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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8:1-8(RNKSV)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1.
최근 가장 마음에 드는(?)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는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다.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로서는 드물게, "이 삽화의 의도/의미/목적은 이러하다"라는 명토가 박혀 있다. 그것도 첫마디, 이야기를 운도 떼기 전부터 말이다. 아마도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일러두기'였을 게다. 경고! 여기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의미만을 가집니다. 그 이상의 뜻을 탐색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2.
이해는 된다. 이 우화의 주장은 (가뜩이나 급진적인) 예수님의 견해 가운데서도 독보적으로 위태롭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조르고 떼 쓰면 된단 얘기지 않은가? 이 메시지를 이렇게 그르게 읽고 틀리게 받아들여 버리면, 그건 고스란히 잘못된 태도와 실천과 문화와 조직을 낳을 것이다. 로마 제국 치하의 피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사태만큼은 막아야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교훈으로 공식 국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실은 어느 제국 치하에서든지 마찬가지다.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기로 하고...

3.
아무튼 그래서 여기서는, 정경의 정설/정론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이 메시지를 읽어볼까 한다. 내가 이 비유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4.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이야기가 딱히 "신앙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은혜를 받고 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신앙적이기는커녕 대단히 인간적인 '속세'의 이야기다. 과부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그 전체 서사 가운데 믿음, 기도, 선행 따위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재판관 한 명을 죽어라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시위하는 한 여자, 그리하여 마침내 그 덕분으로(만)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고독한 여자뿐이다. 초반의 머릿말이 아니었던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가 대단히 어렵다. 흡사 창세기/사사기적이기까지 한 이 세속적인 삽화에는 신앙적인 요소가 딱히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라는 언급이 있는데 그게 신앙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다. 과부가 재판관을 졸라대는 것을 보고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것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과부가 시위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시위해야 된다고? 그건 또 무슨 아닌 밤중의 잠꼬대인지 모르겠다. 됐고, 재판관의 혼잣말을 들어보자. 그가 이 사건을 외면하다가 마침내 접수하기로 맘먹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서인가? 과부가 그에게 기도를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18:5b).

6.
선행 연구 근거자료 없이 하는 소리지만, 이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그가 기독교적/유대교적 의미에서의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식의 문자적인 진술이 아니고, 그가 그만큼 부도덕하고 몰염치했다는 묘사를 위한 수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말하자면 '직업 윤리가 심각하게 결여된 법조인'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표현하신 거였겠지. 이 개념은 요즘의 우리에게도 어렵다. 하물며 1세기 무렵 고대 근동의 저학력 아람인과 헬라인에게는 어땠겠는가? 자연히, 우리말의 "땡중"에 해당하는 표현을 써야 했을 게다.

7.
요컨대 그는 직업 윤리가 부족한 판관이다. 하지만 무능하거나 멍청하지는 않다. 실은 오히려 반대다. 그는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이고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다. 나로서는 특히 이 부분이 흥미롭다. 상상해 보시라. 몇 날이고 며칠이고 질리지도 않고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과부를 겨우 외면하여 집에 돌아온 그 재판관이, 왠지 그날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 방에 앉아, 직업적으로 훈련받은 생각을 시작하는 거다.
'지금까지 이 과부 때문에 내가 얻은 득과 실은? 앞으로도 이 과부가 나를 괴롭힐 확률은? 난 이런 원고의 탄원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놈이지만, 혹시 만약에 내가 이 탄원을 접수해 주면 그때 내가 얻는 득과 실은?'
그리고 그는 이 판단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자기 상황을 제삼자적으로 조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어설픈 정의감 같은 것보다 더 세련된 자질일는지도 모른다.

8.
혹시 그는, 바로 이 태생적 기질 때문에, 어느 날부턴가 이런 재판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건 아닐까? 설마 그도 처음부터 이런 판사는 아니었을 테다. 이 재판관이 과부의 탄원을 처음부터 덮어놓고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처음에는 그냥 다른 탄원 보듯이 똑같이 봤겠지. 그래서 봤더니 이런! 아무래도 사건성이 없는 거다. 피고가 애매했든지, 책임 소재나 비중이 불분명했든지, 피해라고 주장하는 그걸 현행법 내에서 규명하기가 곤란했든지 했을 테다. 그래서 처음 한두 번은 이 탄원을 점잖게 돌려보냈겠지. 참 안됐는데 이건 내가 법정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사안이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그랬더니 이게 과부 입장에서는 "드디어! 내 사연을 읽은 재판관이 한 명은 나왔다!"가 되고 말아서, 그때부터 이 과부와 재판관의 악연이 시작된 그런 것일 테다. (그렇게 읽어야, "왜 이 과부는 다른 판사는 냅두고 꼭 얘한테만?" 하는 의문이 풀린다. 애초에 이게 가장 현실성 있는 전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의 결말은 열려 있되 어느 정도는 해피 엔딩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 과부는, 그 억울함을 100% 풀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사법부의 판단을 받았다"라는 부분만큼은 한풀이를 했을 게다.

9.
문득, 태평로, 테헤란로, 의사당대로 여기저기에 몇 날이고 며칠이고 너덜너덜 걸려 있는 피켓, 텐트, 분향소들을 생각한다.

10.
슬프게도,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바, 사회적 약자가 공공과 공권력을 향해 뭔가를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요구 혹 탄원하며 시위하고 있을 경우, 그 요구와 탄원은 그 지속력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무시된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사회적 정의는 과연 (왜) 실현되지 않는가?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이 해결될 길은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걸 알아채지 못하고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싣지 않은 다른 제자들은 아무래도 "꿘"이 아니었는가 보다. 이 농담은 끝에서 한 번 더 하기로 하고...

11.
잠시 성경책을 보던 눈을 들어 그대로 주변을 읽어 보자. 일본 정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서야 과연 전범국으로서의 송구함이 없는 철면피 얼굴로 노인의 얼굴에 돈다발을 던지는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모 반도체 대기업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들 과연 그들 밑에서 일한 것 외에 아무 공통점이 없는 "또 하나의 가족"들의 희귀병을 그렇게 차갑게 나몰라라 할 수 있었을까?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이상민 "장관"이, 김건희가, 남양과 쿠팡과 카카오와 아디다스의 오너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더라면?

12.
퍽이나 그렇겠다 그치? 안 그러니까들 저러는 거야. 저것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정권이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본이며, 직업 윤리가 심각하게 부족한 전문직능집단이고 사회적 도의가 없는 기득권이야. 그래서 끈질기게 모르는 체하는 거라고. 분명히 어느 정도는 자기들이 말을 듣고 책임을 져야 하는 여자들의, 유가족들의, 사회적 약자들의, 너희들의 탄원과 불매와 시위를.
그런데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정말로 끈질기게 탄원하고, 끝까지 불매하고, "자주 그에게 가서"(눅18:3b) 투쟁하고 시위하면,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니? 저것들도 어느 날인가는 질려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는 날이 오게 될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남편 없는 여자 같은 것들이 나를 괴롭게 하니, 해 달라는 걸 해주고 확 치워버려야겠다' 같은 생각을 말이야. 혹시라도, 정말 드물게 가끔씩이라도, 정말로 그런 일이 있고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너희의 소원과 억울함은, 잠깐이나마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서 풀리고 해결되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3.
나는 너희들의 삶에 그런 싸움이 있어도 된다고 봐. 그런 싸움은 그런 식의 승리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해. 세상은 악하기 짝이 없지만, 악을 이기려는 노력 자체는 어떤 이유로도 무작정 좌절될 필요가 없어. 정말이야. 그런 싸움은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에는 어떤 그럴싸한 드라마나 종교적 교훈도 필요가 없어. 내 이름까지 들먹일 것도 없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b)
왜냐면, 현실에서도, 아주 가끔 악이 패배할 때는 그렇게 패배하거든. 다른 게 아니고,
질려서. 너희들에게 질려서. 너희가 정당하다는 걸 깨달아서도 아니고, 너희를 갑자기 존중하기 시작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너희를 통해서) 깨달았다느니 되도 않는 종교적 도덕적 분칠 때문도 아니고, 그냥 나약한 그릇됨이, 너희의 옳은 호소를, 그 호소의 지구력을 더 버티지 못해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우르르 무너지고 휙 뒤집히고 그러기도 하는 법이거든. 그런 건 소망해도 좋아. 내가 정말 이 얘기는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었어. 이걸 "누가" 좀 적어주면 좋을 텐데.

14.
직전의 두 단락은 아마 예수님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웬 백발 미치광이 '길거리 목사'가 짝퉁 민중신학과 짝퉁 레닌주의를 적당히 섞어 떠드는 취한 소리처럼 들렸겠지. 그럴 만도 하다. 누가복음 18장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들과 비슷하게, 이 정도의 현실적 구체적 묵상, 설교, 의논을 누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지. 분명 원래의 예수님 말씀은 당대 일반 인민의 일상에서 진리를 추출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기가 더 어려웠는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걸로 '비유풀이' 같은 미신, '관주주해', '원어분석' 같은 지적 유희 등을 탐닉하기 바빠, 이해해야 할 요점만 쏙 빠지는 "성경 공부"를 한다.

15.
그리고 "공중 권세"는, 사회 기득권은, 악의 제국은 그 상태를 기꺼이 방치하고, 필요하면 더 강력한 오독을, 더 확실한 맹목을 장려 및 조장하기도 한다. 그게 그들의 수성전에 도움이 되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행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기상천외한 조합이 어떻게 성립한다는 건지부터를 모르겠는 입장이다. 하지만 분명 이 사회는, 누구랄 것 없이 어느 나라랄 것 없이, 기회 닿는 대로 피해자를 비난하기를 마지않는다. 하물며 그 피해자들의 피해 자체, 억울함 자체, 불합리와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서는 더 볼 것이 있겠는가? 과부의 청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되려면, 그 재판관은 최소한 "사람을 무시"(눅18:2b)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본에게 이윤이 된다면, 정권에게 표가 된다면, 알량한 자아와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역량을 정확히 거기에 집결시킬 의지마저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을 분명 읽고 듣고 설교하고 QT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소수자들, 투쟁하는 단위들, "과부"들에 대해 완전히 눈멀고 귀먹은 교인들을 길들이고 있다.

16.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믿은 사람으로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봤던 바로 그 과부와 바로 그 재판관이 눈에 띄면, 과부 편을 들어야 한다. 그게 맞다. 그리고 그 억울한 과부는 국민신문고와 "단식 n일차" 텐트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 불의한 재판관은 날마다 TV 뉴스와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이 모든 시위 투쟁을 성경 속 과부처럼 "낙망치 말"고 모두 끝까지 밀어붙이자면, 그건 고스란히 "혁명", "노동자 대투쟁"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참아내지 못했고, 이 사회 기득권 역시 결코 참아낼 생각이 없는 그런 싸움 말이다.

17.
나는 그 싸움을 지지한다. 최대한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한 지구전에 되는 대로 합력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굳이 따지자면 나는 천상 "꿘"인 편이니까. 여러분은 어떤가?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그냥 "항상 기도"하라는 이야기로만 듣고 헤헤 웃고 큐티 책 덮는 그쪽에 있고 싶은가? 예수님은 이쪽이신 것 같은데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Posted by 엽토군
: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는 굉장히 유명한 성경 삽화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베드로의 꾸중을 듣고 급사를 했고, 잠시 후 찾아온 그 부인도 베드로에게서 똑같은 꾸중을 듣고 똑같이 급사했다는 얘기니까.
이렇게 논쟁적으로 폭력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그런지, 무례하리만치 무시로 인용된다. 최근에는 무슨 목사 임직식 예배의 1부 설교 본문으로도 나오는 것을 봤고, 심지어 가끔은 유치부 초등부 설교 시간에도 다뤄지곤 한다. 이야기의 '수위'를 생각하면 절대 전체이용가는 아닌데도 말이지. 참말 현대의 교회란 그저 "불순종"에 따르는 벌에 관해 호통을 칠 수만 있으면 뭐든 다 OK인 모양이다. 이 얘기는 좀 있다 더 하기로 하고...

