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는 굉장히 유명한 성경 삽화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베드로의 꾸중을 듣고 급사를 했고, 잠시 후 찾아온 그 부인도 베드로에게서 똑같은 꾸중을 듣고 똑같이 급사했다는 얘기니까.
이렇게 논쟁적으로 폭력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그런지, 무례하리만치 무시로 인용된다. 최근에는 무슨 목사 임직식 예배의 1부 설교 본문으로도 나오는 것을 봤고, 심지어 가끔은 유치부 초등부 설교 시간에도 다뤄지곤 한다. 이야기의 '수위'를 생각하면 절대 전체이용가는 아닌데도 말이지. 참말 현대의 교회란 그저 "불순종"에 따르는 벌에 관해 호통을 칠 수만 있으면 뭐든 다 OK인 모양이다. 이 얘기는 좀 있다 더 하기로 하고...
아무튼 "수위 드립을 친" 김에 '콘텐츠'의 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연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기엔 좀 '억까'인 면이 있다.
대체 이 부부가 지은 죄가 뭣이기에 그들은 찰나의 회개 기회도 없이 각각 즉결 처형돼야 했던가? 재산의 '일부'만 가져와 헌납하고는 '이게 전부다'라고 말한 것이 그 죄의 내용이다. 현대 형법 기준으로 보면 죄형 균형의 원칙이 전혀 맞질 않거니와 당대 기준에도 좀 너무 무서운 얘기였을 것이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설교는 대체로 거짓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고 그걸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교역자 속일 생각 하지 마라, 헌금하고 헌신해라 하는 삼천포로 간다.
넘 모욕적이지 않나? 겨우 그런 사자소학 소리나 하라고 주님께서 이 대목을 성경으로까지 써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면.
—
사도행전 4장 후반에서 5장 전반까지가 다루는 것은, 순종이니 거짓말이니 하는 유아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아주 낯선, 새로운 규칙으로 사는 어떤 새로운 공동체다. 그 공동체는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걸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다.
능력에 따라 부를 창출하고 필요에 따라 부를 분배해서 경제적 평등을 실현해? 이것들 빨갱이냐? 당연히 빨갛겠지 다들 어린양 보혈로 씻고 나왔는걸. 그렇다. 이건 오늘날의 맑시즘에서도 "기독교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여전히 연구하고 시도하는, 지금의 교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급진적인,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공동체다. 그런데 심지어 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발 앞에 둔다"는 표현을 통해, 각자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후술하겠지만, 바로 이 점이 이 모임을 그 주변의 다른 흔한 모임과 결정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4장 후반부~5장 전반부는 누가 뭔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얘기가 반복 제시된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 하는 일반론, 그 다음에는 개중에도 특히 바나바는 어땠다 하는 특기(特記). 그런데 그 직후에 이어지는 진술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것이다. 그들도 뭘 발 앞에 두긴 뒀는데, 일부러, 앞의 둘과는 좀 다른 것을, 조금 열등하게 두었다고.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패턴으로 3개 사례를 대조하는 이 수사법이 무슨 요점을 빌드업하고 있는지 눈치챘는가? 화자는 그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는 그 공동체 규칙을 진정 따르지 않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데 그쳤음을 강조하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사도행전에서 꽤 자주 반복되는 '세속적 모방 실패' 미담의 범주에 포함되고, 읽어야 할 내용의 초점은 그 깊이가 달라진다.
