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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Prologue


정말 끔찍한 일은 말이지, 하고 그가 새벽 세 시 오 분 경의 무거운 침묵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나는 우선 그의 들어올리는 목소리와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열 손가락을 관전만 하고 있으려고 했다. 정말 끔찍한 일은 내일 일어나지 않을 거야. 잠시 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앗차, 나도 그만 그 침묵의 링 안으로 난입했다. 그럼 언제 일어난다는 건데, 내일 일은 별로 안 끔찍하단 소리냐, 무슨 말을 그렇게 모호하게 해, 나도 모르게 너무 자질구레하게 되물어친 다음에 들려오는 컴퓨터 본체 냉각 팬 소리는, 그래서 무슨 야유처럼 내 말이 끝나고서부터 38평형의 텅 빈 사무실에 붕붕 메아리친다. 탭댄스가 잠시 멈추었다.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정규방송이 중단된다.

내일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하지만 지금껏 날 곁에서 지켜본 너만은 내일 그렇게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끔찍한 일은 내일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아닐 거니까. 내일 너무 놀라거나 끔찍해하지 마.

그럼 정말 끔찍한 일이란 건 뭔데.

음, 그가 잠시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수천 년 전 제 나라 임금의 죄상과 차후 멸망상을 예언하러 가는 선지자가 그렇게 했을 법한 억양과 분위기로 조심스럽게 표현의 2차 시기를 시도했다.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어느 공항의 모든 교통편과 운항 일정이 전부 끊겼어. 사람들은 갈 길이 멀고 바쁘지만 아무 방도가 없으니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그런데, 이게 중요한데, 공항 측에서 자꾸 무슨 표를 발급해. 어떨 때는 공짜로, 어떨 때는 돈 있는 몇 사람에 한해서. 잠시 후 비행기가 도착하면 제일 먼저 타고 나가게 해 주겠다, 버스가 오면 순서대로 타고 나가라, 소포나 중요한 걸 따로 보낼 수 있게 해 주겠다 운운하면서 말이지. 밖은 위험하니까 절대 나가지 말고 교통편이 올 때까지 무조건 실내에 있으라면서 심심하지 않게 음악이나 DVD도 틀어 주고 말이지. 그런데 이 공항의 유리창엔 온통 선팅이 되어 있단 말야. 왜냐면 밖은 이미, 음, 공항 주변이 싸그리 원폭을 맞고 무슨 호수 한가운데 인공섬처럼 고립되어 버렸거든. 그리고 공항에 직원은 없어. 모든 건 방송과 기계에게 맡겨 놓고 폭격 직전에 참모부터 말단까지 모두 대피했으니까. 사람들은 내일이면, 모레면, 두 시간 되면 다시 원래대로 일정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별 의미도 없는 순번표 수십 장을 지갑 속에 꽁꽁 숨겨놓고 웅크리고 있는데, 공항은 그 반경 5km 근방이 민간 절대 통제 구역으로 영구 지정되는 거야. 자, 그가 속사포같이 쏟아내던 등골 서린 괴담을 중단하고 날 보았다. 그가 고쳐 쓴 안경이 번득이며 내게 물었다. 며칠이 걸릴까, 공항 내 생존자 절멸까지는?

붕, 붕, 냉각 팬 회전하는 소리가, 붕, 붕, 38평형의 텅 빈 사무실에서 수도 없이 메아리쳐 울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로 그 안경을 돌리고, 몇 번의 거액의 주식거래를 대강 마쳐둔 뒤, 마지막으로 몇 개 은행의 개인 계좌 잔액을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USB 메모리를 뽑고 드라이브 포맷 작업을 예약해 두고 일어났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대강 짐작했다.

이제 어떡할 거야?

글쎄, 신문배달을 할까 싶어. 나도 내집마련의 꿈을 좀 이뤄야지, 안 그래?

우리는 웃지 않았다. 그 그가 무슨 작은 종이를 두 장 내밀었다. 무슨 영수증이 한 장, 하와이주 어딘가를 가리키는 주소가 적힌 쪽지가 한 장이었다.

이게 뭐야?

천국으로 가는 주소랑, 그건...

조선일보 구독 신청 영수증을 왜 나한테 줘? 이거 우리 집 주손데?

지옥을 보여준다는 순번표야.

나는 영수증에서 떼지 못하던 나의 시선을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어딘가 대단히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몹시 불쾌해하는, 흡사 지옥 문 앞까지 잠시 순찰을 나간 성 베드로 사도처럼 내게 말했다... 아니 웃어보였다. 드드득, 예약 작업이, 드드드드득, 시작되어, 드드득, C드라이브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군대에서 물려받아 쓰던 노트에 적혀 있던 초고. 김진혁님의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한 문장에 꽂혀 있던 시절에 쓴 것이라 구체적인 시놉은 없고 프롤로그밖에 없다. 이걸 쓸 당시에는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을 뿐인데, 정말 이 그림에 대충 들어맞는 사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뭐라 할 말이 없달까 도리어 창작 의욕이 솟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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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쓸모가 있는 지하철 5호선 노선도가 필요하신 분들은 차라리 네이버 지도다음 지도로 가세요! 여기 올린 노선도는 쓸모가 없는 노선도입니다!


실로 그림 카테고리에 뭐 올리기는 오랜만인데... ㅈㅅ합니다.
업데이트: 네이버 검색에서 괜히 들어와봤다가 실망하시는 분들이 있는 듯해 RSS 갱신차 최신으로 올립니다.


