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교활동을 너무 안 한다 싶어서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골라 "크리스천 비전 커피챗"이라는 모임에 어제 저녁 참석해 보았다. 알고 보니 무슨 멘토링 업체 주관의 세미나와 네트워킹이 느슨하게 결합된 형태의 정기 모임이었다. 커피챗이라더니 커피는 지급되기는커녕 마시는 사람도 별로 없었으며, 크리스천이라는 자부심과 자기애가 넘쳐나던 그 자리에 막상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대로 요약하자면, 그 기독교인 비전 커피챗이라는 행사는, 실은 그저 '교인 비전 챗'인 셈이었다.
행사는 4시부터 5시 반쯤까지 이런저런 자기계발 강좌가 이어졌고 남은 시간은 조별 모임 2회와 저녁 식사로 구성돼 있었는데,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양과 재능이 차고 넘치며 착하고 바르기가 짝이 없고 심지어 자기 꿈과 남을 도우려는 의지까지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비전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는 도움이 더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완성도'가 더 높아 보이는 사람들일수록 그 모임의 고참들이었다. '나는 무슨무슨 가치를 기반으로 교육가적 뭐시기가 되겠다' 운운하는 선언을 명함에 새겨놓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걸 읽고 그런 걸 주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는 한 가지 의문뿐이었다. 그럼 가서 그거 하면 되지, 부러 여기 또 출석을 해야 된담? 글쎄 아무래도 그 출석은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 빼고 모두가, 지난번에 본 사람을 반가워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근황을 묻고 서로만 아는 농담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광경은 일요일 낮에, 수요일이나 화요일 혹은 목요일 저녁에, 다르지만 같은 여러 장소에서 그토록 자주 보았던 광경이다.
지급받은 "워크지"의 질문들은 이런 식이었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당신 인생에 점수를 매기고 BEST/WORST 키워드를 선정해 보세요. 일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뭔지, '의미가 없지만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고 싶은지 등의 질문을 서로 주고받아 보세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 3가지, 받고 싶은 3가지를 적고 나누어 보세요. 심지어 이날의 활동을 위해 주최측이 구성한 조 편성은 노골적으로 직군 중심이었으며, 우연히도 같은 조에 '대학생 선교 동아리'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떤 왈츠를 추어야 하는 무도회인지가 민망하리만치 분명했다. 말은 아니라고들 했지만, 다들 모종의 모범답안을 훈련한 대로 주고받는 것처럼 들렸다. 예컨대 나는 그날 거기 처음 간 사람이었고 내 인생에 내가 매긴 점수는 같은 조 안에서 최저점이었다. 반면 최고참 중 한 명은,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면서도, "40대는 10점 이상일 거고 50대는 그보다 더 높을 거라고 적어 봤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 왈츠를 엉금엉금 따라 추면서 차츰, 그 자리에서는 복음, 구원, 천국이 암시조차도 되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4시부터 5시까지의 이런저런 '강의'들은 내가 놓쳤으니까 논외로 하더라도, 그 이후 3시간 동안 내가 읽고 들은 글과 말 가운데서 크리스천 된다는 것, 기독교인 된다는 것,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에 관한 고찰은 절묘하리만치 회피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번은 왠지 울컥해서 도발적 농담을 해 보았다. 나도 40대쯤이 되면 좋든 싫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게 될 거라고. 그렇지 않냐고. 무릇 크리스천이라면 이 땅에서 열심히 재물 쌓고 벽돌집을 짓고 곡식 쌓을 창고를 지어서 재물을 쌓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다들 '뭔 말인지 모르겠어서 웃는' 웃음만 웃을 뿐, 그게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임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낌새였다. 그 도발이 불발되는 꼴을 보아하니, 여기서는 이 이상 속 있는 진담을 할 필요는 없음을 알았다. 그 다음은 쉬웠다. 일회용 발언과 맞장구를 늘어놓고, 한솥도시락을 받아먹고, 납부했던 보증금 2만 원을 현찰로 돌려받아 1등으로 퇴장했다.
그래 아무려면 예수님이 너네 비전 따위나 되어 주실라고 골고다까지 가서 그 개죽음을 하셨겠니 이 개것들아?
초인적인 의지와 바리새-헬레니즘적 지성을 동력으로 활동했던 바울 사도를 제외하면, 절대 다수의 초기 교회 제자들은 비전이니 소명이니 따위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하나같이, 삶의 한가운데에 불쑥불쑥 되살아오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따라 움직여 살았다. "물고기 잡으러 가" 있다가, 어디 숨어 있다가, 삶을 살고 있다가 문득 상대했던 웬 낯선 사람이, 나중 돼서야 뒤늦게 고찰해 보니 아차 그게 예수님이셨더랬구나, 하는 줄거리는 성경 안팎으로 적지 않게 반복된다. 요컨대, 만유의 주이신 주님께서는, 심지어 그 제자들의 사명에 대해서도 주권을 갖고 행사하시는 주님이셨던 셈이며, 그 "사명"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신적 권위로, 심지어는 그들이 원치 않았던 것일지라도, 강제로 (혹은 "예정대로") 부여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그들의 사명은 종잇장 몇 쪽에 빈칸 몇 개 채워서 "사명 선언문" 따위로 엮어 완성 가능한, 작위적이고 자의적이며 private한 무언가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실은 그저 나사렛 예수의 지인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해내야만 하는 증명/증언, 생존자로서의 부채의식이라는 차원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 오늘날 현대인들의 낯간지러운 '비전' 따위로는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차원으로. 그렇다면 오늘날 이들이 말하는, 목숨을 바칠 가치까지는 없는 바 그 비전이니 소명이니 따위의 실질은 무엇인가? 별거 없고 그저 거룩한 포장을 한겹 둘러서 도덕적 불쾌감을 덜어 놓았을 뿐인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에" 그게 "나왔으면 정말 좋겠"는, 가히 태아적(embryonic)이라 할 만한 자아상.