아무튼 "수위 드립을 친" 김에 '콘텐츠'의 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연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기엔 좀 '억까'인 면이 있다.

대체 이 부부가 지은 죄가 뭣이기에 그들은 찰나의 회개 기회도 없이 각각 즉결 처형돼야 했던가? 재산의 '일부'만 가져와 헌납하고는 '이게 전부다'라고 말한 것이 그 죄의 내용이다. 현대 형법 기준으로 보면 죄형 균형의 원칙이 전혀 맞질 않거니와 당대 기준에도 좀 너무 무서운 얘기였을 것이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설교는 대체로 거짓말하지 마라, 하나님은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고 그걸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교역자 속일 생각 하지 마라, 헌금하고 헌신해라 하는 삼천포로 간다.

넘 모욕적이지 않나? 겨우 그런 사자소학 소리나 하라고 주님께서 이 대목을 성경으로까지 써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면.

사도행전 4장 후반에서 5장 전반까지가 다루는 것은, 순종이니 거짓말이니 하는 유아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아주 낯선, 새로운 규칙으로 사는 어떤 새로운 공동체다. 그 공동체는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걸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다.
능력에 따라 부를 창출하고 필요에 따라 부를 분배해서 경제적 평등을 실현해? 이것들 빨갱이냐? 당연히 빨갛겠지 다들 어린양 보혈로 씻고 나왔는걸. 그렇다. 이건 오늘날의 맑시즘에서도 "기독교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여전히 연구하고 시도하는, 지금의 교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급진적인,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공동체다. 그런데 심지어 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발 앞에 둔다"는 표현을 통해, 각자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후술하겠지만, 바로 이 점이 이 모임을 그 주변의 다른 흔한 모임과 결정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4장 후반부~5장 전반부는 누가 뭔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얘기가 반복 제시된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했다' 하는 일반론, 그 다음에는 개중에도 특히 바나바는 어땠다 하는 특기(特記). 그런데 그 직후에 이어지는 진술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것이다. 그들도 뭘 발 앞에 두긴 뒀는데, 일부러, 앞의 둘과는 좀 다른 것을, 조금 열등하게 두었다고.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패턴으로 3개 사례를 대조하는 이 수사법이 무슨 요점을 빌드업하고 있는지 눈치챘는가? 화자는 그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는 그 공동체 규칙을 진정 따르지 않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데 그쳤음을 강조하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사도행전에서 꽤 자주 반복되는 '세속적 모방 실패' 미담의 범주에 포함되고, 읽어야 할 내용의 초점은 그 깊이가 달라진다.

세속적 모방 실패 일화란 무엇인가? 그냥 내가 만들어본 용어인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 얘기나 마술사 시몬 얘기가 여기에 속한다. 사도와 초기 교회의 놀라운 행실을 본 세속인들이, 그 가르침과 삶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 겉모양만 따라하여 그 긍정적 효과(즉 효험)만을 취하려다가 쪽박을 찼다는 일화들 말이지. 사도들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은 책이라 그런지 사도행전에는 이 모티브가 꽤 자주 등장한다. 앞서 살펴본 바, 내 생각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화도, 그 수사법에 의해, 이런 목적으로 삽입된 이런 일화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부가 재산의 '일부만' 바친 이유는 설명이 된다. 뭔가 효험을 얻고 싶어서 뭔가를 겉으로 모방하는 연기를 하는데, 그런 일에 전 재산을 바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이 얻고 싶었던 그 효험이란 무엇이었고, 왜 이들은 그걸 원했다는 이유로 꼴까닥해야 했을까? 애초에 뭘 원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쯤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앞서 골치 썩은 신약학자들이 남긴 단서를 참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연구에 따르면, 이 부부는 어쩌면 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피호제란 무엇인가? 창작자 후원 사이트 이름이기도 한 영단어 "패트리온", 오늘날 '고객'을 뜻하는 "클라이언트"가 연관된 개념인데, 요컨대 돈 있고 빽 있는 자("patronus")가 돈 없고 빽 없는 자("cliens")에게 찾아가서 "내가 네 생계와 신변을 책임져줄 테니 너는 내게 정치적 사회적 충성을 바쳐라" 제안을 하고, 이 제안에 쌍방이 합의하여, 상호 신의에 의해 서로의 이익을 꾀하는 사회 계약 방식이다.
마피아가 정확히 이렇게 운영된다고 하는데, 마피아가 아직 없던 고대 로마에서도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건국자 로물루스가 물려준 당연한 사회 권력 관계로 알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시대건 보통은 돈을 주는 쪽이 "갑"이다. 그건 아마 사도행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게다가 이 사건은 피호제가 당연하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이름만 보아도 비유대인이다. 자연히, 그 신약학자들의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여보 저기 예루살렘 어디에 웬 유태인들이 새로 집단 생활을 시작했다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돈을 주면서 산다는 모양이야.
그래? 예산 규모가 얼마라는데?
얼마얼마밖에 안 된대.
우리 재산의 반에도 못 미치네? 그거 갖고 어떻게 산대?
서로 필요에 맞게 나눠주다 보니 부족한 건 못 느끼고 사는가 보더라고.
그래? 그럼 우리가 가서 그 사람들을 좀 도와주고 보호자가 되면 어떨까? 우리 재산 좀만 줘도 거기서는 엄청 큰 패트리온이 될 거 아냐?
그러네! 그러면 그 피호자들은 우리한테 그만큼의 충성을 바쳐야만 되겠지?!

이 부부가 정말 이런 의도로 사도행전 5장에서 등장했던 거라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이 밝히고 있었던 것은,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요점이기도 하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누가 더 가난하다거나 꿇린다거나 "을"의 입장에 처해 있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건 모두가 모두의 보호자이자 피호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그런 피호제의 인식 틀로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사회였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모두가 누군가의 피지배계급이거나 피호자일 뿐인 로마 제국에서, 이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겨지며 사람을 끌어모았던 데는, 이런 근본적 정신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삽화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꾸린 공동체에 피호제를 도입하려던 시도가 저지된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뭐라고? 지금 이 부부가 우리의 벤처투자자가 되어 주겠다고? 안 되지. 그건 안 돼. 이 사람들 이거 우리 형제, 자매가 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파트로누스, 스폰서, '갑'이 되겠다는 거야. 아예 다른 이들처럼 재산권 자체를 포기하고 들어온다면 또 모를까, 자기 재산권은 계속 가지면서, 왜 그 중 일부를 가지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양 꾸며내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니면서? 이것들 지금 우리 공동체를 피호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 아니냐?

좀 엉뚱하게도 나는 여기서 문득, 경제 지원을 한사코 거절하는 북한을, 그리고 전두환의 차남을 생각한다.

일단 북한부터 설명하자면, 북한은 '그깟 돈 얼마 받는' 경제 지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제안에 모욕을 느낀다는 식으로 화를 내곤 한다.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한없이 귀엽고 가여운 발악처럼 보일 수 있겠으되, 북한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는, 북한은 그 지원을 "당신들은 우리의 비호와 후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는 조롱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얘기가 그렇다면 확실히 그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아무리 헐벗고 배고플지언정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하는 나라가 그들의 궁극의 지향일진대, 기껏 그 이상을 추구하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막상 돈을 받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 있어라"로 전향할 수는 없다. 체면이랄까 신념이랄까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잖은가.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은 왜 갑자기 생각나는가 하면, 얼마 전에 본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자기 아버지가 일하는 교회를 찾아간 장면 때문에 그렇다. 전두환 일가라고 하면 그보다 더 치사하고 사악할 수 없게 자기 친인척 주변인을 보호하고 피호하는 더럽고 불의한 관계로 돈과 지위를 누리며 떵떵거리는 도당들인데, 그 피호제 체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으로 뛰쳐나와 고발을 이어나가는 것이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고, 그 애비라는 새끼는 웬 교회에서 교역자를 하고 있다. (이미 여기서부터 비위가 상한다.) 그래 전우용이 카메라를 대동해서 그 교회에 찾아가 여기 내 아버지가 있느냐, 그를 면회할 수 있겠느냐고 하니, 모자이크된 교인들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그러게 그 전도사님이 이번 주일에도 교회 오시긴 했는데 요새는 잘 못 보겠네 안 보는 게 좋지 않아?" 따위 사람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짖고 웃어넘기며 지나간다.
그렇다. 이 나라는 제 자식도 내다 버리는 전재용이라는 새끼가 전도사를 참칭할 수 있는 나라다. 모두가 전두환 일가를 기꺼이 '슈퍼 파트로누스'로 섬기며, 교회도 교단부터 일개 성도까지 한 줌 부끄러움 없이 그 피호를 마다않고 받아먹는 치들이다. 전우원은 전재용이 자기 전화를 받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교회에서 돌아선다. 교회가 참 한남 유충 실좆 같지. 이보다 더 심한 욕이 있다면 쓰고 싶다.

그런데 비단 교회뿐이겠는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늘날 현대 사회는 팍스 로마나의 그때와 똑같은 양상으로 크고 작은 제국식 계약과 "세상적인"(ㅋㅋ) (비)도덕이 판치는 곳이다. 멀리는 미국의 PAC 제도에 의한 금권 선거부터 가깝게는 헌금 많이 내는 장로와 출자 많이 하는 주주가 1인 1표 이상을 행사하는 각 기관까지 피호제가 구현되어 있는 면을 찾기가 전혀 수고스럽지 않다. 오죽하면 한국인들은 보호자-피호자 사이에 합의된 역할 이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보호자에 대해서 "갑질한다"는 욕설까지 개발해낸 상태다. 다만 로마 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안 되고 있는 게 있다면, 그런 피호제적 관계 이상의 도덕과 섭리로 운영되는 공동체의 성립이 그것이다. 초대 교회는 얼마 못 가 교황과 황제가 영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재용을 앉히고 전우용을 내쫓는 조직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아나니아를, 삽비라를 자꾸 우리 모임에 들이려고 하는가? 애초에 그들을 알아보고 경계하기는 하는가? 이 믿음을 가진 이들의 모임에, 그 "재정"과 그 "인맥"이, 그 "스폰서"가 그토록 간절히 필요한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던가? 천지 창조자 하나님의 백성 된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먹일 수 있었던 베드로의 교회의 후신이 우리 아닌가? 근데 왜 자꾸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배반적 고백을 거듭하는가? 왜 자꾸 하나님 이외의 누군가를 파트로누스로 모시려 하는가? 당신들이 그 갑님들을 모시면, 그들이 당신들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책임져줄 거라고 믿는가? 그딴 것도 믿음인가? 당신들이 이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 끔찍하게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인가? 오~ 교회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전두환과 전재용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 탐나더냐?

여기까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가지고 내가 늘어놓을 수 있는 풍월이다. 보다시피 졸라 길고 복잡하며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왜 목사님들은 그걸 못 하는가?

안 하는 거겠지. 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건 단지 "고대 근동 로마 제국 치하 피호제의 원리가 어쩌구"를 주일 대예배 때 설교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논리의 복잡함은 핑곗거리가 안 된다. '갑질'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충분히 풀 수 있으니까.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여기서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가 되길 원하는 척하면서 실은 교회 안에서 갑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추론 근거는 무엇이며... 그러나 우리는 그간 부끄럽게도 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에 참배를 했으며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구국 조찬기도회를 주도하였고... 이런 역사를 회개하면서 우리 교회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도... 운운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러면 교회 조직과 출석교인 간의 피호제마저도 재고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역자들, 교회라는 기관, 현대 기독교라는 제도는 출석교인 각각에게 "구원의 확신"이라는 '영적 신변'을 확보해 주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 등의 '영적 풍요'를 제공한다. 그 댓가로 출석교인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봉사 선교 건축찬조 등의 '비-영적 충성'을 공납한다. 그게 이들의 관계이고, 보다시피 이보다 더 피호제적일 수 없다. 상징적인 양상이 그런 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라 하겠다. "무조건 이명박 찍어" 소리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세습을 하건 횡령을 하건 믿음페이를 강요하건 논문을 조작하건 찍 소리 하나를 못 하고,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하는 목사는 열렬히 따르라고 내버려두는 진짜 충성도 뻔히 발생하고 있잖은가. 이렇게 상하 수직 주종 관계 명확한 피호제를 고대 로마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알고 보니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꼬락서니라고 들으면, 그들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뭐라고 비웃을까?

