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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쓰고 싶던 테마였는데 이번에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을 기념하여 아주 콤팩트하게 써본다. 이거보다 길어지면 나도 헷갈리고 모두가 헷갈리는듯.


세트장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해진 개념이지만 예전에는 '버라이어티 예능'을 하기 위해 도입된 혁신적 장치였던 세트장이란, 어떤 굉장한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각종 장치와 설비가 고안되어 작동하는 기계/전기 조립체 일체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울고 웃고 때리고 뒹굴며 '오락 프로'를 만들었다.

세트장은 목적지향적, 결과지향적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드는 이유 자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그림'만큼은 '따내겠다'라는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세트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신 그 반대 급부로서 주어진 규격과 분량에 맞춰서, 계산된 재미를 위해서, 모두가 각본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트장은 21세기 초엽까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성장 중심적 계획과 사회의 첨병에 다름아니었다. 어떤 목표와 도전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대신, 각 개인의 계획과 규격, 행복의 기준과 방향을 제어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았고, 그게 어느 정도 순기능을 했다. 우리는 한때 대형 버라이어티 쇼의 거대한 세트장을 진심으로 우러러보았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무한도전은 바로 이 '세트장'을 빠져나오려 하는 예능이었다. 아하 게임을 하던 '스튜디오'(그것은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세트장이기도 하다)에서 시작한 그들은 장충체육관으로,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것들은 좀더 세트장에서 멀어진 것이다) 가더니 지하철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어딘가로(여기서부터 세트장이 아니었다)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물리적인 세트장을 탈피해 왔다.

한때는 전형적이고 다소 상투적이기까지 했던 방송가의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큰웃음이 보장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모내기 특집이 그랬다. 비 오는 논두렁에서 뒹구는 일은 그 자체로 시답잖게 우스운 것이다. '세트장 아닌 세트장'을 통해 변칙적으로 재미를 확보하는 이러한 의존성은 최근의 방콕 특집 같은 것에도 발견되었던 바다.

아무튼,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기만 해서는 머지않아 '(성장 발전상의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것을 직감한 TEO 사단은 새로운 세트장을 구성한다. 바로 관념적 세트장이다. 무한도전은 갈수록 'OOO 특집'의 이름으로 특정 주제/과제/컨셉을 내걸고 이것 하나에 모든 여건과 아이디어와 몸개그를 전면 집중해 70분을 채우는 (그걸 실패한 '특집'은 통편집되어 재방송을 타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왜 관념적 세트장이냐면, 기존의 세트장에서 볼 수 있던 철골 구조물, 카펫, 폭죽 같은 물리적 요소들은 사실상 없어지되 개그, 상황극, 캐릭터, 도전, 팀 꾸리기, 액션, 교훈, 사회적 의의 등등 비물질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특정 감동과 재미를 창출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계획대로 잘 될수록 그 특집은 레전설이 되었고, 잘 안 되었을 때는 통편집되어 창고에 박혀 있다가 발굴되곤 했다.


그들은 과연 세트장 자체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방송의 본질상 70여분간 별 요점이 없는 신변잡기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무한도전의 지난 십몇 년 역사상 그들은 성장주의, 목적주의, 성과주의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각본과 세트장이 주어지지 않는 예능에서도 빅재미를 만들어낸다며 뛰쳐나간 그들이 정작 스스로 만든 각본과 세트장에서 낑낑대게 된 꼴이란 아이러니가 아니면 무엇인가.

심지어 '쉬러 간다', '우천시 취소하는 특집으로 한다' 같은 관념적 세트장을 나가는 듯한 기획마저도 사실은 치밀하게 (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각본, 체계, 어떤 그림을 무조건 따내기 위해 고안된 설계와 배치로 기능했다. 방송이니 그래야만 했다. 심지어 무한도전은 리얼 예능을 표방한 탓에 오히려 그 반대로 작위미, "일부러 철저하게 어떠어떠하게 한다" 하는 기획이 주는 즐거움도 넘볼 수 없게 됐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은 시사적이다. 이렇게까지 일부러 대본과 내용구성, 로케이션 등을 '어기고' 다닌 방송은 일찌기 없었는데, 그런 쇼가 유지 불가능성이 가시화된 이후로 그걸 끝내 부정하다가 마지못해 마침내 수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것이 쇼이기를 표방하는 이상은,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기획, 각본, 목적하는 결과의 집합체(set)에서 실행되게 되며 그래야만 한다."


무한도전은 자기가 얻어야 할 교훈을 이미 다 얻었겠지만, 그걸 보며 몇 년을 함께한 일반 대중은 과연 어떤 교훈을 제대로 얻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의 삶 여러 영역에, 사실은 불가능한 그리고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성장주의 계획이 삼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물리적 세트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철저히 자신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자본과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반 대중도, '디카'와 스마트폰을 손에 넣으며 다른 의미에서 물리적 세트장 없이 '쇼'를 해 오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쇼는 쇼이므로 이들에게는 크게 둘 중 한 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무한도전이 그랬듯 각종 컨셉과 설정으로 무장한 관념적 세트장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인생 전체를 물리적이고 통합된 세트로 구성해 버린 것이다.

둘 다 별로 건전하지 못하다. 전자는 경제규모 상위국가의 대표 민영방송사의 간판 예능조차 끝내 버티지 못한 고강도의 정신 노동을 일반 대중 개개인이 감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속된말로 자기 인생을 팔아서 관심을 얻고 유지를 하는 마이너스 게임이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이 보고 배운 것은 무한도전이나 인간극장, 세상에 이런일이 등이었을지언정, 그들이 정말 그것을 동경하고 모방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탈-세트장 예능의 대표주자였던 무한도전의 종언 이후 가장 질서 있는 퇴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냥 순순히, 물리적이고 인위적이며 전면적이고 조작적인 계획의 존재를 인정해 버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쇼"라고 이해하는 세계는 철저히 그 계획 속의 세계로 한정하고 샌드박싱하여, 그 안에서만 쇼의 문법과 방식이 작동하게 내버려두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그 밖에 나와 있는 방식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아주 그로테스크한 만화의 작가가 될 수는 있겠으나, 작가로서의 그를 예능 방송 게스트로서의 그의 자리에 불러내는 일은 하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또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더라도, 자기 개인사를 죄다 털어놓는 지금 대다수 유튜버들의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채널 속 자아를 좀더 허구적 체계로 확립하고, 분리 관리하며 그것을 게임의 룰로 이해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요는, 쇼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쭙잖게 대본과 세트장과 계획과 목적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고 하다간 실패만 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무한도전 역시 무한하지 못하게 도전을 멈췄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향주의 자체를 중단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만큼의 급진성과 거기 따르는 각종 능력 요건을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쇼는 결국 쇼이니 순순히 세트를 짜고 그 안에서 행동하자는 겸손한 교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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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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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기고한 리뷰에서 아래 내용을 요약해 두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애국청년 변희재 :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맞다


- 꽤 오랜 기간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부침이 심했는데 드디어 실물을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2018년 3월 1일 IPTV 배급 개시 기념 시사회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2관에서 별도 신청 절차나 비용 없이 참석 가능하다고 해서, 가봤습니다.

상영관에는 약 120여 명의 관람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영화 상영과 이후 10여분간 진행된 관객과의 Q&A 시간에 이르기까지 장내는 별일 없었으며, 감독이 혹여나 걱정했던 바 “상영 항의 전화를 하던 분들”의 난입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현실 정치가 그렇죠 뭐!

- 영화를 보고 나서 한줄 요약평을 SNS에 올리자마자 지인들이 물어봅니다. “추천할 만합니까?” “자세한 얘기 좀 써줘여 가고싶었는데 까먹고 못갔음” 작품 자체는 관심작이었습니다. 정작 현장까지 가서 관심을 지불한 사람들이 120여명에 불과했을 뿐이지요. 추천할 만하냐고요? 이 리뷰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리뷰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리뷰가, 이 영화를 앞으로 ‘굳이 보실’ 분들이, 그때 좀 덜 당황하고 좀더 생산적으로 이 작업물을 이해하고 감상하실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가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 반대로, 그저 지금껏 하던 대로 “ㅋㅋㅋㅋ 변희재 새끼 결국 영화까지 나왔네 ㅋㅋㅋㅋ 애북고수들 좋겠넼ㅋㅋㅋㅋ 이런건진짜 왜만드냐 절대로 안본다 홍가놈들이나 보라고해라 ㅋㅋㅋㅋㅋ” 하고 지나가실 분들은 이 리뷰를 그만 읽으시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제가 변희재를 옹호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게 참 뭐랄까… 세상의 이면과 모순의 층층을 더 깊이 들여다볼 의지나 지능이 없으신 분들의 행복 추구권을 어찌 제가 감히… 싶어서요.


-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영화로서 선뜻 추천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한국 다큐멘터리답지 않게, 영화가 시종일관 시청자에게 어떤 입장을 갖기를 요구하는 자료화면으로서 주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특히 변희재라는 인물의 ‘애국청년’ 캐릭터가 그것을 방해하는 함정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 먼저 함정이란 뭔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전제인데,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에서 변희재란 인물은 아주 납작하게 캐릭터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캐릭터화가 공정한가 어떤가는 접어두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를 ‘변듣보’, ‘변TM’으로 알면 충분하고(“저들”의 경우에는 ‘변땅크’), TV에서건 현실에서건 스크린에서건 오직 그런 변희재만이 알기 쉽게 등장해 알기 쉬운 행동을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가끔 코미디 내지 냉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언제 그런가 하면, 변희재가 변듣보, 변땅크 등의 노릇을 할 때 그렇습니다.

- 이를테면, 관객들은 무슨 조건반사를 학습받았거나 사전에 안내라도 받은 듯이, 일베 표시 손동작을 한 시민과 기념 사진을 찍는 그림이 나오면 웃어 주었습니다. 허탈한 웃음과 냉소와 폭소가 정확히 같은 비율로 섞여서요. 글쎄요, 그건 불필요한 웃음입니다. 적어도 영화의 비평, 그리고 다큐멘터리 전체 서사를 따라잡는 데 있어서는 말이죠.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그게 학습된 웃김이기 때문이에요. 요컨대 저들만의 리그 속에서 조그맣게 영웅 대접받고 있는 “애국진영후보 변희재”에 대한, 그런데 영화가 지시하지는 않는, 그냥 관객들이 멋대로 웃는, 그런 웃김.

- 한국 다큐멘터리는 그 생태적 환경에 의해 필연적 정치성을 띠고,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사회의 맥락에 관계될 것을 요구받곤 합니다. 그러면 이해와 해석과 반응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해지거든요. 그 조건에 가장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GO발뉴스와 김어준-주진우 브랜드 다큐들이라면, <애국청년 변희재>는 그 조건에 꽤 적극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변희재 한 명을 세워놓고 까르륵 까르륵 비웃는 영화는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기대했을지언정, 그리고 “원래 기획 의도 중에는 변희재라는 사람을 놀리고 비판하는 것도 있었”을지언정.

- 그래서 사실은 <애국청년 변희재>라는 제목조차도 작정하고 설치된 함정이고 ‘어그로’입니다. 고로 이 제목에 웃어주는 것은 여러분의 웃음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좀더 쓰겠지만, 한국은 이런 함정을 깔아 주면 신나서 걸려 주는 습성을 갖고 있고, 그렇기에 이 영화는 앞으로도 공정한 비평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며 한국의 정치문화는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 적어도 액면상으로는,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진보진영의 괴짜 논객으로 활동하다 어떤 계기로 보수로 돌아서고 진중권과 사망토론을 하며 미디어워치를 운영하고 “탄기국”의 리더십이 된’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변희재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러한 개인 이력을 1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다른 분들이 더 잘 할 수 있고 내가 잘 하는 건 그냥 지금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2014년을 중심으로, 그때부터 2017년까지의 변희재를, 상당한 절제력으로 집중하여, 전인적으로 기록(documenting)해 나갑니다.

- document라는 영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문서화하다, 기록하다, 기록으로서 남겨두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딱히 마이클 무어 식의 쇼잉과 텔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죠. 이 영화는 정말 문자 그대로 그 시절의 변희재가 중요한 몇몇 날들에 어디 가서 뭐 하고 어떤 술자리를 가졌나 하는 사실들을 기록으로서 촬영해 남겨두는 데에만 골몰합니다. 못 믿겠지만, 그게 이 영화의 전부에요. 뒤에 좀더 쓰겠지만 심지어 그 사실들의 나열을 통한 의미적 연결이나 구성을 상당히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듯 보입니다. 대신 그 장면들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인상들을, 보는 사람마다 제각기, 취사 선택해서 판단할 여지가 있을 뿐인 거죠.

