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은 다음 팀블로그 게시물에 대한 첨언 내지 주제 넘은 오지랖이다.
[아무키 대잔치-트럼프①] 정치는 도덕이 아니다. 선악도 아니다. (이찬우의 엔터 더 보이드 @ 팀 블로그 아무키)
1.
물어보니, 이 글의 필자는 사람들이 안희정을 지나치게 싫어하는 상황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트럼프(의 지지자)를 극렬하게 싫어하고 꺼리는 장면 역시 낯설다고 했다. 그래서 쓴 글이라는 취지다.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그러면 차라리 제목을 '안희정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같은 걸로 저돌적으로 뽑고 전개에서 '미국 같은 극단적 사회로 나가고 싶은 거냐, 토론 좀 하자' 하는 쪽으로 가면 어떠니" 했는데, 말만 알겠다 하고 그만이었다.
그리고 ppss에 이 글이 팔리자마자 가차 없이 달려온 베댓 두 개가 이런 류의 논지의 구멍을 완벽하게 가리켜 주어서 달리 더 붙일 말이 없다. "전제가 틀렸습니다. 우린 지금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을 하고 있는 거에요." "누가 보면 우리가 배제해서 일베 생긴 줄 알겠네."
2.
전제 얘기가 나온 김에 몇 개 전제를 정돈하고 지나가자. 한국의 진보-보수는 형식적으로 지나치게 경도되고 내용적으로 비표준적인 것이 사실이다. 냉철하게 분석하면 '자유주의 정당'이 되는 민주당과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언론' 정도로 분류 가능한 한겨레가 각각 "대중 진보정당"과 "빨갱이 신문"으로 불리고 있고, 사실상 민족주의적 세미파시즘에 가까운 것이 "애국보수"로 참칭되고 있으며, 중간적 진보라 부를 만한 플레이어는 별로 없고, 있느니 저 왼쪽 내지 아래쪽(어딘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사용하는 비유)으로 가고 있는 극소수 좌파가 있다. 자세한 건 김규항 선생께 여쭤보자.
아무튼, 그런가 하면, 누구의 워딩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흥미롭게도 적절하게, '상식'과 '비상식'의 이념 대립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것은 현실정치의 층위가 아니라 정치학, 정치철학의 차원일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단히 영향을 끼치는 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저런 말(생각)을 할 수가 있나", "사람이 저러고도 부끄럽지가 않을까", "자기 친족이 당해도 저럴까"로 대표되는 상식의 진영이 있고,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파렴치의 진영이 있어 그들을 상식 진영에서는 몰상식, 비상식이라 부른다.
여기서 이 글의 진짜 핵심 문제 그리고 원본글에 대한 나의 오지랖의 핵심 논제를 꺼내 본다. 자기를 상식의 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있는데, 자기를 비상식의 편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3.
힐러리 진영이라고 쉽게 부르자면, 그들이 트럼프 진영을 대차게 까고 조롱하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상식의 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람이 이걸 모르려고? 아니 어떻게 "자박꼼"(내게 전권이 있다면 그의 막말 'grab by one's pussy'는 이렇게 번역시킬 것이다)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있지? 국경에 장벽이라니 저 사람 미쳤어?
그런데 그게 정말 그야말로 몰상식이었다면, 그걸 듣는 이들, 그걸 말하는 이들, 그걸 말하는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사람으로써 과연 얼굴을 들고 눈을 뜨고 그걸 기억이나 하려고 했을까? 정말 몰상식한 일은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깊은 밤 지하철이나 버스 좌석에 앉은 채로 구토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듯이. 하지만 트럼프는 주목되었고 논의되었으며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환영을 받았다. 이 현상의 성립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혹시 없는가?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간단하다. 트럼프가 누군가에게는 몹시도 상식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진보든 보수든 파시즘이든 뭐든 그건 정말 아무래도 좋고, 상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리버럴에게 공격받아서 더욱더 트럼프의 세계로 몰두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상식을 몰상식으로 공격받다 못해 비빌 언덕을 찾다 보니, 자기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강력한 무엇을 찾은 것뿐이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구호 "다시 위대한 미국을"이란 바로 단 하나 이 심정을 성문화한 것이다.
윗글에서 인용해 온 뉴욕타임즈조차도 이 층위까지는 다루지 않았지만(적절한 처사였다, 이런 뇌피셜 잡소리보다는 물증이 있으니), 나는 이 차원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뭐 트럼프나 힐러리를 공약 하나 발언 하나 논란 하나 일일이 팩트 체크해 가면서 지지하고 반대할 턱이 있나? 하물며 실질 문맹률 얘기가 나오는 이 나라에서는 더군다나.
그래서, 나는 윗글이 그런 차원을 좀더 말해주기를 바랬다. 이건 좌우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상식 클러스터(다발)의 조우(encounter)고 충돌이라는 점을 말이다. 어떤 상식 다발은 주목되고 논의되고 발언권을 얻을 기회를 못 얻었고(원글에서는 그걸 "배제"라고 불렀다), 그러니 일베도 탄생하고 뭐도 탄생하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한국에서 엄청나게 모호하고 틀리게 사용되고 있는 '진보', '보수'의 워딩에 넣어 버리니, 페이스북 댓글 두 개와 맞다이를 뜨는 초라한 행색이 됐다.
