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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패배

2009. 1. 23. 13:10

우리는 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 누군가는 이겼다고 으스대고 한쪽에서 또 누군가는 패배자 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절망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상 이것들은 안타깝게도 죄다 싸그리 곱쳐서 하나의 거대한 패배의 전체집합인 것입니다.

철거민이 화염병을 던지며 '생존권 투쟁'을 합니다. 전경들은 크레인을 끌고 와 '불법시위를 저지'합니다. 서민 다섯과 경찰관 하나가 떠났습니다. 아무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모두가 학점과 토익을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오르비와 수만휘에서는 오늘도 숱한 청소년들이 서로의 봉사경력 등으로 스펙을 키재기합니다. 모두가 지고 있습니다.
웰빙 브랜드 채소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 그렇게나 보기 좋은 모양이 되는지 전혀 모르는 어린이들은, 채소란 응당 마트에 가서 가격표를 보고 고르는 것인 줄 압니다. 바로 옆에 논밭이 펼쳐진 신도시의 어린이들은 양상추와 콜라가 같은 종류라고 배울 것입니다. 실로 지구촌 규모의 패배입니다.
병원을 개업한 뒤 손님 많이 오게 해 달라고 고사를 지냅니다. 불경기라는 이유로 투자를 하지 않아서 불경기가 됩니다. 은행이 대출한 돈이 다시 은행으로 들어가 다시 대출됩니다. 우리는 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패배는 누군가의 승리입니다. 그러할진대 누군가는 분명히 이기고 있어야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아무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상위 1%는 승리하고 있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이 세계가 당해내고 있는 거대한 패배의 콜로세움에서 단연 우수하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는 아주 자신감 넘치는 속도로 벼랑을 향하고 있습니다.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건 누구이고, 2인자와 3인자는 누구이며, 뒤처지는 낙오자들은 또 누구인가요? 의미가 없습니다. 낭떠러지로 전력질주하는 시합에 등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패배자입니다.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경기는 한시바삐 중단해야 합니다. GPS[각주:1]를 켜고 경로를 재탐색해야 합니다. 이 크고도 큰 패배 앞에서는 신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다 개나발이고 강남 땅부자 1등이건 최저빈곤층이건 좀벌레의 솜털만한 격차일 따름입니다.[각주:2] 3류 경제예측 서적도 서술할 엄두를 못 내는, 나도 감히 상상을 못 하는 이 거대한 거대한 패배에 비하면...



P.s: 이하는 이 글의 제목과 모티브(?)를 따 온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의 일부. 겸사겸사 오랜만에 좋은 시 읽어보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治安局)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 GosPel Song의 약자. [본문으로]
  2. 현대민주주의론 수업을 듣는데 이런 걸 배웠다. "민주주의가 그러하고 시장자본주의가 그러한데, 자유와 기회의 평등 등등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많지만 정작 내용적으로는 아주 빈곤하며 이에 대해 체제는 침묵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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