세속적 모방 실패 일화란 무엇인가? 그냥 내가 만들어본 용어인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 얘기나 마술사 시몬 얘기가 여기에 속한다. 사도와 초기 교회의 놀라운 행실을 본 세속인들이, 그 가르침과 삶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 겉모양만 따라하여 그 긍정적 효과(즉 효험)만을 취하려다가 쪽박을 찼다는 일화들 말이지. 사도들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은 책이라 그런지 사도행전에는 이 모티브가 꽤 자주 등장한다. 앞서 살펴본 바, 내 생각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도, 그 수사법에 의해, 이런 목적으로 삽입된 이런 일화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부가 재산의 '일부만' 바친 이유는 설명이 된다. 뭔가 효험을 얻고 싶어서 뭔가를 겉으로 모방하는 연기를 하는데, 그런 일에 전 재산을 바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이 얻고 싶었던 그 효험이란 무엇이었고, 왜 이들은 그걸 원했다는 이유로 꼴까닥해야 했을까? 애초에 뭘 원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쯤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앞서 골치 썩은 신약학자들이 남긴 단서를 참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이 부부는 어쩌면 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피호제란 무엇인가? 창작자 후원 사이트 이름이기도 한 영단어 "패트리온", 오늘날 '고객'을 뜻하는 "클라이언트"가 연관된 개념인데, 요컨대 돈 있고 빽 있는 자("patronus")가 돈 없고 빽 없는 자("cliens")에게 찾아가서 "내가 네 생계와 신변을 책임져줄 테니 너는 내게 정치적 사회적 충성을 바쳐라" 제안을 하고, 이 제안에 쌍방이 합의하여, 상호 신의에 의해 서로의 이익을 꾀하는 사회 계약 방식이다.
마피아가 정확히 이렇게 운영된다고 하는데, 마피아가 아직 없던 고대 로마에서도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건국자 로물루스가 물려준 당연한 사회 권력 관계로 알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시대건 보통은 돈을 주는 쪽이 "갑"이다. 그건 아마 사도행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게다가 이 사건은 피호제가 당연하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이름만 보아도 비유대인이다. 자연히, 그 신약학자들의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여보 저기 예루살렘 어디에 웬 유태인들이 새로 집단 생활을 시작했다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돈을 주면서 산다는 모양이야.
그래? 예산 규모가 얼마라는데?
얼마얼마밖에 안 된대.
우리 재산의 반에도 못 미치네? 그거 갖고 어떻게 산대?
서로 필요에 맞게 나눠주다 보니 부족한 건 못 느끼고 사는가 보더라고.
그래? 그럼 우리가 가서 그 사람들을 좀 도와주고 보호자가 되면 어떨까? 우리 재산 좀만 줘도 거기서는 엄청 큰 패트리온이 될 거 아냐?
그러네! 그러면 그 피호자들은 우리한테 그만큼의 충성을 바쳐야만 되겠지?!
이 부부가 정말 이런 의도로 사도행전 5장에서 등장했던 거라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이 밝히고 있었던 것은,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요점이기도 하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누가 더 가난하다거나 꿇린다거나 "을"의 입장에 처해 있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건 모두가 모두의 보호자이자 피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그런 피호제의 인식 틀로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사회였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모두가 누군가의 피지배계급이거나 피호자일 뿐인 로마 제국에서, 이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겨지며 사람을 끌어모았던 데는, 이런 근본적 정신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던 시도가 저지된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뭐라고? 지금 이 부부가 우리의 벤처투자자가 되어 주겠다고? 안 되지. 그건 안 돼. 이 사람들 이거 우리 형제, 자매가 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파트로누스, 스폰서, '갑'이 되겠다는 거야. 아예 다른 이들처럼 재산권 자체를 포기하고 들어온다면 또 모를까, 자기 재산권은 계속 가지면서, 왜 그 중 일부를 가지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양 꾸며내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니면서? 이것들 지금 우리 공동체를 피호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 아니냐?
—
좀 엉뚱하게도 나는 여기서 문득, 경제 지원을 한사코 거절하는 북한을, 그리고 전두환의 차남을 생각한다.