그러나 바울 사도의 공로 덕에 완전히 바티칸 체제 내 헬라 철학의 한 분파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기독교는 그 이후로 그런 자아상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여 이를 권장하게 되었는데, "소명"이니 "사명"이니 따위의 앞뒤를 뒤집고 목적을 완전히 비틀어 놓은 덕분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전체 서사의 핵심 용건에서 이야기 첫머리의 재미있는 도입부로 고꾸라져 있으며, 그 거룩한 이름은 이런저런 빈칸과 제단 위를 채우는 비콘으로만 기능하고, 실제로는 그 빈칸과 제단이 숭상을 받게 된 것이다. 어제 참석한 모임의 주최측이 홍보하는 강의 중에는 "자본으로 선교하기"라는 것도 있었다. 차포 다 떼면 결국 좋은 곳에 돈 쓰라 뭐 그런 말일 텐데, 그걸 선교라고? "자본으로 복지사회 이룩하기"로 강의 제목만 바꾼다고 했을 때, 과연 이 강의는 스데반처럼 돌을 맞을 선포가 될 것인가 아니면 KBS 아침마당에 의젓이 진출 가능할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비전을 탐하는 오늘날 자칭 크리스천들의 실제 은밀한 속내는 그저 여의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실력을 인정받아 돈을 벌고 싶다, 기왕이면 유명해지고 싶다, 기왕이면 남을 돕는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기왕이면 나의 종교적 정치적 의지와 견해를 관철하여 강요하고 싶다, 이것저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싶다, 그 성공을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열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다가 주님 부르실 때 천국까지 안전하게 직행하고 싶다! 바울과 비잔틴 그리고 어떤 "크리스천"들의 그리스도교는 그런 야심의 종교다. 예수님이 믿고 전하고 제자들이 듣고 전하고 실천하고 그러다가 잘 안 되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실천할 수 있게 되었던 라이프스타일이 그딴 야심과 하늘땅 차이가 있건 말건 아무 상관 없이 그러하며, 만유의 주님이신 주님께서 또한 인간의 꿈과 목표와 의지에 대해서도 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진리에 대해서마저 아랑곳없이 그러하다.
그런 모임을 하루 경험해 보고 나와서 느낀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어떤 모임이 그렇게까지 겉껍데기뿐이 되면 오히려 생각만큼 '기가 빨리지'는 않더라는 발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 지인들하고나 더 사교하려고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저들끼리 모여서 "크리스천 비전이란 뭘까요? 우리 크리스천 비전 이루는 크리스천이 되어 볼까요?" 하는 꾀꼬리 소리나 늘어놓는 자리에는 그런 꾀꼬리들이나 출석하면 좋을 테고, 나는 그냥 이미 있는 내 이웃들에게나 관심 가지러 가야 되겠다고 새삼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었다.
생성형 AI가 폭로해 준 불편한 진실 하나. (특히 한국의 (사업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mediocrity에 굉장히 관대하다. 듣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을 들려주고,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 주고, 잘 모르는 사람의 식견으로 척 보기에 그럴듯한 뭔가를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해 주면, 내용과 수준은 요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컨시어지들과 비서들은 이 비결을 알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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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대규모 회귀예측 수단이고 이것의 응용은 많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유일하게 가장 뜨거운 화두는 인간 노동 대체 가능성 문제다. 가장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지구적 난제 해결 문제다. 초창기 '머신러닝'은 암도 없애고 기후위기도 고치고 할 것처럼 마케팅되었는데,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진" 이후로 이 "희망"은 거짓말처럼 증발하여, 이제 인류는 일제히 신변 비관에 몰두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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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자들의 도태 공포는 크게 두 가지에서 오는 듯하다. 하나는 모델들의 압도적인 스케일("모르는 것이 없음"), 다른 하나는 자기가 비교적 열등하다는 사실("이제 개발 배울 이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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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타협/대응책은 크게 2가지로 보인다. 전자/컴퓨터/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의 본령에 더 천착하기, "코딩"이 그 자체로 사업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며 기꺼이 사업가적 마인드셋의 노동력으로 변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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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명백히 '타협' 전략이고 좀 비웃기는 이유는, 이건 원래부터 이랬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코딩을 위해 코딩하는 코더들은 언제나 도태 대상이었으며, 자본은 노동자가 자본가적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착취케 할 방안을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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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점에서 급변한 변수는 하나다. 자본이 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자본이 스스로를 조금 착취해 보니 대충 되겠더라, 그러니 너희도 해라, 너희는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유의해라, 하는 으름장이 이런저런 신화에 동봉되어 항간에 범람하고 있다. "쇼피파이 사장님이 쇼피파이 개발자들의 비효율적 쿼리를 개선하라고 AI에게 지시해 놓고 자러 갔다더라" 따위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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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하이프"가 유난히 시끄러운 이유는 이 접근성에 있는 듯하다. 메타버스, 빅데이터, 블록체인, 노코드/로우코드 따위 과거 하이프 사례들은 "아는 척"을 하고 싶어 죽으려던 (예비)자본가들이 정작 실제로 그걸 알고 쓰고 행하지는 못해서, 그래서 "알기만 잘 알아서" 속 터져 죽으려고 했던 것들이다. "챗GPT"는 다르다. 말귀를 알아듣고, 그럴듯한 실물이 나온다. 드디어 마침내 그 허영심을 채워줄 '이야기 노예'가 등장한 것이다. 자본 입장에서는, 그간 그토록 하고 싶어 죽을 거 같던 무언가를 하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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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시장 불황, 기존 노동력의 업무 가중 등은 바로 이 "그토록 하고 싶어 죽을 거 같던" 착취행위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은 원래부터도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최대한의 초과이윤을 뽑아내고 싶어했다. 적당한 구실과 실질이 없었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기 대량해고"가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또 하나의 방법이, 심지어 더 좋고 우월하다는 방법이 등장해 주었다. "이 돈을 토큰에 태울 바엔 사람을 뽑지" 싶은 상황에서도 차라리 '토큰을 태우기'를 마지않는 것은, 오직 이런 가치 가중치 연산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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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 (1) 왜 이것이 착취의 문제임을 말하지 않는가? (2) 왜 노동자들은 이 상황을 임노동자로써 응전하지 않는가? (3) 다들 더 가치 있고 큰 문제를 정녕 나몰라라 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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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의 문제. 현재의 AI 하이프는 극소수 독점 자본이 정보를 중앙 집중하고 독점적으로 가공하여 인간 노동력의 "대체제"로 광고되는 무언가를 막대한 규모로 초과 공급하겠다는 수작이다. 이는 사회경제학의 측면에서 자본가들이 임금을 덤핑하려는 시도이며, 환경의 측면에서 물과 전기의 남용이며, 공동체 안보의 측면에서 공적/사적 데이터의 남획 오용이다. 