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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천호역 계단을 오르면서였다. 매일 오르는 계단이지만 너무 멀었다. 나도 모르게 '멀다!'라고 새삼스럽게 외쳐 버렸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먼 거리를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고 있더라. 따져본 결과 편도로만 37km를 다니는 데 1300원을 내고 있다. 1300원! 이 싼지 비싼지 애매한 요금으로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하루 안에 갈 엄두도 못 내던 거리를 가만히 앉아서 혹은 서서 가끔 자습까지 하면서 익숙하게 다닌다. 교통의 발달이란 대단하다. 사실을 놓고 말하건대 37km는 짧지 않다. 일직선 도로를 시속 100km로 달려도 20분 넘게 달려야 37km를 간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거리, 심리적 거리를 점점 희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교통수단인 것이다.
천호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리를 잡으니까 생각나는 또 하나는 GS마트다. 한때 하남시 신장동 일대를 평정했고, 심지어 개점 당시엔 신장시장에서 보이콧 운동 비슷한 결사 조짐까지 보였던 LG마트인데, 요즘은 어째 예전같지 않게 사람이 뜸해졌다. 왜? 풍산지구가 들어서면서 하남시에 드디어 이마트가 들어온 것이다. 얼마 전에 드디어 구길(온조로)에도 이마트 가는 마을버스가 생겨서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중심지 이론에 따르면 고위 중심지는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고, 다른 저위 중심지들을 수렴할 만큼 큰 구역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이론은 아주 알기 쉽게 현장에서 학습된다. 이마트 가는 버스가 생기면 생겼지, 이마트가 주거지역에서 좀 떨어져 있다고 금세 망해버리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망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가자마자 인기척 없는 냉랭함이 확 끼쳐오르는 신장시장 공판장과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시장 골목뿐이겠지.
내가 느끼는 것은 이것이다. 그 모든 중심지―쇼핑몰, 공연시설, 대학...은 어쩔 수 없다, 학교가 내게 올 수는 없으니까―는 사실상 대단히 먼데, 우리는 그게 먼 줄 모르고 다닌다. 아무리 이 이론이 실제 생활을 잘 설명해 준다 할지라도, 이 현상의 방치는 경제적 불균형, 근본적 위험, 그리고 정치적 불온함만을 낳을 것이다. 경기도에 사는 대학생들 대부분이 서울 혹 강원도 소재 학교에 다니기 위해 편도로만 한 시간 반 가량을 길바닥에 버리고 있다. 하남시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려면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한다. 심지어 지하철 한 정거장을 가려 해도 버스를 타고 강동구로 들어가야 한다. 모든 것은 내가 사는 동네에 없다. 그래, 서울이라는 초고위 중심지는 그만한 수용량이 되는 모양이다. 문제는 자유방임의 차후 결과다. 전국이 서울로 수렴되는 광경을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한반도대운하를 파든 지하철의 전국화를 진행하든 이는 정치적으로 불온하며 근본적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무엇보다 상식적으로 불합리해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이 희생된다. 일단 너무 멀지 않은가? 중심지와 주변지가 기술적으로 가까워지면, 그래서 중심지는 중심지 본연의 역할을 위대하게 해내면 그것은 정말 잘 된 일인가? 만약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집 앞에서 가능하다면, 내가 왜 이 시간, 이 돈, 이 발품 다 들여 가면서 그곳까지 가야 하는가?
나는 이제 신장사거리 정류장에서 내려서 집으로 간다. 집 코앞에 농협이 있는데, 간혹 보면 시민들을 위해 재개봉관 수준의 영화 무료상영을 하는 모양이다.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기필코 가 봐야겠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것인데, 영화를 보기 위해 버스에 타고, 버스에서 내려서 극장으로 이어지는 10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꼬박 40분을 달려갈 생각을 하면... 영화관 처음 다니던 시절의 감동은 이제 잊혀지고 다만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래, 좀 후지겠지. 근데 집 앞에서 공짜로 영화 한 편 보고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집으로 걸어가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
로컬리제이션? 지방의 세계화? 분권자치? 탈서울화? 대형할인점 보이콧 및 지역 경제 활성화? 골치 아픈 말 백 마디로 말장난을 하느니 이 몇 마디를 물어보자. 너무 멀지 않나? 꼭 거기까지 가야만 하나? 왜 우리 동네에선 이걸 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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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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