- 예컨대 영화 초반 1분 정도는 여러분이 보신 예고편 그대로가 들어가 있는데, 그게 지나고 나면 새로운 장면으로서 뭐가 나오냐 하면, 그의 ‘애국산악회’ 활동이 조금 서투르다 싶을 정도로 가감 없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태극기를 등에 지고 땀 뻘뻘 흘리며 “이 길이 둘레길이 아니라고” 같은 말을 되뇌이며 산을 타는 걸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지, 이거 뭐 중요한 신인가,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지 아세요? 이 신은 의미가 있으려면 있기도 하고, 없으려면 없기도 합니다.

- 무슨 말이냐? 이 시퀀스는 “산악회에서부터 시작해서 보수진영 조직을 형성”하려는 변희재의 정치활동 계획의 서두 부분일 뿐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변희재라는 인물의 내면의 은유라는 꽤 깊은 통찰이 담긴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등반자들이 박박 우기는 틀린 길을 따라가고, 그러면서도 “이 길이 아닌데…” 갸웃거리는, 그러면서 나름의 길을 찾아 다같이 정상으로 가려고 하는 등장인물. 주인공의 행동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포착하고 묘사하면 그건 극영화에서 무슨 의도입니까? 보통은 내면의 상태나 변화의 은유죠.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는 듯, 영화는 전체에서 불필요해 보이는 이 등산 장면을 꽤 공들여 보여줍니다.

- 뭐 아니면 감독이 개인적으로 이날 뭔가 의미가 각별해서 분량을 1초도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거나… 그런데 강의석이란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부지는 아닙니다 여러분.


- 그렇게 영화는 계속해서 (주로 정치에 뜻을 품어 준비하고 출마하고 낙선하는) 변희재와 그 주변부를 비집고 들어가 밀착 취재를 해나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 하나하나에서 감독은 플레이어가 되어 등장할지언정, 내레이터가 되어 개입하거나 해석하거나 정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강의석이 왜 변희재 옆에 있느냐’가 영화의 주요 갈등축 하나를 담당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비중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셨지만 아뇨 그게 그렇지가 않다니까! 당신이 어느 정도는 이 서사를 추동하고 있다고!)

-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각자의 판단을 할 근거 자료로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하기 힘든 컷일수록, 그 리액션도 시원찮습니다. 예컨대 변희재가 도림천 농구장에 나가서 사람들과 농구를 하거나 서울대에 가서 졸업증명을 받아 오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건 제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 다른 관객들에게는 다소 당혹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뭐지? 왜 웃긴 게 안 나오지? 뭐라도 좋으니까 한심한 모습 좀 나와라’ 같은 분위기였달까.

- 애초에 이 영화에서 정말 웃긴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예컨대 그 악명 높은 주옥순 대표가 변희재와 함께 다니며 지역구 주민 추천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장면은 어떨 것 같은가요? “왜 안 찍어준대” 묻는 주옥순에게 “저거 좌파야” 단언하는 변희재만큼이나 우스운 블랙코미디는, 적어도 제게는 바로 그 직전 컷이었습니다. 주옥순씩이나 되는 사람(영화에서 자막으로 엄마부대 대표라고 명시해 줍니다)이,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근사근함으로 굽실거리며, 변희재의 앞에 서서 막도장 날인 한 번을 구걸하고 다니고 있거든요.

- 또는 이런 장면이죠. 변희재 캠프 선거인단 중 한 명이 삭발로 유권자에게 호소를 하자, 다른 선거인단이 천진난만하게 “나도 삭발할 거에요”라고 합니다. 되레 변희재가 기가 차서 담배를 물고 묻습니다. “…대체 어느 유권자에게 호소를 하려고 삭발을 한다는 거야???” 이 장면은 가히 이 프로젝트가 뽑아낸 최대 성과로서 빛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절묘하게 사람 말문 막는 광경인지는 직접 보셔야 합니다.

- 왜 이 컷들이 웃기는가 하면, 적어도 제가 해석하고 종합한 바,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보수 집결’의 실체 내지 실상을 좀 우스운 느낌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보수 집결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과의 엉성하고 느슨하며 쓸데없이 결연한 연대감이라는 게 저의 감상입니다.

- 거듭 강조하지만, 영화는 이 감상을 유도하거나 제시하지 않습니다. 제가 멋대로 내린 결론일 뿐이죠. 여러분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네요. 다음 단락은 다소 덜 객관적인, 저만의 감상과 해석입니다.


- 변희재 옆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는 ‘성호스님’을 곁에 두고, BJ검풍을 곁에 두고, 덩치 좋고 말수 적은 골수 “일게이”를 자기 선거원으로 둡니다. 강의석은 변희재가 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변희재 옆에 비집고 앉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다르죠. 아무튼 주옥순이 있고, 다른 보수파 선거원들이 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와 변희재가 어떤 관계이고 무엇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이루는가를 지켜보다가, 2017년으로 점프해 코엑스 앞에 총집결한 탄핵 반대 시위대에서 환영받는 변희재가 나오는 걸 보는데, 느낌이 쎄하더랍니다.

- 예컨대 이런 요약이 가능한 겁니다. 변희재란 어떤 인물인가? 그 사람 자체는 산 좋아하고 술 담배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빨갱이를 죽여라~” 외치고 다니는 땡중을 굳이 선거차량 자기 옆 자리에 태우고는 그걸 말리는 양 아주 의미 불명한 웃음만을 짓는 사람이다. 아니면, 지하철역 출구 앞에 아침부터 나가서 인사하며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1인 시위자에게까지도 명함을 돌리기는 하는데, 그런가 하면 그의 선거원과 1인 시위자가 ‘빨갱이’ 운운으로 시비가 붙을 때는 자기 선거원의 어깨를 감싸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 허공을 보며 아주 애매한 웃음을 애써 지어 보이는 사람인 것 또한 분명하다.

- 이 기분 나쁠 정도로 일관되고 모순된, 전혀 ‘논객 변희재’답지 않은, 분명치 않고 웃어넘기는 듯한 웃음. 어쩌면 바로 이 불분명함이야말로 (전혀 분명한 ‘애국’이 아니었던) “애국보수”를 집결시킨 무엇이 아니었나 합니다. SNS에 남긴 ‘불명확하다(uncertain)’라는 감상은 먼저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 잠시 한국정치 얘기를 좀 할까요. 이른바 “세월호 정국” 이후 보수 특히 수구 진영은 사회적 도의라는 것에 좀 많이 질려 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자유시장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고 싶은 분들에게 “진실을 인양”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듯한 그 분위기란 사실 거북하고 불쾌하며 (굳이 따지자면) 이중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었거든요. 사회의 쓰레기통인 일간베스트가 총대를 메고 그 거부감을 수면에 띄워 주자, 비로소 수구 보수는, 사실은, 이 총체적이고 묵시적인 거부감을 바탕으로 하여 느슨하게 집결하게 됩니다.

- 이 ‘싫음’, 이 (“빨갱이“를 향한) 혐오 정서에 공감하기만 하면 무조건 애국 보수였던 시절이었기에 이때는 다들 ‘애국진영’의 깃발 아래 헤쳐모여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꽤 적당하고 엉성하며 사실은 꽤 위태로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결사체였고요. 오직 강의석만이 변희재라는 인물 그 자체 때문에 그의 옆에 있었고, 한참 뒤에야 그의 인터넷 방송을 보게 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진정으로 궁금해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강의석 같은 것이 ‘변후보님’ 옆에 있느냐고.

- 그래서인지 그동안 그는 시종일관 진심이 담기지는 않은 듯한 웃음을 웃습니다. 그저 뭔가를 무마하려는 듯, 어떤 상황을 대강 퉁치려는 듯, 누군가와 그저 좋게 좋게 가려는 듯. 혹시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자기가 속한 우파의 당시의 연대는 반드시 그렇게 좋게 좋게 무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본질적으로 당시 우파가 가지고 있었던 연대감의 근거란 ‘반감’이었음을. 그나마 그 반감이란 게 실은 인륜에 대한 ‘과도한’ 요구에 대한 반감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전면에 내놔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일단은 애국을 한다는 것으로 해야지, 아무리 “빨갱이”가 미워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하거나 노골적으로 지지해선 안 된다는 것을.

- 모르는 일이죠. 여기서부터는 영 생각이 꼬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아무튼 돌아와서 정리를 하자면, 영화는 이렇게 철저히 주변부를 관찰(하게 )함으로써 당시 “수구꼴통”들이 어떤 느낌으로 일하고 생각하고 뭉쳤나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냥 단지 희귀 푸티지로서도 가치가 있는 장면들이 있어요. 예컨대 성호스님과 같은 선거사무소 직원들이 “길에서 욕 좀 하지 마시라” “내가 언제 몇 시에 욕을 했다는 거여” 삿대질하고 싸우는 장면은, 너무 짧아서 문제지, 순수한 싸움 구경으로서 볼 만합니다.

- 그리하여 바야흐로 영화는 다급하게 줄거리 아닌 줄거리를 매듭짓고 끝을 냅니다. 다니지도 않는 교회에 들어가 ‘차별금지법 입안반대 서명’에 사인하고 선거 운동을 하던 변희재는 527표를 받고 낙선하고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자위를 하고, 아니나 다를까 2017년의 탄핵 정국이 되어서는 태극기 인파 속에서 끊임없이 지지자들의 인사를 받는 인사가 됩니다. “대통령이 불법한 게 없다고.” 그의 발언과 표정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여전한 가운데 영화상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강의석에게 초대받아 가는 곳은… “차별금지”를 외치는 영화의 상영회였다고 합니다~ 변희재는 데꿀멍 상태로 영화를 다 봐야만 했다고 하네요,, 띠용~

- 네 이게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최근의 한국 다큐멘터리 시장의 흐름과 전혀 상관 없이 제 갈길 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지식하달까 고루할 정도로 기본적인 그런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되어 나왔더라고요. 다 보고 나서 딱 어떤 감정이 느껴지면 되는 다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다 보고 나서 어떤 감상도 들지 않거나, 본 사람이 알아서 감상을 종합해 의견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기록영화.

- 이러한 사실 그대로서의 장면들은 어떤 진실이나 서사적 종합을 분명히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희재란 누구인가, 그를 호명하는 애국청년이라는 지시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철저히 관객에게 맡겨지죠. 저의 요약감상평에서 쓴 단어 ‘불명확함’은 두 번째로 바로 이 점을 짚고자 한 것입니다.

- 여기서는 이게 문제가 되겠죠. 이 불명확함은 유효하였는가? 그러니까, 예컨대 변희재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그 규정을 뒷받침하는 변희재를 골라 보여주고, 자막과 내레이션과 악마적 편집을 총동원해 그 규정을 극대화하는 명확함을 채택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는가? 일단 영화는 자신 있게 YES라고 답하는 모양입니다. 감독도 관객과의 질답에서 말합니다. “더 찍을 수도 있었는데, 사실 패턴이 비슷하더라고요. 이 정도만으로도 변희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건 충분했던 것 같았습니다.”

- 저요? 저도 유효하긴 했다고 생각합니다.


- 변희재를 데리고 인간극장을 찍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일단 관련 KBS 내부 인사 전면 숙청을 요구하는 내외부 목소리가 터져나오겠죠. 뭐 그걸로 얘기는 진작에 끝입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기획이 통과되면, 무엇이 방송되어 나갈까요? 어쨌든 ‘인간극장’이니, “크 변듣보도 사실 알고보면 인간이야~” 같은, 어쩔 수 없이 다소 옹호적이고 친화적이며 거리감이 무너지는 톤 앤 매너로 나오게 되겠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변희재 본인은 이 영화를 보자) 되게 싫어하더라고요.”

- 거기에는 어떤 관객이 질문 중에 표현한 바 ‘냉소적 시선’의 역할이 큽니다. 강의석이 변희재와 함께 그야말로 사막에서 정글에서 때리고 뒹굴며 울고 웃는 동안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정 거리감은 유지가 됩니다. 감독도 마지못해 그 존재를 수긍한 그 냉소적 시선과 냉정한 거리감이, 그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절묘한 온도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합니다. 뭐랄까 강의석이니까 가능했지 싶습니다. 막말로, 그도 변희재도 ‘상돌아이’로 불리기만 하지 남들이 정작 잘 몰라주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요.

- 한국 사람들에게 이 온도와 거리감과 시선은 낯설기 짝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간, 여러 경제적 사정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좋은 거냐 나쁜 거냐를 정해 놓고 봐야 했고, 누구를 소개받더라도 우리 편이냐, 얼마나 잘 대해 줘야 하느냐를 따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 판단을 접어두는, 사전 가치 판단 세팅이 되어 있지 않은 정보들은 ‘뭐 어쩌라는 거냐’로 일관되게 매도되고 배제되거나, ‘이것도 그쪽 수작인가?’ 같은 엄한 혐의의 검증을 굳이 받아야 했지요.