이런 관계에서 잘들 살던 중에, 자기에게 '신앙적 피호자'의 목줄이 채워진 줄도 모르고 있는 그 클리엔스들에게, 그 '신앙적 파트로누스'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자세히 풀어줄 이유나 의리가 있는가? 그 사건은 피호제가 얼마나 세상적인지, 사악한지, (최소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아님을 더할 나위 없이 뚜렷이 보여준 사건인데, 그걸 있는 그대로 그 클리엔스들에게 소개해 주면, 갑자기 그들이 자기 처지의 실제가 무엇인지 재고해 보고 말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면, 그래서 그들이 목줄을 풀고 "교회갱신공동체"로 거듭나고 진짜로 만인 제사장의 하나님 나라를 조그맣게나마 시작해 버리면, 파트로누스 입장에서는 좀 많이 곤란하지 않겠는가? 자연히 그들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가능한 최대로 납작하고 싱겁고 희멀겋게 유지해야 하는 말씀이 된다. 정 안 되면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같은 싸구려 토크라도 써서.

정리하고 끝내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순히 '교역자에게 거짓말하면',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면' 따위의 교훈만을 위해 전승된 사건이 아니다. (하물며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목사"에 대해 설명하라고 주신 말씀일 리는 더더욱 없다. 대체 뭐 하자는 코미디 연극인지?) 그 사건은 초대 교회가 세속의 다른 사회와는 어떤 면에서 근본부터 새롭고 은혜로웠는지, 그래서 당대의 무슨 통념에 정면 도전하는 급진적인 모임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사건이다. 오죽하면 그 실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겉모양만 취해 효험을 보려던 이들이 이렇게까지 크게 망하고 말았겠느냐고.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 사건에 대해 이 정도 혹은 이 이상 말하는 "한국 교회 교역자"를 본 적이 없다. 교회가 꿀 먹은 벙어리일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입장에서는 야속함도 냉소도 다 지나고 그저 좌절 섞인 의분만이 모루를 맞으며 달구어진다. 왜 말을 안 해? 왜 내가 궁금해하거나 추정하거나 연구해 보았거나 확실히 이해하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아? 실천하라고, 지상에 실현하라고까지는 요구하고 싶지도 않아.  뭐 너네 보고 갑자기 전두환 욕하라고 할 생각도 없어. 왜 닥치고들 있는 거냐고. 왜 유치부에서나 필요할 수준의 설교를 초등부에서 또 하고 중등부에서 또 하고 고등부에서 또 하고 청년부에서 또 하고 대예배에서 또 하고 루디아회, 바울회에서 또 하고 장년부에서 또 하고 노년부에서 또 해?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우스워? 아나니아가 베드로 말 한 마디에 뒤지고 삽비라가 베드로 말 두 마디에 뒤진 게 그렇게 별볼일 없는 일이야? 아니지, 니들은 이 사건이, 이 말씀이 우스운 게 아니고 성도가 우스운 거구나? 그들을 자녀 삼으시고 그들에게 같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우습구나 그렇지? 말씀이 없어 주려 죽는다는 그 성도들이 하찮아 보이지? 그럴 거야 니들한테는 그들이 그저 주일 출석과 헌금을 바치는 피호자 머릿수일 뿐이잖아. 저들도 당신들의 영적 보호와 잠 오는 설교 아래 졸고 있기를 기꺼워하니까.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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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교회들이 오늘을 어린이주일로 섬기는 모양이다. 우리 교회는 공예배에서는 쇠지 않고 어린이부만 어린이주일로 쇤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웃기는데, 광고 시간에 그런 소리가 나온다. 아 지금 전 교단이 문제에요. 저출산이다 코로나다 하면서 전국적으로 어린이부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어린이부를 "부흥"시키고 싶은가? 교회 외벽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커다랗게 예스키즈존 이라고 써붙여 보시오. 다음 주부터 교회가 미어터질 것이다.

아니 진짜로 해보라고. 모든 물건이 어린이 손에 닿을 때까지 높이를 낮추고, 뾰족한 것 딱딱한 것 무거운 것 뜨거운 것 다 치우고, 마이크 볼륨을 좀 줄이고, 대예배당에 어린이들이 어디든 앉게 해 주고, 우는 애 내쫓지 말고, 모자실을 폐쇄하고 대예배당을 모자실로 써라. 그리고 여기 앉은 어느 어른에게 어떤 장난을 쳐도 절대 화내지 않겠다고 잼민이들에게 약속해 보시라. 장담하건대 그날부로 그 교회는 기적의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단지 어린이가 주께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않을 뿐인데도.

현실은, 한국 교회야말로 한국 경제문화사상 가장 유구하고 능숙한 노키즈존이다. "모자실"이란 소싯적이나 지금이나 참말 부끄러운 것이다. 애와 애엄마를 방음 잘 되는 한쪽 구석에 처박아놓고 테레비 하나 연결해서 대머리 목사의 근엄한 말씀을 중계하는 것은, 그 안에서 애가 울건 말건 그저 나 하나만 대예배당에 근엄하게 앉아 설교나 들으면 그만이라는 대머리 장로들의 탐욕 덕분 아니었던가? 그 탐욕을 생각하다 보면, 무슨 식당 무슨 카페 주인이 어쨌다더라 하는 심술은 하찮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리 중에 누가 크니이까? 라고 다 큰 어른들이 물어보는 꼴 역시 예수님 눈에는 세상 하찮게 느껴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사상 최초의 예스키즈존을 설치하며 꾸짖으신다. 니들이 크긴 뭐가 커 얘네들이 크면 컸지 그러니까 허튼소리들 말어. 그로부터 이천 년쯤이 지났고 우리는 노키즈존 매장 출근 전 1부 예배를 드리며 애와 애엄마를 모자실에 처박아두는 어른들이 됐다. 뭐라고? 어린이부가 줄었다고? 그야 그럴 테지 니들이 줄였잖아. 교회가 노키즈존인데 어린이부가 어떻게 부흥해.

진짜 이제 이런 소리는 페북에 그만 쓰고 기독교인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에나 가서 해야겠다 그런 게 없어서 문제지만.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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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금요일 오후 6시 40분쯤인가였고, 기본적으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으며, 아직은 퇴근을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 팀별로 한두세 명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중 개발팀 당번이 된 꼴이었고, 기획팀에서는 내 등 뒤 저쪽 자리 아이맥 앞에 앉은 모 과장님이 그랬던 모양이다. 나야 지난 몇 주간 무슨 되도 않는 초등영어 라이브방송 관련 기획 구현하느라고 상습 야근 중이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저 과장님은 요즘 뭐가 바빠서 갑자기 야근을 하시지? 하고 좀 궁금해하고 있으려니까, 마침 그 과장님이 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등 너머로 물어본다. "엽토군 씨… 왜 퇴근 못 하고 있어요…?" 이걸 진지하게 답하고 싶지 않아서 되물어봤다. "과장님은 왜 퇴근 못 하고 계시는데요?" "몰라요… 엽토군 씨 일 많이 힘들죠…?" 힘들다고 답할 힘도 안 나서 그저 잠자코 있었더니, 머쓱하다는 듯이 뒤늦게 덧붙은 말 한 마디.

다 뜻이 있으셔서 그러실 거에요 그쵸? 엽토군 씨 교회 다니잖아요.

유일신의 의지를 믿는 종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그런 신앙의 관점을 존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 여기엔 당연하게도 대다수 멀쩡한 기독교인이 해당되고 ― "신의 뜻"에 대해 가장 많이 잘못 이해하는 것 두 가지는, 첫째 우리 인간이 당하고 있는 각종 곤란과 고통이 그 자체로 신의 뜻에 포함된다는 것이고, 둘째 결국 그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곤란과 고통에 대해 "다 뜻이 있으셔서"라고 주억거릴 수 있게 된다.) 둘 다 신의 뜻을 원천적으로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관점이다. 그래서, 서로를 직접 알아가려 하지 않는 커플들이 기계처럼 주고 받는 기호화된 성애적 상호작용이 바로 그러하듯이, 이러한 신정론적 결론 역시 덮어놓고 쌓아올리며 생활해 나가다간 어느 순간 반드시 그간 쌓였던 오해를 터뜨리며 믿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된다.

우리 인간이 당하고 있는 각종 곤란과 고통이 그 자체로 신의 뜻이라면, 그건 그 신에게 너무나 무례한 소리이다.

그게 무슨 신이냐 말이다. 기본적으로 신은 인간의 곤란과 고통을 가여이 여기고 해결해 줄 존재로 이해된다. 신이 그 본질상 인간을 초월하는 전지 전능 전선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필연이며, 그래서 실제로 세계 어디의 어느 시절 종교관이든지 이 부분에서는 딴소리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중간에 뭔가 아주 단단히 잘못 이론화되어 전파된 청교도식 기독교만이 이런 영적 구속구를 차고 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이건 정말이지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도 민망한 얘기다. "오 주님! 저는 지금 너무나 아프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생기고 웃음이 납니다! 자! 저에게 더 큰 고난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사 저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을 똑똑히 보아 주시옵소서!" 음, 써놓고 보니 별로 변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각종 수련회와 기도굴에서 오늘도 쩌렁쩌렁 울리는 통성 기도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까?

기독교에만 한정해서 얘기하자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궁극적으로는 아담을 조상으로 갖고 태어난 우리의 잘못이다. 그리고 아담을 빚은 하나님의 뜻은, 아담 옆에 선악의 나무를 두시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결같이 딱 두 가지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릴 수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좀 사이 좋게 불화 없이 잘 지내기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베어물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 말하자면 수오지심이라는 게 생겨난,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적 없는 관습과 제도와 행동 양식을 구성하기 시작한 ― 그때부터, 인간사에 일어난 일 중, 정말로 그 하나님의 뜻 두 가지가 실현되었던 순간은 눈물겨우리만치 드물었다. 그래? 다 뜻이 있으셔서 내가 근무 시간 다 끝나고도 테스트 결과 기다리며 야근하고 핫픽스 올리는 인생을 살고 있다 이거지? 솔로몬과 로마 황제와 트럼프를 다 지켜보신 하나님은 그런 발상에마저도 애써 동의하려고 노력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야근하고 있는 건 그냥 일이 많아서다. 내가 일이 많은 이유는 그냥 이 회사가 이래서 그런 것이다. 이 회사가 이 모양인 이유는 그냥 오늘날 이 나라 경제 돌아가는 꼴이 이 꼴이어서다. 그렇다면 내가 야근하는 것은 누구의 뜻이랄 것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이 체제를 이렇게 굴리고 있는 인간들의 더 큰 죄악에 의해 아래로 캐스캐이딩 되어 우리 회사 내 자리까지 내려온 악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걸 한 번도 의도하신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주님은 그런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쓰시는 분이다. 보아라! 사탄이 심지어 너희를 밀 까불듯이 까불게 해 달라는 이슈 티켓까지도 열어 놨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나니…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자. 우리의 믿음이 더 정확해지고 성숙해지고 완전해지기를. 체념하듯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별로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우리가 자초한 이 모든 곤란과 고통을 신 덕분이라고 결론짓는 습관을 그만둘 수 있기를 말이다.

