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의 <딴지일보>란 옛날 딴지일보를 말한다.
딴지일보가 오프라인 및 모바일로 진출한다는 것 같다. 배포된 날, 역설적이게도 대의제의 본질을 배우고 있던 현대민주주의론 수업 시간에 다른 학우들이 이것을 읽고 집어던져 두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집어왔다. 그리고 브리핑한 결과는... 반갑지 않다. <딴지일보>의 초창기를 초딩 때 만났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즐겨찾기에 넣어두고 잊을 만하면 한번씩 들어가 보면서 왜 기사 업뎃이 안 돼, 불평했던 사람으로서, 반갑지가 않다. 이제 딴지일보는 <딴지일보>가 아니다. 흔하디 흔한 극소수 진보정당 기관지 같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발행인이자 그 정당의 총수는 이름도 비슷한 김어준 씨고.
<딴지일보>는 딴지일보와 뭐가 달랐는가? <딴지일보>는 언론이 아니었다. 하나의 분출구였고, 요컨대 지금의 DC가 담당했던 역할을 <딴지일보>가 하고 있었다. 누가 허경영을 제일 먼저 주목했는가? <딴지일보>였다. 누가 독수리 5형제를 인터뷰해 386세대를 비꼴 생각을 했는가? <딴지일보>였다. 그 시절 누가 응급실 인턴 르포(에 가까운 체험기)를 생생하게 적었던가? <딴지일보>였다. 내가 논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한 엽기 우스개가 아니었고 어떤 아젠다(의제)들이었다.
우스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특히 진보적이다. 저번에 썼지만 웃음이라는 건 권위의 몰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아직 이 주제에 대해 이 이상 정연한 논리를 구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우습게 하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권위 부정을 의미하며 이것이 좋게 웃기다는 긍정성을 확보할 때 우스개는 농담 따먹기가 아닌 재치가 되어 그 무언가에 대한 다른 논의를 촉구한다. <딴지일보>는 그 전형을 잘 보여줬다. 초딩 때 멋모르고 (그때 누런국물 등의 안 좋은 엽기들이 유행하던 터라 난 딴지일보가 좋은 엽기 축인 줄로 생각하고서) "야 웃기는 것들이 있다" 하고 <딴지일보> 기사를 따라 읽던 기억이 난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딴지일보>는 그렇게 읽어진다. 그러나 함 맘 잡고 정치적으로 읽자면 한없이 복잡다단한 논의들이 얼키고설켜 백날 토론해도 졸라 끝이 안 날 거 같은 난장판이 바로 <딴지일보>였다. 절대로 진중하게 쓰지 않고 '씨바', '졸라'를 남발하며 거침없이 적어내려간 글들은 얼핏 보아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아 보이고, 아니 그 이전에 자격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주목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딴지일보>가 다루었던 주제다. 그것은 기성 언론들이 절대로 주목하지도 않고 취급조차 해 주지 않는 논의들이었다. 기사 일부를 하나 읽어보자.
예전에 읽은 한 기타리스트의 인터뷰에서 이런 대목이 있었다.
질문 : 실드(그러니까 기타에 꽂힌 그 전선)를 쓰시다가 와이어리스(즉 무선)로 바꾸셨는데, 연주에 어떤 영향은 없나요?
답 : 음.. 와이어리스를 쓰니 약간 음이 컴프레스가 걸린듯한(머, 좀 복잡한 얘기니깐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상관엄따) 느낌이 있더군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잘 나가는 가수(!) 중, 이런 인터뷰가 가능한 가수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마이크가 유선에서 무선을 바뀐것에 대해서 그 음의 차이를 느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파악하고 있는 가수가 과연 있겠느냔 말이다. 이 정도까지는 안 되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가수들이 무대에서 노래의 분위기와 감정에 따라 마이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입과의 거리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자신의 목소리가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신경 써야하는 분위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출처)
<딴지일보>의 기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기사를 이런 느낌으로 썼다. 사람들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체험담을 썼으며 특히 외국에 있던 사람들이 특파원이라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고, 아니면
나름 한 분야에서는 졸라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알찬 그리고 가감 없는 필체의 기사를 올려 줬었다. 그것은 기성 정치판과 언론플레이가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았던 제3세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딴지일보>는 차라리 그 시대의 '대안지'라고 부를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예 근본부터 다른, 그러나 절대로 산으로 가지 않고 분명히 심각한 문제일 수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엽기적으로) 끄집어내어 똥침을 날렸다(아젠다를 형성했다).