흔히 볼 수 있는 5호선 노선도는 이런 식입니다. 5호선이 T자형으로 뻗어 있고 나머지 노선들은 환승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럼 도대체 저렇게 5호선 밖으로 뻗어나간 나머지 노선들은 어떻게 맞물리는 걸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해서, 아주 잉여로운 프로젝트로, "5호선을 T자형으로 쫙 펴서 먼저 그려 놓고 5호선 위주로 나머지 노선을 그 위에 억지로 왜곡해 그려보자!"라는 기획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꼬박 3시간 걸려서) 실제로 했습니다.


5호선 위주로 보는 서울 (C)2013 by yuptogun.tistory.com130227 제 1.0판입니다. 클릭하시면 1920 사이즈로 보실 수 있을겁니다.


The total length of this line is 52.3 km and it is the 3rd longest fully underground subway line in in the world just behind Guangzhou Metro Line 3 and Beijing Subway Line 10 (see world's longest rapid transit tunnel).

이 노선의 총 길이는 52.3km로, 광저우 3호선과 베이징 10호선에 버금가는 세계 3위 최장 전체 지하 노선이다. [출처]


  1. 이 노선도의 저작권은 엽토군(김어진)에게 있습니다. 무단 도용을 엄금합니다.
  2. 역은 기점들만 표시했습니다. 심지어 노선 번호도 표기하지 않고 나머지 노선 색깔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서울을 5호선 위주로 보는 사람을 위한 지도입니다. 만약 이 노선도를 굳이 활용하겠다고 한다면 '*호선 ~방면으로 환승하는 ~역', '~역과 ~역 사이의 목적지 *역' 하는 식으로 읽는 수밖에 없겠지요. 뭔말인지 모르면 말구
  3. 5호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은 정확도보다 아름다움(?)을 중시하기 위해 (그리고 도저히 다른 노선을 일일이 왜곡시키는 짓은 손과 머리로만은 할 수가 없어서) 역간 거리 비례가 거의 맞지 않습니다. 예컨대 신도림과 대림, 구로와 가산디지털단지 등이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2.0으로 판올림을 하게되면 서울 남서부 저쪽도 어떻게 건드려질라나 근데 엄두가 안ㅋ남ㅋ
  4. 따라서 이 노선도는 거의 실용성이 없고 그냥 서울을 다른 모습으로 보는 목적만 실현한 셈입니다. ㅋ...ㅋㅋ... 나란녀석 못난녀석




원본 파일을 올려둡니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CC라이선스를 따릅니다.


JPG 3537*2464 2MB+ / PDN 6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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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집 변기 몇 개야?

2014. 10. 18. 10:20

집안 변기의 개수가 그 집의 계급이다.


고은 시인은 <지붕>이라는 시에서 "지붕이 그 집의 사주팔자다"라고 읊은 바 있다. "기와만년 기와집은 기와로 지붕을 하고 / 굴피천년 굴피집은 굴피로 지붕 얹고 / 초가삼간 지붕이야 짚으로 지붕 이고" 산다고 말이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던 어머니를 쫓아내다시피해서 헐레벌떡 화장실에 들어가 급한 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미친 것은, 지금 시절은 지붕 말고 집안의 변기 개수가 바로 그 집의 팔자, 못해도 현재 처지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지금 이 나라 대부분의 집은 내부에 화장실이 있고, 세면실과 욕실을 겸한 경우가 많다. 그 개수는 아마도 한 개인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어떤 집에 변기가 하나 달리는가? 뻔하지, 단독주택 월세방이나 연립주택이 그러겠지. 변기가 하나만 있어도 저들끼리 어찌어찌 잘 융통하고 살아갈, 그래서 굳이 변기를 두 개 이상 달아 줄 이유가 없는 생활의 사람들, 피차 일이 많아 집에서 일을 볼 일이 많지 않은 소가족 혹은 1인 가구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테다. 그들은 자기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다른 식구에게 폐가 되는지 어떤지를 항상 주의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종의 시간 배분을 만들어 행동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 한 사람의 볼일 때문에 나머지 모두가 씻지도 못하고 빨래도 못 걷고 큰일도 못 보는 불상사가 생기니까. 요컨대 집안에 변기가 하나인 집은 그렇게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정량의 번잡스러움에 수시로 대응하며 살아간다. 그 빈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것은 정확히 그 집에 무단정차 과태료 통지서(그렇다, 변기가 하나 딸리는 집에 그 집 전용 주차공간이 주어질 리 없지 않나, 그래서 변기가 하나 있는 집은 딱지도 자주 떼는 것이다), 보험료 자동이체 안내 이메일, 최신 휴대폰 무상교체 운운하는 광고 전화 따위가 방문하는 정도의 빈도이다.