아예 금하지는 못할망정 "작작 좀 해라" 할 여지는 차고 넘치는 바 혐오스러우리만치 노골적인 탐욕인 것이다. 버니 샌더스가 데이터 센터 모라토리움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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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아틀라스'를 둘러싼 그 숱한 논점들 중, 그 로봇의 도입이 일종의 선언이었음을 지적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심히 유감이다. 그 로봇은 사람과 흡사하되 귀도 없고 입도 없고 사람보다 크고 정력적이며 지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재벌 기업이 오랜 세월 몽정 속에서나 보아 왔던 가장 섹시한 노예의 얼굴이다. 현대자동차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얘 같은 노예가 좋지 너네는 싫어! 너네는 더 열등한 노예잖아!" 인간으로서의, 지금까지 현대자동차의 "파트너"로서의 반사적인 당혹감은 여기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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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으로서의 노동자성의 문제. 터놓고 말해서, 노동자들은 시키는 일을 하라고 고용되었지, 고용주처럼 생각하라고 고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AI 하이프는 이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인 양 선전되고 있다 보니,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AI를 활용해야 한다는 식의 으름장이 나오고 있다. 이 부분이 계약 위반 수준의 착취다. 여기저기서 "개발자의 미래상"이랍시고 제시되는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따위는 자본주의 도식에서 어디까지나 생산 수단의 일종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도 하지 않는 한 생산 수단의 소유와 책임은 부르주아에게 있다. AI를 갖고 뭘 어떡하라는 건지 뭘 오케스트레이션해서 어쩌자는 건지 따위는 유산자가 알아내야 할 일이지 무산자의 알 바가 아니다. 군복을 사 입고 입대하는 군인은 없으며, 혁명되지 않은 세계의 무산자의 책임이란 품을 파는 것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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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회사'의 사장은 모든 직원이 하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신규 인력은 경력 불문 항상 재교육되었다. 왜 AI라고 예외여야 하는가? AI를 도깨비방망이로 선망하는 현재/미래 고용주들이야말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더 자세히 답할 책임을 갖는다: 무슨 AI를 (안) 쓸 건가? 어떤 프롬프트가 허용/금지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용간 재해/상해/피해 발생 시 책임 소재와 범위는 어떤가? 인력, 자원, 임금의 부족에 대해 협상할 방안은 무엇인가? 교육과 평가는 어떻게 정당히 이루어질 건가? 그렇다 사실은 대단히 전통적인 생산 전환 계획이다. 19세기 영국의 방직 기계들은 이런 계획 없이 무작정 24시간 돌아가면서 인간이 여기에 24시간 맞추기를 요구했다. 그 따위 개악된 계약의 암시적 추가 착취를 러다이트들이 거부한 것은 차라리 자연의 섭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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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의 문제. "AI로 대체되지 않을 분야" 따위의 소문들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바로 그 분야들이야말로 지금 당장 AI든 뭐든 써서 조금이라도 더 진일보시켜야 할 분야들이다. 돌봄 노동, 청소, 운송, 보건 등등 인류 관심사의 어떤 영역은 몇천 년에 걸쳐 유구하게 구태하다. '이 일들에 대한 멸시는 혹시 모종의 위계를 창출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기되고 있나?' 하는 혐의가 있을 지경인데, AI 시대에 들어 그 혐의는 한층 짙어진다. 자본과 관심의 초점이 조금만 돌아와도 해결하고 남음이 있을 어렵고 오래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여기에는 AI가 전혀 할당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 가히 환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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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빌 게이츠가 깨끗한 화장실 만드는 벤처에 투자하던 시절도 있었고 머스크며 베조스 패거리의 우주여행 놀이에조차도 '미래 식민지 개척' 따위 이런저런 미사여구가 붙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만들어달라 한 적 없는 무언가를 너도나도 똑같이 만들어서 각자 잘난 척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 사회적 기여도 하지 않기' 잔치는 원래도 너무 많이 열렸던 것이 지금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설거지 방청소 병수발은 하기 싫고 책상 앞에 앉아 "딸깍딸깍"만 하고 싶은 것이다. 돈 안 되고 재미도 없지만 누군가 해야만 하는 그 일들은 AI 시대에조차도 기어코 회피만 될 모양이다. 이런 류의 절망을 거두는 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정식 번역이 없진 않다. 새찬송가117장 "만백성 기뻐하여라" 근데 그 정식 번역이 우리말 노래로서는 너무 엉망이라 못 참겠던 마당에, 걍 왠지 오늘 삘이 와서 사역(私譯)을 해 봄.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고 이 정도면 특별히 오역 아니겠다 싶어서 공개. 혹시 사용하시려거든, 돈은 안 받을 테니, 저한테 알려나 주시고, "번역 김어진"을 명시해 주세요.
온누리여 주님의 안식 안에 거하라 이 성탄일에 그리스도 예수 나셨다 사단의 권세에 헤매던 우릴 구하신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흘러가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God rest you merry, gentlemen, let nothing you dismay, remember Christ our Savior was born on Christmas Day to save us all from Satan's pow'r when we were gone astra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하늘의 아버지께서 저 목동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소식을 알리셨다네 베들레헴에 아들 주신 기쁜 소식을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흘러가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From God our heav'nly Father a blessed angel came and unto certain shepherds brought tidings of the same; how that in Bethlehem was born the Son of God by name.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무서워 말라 다독이며 천사 가로되 정한 처녀가 구세주를 지금 낳았네 믿는 자마다 이제 사단 권세 이기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흘러가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Fear not," then said the angel, "Let nothing you affright; this day is born a Savior of a pure virgin bright, to free all those who trust in Him from Satan's pow'r and might."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 한국찬송가는 여기 3절까지만 번역하여 부르고 있음.)
소식을 들은 목동들 기쁨에 사무쳐 두려움 잊고 세찬 바람 마다 않고서 베들레헴의 새 아기를 찾아 왔다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흘러가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The shepherds at those tidings rejoiced much in mind, and left their flocks afeeding, in tempest, storm, and wind, and went to Bethlehem straightway, this blessed Babe to find.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온누리여 이제 주께 찬송을 올리며 자매 형제를 참 사랑에 얼싸안으며 성탄의 복된 소식으로 온전하여라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흘러가네 오 반갑다 평안의 소식 Now to the Lord sing praises all you within this place, and with true love and brotherhood each other now embrace; this holy tide of Christmas all other doth deface.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comfort and joy; O tidings of comfort and joy.