이제 그런 <딴지일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평하되 대체로 딴지 기업화 선언과 노무현 적극 지지 천명 이후부터 딴지는 쇠락일로를 내달았다고들 하거니와 사실을 보건대 딱 그렇다. 가장 최근의 딴지일보는... 대안지가 아니라,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김어준이라는 총수 이름만 팔아먹고 있고 사원 몇이서는 밤이면 밤마다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3류 유령 진보언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황우석으로부터 시작하여 박 터지게 싸우는 법을 배웠다. 박 터지게 싸운다 함은 이런 것이다. 이치에 맞게, 조리 있게, 상대가 공격을 못 하게,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논의하는 주제만 논의하는 것이다! 이제 사건을 터뜨리는 일은 <딴지일보> 등의 비주류 매체에서 방송사와 언론사들의 몫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쩌면 누리꾼이 견인하는 담론 형성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자멸해 버렸다. 그리고 딴지일보는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서만 졸라게 논의했다. 마치 다른 블로거기자들이, 아고리언들이,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심지어 한겨레 같은 제도권 일간지 기자들이 훨씬 뛰어나게 해내었듯이.
결론을 써야겠다. 딴지일보가 정말 <딴지일보>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의 노선(지면을 읽어봤는데 4면에 걸쳐 온통 이명박이다. 논의하는 주제만 논의하는 거다. 망했어요!)은 무조건 포기하라. 그리고 다시 한 번 썬데이서울(<오마이뉴스> 말고)과 경쟁하겠다는 자세를 되새기기 바란다. 딴지일보의 역할은 기존 담론에 한 마디 거드는 것이 아니고 정치 풍자 전문지도 아니며 그렇다고 김어준 총수의 가족신문도 아닌 것이다. 그런 역할 하는 언론들은 각각 쌔고 쌨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 달라. 발견해 달라. 전기장판의 두 가지 종류를 분해 분석한 과학 소논문, 야채의 해악성을 주장하는 막말 기사, 원고료 투쟁하는 창작노동자 르포를 써 달라. 아니지, 아니다. 딴지일보에 갇히지 말자. 우리가 해야 한다.
더 많은 아젠다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입이 필요하고, 더 많은 우스개가 필요하며, 더 상스럽게 그러면서도 장황하게 기록한 졸라 열 받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나는 딴지일보(와 그 오프라인 확장 등등)를 바라지 않으며 다만 더 많은 <딴지일보>를 요구한다. 최규석 선생 말마따나 "총알보다 과녁이 많다." 2MB 포크레인 부대가 몰려온다! 엄호 바란다! 총알은 애진작에 다 떨어졌는데 <딴지> 보급은 아직 멀었나? 졸라!
P.s 이시형(aoitoki) 어디 가서 뭐 하냐? 딴지는 정 아쉬우면 얘라도 채용해서 헛소리를 지껄이게 냅둬라. 세월 지나면 설사만 싸던 거 굳은 똥도 간혹 싸겠지.
P.s2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DC는 그럼 딴지처럼 대안언론의 역할이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입장이다. DC에서는 논의의 기본단위가 '떡밥'인데, 이것은 논리와 주장을 지독하게 원자화하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모든 주장은 떡밥들의 조합 연성으로 환원되는데 여기서 '기자'의 논조와 정체는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된다. 디씨에서 딴지처럼 글 쓰면 무플이거나 '그래서 어쩌라고' 등의 뻘플이나 받을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