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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Z751

2024. 8. 27. 22:33

여기가 어딜까.
비행 고도 10972m.
대략의 위치는 싼야 와 마닐라 사이.
도대체 여기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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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소재의 웬 POS 개발사에 개발자로 취직했다.

그런데 막상 그토록 별렀던 외국에서의 돈벌이 생활을 출발하고 보니 심지어는 제일 재미있어야 할 0일차부터 설렘이며 기대감, 자기효능감 따위는 없고 은은한 긴장과 불안만 있을 뿐이다. 여권이 가방에 있는지를 두 번이나 확인했고, 내 발밑 짐칸에 내 캐리어가 없을 경우에 대한 걱정을 해보고 있다. 나도 내가 이렇게 걱정 많은 인간인 줄 몰랐다. 아마도 이번에는 내가 뭔가를 입증해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겠지. 영어로. 없는 머리 열나게 굴려서.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없애는 방식으로 충성했던 회사가 날 권고사직한 이후 여태까지의 몇 개월은, 내가 되고 싶은 게 정녕 무엇이었더냐는 질문을 피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난 뭐가 되고 싶지? 시니어? 팀장? PM? 풀스택 웹개발자? PHP 엔지니어? 그냥 어디에선가든 어떻게인가든 하여간 돈을 벌어 집에 보태는 장남? 뭔가 잘난 힙스터? (정말 그거였던 걸까 까지도 생각해보고 있다. 진지하게 스스로를 프로파일링해 볼 필요가 있어서.)

소름 돋을 정도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게 뭔지 모른다. 그저 어떤 교통수단, 커리큘럼, 분기 목표 따위에 날 태워 앉히고 어디로든 가면 뭐든 되겠지 하는 인생이었다. 맘만 먹으면 지금부터도 한동안은 그럴 수 있겠지. 일단 가서 뭐라도 하면 어떻게든 안 되겠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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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남은 비행 거리 2050km.
바깥 온도 -43°c.
난 대체 어디를 가겠다고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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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지금 그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이 일터에서 저 일터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마치 고물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던 그 제자들처럼 지난 몇 달 몇 주 사이에 유난히도 호들갑이었다. 갈릴리는 그들의 평생의 일터였겠지만, 여기서 저기로 가는 과정이 조금만 흔들거려도, 그들은 아이고 나 죽는다고 잠자는 주님을 깨워 가며 비명을 지른다. "주여! 주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전에는 이 대목이 한심하게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일자리가 안 구해지는 시기며 면접 전형 결과를 몇 날이고 며칠이고 초조히 기다리는 시기를 지나니, 나도 이 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근데 실은 그 이동은 내가 자초했고 내가 원했고 내가 책임져야 했고 그러겠다고 호언장담해 놓은 것이었다. 경력자라면, 이 바닥을 안다면 문제 없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과신한 오만의 결실이 지난 몇 달의 고생길이었던 것이다. 기술면접을 한국어로 망칠 때는 내내 몰랐는데 이번에 영어로 망치고 나니 그제야 겨우 자각했다. 아 나는 내가 내 실무를 보여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난 기술면접을 못 보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엔지니어도 아니고 PHP 엔지니어도 아니고 그저 PHP라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 풍랑 속에서 뒤집히기 직전의 배에서 주님을 흔들어 깨우던 제자들에게도 갈릴리가 그랬을까? 그들 역시, 그 바다가 정확히 어떤 호수인지, 그 물의 기후라는 게 뭔지, 애초에 기상악화라는 게 뭔지 하나도 모른 채로 그저 노 저어 그물 칠 줄만 알던 몸이었음을 뼈아프게 자각하게 되었을까? 그들도 자기들이 처한 상황이 수치스러웠을까? 자기들이 노 저어 나아온, 자기들의 생업의 터전이던 곳에서, 제일 아마추어 같은 꼴로 곤란을 당하고, 내 인생 이러다 어떻게 되는 거냐고 진짜로 불안하게 긴장해야 했던 그 상황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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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 자체는, 일반적으로는 그저 예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증거하는 기적으로 그러나 다분히 일화적이고 부수적이며 다른 비슷한 사건들 사이에서 독창성을 뽐내지 못하는 해프닝으로 회자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자기만의 갈릴리 호를 건너고 있는, 그 바다를 매일 뻔질나게 주님과 드나들며 사는, 그러다가 바로 그 바다 위에서 곤경에 빠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인지도 모르겠다. 결론만 놓고 보면 나는 어쨌든 그 어렵다는 해외 개발자 취업을 거의 성공한 입장이고, 제자들은 자연이 잠잠해지는 권능을 목격한 것이다. 나도 그들도 그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소리밖에 못 하는 건 그래서다.

자 그러면 이제는 그 바다를 건넌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는 무엇이 되고 싶어야 할까. 일단 제자들은 그 갈릴리를, 그 사람 예수님을 전하고 다니다 죽었다던데. 그것만 해내기도 짧은 인생, 그것마저 못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는 모양인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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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가자.
비행 속도 907km/h.
남은 비행 시간 2시간 1분.
오늘 밤에는 이 바다를 건너는 것까지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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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배우에게 젤 중요한 건 얼굴이다. 잘생겼다 예쁘다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더불어 자기 얼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배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 얘기들은 모두 배우에게 먼저 들은 후 많은 배우들을 관찰/대화해본 후 나도 공감하게 된 이야기.
연기를 '안 하는' 배우들이 자꾸 뭘 하려고 하거나 쪼가 심한 배우보다 연기가 빨리 는다는 말을 어떤 감독이 했었는데 그 말도 공감... 뭘 해야 하는지 모르던 사람들이 뭘 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갑자기 깨우치게 되면 어느 순간 연기를 잘할 때가 있음;; 혹은 버릇을 버리는 훈련을 열심히 하거나

2024년 7월 28일, 임수연 씨네21 취재팀장

최근 유난히 유난스럽게 이직을 하면서 "나 뭘 잘 하지? 뭘 못 하지? 나는 뭐가 되고 싶지? 나는 뭐지?" 하는 "정체성 위기"를 좀 느꼈었고 그 시기 중간에 접한 이 통찰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유튜브를 꼬박 6년을 했으니 내 얼굴 내 목소리 내 생긴 꼴이 어떤지는 모르지 않는데, 일단 내 자의식이 이걸 모른 체하며 여전히 가상 자아를 갖고 살려고 하고 있고, 내 실천 자체도 남들이 이런 생김새의 내게 걸고 있는 기대에 부응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 그나마 최근에는 바로 이 현상태 상황 자체가 좀더 생생히 와닿는 정도가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요컨대 '아.. 사람들이 나를 이러이러하게 보는구나.. 나는 나를 그렇게 보지 않지만 하여간 현실은 그렇구나..' 하는 자각이 온달까.

나라는 사람의 특이함에 대해 나 자신은 초등학생 때 진작 질리고 말았다. 지난 "PHP 엔지니어"로서의 삶은 어쩌면 그걸 주박으로 여겨 본 나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리고 실은 시종일관 내내, 남들에게 내가 맘대로 써서 내줄 수 있는 공수표라곤 이게 거의 유일하다. 이 얼굴, 이 특이함, 지겹게도 지독하게도 그저 나이기만 한 내 모습. 이제는 내 얼굴을 받아들여야 하겠지. 내가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얼굴임을. 잘생겼다 예쁘다 그런 게 아닌, 그냥 이게 주어진 나임을. 그래야 한국이라는 현장, 2024년이라는 현장, 집이라는 현장, 회사라는 현장, 내 인생이라는 현장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갑자기든 서서히든 깨우칠 수 있겠지.

다른 배우 인터뷰들도 좀더 읽어볼까. 아무튼 요새는 마음이 어렵다. 이 정도로 "정체성 위기" 겪은 적이 고3 이후로 있었던가.

Posted by 엽토군
:

2024년 고래주주 간담회 1차 일정을 다녀왔다. 엷은 봄비가 그칠 듯 그칠 듯 하면서 계속 내리는 토요일이었다. 그 자리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나까지 대략 8명 정도였던 것 같고.

  • 내 입장에서 작년 2월경에 내 통장에는 돈이 썩어나게 많았다. 이게 썩 거북하던 차에 마침 규항넷에 고래주주 공모글이 올라온 걸 보고 반쯤 홧김에 질렀다. 한데 막상 1구좌 200만원을 납입하고 나니, 그 이후 나는 '주주'로서의 무슨 권리나 의무를 행사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래를 따로 구독해서 읽은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4천고래동무" 캠페인에 자극 받아 고래동무 일시후원을 한 번 한 것이 전부고. 그러고 얼마 안 가서는 주주간담회를 한다기에 '음... 사정이 많이 궁한 모양이군...' 하고 가서 들어보니 아니나 다르랴 였다.
  • 이 이상 자세한 얘기는 출자자들끼리만 알고 있는 게 맞을 거 같아 각설하고... 대신 내 입장에서 몇 가지 새로운/놀라운 정보들을 접하게 된 바 그걸 좀 적어볼까 싶은데.
  • 한창 지면 개편을 해나가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써 대상 연령대를 지금보다 더 낮출 생각이란다. 더 쉬운 걸 더 고연령의 독자가 보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나.
  • 조국이 고래 구독자였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고 그게 좀 충격적이었다. 김규항 선생이 "조국 사태"에 입장이 유난히 각별한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된다. 말하자면, 고래가그랬어는, 조민을 만든 잡지인 셈이다.
  • 최근 몇 년 간 주변 상황이 좀 바뀐 바 그간의 노선대로는 강행할 수 없다는 입장인 모양이다. 일단 이제 소비자들은 고그를 오로지 어린이 교양지 상품으로서만 접하고 이해하고 구매한다는 것이다. 한때는 고그를 누가 만드는지, 왜 만들었는지, 뭘 하려고 만드는 건지 등에 동조한 사람들이 고그를 '후원'해 줬는데, 지금의 실제 고객 전환은 그냥 '물건 자체가 좋고 애들이 좋아해서' 발생한다나.
  • 비슷한 맥락일 텐데, "교육이 어때야 하고 사회가 어때야 한다" 하는 '토론', 현상태를 문제시하고 극복하자는 기조 자체가 담론장에서 아주 퇴출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이번에 선거에서 진보신당[sic.]이 한 석도 못 얻었잖습니까?" 듣고 보니 주간경향에서 연재하던 교육 자체 관련 칼럼도 스리슬쩍 우찌끼리 상태고. 그런 차원에서도, '사회가 어떠해야 하고 어린이의 삶이 어떠해야 하니, 고그를 읽어야/읽혀야 한다' 하는 당위 가지고는 비즈니스 모델을 세우지 말아야겠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속으로 '성인용 고그 교육지도서', '편집후기 뉴스레터'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입장을 이해하고 나니, 별 도움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겠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 특히 어른들은 "교육 탓"을 한다. 일선의 교육자들은 피나게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국 성인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교양 부족을 욕하기 바쁜 아주 괴상한 수라장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성인 대상의 무언가'를 추진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미련이 남는다.
  • 고래가그랬어가 괜찮은 어린이 잡지로 평가되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MSG 없이 좋은 재료로 콤팩트하게 만든 음식을 어린이들이 곧잘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거라고 생각된다. 그건 정말 적게 정말 좋은 재료를 듬뿍 써야만 가능한 경지다. 아주 많은 사람들에 한번에 비슷한 맛을 먹이자면 MSG를 쳐 가면서 자극적으로, 해로운 성분을 섞어 가며, 필연적으로 부실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싫어하는 어린이 대상 추천도서"는 그렇게 탄생한다.
  • 이게 '교육', '어린이' 도메인에 한정해 논할 사안은 아닌 거 같다는 막연한 의구심이 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정신도 늘 일용할 양식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 성인들은 매주 일요일의 대형 교회, 이런저런 트위터 계정의 이런저런 주장, 포털 사이트 뉴스, 뉴스 댓글, 유튜브, 유튜브 댓글창 등등 영 먹을 게 못 되는, 싸구려인, 불량식품에 가까운 마음의 양식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문득 EBS가 '딩동댕 대학교'를 런칭했던 것이 생각난다. 아니면 '성인용 구몬학습지' 같은 거(이건 주주총회 자리에서부터 연상했던 것이다). 그런 기획들은 왜 등장하는가? 오늘 우리가 어른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실은 별로 어른이 아니고, 시민사회의 근대화된 교양 개인은 어른들 가운데서도 썩 부족한 것이 아닐까?