신 덕분이라고? 신의 탓이 아니고? 그렇다. 잘못된 관념 그 두 번째에 의하면, 우리가 자초한 이 모든 환란과 고난은 신 덕분에, 결국 다 좋게 좋게 끝난 해피 엔딩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해피 엔딩으로 가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하여간 언젠가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고, 더 이상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헤어짐이 없는 세상이 오고야는 마니까. 근데 말이지요, 결국 어찌저찌 해서 다 좋게 좋게 되었더라 하는 이야기라고 뭔가를 요약하는 건,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 또는 수치가 되는지 압니까요들? 좋은 서사일수록 뿌려진 떡밥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며 훌륭하게 회수된다. 애초에 정말 잘 지은 이야기라면 필요 없는 떡밥은 절대 아무렇게나 흩뿌려지지 않는다. 반대로 나쁜 전개일수록 이것도 했다 저것도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알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다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여 막을 떨어뜨리고 도망가는 법이다. 19세기에 세계 대전쟁을 하고 20세기에 세계 대전쟁을 또 하고 21세기에 세계적 유행병이 또 퍼지는 이 인류 역사가, 정말, 주님 재림과 휴거 한 방으로 모두 갓띵작 해피엔딩 된다고? 그게 무슨 뻔뻔스러운 궤변인가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 해피엔딩이란,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장면이란 언젠가 지금이 아닌 미지의 나중에 한방에 빡 하고 오는 대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해 수시로 발현돼야 하는 상태인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이 시간 야근을 하면서 결제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 결제 테스트가 잘 돼야 결제가 잘 될 거고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잠재 고객들이 우리 상품을 이용할 거고 그래야 그들의 삶의 질이 올라갈 거고 그래야 경제가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고 '나인 프론티어즈'의 비즈니스 영역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거라서?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냥, 실제로 결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결제 테스트를 해보자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게 다다. 일은 일일 뿐이다. 내가 무슨 새마을 운동이며 실업 선교사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결과만 말씀드리면, 결제 자체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 다음 처리가 이상하다는 리포트가 들어왔고 실제로 보니 내가 놓치고 지나간 부분이었어서 앗 죄송합니다 하고 그 부분을 고치고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런 거다. 갖은 일이 결국 선을 이룬다는 건, 결국 그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랄까 사실은 언제나 딱 그런 정도까지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요컨대 거창해지지 않고 너무 멀리 허황되이 바라지 않고 지금 이 광야와 땅끝에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그곳을 개간해 나가는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그렇게 했다. 물론 처음에야 빌리 그레함 같은 파송자들이 "가라! 주 영광 위하여" 하니까 "가야겠다" 하고 왔겠지만, 와서 살아보니 이건 내가 예수님을 전하고 어쩌고 그 이전에 병원부터 학교부터 좀 있어야겠다고 정신이 드는 거지. 그래서 예수님 전하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그 지역 그 영혼들의 필요를 채우며 열심히 손해를 보다가 죽은 것이다. 그 삶이 고스란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저렇게 손해 보다 죽었을까' 하는 감동이 되어 그 지역을 기껏 복음화해 놓았더니, 그 후손들은 어째서인지 "주 영광 위하여" 어쩌구 하면서 세습하고 부동산 놀음하고 태극기 흔들며 광화문과 국제분쟁 지역으로 밀어닥치는, 거창하게 하찮은 삶을 살고 있다. 아니면 정반대 방향으로, 이를테면, 노조를 결성하고 법을 바꾸어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을 수요기도회의 침묵 속에 유야무야 떠내려보내는 온순한 기독교인들이 되어주고 있다. 그 부조리마저도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이용될 거라는, 지배 계급이 좋아하는 한숨 섞인 믿음으로.

그 과장님께는 이렇게 길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생각 하지 않으려고 해요. 일은 일로 해야지요. 이런 일 하나하나에 하나님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일 하는 사람 없단 말이에요. 그마저도 맨 끝의 요지는 적당한 예시가 생각이 안 나서 헛소리처럼 뭉그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금요일 퇴근 직전에 동생에게 전화하여 오늘 퇴근하면 치킨을 먹자고 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저녁을 굶었고 8시 좀 넘어서 퇴근해 기어코 치킨을 시켜 동생과 먹고 잤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 뒤지겠는데 하나님 너 이 새끼는 빨리 튀어나와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 빨리 퇴근시켜서 선을 이뤄줄 것이지 대체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뵈십니까?' 같은 소리를 하지 않고, 대신 그냥 약속을 지키고 할 일을 한, 그래서 나쁘지 않은 편이었던, 그런 저녁이었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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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 대학사역이 슬슬 MC 시즌이라고 인스타그램 업로드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니) 이틀 전에 이런 게 올라왔다.

육성 설교로 들으면 눈치 못 채거나 의구심만 갖고 지나갔을 텐데 이렇게 텍스트로 정리된 걸 보니 확실히 알겠는 바, 어떻게 이렇게 속빈 말인지 모르겠다. "가난이란 결핍을 내포한 말입니다." 이 무슨 하나마나한 소리인가? "자신이 어떠한 것에 결핍이 있"다는 서술이, 어떻게 대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늘 갈망하고 찾는" 상태의 서술로 등치되며 도약하는가? 팔복처럼 알기 쉬운 말씀을 가지고 이건 무슨 (말)장난을 하자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알기 쉽다고? 그렇다. 팔복은 알기 쉬운 교훈이다. 이런 블로그까지 쫓아오신 분들이라면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대충 설명을 드리자면... 팔복은 딴거 없고, 당대 세속 필부들의 '복'에 관한 통념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그러면서 진정한 복의 개념을 밝혀 버리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강력하다. 뭐 사실 산상수훈 전체가, 아니 기독교 자체가 바로 그런 교훈들로 구성된 종교지만 뭐 그런 큰 얘기는 안 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건 무슨 말일까? 팔복의 핵심은, 예수님이 나열하고 계신 바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들이, 어째 하나같이 '없는 살림'에 나오는 '아쉬운 소리들'뿐이라는 데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착해빠진("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자비를 베푸는 쪽이 복이 있다.
마음에 숨김이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
싸움을 말리고 중재하려는 사람이 복이 있다.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잘 사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되는가? 복 받은 사람이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남들 싸움을 말리려고 뛰어다니는("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말이지.

잘 생각해 보면 새삼 놀라운 일이다. 세속의 인류는 한 번도 복에 대한 관점을 진실로 재고해 본 일이 없다.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관점은 시종일관 동서고금 아주 따분하게 똑같다. 남들 눈치 안 보고 떵떵거리는 것, 배부르고 등 따수운 것, 웃음과 의기양양함으로 점철된 상태, 좋은 건 다 취하고 싫은 건 다 피하는 경지, 뭐 그런 것이 인류가 생각하는 복의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그 정 반대 대척점에 있는 상태들, 예컨대 남들 눈치 보며 산다든가 주리고 목마르다든가 하는 상태가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인류는 단 한 번의 착념도 기울여준 적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상태들이 복 받은 상태일 수 있다고, 아니, 그런 상태들이야말로 복 있는 자들의 상황이라고 역설하신다. 그건 이상하게 들린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울고 있는 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자가 복받은 자가 될 수 있다니? 어떻게 그렇게 된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가난해도 복이 있고, 그 가난은 심령의 가난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인 한,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진 이들인 이상은, 그들은 아무리 복과 멀어 보이는 상태에 있더라도 복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만사에 자비를 베풀고 사는 이들은 복이 있고 그런 자들은 슬픔 중에 있더라도 복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전복하여 바로잡고 계신다. 사실은 하나님 그분 자체가 홀로 인류의 진정한 복락인 거라고. 하나님을, 하나님 나라를 가질 때 혹은 추구할 때 그 삶은 복된 것이다. 우리는 복받은 결과로서의 현상들의 일부 -- 떵떵거린다든가 배가 부르다든가 하는 -- 에 천착하고 그게 복인 줄 알지만, 복에 관한 실상은 거기서부터 한참 멀리 천양의 차로 떨어져 있음을, 예수님은 이렇게나 도전적인 역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억지 해석 같지만 나름 근거는 있다. 마5:1-12에 병행하는 구절인 눅6:20-23이 그 뒷부분 눅6:24-26과 대칭을 이루며 '누가 복 받은 사람이며 누가 화를 당한 사람인지'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절을 통해 '무엇이 진짜 복인가'를 설명하신 바로 그 이치와 논지로,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역시나 우리가 갖고 있는 '화'의 개념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말씀을 하시며 '무엇이 진짜 화이고 큰일인가'의 개념을 바로잡으신다. "만약 너희가 너희 자신을 충분히 합리화하였고, 너희가 너희 자신의 소유와 요행에 마냥 자신만만하다면, 너희가 부요하고 배부른 것이 아주 큰일난 일이다.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배고픔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하나님 그분이 없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 그때, 기원후 30년 언저리 중동 한구석에서 오만 군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셔야 했던 그런 맥락을 감안해 보자면, 여기서의 '가난'이란 정말로 '심령의 가난'(심령에 방점을 찍자면, 예컨대 신학적 깨달음에 대한 추구?)이라든가 "심령이 늘 결핍에 있고 그걸 인정" 운운하는 그 정도의 복잡한 관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높은 확률로, 그건 그냥 정말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물리적인 가난을 뜻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을 선포하시며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을 말씀하셨을 때, 그 설교를 듣고 있던 그 필부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매일 매일 살아나가고 있던 가난이며 애통, 억압, 핍박, 주림과 목마름으로 곧이 들렸을 것이다. (눅6:20-23은 이 가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하려고 하신 게 아니었다. 그런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이는 평범하고 누추한 그대들의 삶에도 행복이 있다는 벅찬 소식을 전하신 것이다. "너희는 분명 가난하게 살고 있고, 그건 어떻게 봐도 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너희에게는 매일 슬퍼할 일이 끊이지 않고, 매일 매끼 주리고 목말라 괴롭다. 너희는 어딜 가나 착하게 살아야 하고, 싸움을 말리는 억울한 입장이 되어야 하고, 번번이 억울한 핍박을 당하며 산다. 하지만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하나님 그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너희의 복이 되시니, 너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너희는 배고프지만 배부를 것이고, 심령의 가난 외에는 가난을 모르게 될 것이며, 어떤 슬픔이 있다 한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터전을 얻을 것이고, 하나님을 뵐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너희에게 하나님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인 한 너희의 슬픔이며 아픔 등은 너희의 불행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물며 너희가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공갈 협박과 모든 악한 말을 듣더라도 너희는 불행하지 않다. 너희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복이다. 선지자들이 모두 그랬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런 메시지를, 매일 생로병사의 번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들렸을까? 솔깃한 소망의 메시지로 들리지 않았을까? '정말 그런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지? 나처럼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하나님 나라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건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내가 그걸 가질 수 있을까? 까짓거 하나님 잘 믿으면 되는 일인데 할 수 있지 않을까?' 팔복이 그때나 지금이나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복받아 잘 사는 모습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는 차원이 다른 복을 설명하시면서, 그 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시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진정성 있게, 그들의 마음을 흔드시면서, 그러면서도 그 귀에 쏙 들리도록 쉽고 명확하게.


가난하더라도, 슬프더라도,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들은 복이 있고 불행할 수 없다. 사실 팔복에서 이 이상 우리가 더 복잡하게 배배 꼬아서 곱씹을 내용은 별로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뭔가를 창고에 무한정 쌓아올리며 좋아라고 해해 웃는 망할 짓거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과 박해를 일부러 받으러 다닐 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삼위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분 자신이 인류의 복이고, 그분을 가지는 것이 인간 행복의 요체이며, 배가 부르니 배가 고프니 돈이 없니 심령이 가난하니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그 유일한 기준을 갈음하지 않으므로.

