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설교를 흔히 '말씀 선포'라고도 부른다. '교리를 설파하다'라는 의미에선 설교란 말을 쓸 수도 있지만, 그 교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누군가 그런 말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이 말씀 선포가 '설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말로 잔뜩 채워진 시간이긴 한데 그게 정말 '교리'인지 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단 말이다.
굳이 인간적인 클레임(?!)을 말해보자면 한도 없다. 우선 사소한 실수가 자꾸 나온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라는 그 유명한 말씀이 '잠언'에 있지 않느냐고, 어떤 유명한 간사님이, 무심결에, '말씀 선포' 시간에 말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여기저기에 세운 높이 60규빗짜리 금신상들이 요새 높이로는 '300미터'나 된다고, 어떤 '담임목사님'이, 대예배 시간에 말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까지만 인용하고 '어리석은 자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잘라먹고, 이게 우리 미션스쿨의 교훈이라고 가르치는, 어떤 교장이 있다. 사소한 말실수는 왜 나오는가? 철저한 탐독과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설교자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실은 모르는 거라고 했다(고전8:2). 3만 절이 넘는 큰 책을 무지렁 백성이 어떻게 다 외우겠는가? 그래서 수시로 검색하고 무시로 중요 성구가 몇 장 몇 절인지 적어 되풀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없다. 그냥 '그런 게 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선포해 버린다. 인간적으로, 어떤 시사쟁점에 대해서조차 '그런 말이 있던 거 같아서' 선포했다간 독단으로 치부된다.
또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발언들이 은근히 많다. 특히 사단에 관해 말할 때 그렇다. 성경에선 사단에 대해 그리 많이 말하고 있지 않다. 집안 원수에 대해 그 집 안에선 말하기를 꺼리듯이. 그런데도 최근 강대상을 보면 사단과 마귀에 대해 장황하고 확고하게 얘기한다. 사단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마귀는 우리가 어찌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고... 솔직히 말해 보자. 하나, 이런 이야기를 성경(정경)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본 일이 있는가? 둘, 그런 얘기 굳이 설교 때 들으면 재미있나? 셋, 악한 세력의 이야기 자주 들어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신비 세계를 알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에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자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적어도 '말씀 선포' 시간에만큼은 '말씀'에 준거해야 한다는 거다.
예화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꺼내는 것도 사실 문제다. 극단적인 예가 조엘 오스틴이다. 그의 책을 국내에 수입한 출판사는 두란노다. 그런데 '긍정의 힘'에는 '(창1:1)' 같은 장절 표기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시피하다. 그런데도 공공연히 신앙서적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굳이 오스틴 목사(?)를 들지 않더라도, 요즈음 설교 추세는, 좀 심하게 말해서, 순서가 이렇다. "오늘 말씀은..." 이라면서 어딜 읽는다.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물론 그 말씀이라는 것관 좀 별개고 약간 관련 있다. 그러고서 마무리 기도로 말씀과 별 관련 없이 기도하고 마친다. 그런데도 은혜스럽다. 그런데도 오늘 '말씀'이 '좋았다'는 칭찬을 점심 식사 때 공공연히 한다. 그 좋았다는 말씀은 무슨 책 몇 장 몇 절인가? 관련된 말씀은 무엇인가? 전후 맥락은 어떠한가? 어렵거나 특이한 표현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졌는가? 그리고 그 해석은 진리인가? 이 정도는 해야 '말씀' 선포 아닌가?
선포란 무엇인가? 세상에 뭘 알린다는 의미의 한자어는 매우 많지만 특히 '선포'는 세계적 규모 혹은 영향력을 지닌 무엇을 알릴 때 주로 사용한다. 그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것이고, 절대적이고, 따라서 아주 분명한 근거와 기반 아래에서 떳떳하고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 그게 선포다.
그런데 어째서 요새 이러한 요상한 풍토가 일어나서, 자칫하면 설교자의 개인적 견해로 볼 수도 있는 걸 '은혜로운 말씀'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내 생각엔 교회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니라 '현대인'이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응, 현대인. 이성과 합리의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까지 온 그들. 그들이 원하는 건 주의 뜻이 아니라 합리주의적 사고를 넘어선 어떤 해결밖에 더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선 관심없고 그 진리에서 내 행복, 내 집안 평화, 내 재테크를 뽑아낼 궁리만 한다. 회개와 사죄는 엄연히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 하나이고 '선포'해야 마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강남 동네에서 이 주제는 잘 선포되지 않는다. 간간히 '복 받는 비결'의 하나로 잠깐 스쳐 지나가다시피할 뿐이다. 도대체 교회에서 하는 겉치레 회개와 속세에서 하는 '울고 웃고 요법'과 뭐가 다른가? 말해 보라. 뭐가 달라야 하나? 말씀이 필요하다. 왜 그러한지 '성경'에 근거가 없고서는 말씀 선포가 못 된다. 설교는 더더욱 안 된다. 성경에 없는 걸 교리라고 내미는 게 이단이고 오컬트(occultism)지 달리 뭔가?
위선자들의 같잖은 설교에 관한, 예수님도 언급한 적 있는, 이사야의 대언이 생각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사29:13, 새번역)
지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사실 우리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나? 조엘 오스틴은 '하나님을 한정하지 않는' 신앙을 말한다. 좋다 이거다. 개인적 영성 체험, 사회적 모순과 변화 속에서 선견자, 제사장, 천국 사람, 제자, 용사로서의 삶, 예수님께서도 이런저런 비유로 말해주셨듯이 자기가 겪고 느낀 바를 표현해보는 온갖 저작과 이야기, 전부 다 좋다 이거다. 근데 그건 선포는 아니다. 그래선 설교는 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한다고 했으면 잡담을 하지 말고 선포를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너한테 내가 설교를 늘어놓겠다고 솔직히 말하라!
P.s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청년부 평신도입니다. 전 예수전도단이고 이번 MC 후불금 6만5천 원을 못 내서 지금 고민중입니다. 전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조건 매도하고 욕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절 보지 말아주십시오. 하도 답답해서 쓸데없이 긴 글 한 번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