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쓸모가 있는 지하철 5호선 노선도가 필요하신 분들은 차라리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로 가세요! 여기 올린 노선도는 쓸모가 없는 노선도입니다!
실로 그림 카테고리에 뭐 올리기는 오랜만인데... ㅈㅅ합니다. 업데이트: 네이버 검색에서 괜히 들어와봤다가 실망하시는 분들이 있는 듯해 RSS 갱신차 최신으로 올립니다.
흔히 볼 수 있는 5호선 노선도는 이런 식입니다. 5호선이 T자형으로 뻗어 있고 나머지 노선들은 환승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럼 도대체 저렇게 5호선 밖으로 뻗어나간 나머지 노선들은 어떻게 맞물리는 걸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해서, 아주 잉여로운 프로젝트로, "5호선을 T자형으로 쫙 펴서 먼저 그려 놓고 5호선 위주로 나머지 노선을 그 위에 억지로 왜곡해 그려보자!"라는 기획을 해 봤습니다.
이 노선의 총 길이는 52.3km로, 광저우 3호선과 베이징 10호선에 버금가는 세계 3위 최장 전체 지하 노선이다. [출처]
이 노선도의 저작권은 엽토군(김어진)에게 있습니다. 무단 도용을 엄금합니다.
역은 기점들만 표시했습니다. 심지어 노선 번호도 표기하지 않고 나머지 노선 색깔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서울을 5호선 위주로 보는 사람을 위한 지도입니다. 만약 이 노선도를 굳이 활용하겠다고 한다면 '*호선 ~방면으로 환승하는 ~역', '~역과 ~역 사이의 목적지 *역' 하는 식으로 읽는 수밖에 없겠지요. 뭔말인지 모르면 말구
5호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은 정확도보다 아름다움(?)을 중시하기 위해 (그리고 도저히 다른 노선을 일일이 왜곡시키는 짓은 손과 머리로만은 할 수가 없어서) 역간 거리 비례가 거의 맞지 않습니다. 예컨대 신도림과 대림, 구로와 가산디지털단지 등이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2.0으로 판올림을 하게되면 서울 남서부 저쪽도 어떻게 건드려질라나 근데 엄두가 안ㅋ남ㅋ
따라서 이 노선도는 거의 실용성이 없고 그냥 서울을 다른 모습으로 보는 목적만 실현한 셈입니다. ㅋ...ㅋㅋ... 나란녀석 못난녀석
한규현의 현대미술강좌 중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에 대한 tribute로서 이 시리즈의 1번을 이걸로 선택했다. (그는 바로그찌라시의 양태가 다분히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골백번 강조했다.) 사실 위주에 각색만 더해서 쓰는 종류의 글이기 때문에 좀더 문학적인 표현과 감성팔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 철판도 한 장이었고 찌라시도 한 장이었다는 사실을 좀더 부각하고 싶었다.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내후성강판이 생각보다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더라. 아 그것들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규자의 다음 강좌를 어서 듣고 싶다. 후후
금감원 카페 알바를 이틀만에 짤리고 규장각 가서 작업이나 하려고 버스 타고 신촌 가다가 떠올랐던 소재를, 골치 썩지 말고 그냥 막 화내면서 쓰자는 느낌으로 간단히 옮겼다. 뭘 써놓고 나서 그 후속 에피소드가 모락모락 생각나는 건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운 기분이지만, 일단 추세를 지켜볼 생각. 시드노벨은, 아무리 전체수준이 낮네 로리만 파네 왜색이 짙네 해도, 여전히 가장 한국적으로 라노베를 해석하고 있는 사회이다. 참고로 갑자기 혜화동9시반이 생각나서 용준이란 이름을 따왔다. ㅋ
자료조사를 하면서 예상보다 더 많이 쏟아져나오는 뒷이야기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상당한 격려가 되었다. William Crotch, 오르간에 재능을 보였던 한 어린이가 전공자가 되어 어느 날 교수들이 시켜서 작곡한 한 장의 악보가 빅 벤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는 그의 음악이 캠브릿지 차임스에 사용되는 것 정도만 보다가 영면하였을 것이다. Epics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결자라는 번역어를 생각해 봤는데 이건 좀더 생각해 보자. 여튼 참으로 epic이라 할 만한 얘깃거리였다.