명색이 YWAM CMK쯤 됐으면 성경 말씀 공유를 할 때는 대충 이 정도 수준의 연구라도 좀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하고 많은 성경 주해라도 타이핑해다가 올려주면 어디 덧나는가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이라는 어구 하나에 딱 목매어 아무 말 대잔치를 카드 다섯 장으로 늘어놓는 거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엽토군
: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7:12, KRV)

영 신통찮은 교역자가 담임목사랍시고 부임해 와서는 매주 뜬금없는 본문에 뜬금없는 예화를 붙여 뜬금없는 설교를 늘어놓기가 벌써 다섯 달쯤이 넘었다. 급기야는 이젠 넌 설교해라 난 성경 볼란다 하고 저 혼자 잘못 읽는 성경 본문을 나 혼자 아이패드 미니로 막 읽고 졸고 하다가 성가대석에서 내려오는 마당인데... 지난 주 설교본문은 또 하필 저 구절이었어서, 그 일요일 이후로 사무엘상 앞쪽을 좀 살펴보게 되었다.

그건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막연히 알고 있던 것보다, 더 기묘하고 심오하다.


사무엘상에서 '에벤에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면 3개의 구절이 나온다.  3장, 4장 그리고 7장인데,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그 셋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 3개의 검색결과만 놓고 보아도 사실은 벌써 이상스럽다. 마치, 에벤에셀이라는 곳은, 사무엘이 돌 쌓고 명명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에벤에셀"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은 것이다. 이것부터가 요상하지만, 사실은 그 '에벤에셀'이란 지명이 처음 나오는 대목부터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까지를 죽 읽어내려가다 보면, 정말 낯설고 당황스러운 옛날 얘기 하나를 만나게 된다.

소수민족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투민족 블레셋이 진을 친다. 이스라엘은 맞서 싸우지만 4천 명쯤을 잃고 진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전개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를 한다. 우리의 신의 언약궤를 가져다 앞장세우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제사장의 아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언약궤를 떠메어 온다. 이스라엘은 벌써 신나서 파티를 연다. 그걸 보고 엉뚱하게도 블레셋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전의를 다지면서 이스라엘을 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용맹히 나가 맞서 싸웠더니 더 크게 패했다. 무려 3만 명이 전사하고, 기껏 가져온 그 언약궤는 홀랑 빼앗기고 만다.

뭐? 이 각본은 문제가 있다. 소수 민족, 신의 권능과 상징, 소재가 이쯤 갖추어졌으면 당연히 소수 민족이 신심의 힘으로 승리하는 게 결말 아닌가? 왜 지고 앉았지? 이거 뭔가 플롯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년부, 청소년부, 대예배에서도, 심지어 유튜브나 기독교 라디오 설교에서도 이 서사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항상, "에벤에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식의 너무나 희망차고 달달하며 알기 쉽고 행복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나오던 것이었단 말이다. 살륙이 심히 커서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더라는 역사는 거의 은폐되다시피 했다. 이 문제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데, 가뜩이나 이상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5~6장의 사건을 추동하는 '주인공'은 ― 나도 말하면서 믿기지 않는다 ― 바로 그 언약궤다. 블레셋의 영토로 끌려간 그 언약궤는, 뜻밖에도 보통의 평범한 언약궤들처럼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고, 그 옆에 있던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상을 두 번이나 제 앞에 거꾸러뜨려 육시를 해 놓는다. 블레셋의 사제들이 당황해서 이건 추방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수레를 끌어본 적이 없는 암소 두 마리에게 그 언약궤를 끌게 한다. "저 소들이 벳세메스 산에라도 올라가지 않는 한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소들은,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아니나 다르랴는 듯이, 곧장 그 산으로 올라간다.

여기까지 집필을 마친 스토리 작가가 좀 지쳤던 모양인지, 결말부인 7장은 좀 맥없이 끝이 난다. 만지는 족족 벌을 받는 그 언약궤를 어찌저찌 굴리고 옮겨서 그 언약궤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고...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심이 돈독해졌는데...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죄를 회개하는 대집회를 열자 블레셋 군사가 그들을 일망 타진하러 몰려왔고... 사무엘이 기도를 하니까 막 번둥 천개가 우르릉 쳐서 블레셋이 패주하고... 이스라엘은 전진하여... 맨 처음에 자기네들이 진쳤던 자리까지는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거기에 돌을 쌓아 '도움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했다더라... 뭐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잠시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시라. 이게 무슨 이야기지?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희한하고, 알쏭달쏭하며, 놀라울 정도로 비상투적이어서, 묘한 숭고미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왜 에벤에셀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는가 하면, 앞에서 살짝 힌트를 주긴 했는데, 이 설화가 사실은 블레셋도 이스라엘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궤', 그것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가 주인공인 서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벤에셀 사건이란 언약궤의 행적과 입장을 따라가야만 비로소 읽히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는 억지로 실로에서 소환되어 앞세워진다. 제사장 집에 멀쩡히 잘 있던 언약궤를, 자기들 전쟁에 효험 좀 보겠다고 그 먼 곳 전쟁 최전선까지 들쳐메고 오는 게 뭐 하자는 짓인가? 그걸 또 뭐 좋은 일이라고 제사장의 아들들은 보란 듯이 뻐기고, 사람들은 무슨 경사가 났다고 잔치인가?

그래서, 이 서사의 주인공은 그 상대 악역인 블레셋에게서 필패의 운명의 멍에를 잠깐 벗기고, 그들을 잠시 덜 납작하게 만든다. 그 순간, 첫 전투에서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저 평면적인 악역에 불과했던 블레셋이,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면서 덤벼드는 적극적이고 주관적이며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 상대에게, 여전히 납작하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마는 것은, 심지어 연극론적으로도 타당한 일이다. 언약궤를, 유일신 하나님의 상징과 권능을 무슨 금두꺼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그 언약궤를 모시고 있기에도 과분했던 것이다.

그 언약궤는 계속하여 과격한 행보를 이어간다. 블레셋 한복판이건 이스라엘 접경 지대의 촌마을이건 자기의 권능을 몰라보는 것들에게는 죽을맛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님을 보이며 벳세메스 산으로 꾸역꾸역 올라간다. (그리고 위세 높은 블레셋의 방백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언약궤가 매우 주체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찾았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 주제를 겨우 파악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이 전체 서사의 진짜 주인공 ― 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은 모두가 처음에 납작하게 기대했던 바로 그 평이하고 행복한 결말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그 사연 많고 황량하고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는 바로 그 공터에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묘한 지명 하나만이 남게 된다.

아니지 아마도 사무엘은 그때 말이 좀 덜 나왔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의도(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체적인 일하심에 의해 우리가 여기까지 도움을 입었다'였을 것이다.


언약궤를 전쟁터에 대령해 바쳤다고 앞서 적은 제사장의 아들들을 기억하시는가? 한 놈은 홉니, 다른 한 놈은 비느하스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장 사무엘상 2장쯤에서 이미 천하의 개쌍놈들("브네 블리야알")로 소개된 바 있다. 주님의 제사를 업신여기고 주님을 망신 주는 제사장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앞세우자' 하는 소리가 나왔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 언약궤와 함께 앞장을 섰을까? 물론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을 개죽음시키시려고"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그런 이유 외에도 그들의 성정, 그리고 에벤에셀 이야기의 핵심 갈등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입성은 그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다. 그들은 어쨌든 언약궤가 어느 정도 '효험' 내지 '신통력'이 있긴 있다고 믿었을 것이므로, 언약궤와 이 전쟁 사이에 긍정적인 연관 관계가 생기면, 이를 통해 제사장 직분의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언약궤 입성 행렬에 앞장섰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제 2차 전투에 꽤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그 결과 전사(戰死)하기에 이른다. 그 모든 돌아가는 상황이 실로에 가만히 임재해 계시던 하나님의 계획에 전혀 포함돼 있지 않던 것과는 무관하게도 말이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에벤에셀 이야기를 설교 본문으로 딱 취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같은 달콤하고 곁가지적인 부분만 쏙 들어내어 모두의 귓가에 톡톡 두들겨준 뒤 다시 성경 뚜껑을 주여 삼창으로 닫아 버렸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먹는 유권자 성도들에게 그 영향력을 과시하거나 확장하려고 야심을 품고 강단에 오르던 그 숱한 대머리 배불뚝이 장년 남성 설교자들이야말로,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홉니이고 비느하스이지는 않았는지? 오늘날 개신교인의 줄어듦이 심하여 매년 몇만 몇십만이 깎여나가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는 찾아보지 못하며,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는 것은, 그들 덕분에 언약궤가 빼앗긴 상황과, 과연 얼마나 다른지?

혹시 오늘날의 하나님도 그때 그곳에서 다곤 상을 거꾸러뜨리던 하나님이실지? 세상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친히 이적을 베풀고 역사를 바로잡으며 모두의 시선을 국경과 주변부 존재들의 산마루로 이끌고 계시지는 않은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이며 제 스스로를 망신 주는 동안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는 온갖 해괴한 일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당신의 위치를 찾으시어,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의 지경을 다만 얼마라도 허락하실 계획인지? 그것은 지금 이름 없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하여, 거스를 수 없는 시대 변혁의 정신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누가 알겠는가? 온갖 이해할 수 없는 (랄까 뭔가 각본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왕왕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은, 최후의 날 하나님 나라 역사책에서는, 또 하나의 에벤에셀 설화 같은 것으로 요약될지 모르는 일이다. 요컨대 에벤에셀의 이야기란 하나님 그 자신과 그 하나님의 권능을 멋대로 빙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등이 일방적으로 촉발되고 일방적으로 해결된 이야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구약과 인류사를 통틀어 내내 반복되어 온, 언제나 인간이 촉발했고 하나님이 해결하셨던 그런 갈등 말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그냥 덮어놓고 '하나님만 믿으면 뭐든 다 무조건 도와주셔요' 하는 동화적인 소리와는, 하늘땅 차이의 거리가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이야기를 제대로 읽고 깨우쳤다면, 최소한 세계를 우리 입맛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이해대로 재단하려는 행위를, 요컨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리가 원하는 곳에 끌고 가 앞세우려는 일체의 시도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그런 짓을 또 하려고 했다가는 참패와 모멸을 안기실 것이며, 우리가 그런 깽판을 벌이건 말건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합당한 영광을 우리에게서, 이방에게서 모두 받아 누리시고 회복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저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진 "도움"을 기념하며, 대체 이게 다 뭐였냐고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찰도 교단에서 공유되지 않고 있는데, 그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더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감사합시다 같은 염불만 외는 마당에는 뭘 기대하나 싶고 좀 그렇다. 다음 주엔 또 어떤 기묘한 설교 본문이 얼마나 알기 쉽게 고아져서 나올는지 그냥 그게 (안) 궁금할 뿐.

 

PS. 이 글 제목과 관련된 농담을 하나 하고 끝맺고 싶다. 제목(과 대표이미지 썸네일)은 불보듯 뻔하게 <Stranger Things>의 패러디이다. 사무엘상 4~7장을 읽는 동안, 만나는 장면 하나하나를, 동네의 흔한 넷플릭스 코즈믹 호러 시리즈로 각색해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어떤가? 좀 그럴듯하지 않은가? 모르겠으면 말구.

Posted by 엽토군
:

어진 씨 교회 다녀? 난 어진 씨 보면 그 엔트로피라고 해야 하나? 그 차분한 느낌이 하나도 없고 막 부산스러워서 안 그런 줄 알았어. 사실 나도 교회 다니거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출석만 하는 건데, 목사님 말씀 들어 보면 다 결국 하나야. 익명화(anonymized)되는 거야. 자아를 죽이고, 내려놓고, 그분 말씀만 잘 순종하고 그러라는 거지. 살면서 뭐 선택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 근데 그걸 내가 하나하나 선택할 때마다 그게 다 짐이 된다 이거야. 그걸 다 내려놓으라 이거지. 요즘 우리 목사님이 거기에 꽂혀 계셔서 다 그 얘기거든.