일단 북한부터 설명하자면, 북한은 '그깟 돈 얼마 받는' 경제 지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제안에 모욕을 느낀다는 식으로 화를 내곤 한다.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한없이 귀엽고 가여운 발악처럼 보일 수 있겠으되, 북한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는, 북한은 그 지원을 "당신들은 우리의 비호와 후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는 조롱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얘기가 그렇다면 확실히 그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아무리 헐벗고 배고플지언정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하는 나라가 그들의 궁극의 지향일진대, 기껏 그 이상을 추구하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막상 돈을 받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 있어라"로 전향할 수는 없다. 체면이랄까 신념이랄까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잖은가.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은 왜 갑자기 생각나는가 하면, 얼마 전에 본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자기 아버지가 일하는 교회를 찾아간 장면 때문에 그렇다. 전두환 일가라고 하면 그보다 더 치사하고 사악할 수 없게 자기 친인척 주변인을 보호하고 피호하는 더럽고 불의한 관계로 돈과 지위를 누리며 떵떵거리는 도당들인데, 그 피호제 체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으로 뛰쳐나와 고발을 이어나가는 것이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고, 그 애비라는 새끼는 웬 교회에서 교역자를 하고 있다. (이미 여기서부터 비위가 상한다.) 그래 전우용이 카메라를 대동해서 그 교회에 찾아가 여기 내 아버지가 있느냐, 그를 면회할 수 있겠느냐고 하니, 모자이크된 교인들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그러게 그 전도사님이 이번 주일에도 교회 오시긴 했는데 요새는 잘 못 보겠네 안 보는 게 좋지 않아?" 따위 사람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짖고 웃어넘기며 지나간다.
그렇다. 이 나라는 제 자식도 내다 버리는 전재용이라는 새끼가 전도사를 참칭할 수 있는 나라다. 모두가 전두환 일가를 기꺼이 '슈퍼 파트로누스'로 섬기며, 교회도 교단부터 일개 성도까지 한 줌 부끄러움 없이 그 피호를 마다않고 받아먹는 치들이다. 전우원은 전재용이 자기 전화를 받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교회에서 돌아선다. 교회가 참 한남 유충 실좆 같지. 이보다 더 심한 욕이 있다면 쓰고 싶다.
그런데 비단 교회뿐이겠는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늘날 현대 사회는 팍스 로마나의 그때와 똑같은 양상으로 크고 작은 제국식 계약과 "세상적인"(ㅋㅋ) (비)도덕이 판치는 곳이다. 멀리는 미국의 PAC 제도에 의한 금권 선거부터 가깝게는 헌금 많이 내는 장로와 출자 많이 하는 주주가 1인 1표 이상을 행사하는 각 기관까지 피호제가 구현되어 있는 면을 찾기가 전혀 수고스럽지 않다. 오죽하면 한국인들은 보호자-피호자 사이에 합의된 역할 이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보호자에 대해서 "갑질한다"는 욕설까지 개발해낸 상태다. 다만 로마 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안 되고 있는 게 있다면, 그런 피호제적 관계 이상의 도덕과 섭리로 운영되는 공동체의 성립이 그것이다. 초대 교회는 얼마 못 가 교황과 황제가 영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재용을 앉히고 전우용을 내쫓는 조직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아나니아를, 삽비라를 자꾸 우리 모임에 들이려고 하는가? 애초에 그들을 알아보고 경계하기는 하는가? 이 믿음을 가진 이들의 모임에, 그 "재정"과 그 "인맥"이, 그 "스폰서"가 그토록 간절히 필요한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던가? 천지 창조자 하나님의 백성 된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먹일 수 있었던 베드로의 교회의 후신이 우리 아닌가? 근데 왜 자꾸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배반적 고백을 거듭하는가? 왜 자꾸 하나님 이외의 누군가를 파트로누스로 모시려 하는가? 당신들이 그 갑님들을 모시면, 그들이 당신들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책임져줄 거라고 믿는가? 그딴 것도 믿음인가? 당신들이 이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 끔찍하게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인가? 오~ 교회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전두환과 전재용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 탐나더냐?
여기까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가지고 내가 늘어놓을 수 있는 풍월이다. 보다시피 졸라 길고 복잡하며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왜 목사님들은 그걸 못 하는가?
