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7zip 이 시스템 환경 변수에 없다면 추가해 준다. 이 부분은 '환경 변수 추가'라고 검색하면 이미 다 나오므로 생략
2. 여기에서 적당한 identifier 숫자를 찾는다. 일본어로 압축된 파일의 경우 아마 932 (shift_jis)
3. cmd, 파워쉘 등을 열고 다음을 실행한다.

7z x 압축파일 -mcp=찾아놓은identifier숫자

예를 들어 압축파일 경로가 C:\foo.zip 이고 mcp가 932라면:

7z x C:\foo.zip -mcp=932

4. 될 때까지 2~3을 반복한다. 끝.

반디집 없어도 되네 ㅋㅋ 참고 매뉴얼

Posted by 엽토군
:

때는 금요일 오후 6시 40분쯤인가였고, 기본적으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으며, 아직은 퇴근을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 팀별로 한두세 명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중 개발팀 당번이 된 꼴이었고, 기획팀에서는 내 등 뒤 저쪽 자리 아이맥 앞에 앉은 모 과장님이 그랬던 모양이다. 나야 지난 몇 주간 무슨 되도 않는 초등영어 라이브방송 관련 기획 구현하느라고 상습 야근 중이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저 과장님은 요즘 뭐가 바빠서 갑자기 야근을 하시지? 하고 좀 궁금해하고 있으려니까, 마침 그 과장님이 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등 너머로 물어본다. "엽토군 씨… 왜 퇴근 못 하고 있어요…?" 이걸 진지하게 답하고 싶지 않아서 되물어봤다. "과장님은 왜 퇴근 못 하고 계시는데요?" "몰라요… 엽토군 씨 일 많이 힘들죠…?" 힘들다고 답할 힘도 안 나서 그저 잠자코 있었더니, 머쓱하다는 듯이 뒤늦게 덧붙은 말 한 마디.

다 뜻이 있으셔서 그러실 거에요 그쵸? 엽토군 씨 교회 다니잖아요.

유일신의 의지를 믿는 종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그런 신앙의 관점을 존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 여기엔 당연하게도 대다수 멀쩡한 기독교인이 해당되고 ― "신의 뜻"에 대해 가장 많이 잘못 이해하는 것 두 가지는, 첫째 우리 인간이 당하고 있는 각종 곤란과 고통이 그 자체로 신의 뜻에 포함된다는 것이고, 둘째 결국 그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곤란과 고통에 대해 "다 뜻이 있으셔서"라고 주억거릴 수 있게 된다.) 둘 다 신의 뜻을 원천적으로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관점이다. 그래서, 서로를 직접 알아가려 하지 않는 커플들이 기계처럼 주고 받는 기호화된 성애적 상호작용이 바로 그러하듯이, 이러한 신정론적 결론 역시 덮어놓고 쌓아올리며 생활해 나가다간 어느 순간 반드시 그간 쌓였던 오해를 터뜨리며 믿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된다.

우리 인간이 당하고 있는 각종 곤란과 고통이 그 자체로 신의 뜻이라면, 그건 그 신에게 너무나 무례한 소리이다.

그게 무슨 신이냐 말이다. 기본적으로 신은 인간의 곤란과 고통을 가여이 여기고 해결해 줄 존재로 이해된다. 신이 그 본질상 인간을 초월하는 전지 전능 전선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필연이며, 그래서 실제로 세계 어디의 어느 시절 종교관이든지 이 부분에서는 딴소리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중간에 뭔가 아주 단단히 잘못 이론화되어 전파된 청교도식 기독교만이 이런 영적 구속구를 차고 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이건 정말이지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도 민망한 얘기다. "오 주님! 저는 지금 너무나 아프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생기고 웃음이 납니다! 자! 저에게 더 큰 고난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사 저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을 똑똑히 보아 주시옵소서!" 음, 써놓고 보니 별로 변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각종 수련회와 기도굴에서 오늘도 쩌렁쩌렁 울리는 통성 기도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까?

기독교에만 한정해서 얘기하자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궁극적으로는 아담을 조상으로 갖고 태어난 우리의 잘못이다. 그리고 아담을 빚은 하나님의 뜻은, 아담 옆에 선악의 나무를 두시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결같이 딱 두 가지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릴 수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좀 사이 좋게 불화 없이 잘 지내기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베어물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 말하자면 수오지심이라는 게 생겨난,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적 없는 관습과 제도와 행동 양식을 구성하기 시작한 ― 그때부터, 인간사에 일어난 일 중, 정말로 그 하나님의 뜻 두 가지가 실현되었던 순간은 눈물겨우리만치 드물었다. 그래? 다 뜻이 있으셔서 내가 근무 시간 다 끝나고도 테스트 결과 기다리며 야근하고 핫픽스 올리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거지? 솔로몬과 로마 황제와 트럼프를 다 지켜보신 하나님은 그런 발상에마저도 애써 동의하려고 노력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야근하고 있는 건 그냥 일이 많아서다. 내가 일이 많은 이유는 그냥 이 회사가 이래서 그런 것이다. 이 회사가 이 모양인 이유는 그냥 오늘날 이 나라 경제 돌아가는 꼴이 이 꼴이어서다. 그렇다면 내가 야근하는 것은 누구의 뜻이랄 것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이 체제를 이렇게 굴리고 있는 인간들의 더 큰 죄악에 의해 아래로 캐스캐이딩 되어 우리 회사 내 자리까지 내려온 악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걸 한 번도 의도하신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주님은 그런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쓰시는 분이다. 보아라! 사탄이 심지어 너희를 밀 까불듯이 까불게 해 달라는 이슈 티켓까지도 열어 놨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나니…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자. 우리의 믿음이 더 정확해지고 성숙해지고 완전해지기를. 체념하듯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별로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우리가 자초한 이 모든 곤란과 고통을 신 덕분이라고 결론짓는 습관을 그만둘 수 있기를 말이다.

신 덕분이라고? 신의 탓이 아니고? 그렇다. 잘못된 관념 그 두 번째에 의하면, 우리가 자초한 이 모든 환란과 고난은 신 덕분에, 결국 다 좋게 좋게 끝난 해피 엔딩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해피 엔딩으로 가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하여간 언젠가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고, 더 이상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헤어짐이 없는 세상이 오고야는 마니까. 근데 말이지요, 결국 어찌저찌 해서 다 좋게 좋게 되었더라 하는 이야기라고 뭔가를 요약하는 건,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 또는 수치가 되는지 압니까요들? 좋은 서사일수록 뿌려진 떡밥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며 훌륭하게 회수된다. 애초에 정말 잘 지은 이야기라면 필요 없는 떡밥은 절대 아무렇게나 흩뿌려지지 않는다. 반대로 나쁜 전개일수록 이것도 했다 저것도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알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다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여 막을 떨어뜨리고 도망가는 법이다. 19세기에 세계 대전쟁을 하고 20세기에 세계 대전쟁을 또 하고 21세기에 세계적 유행병이 또 퍼지는 이 인류 역사가, 정말, 주님 재림과 휴거 한 방으로 모두 갓띵작 해피엔딩 된다고? 그게 무슨 뻔뻔스러운 궤변인가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 해피엔딩이란,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장면이란 언젠가 지금이 아닌 미지의 나중에 한방에 빡 하고 오는 대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해 수시로 발현돼야 하는 상태인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이 시간 야근을 하면서 결제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 결제 테스트가 잘 돼야 결제가 잘 될 거고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잠재 고객들이 우리 상품을 이용할 거고 그래야 그들의 삶의 질이 올라갈 거고 그래야 경제가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고 '나인 프론티어즈'의 비즈니스 영역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거라서?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냥, 실제로 결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결제 테스트를 해보자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게 다다. 일은 일일 뿐이다. 내가 무슨 새마을 운동이며 실업 선교사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결과만 말씀드리면, 결제 자체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 다음 처리가 이상하다는 리포트가 들어왔고 실제로 보니 내가 놓치고 지나간 부분이었어서 앗 죄송합니다 하고 그 부분을 고치고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런 거다. 갖은 일이 결국 선을 이룬다는 건, 결국 그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랄까 사실은 언제나 딱 그런 정도까지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요컨대 거창해지지 않고 너무 멀리 허황되이 바라지 않고 지금 이 광야와 땅끝에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그곳을 개간해 나가는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그렇게 했다. 물론 처음에야 빌리 그레함 같은 파송자들이 "가라! 주 영광 위하여" 하니까 "가야겠다" 하고 왔겠지만, 와서 살아보니 이건 내가 예수님을 전하고 어쩌고 그 이전에 병원부터 학교부터 좀 있어야겠다고 정신이 드는 거지. 그래서 예수님 전하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그 지역 그 영혼들의 필요를 채우며 열심히 손해를 보다가 죽은 것이다. 그 삶이 고스란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저렇게 손해 보다 죽었을까' 하는 감동이 되어 그 지역을 기껏 복음화해 놓았더니, 그 후손들은 어째서인지 "주 영광 위하여" 어쩌구 하면서 세습하고 부동산 놀음하고 태극기 흔들며 광화문과 국제분쟁 지역으로 밀어닥치는, 거창하게 하찮은 삶을 살고 있다. 아니면 정반대 방향으로, 이를테면, 노조를 결성하고 법을 바꾸어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을 수요기도회의 침묵 속에 유야무야 떠내려보내는 온순한 기독교인들이 되어주고 있다. 그 부조리마저도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이용될 거라는, 지배 계급이 좋아하는 한숨 섞인 믿음으로.