백만년만에 로그인해서 글을 써 봅니다. 잉여는 아니지만... 이런 썰을 풀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일상물", 그것은 생산 및 소비가 과열 팽창해 있는 일본 서사 산업에서 등장한 장르입니다. 시청자의 경험, 미디어가 만들어낸 stereotypes 혹은 그에 준하는, 별다른 엄청난 사건의 기승전결이 없는, 소소한 신변잡기적 일화와 그 주인공으로서 각자의 개성이 잘 설계된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즐기는 장르이지요. 이 장르의 대중화가 <아즈망가 대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큰 반론은 없을 겁니다. <미나미가>라는 명작, <러키☆스타>라는 시대의 총아, <A채널>이라는 극단주의 작품에서 <일상>이라는 제목의 변칙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주로 미소녀물의 대표 장르 중 하나로 일본 시장에서 정착해 왔고, 그 외의 외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일상물이 되지 못하지요. 기승전결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본인은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물이란 '일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일상이 배제된 상태'를 다루는 것뿐이다."
그것은 일본식 일상물 특유의 클리셰적인 전개 그 자체와, 거기에 일체의 잡음 내지 변수가 배제된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에서 왔습니다. 1화는 신학기, 2화에서 5화까지 대충 캐릭터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 6화에서 여름방학과 불꽃놀이와 바다, 7화쯤에서 새 캐릭터, 8화에서 마지막회 직전까지 다시 2학기와 일상과 '문화제', 마지막회에서 뭔가 결말을 내야 하는 이야기 및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이 클리셰적인 프로그램 구성, 바로 이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등장인물 누구도 어느 순간에도 경제적 위기를 겪지 않고, 부모님 등의 어른이 시종일관 일체 관여하지 않으며, 아파 보아야 감기에 걸리는 정도이고, 뉴스라 할 만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의 이야기란 말이지요. 물론 이런 '있을 법한 것이 없다'라는 반론은 매우 값싸게 제기되고 간단하게 반박되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일상물"의 일상과 우리의 '진짜 일상'이 같을 수 없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은 일상물에 최소한의 세월(歲月)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times)이란 무엇인가? 세월이란 연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인간 이성의 본능적 작용에 의한연관 찾기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은, 반복이 되는 듯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과 혹은 전후가 인지되도록 재구성되고, 그와 동시에, 어떤 일관된 방향이 있는 'season'을 보내면서도 이런저런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는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당장 여러분이나 여러분 친구의 트위터(혹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가만히, 월 단위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의 일상도 그저 지리멸렬하게 쳇바퀴를 돌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누구의 일상도 할리우드 추격전 영화처럼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두 가지 패턴 사이의 미묘한 배율, 거기에 일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려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매일이 같지만 매일이 다른 것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당위'와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일상이란 개념에 대한 존재론/인식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실제 일상 생활이란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상물'의 일상은 바로 이 세월 개념이 완벽하게 배제된, 그래서 클리셰적으로만 운용 및 각색되는 하나의 뼈대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5월 히나마츠리와 여름방학 유카타 불꽃놀이와 문화제와 크리스마스와 신년참배는 그토록 이물감이 느껴지는 작위적인 장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행사들 중 하나는 거르지 않겠는가 하는 따위의 무성의한 의심 이전에, 왜 그렇게 일련의 이벤트들을 치르는 것이 그토록 맥락 없이 당연하게 떡떡 주어지느냔 말입니다.
