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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기고한 리뷰에서 아래 내용을 요약해 두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애국청년 변희재 :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맞다


- 꽤 오랜 기간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부침이 심했는데 드디어 실물을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2018년 3월 1일 IPTV 배급 개시 기념 시사회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2관에서 별도 신청 절차나 비용 없이 참석 가능하다고 해서, 가봤습니다.

상영관에는 약 120여 명의 관람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영화 상영과 이후 10여분간 진행된 관객과의 Q&A 시간에 이르기까지 장내는 별일 없었으며, 감독이 혹여나 걱정했던 바 “상영 항의 전화를 하던 분들”의 난입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현실 정치가 그렇죠 뭐!

- 영화를 보고 나서 한줄 요약평을 SNS에 올리자마자 지인들이 물어봅니다. “추천할 만합니까?” “자세한 얘기 좀 써줘여 가고싶었는데 까먹고 못갔음” 작품 자체는 관심작이었습니다. 정작 현장까지 가서 관심을 지불한 사람들이 120여명에 불과했을 뿐이지요. 추천할 만하냐고요? 이 리뷰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리뷰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리뷰가, 이 영화를 앞으로 ‘굳이 보실’ 분들이, 그때 좀 덜 당황하고 좀더 생산적으로 이 작업물을 이해하고 감상하실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가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 반대로, 그저 지금껏 하던 대로 “ㅋㅋㅋㅋ 변희재 새끼 결국 영화까지 나왔네 ㅋㅋㅋㅋ 애북고수들 좋겠넼ㅋㅋㅋㅋ 이런건진짜 왜만드냐 절대로 안본다 홍가놈들이나 보라고해라 ㅋㅋㅋㅋㅋ” 하고 지나가실 분들은 이 리뷰를 그만 읽으시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제가 변희재를 옹호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게 참 뭐랄까… 세상의 이면과 모순의 층층을 더 깊이 들여다볼 의지나 지능이 없으신 분들의 행복 추구권을 어찌 제가 감히… 싶어서요.


-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영화로서 선뜻 추천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한국 다큐멘터리답지 않게, 영화가 시종일관 시청자에게 어떤 입장을 갖기를 요구하는 자료화면으로서 주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특히 변희재라는 인물의 ‘애국청년’ 캐릭터가 그것을 방해하는 함정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 먼저 함정이란 뭔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전제인데,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에서 변희재란 인물은 아주 납작하게 캐릭터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캐릭터화가 공정한가 어떤가는 접어두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를 ‘변듣보’, ‘변TM’으로 알면 충분하고(“저들”의 경우에는 ‘변땅크’), TV에서건 현실에서건 스크린에서건 오직 그런 변희재만이 알기 쉽게 등장해 알기 쉬운 행동을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가끔 코미디 내지 냉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언제 그런가 하면, 변희재가 변듣보, 변땅크 등의 노릇을 할 때 그렇습니다.

- 이를테면, 관객들은 무슨 조건반사를 학습받았거나 사전에 안내라도 받은 듯이, 일베 표시 손동작을 한 시민과 기념 사진을 찍는 그림이 나오면 웃어 주었습니다. 허탈한 웃음과 냉소와 폭소가 정확히 같은 비율로 섞여서요. 글쎄요, 그건 불필요한 웃음입니다. 적어도 영화의 비평, 그리고 다큐멘터리 전체 서사를 따라잡는 데 있어서는 말이죠.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그게 학습된 웃김이기 때문이에요. 요컨대 저들만의 리그 속에서 조그맣게 영웅 대접받고 있는 “애국진영후보 변희재”에 대한, 그런데 영화가 지시하지는 않는, 그냥 관객들이 멋대로 웃는, 그런 웃김.

- 한국 다큐멘터리는 그 생태적 환경에 의해 필연적 정치성을 띠고,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사회의 맥락에 관계될 것을 요구받곤 합니다. 그러면 이해와 해석과 반응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해지거든요. 그 조건에 가장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GO발뉴스와 김어준-주진우 브랜드 다큐들이라면, <애국청년 변희재>는 그 조건에 꽤 적극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변희재 한 명을 세워놓고 까르륵 까르륵 비웃는 영화는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기대했을지언정, 그리고 “원래 기획 의도 중에는 변희재라는 사람을 놀리고 비판하는 것도 있었”을지언정.

