生徒会役員共(원래는 '학생회 임원들'이지만 만화가 만화이니만큼 좀더 상스럽게 역하여 '년놈들')의 한 페이지. 맘에 들어서 번역해 봤음.
"여동생은 사춘기" 보고서 그림에 대실망했는데 얼마 전 산 매거진에서 뜻밖에 만난 우지이에 토젠은... 발전했다! 정말 발전했다! 원래 이런 만화는 그림이 귀여워야 진가를 발휘하는데(타케우치 모토키처럼) 캐릭터가 너무 이쁘다! 핡핡
곧죽어도 끝날 거 같지 않던 이 책 드디어 며칠 전에 일독했습니다. Part 2 중반을 넘으니까 이젠 이 책을 읽는 법을 깨우치게 되어서, 보다 빨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책은 2008년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농활 갔을 때도 들고 갔었고요, 신검 받으러 수원 내려갈 적에도 버스 안에서 오며가며 읽었더랬죠.
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제목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혁명은 파는 것"입니다. 뭔가를 사고파는 세상이 싫은 좌파들은 혁명을 하려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잘 팔리는 소재다, 그 말입니다.
파트 1에서는 반소비주의와 연관된 담론들과 뻔한 주장들을 비웃고, 파트 2에는 좀더 심도 있고 정리된 반소비주의 관련 반박들이 이어집니다. 결론에서 잘 마감을 해놨던데, 제가 읽기로는 각각 이렇습니다.
반문화 :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배세력이라든지 혁명을 포섭하는 일 따위는 애초에 없다.
프로이트 체계 : 우리의 대중문화와 대중사회는 거기 나오는 '억압'의 성질이 아니다.
평범에 대한 거부 : 죄수의 딜레마로 해석하면 결국 규칙이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침이다.
소비주의 : 군비 경쟁. 사상 주입이 아니라 개개인의 지위 추구 때문이다. 심지어 혁명까지도.
근본적 혁명 : 정작 그 행동이 전혀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을 붙인다.
개성 추구 : 오히려 획일성이 소비 경쟁을 잠재운다. 예측가능성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쿨하지 않게 만들기 : 쿨한 사람은 있어도 쿨은 없다. 그러니 기업도 그것을 광고하지 못한다.
대량 생산에 대한 혐오 : 그렇게 개성이 필요하면 타인의 수고를 위해 돈을 내라.
제3세계 추구 : 서양도 제3세계 못지않게 합리적이지 않았었고 자본화되지 않았었다.
환경보호 : 그 행동양식에서 제도와 국가의 가능성은 완전히 묵과하고 있지 않나.
저는 고등학교 때 애드버스터誌를 먼저 접한 사람인지라 단연 (소극적인) 반소비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그렇게 거북하지도 않았고 아주 어렵지도 않았지만 또 무조건 공감하거나 이해하거나 찬성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책 자체가 혁명이 팔리는 현실을 인식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쓴 것이기 때문에, 사실 중요할 수도 있는 전체적 서술의 배경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소비주의가 어떤 계기로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조지프와 앤드류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가 오롯이 전부 옳다고 합시다. 근데 막말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동의를 얻은 획일성'안에서 '또 다른 군비경쟁의 축소'를 위해 '죄수의 딜레마'를 고민하며 살아갑니까? 그건 아니란 얘기죠. 대다수 대중들이 아무 비판 없이 주어진 문화를 향유하는 작금의 행태는 과연 마냥 옳기만 하냐는 의심에서 시작된 것이 대중사회 비판일 겁니다. 일련의 반소비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이지요. 일상의 소비행위 안에서는 '쿨 헌팅'도 엄연히 있지만 '개성보다 실속'으로 구매하는 것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개념조차 모르지요. 그러므로 이렇게 급진주의자들을 설득하는 책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반소비주의는 대중사회 담론에서 한동안 유효할 거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저자들은 맹목적이고 실속 없는, 제도적 해결과 우파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달려가기 위해 달려가는 좌파들을 향해 이 책을 썼지, 나이키의 시장 지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규모의 경제가 뭔지 체 게바라가 티셔츠에 들어가는 게 왜 그렇게 나쁜지(혹 나쁘다고 우기는지) 전혀 생각이 없는 문외한 대다수를 향해서는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반소비주의자들의 불만의 대부분이 제도권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그 중 상당수는 오히려 그 불만들이야말로 '창조적 파괴' 즉 자본주의를 굴리는 근본 원동력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혁명은 없지요. 포섭은 더더욱 없고요.