- 이 영화 역시 사람들의 섣부른 가치 판단을 거부한 결과, 본의 아니게 부당한 가치판단을 역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저쪽에서는 변희재 돌려까는 영화다, 강의석 같은 좌빨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있고 이쪽에서는 꼴도 보기 싫다, 보나마나 빨아주는 거겠지, 하고 있고요. “영화관에 전화를 했는데 (한번은) 제목만 듣고도 거절을 하는 거에요. 극장주님이 변희재 이름만 들어도 싫어하신다고.” 그래서 이 영화는 공정한 비평이나 대중의 감상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말이죠.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청각적으로는 상당히 괴롭고 시각적으로는 희귀한 볼거리들이 평타를 쳤으며 정신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대학 수업 기말고사 문제를 푸는 기분이었습니다. 현대 한국 다큐멘터리만 딥다 다루는 전공 과정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 커리큘럼에 들어가야 합니다. 추앙될 필요는 없고, 비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ㅅㅂ 아무리 그래도 넷플릭스 정도는 배급하게 해 줘도 될 것을 진짜 너무들 한다 싶습니다.

- 강의석 차기작이 궁금해지네요. 노네임 필름 자체는 상당히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라서 유튜브 채널을 구독해둘 만합니다. 뭐 일단은 출산과 육아를 하고 나서 식당이 안정궤도에 접어들면 뭐든 알아서 생각을 하겠죠?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변희재는 오늘도 자기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내 알 바인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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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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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주 레진

2018. 1. 31. 05:50

한희성 씨가 레진코믹스 불공정계약 폭로를 진행한 작가들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인신을 좀 비방해볼 양으로 써본다.

포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끌어안을 포[각주:1] 에 가진놈 주 자를 써서 포주라고 하고, 창녀를 고용해서 그들과 같이 지내며 그 영업을 돌봐주고 수익을 얻어먹는 자를 부르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레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본질적으로 포주(抱主)다. 웹툰 작가님들이 기생이란 얘기가 절대 아니라, 레진이 자기가 취급하는 대상들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기생 창녀로 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애초에 그 소위 야동 블로거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걸 직함이라고 부르자면) 그 직함이란 게 무엇인가? 조직적으로 제작 생산된 음란물을 제 블로그에 들여와 늘어놓고 짐짓 진지한 체 오시오 보시오 사시오 하면서 방문자와 인기를 벌고 공개적으로 낄낄거리는 것이 아닌가? 비디오 속에서 필사적으로 제 몸 파는 “창녀”들이 있고, 그걸 영상으로 찍고 유통을 하며 파는 포주들이 있었다면, 레진은 그 포주들이 던져주는 각종 ‘품번’들을 주워와 주섬주섬 되파는, 그야말로 리셀러 포주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던 자가 뜬금없이 웹툰 사업을 한다기에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처음에는 그저 좋게 생각했다. 성인용 만화를 파는 게 수익의 본질인가보다, 그놈 참 아닌 체하면서 꾸준히도 밝히는 놈일세, 하고 말았다. 그런데 폭로되는 내용들을 보면 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고 ‘이게 대체 무슨 사고방식으로 나오는 짓인가…?’ 하는 의문만이 커졌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연재처와 편집부를 자처할 셈이면, 막말로 작가와 척을 지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소위 ‘지각비’, “모든 작품을 프로모션해야 한다면 우린 프로모션 안 하겠다”, 유난히 레바를 밀어주며 재밌는 웹툰 사이트를 강조하려는 알리바이 공작, 말도 안 되는 수익 배분률, 편집부라고 믿을 수가 없는 방조와 방치와 무관심, 각종 관계자들의 성추행이며 비방 발언과 사생활 감시 등등 별별 폭로가 다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겨우 한 가지 아이디어로 정리가 된다. “레진이 작가들을 작가가 아니라 이를테면 ‘나가요 아가씨’ 따위로 보고 있는 거라면?”

레진의 없다시피한 작가관리와 양아치 같은 영업짓거리를, 포주와 성노동자의 구도에 집어넣고 도식화해 보면 썩 말이 된다. “쉽고 간단한 일 돈많이 벌고싶은 분들 환영 숙식제공 정부공인기업” 따위 아주 그럴듯한 문구로 순진한 사람들 홀려서, 소속을 시키고, 야한 것 야한 짓을 원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쉴새없이 내보내 고객 만족을 시키고 코인을 받아낸다. 그러고는, 당신 거두어서 일감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라며 그 수입을 7대 3으로 갈라 그 7을 얻어먹고 산다. 물론 이게 작가님들에게도 모욕적인 수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시라. 정말로, 한희성의 사고방식이 이것과 아주 다를까?

당신이 그의 밑에 있는 작가인 한, 애초에 그는 당신의 “작업”과 근무환경에 아무 관심이 없다. 한희성 입장에서는 당신이 고객들에게 약속한 날짜에 약속한 장소로 나가서 코인을 환전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나간 자리에서 휴재공지가 웬말이냐고 욕지거리를 듣든, 최고의 작가님이라고 상찬받으며 그 작업을 도촬당해 불법사이트에 뿌려지든 그건 한희성 입장에서는 근본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몸이 힘들어서 도저히 못 나가겠다는 당신의 읍소에도 그가 꿈쩍할 이유는 없다. 알아서 나아서 계속하든지 혼자 망가지든지 할 일이다. 왜? 꼭 당신이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이 일 하겠다는 다른 사람들 많아요!”

이게 그냥 일개 ‘일못’의 덜렁이 짓거리라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텐데, 폭로되는 정황들이 소름이 돋는다. 503정부 시절 그 누구도 우수하지 말았어야 할 창조경제의 우수 사례로 자신을 적극 노출시킨 일이며 최근에 레진코믹스가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돈을 발랐다는 폭로에 와서는, 레진의 포주짓거리는 거의 확신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양아치라면, 내 사업의 본질이 이쁜 여자애들 내다팔아서 화대 받아먹고 사는 것이라면 나로서도 박근혜 같은 어리숙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잽싸게 감투를 사둘 것이다. 그리고 그 쪽팔림을 감추기 위해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필사적으로 술을 살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 같은데, 한희성처럼 속 다 보이는 기둥서방이야 제깐에 생존 전략이랍시고 달리 무슨 약을 더 쳤겠는가?

레진코믹스 사태에 우리가 분노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 사태는 단지 한 기업이 상도덕을 어겼다거나 원고 단가, 수익 배분률, 편집자 의무이행 등의 계약상 세부 쟁점이 있다거나 하는 데서 얘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사안의 본질은 윤리에 있고 한희성이라는 대표자의 의식 그 자체에 있다. 결코 그렇게 취급되지 말아야 할 웹툰이라는 업태와 그 노동자들을, 확신하건대, 한희성은 무슨 성매매업소 취급하듯 취급한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노동윤리의 유린이고, 완전한 인간 배반이며, 순전한 사악이고 용납할 수 없는 추잡이다. 레진코믹스 사태를 정말 해결하려면 법제화를 통한 작가들의 노동환경 개선이 최고 급선무지만, 그 다음에는 정말로 레진 한희성의 모가지와 좆을 잘라야 한다.

오랫동안 꾸준히 포주 짓거리로 제 벌 돈 다 벌며 수많은 사람들 눈에 피눈물 맺히운 이 후릴 놈의 패륜아 새끼를 포함해 이후 그 누구도, 콘텐츠 바닥에서 이런 양아치 짓거리를 꿈도 못 꾸게 해 줘야만 비로소 이 얘기는 끝이 난다. 레진씨, 불만이 있으시거든 나도 좀 고소하오. 그러면 나는 순순히 벌금형을 받는 대신 법정에서 당신을 이보다 더 공개적으로 모욕줄 생각이다. 아니면 이제라도 제발 작가님들에 대한 무례를 멈추고 모든 책임을 지고 고자가 되시오. 그리고 그 허섭스레기 같은 앞잡이 레바는 당장 내치든지 읭읭이 따위 날로 처먹는 3류 개그 만화로 당신 사업의 양아치스러움을 성실히 덮는 짓거리를 속히 중단시켜 주시라.


PS. 내친김에 한 명만 더 저격하고 가자. 권정혁 씨? 당신이 구루는 무슨 얼어죽을 구루여? 포주 새끼 밑에서 시키는 대로 작가님들 실어나르는 봉고차 구루마 운전수지. 먹을 나이 다 먹은 남자로서의 부끄러움과 개발자로서의 최소한의 의협심이 아직 있다면 제발 그 한희성의 좆을 가위로 자르고 레진 깃헙을 sudo로 지우고 거기서 나와 주시오. 그것이 야동블로거의 후장과 박근혜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그 과거를 손 터는 유일한 길이다.

PS2. 레진에서 유일하게 챙겨보던 앙영 작가님이 정말 절묘한 시점에 탈레진에 성공하신 것이 새삼 생각나면서 다행스럽달까 왠지 뒷맛이 씁쓸하달까 그렇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1. 물론 여기서 안는다는 것은 성교한다는 의미의 완곡어이다. 좀더 어려운 한자일 줄 알았는데 이것이었구나 하는 허탈감이 상당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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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잉앤츠의 원래 이름은 '인조이뜰'이었다. 한국예수전도단 대학사역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대상 예수제자훈련학교를 계기로 만나 알게 된 4명이 시작할 땐 완전히 재미 내지 취미로, 1집에서는 제도권 음악을 한다는 느낌으로 노래하고 연주를 하더니 2집에서는 돌연 끝을 내버린 것처럼 돼 버렸다.

한국예수전도단 서강대학교지부 소속이었던 사람으로서, 동아리방에 놓여 있던 인조이뜰 음반을 보며 싱잉앤츠 앨범을 때마다 구입하며 언제 한 번 리뷰를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문득 멤버 중 한 분인 장보영님의 짧은글을 읽고, 조금 거칠지만 이 아티스트 전체를 둘러보는 리뷰를 조금 써본다.


싱잉앤츠 - 뜰로 나아오라내가 처음 본 이 음반의 실물은 종이로 만든 케이스에 CD가 담겨 비닐로 밀봉돼 있었다.

싱잉앤츠 0집 내지 EP라 할 수 있는 <뜰로 나아오라>는, 아직까지는 포크와 CCM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며, 청년만이 구가할 수 있는 풋풋함과 아찔한 갑갑함을 무슨 4월 어느 날 아침 11시의 햇빛처럼 막 쏟아낸다(그래서 이 앨범의 아트워크도 이런 사진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그냥 대충 멤버끼리 가위바위보로 술래 뽑아서 붙인 것이었겠지만). 트랙리스트를 실제로 들어보아도,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아직은 세상을 낙관해도 좋은 시기의 청년 정서 바로 그것이 이 음반 전체를 뚫고 지나간다.

가장 유명한 곡은 <전도사 마누라는 다 예쁘다네>라는 네타송이고 내가 가장 손꼽는 곡인 <그럴 수가 없네>는 가장 덜 유명하지만, 두 곡은 완전히 대척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주 구체적으로는) 교회 사역 봉사자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 오묘한 감성의 외곽지역에서 작으나마 독보적으로 분명하다. 말하자면 이 음반의 선율과 가사와 기분은, 이 음반을 가장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 딱 그러한 정도의 신선도와 (미)성숙도를 과시한다. 이를테면 "우리교회 청년들"에게 권하면 그대로 '입덕'하게 될 음반인 것이다.

싱잉앤츠 - 1집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받았네서강와웸 홈커밍데이 때 이민형 선배님께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가져가는 걸 까먹어서 기약 없이 대기중임.

농사부터 향초까지 별별 종류의 생산 프로젝트가 느슨하게 연합해 있던 '뜰' 브랜드에서 "싱잉앤츠"라는 음악팀이 확실하게 분리된 이후 정규 1집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받았네>가 나온다. 이 음반은 말하자면 마냥 푸릇푸릇하기만 했던 그 20대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이 돌이켜 보니 뭐였던가를 최대한 구체적인 언어와 겸손한 사운드로 정리해 언제든 꺼내 재현할 수 있게 만든 앨범이고, 그래서 대중적으로 (개중 가장) 흥행했다.

<우주의 먼지>라는 곡은 방송 BGM으로도 나가고 방탄소년단의 소개로도 유명해졌으나, 그러지 않았더라도 이 음반은 소문이 날 여지가 충분했다. 곡들의 포텐셜과 독자적 정서가 오묘하고도 확실한 까닭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의 베스트 픽이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동기>라는 곡이라든가[각주:1], <초록이 되자> 같은 곡들은 이미 미친 듯한 창의력과 서정성으로 "이게 싱잉앤츠다"라는 공리를 규정한다. 나머지 후반부 곡들이 얼핏 듣기에 다 '홍대 감성'으로 비슷하다는 혐의는, 바로 그 음악적 포지셔닝의 보석을 받고 풀려난다.