그 과장님께는 이렇게 길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생각 하지 않으려고 해요. 일은 일로 해야지요. 이런 일 하나하나에 하나님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일 하는 사람 없단 말이에요. 그마저도 맨 끝의 요지는 적당한 예시가 생각이 안 나서 헛소리처럼 뭉그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금요일 퇴근 직전에 동생에게 전화하여 오늘 퇴근하면 치킨을 먹자고 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저녁을 굶었고 8시 좀 넘어서 퇴근해 기어코 치킨을 시켜 동생과 먹고 잤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 뒤지겠는데 하나님 너 이 새끼는 빨리 튀어나와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 빨리 퇴근시켜서 선을 이뤄줄 것이지 대체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뵈십니까?' 같은 소리를 하지 않고, 대신 그냥 약속을 지키고 할 일을 한, 그래서 나쁘지 않은 편이었던, 그런 저녁이었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엽토군
:

제로보드 4가 아직 현역이라는 (실화)공포 스토리를 트위터에 올려 RT좀 받은 게 언젠데 아직도 PHP 4~5의 망령은 가시질 않는다...

MMB라는게 있는 모양이다 일단은 CMS 프레임워크인데... 전해들은 말로는 원작자가 20년전에 손을 놨으며 스킨 개발자는 10년전쯤에 연락 두절됐다는 뭐 그런 소스이다... 그런데 아직도 누군가가 다운받아서 깔아서 쓰고 있다... 아 너무 무섭다...

index.php를 VS Code로 까봤는데 인코딩이 깨진다. 아니나 다를까 다 EUC-KR 인코딩된 파일...
이게 돌아간단 말인가...
암튼 소스를 까봤고...

<?
include "env.php";
include "lib.php";
include "config_data.php";
include "option_data.php";
include "mtype_plugin/extend_lib.php";
include "mtype_plugin/db_admin.php";
include "KDM_skin_data.php";
include "KDM_fontcol_data.php";
include "KDM_tb_data.php";


header ("Pragma: no-cache");

$ad_ico = "<img src='$ad_icon' border='0' onerror=\"this.style.display='none';\">";
$maxleng_w = strlen($max_width);
$maxleng_h = strlen($max_height);
$emowidth = $cfg_emolist*72; //사용하시는 이모티콘의 가로 사이즈가 클 경우 곱셈 값을 올리세요.

//비공개 게시판 모드
if($mem_login=='on')
	{
		if($memberlogin == $cfg_member_passwd);
		else
			{
			gourl("./admin.php?member=1");
			exit;
			}
	}

if($memberpasswd === $cfg_member_passwd)
{
  setcookie ("memberlogin",$memberpasswd,0);
  $isMember = 1;
}
else $isMember = 0;
	// 관리자 패스워드쿠키가 있으면서 관리자암호와 같으면 관리자모드임
if($ckadminpasswd == $cfg_admin_passwd && $ckadminpasswd !="")
{
	$isAdmin = 1;
}

후.. 이 이상은 너무너무 무서워서 생략한다.


제로보드4도 그렇고 사실 이런 류의 CMS Frameworks들은 일관되게 특수한 요구사항들이 몇 가지로 압축된다.

  • no-brainer
    • 시키는 대로만 하면 컴맹도 설치해서 쓸 수 있어야 함.
  • hackable
    • 기능을 넣고 빼고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어야 함.
  • accessorizable
    • "스킨"을 입힐 수 있어야 함.
    • 기본 프레임워크를 그대로 두고 추가 설치하는 것들 - 테마, 플러그인 등으로 흔히 부르는 거 - 을 만들고 배포하고 적용하는 게 가능해야 하며 정말 쉽게 가능해야 함.
  • minimally dependent
    • 의존성은 없을수록 좋음.
    • 무슨 익스텐션이 필수라느니 어디가서 뭘먼저 깔라느니 하는거 질색 팔색이라는 뜻.
    • MMB 는 심지어 DB도 mysql 같은거 안쓰고 자체 파일DB를 쓴다. 그 정도로 의존성이 꺼려지는 것이다. 꼴에 DB라고 쓰기 락까지 구현해 놨던데 진짜 까무러칠 뻔함.
  • compact than extensive
    • 게시물 입력폼, 관리툴 같은 것은 기능이 많지 않음.
    • 딱히 기술적으로 최첨단도 아님.
  • socializing
    • "친목질"이 가능한 수준의 권한관리, 사용자관리, 글-댓글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해야 함.

최근 대부분의 CMS가 반대로 가는 방향성들은 몇 가지 있다.

  • customizing not accessorizing
    • 워드프레스부터 OctoberCMS, 기타 각종 CMS들은 테마, 플러그인 등의 좀더 포괄적이고 기술적으로 타당하고 규모가 큰 개념으로 접근한다.
    • 일반인들에겐 이것조차 장벽인 듯?
  • dependent in the best practices
    • 의존성을 적극적으로 가져가되, 최대한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방법으로 가져가는 게 대부분의 추세다. 사실 그게 맞고. (Composer가 왜 나왔겠나?)
    • 뭘 하기도 전에 뭐 먼저 해라 뭐 먼저 깔아라 하는 건 확실히 장벽이긴 하다.
  • extensive than compact
    • 대부분의 CMS는 관리 도구를 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아직도 폐기되지 않고 돌려써지고 있는 프레임워크들과는 반대다.
    • 대신 이런 '프레임워크'들은 입력폼이 정말 단촐하다. 관리툴도 straightforward 하다. 대부분의 최신 CMS들은 사실 "그래서 새글쓰기가 어디야?" 싶은 감이 없지 않다.
    • 뭔가 이 대목이 아주 묘하다. 우리 개발자들은 최첨단의 굴레에 사로잡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이상은 생각 정리가 안 되므로 이하 생략

Posted by 엽토군
:

오늘 08 동기 결혼한다길래 국수 먹으러 가서 새로 바꾼 폰으로 첫 동영상을 촬영하고 대충 국수 먹다가 오랜만에 대학 선배님과 얘기를 좀 할 일이 있었다. 따로 커피 마시러 나가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다가 대충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근데 요즘은 유튜브로 사람들이 (정보를) 다 접하잖아. 근데 유튜브는 되게 직관적이니까, 사람들이 앞으로는 이런 철학적인 얘기는 잘 안 하고 이해도 못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 맞아요 그럴 거 같아요 바보상자 유튜브 나빠요 같은 맞장구나 치고 넘어가면 좋았을 걸 그 와중에 그래도 성심껏 앞에 앉은 이의 질문에 의견을 내드리겠다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답변을 했다. 음, 글쎄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어린이 학습만화' 같은 걸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비싼 등록금 부어서 철학 공부 찔끔 한 다음 이 나이 먹도록 별볼일없이 살면서 매주 유튜브를 찍어 올리고 있는 입장에서 말이지.

-

일단, 유튜브가 "직관적"이라는 건 좀 뭉툭한 서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튜브는 매우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매체인데, 그렇다고 해서 직관적인 매체인 것은 아니다. 둘은 다르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뭔가가 너무나도 함축적이고 복합적이고 고문맥적인 나머지, 부연 설명이 구구절절 따라오지 않더라도, 그걸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이미 설명이 충분히 제공될 때 그런 걸 직관적이라고 한다. 예컨대 "빨간 버튼"이 그렇다. 그런 걸 회원정보수정 화면 어딘가에 붙여 놓으면, 심지어 그 버튼에 '눌러도 별일 없습니다'라고 써있을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눌렀을 때 별일 없더라도) 사람들은 그걸 함부로 누르지 않는다. 그 버튼을 위험한 버튼이라고 직관해 버리기 때문이다.