위와 같이 황당한 얘기를 회사 회식자리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듣게 되어서, 그때 바로 얘기하면 술주정으로 들을까 봐 일부러 안 했던 이야기를 좀 적어놓으려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그거 순 불교 가르침 같은데요?" 정도로 퉁쳐 비비고 지나갔던 것인데 그걸 좀 길게 쓸 생각이다.


1.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아무도 해달란 적 없던 익명화를 요구하는가?

그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요약과 그 용어는, 나도 해석된 것을 전해 받아 들은 바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그 "목사님"이 정말로 '익명화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멘?' 운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가 설교를 구경하고 계신 분이 '가만히 들어 보니 결국 그 소리더라'라고 한다면, 그건 대상에 대한 전반적·전인적인 요약으로서 충분히 유효하다 할 정황이 있다 할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요약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이게 과연 기독교적 가치인가? 아니오!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시다. 근거 성구가 한둘이 아니다. 마태를 보고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심지어 이것은 우연한 인간적 습관이 아니고 오히려 이유가 있어서 나오는 본보기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버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더러 게바라고 부르는 식으로) 이름을 더 주시면 주셨지.

복음서 역시 (사실은 그리고 성경 전체가) 사람의 신원 파악(identification)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성경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누가 누군지 각각 무엇을 했는지 그 명부를 치사하다시피 세세하게 남겨 전하고 있다. 열두 지파, 열두 제자, 바울이 로마서 끝에서 안부를 물은 자매 형제들의 이름, 아니면 누가 누구의 자손 누구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구약이 지긋지긋하게 지키던 연표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연표를 여기 또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기독교는 익명화를 요구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내 전화번호와 금융기관이 서로 그러하듯이, 익명화를 요구하는 그 어떤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피싱이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그 "말씀"들은 뭘 말하고 있었기에, 좍 걸러 듣고 요약한 엑기스가 "익명화"란 말인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황망하고 아찔하다.

그건 아마도, 무리와 제자들 보고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에 근거하고 있는 얘기이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를 영어 성경들은 하나같이 'deny yourself'라고 번역해 놨는데, deny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관계'를 정정할 때,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때 쓰는 동사라고 한다. 따라서 deny oneself는 이를테면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여러분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면 당신은 뭔데요? 목사입니까? 선지자입니까?' 같은 질문을 들으면 그때는 등에 지워진 십자가를 보여주며 '나는 그저 예수님 따르는 사람올시다' 대답하라는 것, 그게 제자로의 부르심의 총체이다.

더도 덜도 아니라는 점, 이 이상도 이하도 요구하신 적 없음에 주목하자.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을 "자기 존재를 지우고 몰개성하게 군중 속으로 숨도록 하고"로 읽는다면, 이는 어떤 경우에도 오독이거나 비약이다. 논리는 간단한데, 'deny oneself'에 개성을 버리라든가 군중 속에 숨으라거나 눈에 띄지 않게 남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라거나 하는 의미는 내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등종교의 공통 요건 중 하나인 '자기부정'은 절망적 상태의 자아상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의미할 뿐이지, 무슨 실천적인 의미에서도 익명성에의 추구 등을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시 의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대체 누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의미에서의 '익명화된 교인'을 말하고 생각하게 하는가?

잠시 후에 적겠지만, 이건 교회라는 시스템이 원하는 한 마리 양에 관한 이야기일 뿐 제자도와는 일체 하등 아무 상관없다.

2. 뭘 내려놓고 집어들고 하는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뻘소리인가?

이 단락은 일단 결론부터 적자면, 그 "목사님"의 설교는 제자도에서의 자기 부정과 일생 여정에서의 행동 강령을 아무렇게나 짬뽕해 놓음으로써 세속적 종교 생활을 수요하는 다수 대중의 기대를 만족하고 통속적 종교관을 유지함으로써 그 청중을 호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들으나마나한 좋은 말씀 매주 똑같이 약간씩 바꿔서 들려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결론이다.

어떻게 그렇게 감히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어도 보지 않고 함부로 막 품평하느냐고? "자아를 내려놓" 운운하며 각종 관념을 유행어 하나로 묶어 팔아 기어코 기억까지 시키는 걸 보면 필시 그러하다.

이쯤에서 좀 솔직해져야겠는데, "내려놓음"은 처음에는 안타깝게 오독되었고, '더 내려놓음'에 와서는 악랄하게 영합을 한 아이디어라는 게 내 일관된 생각이다. 규장에서 "내려놓음"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한창 경건한 신학생 모드였고, 그래서 그 책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뭘 정말로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가 내려놓겠습니다"는 우선 모순이며 결국 오만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내려놓으라" 하시는 것은, 그게 뭐든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추구해도 좋은 유일한 것은 주님뿐임을 깨우쳐 주시려는 뜻이지, 그거만 딱 내려놓으면 무슨 우는 아이 젖 주듯이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 같은 거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려놓음은, 그리고 "더 내려놓음"은,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를 매우 강하게 암시한다. 그건 겉으로만 건강하고 속으로는 너무나 달콤해 물러 터지는 이야기다.

"권리 포기"라는 용어조차도 이런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비슷하게 취약하고 불안하다. 분명 원래는 피조물의 피조물됨을 상기시킬 목적이었던 이 아이디어들은, 착한 일에 대한 댓가를 바라는 우리의 "세상적" 도덕 관념에 멋대로 근거하여, 더 좋은 뭔가를 위해 잠깐의 힘든 시절을 겪자는 얘기로 소비되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이 집에 가다 말고 여러분의 교통카드를 내려놓는다(혹은 교통카드 이용 권리를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이유가 '오늘 내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서'라고 하자. 이게 어떻게 은혜로운 사건인가? 그냥 대책 없는 충동이지. 하지만 우리는 몇 분 잠깐 기도하고 나와서는 그간의 사업상 결정 일체를 뒤집고 수많은 타인의 계획을 엎으며 뭔가를 했더니 더 큰 "은혜"와 "감사 제목"을 주셨다는 간증을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어코 인지부조화가 오고 말았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버렸다는 그것이 사실 단 한 번도 그들의 것이었던 적은 없는데.

심지어 번뇌를 내려놓고 해방되라는 소리는 아주 스토아철학적인 것이어서 대다수 고등 종교의 관념을 꿰뚫는 한 가지 테마이기도 한 바, 내려놓으라는 말은, 돌려쓰면 쓸수록 공허하고 납작한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런 썰이 있었지 않은가? 성폭행당한 기억을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버드 나온 스님한테 물어봤더니 그 번뇌도 버려라 운운했다던. 이것은 아주 놀랍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개소리인데, 왜냐하면 자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종교철학적 관념은 필연적으로 일체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번뇌 탈출이라는 테마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무 쉽거든.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 안에서는 배고픔도 사회문제도 트라우마도 다 그저 공이 된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그냥 그러려고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프로테스탄트이며, 기독교는 인간의 자아상보다는 그걸 포함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삼위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다. 하지만 당장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안락, 현실로부터의 적당한 도피와 허황된 자아상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들에게 '내려놓기'는 위대한 깨달음의 경지였고 그래서 그토록 유행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고통이 없는 상태이고,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은 그걸 위한 액면상의 종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진짜로 말을 꺼내 볼 생각인데, 바로 그 액면상의 형식적 종교를 공급하는 자들이야말로, 이러한 통속적 비대칭적 소시민적 종교인들을 양성해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은 확신범들이라는 생각이다.

3. 누가 누구더러 무슨 근거로 누구 좋으라고 다 내려놔라 자기를 버려라 운운하는가?

물론 권면과 동기부여의 차원에서 비유적으로 일컬어 깨우치는 말이라면 내려놓으라니 자기를 버리라니 하는 말의 효용이 1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효용, 불경제, 자기모순이 이와 같이 명확한데도 그걸 매주 실질적으로 똑같이 반복하는 설법자들, 설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이치란 대체 무엇일까?

간단하다. 삯꾼 목자에게도 양떼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네 것을 내려놓으라', '너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 되어 세계 만방 사람들과 영생할 것이다' 같은 말을, 그 은혜롭고 위대한 맥락에서 썩둑 들어내어 그 문자들 그대로만 되풀이 들려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과연 "아! 나는 부르심 받은 제자이지만 내가 제자된 것조차도 나의 노력이 아니고 값없는 하나님 은혜이구나! 이 놀라운 역설이 주는 감격으로 삶을 승화해야지!" 하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건 극소수 적극적인 신앙인들이 누리는 행운이다. 일요일 오전 11시 반부터 12시 정도까지만 말씀 구경을 하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냥 문자 그대로 들린다. '아 나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 자신을 그런 의미에서 부정해야겠네. 천국도 그냥 여기처럼 익명의 착한 존재로 살면 되는 곳인가 보다.'

심지어 그들은 행정적, 구조적으로도 철저하게 익명화되며 그 댓가로 생활에 어떤 위협이나 변혁도 가져오지 않는 소비적 종교 생활을 보장받는다. 관람객, 양떼 속 양이 되는 것이다.

대다수 교회 의자는 어느 자리에 누가 앉든 말든 상관없는 배치로 되어 있고, 교회 건축의 요체는 모든 청중이 모여 집중하는 단 하나의 점이 어디냐와 그 대중이 얼마나 빠르게 입퇴장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르르 몰려와 정해진 타이밍에 할렐루야 아멘 하고 지하주차장에서 쏟아져 나와 집으로 흩어지는 경험은,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갔다 오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그 한두 시간 동안 시청하는 내용만 적당히 괜찮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윤리적인 생각으로 기분을 전환하다 오는 주말 여가생활이 되고 만다. 흔히들 상투조로 "예배는 드리는 거지 보는 거 아닙니다" 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등장인물이 "우리 예배를 드리십시다? 아멘?" 하면 관객이 "아멘!" 외치는 게 규칙이라면, 그게 동네 오타쿠들의 "라이브 뷰잉"이지 무슨 예배냐는 말이다.

이걸 유지하려면 뭘 해야 할까? 뭘 하면 안 된다. 매주 매년 대동소이하게, 사실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주말 여가생활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인 사람들이 있다. 그 존재는 필연적이다. 여가 생활의 형식을 띠며 개인적 심신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속적 종교란 본질적으로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service라는 영단어가 실제로 이런 맥락의 '예배'를 의미하겠는가?) 윤리도덕적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해 소비자 고객에게 공급하고 그 댓가로 프로젝트 추진 기금 등을 합법적으로 모금 받으며 대중의 멸렬한 현실로부터 의식적으로 동떨어질 권리를 얻는 이들은,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더 받고 덜 받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한 가지 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참 좋다" 하는 얘기는 계속 들으면서 "목사님 그 말씀은 좀 부담된다" 하는 말은 가급적 안 듣도록 할 것.

자아를 죽이라느니 다 내려놓으라느니 하는 얘기들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용되는 화제들이다. 영양학적으로는 불균형하고 결과적으로는 교활한 것이어서, 이렇게 많이 팔면 안 되는데도 말이다.

앞서 살펴본 바 자기를 익명화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실제 가르침이 아닌데도 발신되거나 잘못 수신되는데,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게 실은 궁극적으로 '내려놓기',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기 주제에 느슨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며, 그 주제는 이미 고찰하였듯이 자아의 아파테이아 상태에 관심이 있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 대중의 수요와 욕망을 정확히 지시하므로 유행처럼 공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생산의 다른 한 견인축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종교를 소비할 청중을 유지하기 위한 서비스로서의 종교 기획인 것이다. 이미 자아가 없는 신도들은 누구도 두드러질 수 없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닌 건물에 모여 자아 없이 살라는 텅 빈 가르침을 듣는데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너무나 깊게 와닿는다. 그 좋았던 경험은 다시 다음 주에 그 건물에 모일 빌미를 만들어 주고, 그 건물의 유지비는 헌금함에 착실히 쌓인다.