근데 이 이상은 나도 구체적인 주장거리가 없어서 말을 못 잇겠다. 어린이가 아닌 사람, 구독자가 아닌 사람이면서 이 기획에 연대하고 싶은 사람은 당최 무슨 수를 내 주어야 좋을지가 막막하다. 돈은 둘째 문제다. 세상이 이렇다는데, 진짜 어떡하나.

Posted by 엽토군
:

10년 전 이맘 때쯤 청년좌파에서 성명문을 내놓은 일이 있다. 원문은 사이트째로 폭파되고 없다. 애초에 청년좌파도 해체한 지 오래고. 그 성명문만큼은 다른 언론사에서 통째로 전재했던 것이 있어서, 여기 내 블로그에도 백업 옮겨 놓는다. 링크들이 깨져 있는 꼴은 참말이지 볼 때마다 심란하고 적응이 안 된다.
그건 그렇고, 아래는, 참말 지금 다시 보아도 전율이 치미는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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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난 4월 16일 8시 48분경, 인천-제주 정기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에는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그리고 언론과 대중에게 완전히 잊혀진 70여명의 승객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침몰의 결정적 요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검경합동수사본부는 ‘급변침’에 무게를 두고 있다. 급변침이 조타수의 실수 때문인지 조타기의 고장 때문인지 정전 때문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이 배가 침몰하기에 충분했던 조건들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세월호의 선주사인 청해진해운은 전두환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던 ㈜세모가 전신이다. 1990년에도 세모가 운행하던 선박이 침몰하여 15명이 실종된 바 있으며, 당시 실종자 수 축소조작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6년 이후 해양수산부의 고객 만족도 평가에서 네 차례 우수 등급을 받은, 정부가 인증하는 기업이다.

세월호는 1994년 일본에서 취항해 18년 동안 운항하고 2012년 퇴역한 배로, 청해진해운이 이를 사들여 2013년부터 운항에 들어갔다. 20년 가까이 운행한 퇴역 선박을 사들인 배경에는 ‘제도적 수명연장’이 있었다. 2008년 정부는 선박의 제한수명을 종전의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렸다. 비슷한 시기 수명이 다한 고리 핵발전소의 수명을 10년 더 늘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명연장이라고 해서 낡은 기계가 젊은 기계처럼 움직이도록 어떤 물리적 조처를 한다거나 건강상태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10년 더 쓸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주는 것뿐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안전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라고 정부가 기업에 말해주는 것뿐이다.

한번 관 속에 들어갔다가 사망신고 취소로 좀비처럼 부활한 세월호는 그야말로 좀비의 몸이었다. 선박 주변의 물체를 식별하는 레이더는 최근 4개월 동안 3번이나 교체했고, 발전기를 돌리는 엔진과 배를 움직이는 엔진도 노후했다. 문제의 조타기는 사고 나기 보름 전에 오작동과 수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후 수리가 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부활 직후 이 배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마냥 개조당하기 시작했다. 물론 안전을 위한 개조는 아니었다. 전직 세월호 기관사의 증언에 따르면, 600여 명이 세월호의 본래 정원이었으나 300여 명을 더 태우기 위해 배 뒤쪽이 개조되었다고 한다. 맨 처음 개수했을 당시 5,997톤이었던 선박은 사고 당시 6,835톤이었다. 1,000톤 가까이 무게가 늘어난 것이다.

사고 1주일 전까지 세월호에 있었던 전직기관사는 JTBC 9시 뉴스에서, 세월호가 항해 중에 배가 자꾸 기울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 배가 “찜찜했다”고 표현했고, 찜찜한 배에서는 잦은 이직이 일어났다. 1년에 기관사 7명 중 5명이 바뀌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등장한 전직 항해사는 “다른 결함보다도 사고 당시 세월호가 화물 결박을 제대로 안 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연합뉴스에서도 차량결박이 평소에 허술했었다는 단골 승객의 증언을 확보했다. 전직 항해사가 증언한 차량결박 부실의 이유는 결박을 연구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회사에서 좀처럼 해주지 않는다는 것. 청해진해운은 지난해 접대비에 6,060만 원, 광고비에 2억 2990만 원을 쓴 반면에 안전교육 연수비로는 54만 원밖에 쓰지 않았다. 여기에 경제적 효용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비용의 “절약”은 고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박의 수명은 긴 반면에 노동자의 수명은 짧았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승무원 29명 중 절반 이상인 15명이 6개월~1년 단위 계약직이었다. 선박 안전관리의 핵심 보직인 갑판부 선원 10명 중 8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사고의 방아쇠가 된 조타기는 누가 만졌을까? 조타수 3명은 모두 6개월~1년 계약직이었다. 선장 역시 1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갱신하는 촉탁직이었다. 심지어 사고 당시 세월호를 몰던 선장은 청해진해운이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는 또 다른 배 ‘오하마나호’의 교대선장이기도 했다. 통상 대형 선박에는 두 명의 담당 선장을 두는 것과 달리, 한 사람을 두 배의 선장으로 등록한 것이다.

모든 것은 경제적 효용을 위해서였다. 정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운행제한 규제를 완화하고, “고용 유연화”를 추진해 기업이 비정규직을 멋대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기업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시체가 된 배를 되살려냈고, 배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여기서 “비용”으로 분류된 것의 정체는 바로 생명이다. 청해진해운이 접대/광고비에 투자한 약 3억 원과 안전교육에 투자한 54만 원. 이 차이는 오늘날 시장에서 인명의 단가가 얼마인지 추정하게 해주는 척도다. 우리의 생명은 경제적 효용에 비해 약 0.000018%의 가치가 있다.

배가 침몰하고 사람이 죽은 것 자체는 불의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검토된 비용이다.

II. 누가 죽었고 누가 다쳤는가


절대다수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이었다. 수학여행의 일정과 경로, 선박의 선정과 계약 등에 일체의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다. 또 이들 중 상당수는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의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가족이었다. 수학여행은 교육의 일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들의 수학여행은 대행업체에 위탁 진행되었으며, 대행업체의 선정기준은 최저가 입찰방식이었다.

결정할 수 없는 자들이 최저가 입찰을 통해 안전하지 않은 것에 태워졌다.

III. 수학여행 때문인가


사고 이후 서울과 경기도교육청은 수학여행을 취소하거나 보류했고, 나머지 지방교육청들도 학교장들을 소집하여 대책회의를 논했다. 주간조선은 사고 직후 커버스토리 제목을 “이래도 수학여행 가야 하나”로 달았다. 수학여행을 폐지하자는 언론기사도 심심치 않다.

1.
교육청이 수학여행을 취소/보류한 것은 물론 당연한 조치다. 전 국민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굳이 학생들에게 유사체험을 시킬 필요가 없으며, 예정/계획된 수학여행들의 안전점검도 필요하다. 수학여행의 대행업체 위탁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교육청이 당연히 그렇게 조치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조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하지 않았던 다른 사례에 대해 기억한다. 태안에서 일어난 해병대 캠프 참사다. 사고 이후 사실상 의무적으로 학교에 부과되는 병영체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교육청은 여전히 병영체험을 각 학교에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학여행 폐지론을 들먹이는 언론들이 “병영체험 이래도 가야 하나” 따위의 기사를 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그렇다면 병영체험과 수학여행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지 피해자의 숫자 차이인가? 가장 큰 차이는 교육내용의 차이다.

학교 병영체험의 목적은, 교육청 공문에 따르면 “올바른 국가정체성 확립과 안보의식 함양”을 위함이다. 첫째로 “올바른 국가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병영체험에서 헌법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사고의 훈련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성문가치를 병영체험을 통해 교육한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군사주의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말이다. 군사문화는 폭력을 기반으로 한다. 폭력이라는 단어가 질서정연하게 느껴지지 않아 불만이라면 무력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좋다. 상명하복이 기초원칙이며 옳든 그르든 군대에서 민주주의는 보류된다. “올바른 국가정체성”이라고? 합의된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올바른 국가정체성” 교육은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의식화 교육일 뿐이다.

둘째로 안보의식의 안보는 도대체 누구의 안보를 말하는 것인가? 국가의 안보인가 국민의 안보인가? 국가의 안보는 국민의 안보와 일치하는가? 안보의식이란 도대체 어떤 안보의식을 말하는 것인가? 국가의 안보는 국민의 안보를 위해서만 정당하다는 의식인가? 아니면 국가의 안보를 위해 국민이 봉공해야 한다는 의식인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오늘날 그 어느 곳에서도 “국민의 안보”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 세상이 우려하는 것은 “국민의 안보”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안보 불감증” 뿐이다. 국민은 오로지 국가의 안보를 위해 동원되는 대상이며, 역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치 않다. 그런데 그 필요는 대체 누구의 필요인가?

2.
주간조선과 일부 언론의 “수학여행” 비판은 문제를 수학여행이라는 협소한 부분으로 축소하려는 의도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시각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수학여행이 우려되는 이유는 중앙일보에 게재된 기사, “교육적 수명 다한 수학여행 폐지하자”의 첫 문장에서 간략하게 나타난다.

