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참 많다...
- 군부대 안에 있을 때도 소식을 접해듣고는 아, 이건 봐야 해, 하고 기억만 해뒀다가 나왔는데 개봉이 끝났다는 것 같아 시무룩하고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칭 지식외판원이라는
김PD님이랑 점심 먹을 스케줄이 파토난 차에 희한하게도 CGV에서 재개봉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상영시간도 참 절묘하게 맞아요. 그래서 대신으로 질렀습니다. 그러고 나선 대학로 가서 디맥 테크니카 2를 해보다가 돈만 날리고 어슬렁어슬렁,
모과장님 만나서 짬뽕 먹고 크리스피 먹으면서 중얼중얼. 뭐 요즘 제가 그래요. 작년에 왔던 군바리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90년대 어느 날부터인가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자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는데요, 옛날엔 거기에 붕어가 두 마리 살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이 서로 싸웠답니다. 한 마리는 결국 물 위로 떠올랐지요.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니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고, 결국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고. 지금은 이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전엔 문제가 됐다고 하네요.
- 70년대 어느 날부터인가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깊은 산에 대문바위골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전쟁중에 이 마을에서 쌀 모자라서 보도연맹이란 데 가입하고 쌀 받아간 한 가족이 산으로 도망갔더랍니다. 그랬는데 며칠 뒤에 미군들이 와서는 마을 사람들더러 전쟁이 벌어질 테니 다짜고짜 피난을 가라고 합니다. 뒷산 피난길에 오르려니까 다른 미군들이 와서 뒷산에 짱박혀 있지 말고 나가랍니다. 짐 싸서 나가고 있노라니까 다른 미군들이 와서 트럭 지나가야 하니까 비키라고 합니다. 철길로 비켜서 마냥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다른 미군들이 와서 짐 열어보라고 하고는, 잠시 후에 명령을 받은 미군들이 저 멀리서 대민폭격을 실시합니다. 그거 피해서 바로 옆의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해 있으려니까 밤새도록 무차별 집중 사격을 실시합니다. 산모가 몸 풀고 애를 낳는 마당에. 지금은 이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전엔 문제가 됐다고 하네요. 2005년까지만 해도.
- 명대사는 역시 "모르믄 가서 물으봐, 빨개이들헌티"와 "사람들이 왜 노래를 부르는지 알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건 싸우지 말자고 하는 거여." 아ㅅㅂ 보는내내 촌놈들의 동질감이 느껴져서 웃겨 죽을 뻔하다가... 비참해지더군요. 어쩜 그렇게 다들 컨트리들 한지;;;
- mofac studio가 참여했습니다. 어쩐지 폭격장면에 무게감이 없다 싶더니 CG를 생각보다 많이 넣은 거 같습니다.
- 음악은 별로 안 깔립니다. 대신 김민기의 노래들을 많이 깔아서 그걸로 감동을 전해요.
- 처음 상영하기 직전에 100명의 명단이 나옵니다. 필름 사주기 운동이 이렇게 진행이 되는구나!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 의외로 상영시간은 짧(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많이 나옵니다.
주인공도 엑스트라도 따로 없는 영화. 별로 많지도 않아요.
- 맨 위에 붙인 사진의 장면에서 전 처음부터 다리는 안 보고 하늘 쪽을 보고 있었는데, 아니 웬걸, 저쪽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점점 다가옵니다. 잉 뭐지? 디지털 필름에 에러가 났나? 3D로 그린 고래가 막 다가오고 있지 않겠습니까? 저게 뭐야? 저게 뭐다냐? 그러다가 영화 다 끝날 때쯤에 또 저녁놀 지는 하늘에 고래가 날아다녀요. 저거 또 뭐다냐? 뭐라냐? 인터넷 리뷰들을 보고 아, 그런 거겠구나, 하고 모범답안을 알아 버렸지만, 제가 처음 받은 감상을 적도록 하지요. 하여튼 이 고래는 상투성과 일상성을 깨 보려는 대단히 의도적인 갑툭튀입니다. 이 이야기를 리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적 허구성을, 실제 사건을 차용했을 뿐인 가공의 영화로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런 3D 그림을 보여줌으로서 그 밑의 시간을 실제적 기록으로 느끼도록 해줬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 영화에 작은 연못은 안 나옵니다(대문바위는 나오죠). 이 영화의 배경인 대문바위골과 노근리, 거기가 작은 연못인 거겠죠. 근데 또 원래 수사법에 있어서 별로 연관 없어 보이지만 관련을 지을 수는 있는 어떤 다른 딴 소리를 하는 것도 한 가지 기교이고 보면... 그냥 여러분 생각하시는 게 정답입니다.
- 이 영화가 슬펐던 건 사람들이 다 죽어나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디루 가란 말유?"라고 묻고 있을 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는 것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다는 것이 지독하게 슬펐습니다. 맞아요. 역사는 영화 시나리오 같지 않아서 고통이 한 시대의 막에서 한꺼번에 퇴장하지 않아요.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홀로 서서, 그 뼈가 찢어지는 듯한 기억을 되새기고 살아가지요. 저게 뭐야, 왜 다 안 죽었어, 저 사람들은 왜 안 죽은 거야, 이 씨바 도대체 이 땅의 역사란 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거기서 왈칵 하고 눈물 뿜을 뻔.
- "나서지 말라." 제가 시위 좀 나가볼라치면 울 아부지가 하는 인삿말은 여기서부터 나왔던 모양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영웅은 없습니다.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고 "아 니가 나가봐" 서로 미루기 바쁩니다. 그게 촌놈들이거든요. 도대체 이 세상에선 왜 촌놈이 살질 못합니까? 두 눈 부라리고 비판하든지 아니면 두 눈 부라리고 영합하든지 해야만 좀 먹고살거나 좀 떳떳해질 수 있는 세상. 그냥 촌스럽게 무식하게 살다가는 쌍굴다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총이나 얻어맞는 세상. 씨바.
- 만약에 저였다면 다르게 연출했을 겁니다. 노근리라는 곳을 아무 생각 없이 취재 나간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이 전쟁에 휩쓸려서 노근리 사람들과 함께 죽어나가고 그게 무삭제판으로 공개되었다는 뭐 그런 컨셉의 가짜 다큐처럼 해 봤을 겁니다. 영화가 너무나 다큐멘터리의 관점을 취해요. 상업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요소는 쭉 빼고 CG를 동원해서 꼭 보여줘야 할 것만 보여줍니다. 기록영상의 기능을 하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좀더 '실제 있었던 일의 당시 기록' 같은 느낌이 나도록 했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전쟁의 비극을 아주공갈로 만들 셈이냐고 두드려 맞겠죠. 그래서 포기.
-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반. 나머지 절반은 무성의한 편집과 일관성 없는 그래픽이 깎아먹었습니다. 명배우 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어요. 아무튼 나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이 영화로 기억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