유튜브가 시각적으로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걸 문자로 써서 '직관(直觀)'의 매체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어느 쪽이냐 하면 유튜브는 텔레비전이 갖고 있던 "바보상자"의 악명을 계승하는 중인 매체이다. 유튜브는 말초적이고 즉각적이며 단편적인 시각적/지적 자극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이해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종합적 판단, 비판적 수용, 주체적/메타적 사고로부터 이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21세기의 텔레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마윈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같은 퀴즈가 마윈 얼굴보다 더 크게 박혀 있는 섬네일을 눌러, 10분짜리 영상을 보고 나면, 확실히 마윈의 성공 비결에 관한 팩트 몇 가지는 대충 기억이 나지만, 그밖의 내용은 며칠 뒤에 잊혀지고, 그 영상에 대한 '감상'은 있었는지도 모르게 없어지고 만다.

선배님이 의문(또는 걱정)하고 계시던 부분은 이런 맥락이었다. 확실히 기독교는 변증과 서사의 종교고 사람들에게 뭔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 시대다. 사람들은 5분 안에 명쾌하게 시각적으로 주어지는 정답을 원한다. 이런 시대에 과연 우리가 뭘 말할 수는 있을까? 나는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할 수 있다. 랄까 해야 한다. 유튜브 때문에 변증 못하겠다는 소리를 해선 안 된다는 말이지.

그러면 지금 시대에 기독교는 어떤 변증을 해야 하는가? 동시대적이고 성경적으로 정확한 '도식'(diagrams, schema)을 개발하고, 그걸 과감하게 침투시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도식"의 성질에 의해 자명한 바) '직관적'인 그림을 그려 보여줘야 하는데, 그 내용은 성경 진리를 충분히 소화해 압축한 것이어야 하고, 그 제재와 전개는 요즘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가닿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나는 프로그래밍 드립들 중 기독교 진리의 도식에 도움이 되는 게 꽤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바스크립트의 삼위일체이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게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자기 세계의 진리를 매우 정확히 도식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의 해괴망측함도 닮았고, 전체적 교리 이론에서 핵심이 된다는 점도 빼다박았다. 그래서, 이렇게 정확한 도식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적어도 프로그래머들에게는 삼위일체론을 소개하기가 수월하다. 일단 이 그림을 보여주고, "이처럼, 이게 왜 이렇게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성부, 성자, 성령은 타입도 서로 다르고 실질도 다르지만,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 되신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프로그래머들은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알겠다고, 그거 참 희한하다고 납득하고 지나간다. 오히려, 이런 정확하게 직관적인 도식이 없으면, 이런저런 말장난이 늘어벌려지면서 양태론이니 성부우월론이니 하는 요설로 빠지고 만다.

물론 이런 도식적 변증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보급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가장 정확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변증이 굳이 시각적이고 즉각적인 것일 필요도 없다. 실질 내용이 정확하고 온당한 게 더 먼저니까. 그럴 때는 '역설'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첨 들었을 때 당장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싶지만, 동시에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어지는, 그래서 듣게 되고, 듣고 나면 "그런가?" 싶어지는 그런 방식의 설명 말이다.

오늘 선배와 얘기하다가 들은 신학 난제가 대표적인 예다. 자기 군생활 때 어떤 선임이 "근데 하나님은 사람을 왜 만들었어?" 물어보길래 예배받으려고 만드셨다 했더니 당장 돌아오는 답이 "그게 말이 되냐?"였다고 한다. 유구무언이 되고 말았다지. 지금 나보고 이 선임에게 대신 답해주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말이 되죠, 인간을 만들어야 그 신은 진짜로 신이 되니까요." 딱히 궤변은 아니다. 우주와 자연은 신을 신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인간은 신은 신으로 대접하고 추앙할 수 있는 존재다. 기독교에서 신이 만든 것은 그런 존재이고, 그게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게 "예배받기 위해"의 세속적 번역이다. 대예배당의 상자 밖에서 생각해본 적 없는 동료 기독교인들이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히려 이게 소위 "유튜브 시대"의 응전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튜브 시대"라고 해서 사람들이 꼭 짧고 쉬운 것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당장 '뉴스공장' 같은 거만 하더라도 김어준 혼자서 몇십 분간 저 혼자 떠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한 마디나 놓칠세라 경청을 하지 않는가. 왜 그러겠는가? 그게 아무튼 귀에 쏙쏙 박히고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어지고 들어 보니 앞뒤가 맞는 거 같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 모두가 김어준 같은 달변가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뭐라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은 말은 할 수 있다. 지난 몇백 년간 선배님들이 관련 신학적 업적을 다 이뤄 놨으므로, 그 성과를 성경과 함께 씹어먹고 실용적으로 재가공해, 자기만의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 기독교는 진리에 한없이 가까우므로, 정확하게 잘만 전달하면, 인류의 대부분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적절한 도식 및 역설적 설명을 가지고 요즘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톤 앤 매너로 전달하면, 딱히 유튜브 시대건 포스트 유튜브 시대건 삼위일체론이건 간단한 설명이건 기독 신앙 변증 자체는 할 만한 일이라는 이야기다. 겁먹을 필요 전혀 없다. 일본 만화가 개방되면서 "폭력적인 상업만화 성인만화가 청소년들 정서 함양에 해악을" 어쩌구 할 때도 누군가는 과학과 역사를 잘 요약해 놓은 좋은 학습만화 보면서 잘만 자랐고, TV와 인터넷이 호환 마마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그걸로 배울 거 다 배우고 깨우칠 거 다 깨우친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중요한 건 좋은 설명과 충분한 설명력 그리고 동시대 매체에 대한 과감한 장악이다. 가면 갈수록 매체의 발전은 '그런 걸 제공하지 않아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다.

뭐야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누가 요약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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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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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 대학사역이 슬슬 MC 시즌이라고 인스타그램 업로드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니) 이틀 전에 이런 게 올라왔다.

육성 설교로 들으면 눈치 못 채거나 의구심만 갖고 지나갔을 텐데 이렇게 텍스트로 정리된 걸 보니 확실히 알겠는 바, 어떻게 이렇게 속빈 말인지 모르겠다. "가난이란 결핍을 내포한 말입니다." 이 무슨 하나마나한 소리인가? "자신이 어떠한 것에 결핍이 있"다는 서술이, 어떻게 대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늘 갈망하고 찾는" 상태의 서술로 등치되며 도약하는가? 팔복처럼 알기 쉬운 말씀을 가지고 이건 무슨 (말)장난을 하자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알기 쉽다고? 그렇다. 팔복은 알기 쉬운 교훈이다. 이런 블로그까지 쫓아오신 분들이라면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대충 설명을 드리자면... 팔복은 딴거 없고, 당대 세속 필부들의 '복'에 관한 통념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그러면서 진정한 복의 개념을 밝혀 버리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강력하다. 뭐 사실 산상수훈 전체가, 아니 기독교 자체가 바로 그런 교훈들로 구성된 종교지만 뭐 그런 큰 얘기는 안 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건 무슨 말일까? 팔복의 핵심은, 예수님이 나열하고 계신 바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들이, 어째 하나같이 '없는 살림'에 나오는 '아쉬운 소리들'뿐이라는 데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착해빠진("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자비를 베푸는 쪽이 복이 있다.
마음에 숨김이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
싸움을 말리고 중재하려는 사람이 복이 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잘 사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되는가? 복 받은 사람이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남들 싸움을 말리려고 뛰어다니는("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말이지.

