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앙생활 하면서 고민하고 공부하고 듣고 배우고 말씀 받는 뭐 그런 것들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노골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인정과 사랑은 다르다.
지난 해외전도여행 때 배우고 싶다고 적었던 것 중에 믿음과 사랑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고 적은 바 있었는데 그에 대해 주님께서 알려주신 제 1단계 같은 음성이다. 사실 사랑이란 개념(?)처럼 쉽게 와닿지 않는 것도 드물다. ('영광' 정도가 있지 않을까?) 심지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런 쓸데없이 거창한 질문에 주님께서 일단 말씀해 주신 것은 이 정도이다. "인정과 사랑은 다르다. 나는 베드로를 사랑한 것일까, 인정한 것일까? 바울은 사랑하였을까, 인정하였을까?"
베드로는 처음에는 인정받는 제자였고 그 다음에는 사랑받는 제자였던 것 같다. 근데 또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받는 제자였을 수도 있겠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정함과 사랑함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종종 매우 불규칙적으로 잘못 혼용된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인정이란 공평의 영역이고 사랑이란 불공평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도 온전한 이해는 아닌 듯하다. 잘 모르겠다. - 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려면, 일단 육적인 사고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좀 영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주제넘는 생각 말라는 듯 들려 주신 음성이다. 이 이상 더 길게 말씀해 주지도 않으셨다. 내가 납득해 버렸기 때문에. 과연 그렇다. 영적인 사고나 행동이 어디 뭐 따로 있겠는가? 그리고 일개 평신도인 내가 그런 주제에 이를 수나 있겠는가? 그저 육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나 그만둘 수 있으면 다행이라 하겠다. 뭘 하려고 하기보다, 일단 뭘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것이 이런 영역에서는 특별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기도는... 걍 수시로 하라.
해외전도여행 job이 중보기도였기 때문에 기도의 실제를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도여행 막판에 말씀하여 주셨다. "그리고 기도는... 걍 수시로 해라.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걱정하면서 말을 고르는 건 나쁜 아버지 밑에 있는 불쌍한 아들이나 하는 일이다. 좋은 아버지에게 좋은 아들은 그냥 수시로 말을 건다."
그런 것 같다.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비위에 맞는 말을 고르는 아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들의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기도에 다른 비법이나 실제적 요령 같은 것은 없고 그냥 수시로, "쉬지 않고" 무시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요령도 생기겠지. 기도가 무슨 마법주문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에 눈치챘지만, 기도가 대화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내겐 이론에 불과하다. - 언약의 하나님.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가 최근 몇 주간 느닷없이 묵상하고 있는 주제이다. 기도하면 이루어지고, 구하면 받고, 나의 꿈과 소망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데,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뭐 그리 보잘것 있다고,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우셔서 일개 인간인 내가 비는 것을 이루시고 복을 주시겠는가? 도대체 왜?