싱잉앤츠 2집 - 파국열차호주에 살면서 싱잉앤츠 블로그에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해서 한국 집으로 배송받았다.

3년이라는 공백 끝에 설마 싶던 정규 2집이 나온다. 두 음반 사이에는 별게 없었다. 그저 박근혜 정권과 각 멤버의 결혼, 출산, 각자도생만이 있었다. 이 음반이 노골적으로 파국, 죽음, "I'm a single man"을 운운하는 것은 바로 그 탓이다. 아직 청년다움이라는 스펙트럼의 어딘가에서 있고 싶은 그들을 세상은 영 도와주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행보는 끝내 '어차피 우리 다 죽잖아?'라는 조소도 무엇도 아닌 현실에서 멈춘다. 음반 표지 디자인과 <우주의 먼지 개미팝 Remix>가 1집을, 명백한 타이틀곡 <파국열차>의 편곡이 인조이뜰의 감성을 필사적으로 복각하려 하는 것은, 그런 맥락으로 살펴볼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음반은 음악 작업이라기보다, 차라리 그들이 지나온 세월 전반에 대한 코멘터리에 더 가깝다. 가사들은 개인사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더 늘었고, 센티멘트는 20대가 결코 공감하지 못할 30대의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심지어 대중성과도 거리를 두어서, 조금 흥얼거려 볼작시면 느닷없이 일렉트로닉 편곡(<답장>)이며 B파트 등으로의 전환(<악기를 받았네>)을 걸어버림으로써 "이렇게 부르고/연주하고 끝을 내겠다"라는 의지를 공고히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음반의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로서의 끝장, '파국'이다. 단 1개 트랙에서 "이번 정차역은 파국" 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귀여운 눈속임이라 함이 정확하다.

2집 발매기념 캘리그래피 대회 우리는 언젠가 캘리하겠지요 응모장면이 맥락에서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이 발상을 하고 응모작을 찔 때부터 반쯤은 벌써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재밌게 불러서 그렇지, 사실 이 파국은 진짜 문자 그대로의 파국을 말하는 거 아닐까? 싱잉앤츠가 잠깐이나마 하필 '단편선과 선원들'과의 교류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며 엄연한 디스코그래피적 사건이고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 시점에서 남는 물음은 이것이다. 이 파국, 종언, 종료는 실은 싱잉앤츠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였는데 이번에 결언된 것에 불과한가, 아니면 지금까지 전개했던 것처럼 우연하게 디스코그래피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쉽게 말하면, 예컨대 싱잉앤츠 멤버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죽을 때 죽더라도 좀더 놀다 죽자" 같은 긍정적 결기를 갖는다면 3집은 마치 2집 위에 1집을 덮어써놓은 듯한 모양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표현이나 발상을 자기표절 내지 재활용하지만 않는다면 ― 김명재님이 계신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 그 역시 닳아빠진 '홍대포크' 신에서 이번에도 존재감을 뽐내며 좀더 계속해나갈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전자다. 내가 너무 낙관하는 것일까? 싱잉앤츠는 여태껏 "맘에도 없는 여행"을 하며 "원하고 바랬던 … 이런 노랠 불러도 좋단 허락"을 구하다가 기어코 "뜨거웠던 지난 아픈 기억 … 모두 다 바람에 흘려 보"내고 만 것일까? 그걸 나와 숱한 청취자들만 몰랐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이다. 자기들은 일개미지만, 그래도 노래는 하면서 "조용히 재밌게 …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살고 싶다던 싱잉앤츠가 이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다면, 그런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힘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3집을, 아니면 디지털 싱글의 연속을, 하다못해 기성곡의 편곡 놀이라도 계속해 주기를 무책임하게 바라게 되는 이유다. 뭘 하든 식상하거나 전형적이지는 않았던, 복잡하고 밝았던 청년의 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싱잉앤츠가, 이젠 정말로 노래할 거리가 다 떨어진 건지, 아니면 그래도 좀더 살아보니 뭐가 더 있더랬었는지, 그걸 한 두어 해쯤 뒤에 좀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1. 이 블로그에서 영역 가사를 붙여 소개한 적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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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히브리어라는 언어 자체에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분들, 히브리 문화 연구자 여러분과 학계의 성과를, 최대한의 성의로서 존중하고 있다. 이 글은 누구와도 면전에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여 작성해 공개하는 서면상의 사적 입장 표명이다.


1-1. 히브리어를 공부하면 유익이 있다는 충고나 제언들을 아주 가끔씩 접한다. 온라인 광고 배너에서, “[펌]좋은묵상글” 같은 출처 불명의 좋은 말들에서, 주변 신앙인들의 지나가는 말로, SNS 영상으로, 출판사 홍보로.

1-2. 그럴까?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정확히는, 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 배우는 것인데 뭐 어떤가? 심지어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언어를 직접 배워서, 그 참뜻을 새기며 읽을 수 있게 된다는데.

1-3. 조금 더 알아보고 조금 냉정해져서 조금 위에서 둘러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정확히는, 해로울 여지가 있다. 내가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현재 고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1-4. 핵심적인 의문은, 왜 한국인이 히브리어를, 특히 고전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느냐는 점이며, 그게 과연 특정 외국어에 의한 효용을 추구하는 일인지, 과연 그 효용이 있기는 한지, 다른 부정적 부작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하는 점들에 있어서 그렇다.


2-1. 먼저, 외국어 학습 자체의 차원에서. “유익이 있”다고 선전되는, 그래서 면학이 권고되는 대상으로서의 히브리어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압도적인 대다수의 경우 고전 히브리어다.

2-2. 히브리어는 엄밀히 나누어서 옛날 성서 시대에나 사용되던 고대의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의 2가지로 구분되고, 오늘날 실존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 히브리어를 읽고 쓴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심지어 이런 기초적 객관 사실관계조차 모르고 히브리어를 덥석 권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3. 이것은 언어 학습 동기 부여의 차원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이두향찰을 공부하는 꼴인데, 이런 이치의 학습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권고하는 속뜻이란 무엇인가? 실상은 적나라하다. “성경 작성에 사용된 문자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두와 향찰을 공부하는 이유가 거지반 삼국 시대의 글을 읽기 위함에 다름아니듯이.

2-4.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라는 것은, 오늘날 그 외국어를 쓰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주체들과 소통하겠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는 지금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 언어는 그것을 배우는 누군가에 의해 확산 및 확장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 작용 하에 전수되리라고 기대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 공부란 본디 히브리 문화권을 이해하고 히브리어 구사자들과 소통하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편이 건전하다 할 것이다.

2-5. 2-3과 2-4를 종합하여, 나에게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게, 이러한 사회적 상호 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확산될 뿐인 일련의 지식/정보/논리 체계에 지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2-3에서 제기한 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것의 실상은 구약성서라는 문서를 ‘나름의 기호 체계를 도입해 해석’한다는 독립적이고 단일한 목적을 가질 뿐, 지금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며 그 세계에 대해서는 그 흥미를 일절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2-6. 2-5에서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증명이 있다. 히브리어를 공부한다는, 혹은 공부하라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들 중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어 구사자, 셈족 문화 등에까지 관심을 확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성지순례”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 수준으로, 이마저도 해당 문화에 대한 교류의 차원이 아니라, 본인들이 주고받은 학술적 내용의 지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견학의 일환인 경우가 태반이다.

2-7. 이것은 내게 일반적인 외국어 공부 행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주 특수한 학술적 교습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3-1. 이 학술 교습의 논리는 극히 간명하다. 구약성서는 절대 다수가 고전 히브리어로 정리되어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본뜻을 읽고 싶다면 고전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 없다. 이 교습을 권면하는 일부가 심지어 “기득권이 어려운 히브리어에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온 역사”니 “누구나 공평하게 배워서 해석” 운운을 내세우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3-2.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서의 본뜻이란 문자에의 착념이며 그 완벽한 해독 따위에서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필자와 제1독자를 포함한 집필 시점의 총체적 맥락을 감안하여 경건하고 성심 있는 자세로 그 문의(文義)를 탐구할 때 드러난다. 이는 그 이치가 사실상 대다수 학자가 고전(古典)을 탐구할 때의 일과 진배없다.

3-3. 글뜻을 읽기 위해 글[文字言語] 자체를 배우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소위 “글로 인하여 글뜻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라든가 “글이야말로 글뜻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글을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 글뜻을 다 알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선동과 호도(糊塗)에 다름아니다.

3-4. 3-3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집필 과정에서 그 요점보다 그 요점을 기술하기 위해 동원한 문자언어의 엄밀성에 더 치중한 일이 없다. 이는 항간의 이치에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둘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전승 과정에서 글과 글뜻의 이격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전승된 일이 없다. 그럴 바에는, 글을 베껴서 전승해 보아야 오해만 더 키울 것이 분명하므로 글 자체를 없애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어떤 지혜 전승들이 암송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데는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한다.)

3-5. 3-4에 의하여 3-3을 강화하면 다음과 같게 된다. 즉, 그것이 고전인 한은, 그 고전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 고전을 작성한 고대 언어를 모두가 정말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절실한 까닭이란 없다. 필요한 것은 고전에 통달한 현대 전문 학자들의 적절하고 체계화된 번역과 주해와 교훈일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그 누구도 결코 완전히는 알 수 없는 옛 성현들의 당대 말씨를 샅샅이 새기는 따위의 언어학적 재간일 리는 없다.

3-6. 3-5에 덧붙이자면, 히브리어 강습자들은 이를테면 히브리어에서 “눈[目]”이 무엇을 뜻하니, “머리”의 어원과 여러 뜻이 무엇이니, 첫번째 두번째 알파벳이 어떤 어감을 갖느니 따위를 대단히 진지하게 강의한다고 한다. 구약성서와 같이 방대하고 장황한 고전을 이런 수작으로 읽는데, 그 결말이 “창세기 1장 2절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이 숨겨져 계시” 운운 기상천외하고 자기중심적인 과잉해석으로 귀착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는지.

3-6. 구약성서를 고전으로 간주하는 한, 3-2와 3-5에 의하여, 3-1에서 소개한 (고전) 히브리어 강습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속된말로 짧게 요약하면, 그렇게까지 빡세게 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 어느 부분도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4-1. 구약성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고전 히브리어 강습을 두둔하는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바 또 하나의 논거란, 아무튼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정도라면 성서를 탐독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데는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4-2. 개신교 내에는 세대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대체로 신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예언과 계시들을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보다는 해독의 대상으로서의 명제로써 간주하고, 그렇게 성경을 체계화했을 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세대(들)” 개념을 현실상의 타임라인에 대입하려 하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지 창조로부터 인류 역사 최종 종료 시점까지의 모든 기간을 대략 7세대로 구분한다고 하며, 이 중 후반부 세대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서 ‘유태인(혈통 위주의 유대인 사회)의 집단 회심과 (지리적 의미에서 이스라엘로의) 회귀’를 중요하게 여긴다.

4-3. 만약 당신이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신구약 성경은 그 요점이 더 중요하며, 예언과 계시를 모든 실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묵시라고 인정하고, 어떤 세대에서 다른 어떤 세대로 역사가 이행하는 일은 없으며, 또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민족의 지구상 특정 위치로의 귀환 따위가 정말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유태인에게 그다지 각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유태인, 즉 히브리 문화권과 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4. 개신교 내에는 또한 신사도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각종 이적과 기사가, 대체로는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 문자적으로,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은 특히 방언과 예언이라는 두 가지의 특별한 신적 능력(“은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간구하는데, 여기서의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지구상 특정 언어문화권에서 유효하게 통용 가능한 실제 외국어를 의미한다.

4-5. 만약 당신이 신사도주의자가 아니라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사도행전상의 이적과 기사는 교회 공동체 건설 최초 단계에서 특수하게 발생한 것이며, 오늘날의 일상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방언이며 예언 등의 은사에 관심을 가질 각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방언과 예언, 특히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의 방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6. 4-3과 4-5를 염두에 두고 4-1의 논거에서 말하는 바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재고하라. 이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관점인가? 그것은 모든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단지 신학적 난제를 규명하는 차원의 “새로운” 관점인가, 아니면 교회 전체가 동의하기는 어려운 특정 입장들의 관심에 복무하여 그 입장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사되고 편집된 일련의 이해 체계로서의 관점일 가능성이 있는가?

4-7. 4-6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이다. 요컨대 히브리어를 배운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회심이나 성경 언어 방언 등에 대한 엄한 관심과 상관 관계가 없기 어렵다는 말이다.