2화니까 친해지려고 도시락을 같이 먹고 3화니까 꽃놀이를 가고 4화니까 하복으로 갈아입는 식인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지난 회차의 심경 변화를 이어받는 것도 없고, 새로 설정이 추가되는 일도 극히 드물고, 그 모든 것 이전에 그저 날씨에 맞추어 자동 인형처럼 너무나 전형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그 숱한 일상물들의 위화감의 정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대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의 그 똑똑한 서사 산업 관계자들은 왜 이렇게 일상이 아닌 일상을 뻥튀기 기계 돌리듯이 계속 돌리고 있느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일상들, 일상에 일정 비율 섞여있음으로서 더욱 일상을 일상답게 하는 변칙적 사건들을 배제하는 것이, 캐릭터들의 특징과 만담과 매력과 모에 포인트를 어필하는 데 조금이라도 여력을 더 투입하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상물 장르는 초창기에 분명 "일상의 느긋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치유계의 범주에 속했던 것이, 점차 쓸모 없는 노출, 패러디, 새 캐릭터로 밀어붙이기 따위로 점철된 "미소녀 캐릭터물" 범주에 속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나미가>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일반적인 범주의 세자매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일반적이지 않은 범주의 주변 인물을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이제는 일상이라 부를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장르 중 하나가 분명하게 시장에서 승리한 이래 "어쨌든 '미소녀'가 뭔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라는 사고가 공급자들 측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미소녀 캐릭터를 개발한 다음 그들을 출연시킬 곳으로서 가장 안전하게 세울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일상물이 구축해 놓은, "세월이 배제된 춘하추동"의 원형극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쨌든 미소녀들 중 한두 명만 인기를 얻고 나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안일함이 우후죽순으로 양산한 질 떨어지는 일상물들인 것입니다. <학생회의 일존>, <에비텐> 따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차라리 줄거리라도 있었으면 욕이라도 덜 먹었을 것을, 오로지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매회 바다다 합숙이다 도전과제를 해내는 따위의 이야기로 때우면 어쨌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무책임하게 만들어진 작품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물에 대한 재정립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와전된 개념―"비일상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목가적 가능세계"―이 아니라, 세월이 존재하고 캐릭터가 그 세월에 반응하는 식으로 굴러가는, 상황과 인물 성격과 세계관 설정에 더 구체적인 현실성이 부여된 채 그런 세상의 별다를 바 없이 매일 흥미진진하고 잔잔하게 파도치듯 일렁이는 삶의 향연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잘 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쓸 수 없다면 애당초 일상물이 아닌 다른 장르나 소재나 기승전결을 구상하기 위해 '딴 데 가서 알아봐야' 할 것이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일상물을 써낼 때에야 일상물은 소기의 목적 내지 온전한 존재 양태를 달성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픽션과 서사를 통해 구제받고 부각되어야 할 중요한 소재의 하나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월의 개념이 "일상물의 일상"에는 없게 되었기에, 그 개념을 일상물에 넣든지 아니면 일상물 장르를 폐기하든지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야 관계자가 아니니 속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로서 이 한 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다지 모에하지도 않은 미소녀들이 그 밥에 그 나물로 따분하게 보내는 사계절로 구성된 13화 분량의 산업 쓰레기가, 다시 또 양산되어 재고로 쌓일 뿐입니다.
이미 영화나 책으로도 여러 번 다뤄졌었고 야구 팬들이라면 대충 다 알지만, 소재 자체가 워낙 파워풀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려고 일부러 관련 영화를 다운받아 본 건 처음인 듯. 그거랑, 초반 도입의 hook이 약하다는 이전 버전에 대한 피드백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갈아엎은 게 잘한일. 공유를 해 주신 분이 "눈물도 살짝 날 뻔했다"라고 코멘트해 준 걸 봤는데 눈물이 살짝 날 뻔했다. 수많은 잡지들의 막대한 텍스트들을 보고 기가 죽으려고 하는 이 시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 괜찮은 소재를 잘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좀더 흥미진진하게 각색해서 쓸 걸 그랬나 싶다. 소창영이란 사람은 이후 SBS의 <세상에 이런일이> 취재진이 수소문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센세이션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글에서도 언뜻 비쳤지만, 우리나라의 생방송 사고 역사가 음모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뜻깊다.