학문적 개론들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특히 철학 담론도 21세기 필수 패키지로 구석구석에 잘 짱박혀 있습니다. 학자만 하더라도 데카르트, 루소, 맑스, 베이컨, 사르트르, 촘스키(?), 칸트, 푸코, 프로이트, 홉스(가장 인용이 많은 사람)까지.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가령 여행의 전면과 후면이라든가, 조립식 주택의 옵션 카탈로그라든가. 다시 한 번 읽어볼 때는 그 소재들을 찾아가면서 봐야겠습니다. 다시 보긴 볼까 이거...;;;
IBM Linux, "Prodigy": Linux The Future Is Open (IBM 리눅스, "거목": 리눅스의 내일은 열려 있다)
2003년작. 맥에 대해 알아보다가 어찌어찌 관련영상 타고 다녀서 보게 됐다. 운영체제를 광고(혹은 유희)하는 영상들은 희멀건 바탕에 캐릭터 배우들을 세우는 일이 잦다. 이것도 잡스나 게이츠의 계략인가? 아무튼 개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광고.
최근 윈도 말고 다른 걸 써보고 싶어진다. 결행을 한다면 매킨토시가 되겠지만, 성격대로 할 거 같으면 리눅스도 괜히 넘보게 된다.
유영철 뉴스 시절과 강호순 뉴스 시절의 딱 중간쯤에 이런 걸 봤었다. 상상력의 힘이라는 제목이 너무 계면쩍은 지식채널e 짝퉁 프로그램... 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강호순이 잡히고 나니까 이게 뉴스에 다시 등장하더라. 거의 까먹고 있었는데 개 떡밥이 그렇게 유명한가보더라.
싸이코패스 테스트 받지 마라.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
적어도 그런 테스트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댁들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다.
싸이코패스 테스트의 핵심은 한결같다. '논리상, 전개상 타당할 수 있으나 심히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이유 혹 추론에 대하여 싸이코패스식 사고로 간주한다.' 문제는 그런 테스트가 싸이코패스 테스트라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을 때다. 누가 이 테스트를 허투루 대하겠는가? 이런 이름의 테스트를 보고 지레 겁먹은 혹은 긴장한 우리의 뇌는, 자연히 그럴싸한 답을 내놓기 위해 별로 그럴 힘도 없으면서 괜히 싸이코패스식 사고를 시도하게 된다. 어린아이 하나가 축구공, 운동화 등을 선물받았는데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왜 그럴까?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 오타쿠라거나 여자아이라거나. 그러나 이 질문이 싸이코패스 검사가 될 경우 답은 '두 발이 없어서'. 테스트 받지 마라. 댁들 기분만 께름칙해진다. 아무 의미나 미덕도 없는 이 따위 논리 추론 게임을 뭣하러 검색까지 해 가며 디비고 앉았는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반응 매커니즘은,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어 놓고 외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도둑이 들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여러분 댁의 현관문이 열렸는지 어쨌는지 신경쓰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다. 기다린 끝에 드디어 ATM 앞에 섰을 때, 당신 등 뒤에 바짝 선 사람은 당신의 비밀번호를 엿보고 있겠는가? 그럴 리 없다. 그냥 급한 김에 재촉해 보는 것일 따름이다. 연신 필살기를 날려대며 치고박고 싸우는 게임에 빠진 소년을 보고 우리는 뭐라고 충고해야 하는가? "적당히 놀고 공부도 해야지"와 "너 자꾸 그런 게임 하면 청소년 폭력사범으로 전락해 버린다" 중 어느 게 더 맞는 말인가?[각주:1] 싸이코패스가 우리 주위에 싹싹하고 건실한 미청년의 얼굴로 숨어 있겠는가? 댁들의 내면 깊은 곳에 어쩔 수 없는 죄악이 불끈불끈 일어나려 하고 있는가? 그런 게 겁나면 테스트를 퍼나르지 말고, 내일부터 첫차 타고 새벽기도회나 다녀라. 현대사회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공갈협박을 많이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고 회로를 '상정할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상황'으로 선회하게 만들어 놨다. 그러니 싸이코패스 테스트를 받아 보았자 소용이 없다. 비사회적 인격 장애인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그 답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작고 별 볼일 없는 평화주의자인 내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제길, 남들처럼 나도 겁이 난다. 공포는 합리적인 것이며 우리의 생존 능력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다. 진짜 위험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수천 년 내내 우리 인류에게 봉사해온 본능이다. 그러나 비합리적 공포는 살인자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 나침반을 던져버린다.[각주:2]"
P.s 일부러 사이코패스라고 쓰지 않고 싸이코패스라고 쓴다. 이 글은 쌍시옷을 넣어서 썼다.