“수학여행은 대규모 인원이 단체로 움직이는 특성상 사고가 발생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어떠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있어 비판의 시작이 될 이 문구는, 문구 자체로서는 이상하지 않다. 대규모 사상을 방지하자는 주장은 합리적이다. 불의의 사상을 방지하자는 합의가 있은 후에만.

다만 주간조선의 커버스토리 제목처럼, 문제의 핵심을 “수학여행”으로 지목하는 시각의 특징은 “대규모 사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상”에서 근거하지 않고 “대규모”에서 근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배가 침몰하고 사람이 죽은 것 자체는 불의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검토된 비용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악재는 “수학여행” 뿐이다. 대규모의, 그리고 여론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계층의 죽음 말이다. 죽음을 단순한 숫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을 때 언론은 경제학자들에게 묻게 될 것이다.

“몇 명의 죽음부터가 위험한 손실인가?”

이익 대비 손실, 수학여행의 필요와 병영체험의 필요는 이를 근거로 추산된다.

3.
어디 수학여행이나 병영체험 뿐인가? 인권의식이 발전할수록 청소년 자살률이 줄어드는 세계적 추세와 정반대로, 한국의 어린이·청소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지난 10년간 47% 증가했다. 교육부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중 40%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고 9%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자살의 동기는 ‘성적, 진학문제’가 53.4%라는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매년 수능날이면 성적비관 자살 뉴스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더 이상 사람들은 이런 뉴스로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경쟁교육 이래도 계속 해야 하나”라는 질문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한다.

방과 후 문제풀이 수업, 강제보충학습과 강제자율학습, 토요 강제 등교 등 학생을 기계로 만드는 교육방식은 시간이 갈수록 ‘공부시간 인플레’현상을 만들고 있다. 정부와 교육부는 사회적 반대도 무릅쓰고 중고등학교의 일제고사를 강행하며, 탈락한 청소년들을 자살로 몰고 있다.

죽음을 무릅쓴 교육은 도대체 누구를 위함인가? 죽은 청소년을 위해서는 분명 아닐 것 아닌가.

IV. 생명은 이윤보다 무거운가


물론, 반박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는 0.000018%로 취급되고 있지 않으며, 특수한 회사의 특수한 상황일 뿐이라고. 그러나 세월호 사건이 고발하고 있는 것은 청해진해운이라는 한 회사만이 아니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온몸으로 자신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 상조회사는 공무원을 사칭해 유족에게 접근하고, 세월호를 소재로 삼은 스팸문자는 전 국민의 손안에서 요동친다.

언론은 조회수와 특종을 위해 자극적인 보도와 저열한 제목들을 뱉고 있다. “기레기” 때문이라고? 멀쩡한 사회에서 기자들이 도덕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단 말인가? 시장도, 소비자도 권하지 않는 폭동을, 오로지 그들이 악랄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업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죽음을 투자비용으로 전제한 사업이 참사의 요인 중 하나였다면, 참사 이후 벌어진 것은 죽음 자체가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등장한 모습이다. 생명은 이윤보다 무거운가? 이 물음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겠다. 생명은 가공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며, 죽음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바레인이란 이름의 아랍 섬나라에도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바레인 왕정은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을 펼쳤고, 이 진압에 주로 사용된 장비는 최루탄이었다. 그해 12월 31일, 15세 소년 사예드 하쉬엠 사에드가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찰은 조문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장례식장에 최루탄을 쏘았다.

사에드의 얼굴을 때린 최루탄은 한국산이다. 지금까지 바레인 왕정은 한국 기업들로부터 최루탄 150만 발을 수입했다. 바레인 전체 인구 약 120만 명. 국민 1인당 1발씩 쏘고도 남는다. 최루탄만이 아니다. 필리핀에는 한국산 경공격기가 날아다니고, 서아프리카에서는 한국산 총알이 날아다닌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기산업을 “창조경제 꽃피우는 동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국산 경공격기 24대가 이라크로 수출된다는 소식에 방송은 앞다투어 “쾌거”를 칭송하고 2조원의 수익이 생겼다고 보도했다. 그 공격기가 대체 누구를 공격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무기 수출을 “국가 경쟁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누구도 반문하지 않는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창조경제의 꽃이라면, 창조경제의 정체는 생명의 무게를 초과하는 이윤 바로 그것이며 양심은 비효율적인 비용에 불과하다.

더 새로운 상품은 끝없이 요구된다. 죽음 비즈니스 조차 포화한 오늘 블루오션을 찾는 자들은 금기의 벽을 깨길 원한다. 물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유족충”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유족 혐오발언은 하루를 가리지 않고 인터넷에 등장하고 있다. 어느 잊혀진 우익논객은 유족들의 분노에 대해 “시체장사”라고 표현하고, 인생역전을 원하는 어느 우익언론의 편집장은 “이 (유족)여자는 종북야권 성향입니다. (가족이)참으로 잘 죽었네요”라는 말과 함께 유족의 사진을 배포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혐오발언을 통해 관심을 끄는 것뿐이다. 소위 “어그로” 말이다. 50년대 우익의 정치선동을 흉내내며, 혐오사회의 진보를 여는 낭중지추가 되고자 하는 넷우익들은, 지적 열등감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무정부 상태의 뇌세포를 불쏘시개로 만들며 초과노동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선구자다! 한국사회라는 기차가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말이다.


V. 나 이외에 누구도 선동하지 말지어다


이 와중에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의 관심은 마치 “엉뚱한 곳”처럼 보이는데 쏠려있다. 한기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이 기회에 좌파를 척결하자고 주장한다. 송영선 의원은 “국민 의식부터 재정비할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인 것만은 아니다.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들은 ”망언“이며 ”말실수“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맥락을 공유한다. 국민의 생명은 기회비용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국회가 물리적으로는 여의도에 있되 영적으로는 올림푸스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말들은 실수가 아닐뿐더러 논리적이다! 우리가 경제성장을 위하여 저 멀리 떨어진 이라크 국민들의 죽음을 감수하듯이, 저 멀리 떨어진 바레인의 죽음을 감수하듯이, 저 멀리 떨어진 밀양에 송전탑을 짓기 위해 현지 주민들에게 경찰부대를 보내는 일을 감수하듯이, 그들도 지상에 있는 국민들의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 이상한가? 만약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면, 모든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물론 신들에게도 걱정은 있다. 그 걱정은 바로 신들에게만 허락된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귀한 정치적 발언의 권리이며, 선동의 권리다. 그러기에 그들은 정부 관료에게 항의하는 유가족을 “선동꾼”이라 선동하며, 책임지지 않는 정부에 대한 모든 분노를 “북한의 선동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한편으로는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졌듯이, 국정원이 나서서 참사 관련 전문가들의 ‘인터뷰 통제’에 힘쓰고 있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말이 나가면 누가 말했는지 찾아낸다”는 학자들의 증언과 같이, 작은 불경함도 놓치지 않는다. 정치도 선동도 오로지 올림푸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누구도 선동하지 말지어다!


VI. 모두가 너희들 가운데서 나리라


도망친 선장은 만고의 죄인이 되었고, 끝까지 남은 승무원은 죽어서 영웅이 되었다. 죽은 학생들의 뒤를 따라 자결한 교감은 의인으로 남았다. 각자의 행동에 대한 의로움의 저울눈금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그 눈금을 다 합쳐도 책임의 저울눈금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가 “진실로” 모르겠는가? 저 중의 그 누가 안전하지 않은 배를 만들었고, 저 중의 누가 그 배의 운행을 허가했는가?

악당도 영웅도 오직 결정할 수 없는 자 안에서만 나며 비교 역시도 그들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은 오로지 “정규직 귀족노조” 때문이며, 빈곤한 자의 죽음은 오로지 “이웃의 무관심” 때문이다. 사장은 어디로 갔는가? 정부는 어디로 갔는가? 지난 23일, 25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죽었다. 이 사람은 누구 때문에 죽었단 말인가? 책임의 저울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저들을 올리기에는 당치도 않게 거대한 그 저울 말이다.

그 저울은, 400km 밖에 있다.


VII. 박근혜는 누구인가


4월 20일, 피해자 가족/유족들이 박근혜 정부의 무책임함에 항의하며 청와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도에서 청와대까지 400km의 여정은 고작 10km도 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경찰부대가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경찰은 “안전을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것이 누구의 안전을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사복경찰들을 유족들 틈에 배치해 유족들을 감시하게 하고, 곳곳에서 열리는 추모제들을 방해하고, 정부를 향한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촉각을 세우는 모습들이 유족들의 안전을 위한 것은 아닐 터다.

피해자 가족의 청와대 항의방문이 성공적으로 진압된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상식 밖의 발언으로 언론을 들끓게 했다.

“저뿐 아니라 국민들께서 경악과 분노로 가슴에 멍울이 지고 있다.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였다”

대통령의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대사회의 어떤 정치인도 말하지 않을 법한 말을 두 가지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말들로부터 네 가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1. “저뿐 아니라 국민들께서”
i. 대통령은 자신이 “분노하는” 주체이며 피해자라고 믿는다. 이는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회사도 피해를 입었다”고 항의하던 이준 회장의 태도와도 같다.
ii. “국민뿐 아니라 저도”가 아니라 “저뿐 아니라 국민들께서”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 보다 자신이 분노하는 것이 더 당연히 예측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며, “저뿐 아니라 국민들께서(도)” 분노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2. “선장과 일부 승무원의 행위는 ~ 살인과도 같은 행태”
i. 대통령이 책임자가 아니라 심판자의 자격을 자처하고 있으며, 책임의 소재를 선장과 승무원에 국한시키고 있다.
ii. 외신들이 이미 비판했듯이, 대통령이 판결에 영향을 주는 발언을 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이라는 구실을 제외하면 한치의 존재 이유도 없는, 오히려 민폐에 불과한 것이 국가와 정부라는 존재다. 그러한 존재의 수장이라는 자가 스스로의 책임을 자연인의 수준으로 격하하고,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판결에 따르면, 범인은 선장이다. 오로지 선장이다. 우리는 이 선장이 비도덕적이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가장 유력한 사람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강조하지만 이 월 수입 200만 원 정도의 1년짜리 촉탁직 선장이, 낡은 배를 운행할 수 있게 규제를 완화했고 배를 비정규직으로 채우게 만들었으며 안전비용을 대폭 축소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는 “그 배 안에서만”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설사 이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자라 할지라도, 그는 이 사고를 주재할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 대통령의 판결은 정의도 추리도 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말의 목을 자르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발걸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앞에서 보여준 것은 사과가 아니라 분노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며 도통 자기는 책임을 질 것이 없는 양 굴고 있다. 이 자가 정말 말 그대로의 “국정책임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하는 자인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 조차도 국가대사에는 죄를 스스로 청하는 법인데, 통치하되 책임지지 않는 이 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할 것을 정하며 목소리로 말하되 실패의 책임은 오로지 무도한 백성에게만 존재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정체는 신의 음성을 전하는 무오류의 제사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VIII.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합체는 태생을 잊고 마침내 그 이름 자체가 신물이 되었다. 국민들은 왕 보다도 더 형체가 없는 것을 숭배하고 있다.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신의 제사장이 통치함에 따르는 사이비 율법국가다.