'바로그페북 페친들이 라즈베리 파이에 관심을 가질까?'라고 지레 겁먹고 들어갔던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려웠다(내 기억이 맞다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세 번인가 했다). 특히 도입부가 어려웠다. 생소한 것을 소개할 땐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법한 소재를 쓰니까 바이럴이 알기 쉽게 터진 글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소재에 천착할 순 없는 법. 어떡하면 아즈망가 대왕이란 만화 자체의 대단함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화의 '구별됨'에 집중하게 됐다. 조사 과정에서 고바우 영감으로 소재를 바꿀까 고민했었다.
진짜 기념품은 비매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념품 가게, 공항 면세점에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그러나 전혀 뭔가의 기념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손님에게나 주인에게나 낯설기만 한 물건들이 즐비합니다. 그건 기념품이 못 됩니다. 이번에 대만에 다녀와서 기념품이랍시고 편의점에서 파는 재밌게 생긴 음료수통 세 개와, 이건 진짜인데, 편의점에서 물건 포장할 때 아무렇게나 담을 수 있는 그물 모양 포장지를 가져왔습니다. 마잉구 연임하던 날 나온 호외신문을 들고 온다는 것은 실패했지만, 하여간 뭐 그런 것들을 제 개인적인 기념품으로 가져왔었습니다. 스타벅스에서 산 중국 매장 단독 신년 텀블러는... 우리 돈으로 4만 원쯤 했을까요. 뭐 그런 게 제겐 기념이 됐습니다. 어디 가서 구하기 힘든 것이어야 기념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구경은 공짜 구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을 얼굴이라도 잘 봐두어 나중에 '내가 저 사람 길거리 공연하는 것을 봤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매주 TV 인기가요 프로그램에 나와서 지난 주에 했던 공연을 또 해 주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 언론노조 KBS지부 주최 및 대상으로 열린 '철의 여인 김진숙' 외부 강연회에 아주 늦게 가서 잠깐 듣고 왔습니다. 물론 공짜로 들어갔습니다. 신관 라디오홀로 급하게 뛰어들어가는 제 앞에는 일반인 출입을 통제 중이던 경비원이 있었고, 옆에는 뮤직뱅크 방청객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청중에게 실망했습니다. 여성성을 투쟁 의지력과 물물교환한 듯한 젊은 중년이 "정규직들이 비정규직 보고 '저따위니까 비정규직이나 하는거다' 운운하는 게 가장 무서웠다, 이게 제일 큰 문제 중 하나다,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연대해야 하고 절대 특권의식 가져선 안된다" 암만 호소해 보아야 한국방송공사에서 일하시는 양복쟁이들은 무슨 질문이나 존경을 표할 생각들이 별로 없이 다리 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는 사진 찍기만 바빠 보였습니다. 공짜로 불렀으니, 공짜로 앉아 듣게 되었으니 별 가치를 못 느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간 비싼 사람 모셔놓고 다들 야박하다 싶었습니다. 만약에 아이돌 여가수가 나와서 노동 문제를 살짝이나마 이야기했다면, 저들이 강단 내려가다 말고 다시 불려나와 먹먹히 질문을 기다려야 했던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했듯이 그렇게 했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아이돌들은 그 옆의 TV 공개홀 백스테이지에 있습니다. 세계가 다르다고 할까. 이것이 비매품의 세계인가 합니다.