내가 요즘 '슈액히3'를 하는데, RCX들을 끝없이 죽이는 짓에 몰입하고 있는 내 자신이 순간 미래의 범죄자형으로 보이더라. 니기미, 나도 이 모양 이 꼴이다. [본문으로]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p. 141: 마이클 무어, 한겨레신문사, 2004 [본문으로]
<낮술>, <체인질링> 리뷰
낮술은 시종 웃기다. 전문가 리뷰들마다 '바보스러움'이란 키워드가 들어가 있는데, 그 키워드가 아주 중요한 관전포인트가 된다. '생각해 보면 재밌겠지만 정작 해보면 재미있지 않은' 것이 낮술이고 그런 여행이라는 점.
체인질링은 왜 청소년 관람불가로 해서 관객층을 좁히는지 모르겠다. 참 시류를 잘 탄 실화 영화인데, 문득 '실화를 극화했다지만, 남는 게 무엇인가' 싶더라. 왜 그랬을까. 그걸 좀더 생각해 봐야지.
슬픈 일화: 이거는 좀있다 써야지ㅋㅋ
안식일 경제론 - 전세계가 주일날에 정말로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주일에 볼링 치고 스케이트 지치고 음식점에 몰려가는 걸 보며, 이건 아닌데 싶다가도, 그러면 정말로 주일에 교회뿐 아니라 모든 경제가 올스톱하는 것은 가능한가, 싶어서 생각해 봤다(석 달쯤 전부터 생각해뒀던 거 같다). 여기서의 경제활동이란 '다른 사람의 소비 혹 생산을 부추기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기로 하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토요일이 경제활동의 루틴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이고, 인구밀집지역(경기도)의 지역사회가 발전할 것이라는 정도밖에는 생각을 못하겠다. 상상력과 지식이 매우 딸린다. 관련된 책이 있을 테니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같이 생각해줄 사람 있으면 트랙백 좀 쏴 달라.
제도적으로 시행하려면 일요일의 대중교통을 과감하게 축소하고 영업장의 주일 영업에 대한 누진세를 부과하며 금융업계와 정부 부처는 일체의 업무를 보지 않게 한다(그러므로 이자 계산도 일요일은 빼고 센다―이것에 대한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 같다). 병원은 준 공공서비스이고, 경찰과 소방, 국방은 공공서비스니까 할 수 없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만.
fontclub: 3이 일본어, 4가 서울. 부지런히 좀 쓰자.
상상과 상상력, 실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상상은 그저 망상이지만, 세밀하고 조리 있게 짜여진 상상은 오롯이 예언이 된다. 하루히 시리즈에도 비슷한 얘기(결국 모든 개체와 존재는 정보묶음이라는 뭐 그런)가 나왔었던 거 같다. 그게 사실이라면, 혹은 거짓이라면 왜, 어떻게 그러한가? 그리고 상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의미에 관하여. 무의미는 창조와 예술의 기본 미덕이다. 의미는 누군가가 부여할 테니, 창조자들은 최대한의 의도와 최소한의 의미를 추구하면 된다. 뭔 소리야? 좀더 잘 써야겠다.
내 상상의 지경이 처절하게 바닥나 있다. "정말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혹은 "왜 그러한가?"라는 물음들은, 절대 말버릇으로 끝날 무게의 질문이 아니다. 명심하자...
거창하게 나갈 것도 없다. 우리 자신의 재테크, 취업, 한국경제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눈 등 그 어디에서 예수님의 시각이 묻어난 적이 있는가? 언제나 우리에겐 성경은 성경,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 각자도 총체적 복음, 하나님의 주되심을 늘 외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죽어서 구원받는 데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언젠가 돌아갈 고향 시골집의 늙은 부모님’ 같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이 희년 제도를 제대로 시행했더라면 이스라엘은 세상 모든 국가들이 부러워할 이상적인 복지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희년 제도는 이스라엘에서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성경 속에 있는 이름뿐인 제도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P.s 어제 안개와 스모그 낀 서울은 괴기스러웠다. 흐린 날이 아니다. 눈비가 올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법시위, 불법시위 하는데 합법시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떼거리로 모여서 떼거리로 행동하니까 도매금으로 무시당하고 진압당하는 거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위방법 발상의 핵심 두 가지는 "불법인지 합법인지 애매호모하게", 그리고 "개인의 의지가 분명히 보이도록".