잘 생각해 보면 새삼 놀라운 일이다. 세속의 인류는 한 번도 복에 대한 관점을 진실로 재고해 본 일이 없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관점은 시종일관 동서고금 아주 따분하게 똑같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떵떵거리는 것, 배부르고 등 따수운 것, 웃음과 의기양양함으로 점철된 상태, 좋은 건 다 취하고 싫은 건 다 피하는 경지, 뭐 그런 것이 인류가 생각하는 복의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그 정 반대 대척점에 있는 상태들, 예컨대 남들 눈치 보며 산다든가 주리고 목마르다든가 하는 상태가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인류는 단 한 번의 착념도 기울여준 적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상태들이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고, 아니, 그런 상태들이야말로 복 있는 자들의 상황이라고 역설하신다. 그건 이상하게 들린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울고 있는 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자가 복받은 자가 될 수 있다니? 어떻게 그렇게 된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가난해도 복이 있고, 그 가난은 심령의 가난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인 한,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진 이들인 이상은, 그들은 아무리 복과 멀어 보이는 상태에 있더라도 복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만사에 자비를 베풀고 사는 이들은 복이 있고 그런 자들은 슬픔 중에 있더라도 복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전복하여 바로잡고 계신다. 사실은 하나님 그분 자체가 홀로 인류의 진정한 복락인 거라고. 하나님을, 하나님 나라를 가질 때 혹은 추구할 때 그 삶은 복된 것이다. 우리는 복받은 결과로서의 현상들의 일부 -- 떵떵거린다든가 배가 부르다든가 하는 -- 에 천착하고 그게 복인 줄 알지만, 복에 관한 실상은 거기서부터 한참 멀리 천양의 차로 떨어져 있음을, 예수님은 이렇게나 도전적인 역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억지 해석 같지만 나름 근거는 있다. 마5:1-12에 병행하는 구절인 눅6:20-23이 그 뒷부분 눅6:24-26과 대칭을 이루며 '누가 복 받은 사람이며 누가 화를 당한 사람인지'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절을 통해 '무엇이 진짜 복인가'를 설명하신 바로 그 이치와 논지로,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역시나 우리가 갖고 있는 '화'의 개념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말씀을 하시며 '무엇이 진짜 화이고 큰일인가'의 개념을 바로잡으신다. "만약 너희가 너희 자신을 충분히 합리화하였고, 너희가 너희 자신의 소유와 요행에 마냥 자신만만하다면, 너희가 부요하고 배부른 것이 아주 큰일난 일이다.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배고픔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하나님 그분이 없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 그때, 기원후 30년 언저리 중동 한구석에서 오만 군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셔야 했던 그런 맥락을 감안해 보자면, 여기서의 '가난'이란 정말로 '심령의 가난'(심령에 방점을 찍자면, 예컨대 신학적 깨달음에 대한 추구?)이라든가 "심령이 늘 결핍에 있고 그걸 인정" 운운하는 그 정도의 복잡한 관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높은 확률로, 그건 그냥 정말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물리적인 가난을 뜻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을 선포하시며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을 말씀하셨을 때, 그 설교를 듣고 있던 그 필부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매일 매일 살아나가고 있던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으로 곧이 들렸을 것이다. (눅6:20-23은 이 가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하려고 하신 게 아니었다. 그런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이는 평범하고 누추한 그대들의 삶에도 행복이 있다는 벅찬 소식을 전하신 것이다. "너희는 분명 가난하게 살고 있고, 그건 어떻게 봐도 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너희에게는 매일 슬퍼할 일이 끊이지 않고, 매일 매끼 주리고 목말라 괴롭다. 너희는 어딜 가나 착하게 살아야 하고, 싸움을 말리는 억울한 입장이 되어야 하고, 번번이 억울한 핍박을 당하며 산다. 하지만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하나님 그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너희의 복이 되시니, 너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너희는 배고프지만 배부를 것이고, 심령의 가난 외에는 가난을 모르게 될 것이며, 어떤 슬픔이 있다 한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터전을 얻을 것이고, 하나님을 뵐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너희에게 하나님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인 한 너희의 슬픔이며 아픔 등은 너희의 불행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물며 너희가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공갈 협박과 모든 악한 말을 듣더라도 너희는 불행하지 않다. 너희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복이다. 선지자들이 모두 그랬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런 메시지를, 매일 생로병사의 번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들렸을까? 솔깃한 소망의 메시지로 들리지 않았을까? '정말 그런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지? 나처럼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하나님 나라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건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내가 그걸 가질 수 있을까? 까짓거 하나님 잘 믿으면 되는 일인데 할 수 있지 않을까?' 팔복이 그때나 지금이나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복받아 잘 사는 모습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는 차원이 다른 복을 설명하시면서, 그 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시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진정성 있게, 그들의 마음을 흔드시면서, 그러면서도 그 귀에 쏙 들리도록 쉽고 명확하게.


가난하더라도, 슬프더라도,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복이 있고 불행할 수 없다. 사실 팔복에서 이 이상 우리가 더 복잡하게 배배 꼬아서 곱씹을 내용은 별로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뭔가를 창고에 무한정 쌓아올리며 좋아라고 해해 웃는 망할 짓거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과 박해를 일부러 받으러 다닐 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삼위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분 자신이 인류의 복이고, 그분을 가지는 것이 인간 행복의 요체이며, 배가 부르니 배가 고프니 돈이 없니 심령이 가난하니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그 유일한 기준을 갈음하지 않으므로.

명색이 YWAM CMK쯤 됐으면 성경 말씀 공유를 할 때는 대충 이 정도 수준의 연구라도 좀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하고 많은 성경 주해라도 타이핑해다가 올려주면 어디 덧나는가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이라는 어구 하나에 딱 목매어 아무 말 대잔치를 카드 다섯 장으로 늘어놓는 거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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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7:12, KRV)

영 신통찮은 교역자가 담임목사랍시고 부임해 와서는 매주 뜬금없는 본문에 뜬금없는 예화를 붙여 뜬금없는 설교를 늘어놓기가 벌써 다섯 달쯤이 넘었다. 급기야는 이젠 넌 설교해라 난 성경 볼란다 하고 저 혼자 잘못 읽는 성경 본문을 나 혼자 아이패드 미니로 막 읽고 졸고 하다가 성가대석에서 내려오는 마당인데... 지난 주 설교본문은 또 하필 저 구절이었어서, 그 일요일 이후로 사무엘상 앞쪽을 좀 살펴보게 되었다.

그건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막연히 알고 있던 것보다, 더 기묘하고 심오하다.


사무엘상에서 '에벤에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면 3개의 구절이 나온다.  3장, 4장 그리고 7장인데,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그 셋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 3개의 검색결과만 놓고 보아도 사실은 벌써 이상스럽다. 마치, 에벤에셀이라는 곳은, 사무엘이 돌 쌓고 명명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에벤에셀"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 것이다. 이것부터가 요상하지만, 사실은 그 '에벤에셀'이란 지명이 처음 나오는 대목부터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까지를 죽 읽어내려가다 보면, 정말 낯설고 당황스러운 옛날 얘기 하나를 만나게 된다.

소수민족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투민족 블레셋이 진을 친다. 이스라엘은 맞서 싸우지만 4천 명쯤을 잃고 진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전개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를 한다. 우리의 신의 언약궤를 가져다 앞장세우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제사장의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언약궤를 떠메어 온다. 이스라엘은 벌써 신나서 파티를 연다. 그걸 보고 엉뚱하게도 블레셋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전의를 다지면서 이스라엘을 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용맹히 나가 맞서 싸웠더니 더 크게 패했다. 무려 3만 명이 전사하고, 기껏 가져온 그 언약궤는 홀랑 빼앗기고 만다.

뭐? 이 각본은 문제가 있다. 소수 민족, 신의 권능과 상징, 소재가 이쯤 갖추어졌으면 당연히 소수 민족이 신심의 힘으로 승리하는 게 결말 아닌가? 왜 지고 앉았지? 이거 뭔가 플롯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년부, 청소년부, 대예배에서도, 심지어 유튜브나 기독교 라디오 설교에서도 이 서사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항상, "에벤에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식의 너무나 희망차고 달달하며 알기 쉽고 행복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나오던 것이었단 말이다. 살륙이 심히 커서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더라는 역사는 거의 은폐되다시피 했다. 이 문제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데, 가뜩이나 이상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5~6장의 사건을 추동하는 '주인공'은 ― 나도 말하면서 믿기지 않는다 ― 바로 그 언약궤다. 블레셋의 영토로 끌려간 그 언약궤는, 뜻밖에도 보통의 평범한 언약궤들처럼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그 옆에 있던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상을 두 번이나 제 앞에 거꾸러뜨려 육시를 해 놓는다. 블레셋의 사제들이 당황해서 이건 추방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수레를 끌어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에게 그 언약궤를 끌게 한다. "저 소들이 벳세메스 산에라도 올라가지 않는 한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소들은,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아니나 다르랴는 듯이, 곧장 그 산으로 올라간다.

여기까지 집필을 마친 스토리 작가가 좀 지쳤던 모양인지, 결말부인 7장은 좀 맥없이 끝이 난다. 만지는 족족 벌을 받는 그 언약궤를 어찌저찌 굴리고 옮겨서 그 언약궤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고...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심이 돈독해졌는데...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죄를 회개하는 대집회를 열자 블레셋 군사가 그들을 일망 타진하러 몰려왔고... 사무엘이 기도를 하니까 막 번둥 천개가 우르릉 쳐서 블레셋이 패주하고... 이스라엘은 전진하여... 맨 처음에 자기네들이 진쳤던 자리까지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거기에 돌을 쌓아 '도움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했다더라... 뭐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잠시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시라. 이게 무슨 이야기지?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희한하고, 알쏭달쏭하며, 놀라울 정도로 비상투적이어서, 묘한 숭고미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왜 에벤에셀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는가 하면, 앞에서 살짝 힌트를 주긴 했는데, 이 설화가 사실은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궤', 그것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가 주인공인 서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벤에셀 사건이란 언약궤의 행적과 입장을 따라가야만 비로소 읽히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는 억지로 실로에서 소환되어 앞세워진다. 제사장 집에 멀쩡히 잘 있던 언약궤를, 자기들 전쟁에 효험 좀 보겠다고 그 먼 곳 전쟁 최전선까지 들쳐메고 오는 게 뭐 하자는 짓인가? 그걸 또 뭐 좋은 일이라고 제사장의 아들들은 보란 듯이 뻐기고, 사람들은 무슨 경사가 났다고 잔치인가?