부자여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가 안 내도 되던 소득세에서 널 구했네 노동자와 주린 가족을 잊고 기리세 오 기쁘다 부패한 소식 주 오셨네 땅 위에 탐욕 내려 주시네 God rest ye merry billionaires, let nothing you dismay Forget your workers families going hungry on this day And save yourselves from income tax you'll never need to pay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corruption and greed;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놀잇감 던져주며 우릴 무릎 꿇리고 정치인에게 뒷돈 대던 목자들에게 허울뿐인 민주주의 소식을 전했네 오 기쁘다 부패한 소식 주 오셨네 땅 위에 탐욕 내려 주시네 In Washington and London-town you pay the lobby fees To hold the reins both left and right of sham democracies And keep us entertained so we don’t know we’re on our knees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corruption and greed;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신문 방송이 전한 말 무서워 말아라 너희를 빌어 일자리가 창출되었네 하늘에 지붕 있음에나 감사하여라 오 기쁘다 부패한 소식 주 오셨네 땅 위에 탐욕 내려 주시네 Fear not ye say the media, they only sing your praise The job-creator gave us all that's good and all that pays Be thankful for your stable-beds and don’t ask for a raise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corruption and greed;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평화의 아들 이름을 전쟁에 들먹여 세상 것 쌓는 꿍꿍이에 동원한다네 이 불한당의 백성들은 무슨 죌런가 오 기쁘다 부패한 소식 주 오셨네 땅 위에 탐욕 내려 주시네 The Prince of Peace you call Him while you make war in His name A man with no possessions made a shill for earthly gain Imagine all the people led by men who have no shame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corruption and greed; O tidings of corruption and greed
삶이 개같고 짜치면 짜칠수록 예수님의 사연은 더 뜻밖의 방식으로 덜컥 이해되어 버리곤 한다. "이게? 이거라고?" 싶은 충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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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태국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방콕 공항 근처에 '방나'라 부르는 '트랏'이 있고 그 지역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던 어떤 대형마트가 있어서, 거기에 'ESL 사이니지'를 100대쯤 설치하러 갔다 왔다. ESL이라고 하면 엄밀히는 '전자식 진열대 가격표'를 뜻하지만, 내 회사의 "파트너"(ㅋㅋ^^ㅋㅋ)인 S모 회사가 말하는 "ESL"이란 오로지 '자기네 시스템에 등록된 상품들의 최신 정보를 동적으로 표출 가능한 단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회사의 '사이니지'는 그런 기능 빼고 모든 것을 구현 중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이니지란 '디지털 광고판'이고, 사용자가 업로드한 영상이나 사진만 커다란 화면에 보여주면 끝인 상품인데, 그 커다란 화면들을 상품 진열대에 갖다 붙일 이유는 무엇이며, SaaS 전략으로 가도 돈이 될까 말까인 마당에 특정 회사에 구태여 "락인"될 이유는 또 뭐냔 말이지. 그러나 9월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회사는 그걸 할 수 있다고 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그 '슈퍼갑' 대형마트는 S사의 비딩을 낙찰하자마자 말을 바꿔 "너네 LCD가 ESL도 되는 거지? 안되면 (이미 ESL 기능이 다 돼 있는, 다만 훨씬 더 비싼) 타사제품 쓸거야"하고는 사진 몇 장 던져놓고 나갔고, S사는 그 사진을 우리에게 던지며 "되는 거지?" 하고 화상회의를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 사진들 속의 구현사례는 내가 최근에 작업했던 사이니지 부가기능 '템플릿'과 매우 흡사했으며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가 기술적 책임자가 됐다.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S사 상품을 받아와야 했으며 받아온 상품 정보를 이미지로 '구울' 수 있어야 했으며 그 이미지들의 '레이아웃'을 사용자가 임의 편집할 수 있어야 했고 그 이미지나 상품이 바뀔 때마다 "연결"된 사이니지 단말기들이 알아서 '새로고침'돼야 했으니, 어느 단말기가 어느 상품과 연결되는지를 어떻게 정의할지부터 정의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구현체를 VPN과 방화벽과 로드밸런서 뒤에 있는 폐쇄망 서버에 Docker로 설치해야 했다. 이 단락에 언급된 사양의 거의 대부분을 내가 전부 다 했다. 그때부터 석달간 '외노자' 신분인 날 포함한 개발 실무진 3명이 얼마나 강도 높게 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주말 특근을 했을지는 여러분이 능히 짐작하실 수 있는 바다. 한 명은 S사와의 연동만 맡아서 했고 한 명은 앱에 관한 모든 걸 책임졌고 나는 "프로덕트 템플릿"부터 "레이아웃 디자이너"며 docker 이미지 빌드 등등 나머지를 다 했다. 나날이 우리 3명의 점심 식사 대화는 험악해져 갔다. S사와의 연동을 맡고 있던 S라는 친구는 미얀마 출신 외노자였고, 애초에 사이니지 프로젝트를 그간 쭉 담당해 왔어서, 이 일을 꾹 참고 해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고, 그래서인지 주가 바뀌고 달이 바뀌면서 더 험악한 비속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걸 받아주며 중간에 "통역"을 맡았던 P는 처음 입사할 때는 분명 리액트네이티브 개발자로 왔던 것이 이제는 "앱장님", "디바이스 가이"가 돼 있었다. 그것만도 짜증스러운데 자기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던 S 때문에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나는 나대로 이 회사에 처음 올 때 분명 다른 기존 상품 담당자로 들어왔었고, 그래서 사이니지 프로젝트는 곁에서 도와 주는 정도였는데, 그 도움 중 하나였던 템플릿이 갑자기 너무너무 중요한 기능이 되어 버려, 정작 그 기존 상품에 정성을 못 쓰는 것이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표라는 새끼는 되도 않는 SQL 전수조사며 "상대경로 변환" 따위로 놀고 자빠졌었고 테크리드라는 새끼는 jira 일감에 ======= ←이런 줄을 긋는 일이며 테이블 varchar 길이 통일하기 따위에 넋을 빼고 있었지. 그 얘기는 그냥 하지 말자.) 아무튼 그래서 10월 29일쯤에 S사 대상 중간점검 데모를 "무사히"(ㅋㅋ^^ㅋㅋ) 마치고 11월 24일 월요일에 출국을 8시간 남겨놓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거 안 되네요" "저거 빠졌네요" "미안한데 간단한 거 하나만 합시다;;" 따위 꾸역꾸역 울부짖는 에미 없는 소리에 장단 맞춰 드리며 준비 아닌 준비를 갖춰 정녕코 태국으로 갔다. 첫날은 막혀 있는 네트워크를 놓고 하루종일 "왜 뭐가 안 되지? 네트워크가 막혀 있나?" 