이어달리기 1인시위. 불특정 다수가 목표점(본사 사옥 등)을 향해 시위할 때 사용한다. 먼저 온 순서대로 일렬로 서서, 자기 이름과 특정 구호를 차례로 외치고 줄에서 나간다. 참여자가 1만 명 이상이 되면 이어달리기를 겹치지 않고도 하루종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 가도 되고 따로 모여서 뒷풀이 시위를 해도 된다.
전국구 플래시몹.서울로 올라올 수 없는 시위자들이 정부청사(시청 등)를 향해 시위해야 할 때를 위한 방편이다. 한 날 한 시에 전국의 소수정예(10~100명 정도) 시위대들이 정부청사(정 안 되면 사람 많은 곳)로 난입해 법(공무집행방해죄)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을 정도로의 플래시몹(사무실에 다짜고짜 들어와 딱 한 마디만 하고 도망간다든지)을 한다.
벌받기. 모두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거나 손을 들고 서 있는다거나 목표점을 등지고 앉아서 사죄하듯이 숙이고 있는다. 아무 까닭없이 벌을 받는 사람 앞에서 분노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특히 벌받는 사람을 강경진압하는 상황이 보도되면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시위대는 침통하게 침묵을 지키되, 플래카드나 피켓으로 말한다.
들쥐 태우기. 광장에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때 적절하다. 죽은 들쥐를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공수해 오면 시위대는 그걸 나눠 받고 신나에 찍어서 불을 당기고 한곳에 모은다. 냄새와 불길이 가히 해외토픽 수준의 진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들쥐는 마땅히 박멸해야 할 민중의 적이므로 죄는 되지 않는다. 피켓은 비유적인 문구를 사용한다.
계속 해산만 하는 시위. 먼저 프락치 α←1이 나와 구호 한 번 하고 해산 선언을 한다. 그러고서 프락치 α가 내려가면 프락치 α←(α+1)이 나와 개회를 선언하고 구호 한 번 하고 해산 선언을 한다. 이것을 무한히 반복한다. 선두 프락치들은 전부 다른 단체의 일원들로 구성하며, 현장에서 프락치 자원을 받는다. 집회명이나 취지도 전부 즉석에서 지어내는 종합선물세트로 한다. 전경이 "해산하십시오" 경고를 언제 하든지 "해산했습니다" 혹은 "해산하려던 참입니다"라고만 답하면 된다.
웃는 얼굴 시위. 현장에서 즉석으로 시위자의 웃는 얼굴을 촬영해 만든 임시 가면 혹은 시위자들이 직접 만들어 온 웃는 얼굴 가면을 활용한다. 시위대 전원은 시종일관 자기가 웃고 있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험악한 구호를 외치며 시위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전경대를 이 아햏햏한 시위 방법으로 방법 쌔워주자.
철야기도집회(찬양예배, 성찬식). 준비물은 따로 없다. 스스로 신앙고백이 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해당 장소로 나와서 철야로 구국기도를 드리면 된다. 간혹 찬양팀을 동원하여 찬양집회를 여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빵과 포도주스를 좀 준비하면 성찬식도 거룩하게 진행할 수 있다(잘은 모르지만 성찬식이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는 그림이 나와준다면 봐줄 만하겠다). 이거는 이미 용산 철거민들이 하고 있어서 새롭진 않지만.
시위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비가 많이 내려서 강물이 넘쳐 육지를 침범하는 일'을 가리킨다. 냇물은 가만히 흐르지만은 않는다. 때 되면 왈칵 성을 내서 한바탕 위아래를 섞어 뒤집고 지나간다. 시위는 물난리이다. 침범하자.
P.s 아이디어 더 있으면 트랙백 부탁드립니다. 이하는 퍼온 아이디어 파란불 횡단보도 점거.집시법과 도로교통법상 꿀릴 게 없다고 한다. 파란불이 되면 횡단보도 양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위대가 일제히 횡단보도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치고 빨간불 되기 전에 다시 양편으로 찢어진다. 이것을 전경이 보다못해 먼저 도발할 때까지 계속한다. 맞나?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