4.
자 그러면 상식 다발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여기서부터는 내 패를 꺼내야겠지. 그러면 지금 유효하게 작동하는 정치철학 및 사회이념 대립각은 구체적으로 무엇 대 무엇으로 갈라서고 있는가? 제목에 쓴 이상한 단어들을 여기서 드디어 꺼낸다. '논리적 이득'이라는 상식의 세계와 '인간적 숭고'라는 상식의 세계가, 일단 이 나라에서는, 지독하게 부딪혀 피 튀기는 중이다.
논리적 이득이라는 가치 체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우리에게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응당 논리적 계산을 통해 가장 공리주의적으로 선한 선택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배운 인간의 덕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이 뭔가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 논리와 계산과 선택의 과정에서 '개이득'을 보는 것이다.
인간적 숭고라는 가치 체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사람다운 사람이기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응당 인본 도덕과 사회의 정의를 이해하고 깨우쳐 모든 선택과 행동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떳떳한 인간의 덕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이 뭔가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떳떳함, 쪽팔리지 않음, 요컨대 숭고하고 멋진 삶 자체인 것이다.
무기질적으로 병치해 놓고 보니 뭐 둘 다 뭐 아주 이상하거나 괴랄하지는 않지 않나? 하지만 우습게도, 이게 한국 정치경제 이념의 대립각의 기반이 되는 순간부터는 이런 가치 체계가 서로에게 정말 괴이하고 끔찍하게 보인다. 한쪽은 다른 쪽이 "보상금 받았으면 조용히 계시고 순수한 유가족 아니면 빠져라" 운운하는 벌레로 보이고, 한쪽은 다른 쪽이 빨갱이 선전선동에 놀아나서 '우덜식 ~주의'에 빠져 사람 쥐어패는 참교육이나 시전하는 "씹선비"로 보이는 것이다.
5.
사실 사람이 좌뇌가 있는가 하면 우뇌도 있어서, 이 둘 중 한 쪽 가치체계만을 이해하고 살아가기란 쉽지도 않으며 올바르지도 않다. 그리고 뻔하나마 굳이 언급하자면, 딱 이 두 가지 상식 다발만이 성립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상식의 연쇄들이 상호 연관하며 가치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가치체계가 더 다채롭게 구성될수록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개이득을 찾으며 논리적 실속을 찾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졸렬한 소인배가 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거칠게 사례를 들자면, 일베 유저들 중에 어디 후원금 내거나 무슨 활동을 착실하게 하는 사람도 많고, 오유인들 중에도 악덕 알바생이나 "꽃뱀"(!!!)에게 당할 뻔해 혼났다는 사람도 꽤 있잖나. 평범한 사회적 존재들은 다들 으레 그렇게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상식의 세계를 구성하고 거기 맞춰서 살아간다. 자기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과 좀더 많이 겹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모두가 점점 익명화되어가는 요즈음에 특히 더 두드러지는 바, 더 많은 사람들이 몇몇 특정한 상식적 발상들만을 지나치게 선택하여 기능적이고 불완전한 인격을 형성한 채 전적으로 횡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자 이 타이밍에 내가 혹시 여러분께 예를 들어 Social Justice Warrior나 "넷페미"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냐고 물으면 어떨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면, 답하지 않아도 좋다.
6.
나는 사람들이 자기의 상식 다발의 명세를 좀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다. 아 나는 무엇은 옳다고 믿고 무엇은 안 된다고 믿는구나. 아 내가 지지하는 것은 전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는구나. 아 이러이러한 생각은 입 밖에 꺼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몇몇 선진 사회가 수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훈련시킨 토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윗글에서도 잘 말했듯이 우리에게도 그게 필요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다. 그걸 가질 시간과 차비와 여유와 사고력이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좌표'뿐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LTE의 속도로 욘나게 달려와 나의 불쾌한 인지부조화를 해소해 줄 준비가 돼 있는 선택적 정보들만이 온 사방에 가득 둘러쳐져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가장 유약하고 우스운 것은 평화 협정 제안이다. "당신의 생각을 상식의 한 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어요!"라는 시그널, 그것처럼 모두에게 코웃음을 살 만한 행태는 없을 듯하다.
나는 여기서 멸망의 유황불 냄새를 맡고 있다. 다음 토론이란 영영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애초에 사람들이 뭐에 대해 뭘 생각하는 누가 나와 어떻게 토론해야 되는지조차 몰라서 온라인에서 하던 행태 그대로를 오프라인에 옮겨 놓으리라는 예상, 모두의 상식이 모두의 그럴싸한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기에 오히려 더더욱 모두가 모두의 비상식에 찔리고 다쳐 으르렁거리는 광경, 뭐 그런 것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원글의 술에 물 탄 듯한 결문 주장이 그토록 싱겁다.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난 지금 한 집안이 갈라져서 서로 맞서는 남북전쟁 같은 꼴을 보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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