- 그래서 사실은 <애국청년 변희재>라는 제목조차도 작정하고 설치된 함정이고 ‘어그로’입니다. 고로 이 제목에 웃어주는 것은 여러분의 웃음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좀더 쓰겠지만, 한국은 이런 함정을 깔아 주면 신나서 걸려 주는 습성을 갖고 있고, 그렇기에 이 영화는 앞으로도 공정한 비평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며 한국의 정치문화는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 적어도 액면상으로는,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진보진영의 괴짜 논객으로 활동하다 어떤 계기로 보수로 돌아서고 진중권과 사망토론을 하며 미디어워치를 운영하고 “탄기국”의 리더십이 된’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변희재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러한 개인 이력을 1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다른 분들이 더 잘 할 수 있고 내가 잘 하는 건 그냥 지금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2014년을 중심으로, 그때부터 2017년까지의 변희재를, 상당한 절제력으로 집중하여, 전인적으로 기록(documenting)해 나갑니다.

- document라는 영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문서화하다, 기록하다, 기록으로서 남겨두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딱히 마이클 무어 식의 쇼잉과 텔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죠. 이 영화는 정말 문자 그대로 그 시절의 변희재가 중요한 몇몇 날들에 어디 가서 뭐 하고 어떤 술자리를 가졌나 하는 사실들을 기록으로서 촬영해 남겨두는 데에만 골몰합니다. 못 믿겠지만, 그게 이 영화의 전부에요. 뒤에 좀더 쓰겠지만 심지어 그 사실들의 나열을 통한 의미적 연결이나 구성을 상당히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듯 보입니다. 대신 그 장면들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인상들을, 보는 사람마다 제각기, 취사 선택해서 판단할 여지가 있을 뿐인 거죠.

- 예컨대 영화 초반 1분 정도는 여러분이 보신 예고편 그대로가 들어가 있는데, 그게 지나고 나면 새로운 장면으로서 뭐가 나오냐 하면, 그의 ‘애국산악회’ 활동이 조금 서투르다 싶을 정도로 가감 없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태극기를 등에 지고 땀 뻘뻘 흘리며 “이 길이 둘레길이 아니라고” 같은 말을 되뇌이며 산을 타는 걸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지, 이거 뭐 중요한 신인가,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지 아세요? 이 신은 의미가 있으려면 있기도 하고, 없으려면 없기도 합니다.

- 무슨 말이냐? 이 시퀀스는 “산악회에서부터 시작해서 보수진영 조직을 형성”하려는 변희재의 정치활동 계획의 서두 부분일 뿐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변희재라는 인물의 내면의 은유라는 꽤 깊은 통찰이 담긴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등반자들이 박박 우기는 틀린 길을 따라가고, 그러면서도 “이 길이 아닌데…” 갸웃거리는, 그러면서 나름의 길을 찾아 다같이 정상으로 가려고 하는 등장인물. 주인공의 행동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포착하고 묘사하면 그건 극영화에서 무슨 의도입니까? 보통은 내면의 상태나 변화의 은유죠.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는 듯, 영화는 전체에서 불필요해 보이는 이 등산 장면을 꽤 공들여 보여줍니다.

- 뭐 아니면 감독이 개인적으로 이날 뭔가 의미가 각별해서 분량을 1초도 덜어내고 싶지 않았다거나… 그런데 강의석이란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부지는 아닙니다 여러분.


- 그렇게 영화는 계속해서 (주로 정치에 뜻을 품어 준비하고 출마하고 낙선하는) 변희재와 그 주변부를 비집고 들어가 밀착 취재를 해나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 하나하나에서 감독은 플레이어가 되어 등장할지언정, 내레이터가 되어 개입하거나 해석하거나 정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강의석이 왜 변희재 옆에 있느냐’가 영화의 주요 갈등축 하나를 담당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비중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셨지만 아뇨 그게 그렇지가 않다니까! 당신이 어느 정도는 이 서사를 추동하고 있다고!)