참으로 괜찮은 기획, 볼거리, 자리, 물건은 종종 비매품이곤 합니다. 파업중인 MBC 노조가 이번에 이외수부터 델리스파이스, 강풀, 나는 꼼수다 출연진 등등 말도 안 되는 거대 캐스팅으로 콘서트를 엽니다. 선착순 신청이 시작되는 정오가 되자마자 500여개의 신청, 제가 신청완료 단추를 누른 뒤에는 그것이 800여개의 신청으로 늘어나는 것을 봤습니다. 문제는 그게 공짜라는 겁니다. 핸드폰 필참하여 시작 30분 전까지 장충체육관에 들어가면 된답니다. 이거다 싶은 촉이 얼마나 강하게 오는지, 수련회 복귀하는 날 저녁인데 그냥 신청해 버렸습니다. 이건 진짜 비매품인 겁니다. 이런 게 무료 입장이라니, 단돈 천 원만 걷어도 노조 활동에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요즘 생겨나는 "나는 꼽사리다", "뉴스타파" 그리고 바로 그 찌라시는 어떻습니까? 전부 접근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만 들이면 100% 공짜입니다. 그런데 또 공짜로 보고 듣고 받고 접하기엔 너무나 좋습니다. 또 대단합니다. 그래서 왠지 돈을 내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엔 초기매몰투자비용 운운하는 경영 관념이 개입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공짜냐? 왜 비매품이 될 수밖에 없느냐? 약간의 입장료만 받아도 대박을 칠 사업 아이템인 걸 다들 몰라서 그럴까?
아뇨, 정말 좋은 것은 말할 수 없는 값 곧 공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논리적으로 필연적입니다. 적당히 좋으면 적당한 값이 있습니다. 더 좋으면 더 큰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은 것이 돼 버리면 무슨 값을 매겨야 할지 알 수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짜로 탕감됩니다. 형이하학적 비유를 들어 봐도, priceless라는 어휘가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원은 '무가(無價)'이지만, 사전에서는 '(왜 무가냐면) 무한히 값있는'이란 뜻입니다. 이 어휘는 사전에서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참 절묘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공짜이고 각종 길거리 집회는 공짜이고 노숙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점심식사는 공짜이고 시립도서관은 공짜이고 소방 서비스는 (피해자 입장에서) 공짜이고 바로그찌라시는 공짜인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not for sale, 팔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뭘 만들면 꼭 값을 붙여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 말 잘 들으세요, 비매품은 판매 외의 다른 분명하고 한 차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비매품 표기를 달고 생산됩니다. 그런 연고로 모든 비매품에는 내재적 가치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재화와 용역에 값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만, (항상 교수들에게 따지고 싶은 대목인데) 값이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하여 현대 경제학이 한계 효용과 수요-공급이라는 지극히 통계수학적인 이유 외의 다른 이유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왜 초등학생 때 받은 싸구려 트로피를 버리지 않는가? Not for sale. 그거 파는 거 아니니까. 고작 몇만 원, 몇천만 원, 몇억 원 받으려고 그런 거 갖고 있는 거 아니니까. 그런 차원이 아니니까. 그러니 제작자가 무료다, 비매품이다, 공언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 그것을 누리는 게 목적일 터이므로, 맘놓고 실컷 누리시다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여러분만의 가격을 결정하여 약간의 팁을 더해 지불하시면 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잘 안 되는 그저 그런 적당한 수준의 가치를 미리 받아 나온 것들, 혹은 투자와 손익분기가 존재하는 가엾은 것들을 위해서 정가라는 것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들은 비매품입니다. 친구, 정말 즐거운 추억, 해방감, 용서받았다는 기분, 시원한 웃음, 배부름, 나 하고 싶은 대로 뭔가를 하는 한 순간 등등은, 잘 찾아보면, 의외로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거에 비용이 든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런 건 비용라는 단어가 뭔지도 몰랐을 원시인에게도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뭐든지 원시인 혹은 무일푼의 시골 촌놈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기는 그들이 살기 좋은 세상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여기에 뚝 떨어지면, 그도 우리처럼 살면서 우리처럼 대접받을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왜? 우리도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니까. 어떤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에게 불행한 곳은, 그 비용이 아무리 싸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불행한 곳입니다. 잘 살펴보세요, 이것이 그른가 옳은가.