안 하는 거겠지. 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건 단지 "고대 근동 로마 제국 치하 피호제의 원리가 어쩌구"를 주일 대예배 때 설교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논리의 복잡함은 핑곗거리가 안 된다. '갑질'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충분히 풀 수 있으니까.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여기서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가 되길 원하는 척하면서 실은 교회 안에서 갑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추론 근거는 무엇이며... 그러나 우리는 그간 부끄럽게도 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에 참배를 했으며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구국 조찬기도회를 주도하였고... 이런 역사를 회개하면서 우리 교회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도... 운운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러면 교회 조직과 출석교인 간의 피호제마저도 재고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역자들, 교회라는 기관, 현대 기독교라는 제도는 출석교인 각각에게 "구원의 확신"이라는 '영적 신변'을 확보해 주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 등의 '영적 풍요'를 제공한다. 그 댓가로 출석교인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봉사 선교 건축찬조 등의 '비-영적 충성'을 공납한다. 그게 이들의 관계이고, 보다시피 이보다 더 피호제적일 수 없다. 상징적인 양상이 그런 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라 하겠다. "무조건 이명박 찍어" 소리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세습을 하건 횡령을 하건 믿음페이를 강요하건 논문을 조작하건 찍 소리 하나를 못 하고,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하는 목사는 열렬히 따르라고 내버려두는 진짜 충성도 뻔히 발생하고 있잖은가. 이렇게 상하 수직 주종 관계 명확한 피호제를 고대 로마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알고 보니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꼬락서니라고 들으면, 그들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뭐라고 비웃을까?
이런 관계에서 잘들 살던 중에, 자기에게 '신앙적 피호자'의 목줄이 채워진 줄도 모르고 있는 그 클리엔스들에게, 그 '신앙적 파트로누스'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자세히 풀어줄 이유나 의리가 있는가? 그 사건은 피호제가 얼마나 세상적인지, 사악한지, (최소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아님을 더할 나위 없이 뚜렷이 보여준 사건인데, 그걸 있는 그대로 그 클리엔스들에게 소개해 주면, 갑자기 그들이 자기 처지의 실제가 무엇인지 재고해 보고 말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면, 그래서 그들이 목줄을 풀고 "교회갱신공동체"로 거듭나고 진짜로 만인 제사장의 하나님 나라를 조그맣게나마 시작해 버리면, 파트로누스 입장에서는 좀 많이 곤란하지 않겠는가? 자연히 그들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가능한 최대로 납작하고 싱겁고 희멀겋게 유지해야 하는 말씀이 된다. 정 안 되면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같은 싸구려 토크라도 써서.
—
정리하고 끝내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순히 '교역자에게 거짓말하면',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면' 따위의 교훈만을 위해 전승된 사건이 아니다. (하물며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목사"에 대해 설명하라고 주신 말씀일 리는 더더욱 없다. 대체 뭐 하자는 코미디 연극인지?) 그 사건은 초대 교회가 세속의 다른 사회와는 어떤 면에서 근본부터 새롭고 은혜로웠는지, 그래서 당대의 무슨 통념에 정면 도전하는 급진적인 모임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사건이다. 오죽하면 그 실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겉모양만 취해 효험을 보려던 이들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고 말았겠느냐고.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 사건에 대해 이 정도 혹은 이 이상 말하는 "한국 교회 교역자"를 본 적이 없다. 교회가 꿀 먹은 벙어리일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입장에서는 야속함도 냉소도 다 지나고 그저 좌절 섞인 의분만이 모루를 맞으며 달구어진다. 왜 말을 안 해? 왜 내가 궁금해하거나 추정하거나 연구해 보았거나 확실히 이해하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아? 실천하라고, 지상에 실현하라고까지는 요구하고 싶지도 않아. 뭐 너네 보고 갑자기 전두환 욕하라고 할 생각도 없어. 왜 닥치고들 있는 거냐고. 왜 유치부에서나 필요할 수준의 설교를 초등부에서 또 하고 중등부에서 또 하고 고등부에서 또 하고 청년부에서 또 하고 대예배에서 또 하고 루디아회, 바울회에서 또 하고 장년부에서 또 하고 노년부에서 또 해?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우스워? 아나니아가 베드로 말 한 마디에 뒤지고 삽비라가 베드로 말 두 마디에 뒤진 게 그렇게 별볼일 없는 일이야? 아니지, 니들은 이 사건이, 이 말씀이 우스운 게 아니고 성도가 우스운 거구나? 그들을 자녀 삼으시고 그들에게 같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우습구나 그렇지? 말씀이 없어 주려 죽는다는 그 성도들이 하찮아 보이지? 그럴 거야 니들한테는 그들이 그저 주일 출석과 헌금을 바치는 피호자 머릿수일 뿐이잖아. 저들도 당신들의 영적 보호와 잠 오는 설교 아래 졸고 있기를 기꺼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