이래도 그 목사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그건 정말 당신의 문제다.


4. 대체 기독교란 정확히 어떤 기독교길래 이렇게 야단 법석인가?

기독교는 내려놓음이니 몰개성한 인간이니 하는 것의 정반대 대척점에 서는 신앙이다. 굳이 말하자면 (익명화라기보다는) 자기를 '그리스도를 본받은 구체적인 무엇인가'로 철저히 개변시키자는 믿음, 그리고 그걸 위해 (내려놓는다기보다는) 자기를 세상에 '내어준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해도 좋은 행위는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은 믿고 긍정하고 그대로 한다. 자기를 철저한 자기나 타인으로 만들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지만, 자기를 이도저도 아닌 군중 속 소비자로 만들겠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 손에 다른 게 쥐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면서 손을 펴는 게 기독교일지언정 다른 뭔가가 쥐어지길 기다리며 손을 벌리고 있는 건 도대체 기독교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로병사 번뇌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려고 사람을 입고 오셨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별 수를 다 쓰시다가, 막판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걸 들어서 떼어 나눠주며 그러셨거든. 너네들 이게 내 몸이다 치고, 피다 치고, 다 먹어. 다 마셔. 그거 아냐, 이게 내일 내가 할 일이야. 난 죽으러 간다. 난 죽어서 내 몸 내 피를 너네한테,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나눠주려고 나눠줄 것이다. 그니까 절대로 이거 잊지 마 알았어? 그런 부탁을 하신 분이란 말이다. 이게 내가 아는 기독교다. 그건 정말이지 그 전체가 예수님의 일생처럼 절절하고 인간적이며 드라마틱하고,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건 뭐 대체 얼마나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이름 없는 군중 모아다 놓고 은혜가 어떠니 만군의 여호와가 어떠니 꽃밭에 무지개 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만연해 있다면... 다같이 광야로 뛰어나가 메뚜기에 석청이라도 먹고 살아야 할 판이다.


PS. 다 적고 나서 생각이 났는데 이런 거 말고도 유행하는 설교 레파토리들이 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씩 이런 식으로 좀 뜯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은혜, 믿음, 감사 정도? 이런 것들은 이제 예수님 장사 지낸 무덤보다 더 공허해져 버렸는데 주제별로 어떻게 드러내야 제일 효과적일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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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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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히브리어라는 언어 자체에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분들, 히브리 문화 연구자 여러분과 학계의 성과를, 최대한의 성의로서 존중하고 있다. 이 글은 누구와도 면전에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여 작성해 공개하는 서면상의 사적 입장 표명이다.


1-1. 히브리어를 공부하면 유익이 있다는 충고나 제언들을 아주 가끔씩 접한다. 온라인 광고 배너에서, “[펌]좋은묵상글” 같은 출처 불명의 좋은 말들에서, 주변 신앙인들의 지나가는 말로, SNS 영상으로, 출판사 홍보로.

1-2. 그럴까?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정확히는, 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 배우는 것인데 뭐 어떤가? 심지어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언어를 직접 배워서, 그 참뜻을 새기며 읽을 수 있게 된다는데.

1-3. 조금 더 알아보고 조금 냉정해져서 조금 위에서 둘러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정확히는, 해로울 여지가 있다. 내가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현재 고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1-4. 핵심적인 의문은, 왜 한국인이 히브리어를, 특히 고전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느냐는 점이며, 그게 과연 특정 외국어에 의한 효용을 추구하는 일인지, 과연 그 효용이 있기는 한지, 다른 부정적 부작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하는 점들에 있어서 그렇다.


2-1. 먼저, 외국어 학습 자체의 차원에서. “유익이 있”다고 선전되는, 그래서 면학이 권고되는 대상으로서의 히브리어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압도적인 대다수의 경우 고전 히브리어다.

2-2. 히브리어는 엄밀히 나누어서 옛날 성서 시대에나 사용되던 고대의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의 2가지로 구분되고, 오늘날 실존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 히브리어를 읽고 쓴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심지어 이런 기초적 객관 사실관계조차 모르고 히브리어를 덥석 권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3. 이것은 언어 학습 동기 부여의 차원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이두향찰을 공부하는 꼴인데, 이런 이치의 학습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권고하는 속뜻이란 무엇인가? 실상은 적나라하다. “성경 작성에 사용된 문자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두와 향찰을 공부하는 이유가 거지반 삼국 시대의 글을 읽기 위함에 다름아니듯이.

2-4.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라는 것은, 오늘날 그 외국어를 쓰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주체들과 소통하겠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는 지금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 언어는 그것을 배우는 누군가에 의해 확산 및 확장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 작용 하에 전수되리라고 기대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 공부란 본디 히브리 문화권을 이해하고 히브리어 구사자들과 소통하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편이 건전하다 할 것이다.

2-5. 2-3과 2-4를 종합하여, 나에게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게, 이러한 사회적 상호 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확산될 뿐인 일련의 지식/정보/논리 체계에 지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2-3에서 제기한 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것의 실상은 구약성서라는 문서를 ‘나름의 기호 체계를 도입해 해석’한다는 독립적이고 단일한 목적을 가질 뿐, 지금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며 그 세계에 대해서는 그 흥미를 일절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2-6. 2-5에서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증명이 있다. 히브리어를 공부한다는, 혹은 공부하라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들 중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어 구사자, 셈족 문화 등에까지 관심을 확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성지순례”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 수준으로, 이마저도 해당 문화에 대한 교류의 차원이 아니라, 본인들이 주고받은 학술적 내용의 지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견학의 일환인 경우가 태반이다.

2-7. 이것은 내게 일반적인 외국어 공부 행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주 특수한 학술적 교습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3-1. 이 학술 교습의 논리는 극히 간명하다. 구약성서는 절대 다수가 고전 히브리어로 정리되어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본뜻을 읽고 싶다면 고전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 없다. 이 교습을 권면하는 일부가 심지어 “기득권이 어려운 히브리어에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온 역사”니 “누구나 공평하게 배워서 해석” 운운을 내세우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3-2.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서의 본뜻이란 문자에의 착념이며 그 완벽한 해독 따위에서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필자와 제1독자를 포함한 집필 시점의 총체적 맥락을 감안하여 경건하고 성심 있는 자세로 그 문의(文義)를 탐구할 때 드러난다. 이는 그 이치가 사실상 대다수 학자가 고전(古典)을 탐구할 때의 일과 진배없다.

3-3. 글뜻을 읽기 위해 글[文字言語] 자체를 배우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소위 “글로 인하여 글뜻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라든가 “글이야말로 글뜻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글을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 글뜻을 다 알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선동과 호도(糊塗)에 다름아니다.

3-4. 3-3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집필 과정에서 그 요점보다 그 요점을 기술하기 위해 동원한 문자언어의 엄밀성에 더 치중한 일이 없다. 이는 항간의 이치에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둘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전승 과정에서 글과 글뜻의 이격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전승된 일이 없다. 그럴 바에는, 글을 베껴서 전승해 보아야 오해만 더 키울 것이 분명하므로 글 자체를 없애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어떤 지혜 전승들이 암송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데는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한다.)

3-5. 3-4에 의하여 3-3을 강화하면 다음과 같게 된다. 즉, 그것이 고전인 한은, 그 고전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 고전을 작성한 고대 언어를 모두가 정말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절실한 까닭이란 없다. 필요한 것은 고전에 통달한 현대 전문 학자들의 적절하고 체계화된 번역과 주해와 교훈일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그 누구도 결코 완전히는 알 수 없는 옛 성현들의 당대 말씨를 샅샅이 새기는 따위의 언어학적 재간일 리는 없다.

3-6. 3-5에 덧붙이자면, 히브리어 강습자들은 이를테면 히브리어에서 “눈[目]”이 무엇을 뜻하니, “머리”의 어원과 여러 뜻이 무엇이니, 첫번째 두번째 알파벳이 어떤 어감을 갖느니 따위를 대단히 진지하게 강의한다고 한다. 구약성서와 같이 방대하고 장황한 고전을 이런 수작으로 읽는데, 그 결말이 “창세기 1장 2절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이 숨겨져 계시” 운운 기상천외하고 자기중심적인 과잉해석으로 귀착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는지.

3-6. 구약성서를 고전으로 간주하는 한, 3-2와 3-5에 의하여, 3-1에서 소개한 (고전) 히브리어 강습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속된말로 짧게 요약하면, 그렇게까지 빡세게 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 어느 부분도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4-1. 구약성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고전 히브리어 강습을 두둔하는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바 또 하나의 논거란, 아무튼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정도라면 성서를 탐독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데는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4-2. 개신교 내에는 세대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대체로 신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예언과 계시들을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보다는 해독의 대상으로서의 명제로써 간주하고, 그렇게 성경을 체계화했을 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세대(들)” 개념을 현실상의 타임라인에 대입하려 하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지 창조로부터 인류 역사 최종 종료 시점까지의 모든 기간을 대략 7세대로 구분한다고 하며, 이 중 후반부 세대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서 ‘유태인(혈통 위주의 유대인 사회)의 집단 회심과 (지리적 의미에서 이스라엘로의) 회귀’를 중요하게 여긴다.

4-3. 만약 당신이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신구약 성경은 그 요점이 더 중요하며, 예언과 계시를 모든 실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묵시라고 인정하고, 어떤 세대에서 다른 어떤 세대로 역사가 이행하는 일은 없으며, 또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민족의 지구상 특정 위치로의 귀환 따위가 정말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유태인에게 그다지 각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유태인, 즉 히브리 문화권과 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4. 개신교 내에는 또한 신사도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각종 이적과 기사가, 대체로는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 문자적으로,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은 특히 방언과 예언이라는 두 가지의 특별한 신적 능력(“은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간구하는데, 여기서의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지구상 특정 언어문화권에서 유효하게 통용 가능한 실제 외국어를 의미한다.

4-5. 만약 당신이 신사도주의자가 아니라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사도행전상의 이적과 기사는 교회 공동체 건설 최초 단계에서 특수하게 발생한 것이며, 오늘날의 일상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방언이며 예언 등의 은사에 관심을 가질 각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방언과 예언, 특히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의 방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6. 4-3과 4-5를 염두에 두고 4-1의 논거에서 말하는 바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재고하라. 이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관점인가? 그것은 모든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단지 신학적 난제를 규명하는 차원의 “새로운” 관점인가, 아니면 교회 전체가 동의하기는 어려운 특정 입장들의 관심에 복무하여 그 입장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사되고 편집된 일련의 이해 체계로서의 관점일 가능성이 있는가?

4-7. 4-6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이다. 요컨대 히브리어를 배운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회심이나 성경 언어 방언 등에 대한 엄한 관심과 상관 관계가 없기 어렵다는 말이다.


5-1. 마지막으로 내가 믿는 바를 조금 고백하고 끝맺고자 한다. 이는 히브리어 공부를 권하는 이들의 성심을 야멸차게 모독하지 않기 위함이다.

5-2. 만일 하나님이 고전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그는 고전 히브리어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로도, 한국말로도, 에스페란토어로도, 그 어떤 의미 기호 전달 체계로도 말씀하실 수 있다. 애초에 신이신 하나님께서 동물인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가해하며 초월적인 사건인 관계로, 그 사건이 일어나는 한, 그때의 수단이며 매체가 무엇이냐 따위의 문제는 철저히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이 되는 까닭이다.

5-3. 만일 구약성서가 고전 히브리어로 전승되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신적 질서와 계획 안에서 완전히 필연적으로 혹은 완전히 우연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비유컨대, 이는 인간이 어떤 프로그램을 구현함에 있어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는가와 그 이치가 꼭 같다고 할 수 있다.

5-4. 하나님이 성서를 주셨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읽으라고 주셨을 턱은 없는 까닭에, 하나님은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각자가 이해해야 할 수준까지 성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일체의 여건과 방안을 이미 강구하여 주셨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라도.