‘경제적 성장’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가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 그 자체가 가치이며 인간의 행복은 그 가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율법이다. 그리하여 수단이 가치가 되며, 수단을 위한 수단이 가치가 되며, 만들어진 것들을 위해 본래 있었던 자들이 봉공하는 것이 오늘의 질서다. 어떠한 경로의 폐기도 용인하지 않는 것은 계급을 막론한 다수 국민정서의 공통성이다. 부동은 곧 정상성이며, 체제의 변동은 상상으로도 인정되지 않는다.

공존을 위한 혁명이 학살보다 비도덕한 사회에도 도덕적이고자 하는, 혹은 그렇게 인정되고자 하는 욕망은 상존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의 도덕성을 증명하려 하고 타인의 도덕성을 복원하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현재의 비극을 대변할 뿐이다. 죽음을 팔 용기도 잔인함도 없으려니와 그러한 시대를 용인하지 못하는 애꿎은 자의 정의감은, 그가 책임의 저울에 올라 제사장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이 시대를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IX. 침묵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일어났던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이 말 조차도 이미 20년 전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의 입을 통해 경고되었던 말이다. 말의 목을 수없이 자르고 질주하면, 우리는 다른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혹은 예의와 추모로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불편한 침묵이 이 나라를 황사처럼 떠돌고 있다. “진로를 바꾸자”는 말은 금지되며,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가질 것”은 요구된다. “애도”라는 똑같은 취지에서! 이 앞뒤가 다른 주문은 한가지로만 설명된다. 그 죽음은 “필요한 필연”이며 “권장되는 희생”이라는 것. 그러니 그것이 누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건, 우리는 그 말에 따를 수 없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대응도 아니며 오직 “하지 않음”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제사장을 걷어차는 것뿐 아니라 그 신전 자체를 뒤엎자고 말한다면, 성장주의 율법을 폐기하자고 말한다면, 대통령의 직위를 폐기하고 모든 죽음의 비즈니스를 - 그러니까 무기수출도, 핵발전도, 불안정노동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모든 경쟁과 차별도! - 폐기하자고 말한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규제를 혁파하자”며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자들을 몽땅 끌어내고 이윤보다 생명이 그 어느 순간에도 우선하는 것을 우리의 율법으로 삼자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당신들은 그것을 선동이라고 욕할 것인가?

그렇다. 우리는 선동하려 한다. 추모하고 슬퍼하되 참극은 그대로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당신을 상대로. 어떠한 요구도 배제하고 어떠한 설득이나 견해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태도야 말로 불순하며, 비정치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야만적인 정치다. 뭇사람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선장의 죄”는 바로 그 요구였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에 멈춰있어라!”

“순수한” 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와 같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상상조차 필요없다. 침몰하는 배에서 누구의 편도 아닌 부동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하찮은 중립놀이는 제쳐두고, 우리는 당신을 선동하려 한다. 당신 역시 모두를 선동해야 한다고.

진중한 애도의 물결 속에서 시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우리가 무례한가? 맞다. 우리는 무례하다. 무례한 체제 안에서 예의바른 구성원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 속에 화염이 존재할 수 없듯이. 그러나 더 무례한 것은 생명에 대해 무례한 절대 권력을 침묵으로 용인하는 것이며, 더욱더 무례한 것은 그 무례를 권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무례이며, 인간에 대한 무례다.


X. 이 정부를, 그 전통을 통으로 들어내야 한다


아, 여전히 당신은 의로운 권력자와 의로운 기업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자들이 존재하며, 희망이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예를 들어 저 세월호 보도로 칭송받는 JTBC를 만든 삼성이라거나, 도도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역으로 피해자들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라거나.

그러나 그 숭고한 묵념 후,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상대로 꺼낸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규제완화다. 미국 정부는 지금 한국의 산업은행 민영화, 스크린 쿼터제 완화, 독점 대기업의 횡포를 제한하기 위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 폐지, 환경정책과 의약품 가격 인하 정책 재고 등을 요구하고 있다. 오바마의 묵념은 “이 요리를 위해 희생된 생명들에게 명복을 비는” 식사전 기도에 불과하다. 당신은 예의바른 도살자를 원하는가?

침묵이 허공을 도는 가운데 오로지 삼성자본을 등에 업은 JTBC만이 진실의 기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에 “안타깝다”며 삼성 2호 크레인을 급파한 이건희 회장은, 정작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에게는 사과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산재 없는 삼성”의 브랜드를 위해, 산업재해 신청을 시도하는 유족들을 회유 협박하는 등 끔찍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 게다가 그 삼성 2호의 형뻘인 삼성 1호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태안반도에서 최악의 기름유출사고를 일으킨 삼성중공업이 사고 직후 한 일은 사과도 수습도 아니고, 항해일지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아 혹시 당신은 그들이 집권하지 않았던 태평성대 시절의 권력자들을 이야기할 셈인가? 비정규직도 없었고 국민의 생명이 소중했으며 이윤이 생명보다 소중하게 다뤄졌던 시대를. 부실 시공된 지하철도 없고 침략전쟁에 파병하지도 않았고 핵발전도 없었으며 대통령이 타국의 수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산 무기를 사달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던 그 시대를. 그런데, 기억이 안나서 그러는데 그게 도대체 언제인가?

이 나라는 그 어디도 망가지지 않았다. 부자부터 가난한 자 까지, 합심하여 전통을 지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에서 세월호 참사까지, 모두 그저 전통이 무사히 지켜지고 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 모든 참극은 성장주의 계획의 파편이며, 그 계획이야 말로 우리가 망가뜨려야 할 대상이다. 선거 때까지 기다리자고? 맙소사, 우리는 이윤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확인하는데 투표가 필요하단 말인가?

절벽으로 질주하는 고속도로를 우회하는 길은 거친 숲길 뿐이다. 생명의 대척점으로 가는 경로에서 과속을 주장하는 이 정권을 제거해야 한다. 그 후로 더 이상은, 이 경로를 폐기하려 하지 않는 그 어떤 정권도 진입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입을 봉한 채 기도하는 자들 가운데, 실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든 자들이여, 우리는 신심의 열정을 무시하고 제사장의 매서운 눈치도 외면한 채 제단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고자 한다.

저 놈들을 당장 쫓아내자!

2014년 4월 27일
청년좌파

원문 http://yleft.kr/wp/?p=967

Posted by 엽토군
:

눅18:1-8(RNKSV)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1.
최근 가장 마음에 드는(?)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는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다.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로서는 드물게, "이 삽화의 의도/의미/목적은 이러하다"라는 명토가 박혀 있다. 그것도 첫마디, 이야기를 운도 떼기 전부터 말이다. 아마도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일러두기'였을 게다. 경고! 여기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의미만을 가집니다. 그 이상의 뜻을 탐색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2.
이해는 된다. 이 우화의 주장은 (가뜩이나 급진적인) 예수님의 견해 가운데서도 독보적으로 위태롭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조르고 떼 쓰면 된단 얘기지 않은가? 이 메시지를 이렇게 그르게 읽고 틀리게 받아들여 버리면, 그건 고스란히 잘못된 태도와 실천과 문화와 조직을 낳을 것이다. 로마 제국 치하의 피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사태만큼은 막아야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교훈으로 공식 국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실은 어느 제국 치하에서든지 마찬가지다.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기로 하고...

3.
아무튼 그래서 여기서는, 정경의 정설/정론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이 메시지를 읽어볼까 한다. 내가 이 비유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4.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이야기가 딱히 "신앙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은혜를 받고 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신앙적이기는커녕 대단히 인간적인 '속세'의 이야기다. 과부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그 전체 서사 가운데 믿음, 기도, 선행 따위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재판관 한 명을 죽어라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시위하는 한 여자, 그리하여 마침내 그 덕분으로(만)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고독한 여자뿐이다. 초반의 머릿말이 아니었던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가 대단히 어렵다. 흡사 창세기/사사기적이기까지 한 이 세속적인 삽화에는 신앙적인 요소가 딱히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라는 언급이 있는데 그게 신앙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다. 과부가 재판관을 졸라대는 것을 보고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것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과부가 시위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시위해야 된다고? 그건 또 무슨 아닌 밤중의 잠꼬대인지 모르겠다. 됐고, 재판관의 혼잣말을 들어보자. 그가 이 사건을 외면하다가 마침내 접수하기로 맘먹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서인가? 과부가 그에게 기도를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18:5b).

6.
선행 연구 근거자료 없이 하는 소리지만, 이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그가 기독교적/유대교적 의미에서의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식의 문자적인 진술이 아니고, 그가 그만큼 부도덕하고 몰염치했다는 묘사를 위한 수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말하자면 '직업 윤리가 심각하게 결여된 법조인'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표현하신 거였겠지. 이 개념은 요즘의 우리에게도 어렵다. 하물며 1세기 무렵 고대 근동의 저학력 아람인과 헬라인에게는 어땠겠는가? 자연히, 우리말의 "땡중"에 해당하는 표현을 써야 했을 게다.

7.
요컨대 그는 직업 윤리가 부족한 판관이다. 하지만 무능하거나 멍청하지는 않다. 실은 오히려 반대다. 그는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이고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다. 나로서는 특히 이 부분이 흥미롭다. 상상해 보시라. 몇 날이고 며칠이고 질리지도 않고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과부를 겨우 외면하여 집에 돌아온 그 재판관이, 왠지 그날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 방에 앉아, 직업적으로 훈련받은 생각을 시작하는 거다.
'지금까지 이 과부 때문에 내가 얻은 득과 실은? 앞으로도 이 과부가 나를 괴롭힐 확률은? 난 이런 원고의 탄원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놈이지만, 혹시 만약에 내가 이 탄원을 접수해 주면 그때 내가 얻는 득과 실은?'
그리고 그는 이 판단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자기 상황을 제삼자적으로 조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어설픈 정의감 같은 것보다 더 세련된 자질일는지도 모른다.