-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각자의 판단을 할 근거 자료로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하기 힘든 컷일수록, 그 리액션도 시원찮습니다. 예컨대 변희재가 도림천 농구장에 나가서 사람들과 농구를 하거나 서울대에 가서 졸업증명을 받아 오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건 제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 다른 관객들에게는 다소 당혹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뭐지? 왜 웃긴 게 안 나오지? 뭐라도 좋으니까 한심한 모습 좀 나와라’ 같은 분위기였달까.

- 애초에 이 영화에서 정말 웃긴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예컨대 그 악명 높은 주옥순 대표가 변희재와 함께 다니며 지역구 주민 추천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장면은 어떨 것 같은가요? “왜 안 찍어준대” 묻는 주옥순에게 “저거 좌파야” 단언하는 변희재만큼이나 우스운 블랙코미디는, 적어도 제게는 바로 그 직전 컷이었습니다. 주옥순씩이나 되는 사람(영화에서 자막으로 엄마부대 대표라고 명시해 줍니다)이,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근사근함으로 굽실거리며, 변희재의 앞에 서서 막도장 날인 한 번을 구걸하고 다니고 있거든요.

- 또는 이런 장면이죠. 변희재 캠프 선거인단 중 한 명이 삭발로 유권자에게 호소를 하자, 다른 선거인단이 천진난만하게 “나도 삭발할 거에요”라고 합니다. 되레 변희재가 기가 차서 담배를 물고 묻습니다. “…대체 어느 유권자에게 호소를 하려고 삭발을 한다는 거야???” 이 장면은 가히 이 프로젝트가 뽑아낸 최대 성과로서 빛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절묘하게 사람 말문 막는 광경인지는 직접 보셔야 합니다.

- 왜 이 컷들이 웃기는가 하면, 적어도 제가 해석하고 종합한 바,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보수 집결’의 실체 내지 실상을 좀 우스운 느낌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보수 집결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과의 엉성하고 느슨하며 쓸데없이 결연한 연대감이라는 게 저의 감상입니다.

- 거듭 강조하지만, 영화는 이 감상을 유도하거나 제시하지 않습니다. 제가 멋대로 내린 결론일 뿐이죠. 여러분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네요. 다음 단락은 다소 덜 객관적인, 저만의 감상과 해석입니다.


- 변희재 옆에 꾸준히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는 ‘성호스님’을 곁에 두고, BJ검풍을 곁에 두고, 덩치 좋고 말수 적은 골수 “일게이”를 자기 선거원으로 둡니다. 강의석은 변희재가 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변희재 옆에 비집고 앉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다르죠. 아무튼 주옥순이 있고, 다른 보수파 선거원들이 있습니다. 그들 하나하나와 변희재가 어떤 관계이고 무엇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이루는가를 지켜보다가, 2017년으로 점프해 코엑스 앞에 총집결한 탄핵 반대 시위대에서 환영받는 변희재가 나오는 걸 보는데, 느낌이 쎄하더랍니다.

- 예컨대 이런 요약이 가능한 겁니다. 변희재란 어떤 인물인가? 그 사람 자체는 산 좋아하고 술 담배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빨갱이를 죽여라~” 외치고 다니는 땡중을 굳이 선거차량 자기 옆 자리에 태우고는 그걸 말리는 양 아주 의미 불명한 웃음만을 짓는 사람이다. 아니면, 지하철역 출구 앞에 아침부터 나가서 인사하며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1인 시위자에게까지도 명함을 돌리기는 하는데, 그런가 하면 그의 선거원과 1인 시위자가 ‘빨갱이’ 운운으로 시비가 붙을 때는 자기 선거원의 어깨를 감싸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 허공을 보며 아주 애매한 웃음을 애써 지어 보이는 사람인 것 또한 분명하다.