그래서, 이 서사의 주인공은 그 상대 악역인 블레셋에게서 필패의 운명의 멍에를 잠깐 벗기고, 그들을 잠시 덜 납작하게 만든다. 그 순간, 첫 전투에서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저 평면적인 악역에 불과했던 블레셋이,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면서 덤벼드는 적극적이고 주관적이며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 상대에게, 여전히 납작하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마는 것은, 심지어 연극론적으로도 타당한 일이다. 언약궤를, 유일신 하나님의 상징과 권능을 무슨 금두꺼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그 언약궤를 모시고 있기에도 과분했던 것이다.

그 언약궤는 계속하여 과격한 행보를 이어간다. 블레셋 한복판이건 이스라엘 접경 지대의 촌마을이건 자기의 권능을 몰라보는 것들에게는 죽을맛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님을 보이며 벳세메스 산으로 꾸역꾸역 올라간다. (그리고 위세 높은 블레셋의 방백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언약궤가 매우 주체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찾았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 주제를 겨우 파악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이 전체 서사의 진짜 주인공 ― 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은 모두가 처음에 납작하게 기대했던 바로 그 평이하고 행복한 결말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그 사연 많고 황량하고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는 바로 그 공터에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묘한 지명 하나만이 남게 된다.

아니지 아마도 사무엘은 그때 말이 좀 덜 나왔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의도(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체적인 일하심에 의해 우리가 여기까지 도움을 입었다'였을 것이다.


언약궤를 전쟁터에 대령해 바쳤다고 앞서 적은 제사장의 아들들을 기억하시는가? 한 놈은 홉니, 다른 한 놈은 비느하스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장 사무엘상 2장쯤에서 이미 천하의 개쌍놈들("브네 블리야알")로 소개된 바 있다. 주님의 제사를 업신여기고 주님을 망신 주는 제사장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앞세우자' 하는 소리가 나왔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 언약궤와 함께 앞장을 섰을까? 물론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을 개죽음시키시려고"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그런 이유 외에도 그들의 성정, 그리고 에벤에셀 이야기의 핵심 갈등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입성은 그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다. 그들은 어쨌든 언약궤가 어느 정도 '효험' 내지 '신통력'이 있긴 있다고 믿었을 것이므로, 언약궤와 이 전쟁 사이에 긍정적인 연관 관계가 생기면, 이를 통해 제사장 직분의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언약궤 입성 행렬에 앞장섰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제 2차 전투에 꽤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그 결과 전사(戰死)하기에 이른다. 그 모든 돌아가는 상황이 실로에 가만히 임재해 계시던 하나님의 계획에 전혀 포함돼 있지 않던 것과는 무관하게도 말이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에벤에셀 이야기를 설교 본문으로 딱 취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같은 달콤하고 곁가지적인 부분만 쏙 들어내어 모두의 귓가에 톡톡 두들겨준 뒤 다시 성경 뚜껑을 주여 삼창으로 닫아 버렸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먹는 유권자 성도들에게 그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하려고 야심을 품고 강단에 오르던 그 숱한 대머리 배불뚝이 장년 남성 설교자들이야말로,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홉니이고 비느하스이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개신교인의 줄어듦이 심하여 매년 몇만 몇십만이 깎여나가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는 찾아보지 못하며,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는 것은, 그들 덕분에 언약궤가 빼앗긴 상황과, 과연 얼마나 다른지?

혹시 오늘날의 하나님도 그때 그곳에서 다곤 상을 거꾸러뜨리던 하나님이실지? 세상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친히 이적을 베풀고 역사를 바로잡으며 모두의 시선을 국경과 주변부 존재들의 산마루로 이끌고 계시지는 않은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며 제 스스로를 망신 주는 동안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는 온갖 해괴한 일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당신의 위치를 찾으시어,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의 지경을 다만 얼마라도 허락하실 계획인지? 그것은 지금 이름 없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하여, 거스를 수 없는 시대 변혁의 정신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누가 알겠는가? 온갖 이해할 수 없는 (랄까 뭔가 각본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왕왕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은, 최후의 날 하나님 나라 역사책에서는, 또 하나의 에벤에셀 설화 같은 것으로 요약될지 모르는 일이다. 요컨대 에벤에셀의 이야기란 하나님 그 자신과 그 하나님의 권능을 멋대로 빙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등이 일방적으로 촉발되고 일방적으로 해결된 이야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구약과 인류사를 통틀어 내내 반복되어 온, 언제나 인간이 촉발했고 하나님이 해결하셨던 그런 갈등 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그냥 덮어놓고 '하나님만 믿으면 뭐든 다 무조건 도와주셔요' 하는 동화적인 소리와는, 하늘땅 차이의 거리가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이야기를 제대로 읽고 깨우쳤다면, 최소한 세계를 우리 입맛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이해대로 재단하려는 행위를, 요컨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리가 원하는 곳에 끌고 가 앞세우려는 일체의 시도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그런 짓을 또 하려고 했다가는 참패와 모멸을 안기실 것이며, 우리가 그런 깽판을 벌이건 말건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합당한 영광을 우리에게서, 이방에게서 모두 받아 누리시고 회복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저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진 "도움"을 기념하며, 대체 이게 다 뭐였냐고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찰도 교단에서 공유되지 않고 있는데, 그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더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감사합시다 같은 염불만 외는 마당에는 뭘 기대하나 싶고 좀 그렇다. 다음 주엔 또 어떤 기묘한 설교 본문이 얼마나 알기 쉽게 고아져서 나올는지 그냥 그게 (안) 궁금할 뿐.

 

PS. 이 글 제목과 관련된 농담을 하나 하고 끝맺고 싶다. 제목(과 대표이미지 썸네일)은 불보듯 뻔하게 <Stranger Things>의 패러디이다. 사무엘상 4~7장을 읽는 동안, 만나는 장면 하나하나를, 동네의 흔한 넷플릭스 코즈믹 호러 시리즈로 각색해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어떤가? 좀 그럴듯하지 않은가? 모르겠으면 말구.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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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각하는 것은 인물(characters)이라는 요소이고, 특히 '평범한 조연/몹 캐릭터'에 관심이 있다.

동생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고, 안 그래도 님은 러키스타를 보면서 시라이시 미노루에 꽂혀 있던 이상한 놈이었다고, "WAWAWA 와스레모노"를 불러대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흑역사(?)를 털어서 피차 좀 민망하긴 했다. 흑역사랄 것도 없고 솔직히 그건 사실이다. 평범캐 자체는 (내 기억이 맞다면) 고딩 때쯤부터 꽂혀 있는 모에 요소이긴 했으니까. 근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또 하나의 모에 요소에 대한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취향이었을 뿐이지, 정말로 그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함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걸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시라이시 미노루의 사례를 들자면, 앉은자리에서 동생에게 반박했던 바, "아니 근데 미노루는 거기서 평범함이라는 캐릭터로 부각이 됐었기 때문에 정말로 평범한 건 아니었어. 따지고 보자면."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바 내가 요즘 꽂혀 있다는 평범한 캐릭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가 없는 캐릭터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이 특정한 속성이나 전형을 부여하지 않고, 그런 속성이나 전형이 생길 만한 사건도 주지 않고, 그저 작품 안의 시공간을 살게 내버려두고 기르고 있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이를테면 최근에 넷플릭스로 1~12화를 재주행한 뒤 원작 4~9권을 중고로 사서 방금 막 일독하고 돌아온 "시모세카"에서의 누레고로모 유토리 같은 캐릭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인물이 얼마나 비중이 없느냐 하면, 일단 이 작품이 '애니화'를 할 때 아예 거기에 등장하지 못했고, 4권에서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소위 "4대 음담패설 지하조직" 중 하나인 "포유류"의 두령(이었나 총무급이었나 아무튼) 정도로만 등장을 했었다. 그래서 '흠, 뭐 이런 인물이 있나 보지, 여고생이 거유 요소에 집착하다니 매우 이상한걸'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주인공 남자와 한때 친하게 지냈었고 흔하지만 꽤 슬프게 생이별해야 했다는 쓸데없이 자세한 과거 썰이 풀어지면서부터는 유토리 외의 캐릭터들은 급격히 납작해지면서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그 이후로 유토리의 비중이 갑자기 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출연시키는 방식은 아무리 그래도 좀 억지인걸, 팬들이야 좋겠지만' 하는 감상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작가의 관심도 그냥 그저 그래서, 급기야 9권(이었나?) 작가 후기쯤에 가서는 "그러고 보니 유토리는 러브코미디 라인에 올라 있지도 않군요. 혼자만 영어 이니셜이 Y라서 그런 걸까" 운운 망발을 일삼을 정도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저런 떡밥을 남겨 주며 잘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정말 가뭄에 콩 나게 보이는 그녀의 등장 장면과 대사 몇 마디, 행동 몇 가지, 서술 몇 마디가 그렇게 귀할 수가 없고 그것만으로도 캐릭터가 충분히 개연성이 생긴다는 느낌이다. 희한한 일이다. 다른 캐릭터들에게 쏠려 있는 비중에 비하면 애초에 등장 자체가 별로 없는데도 관심이 간다니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아 이거 뭐냐고 완전 호라모젠젠 루트잖아 너무 슬프잖아" 같은 관심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묘'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할까.