하다가 네트워크 막혔음을 확인하고 퇴근한 덕에 차라리 제일 한가했다. 네트워크가 뚫린 둘째날부터는, 대표라는 새끼와 테크리드라는 새끼가 갖고 놀 "DB툴" 백도어부터 깔아서 (이게 내 출장 기간 동안 가장 칭찬받은 일이었다. 다른 일들은 '당연히 돼야 할 것이 된 것뿐'이었고 아직까지 정식 평가받은 바 없다ㅋㅋ^^ㅋㅋ) 던져준 다음에, '현장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말 이건 꼭 만들어야 하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앉은자리에서 뚜닥뚜닥 만들었다. (지금 그때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스페이스바가 자꾸 두 번씩 눌린다.) 일은 정말 무자비하게 많았다. 알고 보니 가격의 '소수점' 부분만 작게 표현할 수 있었어야 했고, 할인 가격의 경우 취소선을 그을 수 있게 해줘야 했으며, 템플릿의 아이템 사이에 1px 굵기의 구분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절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ㅋㅋ^^ㅋㅋ 식사 시간 간식 시간이 찾아올 때마다 대표라는 새끼와 테크리드라는 새끼는 짐짓 초조해하며 나와 P (S는 10월경에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사표 이메일을 던지고 나갔다) 2명의 밥을 먹일 문제를 걱정해 주는 체했지만, 막상 그 밥과 음료는 점점 그 질과 횟수가 줄어 갔다. 당연히 그랬겠지 갈수록 지들이 초조해 뒈질 거 같았을 테니까. 애초에 지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 docker build를 돌리길 해 앱 소스를 까보길 해. 유일한 실무자가 새벽 2시고 3시고 불 다 꺼진 마트 2층 한구석 푸드코트에서 "클래식 PHP"와 jQuery로 차력쇼 벌일 동안 휴대폰이나 꼬나보다가 바깥 구경 돌아다니는 따위가 최선이었으니 (씹쌔끼들 그렇게 방관만 할 거면 숙소 가서 잠이나 처 잘 것이지) 밥이 넘어갈 리가 없고 음료 사 마실 정신이 아니었을 테며 갑자기 (몇만 바트를 들고 왔을 거면서) 모든 게 존나 비싸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ㅋㅋ^^ㅋㅋ 아무튼 그래서 넷째 날 금요일 아침이 밝았고 의외로 내가 일찍 온 편이었으며 잠시 나 혼자 그 마트 한구석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그 주변을 가만히 둘러볼 짬이 났다. 여러분은 금요일 아침의 마트를 보신 적이 있는가? 세상 그렇게 안락하고 별일 없는 세계가 얼마나 더 있을는지. 식당과 카운터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손님을 (안) 기다리고 있었고, 쇼핑 나온 고객들은 하나같이 그 지역 최고 한가한 사람들뿐이었으며, 5만 종이 넘는(다는) 풍성한 상품들, 푸짐한 음식들, 푸근한 조명, 은은한 캐롤 배경음악, 시원한 에어컨 바람, 무진장한 공짜 전기 등등에, 맡은 일 자체도 (내일 출국인 마당에 지금까지도 바쁘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라서) 그렇게까지 초급할 것 없이 전반적 안정화를 추구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문득 예수전도단에서 훈련받은 감각이 상기되었다. 아, 지금이다, 지금 이곳을 위해 중보를 해야 한다. 그러고서 눈뜬 기도로 적당히 그 지역과 사람들을 축복하는 기도나 하려고 했는데, 나온 기도 첫마디는,
주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토록 안락한 세계에서 이토록 복에 겹게 일하고 있고, 주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 그때의 그곳과는 같지 아니하나이다.
였다.
너무너무 놀라서 그 기도를 그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 금요일 기어코 어떻게든 뭔가를 일단락지어놓은 뒤부터 토요일 하루를 자유 여행 보내고 (주토피아2를 영어 음성 태국어 자막으로 팝콘 없이 봤다. 대충 이해했고 적당히 좋았다) 돌아온 지금까지도, 사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다. 왜. 왜 주님께서는 그때 나를 그 무화과나무 앞에 초대하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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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은 이 사건을 어리둥절해한다. 마태는 예의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단언을 하지 못하고, 마가는 들은 바를 시간 순으로 쓰는 것이 최선이라는 양 맥락 모르겠는 전언을 기계적으로 타전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제성구로 하는 대다수 설교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갸우뚱해한다. '무화과의 철이 아님이라' 하는 언급에서 간신히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운운을 뽑아내는 것이 주류 신학의 최선인 듯싶다. 나도, 이 사건이 여기 삽입됐어야 하는 가장 객관적인 해석으로는 같은 관점을 꼽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시분초 단위로 다급히 돌아가고 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따라올 수 없을 거면, 철 안 든 무화과라도 백번 할 말 없지 뭐.
근데, 뭐랄까. 일이 힘들고, 갈 길이 멀고, 할 일과 전할 말이 너무 많고, 하루하루가 숨이 차게 바빠 죽겠는데, 뭔가 먹을 것이 있어 보이는 풍성하고 그럴싸해 보이는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제로 도움이나 위로가 되는 무언가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면, "에라이 나가 죽어라!" 소리 정도는, 하실 만도 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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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저녁에 숙소 들어가 씻고 자려니 P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제가 치맥 시키면 같이 드실래요?" 사실 각자 밥 먹고 자자는 분위기였어서 혼자 편의점 내려가 이것저것 주워먹은 터였지만, 치킨 정도는 들어갈 자리가 있었고, 애초에 그런 초대는 나 같은 극I에게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와 너무좋네요" 즉답하고 1층 호텔 라운지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맥주 한 캔을 비운 P는 문득 내게 말했다. 저 퇴사하는 거, 이번 출장 봐봐야 될 거 같아요. 말인즉슨, (사이니지라는 신사업이 개척되던 그의 입사 직후 시기 이래) 특히 지난 석 달 동안 그가 내내 했던 생각이, "이거 해서 뭐가 되나?"였다는 것이다. 맨날 이거 돼야 한다 저거 돼야 한다 말이 많고 그래서 늘 억지를 써서 겉으로 그럴싸한 것이 되게 해 온 것이 자기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의 역사인데, 그래서 '이게 다 뭐지? 진짜 100대를 설치하긴 하나? 서버가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확 터져버려라 그래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데' 하고 벼르면서 지난 몇 달을 참았다는 것이다. 근데 막상 와서 보니.. 뭐가 되는 거 같고 자기가 한 일에 결실이랄지 의미가 있는 거 같아서, 그래서 퇴사할 결심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뭐 겉으로 보면 짜장 그렇다. 