변기가 두 개 딸리는 집은 주로 아파트다. 건설 현장에서 숱한 세대를 거쳐 보건대 짐작할 만하다. 현관 근처에 공용 화장실이 크게 있고, 주로 "부모님 방"(으로 쓰라고 건축학적으로 강요하다시피하는 굉장히 직설적인 모양의 방)의 한쪽 구석에 붙박이 옷장처럼 샤워 큐비클과 변기가 같이 놓인 조그마한 화장실이 있다.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명의 큰일 때문에 나머지 모두의 행동이 올스톱되지는 않는다. 대신 그 방의 짜임이, 그 변기의 위치가 그 사람들의 삶을 탁상시계 만들듯이 딱 떨어지게 조립해 놓는다. "부모님들"의 하루 동선은 방, 방에 딸린 화장실, 식탁, 현관, 밖, 다시 현관, 거실 TV 앞, 다시 방으로, 당최 "아이들 방"이나 큰 화장실에 갈 일이 없다. "아이들"도 엄마아빠 방에 들어갈 일이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끔 둘 중 하나가 큰일이 길어질 때나 화장실 일 보러 부모님 방을 잠깐 스쳐 지나가겠지. 분명히 삶은 좀더 윤택하고 여유시간은 조금 더 확보되는데, 그 '거슬림 없음'이 어쩐지 어색하다. 그 어색한 '거슬림 없음'이란, 비유하자면 대형마트에 설치된 무빙워크에 쇼핑카트를 끌고 들어갈 때나, 22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8층에서 잡아 타고 내려갈 때나, 중앙현관에 달린 "세콤"에 터치열쇠를 가져다 대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의 느낌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변기가 세 개 이상 있는 집도 분명히 있고, 집안에 변기가 없는 집도 분명히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변기 세 개 달린 집의 비율과 변기 없는 집의 비율이 한심하리만치 바로 그대로 이 나라의 상위 1%와 하위 10%의 비율에 일치하리라고 예상된다는 것이다. 변기 세 개 달린 집에서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대다수 우리와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아니 집안 식구가 세 명인데 그럼 당연히 변기도 세 개여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집안에 변기가 두 개밖에 없으면 애 일 보고 마누라(바깥양반) 일 볼 때 자기는 어떡하냐며. 아니 그럼 경비원을 경비라고 부르지 뭐라 부르냐며, 택배 좀 받고 청소 좀 하는 게 뭐 대수라고 지가 전태일도 아니고 분신 주접을 떠냐며. 그들은 똥 누러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변기가 확보돼 있으니까. 그들이 무슨 논리적이고 팩트에 근거한 안전하고 상식적인 냉정함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들 집안의 변기 덕분이다. 당장 변기 두어 개 막혀 보라지. 일이 너무 급해서 아주 가끔 집 밖 공중화장실로 나가 봤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볼썽사나운 "똥 누러 갈 때"의 추태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 추태는, 자기 집 안에 변기가 없는 집에서는,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화장실은 항상 공용이며, 그들의 집은 항상 어디 셋방이며, 그들이 화장실에 있을 때 변소 문을 노크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옆집 사람이다.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첫째 귀찮음이며, 둘째 불편함이며, 셋째 잡념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 잡념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이내 끊기고 만다. 옥외변소의 겨울은 똥 냄새가 얼어 있고, 옥외변소의 여름은 똥 냄새가 끓고 있는 그런 곳인데, 그런 곳을 자기 화장실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불평도 사치가 되니까. 그저 빨리 일 보고 물 내리고 닦고 나가기만을 바라게 되는 그런 장소를 자기 집 화장실로 쓰다 보면, 자연히 꼼꼼히 씻는 것도 부단히 가꾸는 것도 좀체로 몸에 익지 않는다. 그냥 화장실은 일 보는 곳, 집은 잠 자는 곳 따위가 되면 오히려 그런 골방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TV나 컴퓨터, PC방 따위에 몰두하기 십상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변기가 집안에 없는 집이, 이 나라에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집안에 변기가 어떻게 없을 수가 있는지 그러고도 사람이 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오늘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숱한 사람들의 발과 얼굴과 머리끝을 둘러보며 생각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선가는 씻고 일 보고 나온단 말이지.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화장실이 있다. 거기에 앉았을 때 가장 안심하고 큰일을 볼 수 있는 자기만의 변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집안에 몇 개나 구비돼 있는가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정확히 계급적이다. 화장실이 집안에 하나 있던 가족은 집안에 화장실 없는 집으로는 두 번 다시 이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가족이 집안에 화장실 세 개 딸린 집으로 이사 갈 일이 생기면, 그들은 그것을 좋은 기회로 보지 분수에 지나친 것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개수의 변기를 쓰는 사람들끼리 공중의 공간에서 마주칠 때, 그들은 이따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곤 한다. 이것은 양극화하게 될까? 적어도 <지붕> 말미에서 시인이 밝힌 사태 하나만은 한동안 그대로일 것으로 보인다. 그게 지붕 때문이든 변기 때문이든, 주거 조건에 최소한의 기본 평등이 없는 한에서는.


어느 하늘놈 막아주나

어느 귀신년놈 막아주나

김어구네 오막살이 그뿐이 아니구나

동고티 김기백이네도

쇠정리 관선이네도

헌 지붕 노래기깨나 떨어진다

한동네 한식구라는 말

두레라는 말

말짱 헛것이여 물감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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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좀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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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밑바닥에서 짓뭉개져 나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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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1. 11:48

지난 금요일 예비군 3년차 동미참 훈련 사흗날 오후 3시 반쯤이었을까, "전원 조기퇴소라매?" "집에 좀 가자!" 툴툴거리는 예비군 아저씨들 틈에 끼어 야전 교육장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도중에 실수로 폰을 떨궜다. 군용 시멘트는 특별히 더 단단한 것인지 정말 어이없게 앞면 유리가 바스락 깨졌다. 조금 난감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살나다시피한 폰을 그냥저냥 쓴다지만,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사적이고 활용도 높은 액정 화면이 이렇게 금이 가 있어서는 곤란해서, 그리고 돈이 마침 얼마간 있어서, 오늘 당장 수리 가능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찾다가 생각해 보니 강동역과 천호역 사이에 애플 공인서비스센터가 있는 것이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안 받더니 두 번째에는 받았다. "7시까지 하는 것 맞나요?" "일단 내방은 상관없으신데 부품 재고가 있어야 수리를 해 드려요." 시세를 알아 보니 공인대리점 수리비는 22만원 정도라고 한다. 한숨을 푹 쉬고 시간 계산을 했다. 여기서 강변역 가는 빨간 버스를 타고 강동까지 가는 데 1시간 반, 수리하는 데 최대 1시간, 그러고서 강동에서 학원까지 출근하는 데 30분. 넉넉잡고 7시에 간다고 봐야겠구나.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첫째 날부터 발뒤꿈치에 물집을 잔뜩 만들어 준 "A급 전투화"를 아예 집에 던져두고 운동화만 신고 왔기에, 위병소에서 대여받은 예비군용 전투화를 가는 길에 반납하고 그곳에 숨겨둔 우산을 챙겨 나왔다. 내가 우산을 숨긴 곳에는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라이트노벨 몇 권이 먼저 숨겨져 있었다. 15분 가량 내가 타야 할 광역버스를 기다려 탑승하고, 강동에 내려, 애플 공인서비스센터로 가려다가, 그 건물 그 공인대리점 바로 아래층에 사설 수리업체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로 경로를 바꿨다. 도착하니 6시가 조금 못 되었다. 그 사람은 12만원을 부르고는 유리를 갈아끼우는가 싶더니 전화 테스트를 몇 번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니 딴 게 아니고요, 전화를 받으면 화면이 어두워져야 되거든요?" 다른 유리를 갈아끼우고 또 테스트를 자꾸 하길래, 치명적인 거 아니면 상관없으니 그냥 놔두라 하고 대금을 결제했다. 놀랍게도 이곳은 계좌이체로도 요금을 받더라. 방금 수리받은 폰으로 기분 좋게 이체를 실행해 주었고, 20분쯤 걸려서 그곳을 나왔다.