그건 내가 변태라서라기보다는 ― 그게 진짜 이유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 그보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첫째는 양적인 이유. 애초에 정보량 자체가 적으므로 상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말이 좀 궤변 같은데, 이렇게 뒤집어서 설명하면 어떨까?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그 '캐릭터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체 너무 많은 정보를 소모한다. 그래서 그 인물은 다른 인물로 살아갈 여지가 적어지고,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평면적인 인물이 될 위험이 높아진다. 평범한 인물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주어진 캐릭터성이 없기 때문에 좀더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고 들여다볼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잘 해내면, 썩 훌륭해진다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이 이유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역시 넷플릭스로 정주행 완료한) "달링 인 더 프랑키스"의 이쿠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체계적으로 격리 육성된 어린이들이 남녀 한 쌍으로 거대 로봇에 탑승하여 어느날 지구에 나타난 규룡이라는 반-기계-반-생물 괴생명체들을 격퇴한다는 별 되도 않는 줄거리 속에서, 그나마 이쿠노라는 승무원(여자 승무원을 '피스틸'이라 부른다)만큼은 사뭇 다르다. (이하 아마도 스포일러) 그가 속한 "제13부대"는 대다수가 굉장히 센 스토리라인과 전형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어서, 안경, 주근깨 외의 별다른 모에 속성도 없고 분량도 없는 그는 초반에는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도 보면 드문드문 등장하는 부분들이 있다. 뭘까? 싶어서 그 짧은 장면의 시사점들을 기억해 뒀다가 전체적으로 엮어서 보면... 뭐야? 갑자기 어떤 쓸쓸한 디나이얼 에이섹슈얼의 인생 여정이 썩 훌륭한 서브플롯이 되어 툭 튀어나오는데,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작품이 이건 좀 좋았다는 감상이다. 이 애니는, 뒤로 갈수록, 웬만큼 '몹캐'가 아니고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와 입장을 꽉꽉 닫아서 시청자에게 딱 던져주고 결말 매듭을 지은, 대단히 지루한 전개를 선택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는 이거보단 좀 덜 궤변일 거 같은데, 질적인 이유. 평범한 캐릭터라는 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투입시키지 않는 한은, 웬만한 캐릭터들보다 더 만들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 캐릭터를 조형함에 있어 각종 속성과 템플릿은 쓸 수 없고 순전히 디테일과 내러티브만으로 인물 조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이 일단 성공적으로 작품 줄거리에 안착을 하면, 그때부터 줄거리와 작품 전체는 그 캐릭터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의 존재 개연성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매력이 있는 어엿한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요지에 있어서 적절한 사례는 아마도 "용왕이 하는 일"이라는 작품의 키요타키 케이카가 아닐까 하는데, 이 인물은 특히 구체적으로 모티프로 삼고 있는 실존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 역시 일본장기 프로 기사로서,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칠전팔기를 하였고, 하마터면 연령 제한에 걸려 꿈을 못 이룰 뻔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흔하고 밋밋한 사연이다. 이걸 가지고 선명한 캐릭터를 세워서 모에캐로 팔기는 어렵다. 캐 만들기의 가성비만으로 따지자면, 이 작품의 메인 여주인공 "아이쨩"을 비롯한 '여자초등학생 장기연구회' 캐릭터들 같은 걸 막 찍어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이쨩은 심지어 여관집 외동딸로 태어나 일본장기에 푹 빠져 머릿속으로 장기 두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소질이 각성되었다는 별 말도 안 되는 스토리라인까지 갖고 있다. 이길 수 있겠냐고. 하지만 아이쨩의 사연은 어찌 됐든 기본적으로 공갈인 반면, 케이카의 사연은 기본적으로는 정말 다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차이가 갈린다. 아이쨩이나 다른 "일본장기천재 캐릭터들"의 대국은 뭔가 대단하지만 잘은 모르겠다는 느낌인 반면, 케이카의 장기 국면들은 왠지 뭐가 뭔지 알겠다는 기분이었다. 재능도 없으면서 공연히 노력만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가 하는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스스로에게 원통함을 느끼며 펼치는 그의 일전은 한편 상투적이면서도 또한 그럴듯하게 처절했다. 나는 그 사연에 순순히 설득되고 있었고, 그를 "여초연" 캐릭터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써놓고보니 전체적으로 결국 한 가지로 수렴을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전형성보다는 입체성과 구체성을 더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콘텐츠업계와 상업예술계는 사실상 매력적인 (작품상의) 캐릭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캐릭터들 자체는 갈수록 특정 기호 몇 가지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맥락 그리고 각종 포맷과 템플릿에 점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로 캐릭터의 구체성이 확보되고 평면성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알아듣는 기표 몇 개를 던져서 귀찮은 설명과 가능성의 여지를 특정하자는 것일까. 뭐 잘은 몰라도 일단 사람들은 이미, 필요하며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든지 프로토콜에 기반한 인지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항간에 돌아다니는 "파쿠리 논란 뜰때마다 생각나는 짤" 같은 건 순전히 대중의 행동 양태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업계가 거기에 저항할 의무나 의리는 없다.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노쟈 로리 캐릭터는 무조건 쿠기밍이 해야 된다고 믿고 있으면 쿠기밍을 캐스팅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솔직히 그렇게까지 막 선명하고 알아보기 쉽게 미쳐날뛰는 캐릭터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작품 내내 예상 가능한 방식대로만 행동하고 자아를 대본에 위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뻔한 행동만 취하다 퇴장하는 인물 대신,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그 주관과 인생 사연이 보이는, 왜 저러는 것인지 좀더 알고 싶어지는,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을 좀 만들어 주셨으면 하는 바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이미 너무 많이 처방되어 그 약발이 떨어진 몇몇 요소와 포맷과 전형에 의해 오독되지 않도록 추가적으로 각별히 신경써 주셨으면 하는 바다.

사실 지금 우리가 닳아빠졌다고 비웃는 전형적인 인물상 중 일부는, 반세기쯤 전만 해도, 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생생했으며 구체적이고 놀랍게 입체적인 인물상들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전형의 복제 재생산이 아니다. 그건 이미 충분히 많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예컨대 핑크색 머리에 깨발랄하고 분위기 메이킹을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는 캐릭터 같은 건 정말 질색이다. 그건 몰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어떤 의미에서 "여학생 C"보다 더 모멸적인 단역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거 말고 유토리, 케이카, 이쿠노 같은 캐릭터를 달라는 얘기다. 그들을 들여다볼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고, 들여다보았을 때 뭔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고,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 하는 발견을 하고 싶다. 요 근래 들어 못 느껴본 지 오래 되었던 모에롭다는 감상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런 순간들이었다. 아직은 그래도 평범한 캐릭터들에게서는 그게 되는데, 어쩌면 지금 평범한 인물들에게 흥미가 돋우어지는 건 그 때문일까.

늦었으니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내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얘기 하고 노는 취미토크쇼"를 표방하는 김어진쇼를 제작하러 나가야 하니까. 나라도 평범한 인물을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김어진쇼에 나오는 김어진은 내가 봐도 평범한 구석이 하나 없어 "소설 캐릭터라고 해도 안 믿어줄" 수준이라 좀 힘들 거 같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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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말찬'이라는 브랜드는 많이 접어주는, 그럴 자격과 가치가 있는 브랜드지만, 기왕에 자비 출판으로서 책이 되어 엮여 나왔으니, 이에 대해서는 좀 많이 진지하게 에누리 없이 짤막하게 비평해 보기로 한다.

