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는 생각인데, 지나치게 나빴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되지만,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된다.
오말찬 페이지 포스팅을 리뷰하다가 문득 생각했던 것은, “전하세 예수” 모델의 “경배와 찬양”이야말로, 이게 폭발을 하던 90년대에 시작해 지금 이때까지, 교계와 거기 속한 이들 모두에게 양(+, positive)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소위 온 민족과 나라들(“All Nations”)을 위해, 온 민족과 나라가 떼로 들고일어나서, 한 자리에 와르르 모여 우르르 꺼르르 극적이고 스펙터클한 종교적 경험을 가져 그로부터 영적 각성을 일으킨다는 기획이고, 사실 이는 지극히 인공적으로 치밀하게 조제된 경험이었지만. 1
이 영상 댓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모두가 이 시절을 말도 못 하게 그리워한다. 저때가 좋았다고, 저때는 참 전세계를 돌며 헌신했었다고. 나는 이것이 그냥 훈훈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하나의 트라우마 증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걸 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우리는 근 20여 년간 꾸준하게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숱한 크고 작은 교회에서, 각종 선교 단체에서, 무슨 집회 무슨 부흥회 때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저 집회 참가자들이며 연주자며 하스데반 목사라도 된 듯이 목청을 높였고 손을 들었고 방언을 읊었다.
그리고 저 좋은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저것은 지나치게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 양(+)의 감정을 갖는 사후외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부의 감정을 갖는 음의 트라우마 ― 일반적으로 말하는 트라우마 ― 가 지나치게 안 좋은 경험이고, 재현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양의 트라우마는 지나치게 좋은 경험, 그래서 재현하고자 하지만 필연적으로 재현되지 못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의 트라우마가 그렇듯, 양의 트라우마 역시 필연적으로 자가당착, 부조리, 불행으로 이어진다.
당장 전하세 예수 예배모델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만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그게 얼마나 임팩트 있고 강력한 경험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매주 주말마다 저 많은 교회의 “찬양팀”들은 끔찍한 수준의 아마추어적 하위 음악 문화를 존속시키게 된 것인가. 그 집회, 그 밴드, 그 목사님의 음반을 듣고 카피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자기들이 그런 걸 올려드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그걸 콘솔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헛웃음 웃고 있는 동년배 작가의 차가운 냉소를 받으면서.
나는 이 트라우마가 21세기 인류 전체의 공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 보라. 20세기말 내내 ‘신세계가 온다! 미래가 온다!’ 잔뜩 부풀어서, 그 미래에 뒤지지 않으려고 온갖 혁신을 일궈내다가 막상 21세기가 닥치고 아이폰이니 알파고니 넷플릭스니 드론이니 하는 것 몇 개 받고 “이게 미래다! 끝~” 하면 어떨 거 같은가? 다들 ‘응? 이게 다야? 띠용~’ 하고 어리둥절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눈과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느라 못 돌이켜보았던 인류의 정신은 이쯤에서 잠시 휴지에 들어왔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좀 돌아보자니,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과거로부터의 양의 트라우마들이 이제금 다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2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70~90년대 콘텐츠/브랜드/컨셉의 리바이벌 붐은 그 증거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 그 시절 어린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돈을 쓸 수 있게 된 점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수가 없다. 지금의 어린이들을 위한 콘텐츠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냥 다들 과거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 지목하는 부분이다. 나는 한끗만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이건 착취가 아니라, 불가능한 과거로의 추구이고, 하나의 사후외상 증세이다.
스트리트 파이터와 모탈 컴뱃이 지금도 새 작품이 나오는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조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들 그걸 그냥 과거 추억팔이가 아니라 진짜로 지금 소비하고 있단 말이야? 잠시 후에는 스타워즈 배틀프론트 2라면서(심지어 2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도 듣는다. 게임을 하지 않지만, 이건 충분히 이상한 징조다. 왜 이래? 뭐 다음엔 ‘풀하우스’나 ‘프렌즈’ 시트콤이라도 리메이크하려나 보지?
왜 아니겠는가? 풀하우스 리메이크는 정말로 진행중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까지의 세계적 호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들 꿈 같은 시절을 보냈거나 적어도 꿈을 꿀 수가 있었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런데 그게 지나치게, 불가능하게 좋았다. 파티는 끝났고 더 이상 그렇게까지 모든 것의 생산량이 급증할 수는 없게 됐다. 자연히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것도 해볼까?’ 하는 시도들이 하나둘 종적을 감췄다. 마치 모두가 하스데반 목사님의 좋은 집회가 끝난 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마음 속으로 내심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그 잔감을 적절히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한 탓에, 그것은 영 실망스럽기만 하던 알루미늄색의 21세기 초엽 내내 묻혀 있다가 이제 와서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발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험이 지나치게 좋기만 해도 문제지만, 그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의 속알맹이가 잘못돼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한국 라이트노벨계가 정확히 그렇다. ‘미얄’과 ‘오라전대’로 대표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꼬리를 찾아줘’ 류의 방향으로 갈 것인지 망설이던 한국 라이트노벨은 ‘나호’의 등장 이후 완전히 모에부타 컬처가 되어 버렸다. 적어도, 작가 지망생들의 세계에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카넬이 지나치게 크고 전형적이고 유일한 경험을 제공한 이래, 그 세계는 완전히 뒤틀려 버린 상태다.