학원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늦어져서 정말로 7시에 도착했다. 학원 선생이 오늘 내게 준 긴급업무는 방학 특강용 교재로 쓸 기존 어법 교재 한 권의 특정 구간을 통째로 베끼는 것이었다. 왜 OCR 스캔을 안 해 주지,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3시간 가량 보람차게 타이핑을 했다. 한 5/7쯤 했을까, 지금껏 그래 왔듯이 Ctrl+S를 눌러 저장을 하려고 했는데 "오류가 있어 종료해야 합니다" 창이 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보내지 않음"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파일을 열었는데, "문서를 읽는 데 오류가 발생했습니다"만 뜨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퇴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복구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헛짓한 걸로 쳐야 하나 싶었는데, 선생에게 다음메일로 보내 놓은 첨부파일을 미리보기로 열었더니 웬걸 멀쩡하게 보이는 것이다. 선생이 불러서 본관으로 가 보니 "야 내가 네이버 오피스로 열어보니까 되는데 너 이거 몰랐지, 좀 똑바로 좀 해라" 생색을 내는 것이다. 예 예 하고 뒤돌아서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원래 생각했던 퇴근 시간보다 30분 늦게 퇴근하는 김에, 엄마가 투잡을 뛰고 있는 홈플러스에나 들러 같이 귀가할까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그 금요일 밤에 학원에서 홈플러스로 걸어가는데, 사흘 연속 예비군, 이틀 연속 긴급작업, 발뒤꿈치의 물집과 빌려 신은 전투화, 엄마의 투잡 알바, 바스러지는 아이폰 강화유리를 생각하며,


문득, '성실(誠實, faithfulness)'을 생각했다.


인류가 적어도 근대 초기까지는 전승해 왔던 '가치'들 중 현대와 탈근대를 거치면서 거지반 화석화된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착한 사람"이라는 가치가 그렇고 친절이 그렇고 성실함이라는 가치가 그렇다. 전통 사회에서 성실함이란 무엇인가? 매일 아침 닭 홰치는 소리에 일어나 어제 하던 대로 밭 갈고 나무하고 모이 주고 그물 내리다가 밥때 되면 참 먹고 한잠 자고 다시 해 떨어질 때까지 밭 갈고 나무하고 우리 치우고 그물 걷어 집에 돌아와 저녁 먹고 자는 것, 꾀부리지 않고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주어진 삶과 그 조건을 몸으로 받아내며 자기 몫을 해내는 모습이 성실함의 형태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그런 종류의 성실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매일 각자 조금도 겹치지 않는 빽빽한 스케줄이 있고, 그걸 소화시켜 줄 각종 탈것들이 교통 체증이라는 변수 속에서 매번 힘겹게 돌아다닌다. 퇴근해서 장 보는 사람들 때문에 마트는 11시까지 영업을 하며, 다음 주까지 만들어야 하는 교재 작업이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쏟아진다. 나의 의지나 예상과 상관없이 여객선과 열차가 어처구니없이 전복되고 환율은 떨어지고 대통령은 불의의 죽음을 맞는다. 예비군 갔다 온 사람을 출근시켜야 하는 긴급 상황이 생기고, 상사는 기껏 열심히 일한 사람의 속도 모르고 "아무개 씨는 왜 일을 꼭 그 따위로 해요?" 면박을 주고, 휴대폰 액정은 말도 안 되게 순순히 깨어진다.