8.
혹시 그는, 바로 이 태생적 기질 때문에, 어느 날부턴가 이런 재판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건 아닐까? 설마 그도 처음부터 이런 판사는 아니었을 테다. 이 재판관이 과부의 탄원을 처음부터 덮어놓고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처음에는 그냥 다른 탄원 보듯이 똑같이 봤겠지. 그래서 봤더니 이런! 아무래도 사건성이 없는 거다. 피고가 애매했든지, 책임 소재나 비중이 불분명했든지, 피해라고 주장하는 그걸 현행법 내에서 규명하기가 곤란했든지 했을 테다. 그래서 처음 한두 번은 이 탄원을 점잖게 돌려보냈겠지. 참 안됐는데 이건 내가 법정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사안이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그랬더니 이게 과부 입장에서는 "드디어! 내 사연을 읽은 재판관이 한 명은 나왔다!"가 되고 말아서, 그때부터 이 과부와 재판관의 악연이 시작된 그런 것일 테다. (그렇게 읽어야, "왜 이 과부는 다른 판사는 냅두고 꼭 얘한테만?" 하는 의문이 풀린다. 애초에 이게 가장 현실성 있는 전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의 결말은 열려 있되 어느 정도는 해피 엔딩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 과부는, 그 억울함을 100% 풀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사법부의 판단을 받았다"라는 부분만큼은 한풀이를 했을 게다.

9.
문득, 태평로, 테헤란로, 의사당대로 여기저기에 몇 날이고 며칠이고 너덜너덜 걸려 있는 피켓, 텐트, 분향소들을 생각한다.

10.
슬프게도,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바, 사회적 약자가 공공과 공권력을 향해 뭔가를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요구 혹 탄원하며 시위하고 있을 경우, 그 요구와 탄원은 그 지속력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무시된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사회적 정의는 과연 (왜) 실현되지 않는가?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이 해결될 길은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걸 알아채지 못하고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싣지 않은 다른 제자들은 아무래도 "꿘"이 아니었는가 보다. 이 농담은 끝에서 한 번 더 하기로 하고...

11.
잠시 성경책을 보던 눈을 들어 그대로 주변을 읽어 보자. 일본 정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서야 과연 전범국으로서의 송구함이 없는 철면피 얼굴로 노인의 얼굴에 돈다발을 던지는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모 반도체 대기업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들 과연 그들 밑에서 일한 것 외에 아무 공통점이 없는 "또 하나의 가족"들의 희귀병을 그렇게 차갑게 나몰라라 할 수 있었을까?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이상민 "장관"이, 김건희가, 남양과 쿠팡과 카카오와 아디다스의 오너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12.
퍽이나 그렇겠다 그치? 안 그러니까들 저러는 거야. 저것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정권이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본이며, 직업 윤리가 심각하게 부족한 전문직능집단이고 사회적 도의가 없는 기득권이야. 그래서 끈질기게 모르는 체하는 거라고. 분명히 어느 정도는 자기들이 말을 듣고 책임을 져야 하는 여자들의, 유가족들의, 사회적 약자들의, 너희들의 탄원과 불매와 시위를.
그런데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정말로 끈질기게 탄원하고, 끝까지 불매하고, "자주 그에게 가서"(눅18:3b) 투쟁하고 시위하면,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니? 저것들도 어느 날인가는 질려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는 날이 오게 될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남편 없는 여자 같은 것들이 나를 괴롭게 하니, 해 달라는 걸 해주고 확 치워버려야겠다' 같은 생각을 말이야. 혹시라도, 정말 드물게 가끔씩이라도, 정말로 그런 일이 있고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너희의 소원과 억울함은, 잠깐이나마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서 풀리고 해결되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3.
나는 너희들의 삶에 그런 싸움이 있어도 된다고 봐. 그런 싸움은 그런 식의 승리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해. 세상은 악하기 짝이 없지만, 악을 이기려는 노력 자체는 어떤 이유로도 무작정 좌절될 필요가 없어. 정말이야. 그런 싸움은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에는 어떤 그럴싸한 드라마나 종교적 교훈도 필요가 없어. 내 이름까지 들먹일 것도 없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b)
왜냐면, 현실에서도, 아주 가끔 악이 패배할 때는 그렇게 패배하거든. 다른 게 아니고,
질려서. 너희들에게 질려서. 너희가 정당하다는 걸 깨달아서도 아니고, 너희를 갑자기 존중하기 시작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너희를 통해서) 깨달았다느니 되도 않는 종교적 도덕적 분칠 때문도 아니고, 그냥 나약한 그릇됨이, 너희의 옳은 호소를, 그 호소의 지구력을 더 버티지 못해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우르르 무너지고 휙 뒤집히고 그러기도 하는 법이거든. 그런 건 소망해도 좋아. 내가 정말 이 얘기는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었어. 이걸 "누가" 좀 적어주면 좋을 텐데.

14.
직전의 두 단락은 아마 예수님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웬 백발 미치광이 '길거리 목사'가 짝퉁 민중신학과 짝퉁 레닌주의를 적당히 섞어 떠드는 취한 소리처럼 들렸겠지. 그럴 만도 하다. 누가복음 18장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들과 비슷하게, 이 정도의 현실적 구체적 묵상, 설교, 의논을 누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지. 분명 원래의 예수님 말씀은 당대 일반 인민의 일상에서 진리를 추출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기가 더 어려웠는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걸로 '비유풀이' 같은 미신, '관주주해', '원어분석' 같은 지적 유희 등을 탐닉하기 바빠, 이해해야 할 요점만 쏙 빠지는 "성경 공부"를 한다.

15.
그리고 "공중 권세"는, 사회 기득권은, 악의 제국은 그 상태를 기꺼이 방치하고, 필요하면 더 강력한 오독을, 더 확실한 맹목을 장려 및 조장하기도 한다. 그게 그들의 수성전에 도움이 되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행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기상천외한 조합이 어떻게 성립한다는 건지부터를 모르겠는 입장이다. 하지만 분명 이 사회는, 누구랄 것 없이 어느 나라랄 것 없이, 기회 닿는 대로 피해자를 비난하기를 마지않는다. 하물며 그 피해자들의 피해 자체, 억울함 자체, 불합리와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서는 더 볼 것이 있겠는가? 과부의 청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되려면, 그 재판관은 최소한 "사람을 무시"(눅18:2b)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본에게 이윤이 된다면, 정권에게 표가 된다면, 알량한 자아와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역량을 정확히 거기에 집결시킬 의지마저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을 분명 읽고 듣고 설교하고 QT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소수자들, 투쟁하는 단위들, "과부"들에 대해 완전히 눈멀고 귀먹은 교인들을 길들이고 있다.

16.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믿은 사람으로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봤던 바로 그 과부와 바로 그 재판관이 눈에 띄면, 과부 편을 들어야 한다. 그게 맞다. 그리고 그 억울한 과부는 국민신문고와 "단식 n일차" 텐트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 불의한 재판관은 날마다 TV 뉴스와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이 모든 시위 투쟁을 성경 속 과부처럼 "낙망치 말"고 모두 끝까지 밀어붙이자면, 그건 고스란히 "혁명", "노동자 대투쟁"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참아내지 못했고, 이 사회 기득권 역시 결코 참아낼 생각이 없는 그런 싸움 말이다.

17.
나는 그 싸움을 지지한다. 최대한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한 지구전에 되는 대로 합력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굳이 따지자면 나는 천상 "꿘"인 편이니까. 여러분은 어떤가?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그냥 "항상 기도"하라는 이야기로만 듣고 헤헤 웃고 큐티 책 덮는 그쪽에 있고 싶은가? 예수님은 이쪽이신 것 같은데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Posted by 엽토군
: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는 굉장히 유명한 성경 삽화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베드로의 꾸중을 듣고 급사를 했고, 잠시 후 찾아온 그 부인도 베드로에게서 똑같은 꾸중을 듣고 똑같이 급사했다는 얘기니까.
이렇게 논쟁적으로 폭력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그런지, 무례하리만치 무시로 인용된다. 최근에는 무슨 목사 임직식 예배의 1부 설교 본문으로도 나오는 것을 봤고, 심지어 가끔은 유치부 초등부 설교 시간에도 다뤄지곤 한다. 이야기의 '수위'를 생각하면 절대 전체이용가는 아닌데도 말이지. 참말 현대의 교회란 그저 "불순종"에 따르는 벌에 관해 호통을 칠 수만 있으면 뭐든 다 OK인 모양이다. 이 얘기는 좀 있다 더 하기로 하고...

아무튼 "수위 드립을 친" 김에 '콘텐츠'의 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연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기엔 좀 '억까'인 면이 있다.

대체 이 부부가 지은 죄가 뭣이기에 그들은 찰나의 회개 기회도 없이 각각 즉결 처형돼야 했던가? 재산의 '일부'만 가져와 헌납하고는 '이게 전부다'라고 말한 것이 그 죄의 내용이다. 현대 형법 기준으로 보면 죄형 균형의 원칙이 전혀 맞질 않거니와 당대 기준에도 좀 너무 무서운 얘기였을 것이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설교는 대체로 거짓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고 그걸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교역자 속일 생각 하지 마라, 헌금하고 헌신해라 하는 삼천포로 간다.

넘 모욕적이지 않나? 겨우 그런 사자소학 소리나 하라고 주님께서 이 대목을 성경으로까지 써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면.

사도행전 4장 후반에서 5장 전반까지가 다루는 것은, 순종이니 거짓말이니 하는 유아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아주 낯선, 새로운 규칙으로 사는 어떤 새로운 공동체다. 그 공동체는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걸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다.
능력에 따라 부를 창출하고 필요에 따라 부를 분배해서 경제적 평등을 실현해? 이것들 빨갱이냐? 당연히 빨갛겠지 다들 어린양 보혈로 씻고 나왔는걸. 그렇다. 이건 오늘날의 맑시즘에서도 "기독교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여전히 연구하고 시도하는, 지금의 교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급진적인,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공동체다. 그런데 심지어 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발 앞에 둔다"는 표현을 통해, 각자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후술하겠지만, 바로 이 점이 이 모임을 그 주변의 다른 흔한 모임과 결정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4장 후반부~5장 전반부는 누가 뭔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얘기가 반복 제시된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 하는 일반론, 그 다음에는 개중에도 특히 바나바는 어땠다 하는 특기(特記). 그런데 그 직후에 이어지는 진술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것이다. 그들도 뭘 발 앞에 두긴 뒀는데, 일부러, 앞의 둘과는 좀 다른 것을, 조금 열등하게 두었다고.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패턴으로 3개 사례를 대조하는 이 수사법이 무슨 요점을 빌드업하고 있는지 눈치챘는가? 화자는 그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는 그 공동체 규칙을 진정 따르지 않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데 그쳤음을 강조하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사도행전에서 꽤 자주 반복되는 '세속적 모방 실패' 미담의 범주에 포함되고, 읽어야 할 내용의 초점은 그 깊이가 달라진다.