- 이 기분 나쁠 정도로 일관되고 모순된, 전혀 ‘논객 변희재’답지 않은, 분명치 않고 웃어넘기는 듯한 웃음. 어쩌면 바로 이 불분명함이야말로 (전혀 분명한 ‘애국’이 아니었던) “애국보수”를 집결시킨 무엇이 아니었나 합니다. SNS에 남긴 ‘불명확하다(uncertain)’라는 감상은 먼저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 잠시 한국정치 얘기를 좀 할까요. 이른바 “세월호 정국” 이후 보수 특히 수구 진영은 사회적 도의라는 것에 좀 많이 질려 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자유시장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고 싶은 분들에게 “진실을 인양”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듯한 그 분위기란 사실 거북하고 불쾌하며 (굳이 따지자면) 이중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었거든요. 사회의 쓰레기통인 일간베스트가 총대를 메고 그 거부감을 수면에 띄워 주자, 비로소 수구 보수는, 사실은, 이 총체적이고 묵시적인 거부감을 바탕으로 하여 느슨하게 집결하게 됩니다.

- 이 ‘싫음’, 이 (“빨갱이“를 향한) 혐오 정서에 공감하기만 하면 무조건 애국 보수였던 시절이었기에 이때는 다들 ‘애국진영’의 깃발 아래 헤쳐모여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꽤 적당하고 엉성하며 사실은 꽤 위태로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결사체였고요. 오직 강의석만이 변희재라는 인물 그 자체 때문에 그의 옆에 있었고, 한참 뒤에야 그의 인터넷 방송을 보게 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진정으로 궁금해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강의석 같은 것이 ‘변후보님’ 옆에 있느냐고.

- 그래서인지 그동안 그는 시종일관 진심이 담기지는 않은 듯한 웃음을 웃습니다. 그저 뭔가를 무마하려는 듯, 어떤 상황을 대강 퉁치려는 듯, 누군가와 그저 좋게 좋게 가려는 듯. 혹시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자기가 속한 우파의 당시의 연대는 반드시 그렇게 좋게 좋게 무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본질적으로 당시 우파가 가지고 있었던 연대감의 근거란 ‘반감’이었음을. 그나마 그 반감이란 게 실은 인륜에 대한 ‘과도한’ 요구에 대한 반감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전면에 내놔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일단은 애국을 한다는 것으로 해야지, 아무리 “빨갱이”가 미워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하거나 노골적으로 지지해선 안 된다는 것을.

- 모르는 일이죠. 여기서부터는 영 생각이 꼬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아무튼 돌아와서 정리를 하자면, 영화는 이렇게 철저히 주변부를 관찰(하게 )함으로써 당시 “수구꼴통”들이 어떤 느낌으로 일하고 생각하고 뭉쳤나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냥 단지 희귀 푸티지로서도 가치가 있는 장면들이 있어요. 예컨대 성호스님과 같은 선거사무소 직원들이 “길에서 욕 좀 하지 마시라” “내가 언제 몇 시에 욕을 했다는 거여” 삿대질하고 싸우는 장면은, 너무 짧아서 문제지, 순수한 싸움 구경으로서 볼 만합니다.

- 그리하여 바야흐로 영화는 다급하게 줄거리 아닌 줄거리를 매듭짓고 끝을 냅니다. 다니지도 않는 교회에 들어가 ‘차별금지법 입안반대 서명’에 사인하고 선거 운동을 하던 변희재는 527표를 받고 낙선하고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자위를 하고, 아니나 다를까 2017년의 탄핵 정국이 되어서는 태극기 인파 속에서 끊임없이 지지자들의 인사를 받는 인사가 됩니다. “대통령이 불법한 게 없다고.” 그의 발언과 표정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여전한 가운데 영화상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강의석에게 초대받아 가는 곳은… “차별금지”를 외치는 영화의 상영회였다고 합니다~ 변희재는 데꿀멍 상태로 영화를 다 봐야만 했다고 하네요,, 띠용~

- 네 이게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최근의 한국 다큐멘터리 시장의 흐름과 전혀 상관 없이 제 갈길 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지식하달까 고루할 정도로 기본적인 그런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되어 나왔더라고요. 다 보고 나서 딱 어떤 감정이 느껴지면 되는 다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다 보고 나서 어떤 감상도 들지 않거나, 본 사람이 알아서 감상을 종합해 의견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기록영화.

- 이러한 사실 그대로서의 장면들은 어떤 진실이나 서사적 종합을 분명히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희재란 누구인가, 그를 호명하는 애국청년이라는 지시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철저히 관객에게 맡겨지죠. 저의 요약감상평에서 쓴 단어 ‘불명확함’은 두 번째로 바로 이 점을 짚고자 한 것입니다.