그들은 서로에게는 설정이 괴상하다느니 맞춤법이 맞지 않다느니 스토리나 캐릭터가 이상하다느니 온갖 독설을 퍼붓지만, ‘감평’을 부탁하며 내놓는 작품이라는 것들이야말로 사실상 “나호가 되고 싶은데 그걸 대놓고 들킬 수는 없고 해서 이것저것 바꿔 끼워서 그럴듯하게 만들고 자기만의 오리지널 개그 몇 줄을 추가해 놓은” 딱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는데, 한국 라이트노벨 작가 지망생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정확히 ‘나와 호랑이님!’이 거기까지만인 것으로 딱 폐쇄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니 뭐가 나와도 막 그렇게 엄청 새롭거나 재미있지 않게 된다.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프랜차이즈,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상상의 세계와 지평이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이럴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좋았던’ 경험을, 따라서 재현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재현하려는 시도를 의식적으로 배격해야 하는 양의 트라우마적 경험들을, ‘나호’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읽은 작가 지망생들은 미처 의식적으로 배격하지 못하고 그 트라우마에 걸려 그걸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추구는 불가능하고 부조리하며 따라서 불행하다. 예배자들이 ‘올네이션스’에 대해서, 게임 시장이 ‘스트리트 파이터’의 시절에 대해서, 모든 종류의 소비자들이 모든 종류의 90년대의 유산으로부터 지금 그러하다.
대책은 있을까. 평소의 지론을 펴 보자면, 적당히 좋고 온전히 건강한 것들의 보편화만이 이 병질을 다스릴 수가 있다.
우선 다들 환상을 좀 깨야 한다. 그렇게까지 엄청 좋은 스펙터클이, 그렇게까지 엄청 자주 일상적으로 우리 삶에 제공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폭풍우를 창 밖으로 바라보는 것은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폭풍우가 내릴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맑거나 대충 구름이 껴 있으며, 시중에 나온 소설의 대부분은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교훈적일 뿐 불세출의 걸작은 그야말로 불세출로 나온다. 모든 아이돌이 톱스타가 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예배 순서는 은혜 받는 기분과 성령 충만한 느낌이 그렇게까지 엄청나지는 않다든가 등등.
그리고 거기서 더 나가서, 그렇게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주어지는 각 분야의 대다수 콘텐츠들에서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오말찬 페이지가 교계 ‘예배 문화’ 비판과 병행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말씀 찬양’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커스나 예△전도단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부르든 어쨌든 적어도 가사는 훌륭함이 보장될 ‘시편’을 가지고 찬송하기 시작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라이트노벨도, 각종 게임 프랜차이즈도 그렇다. 대작이 될 필요 없고, 스펙이나 무슨 보너스 피처나 특전 상품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낸 돈 값을 하고 약속한 재미를 일정량 이상 준다는 가장 기초적인 데서 시작해 줄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소비자들도 ‘지금 여기에 새로 나온’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면, 그들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지금의 경험으로 덮어쓰거나 극복하는 일이 좀 가능해질 것이다. (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그 경험을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유사하지만 다른’ 새 경험을 해내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양의 트라우마 역시 그렇게 극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매번 교회에 갈 때마다 왜 우리 교회 찬양 시간은 여의도광장의 그때 같지 않을까 하는 갑갑한 마음도, 왜 나의 추억이 담긴 이 시리즈가 지금 이렇게 우롱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하는 어처구니 없음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좋았던 경험은 그냥 좋았던 경험이다. 나빴던 경험이 그냥 옛날의 나빴던 경험이듯이. 게임이라는 세계에서, 예배라는 종교 의식에서, 아무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이 가능한 세계에서 그러하다. 지금까지는 다들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그간 우리가 갖고 살아 온 양의 트라우마들을 좀 진지하게 직면해야 하지 않나 싶다. 파티가 끝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가서 밥을 지어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일상을 좀 찾을 일이다. 그닥 좋지도 그닥 나쁘지도 않은, 하지만 건전한 경험들이 충만한 그런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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