상황이 이러니 현대인들은 조금 덜 성실해도 될 방편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훈련부대 지휘관은 맨몸으로 입소하는 예비군을 위한 전투복 세트를 위병소에 구비하도록 지시하고, 요즘 나오는 웬만한 문서 작성 프로그램은 백업 체계와 클라우드 저장소를 거의 기본 사양으로 세팅해 준다. 공인서비스센터 밑에는 약속이라도 된 듯 사설 수리업체가 들어서 있고, 대다수 편의점이 부의(賻儀) 봉투와 붓펜과 ATM을 구비한 지는 오래되었고, 비료와 조미료와 화장품은 더 교묘해져서 누가 어떻게 쓰더라도 그럭저럭 괜찮게 되었다. 딱히 '코리안 타임' 같은 게 아닌데도 그냥 정시보다 약간 늦는 것이 용서되는 분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심지어 이제는 극장 영화조차도 제 시간에 칼같이 상영되지 않는다. 특강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지급받는 몇백 쪽의 교재와 몇백 문제의 답안지는 사실 OCR 스캔과 "복사-붙여넣기"로 며칠 만에 양산된 것이며, 부서진 기계를 위한 어떤 초거대기업의 정책은 해당 제품 수리 보수가 아니라 '묻지마 교환'이 되었다. 어느 정도의 돈과 어느 정도의 요령이 있으면 성실성이 상당 수준 보장되는 세상, 그래서 사실상 '성실'이 흉내만 내어지고 있는 세상, '전화 연결시 화면 밝기 자동조정' 같은 걸 반복 검사하는 성실함이 어쩐지 '뻘하다고' 느껴지는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엄마는 힘들 텐데 왜 왔어, 하면서도 반갑게 날 다른 알바 아주머니들에게 소개하며 좋아하셨다. 같이 장을 보다가 초밥과 삼각김밥이 떨이로 나왔길래 샀다. "김밥은 왜?" "나 내일 9시 반까지 양화진 가야 하니까 이건 내일 아침으로 먹으려고요." 집에 돌아와 단둘이 간장에 (아마도 기계로 개별 포장되었을) 초밥을 찍어먹으며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엄마도 회사에서 괜한 이유로 혼난다는 푸념을 하셨다. "일을 하다 보면 거 좀 늦을 수도 있고 약간씩 틀릴 수도 있잖아, 그걸 가지고 그렇게 생트집을 잡고 그 난리야." "그니까요, 사실 그게, 어떤 의미에서, 진짜 성실함은 그런 거인지도 모르는 거거든, 다들 참 너무 무심해" 주고받고 있는데 마침 어떤 초밥의 비닐 포장을 벗겼더니 생선살 밑의 밥이 세 동강으로 와르르 바스러지길래 벌컥 성을 냈다. "옘병 뭔 놈의 초밥이 이렇게 불성실해??" 엄마와 나는 그 꼴을 보고 웃었다. 각자가 한 주 내내 성실하려고 애썼던 어느 금요일 밤 열한 시 반이어서 그랬는지, 나와 엄마는 생각보다 오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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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붕괴

2014. 4. 23. 16:40

※ 텍스트로 스압이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wordpress로 홈페이지를 짜고 있다. 이걸 좀 빨리 만들어야 할 사정이 생겨서, 코덱스 페이지를 번갯불에 구워먹을 기세로 테마 고치고 플러그인 추가하고 세팅이며 수정을 하고 있다. 새로 플러그인을 활성화할 때마다, php 파일들을 열고 수정하고 새로고침해 볼 때마다 항상 조금씩 떨리지만 의외로 별 문제가 없어 신기해하고 있다. 하긴 그렇게 빠르고 간단하게 때깔 나는 웹 출판을 실현하고 싶어서 만든 게 워드프레스였다고 하니까. 지금은 CSS도 나름 꽤 세련되게 만들어 놓았고, 모바일 뷰는 전체를 한방에 만들어주는 플러그인이 있어서 일거에 해결했다. 이제 오픈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어제 저녁까지는 그랬다.


상황은 이랬다. 원래 가지고 있던 무료호스팅 폴더에 워드프레스 설치 및 커스터마이징 작업을 다 해 놓았고, 막판에 도메인 문제 때문에 새로 무료호스팅을 하나 더 받아서 거기로 이주시켜야 할 상황이 되었다. 밤 11시부터 4시까지 꼬박 다섯 시간 동안 잘 모르는 영어 참조 사이트며 별로 없는 기술 가지고 끙끙 앓아 가면서 잘은 모르지만 따라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간신히, DB와 테마와 플러그인을 유지하면서 이러구러 옮겨 놓았다. 자고 일어나 한두 시간 더 만지니 도메인도 원활하게 적용되고 드디어 내가 원했던 사이트의 90% 정도가 완성되어서(어떤 기능들은 심지어 개선되기도 했다!), 아 이제 다 됐구나 내심 기뻐했다.

그러다가 알바 출근 시간이 되어서 출근을 했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타이핑과 문서 제작 작업을 하다가 잠시 자율 휴식 시간에 숨이나 돌릴 생각으로 /wp-admin을 입력했다. 로그인하고, 관리자 화면에서 플러그인 에디터로 들어가, '모바일뷰의 카테고리별 보기 페이지에 카테고리 설명문만 추가하고 다시 일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wp-content 폴더 속의 어떤 php 아래쪽에 이런 코드를 하나 넣었다. 코덱스에서 생각없이 긁은 것에 괄호 안만 고쳐 붙여넣으면서 생각했다. 분명 여기일 거야. 이거 집어넣으면 카테고리 설명문이 딱 뜨겠지? 빨리 이거 적용시키고 남는 시간에 딴 거 하고 놀아야지. 어디 보자...


<?php echo category_description( %s ); ?>


그리고 새로고침한 화면은 순백 그 자체였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F12 눌러 확인한 태그라인은 가관이었다. body 태그 이하의 아무것도 로드되지 않은 상태였다. 데스크톱 뷰도, 모바일뷰도 통째로 코드가 꼬여 '폭파해체'된 것이었다.

문제가 거기서 끝이면 다행이었을 거다. 다시 관리자 화면의 에디터를 열고 방금 넣었던 걸 빼면 되니까! 근데 그게 되지 않았다. 에디터는 고사하고 관리자 화면 자체가 들어가지지 않았다. 아뿔싸, 방금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wp-admin 쪽 코드까지 뒤섞어 버렸구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최악의 경우 어느 스텝까지 뒤로 돌아가서 다시 와야 하지? 모바일뷰 플러그인 자체를 지우고 새로 세팅해야 하나? 일단 기존 설치본은 유지되고 있으니까 무료호스팅 전체를 지우고 다시 해야 하나?
나는 알바하는 곳 사무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고요와 정적 속에서, 지난 몇 주간의 고생의 결과가 백색 화면으로 리턴되는 패닉을 겪고 있었다. 정말 흔치 않게 '멘탈의 붕괴'를 제대로 경험했다. 무의미한 질문이 종결 조건 없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 코드가 몇 바이트나 된다고 사이트 구조 전체를 비틀어 무너뜨리는가? 이렇게 짧고 간단한 코드의 어디가 잘못될 수가 있다는 거지? 근데 내가 그걸 정확히 어디에 붙여넣었더라?