교통비만 후불카드로 결제하면서 공짜 구경과 식수대를 찾아다니고 이동할 때마다 공짜 와이파이 AP를 찾아다니다 하나 잡히면 빈 콘센트에 대놓고 충전기 꽂아 각종 무료 업데이트를 받는 저는, 궁색한 것입니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은 원래 비매품이었습니다.
1973년 충청북도 평만군에 살던 문상식 씨를 조국군대화추진위원회라는 괴집단이 살해하고 그 사체를 전국으로 흩어 없앤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집단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조국근대화가 주창되었고, 1974년부터 각 신문사가 그를 기려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토막상식”입니다.
2011년, 이제 <바로그찌라시>가 상식 씨의 토막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상식의 토막>에 게재된 내용들은 전부 검증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들의 연관관계는 저희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던 또 다른 상식의 클러스터를 구축해 보려고 합니다.
두세 가지의 상식이 전혀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셨다면, 조국군대화추진위원회가 급습하기 전에 이쪽으로 먼저 연락하세요.
the.very.flier@Gmail.com
가끔 잠깐 붙어서 쓰는데 순식간에 문장이 잘 풀릴 때가 있다. 오랫동안 잠재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가 생각지도 않게 써내야 할 때 그렇게 되는데 이번이 그랬다. 내가 썼지만 맘에 든다ㅋㅋㅋㅋ
나중에 저거에 관련해서 썰을 풀(거나 풀게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할 말이 많은데. 여기다가 다 풀어놓을까 하다가, 아직은 너무 혼자 설레발칠 필요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생각 자체도 정리가 잘 안 돼서 일단은 백업만. 나중에 상식의 토막 단행본이 대원씨아이에서 나오면 그때 썰 풀어야지.
아 참고로 픽션입니다.바로 그 찌라시의 바로 그 간판 코너 소개문입니다. 우리나라엔 평만군이라는 지명이 없어요잉. 1973도 순전히 우연히 나온 연도이므로 김대중 납치사건과 엮으시는 당신은 정치과대망상증.
요 얼마 전에 오리지널이 생산되는 순환주기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일단 이것이 요즘에야 나타난 현상인지 아니면 적당한 조건이 맞으면 응당 일어나게 되어 있는 바 역사적으로 그다지 주목할 특징이 아닌 건지는 잘 모르겠으니 치워놓고라도, 최근 제게는 그나마 오리지널이라는 것이 생산이 되고 있긴 하느냐는 물음이 더욱 절실하게 밀려옵니다.
요즘 찌라시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종이 한 장짜리입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길거리에 뿌리는 무료 찌라시입니다. 지난 7월 28일에 공식 트위터를 개설할 때만 하더라도 이게 실제로 진행이 되겠느냐는 의심이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어젯밤에 사십만 원이 넘는 프린터를 주문하는 지경에 이르러, 정말로 10월 8일이면 창간호를 보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읽고 싶으시다면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든지 바로그트위터에 고지해 드리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가서 길거리를 찾아보시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이리저리 원고 준비하고 디자인 뽑고 돈 문제를 맞추는 일련의 과정을 석 달 넘게 거치면서 느끼는 것은,
...이까짓 찌라시 하나 만드는 것도 무진장한 생산활동이라는 겁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애시당초 무슨 '생산'이 없다는 기분입니다.