5-5. 만약 당신이 5-2, 5-3, 5-4에 찬동할 수 있다면, 나뿐 아니라 당신 역시, 구약성서의 은혜와 신비를 내 삶에서 깨달아 알기 위해 특별히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는지의 근심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999-1. 이 글은 사실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지만, 김우현 PD와 그 주변 “동역자”들의 성지순례니 원어성경이니 히브리어 공부니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누구든지 또한 좀더 많이들 찾아 읽으시길 바라는 바다.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정말이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심지어 일상에서 쓸모도 거의 없다. 차라리 수능 제2외국어에 등재돼 있는 아랍어 같은 걸 배우는 것이, 소위 이스라엘 회복 선교라는 것에는 더 도움이 된다.
999-2. "'니크다'라는 이름의 모음 기호는 존재하고 있으나 이 기호는 일반적인 경우 생략되며, 외래어 표기나 성서 등의 중요한 글에서 매우 정확히 표기할 필요가 있는 경우나, 히브리어 초급 교과서에서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경우 정도에나 쓰인다."
999-3. 근거 없는 사설이라서 본문에는 안 적었지만, 내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오늘날 히브리어란 사실상 WASP-이스라엘 군사패권의 지지자들을 집결하는 시오니즘의 국제언어로 복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비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칭 남은 자들이라는 비주류 유사신학 강도사들이 유튜브 영상 찍을 때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군이 저 무시무시한 대테러 대량 살상 무기들 이름 지을 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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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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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떻게 살고 있느냐면 주중에는 매일 오전에 어느 유학원에 출근해서 홈페이지 관리하는 일을 하고, 끝나고 돌아와서는 조금 쉰 다음에 Lucy Liu라는 식당의 디시워셔로 일한다. 이 식당의 근무표(roster)가 좀 대중이 없어서 일요일 저녁에도 근무가 거의 항상 들어가는데, 그러면 나는 일요일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무도 시키지 않은 RWBY Chibi 2기 자막을 치고 박스힐 한빛교회 성가대를 한 다음 식당으로 가 일을 하고 콜라와 잔반을 좀 챙겨서 집에 가는 것이다. 보통 1주일에 4~5일 디시워셔 일이 있는데, 그런 날은 보통 아침 8시~9시에 일어나고 밤 1시~2시에 잔다.

디시워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식기들이 다양하고 무겁고 세척기의 물이 뜨겁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다.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몸이 힘들 때면 내 머릿속에서는 뭔가 랜덤한 게 재생이 된다. 보통은 옛날에 봤던 재미난 것들이고, 그래서 그걸로 버틴다. 아무튼 그래서 지지난 주쯤, 아마도 Lucy Liu 출근 19일차인가 18일차에 식당에 출근해서 일을 좀 하다가 살짝 한가해질 때쯤 원래 매일 해야 하는 위층 창고 정리를 하려고 배운 대로 걸레통에 물 받고 세제 풀고 몽당빗자루를 쥐고 계단을 올라 아무도 없는 식자재 창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쓸고 있었는데, 뭔가가 떠올랐고, 몸이 그걸 입 밖으로 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몸이 그걸 한 박자도 쉬지 않고 외는 동안 머리는 벙쪘다. 너 뭐하냐? 지금 요한복음 1장 14절을 암송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하필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떠올려? 청소하러 왔으면 청소에나 집중할 것이지... 그러다가 문득 머리가 그 말씀을 잠깐 다시 생각해 본 모양이다. 그때는 움직이던 손발도 잠시 1초 정도 멈추고 허공을 보아야 했다. 이 말씀에 대해 내가 그 순간 묵상한, 여태껏 와서 처음으로 깨달은 바는 이것이다.

와 그거 진짜 피곤하셨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다니? 태초부터 “말씀”이셨던 분이 어느 날부터 육신을 입고 살게 되면 세상에 그 얼마나 피곤할까? 생전 느낄 필요가 없었던 배고픔, 지침, 더위와 추위, 똥오줌 마려움과 더러움을 느끼셨어야 할 테고 그걸 또 지극히 평범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아버지 따라서 목수일 하고, 언제 독립할 거냐고 잔소리 듣다가, 광야에 나가서 40일 금식을 하고, 매일같이 언덕바치며 고깃배 갑판에서 목청 높여 설교하고, 병자들 고치고, 한입거리도 안 되는 하찮은 율법쟁이들과 굳이 싸우고, 허구헌날 누가 크네 작네 다투기 바쁜 제자들 붙잡고 먹이고 재우며 비유 풀어 가르치고,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신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새벽마다 일어나 따로 기도까지 하셔야 했을 것 같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면 말이다. 불교가 말하는 도일체 고액이란 사실은 인간성에 육체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공통 진리에 대한 서술이며 따라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참고가 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오밤중 회당에서의 날치기 구형은, 다음날 아침 빌라도 앞에서의 선고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끝내 못박혀 매달리는 순간은, 아, 도대체 얼마나 끔찍하게 피곤한 일이었을까.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부를 수 있는 분이 “내 마음이 피곤하여 죽게 되었”다고 애걸해야 하는 그런 피곤함은, 꽤 피곤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피곤을, 죽음을, 육체성 일체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감당하시고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 신앙이 참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실로 인간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피곤하고 지치며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실존의 양태이지, 그 무슨 미신적 신앙으로 도망하여 잊거나 피상적 일상을 이용해 외면할 특이상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피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 필요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느라 느끼는 감정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 이성에게 살고 병들고 죽는 일은 그저 다 피곤한 일이다. 이성은 불멸할 것만 같은데 이 빌어먹을 육체 때문에 자야 하고 아파야 하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니다. 한데 불교는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 탈자아의 승리를 말하고, 힌두교는 엉뚱하게 인간 관점에서 설계된 계급을 내세우며, 이슬람은 오직 알라의 위대함에만 의탁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어느 것도 아닌, 오히려 인간성의 기초로서의 육체성을 완전히 수용하는 부활의 믿음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오직 신이고 이성(logos)이기만 하신 그분께서 우리처럼 낮고 힘들고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셔서, 정말로 우리처럼 돌아다니고 일하고 고생하고 죽으셨으며, 그것으로 모든 율법 조항을 갈음해 버리시고,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첫 번째 부활자가 되어 주셨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자 요한이 ‘도대체 내가 누구와 뭘 하며 뭘 본 것인가’를 한평생 곱씹은 끝에 내려 준 답이었으며, 알고 보니 그분의 성육신(incarnation)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기쁜 소식,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 기상천외한 은혜였던 것이다.

말씀이 굳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피곤하게 거하여 주셨으매 우리가 그 영광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더라.

내가 디시워셔 잡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힘든 만큼에 대한 보수가 적정해서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딱 그 수준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쨌든 일이 끝난다는 점이 가장 좋다. 지금껏 해도 해도 안 끝나는 가늘고 긴 “트랙”들의 연쇄에 치여 살아 와서 그런지 몰라도, 하다 보면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살아야 말이지’ 싶어진다. 접시가 막 밀려들어오는 걸 보고 있으면 아 올 게 왔구나 하고 막막해지면서도, 시계 볼 시간에 미친 듯이 물 뿌려서 팔레트에 올리고 세척기 돌려서 잽싸게 닦아 제자리에 갖다놓다 보면 결국은 모두 다 끝난다. 적어도, 아무도 안 들어오는 사이트에 아무도 안 누르는 배너를 유치하겠답시고 영업을 빙자한 구걸 전화와 메일을 돌리며 “앉아서 돈 버는” 헛꿈을 안 깨게 도와주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싶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까. 한가할 때 잠깐 광야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사역 정리 좀 하고, 어쨌든 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좀 풀릴 테니까 다시 공생애 사역 잘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유월절이 되어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움직이는 낌새를 보며 아, 바빠지겠구나, 이제 어떡하지, 하던 대로 하면 되나 하는 막막함을 느끼고, 십자가 위의 육체가 사망하는 시점에 와서는 아, 이 일이 드디어 끝났네,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러신 것일까.

그러셨을 것 같다. 그건 무슨 어마어마하게 신성하고 진중하며 엄숙한 장면들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육신이 되신 말씀이 — 육신을 입고 살며 어딘가에 쪼그려 앉아 빗자루질을 하는 우리처럼 — 고생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그런 차원의 장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말씀이신 그분이 ‘죽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었을 것이며, 그전까지 디시워셔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머릿속에 재생해본 적이 없는 그 말씀을 내 머리는, 내 영혼은 왜 하필 그 자리에서 토해내야 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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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사실은 전혀 안) 사소한 계기가 있어서 문득 깨닫는 것 하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그것은 어쩌면, 이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을 떠나는 가장 큰 규모의 휴가, 그러니까 월차(月次)도 연차(年次)도 못 따라오는 엄청난 기간의 명차(평생에 한 번꼴의) 휴가인 것은 아닐까?

출애굽기의 모세와 그 백성들은 구원 언약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받는다. 그들은 무려 430여 년에 걸쳐 누적된 피로에 지쳐 있었고, 바캉스(?) 장소는 방금 막 가나안으로 정해졌으며, 그 땅 소유자의 초대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찾아가서, 휴가를 쓰겠다는 형식의 요구를 한다. 그러니 돌아오는 답이 알기 쉽게 의미심장하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출5:17)

일하기 싫으니까 제사를 드리러 간다? “히브리 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그들은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그 섭리 안에서의 복락과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므로, 적어도 그들은, 일하다 죽으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일하다 죽기를 원하는 인간이 있기는 한가? ‘지금이야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휴가도 제대로 못 쓰고 있지만, 기회만 되면 언제고 때려치우고 남은 휴가 몽땅 털어서 떠나버리겠다’ 벼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기 위해 산다. 야훼의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 세계관을, 나는 지지하는 바다.

그런 의미에서 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더 생각해 보자. 쉬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휴가를 내기 위해서는, 앞의 출애굽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피곤해야 하고, 쉼으로의 초대가 필요하며, 갈 곳이 있어야 한다. 피곤하지 않은 쉼이란 그냥 노는 것이고, 갈 곳 없는 휴가란 방황이며, 허가나 권한 없는 휴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초대가 필요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20:8-11)

그런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몸의 부활과 영생과 구원과 천국으로의 초대 티켓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생 힘써 일하다 어느 날 죽는 것이, 그것 그대로 휴가가 된다. 피곤한 삶이 있고, 복음의 초대가 있고,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직속상관께서 한 번 쓰라고 하시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일평생에 한 번뿐인 휴가로서 성립한다.

사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직까지도 2개월에 한 번씩은 죽음이 두려워서 잠을 설치는 새벽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렇다. 사도신경에서 유일하게 자신 없는 대목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부분이니까. 난 내가 관에 들어가 누워 영겁을 보낼 생각만 하면 머리털이 죄다 곤두선다. 이쯤 되면 유년기의 심리적 외상이 의심될 법도 한데, 원인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전부터 그렇게도 가고 싶던 어떤 행사가 있어 갖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그 입장 티켓을 확보하니까 딱 그제서야 “아 이 기간에 중요하게 할 일 있다” 깨닫고 주저앉고 보니, 어쩐지 이런 생각이 뒤를 잇는다. 이번이야 이 일이 있으니 못 가지만, 나 천당 가는 그날에는 제아무리 모진 세상이라도 “일해라 절해라” 하지 못하고 별수없이 날 주님 곁으로 보내주겠지? 그땐 정말 다음주 스케줄이고 월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서 누리면 되겠지?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이론적으로나마, 죽음이 덜 무서워지는 밤이다. 우선은 오늘 밤새 해 주기로 한 일감을 좀 처리하겠다. 이 한 세상 살면서는 정말 빡세게 주님 나라 일을 하고, 휴가는 잘 아껴놨다가, 명차휴가로 한번에 몰아 딱 쓰고, 깔끔하게 집에 가야겠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빌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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