대체로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냉동식품 진열한 냉동고 위에 장치 3대 이어 붙여서 "비디오월(서로 다른 영상 n개를 m개의 장비에서 타이밍 맞게 루프하는 구현을 말한다ㅋㅋ^^ㅋㅋ)"로 냉동식품 광고 영상 보여주고 있고, 그 옆에는 무슨 상품이 원래 가격 얼마였는데 취소선 긋고 지금은 얼마다 라고 표시를 실제로 해주고 있고, 그런 식의 "아일랜드"(어떤 매대는 벽도 통로도 없기 때문에 '섬'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9개를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그걸 했으니까 금요일 저녁에 퇴근해서 삼겹살 먹으러 갔던 것이다. 대표라는 새끼는 봉투도 없이 2천 바트를 건네며 다음날 개인자유여행에 맘껏 쓰라고 하셨다. ^^ㅋㅋ) 솔직한 말로 나도 금요일쯤에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만 힘들었을 뿐이고 앞으로는 나아질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그 견물생심은 다시 쏙 들어가고 입장은 다시 확고해졌다. 이건 잠깐의 착시고, 그 나무는 여전히 무화과를 맺지 못할 것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소프트웨어 회사는 상품을 단 한 번만 개발한다. "유지보수"는 돈 받은 곳에 한해서 마지못해 진행하고, 그나마도 (실무자를 딱 한 명만 뽑아서 noonchee가 있는지 석달간 검증하고는 전부 떠넘기고 외면하는 패턴으로) 무책임하게 하며, "연구" 따위는 언감 생심인 곳이다. (아니 씨발 기존 제품들로 웹소켓을 n년간 겪어 봤으면 웹소켓에 상태가 존재한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 되는데 socketio 서버를 스테이트리스 서버리스인 AWS apprunner에다가 배포해 놓고 당연히 안 되니까 당연하게 폴링을 적용해놓고 그걸 씨발 해결이랍시고 오리발 내밀어 놨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래놓고 지가 socketio 할줄 안다고 거드름이 쩔겠지? 그 잘난 30년이 다 이런 식이었겠지?) 하지만 그 단 한 번에서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고 풍성하고 그럴싸하게 구현되는 탓에 그는 그가 모든 것을 해낸 줄 알고, 그걸 감히 팔아도 되는 줄 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내 회사 제품을 쓰는 모든 분들께 어찌 죄송한지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맡은 상품도 S가 맡았던 상품도 영업 멘트 약속만 무성할 뿐 실제로는 그 약속을 ("poorly"라는 표현이 딱맞게) 간신히 한심히 겨우겨우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이니지는 그 3번째 상품이다. 앞전 두 상품에서 일어났던 모든 폐해가 명백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 '태국건'의 '테크리드'를 맡은 그는 이전 상품에 대해서도 '기획/QA'를 했었다. 남이 뭐라건 팩트가 뭐라건 다 모르겠고 결국 자기의 언질이 무조건 항상 옳고 바르고 좋아야만 하는, 자기가 오해했거나 틀렸거나 하는 역사는 있어본 적이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데, 그 예리하고 고매하고 아는것 많은 능력 가지고 프로젝트에서 잡아내는 디테일의 6할이 실무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생트집이다. 그치만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 노하우로 25년간 그렇게 성공적으로 무수한 프로젝트를 훌륭히 끝내 오신 노오련한 프리랜서님이신걸. ㅋㅋ^^ㅋㅋ 그런 사람 밑에서는 자연히, 뻔한 기능은 더 뻔하게 구현되고, 낯설고 도전적이고 누군가의 독박을 필연으로 하는 기능은 더더욱 관조, 방치, 이미모두가다알고있는것또괜히말해보는아무짝에도쓸모없고성가시기만한참견 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와 이거구나! 그동안 기존 제품들이 이건 왜 이따위고 저건 왜 저딴 식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렇게 돼온 거였구나! 정말 대단한 25년 경력자야!"를 석달간 골수에 사무치게 납득하며 아드득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기를 출국 10시간 전까지 그랬고, 재입국 48시간 전까지 그랬다. 대표라는 새끼는 그 D-DAY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공연히 더 큰 공수표를 발행했다. 이 대형마트가 태국에 몇백 개 지점이 있고! 지금은 100대지만 1000대, 10000대 할 수 있고! 지금 PO가 하나 더 들어오려고 하고 있고! S사에서 우리를 되게 좋게 보고 있고! (당연하다. S사가 '일단 만들긴 만들었는데 뭔가 애매하게 쓸모가 없네' 하고 있던 제품군의 쓸모를 겨우 만들어 준 것이 이번 프로젝트였다.) 무슨 이사도 연락을 주고 어디 지부에서도 얘기가 오고 있고 두바이에서 고객이 호주에서 연락이 어쩌고 저쩌고. 당연히 그 약속들은 하나도 약속이 아니었다. 사업의 근본에 아무 조짐이 없었고, 리더십 역시 아무 변화 없이 제 본색대로 신났을 뿐인데, 숫자가 좀 큰 게 뭐 어떻고 나라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되면 어떻단 말인가? 나중에 유지보수 할 실무자들이 사과할 고객 사과할 나라만 더 많아질 뿐이겠지. 그 유지보수 실무자가 나일지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뭐 나? 아니 나는 못 해요. 와우 씨발. 안 해. 돈을 3배를 줘도 난 싫고 사업규모가 9배가 된대도 거절이요. 많이들 하세요 난 갈라니까.
기둥과 뿌리가 막상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데, 그런 나무가 가지를 하나 더 치면 무엇하고 잎을 하나 더 열면 뭐냐 말이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걍 지금 콱 망해 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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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고사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효과만이 있었던 몇 안 되는 표징이다. 오병이어도 숱한 치유 사역도 전부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 효용과 이득이 있었으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기적 중 '딱히 누군가에게 득이 된 건 없고 그냥 불가해하기만 한' 일들도 분명히 있었다. 물 위를 걸으셨다든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셨다든가.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 고사 사건도 그런 축에 든다. 워낙 이상하고 뜬금없는지라 모든 복음서가 일반적으로 공통 기술하지 못할 정도다. 누가의 예수님은 너무나도 인간이고 요한의 예수님은 너무나도 "말씀"이시기 때문에 둘은 이 사건을 언급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님을 진술한 복음서들만이 이 사건을 취급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극히 드물게 예수님이 뭔가를 '죽이신', '파괴하신' 사건에 속한다. 달리 또 예수님이 망가뜨리신 게 뭐가 있었지? 돼지 떼 몇백 마리, 성전 뜰의 돈 바꾸는 장터 (요즘으로 치면 큰 교회 문간에 있다는 은행별 ATM 기기들?) 정도였지 않나? 예수님은 항상 누군가를 살리고, 건지고, 고치고, 먹이고, 마시우고, 이끌고, 모범을 보이시고, 하여간 내내 건설적인 일을 해나가신 분이었고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으시"는 분 아니었던가? 그런 분이 어떤 생명을 의지적으로 파괴하신 사건이 있었다고? 그게 이 무화과나무 사건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사건은 그렇게까지 일화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고, 조건적으로나마 납득 가능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그 정도의 중요도는 있는 사건이다.