5-1. 마지막으로 내가 믿는 바를 조금 고백하고 끝맺고자 한다. 이는 히브리어 공부를 권하는 이들의 성심을 야멸차게 모독하지 않기 위함이다.

5-2. 만일 하나님이 고전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그는 고전 히브리어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로도, 한국말로도, 에스페란토어로도, 그 어떤 의미 기호 전달 체계로도 말씀하실 수 있다. 애초에 신이신 하나님께서 동물인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가해하며 초월적인 사건인 관계로, 그 사건이 일어나는 한, 그때의 수단이며 매체가 무엇이냐 따위의 문제는 철저히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이 되는 까닭이다.

5-3. 만일 구약성서가 고전 히브리어로 전승되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신적 질서와 계획 안에서 완전히 필연적으로 혹은 완전히 우연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비유컨대, 이는 인간이 어떤 프로그램을 구현함에 있어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는가와 그 이치가 꼭 같다고 할 수 있다.

5-4. 하나님이 성서를 주셨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읽으라고 주셨을 턱은 없는 까닭에, 하나님은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각자가 이해해야 할 수준까지 성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일체의 여건과 방안을 이미 강구하여 주셨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라도.

5-5. 만약 당신이 5-2, 5-3, 5-4에 찬동할 수 있다면, 나뿐 아니라 당신 역시, 구약성서의 은혜와 신비를 내 삶에서 깨달아 알기 위해 특별히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는지의 근심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999-1. 이 글은 사실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지만, 김우현 PD와 그 주변 “동역자”들의 성지순례니 원어성경이니 히브리어 공부니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누구든지 또한 좀더 많이들 찾아 읽으시길 바라는 바다.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정말이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심지어 일상에서 쓸모도 거의 없다. 차라리 수능 제2외국어에 등재돼 있는 아랍어 같은 걸 배우는 것이, 소위 이스라엘 회복 선교라는 것에는 더 도움이 된다.
999-2. "'니크다'라는 이름의 모음 기호는 존재하고 있으나 이 기호는 일반적인 경우 생략되며, 외래어 표기나 성서 등의 중요한 글에서 매우 정확히 표기할 필요가 있는 경우나, 히브리어 초급 교과서에서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경우 정도에나 쓰인다."
999-3. 근거 없는 사설이라서 본문에는 안 적었지만, 내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오늘날 히브리어란 사실상 WASP-이스라엘 군사패권의 지지자들을 집결하는 시오니즘의 국제언어로 복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비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칭 남은 자들이라는 비주류 유사신학 강도사들이 유튜브 영상 찍을 때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군이 저 무시무시한 대테러 대량 살상 무기들 이름 지을 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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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이 글은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기술 공부 블로그 포스팅입니다. 이런거 공유하면 확실히 낚여줄 내주변 지인이 최소 1명 있긴 한데... 그에게는 이글이 대윾잼+대환장 띠용글로 보일것이지만 알고도 굳이 씁니다. 목표는 1년뒤 나역시 이걸 보며 대윾잼+대환장을 느끼는것


0. 서론

머 아무튼 2017년도 다 저물어가는 마당에 호주 워홀 마치고 돌아와서 취직은 해야겠고 마땅히 벌어놓은 것이라고는 각종 기획의 잔꾀와 워드프레스/코드이그나이터[각주:1]로 좀 굴러본 것뿐인지라… 최소한의 최신 기술과 개념을 익혀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약간의 절박함이 생겨, 귀국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과감하게 세팅하고 시작한 것이 yuptogun.com 프로젝트.

지금까지 걍 구상만 했던 각종 웹앱들을 *.yuptogun.com 형태의 서브도메인 아래에서 각기 구현해서 돌리고, 개중 잘 팔리는 게 생기면 별도 도메인으로 독립시켜서 운영하고, 그러면서 호스팅업체 서버 스택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기술&신개념을 막 도입해 써보는 운동장으로 쓸 계획.[각주:2]


1. 스택: shared LAMP stack hosting + Codeigniter + uncompiled (in-browser) React

A. 서버 스펙. 일단 주어진 서버 환경을 서술하자면... 전형적인 한국 PHP 웹호스팅 스택. 리눅스에 아파치와 MySQL을 깔고 PHP를 상시 켜놓으며 가상 할당 공간에 실행&전송할 파일을 올리는 방식이다. 월 5천 원을 더 내면 SSH 접속을 시켜준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고 있지 않아서 그야말로 20세기 FTP 홈페이지 스타일. 쉘접속이고 서버설정이고 그딴거ㅇ벗다.

AWS도 있고 다른 옵션도 많은데 굳이 이걸 선택한 이유는 딱 두가지.

  • 비용: 닷홈의 혜자급 상품으로, 도메인값만 닷홈에 내면 디스크 1G와 트래픽 무제한 이용이 무료로 가능하다. 써보다가 트래픽이 증가하면 상위 상품으로 올릴수있음. (물론 하위 상품으로 다운그레이드는 안된다)
  • 시장 친숙성: 서비스 자체를 서비스하는 IT 기업을 제외하면 나의 '클라이언트'가 될 사람들은 보통 shared web hosting 환경에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각주:3] 따라서 임대형 쉐어 웹호스팅 환경이라는 (프로그래머에게는) 꽤 열악한 스택을 선택하기로 함.

B. 프레임워크. PHP라는 서버 언어가 주어진 상황에서 제일 최신 프레임웍을 써볼라치면 아무래도 라라벨이나 심포니 같은 걸 해야겠지? 아니면 좀 힙하게 Slim? 사실 호주에 있을 때 이것저것 건드려 봤는데 결국은 그간 해왔던 코드이그나이터를 골랐다.

  • 가볍다. PSL-7을 준수하는 프레임워크들은 FTP로 배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파일이 보통 많아야 말이지. 로컬에서 작업한 걸 통째로 zip으로 묶어 그걸 올리고 unzip을 (쉘로 하건 php코드로 하건) 실행하는 게 그나마 the best practice so far더라.[각주:4]
  • 버전 관리를 할 것이 없다. Ion Auth나 TCPDF 말고는 딱히 더 갖다 쓸 서드파티 라이브러리도 없고, 대부분의 요소들은 어차피 사용자단에서 돌아가야 하는 파일들인지라 그냥 CDN에서 퍼와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 Slim은 라우팅까지 성공했고 라라벨은 배치하는 것까지 성공했으나[각주:5] 지금은 백엔드 로직보다는 프론트엔드의 react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경험이 있는 Codeigniter를 채택. 보아하니 아직은 코드이그나이터가 php 실무 바닥에서는 현역인 듯도 하고.
  • 뭐 말이 Codeigniter지 가급적 API 생성기로만 사용하고, 각종 라이브러리나 유틸리티는 서버에서 돌아가는 게 효율적일 때(세션관리 등)만 쓸 예정. 애초에 서버란 JSON만 송수신해주면 되는거니까.

C. 뷰처리. 여기서부터 모험이 시작된다. views/template/react.php 파일을 만들고 여기에서 reactjs cdn이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파일 두 개와 babel cdn이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파일 하나를 불러오게 시켜놨다.

  • 사실 React 생태계가 추구하는 방식대로 하자면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Babel은 내가 짠 text/babel 스크립트 파일을 서버에서 미리 컴파일하는 데 쓰여야 하지, 브라우저에서 낑낑거리면서 실행할 물건이 아니다.
  • 그치만 뭐 일단은 콘솔에 인포 메시지 하나 뜨는 거랑 깜박임 문제[각주:6] 말고는 기능상 별 문제를 모르겠어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중.


2. 기본 흐름: CI는 json과 뷰파일 목록만 구성하고 나머지는 React가 한다

메인페이지를 만들면서 결정한 설계는 다음과 같음.

  1. 기본 라우팅에 따라 컨트롤러가 실행된다.
  2. 컨트롤러는 다음 세 가지를 주로 실행한다.
    • 로딩될 뷰파일을 결정한다.
    • 뷰파일에서 사용할 데이터를 만든다. SEO용 메타태그, 현재 로그인한 회원 정보 등
    • 뷰파일에서 json으로 출력할 배열을 만든다. 필요한 DB 테이블 쿼리 결과를 json_encode()로 뽑아 $this->data['table'] 형태로 넘긴다.
  3. 메인뷰는 다음 세 가지를 실행한다.
    • 컨트롤러가 넘긴 데이터를 가지고 html 마크업을 뿌린다. 메타태그, 로그인했을 경우와 아닐경우에 따른 html 마크업 등등
    • 컨트롤러에게서 물려받은 json을 스크립트 태그로 html 출력 맨끝에 뿌린다.
      <script>var theData = <?= $data; ?>;</script>
    • 그리고 assets들(React 라이브러리, 메인 js, 각종 CSS 등등)을 불러온다.
  4. 그러면 이제 뷰가 불러온 메인 js 파일은 브라우저 안에서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 메인뷰가 서버 응답으로서 돌려주는 DB 데이터 json을 props/state로 참조한다.
    • 이 props/state와 자기 안에서 const로 규정돼 있는 정적 정보들(e.g. 쿼리결과 없을시 뿌릴 문자열들 등)을 이용해, 엽토군이 정의한 대로 열심히 컴포넌트 클래스들을 렌더링한다.
장황하게 적었지만 코드를 보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해당 페이지의 응답결과는 예컨대 위쪽에 <script src="app.js">가 있고, 중간에 <div id="wrapper"></div> 같은 텅 빈 요소가 하나 있으며 그 밑으로 조금 내려가서 보면 아주 장황하게 긴 json을 data 변수에 할당한 script가 한두 개 있는 식이다. 그리고 app.js는 data.table.forEach((record) => {어쩌고저쩌고}) 형태의 라인을 가진다.
어떤 assets을 불러올 것인지를 뷰에서 결정할 것인가 컨트롤러에서 결정할 것인가는 지금은 좀 가닥 안잡혀서 일단 죄다 뷰에서 결정중. 아마 컨트롤러에 다 때려넣는게 더 말은 맞겠지(극단적으로 말해서 뷰파일은 그냥 div#app 하나만 덜렁 갖고있어도 될지도 모른다).


3. 깨달은 것들: React

React를 막무가내로 공식문서 봐가면서 공부하고 적용해 현재까지 깨달은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만약 당신이 MVC 구조에 익숙하고, 새로운 라이브러리의 문법을 배우는 데 큰 문제가 없으며, 지금 당장은 리액트를 가지고 화면에 DB자료를 뿌리는 정도로 충분하다면, 다른 것보다 Thinking in React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고 가장 빠르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거의 대부분 나와 있으며, props와 state 개념을 실전으로 바로 알 수 있다. 장황하게 createClass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설명도 생략돼 있어, 필요한 기초에 집중할 수 있다.
  • state는 최상위 컴포넌트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글로 읽을 땐 영 뭔말인지 몰랐는데 실전을 해 보니까 간신히 이해가 되더라.
    예컨대 이런 상황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wrapper가 #sidebar와 #content의 2개 요소를 가지고 있고, #sidebar 밑의 a[data-tab=x]를 누르면 #content 밑의 #x가 보여야 함

jQuery라면 구현 자체는 아주 간단하다. .data('tab')으로 x값 얻어와서 $('#content')를 통제할 때 그 값을 넘기면 된다. 하지만 이 구현이 일으키는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아주 우연하고 작위적이다.
이 상황을 React는 이렇게 해결한다.

#wrapper는 #sidebar 밑의 a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content 밑의 div들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따라서 #wrapper의 this.state.tab을 정의해 주고, #content는 항상 이 state에 대응하는 div를 보여주도록 한 다음, #sidebar 밑의 a가 눌릴 때는 #wrapper의 this.state.tab이 적절히 업데이트되도록 한다. 그러면, #content 밑의 div는 즉시 자동으로 그 state에 반응("react")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왜 다들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것도 같음. 데이터가 어디로 흐르는지 볼 수 있고 훨씬 더 논리적이다. (단 그만큼 프론트엔드가 초반에 머리 싸매고 시작을 해야 하는 것. 어느 객체가 최상위인가? 정말 모두 한 개의 파일/스크립트 안에 넣어야 할까?)