세속적 모방 실패 일화란 무엇인가? 그냥 내가 만들어본 용어인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 얘기나 마술사 시몬 얘기가 여기에 속한다. 사도와 초기 교회의 놀라운 행실을 본 세속인들이, 그 가르침과 삶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 겉모양만 따라하여 그 긍정적 효과(즉 효험)만을 취하려다가 쪽박을 찼다는 일화들 말이지. 사도들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은 책이라 그런지 사도행전에는 이 모티브가 꽤 자주 등장한다. 앞서 살펴본 바, 내 생각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도, 그 수사법에 의해, 이런 목적으로 삽입된 이런 일화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부가 재산의 '일부만' 바친 이유는 설명이 된다. 뭔가 효험을 얻고 싶어서 뭔가를 겉으로 모방하는 연기를 하는데, 그런 일에 전 재산을 바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이 얻고 싶었던 그 효험이란 무엇이었고, 왜 이들은 그걸 원했다는 이유로 꼴까닥해야 했을까? 애초에 뭘 원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쯤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앞서 골치 썩은 신약학자들이 남긴 단서를 참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이 부부는 어쩌면 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피호제란 무엇인가? 창작자 후원 사이트 이름이기도 한 영단어 "패트리온", 오늘날 '고객'을 뜻하는 "클라이언트"가 연관된 개념인데, 요컨대 돈 있고 빽 있는 자("patronus")가 돈 없고 빽 없는 자("cliens")에게 찾아가서 "내가 네 생계와 신변을 책임져줄 테니 너는 내게 정치적 사회적 충성을 바쳐라" 제안을 하고, 이 제안에 쌍방이 합의하여, 상호 신의에 의해 서로의 이익을 꾀하는 사회 계약 방식이다.
마피아가 정확히 이렇게 운영된다고 하는데, 마피아가 아직 없던 고대 로마에서도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건국자 로물루스가 물려준 당연한 사회 권력 관계로 알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시대건 보통은 돈을 주는 쪽이 "갑"이다. 그건 아마 사도행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게다가 이 사건은 피호제가 당연하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이름만 보아도 비유대인이다. 자연히, 그 신약학자들의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여보 저기 예루살렘 어디에 웬 유태인들이 새로 집단 생활을 시작했다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돈을 주면서 산다는 모양이야.
그래? 예산 규모가 얼마라는데?
얼마얼마밖에 안 된대.
우리 재산의 반에도 못 미치네? 그거 갖고 어떻게 산대?
서로 필요에 맞게 나눠주다 보니 부족한 건 못 느끼고 사는가 보더라고.
그래? 그럼 우리가 가서 그 사람들을 좀 도와주고 보호자가 되면 어떨까? 우리 재산 좀만 줘도 거기서는 엄청 큰 패트리온이 될 거 아냐?
그러네! 그러면 그 피호자들은 우리한테 그만큼의 충성을 바쳐야만 되겠지?!

이 부부가 정말 이런 의도로 사도행전 5장에서 등장했던 거라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이 밝히고 있었던 것은,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요점이기도 하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누가 더 가난하다거나 꿇린다거나 "을"의 입장에 처해 있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건 모두가 모두의 보호자이자 피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그런 피호제의 인식 틀로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사회였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모두가 누군가의 피지배계급이거나 피호자일 뿐인 로마 제국에서, 이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겨지며 사람을 끌어모았던 데는, 이런 근본적 정신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던 시도가 저지된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뭐라고? 지금 이 부부가 우리의 벤처투자자가 되어 주겠다고? 안 되지. 그건 안 돼. 이 사람들 이거 우리 형제, 자매가 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파트로누스, 스폰서, '갑'이 되겠다는 거야. 아예 다른 이들처럼 재산권 자체를 포기하고 들어온다면 또 모를까, 자기 재산권은 계속 가지면서, 왜 그 중 일부를 가지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양 꾸며내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니면서? 이것들 지금 우리 공동체를 피호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 아니냐?

좀 엉뚱하게도 나는 여기서 문득, 경제 지원을 한사코 거절하는 북한을, 그리고 전두환의 차남을 생각한다.

일단 북한부터 설명하자면, 북한은 '그깟 돈 얼마 받는' 경제 지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제안에 모욕을 느낀다는 식으로 화를 내곤 한다.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한없이 귀엽고 가여운 발악처럼 보일 수 있겠으되, 북한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는, 북한은 그 지원을 "당신들은 우리의 비호와 후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는 조롱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얘기가 그렇다면 확실히 그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아무리 헐벗고 배고플지언정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하는 나라가 그들의 궁극의 지향일진대, 기껏 그 이상을 추구하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막상 돈을 받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 있어라"로 전향할 수는 없다. 체면이랄까 신념이랄까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잖은가.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은 왜 갑자기 생각나는가 하면, 얼마 전에 본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자기 아버지가 일하는 교회를 찾아간 장면 때문에 그렇다. 전두환 일가라고 하면 그보다 더 치사하고 사악할 수 없게 자기 친인척 주변인을 보호하고 피호하는 더럽고 불의한 관계로 돈과 지위를 누리며 떵떵거리는 도당들인데, 그 피호제 체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으로 뛰쳐나와 고발을 이어나가는 것이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고, 그 애비라는 새끼는 웬 교회에서 교역자를 하고 있다. (이미 여기서부터 비위가 상한다.) 그래 전우용이 카메라를 대동해서 그 교회에 찾아가 여기 내 아버지가 있느냐, 그를 면회할 수 있겠느냐고 하니, 모자이크된 교인들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그러게 그 전도사님이 이번 주일에도 교회 오시긴 했는데 요새는 잘 못 보겠네 안 보는 게 좋지 않아?" 따위 사람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짖고 웃어넘기며 지나간다.
그렇다. 이 나라는 제 자식도 내다 버리는 전재용이라는 새끼가 전도사를 참칭할 수 있는 나라다. 모두가 전두환 일가를 기꺼이 '슈퍼 파트로누스'로 섬기며, 교회도 교단부터 일개 성도까지 한 줌 부끄러움 없이 그 피호를 마다않고 받아먹는 치들이다. 전우원은 전재용이 자기 전화를 받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교회에서 돌아선다. 교회가 참 한남 유충 실좆 같지. 이보다 더 심한 욕이 있다면 쓰고 싶다.

그런데 비단 교회뿐이겠는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늘날 현대 사회는 팍스 로마나의 그때와 똑같은 양상으로 크고 작은 제국식 계약과 "세상적인"(ㅋㅋ) (비)도덕이 판치는 곳이다. 멀리는 미국의 PAC 제도에 의한 금권 선거부터 가깝게는 헌금 많이 내는 장로와 출자 많이 하는 주주가 1인 1표 이상을 행사하는 각 기관까지 피호제가 구현되어 있는 면을 찾기가 전혀 수고스럽지 않다. 오죽하면 한국인들은 보호자-피호자 사이에 합의된 역할 이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보호자에 대해서 "갑질한다"는 욕설까지 개발해낸 상태다. 다만 로마 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안 되고 있는 게 있다면, 그런 피호제적 관계 이상의 도덕과 섭리로 운영되는 공동체의 성립이 그것이다. 초대 교회는 얼마 못 가 교황과 황제가 영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재용을 앉히고 전우용을 내쫓는 조직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아나니아를, 삽비라를 자꾸 우리 모임에 들이려고 하는가? 애초에 그들을 알아보고 경계하기는 하는가? 이 믿음을 가진 이들의 모임에, 그 "재정"과 그 "인맥"이, 그 "스폰서"가 그토록 간절히 필요한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던가? 천지 창조자 하나님의 백성 된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먹일 수 있었던 베드로의 교회의 후신이 우리 아닌가? 근데 왜 자꾸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배반적 고백을 거듭하는가? 왜 자꾸 하나님 이외의 누군가를 파트로누스로 모시려 하는가? 당신들이 그 갑님들을 모시면, 그들이 당신들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책임져줄 거라고 믿는가? 그딴 것도 믿음인가? 당신들이 이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 끔찍하게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인가? 오~ 교회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전두환과 전재용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 탐나더냐?

여기까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가지고 내가 늘어놓을 수 있는 풍월이다. 보다시피 졸라 길고 복잡하며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왜 목사님들은 그걸 못 하는가?

안 하는 거겠지. 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건 단지 "고대 근동 로마 제국 치하 피호제의 원리가 어쩌구"를 주일 대예배 때 설교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논리의 복잡함은 핑곗거리가 안 된다. '갑질'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충분히 풀 수 있으니까.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여기서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가 되길 원하는 척하면서 실은 교회 안에서 갑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추론 근거는 무엇이며... 그러나 우리는 그간 부끄럽게도 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에 참배를 했으며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구국 조찬기도회를 주도하였고... 이런 역사를 회개하면서 우리 교회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도... 운운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러면 교회 조직과 출석교인 간의 피호제마저도 재고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역자들, 교회라는 기관, 현대 기독교라는 제도는 출석교인 각각에게 "구원의 확신"이라는 '영적 신변'을 확보해 주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 등의 '영적 풍요'를 제공한다. 그 댓가로 출석교인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봉사 선교 건축찬조 등의 '비-영적 충성'을 공납한다. 그게 이들의 관계이고, 보다시피 이보다 더 피호제적일 수 없다. 상징적인 양상이 그런 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라 하겠다. "무조건 이명박 찍어" 소리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세습을 하건 횡령을 하건 믿음페이를 강요하건 논문을 조작하건 찍 소리 하나를 못 하고,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하는 목사는 열렬히 따르라고 내버려두는 진짜 충성도 뻔히 발생하고 있잖은가. 이렇게 상하 수직 주종 관계 명확한 피호제를 고대 로마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알고 보니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꼬락서니라고 들으면, 그들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뭐라고 비웃을까?

이런 관계에서 잘들 살던 중에, 자기에게 '신앙적 피호자'의 목줄이 채워진 줄도 모르고 있는 그 클리엔스들에게, 그 '신앙적 파트로누스'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자세히 풀어줄 이유나 의리가 있는가? 그 사건은 피호제가 얼마나 세상적인지, 사악한지, (최소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아님을 더할 나위 없이 뚜렷이 보여준 사건인데, 그걸 있는 그대로 그 클리엔스들에게 소개해 주면, 갑자기 그들이 자기 처지의 실제가 무엇인지 재고해 보고 말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면, 그래서 그들이 목줄을 풀고 "교회갱신공동체"로 거듭나고 진짜로 만인 제사장의 하나님 나라를 조그맣게나마 시작해 버리면, 파트로누스 입장에서는 좀 많이 곤란하지 않겠는가? 자연히 그들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가능한 최대로 납작하고 싱겁고 희멀겋게 유지해야 하는 말씀이 된다. 정 안 되면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같은 싸구려 토크라도 써서.