이성의 두꺼비집이 다시 올라갈 즈음 마지막 질문이 실낱 같은 희망이 되었다. 그래! 아무튼 일단 그 빌어먹을 코드만 다시 뽑아내면 수습된다! 그런데 지금 원래 사용하던 플러그인 에디터는 전혀 가용하지 않은데, 어떡해야 하나? FTP? 이 컴퓨터에는 FTP 프로그램이 없다. 지금 그걸 깔 시간도 없고 정신적 여유도 없다. 웹 FTP? 쓰고 있던 호스팅 사이트의 웹 FTP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net2ftp.com에 들어갔지만 이렇게 잘 알려진 곳의 AJAX가 원활할 리 없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결국 아주 예전에 쓰던 무명 호스팅 사이트의 웹 FTP 신세를 다시 져야 했다. 그마저도 대책 없이 느렸다. 그리고 폴더 안에 웬 놈의 php 파일은 또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아까는 그렇게 쉽고 명확하게 찾을 수 있었던 라인이 왜 지금은 눈에 불을 켜도 안 보이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멘탈이 웹사이트 body와 함께 일시에 와르르 무너진 상태라, 게다가 다른 동료나 상사 어른들이 드나들기 시작할 즈음이 되자 침착할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있을 땐 크롬 내리고 hwp 올려서 작업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양편에 다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가서 몇 시간이나 더 이걸 붙잡고 있어야 수습이 될지 생각하니 울고 싶어졌다. 내가 뭘 한 거지? 역시 일할 때 딴짓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람? 이제 어떡하지? 이거 수습할 수 있긴 할까? 최악의 경우엔 뭘 해야 하지?


병크를 터뜨린 지 꼬박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고친 소스가 fdn_archieve 함수에 연관된다는 걸 알았고, root-function.php를 열어서 그 저주스러운 코드를 삭제해 원상복구 시킬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거짓말처럼, 그전까지 작업했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냥 안심하지만은 못했다. 여전히 나는 경악을 그만둘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 때문에, 그리고 이 참사가 보여준 이 나라의 붕괴상 때문에 그랬다.


굳이 하인리히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마어마한 재변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뭔가 잘못되어 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대참사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나 경위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했더라면 이 정도의 난리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제 내가 몇 주간 만들어 온 사이트를 무너뜨려 본 뒤 오늘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사이트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플러그인 제작자의 의도와 그의 설계 구조를 정확히 모른 채 모양만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서 슬쩍 가져다 쓰려고 하던 그 시점, 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잘 모른 채 온갖 플러그인을 깔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그 시점, 플러그인의 소스 코드 자체를 내 입맛대로 고치겠다는 심정으로 플러그인 에디터 플러그인을 깔던 그 시점, 테마 CSS의 미디어쿼리쪽이 성가시다는 이유로 그 부분 전체를 주석 처리해 놓은 그 시점에서, 이미 사이트는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여지없이 가라앉을 배의 객실에 구명조끼만 입고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시점에서, 선원들이 해경과의 교신을 무시한 시점에서, 노후된 여객선에 층을 하나 더 얹은 시점에서, 선령이 지날 대로 지나 일본에서 버리는 배를 싸다고 좋다고 사서 인천에서 제주까지 돌린 시점에서, 그런 짓을 해도 되도록 규제를 풀어줄 대통령이 뽑힌 시점에서, 세월호는 침몰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무지, 무관심, 무성의, 바쁘다는 핑계와 당장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성과주의 그리고 별 문제가 없으면 그걸로 괜찮다는 무사안일주의의 산물이다. 절대 한 개발자나 한 선장이나 한 대통령이나 한 교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몇 사람에 대한 징벌로 끝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내가 소스 코드만 몇 메가바이트가 되는 웹사이트 하나를 어떻게 무너뜨렸는가 말이다. 이 기능? 잘 모르겠으니까 생략하고 걍 주석 처리해야지. 이 마진에 이 패딩? 내 취향 아니야. 없던 코드? 넣어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냐? 구조적 안정성? 내일모레가 오픈하기로 약속한 날인데 지금 꼭 그런 거 신경 쓰고 있어야 해?