  • 문자열을 직접 인젝션하는 코딩은 잘 안 된다. 예컨대 html 마크업을 구성하는 문자열은 이스케이프되어 문자그대로 브라우저에 뿌려진다. 정 그걸 띄우고 싶다면 악명높은 dangerouslysetinnerhtml을 쓰든지 차라리 리액트 html 오브젝트로 넣어버리라는 것이 공식 조언이다.
    또 남들은 다 된다고 하는데 나만 안 되는 것이 뭐나면… 문자열을 전달받아 그 문자열과 일치하는 이름의 컴포넌트 렌더링하기. 흔히 알려진 React.createElement(ChildName, null) 용법이 작동을 안 한다.[각주:7]
  • render () 메소드 내에서 const로 만드는 빈 배열은 길이가 0이 아니라 1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서 forEach push로 필터링을 할 때 결론적으로 이런 식의 이상한 판별식을 쓰고 있다. 이게 아닌데... 분명 더 옳은 방법이 있는데...
if (filteredArray[0].props.name != '') { /* do the stuff */ }
  • PHP가 세션/쿠키를 만드는 과정/방법론 때문에 사용자 인증이 생각보다 번거롭다. Ion Auth를 쓰고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기껏 깔아놓은 react router를 못쓰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 로그인폼을 POST 제출해서 로그인 처리하고 리디렉션 시키는 몹시 전통적인 짓을 하고 있다.
    • 원래 계획은 ajax 폼으로 그 자리에서 즉각 로그인을 시키는 것이었다. 로그인 자체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자동로그인("keep logged in") 기능. 자동로그인이 도무지 먹지를 않는다. 왜 그런가 하고 모든 소스를 다 뜯어본 결과… "자동로그인"은 일반적으로 이런 로직으로 동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1. 사용자가 POST 요청으로 로그인을 시도한다.
    2. PHP는 ID, 해싱된 패스워드, 자동로그인 여부를 받아 로그인(유저정보 매칭)을 시도한다.
    3. 로그인이 성공하면 PHP는 지금 로그인한 세션 고유값을 DB에 저장한다.
    4. 그리고 즉시 HTTP 응답 헤더에 이 세션 고유값이 포함된 쿠키를 쓰라는 요청을 보내는 리디렉션을 실행한다.
    5. 이때 PHP가 별다른 출력을 내지 않아야 비로소 이 쿠키가 써진다.[각주:8]
    6. 리디렉션된 HTTP 응답에서부터 쿠키와 세션은 유효해진다.
    7. 그래서 그 다음부터 (리액트 라우터가 아닌) PHP가 HTTP 요청을 받으면 우선 서버단에서 쿠키와 세션을 확인해 로그인 여부를 체크하고 그제서야 그 결과를 반환해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자동로그인 구현 완료.
    • 여기서 5번 스텝이 문제되는 것이었다. ajax 요청은 필연적으로 출력을 낳고, 따라서 자동로그인 로직의 5번에서 멈춘다.[각주:9]
    • 그러면 ajax 요청 콜백에서 적당히 쿠키를 만들면 되는것 아니냐? 싶을 텐데 그러면 7번 스텝이 걸림. 요컨대 자동로그인을 체크하고 로그인해서[각주:10] → 사용자 정보를 가져온 뷰를 → F5로 새로고침하면[각주:11] → 거짓말처럼 로그아웃당함.[각주:12]
    • 서버단이 JS로만 구현되었거나 자동로그인 로직이 좀 달랐다면[각주:13] ajax 콜백의 쿠키 작성만으로도 충분히 자동로그인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미련이 남지만... 그건 먼 훗날 많은 이치를 깨닫고 나서 다시 보기로. 지금은 우선 로그인을 시켰다는 데 의의를 두면서, u/(.*) 라우팅과 컨트롤러의 u() 통제와 users.js 최적화로 타협한다.[각주:14]

99. 해야될것들

  1. Redux 배워서 써먹기
    • "최상위 컴포넌트에 스테이트 때려박는게 너무 귀찮아서 온갖 방법으로 그걸 회피하는데요 그래서 state management 라이브러리를 씁니다...!"
    • 아직은 귀찮거나 헤비하지 않지만 넘나 당연하게 react의 짝패로 쓰이는 모양이니 싫어도 적용해야할듯.
  2. webpack 배워서 써먹(으면서 필요한 의존성 버전관리하)기
    • "근데 리액트 사용의 정석은 php 파일에서 로드하는거는 아니에요 webpack으로 빌드해서 index.html 및 js / assets 뭉치를 만들고 걔를 static hosting"[각주:15]
    • 지금 당장은 이런 스텝들이 필요할듯
      • React, Babel을 npm으로 받아서 로컬 트리에 넣어놓기
      • 지금 있는 메인 js를 번들 가능하게 조정하기
      • 컨트롤러 $dev 변수에 따라서 지금식으로 다 로드하느냐 bundle-*.js만 불러오느냐를 스위칭할 수 있게. (이건 순 내 편의를 위한 편법. 충격적이게도 지금은 메인 js 고칠때마다 서버에 업로드하고 새로고침을 해서 테스트를 본다고 한다...)
    • 뭐 일단 해놓으면 앞으로는 npm update 한번씩만 돌리면 되겠지
      • 잘은 몰라도 나중되면 지금 뷰파일이 로딩중인 fontAwesome, pureCSS 등등도 죄다 이걸로 관리하게될듯


  1. 그리고 대략 다섯 달 동안이지만 충격과 공포의 해피CGI 솔루션(...)을 경험해봤다. PHP 5.2 이하에서 실행해 달라고 요구하는 솔루션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한국에서는 무려 이새끼가 아직도 현역이다. 팩트TV가 이회사 물건으로 돌아가고 있다. [본문으로]
  2. 어차피 만들려는 웹앱들의 본질이 TODO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짓이다. [본문으로]
  3. 보통은 애초에 "서버언어" 개념 자체를 안 갖고 계시니. [본문으로]
  4. 예전의 다른 웹호스팅에 라라벨 올리면서 찾은 방법. 다시 하기는 싫다. [본문으로]
  5. 일단 로컬 구조 그대로 올린다 → 루트의 index.php가 public/index.php 를 require하도록 고친다 → public/index.php 가 ../bootstrap/autoload.php 와 ../bootstrap/app.php 를 require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FTP만 되는 호스팅 환경에서도 일단 라라벨을 굴릴 수는 있음. [본문으로]
  6. 인브라우저 컴파일 중일 때는 아무것도 안 뜨다가 잠시 후에야 가상DOM이 그려지는 문제. 리액트 사용상의 대표적인 대환장 포인트 중 하나라고. [본문으로]
  7. 선배왈 스위치문 써서 컴포넌트 리턴하는 거 말고는 답이 없다고. 안그래도 나도지금 그렇게 하는중이다. 글쎄 이게 아닌데... [본문으로]
  8. 내가 이해한 바로는, 쿠키 생성 코드가 포함된 코드 라인들의 최종 목적이 '뭔가를 출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redirect()는 괜찮지만 return $resultjson은 안 된다. [본문으로]
  9. 별짓을 다해 확인해 본 결과, 세션도 만들어지고 쿠키 요청도 들어가지만 실제 쿠키 생성부터가 안된다는 것으로 판명. CORS도 확인하고 별짓을 다해봤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결국 setcookie() 함수의 결함이랄까 설계 때문에 안된다. [본문으로]
  10. 여기선 클라이언트(브라우저)가 단지 쿠키만을 작성한다. [본문으로]
  11. 여기선 서버가 존재하지 않는 로그인정보 세션을 체크하려고 시도한다. [본문으로]
  12. 매치해 볼 세션이 없으므로 자명한 결과. [본문으로]
  13. 대충 찾아보니 JWT(JSON 웹토큰)과 로컬스토리지 사용이 JS 환경에서는 가장 통념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14. 그리고 (서버와 리액트가 라우팅을 놓고 싸우는 탓에) 꽤 속도가 느려졌으며 여전히 두세 시간 뒤면 세션이 풀려버린다. 왜죠... [본문으로]
  15. 느닷없이 그런 말을 들어도 지금은 잘모르겠는 부분이지만 여튼 이바닥 선배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줄 알자.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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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는 생각인데, 지나치게 나빴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되지만,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된다.

오말찬 페이지 포스팅을 리뷰하다가 문득 생각했던 것은, “전하세 예수” 모델의 “경배와 찬양”이야말로, 이게 폭발을 하던 90년대에 시작해 지금 이때까지, 교계와 거기 속한 이들 모두에게 양(+, positive)의 트라우마[각주:1]로 작용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소위 온 민족과 나라들(“All Nations”)을 위해, 온 민족과 나라가 떼로 들고일어나서, 한 자리에 와르르 모여 우르르 꺼르르 극적이고 스펙터클한 종교적 경험을 가져 그로부터 영적 각성을 일으킨다는 기획이고, 사실 이는 지극히 인공적으로 치밀하게 조제된 경험이었지만.

이 영상 댓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모두가 이 시절을 말도 못 하게 그리워한다. 저때가 좋았다고, 저때는 참 전세계를 돌며 헌신했었다고. 나는 이것이 그냥 훈훈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하나의 트라우마 증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걸 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우리는 근 20여 년간 꾸준하게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숱한 크고 작은 교회에서, 각종 선교 단체에서, 무슨 집회 무슨 부흥회 때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저 집회 참가자들이며 연주자며 하스데반 목사라도 된 듯이 목청을 높였고 손을 들었고 방언을 읊었다.

그리고 저 좋은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저것은 지나치게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 양(+)의 감정을 갖는 사후외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부의 감정을 갖는 음의 트라우마 ― 일반적으로 말하는 트라우마 ― 가 지나치게 안 좋은 경험이고, 재현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양의 트라우마는 지나치게 좋은 경험, 그래서 재현하고자 하지만 필연적으로 재현되지 못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의 트라우마가 그렇듯, 양의 트라우마 역시 필연적으로 자가당착, 부조리, 불행으로 이어진다.

당장 전하세 예수 예배모델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만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그게 얼마나 임팩트 있고 강력한 경험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매주 주말마다 저 많은 교회의 “찬양팀”들은 끔찍한 수준의 아마추어적 하위 음악 문화를 존속시키게 된 것인가. 그 집회, 그 밴드, 그 목사님의 음반을 듣고 카피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자기들이 그런 걸 올려드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그걸 콘솔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헛웃음 웃고 있는 동년배 작가의 차가운 냉소를 받으면서.

나는 이 트라우마가 21세기 인류 전체의 공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 보라. 20세기말 내내 ‘신세계가 온다! 미래가 온다!’ 잔뜩 부풀어서, 그 미래에 뒤지지 않으려고 온갖 혁신[각주:2]을 일궈내다가 막상 21세기가 닥치고 아이폰이니 알파고니 넷플릭스니 드론이니 하는 것 몇 개 받고 “이게 미래다! 끝~” 하면 어떨 거 같은가? 다들 ‘응? 이게 다야? 띠용~’ 하고 어리둥절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눈과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느라 못 돌이켜보았던 인류의 정신은 이쯤에서 잠시 휴지에 들어왔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좀 돌아보자니,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과거로부터의 양의 트라우마들이 이제금 다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70~90년대 콘텐츠/브랜드/컨셉의 리바이벌 붐은 그 증거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 그 시절 어린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돈을 쓸 수 있게 된 점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수가 없다. 지금의 어린이들을 위한 콘텐츠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냥 다들 과거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 지목하는 부분이다. 나는 한끗만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이건 착취가 아니라, 불가능한 과거로의 추구이고, 하나의 사후외상 증세이다.

스트리트 파이터와 모탈 컴뱃이 지금도 새 작품이 나오는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조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들 그걸 그냥 과거 추억팔이가 아니라 진짜로 지금 소비하고 있단 말이야? 잠시 후에는 스타워즈 배틀프론트 2라면서(심지어 2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도 듣는다. 게임을 하지 않지만, 이건 충분히 이상한 징조다. 왜 이래? 뭐 다음엔 ‘풀하우스’나 ‘프렌즈’ 시트콤이라도 리메이크하려나 보지?

왜 아니겠는가? 풀하우스 리메이크는 정말로 진행중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까지의 세계적 호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들 꿈 같은 시절을 보냈거나 적어도 꿈을 꿀 수가 있었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런데 그게 지나치게, 불가능하게 좋았다. 파티는 끝났고 더 이상 그렇게까지 모든 것의 생산량이 급증할 수는 없게 됐다. 자연히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것도 해볼까?’ 하는 시도들이 하나둘 종적을 감췄다. 마치 모두가 하스데반 목사님의 좋은 집회가 끝난 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마음 속으로 내심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그 잔감을 적절히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한 탓에, 그것은 영 실망스럽기만 하던 알루미늄색의 21세기 초엽 내내 묻혀 있다가 이제 와서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발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험이 지나치게 좋기만 해도 문제지만, 그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의 속알맹이가 잘못돼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한국 라이트노벨계가 정확히 그렇다. ‘미얄’과 ‘오라전대’로 대표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꼬리를 찾아줘’ 류의 방향으로 갈 것인지 망설이던 한국 라이트노벨은 ‘나호’의 등장 이후 완전히 모에부타 컬처가 되어 버렸다. 적어도, 작가 지망생들의 세계에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카넬이 지나치게 크고 전형적이고 유일한 경험을 제공한 이래, 그 세계는 완전히 뒤틀려 버린 상태다.

