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한 명이 "페이스북에서 하상욱 좀 안 봤으면 좋겠다"라고 올린 걸 보고 나도 최근에 트위터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생겼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래의 글은 그 일치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김에 자판 뽑아 한줄 친 것.
예전엔 트위터를 보면서 사람들의 각종 '취향'과 다양한 생각들, '드립'들과 RT되어 돌아오는 뻘한 것들이 썩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은 갈수록 그 취향이라는 것들이 별로 좋지가 않다.
특히 임근준 aka 이정우, 카라차 등의 타입과 프로필에 "욕트섹트폭트주의"라고 써놓은 타입의 두 부류가 최근에 몹시 싫어진다. (싫은 데 이유가 어딨으랴만 그래도 굳이 설명해 보자면) 전자는 그 고매하신 본인의 잣대가 일말의 겸허함이나 예외 여지조차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후자는 별로 '욕트'도 '섹트'도 '폭트'도 못 되는 주제에 역시나 자기만의 세계에서 혼자만 시끄럽고 혼자만 야단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소통을 할 필요가 있어서 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너무도 적어졌다(아니면 아예 SNS라는 소굴을 떠나기도 한다). 보이느니 온통 자기과시, 자기과잉, 자기과신이다.
우리에겐 역사적으로 순수한 개인이었던 경험도 없지만, 철학적으로 순수한 개인이 될 여지 역시 없다. 데카르트의 근대 자아조차 ergo sum을 도출한 다음에는 다시 조금씩 자기라는 지평 밖의 현실로 걸어 내려왔다. Social Network Service는, 모든 장사가 그렇듯이, 정말로 '소셜 네트워크' 자체를 서비스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 "가능성"을 사고팔 뿐이다). 왜냐? '사회연결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애초에 서비스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동네 반상회 등이기 때문이고, 면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지면이나 화면이나 통화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감각 역시 사회윤리 차원의 거짓이기 때문이다.
SNS 속에서 개인들은 관념상의 개인이 되어 가는 듯하지만, 정작 우리가 확인한 그 개인이란 결국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으면서 다만 어떤 RT, 어떤 like가 저마다 알아서 해석되기를 안일하게 기대하도록 양산된 채 공허한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뿐인, 누구도 아닌 한 명의 누군가일 뿐인지도 모른다. 핵심은 공허함이다. SNS 업데이트의 대부분이 오밤중 자기 방에서 잠옷 차림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좀더 폭로될 필요가 있는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소셜 네트워킹"은, 오밤중에 업로딩되는 그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지, 업로드 후 댓글 알림을 받는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가 RT를 500번 이상 받은 바람에 공약한 대로 콜라로 라면 끓여먹었다는 트윗을 보며 우리는 웃었는데, 어머니 세대는 정색을 하고 물어보셨더랬다. "그게 누구래니? 니 친구야?"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 같이 정색하고 자문했어야 옳았다. 그러게, 이 사람이 누군데 왜 내가 그 사람이 뭘로 뭘 끓이든 말든 상관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왜 그는, 아니 우리는 500번의 리트윗을 원하는가? 우리가 전세계 중의 불특정 다수 500명으로부터 같은 것을 받기를 원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없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하찮은 야망이 HTML5로 변장하고 나타난 것인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즘과 폐쇄성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대상이나 논점에 대해서는 열몇 번의 자기답글 폭트를 날릴 만큼 치를 떨면서도, 어떤 대상이나 논점에 대해서는 역시 하루 온종일 아무 의미도 없는 데이터를 전송할 만큼 한없이 우호적이다. '"최애캐"에 대한 애정'이란 그렇게 방정맞고 휘발적인 것으로 변해 간다. 이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이라고 상상해 볼 때가 있는데, 요즘 트위터 사용자들은 누구를 눈앞에 놓아도 셋 중 하나일 것 같다. 끝없이 말이 많고 온종일 웃는 자, 끝없이 말이 많고 온종일 냉소하는 자, 끝없이 남의 말만 가져다 붙이는 자. 이런 세상을 하루에 몇 시간씩 들여다볼 용의는 없다. 굳이 왜 내가? 오늘 플레이할 게임이 몇 개고 해야 할 일이 몇 개고 벌어야 할 돈이 얼만데.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SNS는 소셜하지도 않고 네트워킹을 통해 더 좋은 공동체나 더 좋은 개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SNS가 증폭한 것은 오프라인에서 제대로 된 개인이 되지 못한 저수준의 자아들이 발광하는 진동폭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므로 SNS와 그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든지 혹은 전혀 잘못 측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몇 년이었지만) 기나긴 '좋아요'의 파티가 끝나고, (원래 그랬듯) 리트윗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날, SNS가 우리 눈에 덮어 두었던 '소통의 허영'이라는 비늘이 떨어지고 만사가 다시 밝게 보이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우리는 당장 그간 가입해 두었던 각종 '리밋계'와 '페이지' 그리고 '친구'와 '팔로워'를 대대적으로 '삭제'하기 시작할 테다. 얼굴, 전화번호, 본명, 그의 진짜 고민 그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알지 않았던, 말하자면 사실 그다지 친구가 아니었던 그들을, 곧 우리들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