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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전혀 안) 사소한 계기가 있어서 문득 깨닫는 것 하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그것은 어쩌면, 이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을 떠나는 가장 큰 규모의 휴가, 그러니까 월차(月次)도 연차(年次)도 못 따라오는 엄청난 기간의 명차(평생에 한 번꼴의) 휴가인 것은 아닐까?

출애굽기의 모세와 그 백성들은 구원 언약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받는다. 그들은 무려 430여 년에 걸쳐 누적된 피로에 지쳐 있었고, 바캉스(?) 장소는 방금 막 가나안으로 정해졌으며, 그 땅 소유자의 초대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찾아가서, 휴가를 쓰겠다는 형식의 요구를 한다. 그러니 돌아오는 답이 알기 쉽게 의미심장하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출5:17)

일하기 싫으니까 제사를 드리러 간다? “히브리 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그들은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그 섭리 안에서의 복락과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므로, 적어도 그들은, 일하다 죽으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일하다 죽기를 원하는 인간이 있기는 한가? ‘지금이야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휴가도 제대로 못 쓰고 있지만, 기회만 되면 언제고 때려치우고 남은 휴가 몽땅 털어서 떠나버리겠다’ 벼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기 위해 산다. 야훼의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 세계관을, 나는 지지하는 바다.

그런 의미에서 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더 생각해 보자. 쉬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휴가를 내기 위해서는, 앞의 출애굽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피곤해야 하고, 쉼으로의 초대가 필요하며, 갈 곳이 있어야 한다. 피곤하지 않은 쉼이란 그냥 노는 것이고, 갈 곳 없는 휴가란 방황이며, 허가나 권한 없는 휴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초대가 필요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20:8-11)

그런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몸의 부활과 영생과 구원과 천국으로의 초대 티켓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생 힘써 일하다 어느 날 죽는 것이, 그것 그대로 휴가가 된다. 피곤한 삶이 있고, 복음의 초대가 있고,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직속상관께서 한 번 쓰라고 하시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일평생에 한 번뿐인 휴가로서 성립한다.

사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직까지도 2개월에 한 번씩은 죽음이 두려워서 잠을 설치는 새벽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렇다. 사도신경에서 유일하게 자신 없는 대목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부분이니까. 난 내가 관에 들어가 누워 영겁을 보낼 생각만 하면 머리털이 죄다 곤두선다. 이쯤 되면 유년기의 심리적 외상이 의심될 법도 한데, 원인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전부터 그렇게도 가고 싶던 어떤 행사가 있어 갖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그 입장 티켓을 확보하니까 딱 그제서야 “아 이 기간에 중요하게 할 일 있다” 깨닫고 주저앉고 보니, 어쩐지 이런 생각이 뒤를 잇는다. 이번이야 이 일이 있으니 못 가지만, 나 천당 가는 그날에는 제아무리 모진 세상이라도 “일해라 절해라” 하지 못하고 별수없이 날 주님 곁으로 보내주겠지? 그땐 정말 다음주 스케줄이고 월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서 누리면 되겠지?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이론적으로나마, 죽음이 덜 무서워지는 밤이다. 우선은 오늘 밤새 해 주기로 한 일감을 좀 처리하겠다. 이 한 세상 살면서는 정말 빡세게 주님 나라 일을 하고, 휴가는 잘 아껴놨다가, 명차휴가로 한번에 몰아 딱 쓰고, 깔끔하게 집에 가야겠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빌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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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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