그들은 서로에게는 설정이 괴상하다느니 맞춤법이 맞지 않다느니 스토리나 캐릭터가 이상하다느니 온갖 독설을 퍼붓지만, ‘감평’을 부탁하며 내놓는 작품이라는 것들이야말로 사실상 “나호가 되고 싶은데 그걸 대놓고 들킬 수는 없고 해서 이것저것 바꿔 끼워서 그럴듯하게 만들고 자기만의 오리지널 개그 몇 줄을 추가해 놓은” 딱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는데, 한국 라이트노벨 작가 지망생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정확히 ‘나와 호랑이님!’이 거기까지만인 것으로 딱 폐쇄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니 뭐가 나와도 막 그렇게 엄청 새롭거나 재미있지 않게 된다.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프랜차이즈,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상상의 세계와 지평이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이럴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좋았던’ 경험을, 따라서 재현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재현하려는 시도를 의식적으로 배격해야 하는 양의 트라우마적 경험들을, ‘나호’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읽은 작가 지망생들은 미처 의식적으로 배격하지 못하고 그 트라우마에 걸려 그걸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추구는 불가능하고 부조리하며 따라서 불행하다. 예배자들이 ‘올네이션스’에 대해서, 게임 시장이 ‘스트리트 파이터’의 시절에 대해서, 모든 종류의 소비자들이 모든 종류의 90년대의 유산으로부터 지금 그러하다.

대책은 있을까. 평소의 지론을 펴 보자면, 적당히 좋고 온전히 건강한 것들의 보편화만이 이 병질을 다스릴 수가 있다.

우선 다들 환상을 좀 깨야 한다. 그렇게까지 엄청 좋은 스펙터클이, 그렇게까지 엄청 자주 일상적으로 우리 삶에 제공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폭풍우를 창 밖으로 바라보는 것은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폭풍우가 내릴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맑거나 대충 구름이 껴 있으며, 시중에 나온 소설의 대부분은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교훈적일 뿐 불세출의 걸작은 그야말로 불세출로 나온다. 모든 아이돌이 톱스타가 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예배 순서는 은혜 받는 기분과 성령 충만한 느낌이 그렇게까지 엄청나지는 않다든가 등등.

그리고 거기서 더 나가서, 그렇게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주어지는 각 분야의 대다수 콘텐츠들에서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오말찬 페이지가 교계 ‘예배 문화’ 비판과 병행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말씀 찬양’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커스나 예△전도단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부르든 어쨌든 적어도 가사는 훌륭함이 보장될 ‘시편’을 가지고 찬송하기 시작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라이트노벨도, 각종 게임 프랜차이즈도 그렇다. 대작이 될 필요 없고, 스펙이나 무슨 보너스 피처나 특전 상품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낸 돈 값을 하고 약속한 재미를 일정량 이상 준다는 가장 기초적인 데서 시작해 줄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소비자들도 ‘지금 여기에 새로 나온’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면, 그들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지금의 경험으로 덮어쓰거나 극복하는 일이 좀 가능해질 것이다. (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그 경험을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유사하지만 다른’ 새 경험을 해내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양의 트라우마 역시 그렇게 극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매번 교회에 갈 때마다 왜 우리 교회 찬양 시간은 여의도광장의 그때 같지 않을까 하는 갑갑한 마음도, 왜 나의 추억이 담긴 이 시리즈가 지금 이렇게 우롱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하는 어처구니 없음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좋았던 경험은 그냥 좋았던 경험이다. 나빴던 경험이 그냥 옛날의 나빴던 경험이듯이. 게임이라는 세계에서, 예배라는 종교 의식에서, 아무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이 가능한 세계에서 그러하다. 지금까지는 다들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그간 우리가 갖고 살아 온 양의 트라우마들을 좀 진지하게 직면해야 하지 않나 싶다. 파티가 끝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가서 밥을 지어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일상을 좀 찾을 일이다. 그닥 좋지도 그닥 나쁘지도 않은, 하지만 건전한 경험들이 충만한 그런 세계를 향해서.

  1. 주류 심리학에 없는 개념이다. 그냥 말을 쉽게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니 오해 없으시길. [본문으로]
  2. 특히 오락문화에 있어서는 20세기말이 혁신이 넘치는 시대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오히려 지금의 업계는 그 시절의 업계에게 빚을 잔뜩 지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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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월요일 저녁 키친핸드 근무 치면서 손으로는 분무질하고 머리로는 딴생각 이것저것 하다가 대강 정리한 것. 내일 멜번컵 공휴일 저녁근무도 있는데 이 시간 되도록 안자고 일안하고 뭐하는거람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자기들이 노는 놀이의 규칙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세대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놀이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 규칙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놀이의 핵심이고 가치이다. 소꿉놀이는 누가 아버지, 누가 어머니, 누가 자식이 되고 각자 무엇을 하는지를 정하고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땅따먹기는 땅에 네모 금을 긋고 돌을 줍는 데서 시작하고, 하다못해 "데덴찌"를 해도 무슨 구호를 외칠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 어린 시절에 스스로 놀이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대로 놀이를 하다가 집에 가는 경험이야말로 유사 이래 인류가 대대로 전수하며 역사를 앞으로 추동한 힘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뭔가가 고안되고 발견되고 발명될 때마다, 인류는 그에 대한 규칙을 수립하고 그 규칙대로 과감하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그런데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지금 이 나라의 아동과 청소년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그들은 성인 사회가 가공 및 규격화해 유통하는 몇 가지 특정한 형태의 오락과 제한된 종류의 쾌락만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를테면, 어렸을 적 전쟁놀이를 하며 느끼던 재미들 중 '롤플레잉'이나 '타격감' 등의 특정 측면만을 어른이 되어 선택적으로 부각해 일정한 목적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온라인 게임으로 체계화해 제공하면, 그들의 아랫세대는 "내가 딜러를 하니 네가 탱커를 하니 이번에 누가 승격을 하니" 하면서 PC방에 옹기종기 모여 주어진 목적에 따라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비디오 게임이 아동 청소년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유를 딱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 부분, 놀이의 본질로서 규칙을 수립하고 준수하는 주체의 의식과 경험을 대체 혹 희석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놀이"를 즐기며 재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지만, 과연 그것은 ― 인류가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던 바 ― 세계를 놀이하며 새 세계를 소화해내는 세대로의 성장의 바탕일까, 아니면 그저 '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오직 비디오 게임에게 아동 청소년을 책임지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따지면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TV도, 누구도 아주 무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길거리, 볼거리, 요깃거리가 다소나마 '놀이하는 주체'를 특정 재미에 길들이고 있는 한 말이다. 요컨대, 사회 전체가 운동장(playground)의 문을 닫고 각종 돈 내고 들어가는 "놀이문화공간"만을 장르별로 즐비하게 열어놓은 형국인데, 나는 이 시국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돈 내고 즐기는 놀이들의 공통점은, 목적을 특정하게 제시하고, 그 대신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특정한 쾌감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방탈출' 게임방이다. 내 돈 내고 방에 갇히는 놀이라니 뭐 이딴 게 다 있는가? 그러나 방탈출 게임방 자체는 아주 흥미진진한 경험인데, "암호/열쇠를 알아내기 어려운 공간에서 단서와 지혜를 모아 탈출하자!"라는 목적 아래 해당 공간이 치밀하게 구성돼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심지어, 각 방별로 테마를 갖춰서.

방탈출 게임방과 가장 대조해서 살펴볼 수 있는 놀이로서, 우리 어렸을 때 다같이 집에 가다가 한 번씩은 해 봤을 놀이를 떠올려 보고자 한다. "땅 밟으면 죽음"을 선언하는 순간부터, "땅"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안 밟으려고 보도 블록에 오르거나, 땅에 발을 최대한 짧게 디디려고 깡총거리거나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때 놀이는 결국 어디까지가 땅이냐, 왜 땅을 밟으면 죽느냐, 어떻게 하면 땅 밟아도 안 죽느냐, 죽으면 부활 못 하느냐 등을 정하다가 다들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외국에도 "땅바닥이 용암이야!"라는 비슷한 게임이 있을 정도로 이 경험은 아주 범세계적이다. 왜 그럴까? 실로 원초적인 놀이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뭔가를 정해서 잘 해내거나 잘 우기면 이길 수 있고, 그래서 아주 유쾌하고 무해하며, 훗날의 기약이 있는 것이다. 암호도 열쇠도 못 찾으면 담당자가 올 때까지 제한시간 내내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방탈출이란 "놀이"와는, 근본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규칙을 정할 수 있고, 대충 그냥 해 보면 되고, 잘 안 되면 우겨 볼 수 있고, '죽어도' 조만간 다시 할 수 있다는 점. 우연히도, 이런 측면들은 사람이 살아봄직한 문명 사회의 안전그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사실 이는 우연하지 않다. 선진 사회일수록, 어차피 인간사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한바탕 역할놀이일 뿐 그밖의 별볼일은 크게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그 진실을 충실히 구체화하는 제도와 예의와 사고방식을 지속시킴으로써, 새로운 놀잇감이 등장할 때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막지 않고 적극 장려해 사회 전체를 하나의 운동장으로 열어줄 따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아도, 일단 지금 우리 세대의 놀이란 갈수록 누군가가 주는 규칙과 목적을 가장 '끝판왕'으로 달성하는 것이 그 본질이 되어 가고 있다. '똥망겜'조차도 '혜자이벤트'가 뜨면 적금을 깨든 밤을 새우든 해서 보스를 깨야 직성이 풀리고, 드립 대회가 열린 것 같은 댓글창에서는 너도나도 최고 공감의 리액션을 한줄 넣어 '페북스타'가 되어 보려고 애를 쓴다. "마비노기"처럼 게임 속 세상 중에도 목적이 오픈된 곳이 있던 한때의 놀이 행태와는 정서부터가 다르다.

그래도 이 세대는 1990년대 어느 한때인가에는 각 동네의 정글짐을 손에서 쇠 냄새 날 때까지 헤집고 다녔던 적은 있다. 그 이후 세대는? 2000년대의 한때를 PC방 컵라면과 "서든어택"으로 보낸 세대는, 없던 룰을 만들거나, 룰의 구멍을 찾고 그걸 헤집거나 메우거나 하며, 작으나마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해 본 경험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그 여지를, 그런 놀잇감을, "운동장"을 제대로 주었는가?

그나마 가장 희망적으로 관측되는 것은 '마인크래프트'다. 현존하는 메이저 게임 중 거의 유일한 완전 오픈 월드 게임인 이 세계에서, 지금 아동청소년 세대는 '마인크래프트 캐릭터 역할놀이 유튜브 콘텐츠'라는 놀이를 찾아냈다. 이걸 자생적으로, 나름의 규칙과 방법과 문법을 찾아서 나온 놀이라고 덮어놓고 긍정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당장 이 놀이의 본령, 그 진짜 재미 포인트가 무엇일까만 해도 그렇다. 게임 세상을 빌렸을 뿐인 '역할놀이'일까, 아니면 별수없이 주어진 제반 여건 하에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기 존재감을 겨루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놀이'인 것일까.

뭔 짓을 하든 "좋아요, 구독, 공유, 댓글"을 많이 벌수록 더 크게 이긴다, 바로 이것이 유튜브 크리에이터 놀이의 핵심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위해 참여하는 경험들로부터 각자를 소외 내지 완전히 분리하게 된다. 주유소 직원 노인더러 "100원어치만 넣어 달라"라고 요구하고 이를 영상으로 올리는 인면몰수의 "꿀잼컨텐츠"는 그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요컨대, 놀이의 목적과 체계가 놀이 주체에게서 유래하거나 주체에 귀속되지 않을 때 그 게임은 성립은커녕 걷잡을 수 없이 파행할 여지가 크며, 지금 청소년들의 "놀이"가 바로 그런 파국의 위험을 안고 있지 않느냐 추측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파국이란 놀이 자체에 한하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 "지면에 붕 떠서 살아본 적밖에 없는 세대"의 장래에 대해 조잡하게 쓸 때도 생각한 것인데 ― 이 세대는 자기가 놀이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때가 되면 싫어도 어떤 규칙을 다함께 제정하고 따라야 한다는 진실을 마주했을 때 집단 패닉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초고령화가 저지하고 있는) 헤이세이 세대의 사회 등장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들이 정치를 해본 경험이 있는가? '블랙기업'을 고발하고 죄 주고 쓴맛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고작해야 <아이돌 사변>을 있는 힘껏 비웃는 데서 그쳤지 않은가? 기성 정치인들이 우경화에 가깝게 뭔가를 밀어붙이는 것에도, 어쩌면 어느 정도는 그런 차원의 문제 의식이 있지는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우경화를 옹호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이 나라라고 사정이 썩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이 나라 어린이 젊은이들도, 작은 정치, 작은 제도, 작은 판결, 작은 사회 역할 수행을 익숙하게 여러 번에 걸쳐서 해 본 경험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까지 '놀이터에서의 놀이'를 통해 쌓을 수 있었던 이 경험들이, 동네 놀이터가 완전히 개점휴업 중인 지금, 쌓이기는커녕 맛봐진 적도 없지 싶다. 자연히 이 세대에서 완전히 소멸한 공유 의식들이 있다. '못해도 된다', '져도 된다', '죽어도 된다', '까짓거 다시 하면 된다',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된다'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 세대는 반드시 잘 해야만 하는 게임을 하고, 지거나 죽으면 안 되는 파티에만 속해 보았으며, 한 번 잘못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입이니 대입이니 하는 갬블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세대다. 심지어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것조차도 어디서 느끼고 배운 적이 없으니, 못 견딜 만큼 뭔가가 싫어지면 무슨 수를 내거나 그냥 관두지 못한다. 대신, 열심히 궁리한 끝에, 그토록 요구받던 목표치 점수를 받아낸 다음 그 시험지에 "이제 됐어?" 한 줄 갈기고 여보란 듯이 몸을 던지고 만다.