요즘 뭘 만들거나 그리거나 연주하거나 하는 일이 잘 있습니까? 그나마 웹툰도 포털이라는 기획사에 소속된 만화가들이 재미를 생산하는 노동을 하고 있는 지경이죠. 누가 돈을 벌고 있긴 한가요? 제가 보기엔 외환차익과 주가 변동과 부동산 가격차이가 나머지를 견인하는 지경입니다. 이론과 사상과 운동은 무슨 생산이 있습니까? 요즘엔 이상하게도 과거에 활동하고 행동했던 분들이나 최근 등장한 분들이나 죄다 언변으로 결과(output)를 내려 합니다. 뭔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세상이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결과물로 말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작품보다 리뷰가 흥성하고 먹을 것 없는 잔치가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자기 트윗을 하는 사람보다 RT가 더 많은 지경입니다. 생산의 소멸이 드러나는 가장 극명한 사례가 인터넷 컨텐츠입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개인홈페이지의 '자작' 작품들이 흥성하던 시절과 UCC 개념(그 자체가 웃기는 짬뽕이지만요)이 등장한 2~3년 전까지의 시기 그리고 그 이후의 현대를 비교해 보자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스마트라는 개념의 보급 때문이며 그래서 강력하게 타도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전에 우리는 본디 스마트하지 않다고 적었는데(이 글은 아마도 그 첫 문제의식의 개정증보판이 될 모양입니다) 과연 이 생각은 가면 갈수록 공고해지고 또렷해집니다. 아닌게아니라 UCC에서나마 보이던 미친 크리에이티브가 무슨 공모전 대상 작품으로 영합(?)하던 시절부터 좀 위험해 보이더니, 스마트라는 시대정신이 보급되면서는 완전히 영리해지기만 했을 뿐 그래서 꽝 하고 터지는 '오리지널의 무지막지함(preposterousness of the original)'이 영영 희미해져 갑니다. 다들 받아적고 RT하고 지켜보고 댓글 달고 키보드 배틀을 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그래 그 모든 걸 하기 위한 재료로서의 오리지널, 개시(initiation)는 실종되었다는 겁니다. 그건 멍청하니까. superrational하기에 irrational한 것으로 보일까봐 부담스러우니까. 내가 책임지고 내가 발언하고 내가 드러나는 건 싫은, 그냥 똑똑하지만 이름 없고 요령 있게 살아가는 차도녀로 있고 싶으니까. 스마트. 괜히 힘들여 뭔가를 고생스럽게 만들어내는 생산이라는 것을 내려다보는 되도 않는 거드름. 그나마 자기 발로, 자기 입으로, 자기 몸으로 뭔가를 하게 되는 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긍정되는 유일한 생산은 사회참여가 아닌가 합니다. 70년대로부터 우리 선배들이 물려 준 팔뚝질의 유산은 참으로 스스로 강건한 것이어서, 유행에 맞게 파스텔톤의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생산다운 생산의 하나로 명맥을 잇고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김기조 씨가 기억하는 8,90년대 문화의 역설적 풍요는 상속되지 못했습니다. 참여는 없어지고 생산은 증발하여 오늘날 과연 모든 것은 신기루 경제 위에서 유통되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그찌라시의 팔레스타인(직함은 주기적으로 바뀝니다.)을 맡아 지금껏 기획을 총괄하고 헛소리를 던지고 원고를 쓰면서는, 바로 이 세태에 반항하듯이 선지자적으로 찌라시를 뿌려 대려고 합니다. 더 이상 2쿨짜리 애니를 볼 수 없고 만화 원고 그리기도 힘드니까 소설로 적당히 적어 내는 등 모든 것이 경량화하는 시절입니다만, 적어도 이 찌라시는 그런 식으로 싸잡아 욕하기는 어려운, 엄청난 밀도와 내공으로 여러분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적어도 제가 만들고 제가 쓰고 제가 뿌리는 불온 선전물에서는, 스마트하기만 한 모든 교양들, 불펌과 단순 패러디에 불과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 그리고 모델하우스 같은 내면적 자세는 타도하려 합니다. 제가 못 봐주겠습니다. 세상에 그런 걸 보여주는 잡지는 넘치도록 있어요, 조선일보가 진중문고로 집어넣는 TOPclass부터 맥심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