형식의 문제. 만화라는 기본 장르, 'B급 감성'으로 흔히 수식되거나 변호되는 간단하고도 서투른 작화, 결국 다 한바탕 꿈이었다는 '유메오찌'의 틀,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초전개' ― 작품 내내 주인공은 아무데나 난입해서 아무거나 열어보고 아무하고나 아무렇게나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 아무 일이나 다 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더더욱 그렇다 ― 는, 모두 잠시 후에 다루게 될 '내용'의 "위험성"을 은닉하기 위한 장치 또는 완충재로 보인다. 그 효과가 너무 탁월한 나머지, 그 완충재는 소재 자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또는 무거워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현실과의 관계성의 문제.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현실 그 자체에 노출을 시키며, 신학에 대해서는 판타지적 묘사와 과장이 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실제/실상의 서술'의 범주에 충분히 귀속된다. (그리고 '약스포'를 하자면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의 현실은 그 신학적 판타지에 디졸브된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만큼은, 작중 시종일관, 어떤 식으로도 정말로 현실을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의식적 괴리가 항시 유지되고 있다.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장면도 과장이나 '드립' 없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오히려 강박이라 해야 좋을 정도이다.

내용의 문제. 이상 살펴본 모든 충돌과 불안정성은 모두 이 작품의 핵심 내용 및 주장에 기인한다. 교회가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께 심경을 토로하고 영광을 돌리는 행위의 일체의 총칭이나, 사실은 교회 그 자신이, 그 찬양이라는 것을 단지 악기 치고 노래하는 행위 그 자체로만 국한하고 격하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이제 "주인공"은 찬양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은폐될 필요나 가치가 없는 자명한 현재 실상이고 비판과 대안의 제시가 절실한 문제 상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잣대에 비하면 너무나 관대하게, 이 내용을 철저히 비주제적인 것으로 한정한다.

시장과 공론장의 문제. 작가의 이 전략은 결국 한국 기독교 콘텐츠라는 장르와 그 토양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는 한국 기독교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에끌툰'을, 한국의 정상급 CCM과 워십음악들을, 자기의 그 의견이 결코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복잡한 심경으로, 최종적으로는 멸시하고 기피한다. 정말로 찬양을 음악에 국한하지 않으려는 시도나 그 시도를 실현하려는 교회 같은 것은 이를테면 현재의 기독교 문화와 관습에 정면 대립하는 반명제인데, 그의 기준에서는, 어떤 플랫폼이나 사역단체도 정말로 이 테제를 수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약. <찬양이 노래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의 작가는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소수의견을 설득시키기 위해 형식상의 선택과 내용상의 비주제화를 시도하였는데, 이것은 꽤나 성공적이면서도 유감스러운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다. 그 유감은 이런 "안티테제"(안티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원론적인 것이지만)를 논의하지 못하는 환경에 대한 유감이다. 기실 그것, 그 분위기, "감히 알려고 하는" 행동에 대한 과도한 경계야말로, 전혀 과도하게 경계할 필요 없으며 오히려 타파해야 할 인습이다. 이 작품은, "찬양"에 대한 신학적 내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되, 최소한 우리가 그 인습을 성토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는 진술서로서는 매우 유효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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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쓸 얘기는 없는데 그냥 요즘 블로그를 하도 안 해서, 근황이나 남겨 볼 목적으로 조금 적어 본다.

내일은 김어진쇼 65회를 녹화/녹취하는 날이다. 그냥 모지리 같은 걸 할 생각이다. 테트리스의 테트리미노 중 정사각형 모양의 테트리미노가 얼마나 쓸모없는지에 관해서 웅변할 예정이다. 사전 조사를 좀 해야겠지… 66회쯤에서는 아마도 옷과 신발을 사러 가지 않을까? 그리고 잊지 말고 운전면허 시험 재응시를 해서 67회에는 토요일 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

김어진쇼 말 나온 김에 그러면 별도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했을 때는… 사실은 스탠드업을 좀 해보고 싶기는 하다. 간밤에 구상을 해보았다. 무대에 나와서 오프너 토크만 70분을 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 막이 닫혀 버리는 것이다. 대충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저번에 신규입사자 자기소개 세션에 10분 동안을 (심지어 앞으로 계속 알고 지내야 할) 사람들 앞에서 굉장히 가깝게 혼자 떠들어 보니 이것도 대본과 훈련과 계획이 없으면 다 허사 되겠다 싶어서 좀 많이 길게 보고 우선 닫아둔 상태다. 내 사운드는 굉장히 헛돌고 고르지 못하고 어딘가 계속 새는 걸 torque로 뻗대는 사운드라서 냉혹한 훈련 아니면 편집이 필요하다. 뭐 김어진쇼라는 좋은 핑계가 있으니 어떻게든 언젠가는 비슷하게 해 보겠지.

무대가 그리우냐, 아니면 사람들에게 뭔가 선사하는 게 하고 싶으냐 하면 그걸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김어진쇼는 요즘은 약간 뭐랄까 지난 몇 년 동안 하여간 뭔가 만들어서 내보내야 했던 그 루틴에 대한 의존성 습관이 되어 있다. 그다지 막 크게 재미있지 않은데 대충 이번 주도 때웠다 싶게 때우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초 체력이 붙으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는 생각과, 이럴 거면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매주 고생하나 싶은 마음이 번민하는 중이다. 일단 무대는 그립지 않다. 무대는 그 자체로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는 이상은, 의식적으로 홀려지지 않으려고 한다. 주관적으로, 선택적으로 내가 무대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는 뭐 집안 베란다만도 못한 구독자 수 100명 미만의 작디작은 스테이지지만… 대체 나는 중학생 때 대학생 때 무슨 정신 무슨 쾌감으로 이젠 나조차도 안 보는 만화를 그렇게 열심히 그렸나… 싶어지고 mazefind씨의 maze 작품들은 영영 다시 못 보는 걸까 싶고 문득문득 그렇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은, 마침 최근 다시 홀린 듯이 재정주행하면서 보았던 <호기심 해결사>의 B팀이다. 캐리 토리 그랜드 세 사람은 이번에 조사를 해 보니 각자 알아서 제 갈 길 가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좀 정신이 차려지면 그렇게 의협심과 어깨의 힘이 빠져 나가는 모양이지. 물론 옛날 하던 거 잘 했고 그 시절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그 모습에 마냥 머물러 있겠다는 꼴이야말로 가장 안쓰러운 몰골이 됨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여전히 과학과 속설과 최신 기술과 엔터테인먼트를 합친 교집합 어딘가를 서성이고들 있지만, 그래도 <호기심 해결사 2>와는 좀 적절하게 거리를 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지금 그랜트 씨는 너무 멀리 가 있고 캐리 토리 콤비는 아직 너무 가까이에 있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건지도 모르지만.

마치 호기심 해결사를 졸업한 그 세 사람처럼 지인들도 하나둘씩 와웸과 찌라시와 트탐라를 졸업하고 저마다의 브랜드를 런칭하고 힘들 쓰고 있다. 해찬이는 제이미가 되어서 랜선극장 극장주가 됐고… 쇼에 나온 사람 중 (취미로나 업으로나) 만화를 하고 있는 인간이 무려 셋이나 있고… 현익이는 잘 취직했고 찬영이는 글밥과 카페 식객 노릇으로 얼추 살 것 같고… 어째 바로그찌라시 멤버들만 이렇게 보기가 힘들고 다 바라바라가 되었는지 야속해서 잠 못 이룰 일이다. 프사를 바꾸고 싶은 것은 그게 찌라시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놓아줘야 하는 때가 오고 있는 거다. 생각의 재활용이니 호밀밭이니 오버스마트니 실천 가능한 20대 라이프 스타일이니 데뷔니 딴에는 꽤 의미 있는 관점들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나한테나 의미가 있었지 아무래도 결국에는 다 시시하게 20대 시절의 재기발랄(씨발)로 귀결될 모양이다. 웃픈 일이다. 아직 그게 내 원동력으로 그리고 계기로 남아 주고 있으니.

