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수행하는 사람들 말로는 화두쯤 될까. 그런 것이 몇 개 있다.
-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정해져 있는 노력은, 무엇으로 정당화 혹은 계속될 수 있는가?
- 정말 참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 혹 종교는 필요한가?
- 현대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은 윤가 수업을 들으면서, 2는 자연인간을 들으면서, 3은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질문.
1은 아직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겠다. 까뮈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2는 한번 생각해 봤다. 사실은 일본 선교에 대해 생각하다가 부닥친 질문인데, 그들에게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구원이 필요하다. 요컨대, 그들의 행복은 그들만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데, 그 매개는 바로 좋은 소식의 전달이라는 것이다. 내가 봐도 어딘가 부족하다.
3에 대해서는 대답하겠다. 현대 기독교는 종교보다 거룩한 신앙으로서 이 세상에서 서 있을 필요가 있다. 요즘 종교계는 개판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단다.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아니지 싶을 텐데 결국 탈근대 초현대의 유행이 사람의 믿음과 십자가까지도 쥐락펴락한다.
종교는 모든 가르침 위에 신자가 앉아 있다. 종교통합이니 진리가 다르지 않다느니 대단하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오만하다. 자기 성찰과 평범한 도덕,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보편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구원과 모든 완성이 완벽히 가능하다고 하니까. 한마디로 "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너 알고 있는 대로 설명하고 다니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럴 리 없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이건 단순한 신념이고, 아니, 그냥 착하게 사는 방법의 온갖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마저 이런 식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적당주의에 기울어서는 안 되겠다.
머릿속으로 성직자를 상상해 보라. 빨리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과연 민중과 함께한다면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있는 혹은 대열의 앞에서 투쟁하는 모습으로 곧장 떠오르는가? 그럴 리 없다. 필시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의 기도 혹은 말없는 봉사를 하고 있었거나, 사람들에게 어질게 웃으며 사려 깊은 한 마디를 해 주고 있을 것이다. 현대의 종교계는 전자를 강력히 요구한다. 대다수의 흐름에 따라오지 않으면 왕따를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약속된 그리스도인들만은 세상이 부른다고 졸래졸래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해야 할 일엔 아니오 해야 한다. 그밖의 모든 것이 타협과 불순종과 오만과 음란함에서 나온다.
그러면 여전히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느 종교에서나 대체로 하지 않나? 내 말이 그 말이다. 그게 바로 종교와 신앙의 차이다. 종교에서는 모두 거의 같은 말을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종교란 순전히 인간적으로 봤을 때 옳은 가르침들의 집합이므로. 그러나 신앙의 지경, 신념의 위에 있으며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조건마저 포기되는 자리, 으로 올라가면 도저히 이 신앙과 저 신앙이 같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보다는, 아무도 도저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렇다고 믿는 믿음이 더 대단한 것이다. 당신은 죄로 죽었는가? 예수께서 당신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나셨는가? 그러므로 그분을 구주로 믿음으로 당신도 다시 나는가?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할 때 이것은 한갓 종교인들에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진리가 된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가 가져야 할 입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길길이 우기는 것이다.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믿고,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조차 납득한다. 그리고 더욱 위대해진다. 기독교야말로 이것이 가장 확실하게 가능한 신앙이다. 이 확고부동한 구분 전략(?)을 포기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시는 것이 된다.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몽학 선생으로 말미암고 말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