워드프레스를 쓰기 전에는 더 심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 웹 개발 취향은 <!doctype html>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장과 개발자 도구만 가지고 하드코딩하는 쪽이다. 코드에 색깔 넣어주는 메모장 유틸도 안 쓰는 편이다. 나보고 CSS를 짜라고 하면 엘리먼트 하나에 라인 하나라는 원칙을 적용하고 {} 괄호 안에서 엔터나 탭은 절대로 안 친다. 문과인 내 눈에는 괄호 앞의 요소 이름이 주어로 보이고 괄호 안이 서술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CSS를 다뤄 본 사람이라면 의심할 것이다. "그렇게 짜놓으면 나중에 수정하면서 소스 찾아볼 때 골치 아프지 않나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내가 짠 코드는 내가 원했던 그림 그대로 돌아가거나, 적어도 어디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끗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남들이 '미려하게' 짜 놓은 훌륭한 소스들을 보면, 분명히 최대한 알기 쉽고 논리 정연하게 짠 것일 텐데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고유하고 일관된 논리 구조의 문제이다. 명제를 추가할 때마다 출력 가능해지는 논리값이 제곱해서 증가하는 게 논리 체계이다. IFELSE 함수 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이 div를 먼저 입력하느냐 저 div를 먼저 입력하느냐에 따라 요소의 부모와 자식이 뒤바뀌는 게 웹 개발이지 않은가. 진짜로 실력 있는 웹 개발자는 CSS 트릭으로 인테리어 장난을 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 접속하든, 확대 축소를 어떻게 하든, 어떤 글꼴이 기본글꼴이 되든, 나중에 무엇을 넣거나 빼더라도 일체의 논리값이 갑자기 붕괴하지 않게 하는 기술, 거기에 진짜 웹 개발자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소스 코드는 어떤가? 일관된 논리대로 작성되기는커녕 그때그때 필요한 요소 붙여넣고 업데이트해서 유지 보수하기 바빴던, 그래서 기트헙에서 포크요청은커녕 레포 업로드하기도 부끄러울 코드임에 틀림없다. 일단 서양에서 추천해 주는 대로 저사양 리버럴리즘 서버를 하나 얻기는 했는데, "일단 사이트를 대박 터뜨려야 할 것 아니냐"라는 미명하에 어설프게 자유게시판 CGI 작성해서 죽어라 돌리고 트래픽 유입은 오는 대로 다 받고, 어디서 신자유 BGM 플레이어 주워다가 정지 불가능한 소스로 때려박고, 파이선인지 뭔지에 제이쿼리인지 뭔지를 접목한 커뮤니티가 유행한다니까 과거 CGI 게시판에 플러그인 갖다 끼우면서 "왜 이거 안 되냐, 우리도 쟤네들처럼 팍팍 돌아가는 것 좀 못 만드냐, 이러니까 랭키 순위가 그 모양이지" 헛소리나 하고, 발견되는 버그는 안 잡고, 허술한 게시판에는 광고 배너만 넘쳐나게 많고, 그러니 올라오는 게시물은 사이트 수준 따라 허접하기 짝이 없는데 운영진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불량유저 차단, 강퇴, '굵은 빨간색 글씨'로 무섭게 번쩍이는 경고 공지 올리기뿐인 이런 역사를 한 50년쯤 지속했으면, 이젠 슬슬 최신 사양 소셜데모크라시 서버 하나 구해서 거기서 잘 돌아간다는 DB 관리툴이며 웹프로그램을 좀 깔아다가 적극적으로 테스트를 해 보고 체계를 세워서 이주할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건 고사하고 최근에 게시판 컬러 테마만 빨간색으로 고친 다음 "새 시대를 맞아 새 색깔로 거듭난 새 사이트입니다"라고 몇주째 공지 팝업을 띄우는 뭐 그런 꼴, 그게 이 나라 꼴 아닌가? 이런 사이트에 뭐가 아쉬워서 누가 접속을 해 준단 말인가? "탈퇴하고 싶다", "이 사이트에서 활동하기 싫다"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게 뭐가 이상한가? 우리는 정녕 우리의 나라가 '다음 카페' 혹은 '싸이월드 클럽'의 전철을 밟기를 원하는가?


경향신문이 꾸준히 밀고 있는 슬로건 "사회계약 다시 쓰자"는 그렇게 이해돼야 한다. 내가 만들고 있는 사이트가 두 번 다시 어제 저녁처럼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선 내가 워드프레스의 파일 연결 구조와 php와 db 돌아가는 원리며 CSS 하나하나까지 철저히 안 상태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형태의 코드로 작성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제 2의 세월호, 제 3의 성수대교, 제 4의 삼풍백화점을 만들지 않으려면 재난 관리 체제부터 하급 말단 공직자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조금의 허술함도 없이 빠릿빠릿해야 할 것이다. 이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을 하려면 체제부터 그 체제를 살아갈 사람 한 명까지 고유하고 일관된 논리에 따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더 큰 건물 한 채 더 짓고 더 큰 행사 더 유치한다고 해서 국가 경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으며, 배 안에 구명정 구명조끼 비치했다고 해서 승객 전원이 비상시에 안전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고, 잘 이해하지도 못한 플러그인 소스를 눈치껏 살금살금 고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위태했던 워드프레스 사이트의 구조 붕괴가 원천 방지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붕괴란 그렇게 필연적이고 느리게, 논리 정연하고 체계적으로 복잡하게 들이닥친다.

더 큰 붕괴는, "더욱 '구조적으로 불가피했고'", "더욱 '무지 무관심 무성의 무사안일에 기인한'" 붕괴일 뿐이다.

더 많은 것이 붕괴하고 있다. 내 웹사이트는 소스 코드 하나 넣었다 뺀 것으로 해결했지만, 세월호 참사는, 이 나라의 "병크"를 완전히 디버그하기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라인을 지우고 빼고 넣고 고쳐야 할까? 까무러칠 것 같다.




우리는 그 엄마가 느낀 절망감을 15년이 지나서야 느끼고 있다. 미처 몰랐다는 듯한 얼굴로, 나와는 무관한 특별한 불행인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이다. 우리는 박근혜씨의 대통령직 하야를 요구한다. 하야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박근혜의 하야는 나의 하야와 병행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며, 나와 내 새끼의 구명보트를 기대하며 이 살인 체제를 외면해온, 그래서 결국 99%에 해당하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을 만들어버린 내 삶으로부터 즉각 하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박근혜는 다른 박근혜로 교대될 뿐이다. 아, 우리는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김규항님)

우리가 만든 것은 물질이 생명을 압도하는 나라였습니다. 사회의 주요한 시스템이 오직 물질적 이익에 의해 움직이고 그 시스템을 정부와 관료, 법령이 뒷받침하는 괴물, 그 괴물에게 우리 아이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몇 몇 희생양을 찾아내고 그들을 엄단하여 사태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재난 시스템을 손질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나라는 기본에 충실한 나라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을 삼는 나라, 성공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나라, 공공의 이익이 사적 이익에 우선하는 나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분들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국가의 모든 자원을 지체 없이 쏟아 부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김상곤님)

이 나라는 그 어디도 망가지지 않았다. 부자부터 가난한 자 까지, 합심하여 전통을 지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에서 세월호 참사까지, 모두 그저 전통이 무사히 지켜지고 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 모든 참극은 성장주의 계획의 파편이며, 그 계획이야 말로 우리가 망가뜨려야 할 대상이다. 선거 때까지 기다리자고? 맙소사, 우리는 이윤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확인하는데 투표가 필요하단 말인가?