- 여기서는 이게 문제가 되겠죠. 이 불명확함은 유효하였는가? 그러니까, 예컨대 변희재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그 규정을 뒷받침하는 변희재를 골라 보여주고, 자막과 내레이션과 악마적 편집을 총동원해 그 규정을 극대화하는 명확함을 채택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는가? 일단 영화는 자신 있게 YES라고 답하는 모양입니다. 감독도 관객과의 질답에서 말합니다. “더 찍을 수도 있었는데, 사실 패턴이 비슷하더라고요. 이 정도만으로도 변희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건 충분했던 것 같았습니다.”

- 저요? 저도 유효하긴 했다고 생각합니다.


- 변희재를 데리고 인간극장을 찍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일단 관련 KBS 내부 인사 전면 숙청을 요구하는 내외부 목소리가 터져나오겠죠. 뭐 그걸로 얘기는 진작에 끝입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기획이 통과되면, 무엇이 방송되어 나갈까요? 어쨌든 ‘인간극장’이니, “크 변듣보도 사실 알고보면 인간이야~” 같은, 어쩔 수 없이 다소 옹호적이고 친화적이며 거리감이 무너지는 톤 앤 매너로 나오게 되겠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변희재 본인은 이 영화를 보자) 되게 싫어하더라고요.”

- 거기에는 어떤 관객이 질문 중에 표현한 바 ‘냉소적 시선’의 역할이 큽니다. 강의석이 변희재와 함께 그야말로 사막에서 정글에서 때리고 뒹굴며 울고 웃는 동안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정 거리감은 유지가 됩니다. 감독도 마지못해 그 존재를 수긍한 그 냉소적 시선과 냉정한 거리감이, 그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절묘한 온도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합니다. 뭐랄까 강의석이니까 가능했지 싶습니다. 막말로, 그도 변희재도 ‘상돌아이’로 불리기만 하지 남들이 정작 잘 몰라주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요.

- 한국 사람들에게 이 온도와 거리감과 시선은 낯설기 짝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간, 여러 경제적 사정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좋은 거냐 나쁜 거냐를 정해 놓고 봐야 했고, 누구를 소개받더라도 우리 편이냐, 얼마나 잘 대해 줘야 하느냐를 따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 판단을 접어두는, 사전 가치 판단 세팅이 되어 있지 않은 정보들은 ‘뭐 어쩌라는 거냐’로 일관되게 매도되고 배제되거나, ‘이것도 그쪽 수작인가?’ 같은 엄한 혐의의 검증을 굳이 받아야 했지요.

- 이 영화 역시 사람들의 섣부른 가치 판단을 거부한 결과, 본의 아니게 부당한 가치판단을 역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저쪽에서는 변희재 돌려까는 영화다, 강의석 같은 좌빨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있고 이쪽에서는 꼴도 보기 싫다, 보나마나 빨아주는 거겠지, 하고 있고요. “영화관에 전화를 했는데 (한번은) 제목만 듣고도 거절을 하는 거에요. 극장주님이 변희재 이름만 들어도 싫어하신다고.” 그래서 이 영화는 공정한 비평이나 대중의 감상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말이죠.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청각적으로는 상당히 괴롭고 시각적으로는 희귀한 볼거리들이 평타를 쳤으며 정신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대학 수업 기말고사 문제를 푸는 기분이었습니다. 현대 한국 다큐멘터리만 딥다 다루는 전공 과정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 커리큘럼에 들어가야 합니다. 추앙될 필요는 없고, 비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ㅅㅂ 아무리 그래도 넷플릭스 정도는 배급하게 해 줘도 될 것을 진짜 너무들 한다 싶습니다.

- 강의석 차기작이 궁금해지네요. 노네임 필름 자체는 상당히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라서 유튜브 채널을 구독해둘 만합니다. 뭐 일단은 출산과 육아를 하고 나서 식당이 안정궤도에 접어들면 뭐든 알아서 생각을 하겠죠?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변희재는 오늘도 자기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내 알 바인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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