예수님이 손봐주셨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돼지떼는 거라사 광인의 '군대' 즉 많은 귀신들이었다. 성전에서 야단을 놓으셨던 대상은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되 열매가 없는 나무였다. 공통점은 그것들이 악하다는 것이었다. 귀신은 당연히 악하다. 성전에서의 상인들은 악한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원하셨던 바 추구해 마땅할 도덕/이상/이념("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파편화, 제도화, 영리화("강도들의 굴혈")하여 실질 없는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무화과나무도 악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과 역사에 아랑곳 없이, 자기의 때와 자기의 시간에만 혼자 저 잘나서 부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눅12:16-21, RNKSV)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눅6:24-25, RNKSV)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욕하고 경계시키시는 것이 바로 이런 부류다. 때도 분간치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도 관심 가지지 않고, 오직 자기의 소출, 자기의 재산, 자기의 가지와 잎사귀 무성해지는 일에만 오만 열심인 모든 자 모든 것들. 이런 부류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오늘밤에 죽여버리겠다' 같은 비유나 드시고 "화있을찐저! 화있을찐저!" 저주도 서슴지 않으셨던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이 몇 년에 걸쳐서 준비했던 프로젝트 — 죽음과 부활 — 가 드디어 당일이 닥쳐서 현장 실무를 진행 중인데,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눈앞에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과실나무가 있을 것 같으면, 그 과실나무가 그 프로젝트 — 100% 하나님 나라 사역인 — 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시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예수님이야 이렇게 힘들든 말든, 자기 혼자 자기 계절이나 만끽하면서 혼자 싱싱하고 혼자 신나 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으셨을 거 아닌가?
연관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비슷한 처지 비슷한 광경을 겪어 본 나로서는 그렇게 독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방콕 한구석의 일주일간 내 눈앞의 세계는 나만 빼고 다들 너무나 안온하고 별일 없이 태평했다. 나는 지금 당장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해내야만 하는데, 안 그러면 (적어도 나의) 세상이 전부 와장창 무너질 거라고들 야단인데, 막상 그렇게 내게 야단을 놓는 이들은 하나도 야단이 아니었다. 내 앞의 대표며 테크리더는 "여기 1층에 마사지샵 있더라 내일은 교대로 마사지 받으러 갑시다?" 따위 개소리나 씨부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이 빌어먹을 슈퍼갑 대형마트조차도 나의 이 임무, 이 고생, 이 절박함을 알 바가 아니었다. (사실 마트 측 사람과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다. 너무 이상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 임무가 망했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그냥 별일 아니었을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애초에 이 마트의 '리뉴얼' 자체가 핵심 큰일이었고 내 회사의 "LCD"는 그 리뉴얼의 정말 작은 일부분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호들갑 떨며 공연히 의미 부여한 것이 과례였겠다 싶을 정도로.
예수님도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심지어, 이게 나만 잘 하면 그만이냐 하면 그게 또 아니라는 점조차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계속해서 "미안한데 이거까지는 합시다 고객은 뭐다? 무조건 옳다!"(염병 좆을 까고 자빠졌네 그건 소금 치고 쿠폰 뿌려서 해결되는 장사에나 쓰는 말이고요 이 씨발아) 소리에 예 예 하고 따르며 막판까지 스스로를 갈아넣던 그 때, 내가 힘들었던 건 일 자체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애를 써서 나아지는 게 뭐지? 이게 그렇게 도움이 되나? 이러면 정말 세상이 더 좋아지긴 하나? 아무리 봐도 그냥 마트 상품 가격 몇 개 보여주면서 옆에 광고 띄우는 게 단데? 이깟 것 아무리 잘 하고 예쁘게 해봐야 이 대형마트 장사에나 도움 되고 이 S사 단말기 세일즈에나 도움 되고 결국 일회용품 장치, 쓰레기 데이터 양산하며 대자본들 배나 불려 주고 뼈다귀 살점 좀 받아먹는 겨우 그딴 짓거리 아닌가? 이게 정말 예수님께서 기껏 구해 주신 백년짜리 목숨의 지적 능력의 최대치를 투여해서 할 가치가 있는 일이 맞나? 뭐 이런 수준으로까지 확대된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기도의 첫마디는 그런 차원에서 정직하려고 한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2천 년 전 예수님 사역하시던 세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이 좋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풍요, 호화, 여유, 최첨단 따위뿐이었고 순간 나의 이 고생은 오롯이 나의 억하심정 자격지심일 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이 좀 힘들다고 그걸 불평하면 쓰나? 하는 생각을 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찰나조차도 허락지 않으시고 바로 보여주신 것이 그 무화과나무였다.
아니야. 불평할 수 있어. 나도 그 무화과나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어. 바쁘고 힘들어 죽겠는데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던 그 나무. 날 도와줬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도 도와주지 않았던, 자기 변명만 크고 자기 혼자만 풍성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세상으로 회복시켜 나가는 과정에 아무 역할도 의미도 없었던 그 나무. 나도 솔직히 그때는 그냥 좀 울컥한 것도 있었어. 지금 네가 느끼는, 저 끝없이 늘어선 매대며 한쪽에 너희가 다소곳하게 설치 중인 그 장치들과 그 아래 진열된 "상품"들이며 그 주변을 서성이는 너의 "상사"들을 보며 느끼는 그 울컥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가 죽으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나무는 죽고, 제자들은 '진짜 죽었네요' 그러는데, 사실 그때는 뭐라 둘러댈 말이 없어서 둘러대느라고 말이 길어졌어. 솔직히 '일이 너무 개같고 상황이 너무 짜쳐서 홧김에 죽였다' 그럴 순 없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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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로 이 글이 계획에 없이 너무 길어졌다. 어찌 보면 그냥 지난 한 달, 아니 지난 석 달, 아니 최근 반 년, 아니 지난 1년하고도 3개월 정도가 그냥 개같고 짜쳤다 한 마디면 됐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주절주절 뭔가를 적어놓은 것은, 그런 더럽고 치사하고 힘든 세월의 정점의 한복판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저의 세계는 이렇게나 안락하고, 주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 주님이시니이다. 이런 과하게 에피파니적인 순간들이 있는 탓에 그리스도의 도를 버리지 못하겠는 면이 하나 있는가 하면, 이야말로 이 지난 세월을 가장 바르고 짧게 요약하는 관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한 측면이다.