절벽으로 질주하는 고속도로를 우회하는 길은 거친 숲길 뿐이다. 생명의 대척점으로 가는 경로에서 과속을 주장하는 이 정권을 제거해야 한다. 그 후로 더 이상은, 이 경로를 폐기하려 하지 않는 그 어떤 정권도 진입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중략) 저 놈들을 당장 쫓아내자!

(청년좌파 공식 입장)

이번 사고가 정파의 문제인가. 이념의 문제인가. 국가 시스템의 근간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국가 시스템의 근간이 뿌리째 허물어져 있으며,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절대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이 문제야말로 여야 가리지 않고 정당이 나서야 하며, 이념과 학문적 입장 가리지 않고 지식인과 전문가 그룹이 발언해야 하는 사안 아닌가. 이번 일을 당하고도 대한민국이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깊은 절망과 냉소주의로 흐를 것이며, 이 나라는 어쩌면 퇴행을 거듭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형태는 남아 있되, 실제로는 망해버린 나라가 된다.

(선대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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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12월 28일 민주노총 총파업 포스터 4개, 故 이남종님 추모 포스터, 페북친구 사진 가지고 만든 visual joke, 그외 그냥 삘받아서 오밤중에 만들다가 잠들어 버린 그림들입니다.

이 블로그에 먼저 올렸어야 했던 것을 SNS에서 먼저 설레발 친 것이 조금 후회됩니다.




#총파업 #포스터 1. 28일 총파업 소식을 듣고 그냥 갑자기 영감이 샘솟아 넷북으로 뚝딱뚝딱 만들고 보니 마침 총파업포스터경진대회 가 자발적으로 열리려 하길래 1등으로 참가했다. 덕분에 트위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RT를 받았다.


#총파업 #포스터 2. '묵과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 무서운 엄포인지도 모른다. 그 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말대꾸를 하고 싶었다.


#총파업 #포스터 3. 이걸 올릴 때쯤 포스터 경진대회는 끝물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평로라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고, 가로로 긴 것 세로로 긴 것만 만들었으니 이번엔 정사각형을 하나 내놓자 싶어서 굳이 하나 더 작업함.


#총파업 #포스터 4. 유머랍시고 써넣으면 RT를 막판 러쉬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거 만든 뒤로 SNS 활동에 회의를 약간 가지게 되었다.


故 이남종 씨가 열사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저 필적을 따면서 느낀 건 어째서인지 굉장히 급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빚이 갚기 싫어서 죽으려던 차에 이렇게 된 거 내 죽음을 가지고 연출이나 해 보자는 심정으로 중도하차 직전 최후의 장면을 기획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든 어떻든 나는 그를 추모하고 싶었다. "우리는 좀더 자연스럽고 비정치적인 이유로 죽을 권리 내지 의무가 있다."


내 아는 페북친구의 셀카를 만진 것. (내 사진이 아니다;;;) 근로장학생 첫 출근 복장이 정장이어야 한다면서 셀카로 그걸 남긴 것인데, 그냥 지나가려다 보니 사진 각도라든가 색감이 여러모로 패션 화보 느낌이었다. 그래서 RGB 레벨 좀 수정하고 아무 브랜드 로고나 갖다넣었다. 좀더 진짜같이 할 수 있었는데, 능력이 없어 이 정도에서 그침 (원래는 WELLDONE을 넣으려고 했다는...)



M for Monarch #1. 롯데슈퍼타워 공사현장에 써 있던 표어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음.


M for Monarch #2. 영어듣기 공부에 여념이 없는 친구들에게 묘한 기분을 심어주고 싶었다.


M for Monarch #3. 이 시리즈의 핵심은 ‘게시되는’ 언어의 전제군주성을 드러내는 데 있음.


M for Monarch #4. 사실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맘에 드신다면 퍼가셔도 좋고 변형 자체제작하셔도 좋아요. 현수막으로 만들어 주시면 ^_^


M for Monarch #5. 나는 이 발언이 순수하게 싫다. 누가 누굴 묵과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M for Monarch #6. 이런 식으로 가끔 SNS에 써먹어도 될거같다.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의 탄생 비화를 알게 된 뒤 그게 만약 한국에서 먼저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서 2분만에 (직장 컴퓨터로!!!) 만들어봄.


아는 형이 제주에서 근황 사진이라고 찍은 것을 좀 만져봄. 소설 쓰러 갔다더니...


게임중독 관련 페이크 공익광고다소 불온한 게임중독 관련 인식 전환 촉구 포스터. 물론 kobaco 로고는 그냥 내가 붙인 것일 뿐이고 이건 절대 실제 공익광고는 아니다. 그냥 퇴근길에 문득 저 카피가 생각나서 만들어봄.




2017 사회적총파업 1 한자버전

2017 사회적총파업 2 영어버전

2017 사회적총파업 3 한국어버전올해도 총파업을 하긴 하는구나 싶기도 했고 싱잉앤츠 캘리그래피도 흥하고 해서 한번 심심풀이로 만들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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