와웸 하니까 굳이 좀 적자면… 엊그제인가에 내 동시대 서강 와웨머 두 명에게서 5분 간격으로 결혼 소식 카톡이 왔었다. 무슨 서로 신호라도 주고받아 가면서 보낸 줄 알았다. 적지 않은 와웨머들이 저들끼리 결혼한다. 그냥 그렇다고 쓰고 싶었을 뿐이고 좋다 나쁘다는 모르겠다. 좋다 나쁘다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명박근혜와 세월호를 지나고 "비전 2020"을 바라보는 이 시절에 와서까지도 아직 저러고 있는 CMK의 게으른 포즈다. 그리고 이건 나쁘다. 대학 사회를 복음화한다는 게 사실은 무슨 의미인지 정말 그걸 해 버리면 뭐가 좀 많이 곤란해지는데 그게 뭔지 하나도 모르고 하나도 안 가르치고 4년 내내 애들을 연애 금지 조례에 가둬 놨다가 세상에 풀어 버린다. 풋내기 1학년 때야 뭐 모든 게 행복하고 안전하고 예배가 맛있고 정서가 풀리고 아주 훌륭한데, 그게 이곳이 엄청나게 안전한 온실이라서 그런 거라는 걸 왜 아무도 명시적으로 말해 주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황야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그리고 대부분의 비신자 일반인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이란 술에 잔뜩 취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피어오를 때 같은 순간(뿐)이라는 통계적 진실을 왜 안 알려주는 것일까? 아니 뭐 다 모르겠고 왜 우리는 전도단이라는 사람들이 변증 하나를 제대로 훈련 안 하고 맨날 3평짜리 우리 방에 틀어만 박혀서 운동장을 구경하며 "음성"만 처 듣고 다닌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대수롭게 홀리하고 스피리추얼했던가?

할 수 있다면 기독교 테마의 무엇을 좀 하고 싶다. 근데 그게 다 일발성으로 끝날 요량이 있어서, 한마디로 '콘텐츠가 없어서' 못 하고 있다. 그리고 할려면 신학 하는 사람이 좀 거들어줘야 하는데 내가 그 연줄이 없어서… 그래도 뭐 저번에 환희랑 전화통화를 두 시간 가까이 했을 때의 일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면, 간단하게 FAQ 토픽 몇개 늘어놓고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것만 해도 당장은 먹힐 것으로 보인다. 데모그래픽적으로 말해서는 현재 2030 신자 및 냉담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말도 못하게 취약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까지도 필요없고 세계사, 교양철학, 기초과학, 기본적 수준의 비판적 사고만으로도 충분히 기독교 개론 가능하다고 나는 보는데 그게 안 돼 있으니까 온갖 좋은 소리 떡발라서 뼈대 없는 건물을 실면적 2만평짜리로 세워놓고들 다니는 거다. 와웸에서 유일하게 변증이며 신학 비슷한 걸 좀 알려주신 분이 이지웅 간사님인데 그분 강의가 세상에 그렇게 인기가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청중들은 여전히 그 강의들과 조셉 프린스의 신나는 히브리어 강의와 <왕의 재정> 사이에서 전혀 분간을 못 잡고 살아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돌아와서 개인사를 좀 논하자면… 피똥 싸게 개발 중이다. 옆에서는 주구장창 유지보수 이슈대응 등만 맡고 있는 ASP 개발자 차장님이 "와 재밌겠다 개발한다" 하면서 구경하는데 구경 자체는 뭐 그렇다 치지만 정말 하루하루 다른 의미에서의 피 마름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레벨업하고 싶지 않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는데, 하필 빌링(결제)이다. 심지어 아임포트나 스트라이프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PG에서 준 코드를 날로 갖다 씌우고 있다. 이니시스는 모든걸 결국 CURL 치는 구조이고(최종 승인 과정에서 인증토큰을 태워 보내야 한다), KCP는 자기네 바이너리에 변수를 넣어서 돌리면 그 안에서 CURL 날리고 인증치고 변수 반환하고 하는걸 다 해주는 구조다. 동적으로 설정값 받아서 메소드 돌리는 class KCP를 만들 수는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걸 말로만 듣던 프로바이더나 뭐 그런 것에 옮겨놓고 걍 툭툭 갖다쓰는 걸 구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럴 시간이 없다. (그나마 퍼블릭 경로에 쑤셔박혀 있던 결제요청 바이너리를 소스 내부로 가져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냥 일단 결제 자체가 성공해야 해서 미친 듯이 기존 레거시와 예제 소스를 뒤집어 까면서 최대한 앞뒤를 맞추려고 하고 있다.

잘 안 되면서도 어쨌든 되어가고 있다. 정말 1년차답구나 싶다. 아무도 내 코드를 봐주지 않는 가운데 베트남 외주개발업체 사람들과는 미친듯이 소통하면서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빠르게 결과물을 받아보고 있어 좀 많이 당혹스럽다. 느낌상 초반에 이렇게 눈핑핑돌게 달린 다음 이후 몇 달 동안 나도 할 일이 없어 얼타게 될 삘이다. 그때쯤엔 뭔가 일을 만들어야지… 이 회사에 3년은 있고 싶은데 그 이상은 정말 내가 그리고 개발팀이 그리고 대표란 사람이 장차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어쨌든 이 회사 주요 상품은 교재와 교사 서비스이지 웹사이트나 "체험상품"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뭐 그래도 최근 한국경제 단독으로 뜬 전직장 존망의 위기 관련 소식을 보면 그냥 아찔하다는 생각만 들지 뭐 지금의 상황을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된다 ㅎㅎ 그냥 주는밥 먹고 얌전히 MSSQL과 씨름하다 집에 가면 될 것 같다. 아 맞다 SQL 공부를좀 해야 하는데… 정말 싫다. 아 맞다 회계자격증 따고 봉사시간 채워야 하는데… 어휴 이다.

다 써놓고 보니 전반적으로 새삼 드는 생각은, 약간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이라는 긴 커밋로그의 어느 한 롤백 가능한 스테이블 배포판 태그 지점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브랜치를 따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새 브랜치를 시작하려면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우물쭈물 핫픽스나 붙여 가면서 master에 머물러 있는 건데… 그래서인 거였을까? 최근에 전혀 내 인생과 무관하던 킹오파 브랜드 신작 폰겜을 받아 봤다. (심지어 사전예약도 했는데 공식 채널 통해서 해서 그런지 별다른 보상이나 알림을 못 받았다.)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초딩때 다 졸업했을 시라누이 마이에게 혹해서 시작해 봤지만 의외로 마이라는 캐릭터는 매력적이지 않다는 느낌이고 (정말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지금쯤 얘 보려고 게임 켜서 얘만 보고 있어야 하는데 안그러고 있음) 그냥 beat 'em up 장르를 (매우 순한)맛이나 보자는 느낌으로 너무 늦게 기웃거리고 있다. 게임 같은 게임을 좀 하고 싶은데 요즘 게임은 게임 같지가 않아서 곤란하다. 플스를 사면 좀 나아질까 했다가, 그마저도 우선은 접었다. 오히려 클래식 테트리스가 게임 같을 지경이라 요즘은 소전 데차 라오진 다 버려두고 테트리스나 하고 앉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음 김어진쇼에서는 테트리스의 테트리미노 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테트리미노 랭킹을 매기는 영 머리 나쁜 기획을 관철할 예정이고… 내일은 샤브샤브와 <걸캅스>를 볼 것 같다. 그게 오늘, 아니 어제의 일이다. 아니 오늘의 일이다. 그냥 지금은 그렇다.

지금 스크롤을 다시 돌려보니 영 황당하다. 뭔 임상학적 개소리를 이리 길게 써놨냐고.

Posted by 엽토군
:

Yet Is Our God by Anointing Ministry

Translated by Eojin K.



# Verse 1

Yet is our God still the mighty One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Praise Him for His strength, Hallelujah 전능하시니 할렐루야
And my soul shall be well 거센 폭풍에도
Even in most raging storm 내 영혼 안전하리
I'm in the LORD 주 안에서

Yet is our God still the faithful One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Praise His trustfulness, Hallelujah 신실하시니 할렐루야
And no promise from Him 어떤 상황에도
Will cease away no matter how 그 약속을 이루시리
It's for the LORD 주 안에서

# Chorus

Praise Him, praise Him 찬양 찬양
All praises and songs unto our LORD 주 찬양하라 노래하라
Shall sound the earth, shall fill the sky 온 세상에 주를 향한
To show how worthy is our God 찬양이 가득하도록

Proclaim, proclaim 존귀 존귀
All honors and thanks unto our LORD 오 주의 이름 선포하라
Shall lit the world and all around 온 세상에 주의 빛난
To show the glory of our God 영광이 가득하도록

# Verse 2

Yet is our God still the rightous One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Praise for His justice, Hallelujah 의로우시니 할렐루야
And the truth shall prevail 어떤 거짓에도
Over the shadows and fakes 진리는 굳건하리
It's by the LORD 주 안에서

Yet is our God still whom shall He be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Praise for He's alive, Hallelujah 살아계시니 할렐루야
And His words will be there 세상 다 변해도
When everything is falling down 주 말씀은 영원하리
It will be there 영원하리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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