관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정말 극단적인 전망을 제시해 드릴까? 이들은 사회에 나와서, 그동안 그들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패악과 구습을, 고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수용한 상태로 고착할 것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의무가 될 것이며, 왜 사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삶 투성이일 것이다. 절대 다수가 가라는 회사 가서 하라는 일 하고 받으라는 대출 받아 갚으라는 빚을 갚는 인생으로 점철할 것이며, 이게 뭔가 싶어지는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수가 '인간증발'을 할 것이다. 핵심은… 누구도 중간에 그렇게 선언할 수 있다고 배운 적이 없으므로, 더는 "씨발! 존나 재미없어! 이딴 거 그만하고 이제 딴 거 하고 놀면 안 돼?!"라고 중간에 외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계속하여, 잔잔히, 숨막히게, 그들이 보고 자란 교실 같은 세상을 이어갈 것이다.


사실은 문득, 요즘 게임이라는 건 다 최종 목표가 있고 다르게 놀 수가 없구나, 싶었던 데서 시작한 생각이다. 그럼 요즘 게임 말고는 별다른 놀이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걸까, 를 계속 생각하니, 종국에는 좀 깜깜한 세상을 그려보게 된다. 그럴 수밖에. 행동 목적이 어딘가에서 내려와 주어지는 한 그런 세상에 무슨 가망이 있을 리가 없다.

무슨 결론을 지어서 어디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머지 세대가 다 들고일어나서 떼로 위선이나 좀 떨어 주면 어떨는지. "못 해도 돼! 져도 돼! 이긴다고 뭐 별거 없어! 쟤가 반칙 쓴다 싶으면 반칙 쓴다고 말을 해! 규칙이 없으면 니가 제안해도 돼! 하다가 잘 안 되면 좀 쉬고 깍두기로 들어와서 시작할 수 있어! 힘들거나 싫으면 그만해도 돼! 너 재밌겠다 싶은 걸 너 하고 싶은 방식으로 실컷 하다가 질리면 집에 돌아가도 좋아!" 음. 써놓고 보니 2017년 한국의 맥락에서 이보다 더 위선적인 꼰대소리가 있을까 싶긴 하다.



추기1: 다 써놓고나서 사전을 찾아보니 영단어에서는 play와 game의 의미가 다르다. play가 일반적 의미의 놀이를 뜻한다면, game은 놀이 중에서도 특히 특정한 목적을 두고 겨루는 놀이만을 한정해 뜻한다. 그렇다면 위의 기나긴 잡설은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game이 아닌 play를 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추기2: 어딘가에 공유가 된 걸 보고 피드백들을 (셀프로) 받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이 요지에서 세대론을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었지 싶다. 한동안 20대란 뭔가 청년이란 뭔가 하는 걸 생각하고 살다 보니 그 버릇이 남아서 공연히 불필요한 논지가 들어갔다. 일단은 수긍해 둔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넓은 의미로서의 놀이 ― 자주적으로 각자의 역할과 행동 요령과 규범을 수립하고 다양한 안전 장치와 제도와 문화 아래 이를 수행하는 체계 ― 를 점점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는 세상 전체이지 특정 세대가 (특히 더) 그렇다는 말에는 별 근거가 없달까 핵심 주제가 못된다. 이제 글 전체를 수정해야 하는데 그건좀 미루고 싶구먼 ㅠ

Posted by 엽토군
:

딱히 정리는 안된 잡감들. 쓰(려)고 보니 순 꼰대소리인 부분 ㅇㅈ합니다.

현재 이 나라의 청년 세대에게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관념은 아주 만연하고 광범위하다. 공감을 사기 쉬워서 콘텐츠 제작이나 칼럼, 기사 작성에 많이들 이용했고 나도 그랬다. 심지어 “헬조선”의 지옥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로서 청년 사회 붕괴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 너도나도 아주 즐겁게 이생망 이야기를 했다. 그런 서사의 생산과 소비는 과연 유효하고 유익하며 유의미할 것이라 믿었다.

재수생과 반수 이야기 - Sepia☂

그러나 이런 만화가 디씨에서 나와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형국이 되고 나면 이제 ‘이번 생이 망했다’는 썰과 탄식은 오히려 하나의 장르, 좀 나쁘게 말하면 하나의 타령조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핵심은, 우리의 삶이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기록해 노출하고 묘사하는 일의 사회적 효용이 과연 그렇게 긍정적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서사의 생산 양상은 흡사 386, 486들이 송강호와 황정민을 앞세워서 그들의 젊은 날을 스크린으로 보상 및 상찬받고 싶어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동일한 점은 다들 모르지 않는 특정 세대의 목격담이며 경험담, 그들이 특정적으로 공유하는 정서와 사상을 굳이 예술 장르의 형태를 빌어 전시한다는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넥타이 부대’들은 그래도 뭔가 해봤다(해본다)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 비해 ‘청년들’은 결말부를 증발 내지 페이드 아웃시켜 버린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는 확실히 그 세대가 내다보았던 미래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386, 486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주인 의식이 충만했다면 그 직후 세대는 바로 그들, 삼촌 외숙부 할아버지뻘들에게서 “참교육을 시전”당한 입장이라 이렇다할 미래관 자체가 각별히 없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시궁창으로서의 현재, 그래도 한때는 퍽 멋모르게 즐거웠던 과거, 그리고 “이번 생은 분명 망했다”라는 대책 없고 확고부동한 결론뿐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 아무런 다음 스텝이나 돌파, 타개의 수가 전혀 없다 보니, 이 세대는 지금 이 결론의 무한 소급과 재생산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 만화가 그렇다. 현재 저 만화는 “공부 자극 확시켜주는 만화”로 홍보되어 유포되고 있는데, 여기서 아주 독특한 생산-유통-소비 행태가 관찰된다. 만화 줄거리 자체는 ‘별 노력 없이 그냥 가는 대로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유통하는 측은 공부라는 노력이 없었을 때 이렇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아마 동시에 소비하는 입장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디테일 오진다”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과거로서의 디테일에 주목한다. 주로 같은 세대인 이 만화의 소비자들은 극단적으로 과장되고 극화된 주인공을 욕하는 것—그리고 작품이 원하는 대로 그 감상에서 거의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다—을 주된 감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이생망이라는 장르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논해도 좋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이것은 장르 예술의 형식이고 소비 패턴이다. 그 장르에만 나오는 요소들, 그 장르가 천착하는 정서와 논리 구조의 세팅, 그 장르에서 응당 받아야 할 감상과 교훈 등이 정형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확실한 장르가 된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 특정한 느낌과 생각이 반복적으로 공고해지는 것을, 이 만화를 포함한 꽤 많은 매체와 콘텐츠에서 점점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이생망이라는 장르가 주는 감상이 퇴폐미보다는 퇴폐 그 자체에 더 가까우며, 이 장르에 세팅되어 있는 가치와 관점과 관념 체계가 다분히 퇴행적이랄까 후진적이라는 데 있다. 퇴폐미는 적어도 엄숙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을 촉구하는 데 비해 퇴폐 자체는 어떤 것도 반성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런 것 따위 반성하지 않아도 좋다는 전제가 다분한데, 특히 이 만화의 결말부가 어떤 장면으로의 이행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압축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너(나)는 이마만큼 쓰레기 새끼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냐” 같은 말들은 정말로 “공부 자극”을 시켜준다기보다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효과를 일으켜 그냥 자기의 ‘쓰레기 같음’에 더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킨다. 정말 그러냐는 얘기는 묻지 마시라 그냥 이것 다 내 근거 없는 잡감이므로.

이 장르, 현시창 이생망 장르에 가장 가까운 역사상 유사 사례는 신파극이라고 보여진다. ‘불쌍한 새아가, 못된 시어머니’ 등으로 촌스럽게 정형화된 비극들은 분명 특정 세대 특정 집단에게는 지극히 유용하였으되 지금은 심지어 공중파 아침 드라마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장르화된 신파극을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주 간단하게도, 우리가 정말로 그런 세상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학의 미학으로 점철했던 신파극이 한물 갔듯이, 아주 정교하고 정당하며 말리기 어렵고 모두에게 쉽게 전파되는 자조의 미학으로서의 이생망 역시 적절한 시점에 종말할 것으로 예상되기는 하지만, 다만 이 장르가 한 세대의 뇌리에 어떤 정서를 얼마나 각인할 것인가가 우려스럽다. 실로 우리는 신파극이 낳은 손녀뻘 장르, 막장 드라마를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론은… 장르로서의 이생망, 장르로서의 현시창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장르는 다분히 자기파괴적이랄까 지속 불가능하달까 바람직하지 않달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별로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거니와 자꾸 되풀이할 소리가 못된다. 할 거면 어떤 타개, 돌파, 최소한의 확실한 골계미나 퇴폐미를 확보하고 가야 한다. 이런 장르, 현재 청년 세대가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표현상의 장르화를 이제는 덮어놓고 긍정하기 어렵다. 우리의 이번 생은 확실히 망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망했는지까지만을 거듭 되풀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일이 과연 어떤 예술적 역사적 공헌을 할 것인가 그런게 있긴 할까 하면 그건 의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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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저 박스 쓰고 눈구멍 통해서 실제 공연 관람을 했던 그 10분을 생각한다.

앉아서 보고 있던 것은 "청이와 삼둥이"였다. 휴대폰만 들고 급히 달려가서 각도를 확인하고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한 뒤 사진 나온 걸 확인하고 잠시 후 합류하겠다고 아주 잠깐 10분 정도 앉아있었다. 도대체 청이와삼둥이가 뭐하는 창극인가 애초에 창극이 뭔가 나도 좀 알자 싶어서. 가사 중간에 심청 얘기가 슬쩍슬쩍 나오길래 아 그거 맞구나 하고 확인만 하고(이 사실관계가 정말 그렇게 중요했다) 다시 또 뭔가에 쫓기듯이 슬며시 자리를 떠 다음 장소로 이동했던 걸로 기억한다.

홍보 콘텐츠로서 이 포스팅은 말하자면 배우 앞에 배경이 등장해 배우를 다 가리는 B컷이다. 단국대의 누가 나오는지(당사자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커리어 아니겠는가?) 배비장전이 뭐 하는 창극인지(사실 아직도 모른다. 이제 찾아볼 생각) 그걸 정말로 앉아서 즐겨보니 어땠다든지(그때 내 감상은 잘은 몰라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는 정보값은 정작 빈약하고 관객석의 누가 이상하다느니(사진 초점도 무게비중도 무대 주인공에 없다) "참신하고 유쾌"하다느니(내가 본 무대는 딱히 그렇지 않았다) 순 군말뿐이다. 공연을 미리 잘 알고 그걸 실제로 만끽하고서 감동을 느끼며 소식을 전해도 주인공들에게 각광을 줄까 말까인데 나는 이때 최후 수단이랍시고 비상물자처럼 갖고 있는 광목 한복 가져가서 당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굴 탓하거나 죄줄 생각은 없고 그냥 그랬다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안 되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즉석카메라 사진처럼 피어올라 이제야 좀 잘 보이는 느낌이다. 우리는 프로들이 뭔가 약은 요령으로 쉽게쉽게 식상하게 해낸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프로들은 즐길 것 다 즐기고 알 것 다 알아 가면서 제대로 치기 때문에 그게 쉬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3년간 꿈을 꾸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면 어쩐지 그렇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자체는 훌륭하다. 돈많이벌어 성공하면 5년에 한 번은 갈 생각이다. 전주 자체는 지금도 외국인들에게 서울 대신 추천할 만치 좋았으므로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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