그것은 언약 때문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종종 간과되고 망각되는 진실이다. 다들 복 받고 응답받고 안식 얻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노래하느라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근본 원리에 대한 숭고함과 경외감을 모르게 된 것 같다. 다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먼저 사람을 지으셨다. 그분이 먼저 모든 복과 평강과 형통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함"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분이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해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은 도저히 파기되지 못하고 이행되는 것이다. 대신 그 쌍무계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 영접한 사람이 되어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도 들어 있는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사실 그분은 아쉬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 스스로 세우신 언약을 파기하지 않기로 결정하사 친히 모든 언약을 직접 성취하시고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되기 위하셔서 지금도 듣고 계시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일은 이루어지고 기도는 응답되고 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청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은혜를 받는다"라는 식의 요즘의 가르침은 요구불 예금을 인출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한 이론이 아닌가? 어느 쪽이냐 하면 우리는 영원히 빚꾸러기일 뿐 아닌가? 왜 은혜를 받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들이 무슨 정해진 결말인 양 이야기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런저런 퀘스트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처럼 말들 하는가? 노발대발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시켰던 모세의 기도는 다른 게 아니라 오직 이 줄거리이다: "아이고 주님, 여기서 이러시면 나중에 악인들이 비웃습니다, 주님께서 저번에 결심하신 것들을 기억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시지성경에 따르면 이런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듣고 보니 그렇군' 하고 진노를 거두시는 모습으로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약하신 대로 이룰 것이니 아무나 그 언약 받을 수 있네." 왜 우리는 언약을 못 본 체하고 '아무나'와 '받을 수 있네'에 집중하는가. 계약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성경책이란 것을 살펴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언약 조건에 따라 간구할 수 있겠으며, 계약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입장이 되었는지 모르고서야 어찌 협상(이라고 쓰고 기도라고 읽자)을 타결(이라고 쓰고 응답이라고 읽자)할 수 있겠는가? 이해를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절대로 무슨 도깨비 방망이 주문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절대 우리가 간구하고 있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그깟 몇 가지 문제가 주인공이 아닌 것이다. - 복음을 돌려 말하는 게 이제는 지겹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다른 구원은 없다. 이 지극히 간단하고 절대적인 진실을, 뭘 어떻게 하면 돌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건 그냥 문자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하는 이야기다. 십자가는 유비(allegory)가 아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란 이름과 그의 직업이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처녀 잉태되었고 변모했고 부활했고 승천했으며 살아계시다는 류의 이야기는 영 믿기 싫다는 감정 때문에, 예수님을 일종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길거리의 소외된 사람들이 작은 예수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멋지게 응용된 간지나는 영성과 폼나는 신앙생활을 하는 '좀 배웠다는 신학적 전문가들'이 평생가야 못 하는 게 있는데, 한 영혼, 천하보다 귀하다는 한 영혼에게 자기가 만나뵈었던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다. 원래는 그분 대신 당신이 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어야 했단 말이다!
이번 예수전도단 CMK 전국LT 가서 다시 기억해냈다. 내가 처음 만나뵌 주님은 내 왼편에 매달려 계셨다. 나는 당연히 죄인이 맞으니까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맞는데, 내 옆에 있는 이분은 누가 봐도 나 같은 죄인이 아니다. 그런데 저렇게 채찍으로 맞고 손발에 구멍이 늘어지도록 못으로 박히고 가시나무로 된 왕관을 쓰고는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고 용서를 빌고 계시단 말이다. 원래는 내가 그렇게 죽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육체 가운데까지도 살게 하셨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율법? 에큐매니칼 신학? 그딴 게 날 의롭게 해 줄 것 같았으면 도대체 그분은 왜, 유대인의 왕이라는 분은 도대체 왜 내 왼편에 매달려 그렇게 죽어가셔야 했나?
그리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더 듣기 좋게 돌려 말할 수가 있나?
성경에는 듣기 좋고 주님께서도 싫어하지 않으시는 진리와 좋은 원리들이 많이 써 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끝날에 변명해야 한다든가,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라든가, 정말 좋은 것은 값이 없어야 한다든가. 그러나 이게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이 모든 원리와 진리를 진리 되게 하신 율법의 완성자,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것도 가장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진리로서의 예수님 이야기이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율법의 완성에서 파생되고 또 파생된 온갖 듣기에 좋은 것들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도 칠 년에 한 번씩 백성들에게 읽어 들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고 심비에 새 계명을 새기게 되면 그런거 다 필요없잖아! '내가 정말 전해야 하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항상 그렇게 속으로 울부짖으며 바로그찌라시라든지 이 블로그라든지, 심지어 페북 댓글 하나를 달 때도 항상 그런 심정이다. 내가 복음 증거의 여력이 부족해서, 간이 작아서, 이래서 저래서, 변증해 줄 말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오늘도 이 모든 것의 주인공이시고 소유주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 이젠 이런 벙어리 냉가슴 앓는 생활도 참 진절머리가 난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실현되고 진리가 선포되는 세상? 예수님 이야기를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그게 다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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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