정리하고 끝내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순히 '교역자에게 거짓말하면',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면' 따위의 교훈만을 위해 전승된 사건이 아니다. (하물며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목사"에 대해 설명하라고 주신 말씀일 리는 더더욱 없다. 대체 뭐 하자는 코미디 연극인지?) 그 사건은 초대 교회가 세속의 다른 사회와는 어떤 면에서 근본부터 새롭고 은혜로웠는지, 그래서 당대의 무슨 통념에 정면 도전하는 급진적인 모임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사건이다. 오죽하면 그 실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겉모양만 취해 효험을 보려던 이들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고 말았겠느냐고.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 사건에 대해 이 정도 혹은 이 이상 말하는 "한국 교회 교역자"를 본 적이 없다. 교회가 꿀 먹은 벙어리일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입장에서는 야속함도 냉소도 다 지나고 그저 좌절 섞인 의분만이 모루를 맞으며 달구어진다. 왜 말을 안 해? 왜 내가 궁금해하거나 추정하거나 연구해 보았거나 확실히 이해하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아? 실천하라고, 지상에 실현하라고까지는 요구하고 싶지도 않아.  뭐 너네 보고 갑자기 전두환 욕하라고 할 생각도 없어. 왜 닥치고들 있는 거냐고. 왜 유치부에서나 필요할 수준의 설교를 초등부에서 또 하고 중등부에서 또 하고 고등부에서 또 하고 청년부에서 또 하고 대예배에서 또 하고 루디아회, 바울회에서 또 하고 장년부에서 또 하고 노년부에서 또 해?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우스워? 아나니아가 베드로 말 한 마디에 뒤지고 삽비라가 베드로 말 두 마디에 뒤진 게 그렇게 별볼일 없는 일이야? 아니지, 니들은 이 사건이, 이 말씀이 우스운 게 아니고 성도가 우스운 거구나? 그들을 자녀 삼으시고 그들에게 같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우습구나 그렇지? 말씀이 없어 주려 죽는다는 그 성도들이 하찮아 보이지? 그럴 거야 니들한테는 그들이 그저 주일 출석과 헌금을 바치는 피호자 머릿수일 뿐이잖아. 저들도 당신들의 영적 보호와 잠 오는 설교 아래 졸고 있기를 기꺼워하니까.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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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을 하는 예의가 아닌 거 같긴 한데 좀 우울한 얘기를 써볼까 한다. 근황이 다소 울적한 때문에.

  • 회사 일은 최근 반 년 정도를 거의 놀았다. 아니 그렇다고 정말 논 건 아니고, 휴가도 잘 안 써 가면서 꾸역꾸역 출근해 앉아 있다 오긴 했고 이런저런 일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개발팀 동료, 시니어, 팀장님 파트장님 CTO님의 공적이고 나는 "쉬운 일 주워먹기"만 하다가 끝나곤 했다. 당시에는 "내가 암만 이러자 저러자 해봐야 결국은 동료, 시니어, 팀장님 파트장님 CTO님들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되지 않나" 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그렇긴 했지만,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는 나 스스로도 "2년간 기반 없이 굴렀으면 됐지 이젠 나도 회사 좀 편하게 다니자" 하면서 일을 주워먹은 면도 있었던 거 같다.
  • 아무튼 정말 단 1인치도 성장하지 않은 나 자신을 목도하는 요즘인데 이게 김어진쇼도 비슷하다. 270회 넘게 에피소드를 발행할 그 긴 시간 동안 콘텐츠로서의 김어진은 단 1인치도 개선되지 않았구나 싶은 좌절감이 있다. 270가지 서로 다른 뭔가를 해나간 270주라고 생각했는데, 딱 1가지의 뭔가를 270가지의 포장으로 팔아치우기 급급하면서 무슨 개인 취미가 어쩌구 일상의 기록이 저쩌구 핑계만 는, 그런 시간이었나 하는 좌절감이 있다. 끝낼 때 끝내더라도 6주년은 채우고 끝낼 건데 솔직히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 성장이랄지 변화랄지 하는 건 좀 하고 싶은데 어케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의 즐거움은 웬 중국제 휴대용 게임기를 하나 사서, 어릴 적에 정말 하고 싶었던 게임들(만)을 채워넣고 틈날 때마다 하는 건데, 내가 정말 정말 정말 게임을 못한다는 사실만 재삼 절감하며 좌절하고 있다. 돈이라면 있다(실제로도 있고, 까짓거 에뮬레이터의 Start 버튼만 누르면 크레딧은 들어가니까). 시간도 의지도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정말이지 나 스스로 알겠을 정도로 "게임 운영"을 너무너무 못한다. 아직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익혔어야 하는 감각을, 이제 와서, 혼자, 어릴 적의 한을 푸는 차원으로 배워 보려고 하니 이게 되겠는가. 난 심지어 2048도 못한다. "512"를 못 보고 6000점대에서 죽기가 일쑤다. 남들은 다 떼고 워들 같은 거나 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지하철에서 휴대용 게임기로 2048 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지고 또 지고 또 지는 35살 남자 어떻게 생각해요?
  • 게임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대체로 이렇게 울적한 심정으로 살고 있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필요가 있는 와중에 그놈의 스트레스 해소라는 건 또 당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요즘은 재밌는 콘텐츠를 즐기거나 맛집을 다니는 것도 약발이 잘 들지 않는데, 왜냐고 하면 그냥 기분 때문이다. 내가 먹고 싶어하는 그 모든 것들은 분명 설탕과 지방을 뒤집어쓰고 있을 테고, 아이패드에 깔려 있는 모든 앱과 그 안의 모든 콘텐츠는 분명 내 뇌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줄 터이다. 그 부분이, 그렇게 자동적인 쾌감과 보상이 보장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께름칙하다. 이게 이렇게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게 아니어야 할 텐데, 하는 기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고? 나도 그렇다. 최근 군것질을 줄인 이유는 당뇨 위험부터 다이어트까지 여러 가지 있지만 최근에는 '나 자신에게 너무 자주 보상을 주지 말자'라는 부분이 추가가 되었을 정도다. 뭐랄까, 이걸 이토록 간단하게 해소해 버리는 건 너무 허무하달지 셈이 안 맞는 것 같다는 찜찜함을 느끼며 결국 대체로는 그저 눌러담아 참고 있다.

울적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렇게 울적한지 모르겠다. 사실 마음의 습기는 항상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울화도 항상 일정량은 마음에 차 있는 편인데(그래서 한숨을 쉬는 버릇이 있다 항상 어느 정도는 갑갑하거든.) 그게 왜 요새 들어 유난히 감각되는 건지 그걸 모르겠다. 몸이 흔들리며 마음까지 흔들리다가 이제 몸이 차분하게 안정되니까 마음의 흔들림이 뚜렷이 보이는 뭐 그런 원리일까. 이 이상은 심리학적으로 틀린 소리가 될 테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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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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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가 좀 덜 내리게 되었으므로 그제야 그들은 거길 가볼 생각이 났다. 간밤에 그들이 사람을 죽인 곳을. 숫자로 말하자면 일가족 총 세 명을, 행정적으로 말하자면 관악구 어딘가의 반지하에 세들어 사는 세 명을,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모 노동조합 지부장 모씨와 그의 언니인 발달장애인 모씨 그리고 그의 10대 딸 모씨'를 죽인 그곳을.

이동 중 그들이 보인 굳게 닫힌 입과 별다른 표정이 없는 그 얼굴은 언뜻 보면 최소한의 염치를 가진 일반인, 혹은 그 죽음에 대해 송구함을 표해야 할 입장인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근엄하게 생각했던 것이란 실은, 근데 관악구가 어디쯤이었지, 아 모르겠네 안 간지가 오래 돼서, 따위의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렇게나 태평했다. 아니지. 어떤 종류의 살인은, 제 몸과 제 정신을 완전한 거짓으로 둘러입고 사는 자만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고쳐 말하건대, 그들은 그렇게 내내 태평할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오와 윤은 거의 동시에 그 자리에 도착했다. 둘 다 같은 검은색 신사용 대형 우산을 직접 들고, 노란색 윗옷을 입고 현장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 자리에 가까워올수록, 안 그래도 축축한 골목에 비가 다 마르지 않아 더욱 질척거리는 듯한 땅과 공기,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현장을 보존하고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는 일선 경찰과 공무원들, 그 모든 갑자기 낯설어진 주변을 걱정스럽게 구경 나온 주변 주민들, 그들이 뿜어내는 인열 등등에 대해서, 윤도 오도 거의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반사적으로, 그 어떤 악의도 없이, 받은 메스꺼움을 그대로 뱉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들의 평소 습관대로.

서성이던 윤과 오는, 그 주변에서 상황을 설명하던 공무원에게 다가가서 가만히 경청하는 것으로, 그 심리적 알리바이 형성 작업에 착수했다. 그 설명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른 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실 바로 그것, 모르는 체하기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었다. 그들이 그간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그 나이가 되도록 이렇달 굴곡 없이 출세가도를 타고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기득권층으로 편입한 덕분이다. 계획적인 살인범은 공모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들은 다른 살인범들이 꼬드겨 세운 공모자였고, 이제 그들 자신도 경력 살인범이 될 참이었다. 차라리 그 자리는 자격 시험에 가까웠다.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게 모르는 체를 해야 했다.

오는 그래도 비슷한 걸 몇 번 해 본 입장이었지만, 윤은 이런 종류의 시험이 처음이었던지라, 아무래도 그렇게 속단했던 거 같다. 이거 너무 쉬운 거 같은데. 그냥 적당히 걱정해 주는 말이나 해 주고 혀나 좀 차 주고 명복이나 빌고 가면 되겠구만. 속단한 것은 속결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윤이었으므로 그는 그 주변에 나와 있던 다른 주민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넌지시 혼잣말처럼 말을 걸어 물었다. 근데 여기 어떻게, 여기 계신 분들은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미리 대피한다는 게 가능한 줄 아느냐,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순식간에 모든 게 급변한다, 순식간에 땅이 꺼지면서 삽시간에 물이 불어나는 걸 모르느냐"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윤은 전혀 듣지 않았다. 자기가 말했고 상대방이 반응했다. 그러면 대화는 성립한 것 아닌가.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오는 그걸 옆에서 바라보며 내심 걱정했다. 이러다가 우리가 범인인 걸 들키는 건 아닐까 하고.

윤은 내친김에 사건과 관련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다른 말도 더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피하고 싶어도 수압 때문에 문이 안 열리게 되기 때문에 못 나간다" 하는 누군가의 고성이 끝나가고 있었어서, 그걸 요령 좋은 반말로 뚝 부러뜨리고, 거기에 제 말을 찔러넣었다. 아 문이 안 열려서? 아니, 어제 엄청났던 것이, 서초동에 우리 제가 사는 그 아파트가, 전체적으로는 좀 언덕에 있는 아파트인데도, 거기가 1층이 지금 물이 들어와가지고 침수될 정도니. 제가 퇴근하면서 보니까 벌써 다른 아파트들도 아래쪽에 있는 아파트들은 벌써 침수가 시작이 되더라고. 그러니 뭐. 제가 있는 아파트가 약간 언덕에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 정도니. 그건 분명, 제깐에는 최선을 다해서, 보아하니 참 힘들어 보이던데 당신들도 참 힘들었을 거 같고 여기 사셨던 분도 참 힘드셨을 거 같다, 하는 소리를 한다고 한 셈이었다. 무식해 보이리만치 무모했을지언정 틀리지는 않은 연기였다. 어떤 비전문가가, 살인범이, 자기가 죽인 사람을, '힘들었겠다'고 공감해 줄 거라고 믿겠는가.