어쩌면 이 자본주의 체제가 통째로 그 무화과나무인지도 모르겠다. 소문은 무성하고, 어떤 성취는 그 규모가 무시무시하며, 그래서 겉으로는 무언가 실질을 기대할 만해 보이지만, 정작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을 살리는 열매는 아무것도 없고 지금은 철이 아니라는 식의 뻔뻔한 변명만 튼튼한 피조물. 그리하여, 아낌없이 찍어서 불구덩이에 던져도 하루아침에 말라 비틀어 죽어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대체 그게 다 뭐냐 싶은 풍요. 자본주의 사회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지금까지 다닌 이 회사 하나만큼은 확실히 그런 피조물이었다. 그 토요일 자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Grab 콜택시 안에서 왼편에 스쳐 지나가는 그 대형마트 현장을 바라보며, 퇴사를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은, 그래서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의 교훈은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시장하셔서 잠시 들러 보셨을 제 생명 살리는 데 소용 있는 뭔가가 아무것도 없을 경우, 그게 무엇이/누구가 되었든, 그 최후는 명백히 그 무화과나무의 전철 그대로 즉각적이고 최종적인 고사일 것이다. 그 마트는 어떻게 될까. 이 회사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고, 이 사회는, 이 체제는,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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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siyon님 혹시 이 글 보고 계십니까? 지금이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나는 2025년 한 해 당신과 같이 일하고 싶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나만 그랬을 거 같나요? "나는 그게 궁금해." 아무튼 알아서 고독사하시기 바라고, 내 인생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십시오.
방금 다시 찾아봤는데, 이 친위쿠데타 잡범을 대통령 만들어줬던 사람들이 1600만명이 넘는다. 정확히는… 천육백삼십구만 사천팔백 열다섯 명이다. 백만 명씩 모듬을 잡아도 이런 그룹이 전국에 열여섯이나 된다.
이게 대체 다들 누구일까. 지금쯤 현시국 앞에 무슨 생각을 할까. 아니 과연 그건 정말 "생각"일까? 혹시 그들은 지금도 몽정 중인 것은 아닐까?
혹시 그들은 그때도 지금도, 울상 된 이재명이 엄청나게 큰 어깨를 가진 윤석열에게 영원히 두들겨맞는(이 그림은 실제로 존재한다 "짤림 방지"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쓰인다), 사탄마귀 이재명의 추락과 "애국보수"의 천년왕국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대안서사로서의 계시록을 눈앞에서 생생히 보는 꿈을 꾸는 중인가? 혹시 그건 모종의 분출 실패한 육욕이 스스로 만드는 포르노인가? 그래서 그 꿈을 꾸는 이들마다 이토록 잠꼬대가 심하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흥분해서, 제정신이라면 안 할 언동을 골라서 하는 것인가?
메이지와 일제가 태어난 곳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 임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 학당은 문자 그대로 두메산골 오막살이다. 그런데 그 요사(妖師)는 거기에 아이들을 몇 명 모아놓고 지나치게 야한 꿈을 지나치게 강력하게 계속해서 꾸어댔다. 대륙! 제국! 천황! 그 꿈이 어찌나 선정적이고 음란했던지, 원자폭탄 두 번이 있고서야 그들은 겨우 대동아공영권의 잠꼬대와 카미카제의 몽정에서 깼다.
야한 꿈이 위험한 것은 몽정을 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다들 경험이 있으실 터이다. 어 이게 뭐지 뭔가 형체도 분명찮은 것이 너무 기괴하고 혼란스러운데 그 와중에 견딜 수 없이 꼴린다. 일어나서 보면 알지 못하는 배설물로 침상은 더러워져 있고 배설에 의한 쾌감은 여전히 잔잔하다. 제대로 사춘기를 끝낸 성인은 여기서 불쾌해하며 이불을 치운다. 오직 미성숙한, 혹은 포르노에 절여진 이들만이, 그 경험을 좋았다고 여긴다.
요컨대, 지난 역사 그리고 각자의 성장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미성숙한 인격(들)이 평소 제대로 배출해놓지 않은 음탕한 정욕을 꽁꽁 숨기고만 살고 있다가, 덜컥 야한 꿈이라도 한 번 잘못 꾸어 버리면, 그때는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예상치도 대비치도 않았던 개인적 낭패를 당하는 건 물론이요, 그 규모가 조금이라도 크거나 그 파급이 조금이라도 실제적이었다가는, 고스란히 아시아를 파괴하는 파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개인과 집단의 차이가 있다면, 개인은 몽정을 일부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만, 집단은 서로의 음란한 꿈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점일 테다.
문재인과 이재명이 구속되고 노무현이 추락하는 꿈을 은밀히 혹은 공연히 거듭 품고 있는 이들을 생각한다. 그들 중 천육백만의 유권자로 진입한, 전광훈의 바짓가랑이 밑에 모인, 성조기와 태극기와 육각성기를 빳빳이 세우고 흔드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진입하는 데까지 이른 그들의 그 음란한 꿈을 생각한다.
모든 꿈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꿈은 첫째 깰 수 없는 꿈이요 둘째 잠꼬대와 몽정과 몽유병을 일으키는 꿈이요 셋째 자꾸만 현실을 그만두고 그저 그 꿈이나 더 꾸고 싶어지게 되는 꿈이다. 파시즘이니, 대안우파니, 후기자본주의의 하부구조적 병폐가 정치사회 상부구조에 전가되는 경향이니 복잡한 말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테지만, 전반적으로, 그저 음란한 꿈을 꾸며 집단 몽정 중인 이들이 있을 뿐인 것 아닌가 생각한다. 조금만 제정신으로 보면 분명한 형체 없이 흉측하기만 한, 그러나 꼴린 기분에 취해서 보면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원초적으로 야하고 흥분되게 뵈는, 확실하게 발기시켜 주고 사정시켜 주는, 그래서 더 꾸고 싶어지는, 그 꿈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 점점 개의치 않게 되는, 오히려 그 꿈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에 더 취하게 되는, 그 은밀하게 더러운 꿈을.
헌법재판소의 내란수괴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이제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아직도 꿈을 못 깬 그들은 누구고 어디 사는가? 그들이 꾸는 꿈의 구체적인 효과와 해몽은 무엇인가? 그 꿈으로만 발산되고 있는, 사실 그러지 말았어야 할 그 억압, 그 욕정, 그 악은 무엇인가? 이것을 일깨울 원자폭탄은 무엇이고 몇 개인가?
당신은 휴대폰으로 무슨 갤러리 무슨 유튜브를 온종일 돌아다니며 백주대낮에 몽정하는 이들과 앞으로도 같은 나라를 쓸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