오는 이쯤이면 됐으니 적당히 다시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적당한 곳에 숨어서 뉴스를 지켜보며 자기가 다시 나서도 되는 시점을 골라야 했으니까. 하지만 윤은, 자기의 범행 현장에 처음 와 본 살인자답게, 현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시 가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느샌가 그의 발걸음은 그 반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말렸다. "여기는 아직도 여전히 사비로 양수기 써서 물을 퍼올리고 있다. 지하에 6가구가 살고 있다. 당신을 들여보내도 좋은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층계참을 좀 지난 애매한 위치에 엉거주춤 주저앉아서는, 뭐라도 한 마디 할 생각으로 그 계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보통 사람은, 아니 그 자리에서 그 사건의 범인이 아닌 이상에는 누구도 결코 느껴볼 일이 없는 대단히 특별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 그런가. 이게 여기가 이렇게 됐단 말이지. 그렇군. 여기가 지금 저 사람들 눈에는 이렇게 보이는군. 그런 거군. 그러면서, 그는 별 말 없이 그 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 이상 현장에 다가갈 수는 없다는 공무원의 제지를 받으며 윤은 끌려나오다시피 그 계단을 벗어나 건물 밖으로 인도되었다. 사실 이제 용건은 더 없었지만, 아직 그들은 정말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윤의 입장에서는, 그 세 사람이 실제로 죽어가던 그곳의 정취를 아직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그 반지하방 안을 볼 방법이 있는지 찾고 싶었다. 아마 윤이 '창문으로 탈출 못하나?' 같은 멍청해 보이는 질문을 해서 유도를 받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오와 윤은 그 창문 앞으로까지 안내를 받았다. 그들의 얼굴이 그 창문 앞에 다다랐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어둠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들여다보여지는 저편 방향에서는 역광에 비친 그들의 몸뚱아리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고, 그 속에서마저 그들의 퍼런 안광이 번뜩였을 것이다.

둘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당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안을 바라보기 바빴다. 겉으로야 티가 안 났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은밀한 흥분을 감추며 그들이 살인을 자행한 곳의 진짜 광경을, 그것도 낮밤을 바꾼 시간대에, 어떤 고소, 고발, 탄핵소추, 주민소환, 용의선상 조사 취조도 받지 않는 자유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순간 정도에만 진실로 감각하고 경탄할 수 있었다. 자기가 안전하고 정당하며 우월하고 결백한 존재라는 것을. 자기는 저 자리에서 죽어나간 사람도 아니고, 저런 어둡고 지저분하고 쿰쿰한 곳과 관계 있는 사람도 아니고, 저곳에서 죽을 만한 사람을 죽여 줬을 뿐이라는 것을.

한동안 그런 비정상적인 감각에 도취돼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신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앉아 그 안을 들여다보느라 다리가 저려 와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 현장을 뜨자는 뜻에서, 서로 간단한 눈빛만 주고받은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 창문 앞에서 시바이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건 남 일이라는 듯이,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잘은 모르겠지만 참 안됐고 그러니 이건 절대로 내가 죽인 건 아니라는 듯이.

야 이거 참, 왜 대피를 못 했을까. 그러니까요. 왜 대피를 못 했을까요. 햐 참 진짜 이거 반지하가 문제야. 여기는 지대가 낮으니까 이게 다 직격탄 맞잖아. 서울시가 반지하가 너무 많아요. 이거 다 이제 금지시키든가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우리는 저기 그런 거 없나? 강수량 측정해서 국민들 알려주는 앱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좀 만들라고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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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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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교회들이 오늘을 어린이주일로 섬기는 모양이다. 우리 교회는 공예배에서는 쇠지 않고 어린이부만 어린이주일로 쇤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웃기는데, 광고 시간에 그런 소리가 나온다. 아 지금 전 교단이 문제에요. 저출산이다 코로나다 하면서 전국적으로 어린이부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어린이부를 "부흥"시키고 싶은가? 교회 외벽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커다랗게 예스키즈존 이라고 써붙여 보시오. 다음 주부터 교회가 미어터질 것이다.

아니 진짜로 해보라고. 모든 물건이 어린이 손에 닿을 때까지 높이를 낮추고, 뾰족한 것 딱딱한 것 무거운 것 뜨거운 것 다 치우고, 마이크 볼륨을 좀 줄이고, 대예배당에 어린이들이 어디든 앉게 해 주고, 우는 애 내쫓지 말고, 모자실을 폐쇄하고 대예배당을 모자실로 써라. 그리고 여기 앉은 어느 어른에게 어떤 장난을 쳐도 절대 화내지 않겠다고 잼민이들에게 약속해 보시라. 장담하건대 그날부로 그 교회는 기적의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단지 어린이가 주께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않을 뿐인데도.

현실은, 한국 교회야말로 한국 경제문화사상 가장 유구하고 능숙한 노키즈존이다. "모자실"이란 소싯적이나 지금이나 참말 부끄러운 것이다. 애와 애엄마를 방음 잘 되는 한쪽 구석에 처박아놓고 테레비 하나 연결해서 대머리 목사의 근엄한 말씀을 중계하는 것은, 그 안에서 애가 울건 말건 그저 나 하나만 대예배당에 근엄하게 앉아 설교나 들으면 그만이라는 대머리 장로들의 탐욕 덕분 아니었던가? 그 탐욕을 생각하다 보면, 무슨 식당 무슨 카페 주인이 어쨌다더라 하는 심술은 하찮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리 중에 누가 크니이까? 라고 다 큰 어른들이 물어보는 꼴 역시 예수님 눈에는 세상 하찮게 느껴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사상 최초의 예스키즈존을 설치하며 꾸짖으신다. 니들이 크긴 뭐가 커 얘네들이 크면 컸지 그러니까 허튼소리들 말어. 그로부터 이천 년쯤이 지났고 우리는 노키즈존 매장 출근 전 1부 예배를 드리며 애와 애엄마를 모자실에 처박아두는 어른들이 됐다. 뭐라고? 어린이부가 줄었다고? 그야 그럴 테지 니들이 줄였잖아. 교회가 노키즈존인데 어린이부가 어떻게 부흥해.

진짜 이제 이런 소리는 페북에 그만 쓰고 기독교인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에나 가서 해야겠다 그런 게 없어서 문제지만.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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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엄청나게 간단한 얘기다. 개발자는 특수한 직군이지만 특권을 가진 직군은 아니다. 그나마도 내 생각엔 개발자가 특수한 직군인 것도 지금 한때나 그러고 말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개발자건 다른 어떤 직군이건 어떤 직군이 타 근로자와 일반 공동체로부터 '이해 불가한 영역으로 남을 권리'를 자동으로 획득하지는 않는다. 그런 시도는 무력화돼야 하며 그런 욕망은 제압되어야 한다. 수단이 목적을, 사익이 공익을, 엘리트가 일반 대중을 압도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이렇게 서본결이 완벽한 간단한 아젠다가 어째서 거듭 되풀이 성토되고 있는지 그게 오히려 희한하다.

-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을 권리', 바로 이것이 쿨타임만 차면 돌아오는 바 '일부 짜증나는 개발자들에 대한 짜증'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시점의 현업 개발자들은 (또는 블로그와 유튜브로 코딩하는 "개발자"들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자신들이 '개발자'로 라벨링되는 과정을 즐기고 있거나 최소한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있다. 사실 뭐 그건 개발자뿐 아니라 의사, 변호사, 교수 등등 전문 지식으로 먹고 사는 직군 종사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사회 자본에 대한 욕망의 발로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 개발 직군이 전문 직종들 중에서도 유난히 이런 차원에서 튀는 것은 두 가지 요인이 더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업계의 미성숙이다. 다른 글에서 한 번 슬쩍 건드려본 적이 있긴 한데 개발이라는 분야는 현재 매우 초기 단계에 속하고 그래서 법령/표준 도입, 정량적 능력/성과 측정, 표준 근로 프로세스 등이 존재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기업/서비스/종사자도 명쾌하게 평가되지 않으며 어떤 성공/실패도 필연적이지 않다. 이러므로 실제로 이 분과는 현재 어느 정도는 실제로 이해 불가한 영역이며 제3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객관적 접근 시도가 (주로 당사자에 의해) 무산된다.

- 개발 직군이 다른 전문 직종들보다 유난히 더 스스로를 신비화/특권화하려고 하는 현재의 경향의 다른 추가적 요인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직군이 갖는 인구통계학적 편향이다. 절대 다수가 남자이고 상당수가 2030이며 이념 스펙트럼상으로는 대체로 가운데-오른쪽에 쏠려 있다. 하루 종일 코드만 쳐다보고 사는 그들의 사상은 결과적으로는 목적 지향적이며 단순한 계량적 공리주의로 쏠리고, 그들의 윤리는 (반사회적이진 않더라도) 비사회적으로, 상대적으로 매우 정밀하게 취사선택적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 게다가 사회가 "4차 산업 혁명 고액연봉 개발자 우대 전쟁" 운운하며 떠받들어 주니, 이 과정에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사회와 동떨어지는 엘리트주의적 동조 집단을 형성하고 만다.

- 이런 식으로 특정 전문직군의 특권계급화가 시도되려고 하는 시기에 공동체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그 생산 수단 및 생산물을 최대한 공공화하는 작업이다. 거시적으로는 (그 빌어먹을 놈의) "AI"를 사용하는 기업마다 회원 가입 약관 및 정례 보고서를 통해 그 기술의 작동 원리 및 작동 현황을 공개하도록 규제하자는 얘기까지도 해 볼 수 있겠지만, 미시적으로는 "저는 개발자라서", "근데 개발이라는 분야는"으로 시작하는 '야부리'를 금지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그런 '썰'을 수시로 제지시키고,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된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평가로만 그들을 다시 엄격하게 측정해 줌으로써, 자기의 중량을 과대 평가하려는 시도 일체를 저지해야 한다.

- 우리말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하는 말이 있다. 기백 년 전 조선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 운운하는 복잡한 전문 지식은 존재했고 그에 대한 당시 언중의 사태 파악도 진작에 끝났던 것 같다. 우리도 슬슬 상황 파악을 했으면 좋겠다. 오늘날 개발자들의 갖은 장광설과 자기 변호성 웅변들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면 '파이썬 놔라 슬랙 놔라' 하는 소리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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