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지역 근혜누나나 회창형 지지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그쪽은 불교 기세가 쎄서 교회가 (단순히 규모의 차원에서) 별로 흥성하지 못한다고 그럽니다. 접때 외할아버지 상치른다고 마산 창원 넘어다니고 있을 때 울 아부지가 해주신 얘기니깐 아마 맞을 겁니다. (울 아부지 다른 주젠 몰라도 종교쪽은 이론부터 듣보잡소문까지 빠삭합니다.)
성당이나 절은 잘 모르것습니다마는 교회는 확실히 아줌마 아저씨들이 씹을 잡담거리가 없어서인지(뭐 다른 모꼬지라면 술이라도 마실 텐데 그것도 거시기하죠잉) 정치 얘길 가끔 하죠. 그래도 뭐 평소 평범한 만18세 대한민국 선거권자들끼리 주고받고 하는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어디까지나 각자의 개인소견이니 이건 암만떠들쳐봐도 문제는 안 됩미다.
문제는 아놔 목사님(진짜루 가끔 장로 아저씨)들이 그것도 설교시간 혹은 뭐 축복기돈지 간구기돈지 할 때, 그 거룩한 시간에 직접적이든 돌려 말하든 그런 얘길 한다는 겁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말입니다, 사람이지 말입니다. 사회적 동물들이시니 정치 얘기 안하고 정치성향 없인 몬사는거 맞아요. 아 근데 그걸 왜 하필 궁극적 원론적으루는 성령님께서 집회를 보시고 계시는 예배 시간에 직간접적으루 발언하시너냐 이겁니다. 고게 문제가 되죠.
왜? 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오는 수요일 일곱시 반에 근처에 성도등록자 200명 이상 되는 아무 교회나 찾아가셔서 기도시간 설교시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진풍경이 보이나...
목사님들이 거룩한 시간에 발언하시는 건 그냥 발언이 아니고 엄연한 설굡니다. 설교. 좀더 겁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고도 불러요 그걸. 웃기지 말라고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정말 거룩한 시간 맞긴 맞아요. 종교 예식이다요. 한창 설교 나가는데 일어나서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라고 하면 안됩니다. 할려면 예배 끝나고서 따로 찾아가 따지면 따질지언정... 나름대로 성직이고 종교집회이기 때문에 함부로 뭐라고를 못 해요. 그 때 발언이라는 거.
문제는,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별 관련 없는 예화(이해를 돕는 삽입된 이야기)를 꺼내시곤, 이어서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정치하고, 경제하고, 문화 하면 얼마나 좋아요, 안그래요? 아멘?" 하면 말이죠,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이 꽤 많은 분들이 "아멘"합니다. 아멘이란 히브리어로 "그렇습니다" 혹은 "그리 될 것입니다"란 뜻임다. 우왓따 살 떨리네요잉.
교회 가서 몸소 견학하기 귀찮으시면 자료화면이라도. 예밴지 성경공부인지 뭐 노래자랑 시간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 만약 예배도 아닌데 다들 이렇게 아멘 구령을 붙이고 있다면 이건 정말 살 떨리는 얘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이거 신앙도 뭣도 아니고 그냥 맹종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막말루, 상식적으로 예배라는 건 신을 불러서 받자와드리는 시간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부정타면 안되지요. 그런데, 신령님,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에서 이명박이 어쩌구 정동영이 어쩌구 소리를 꼭 해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게 신이 하는 말씀이실까요, 그냥 인도자로 서 있는 사람이 생각나서 하는 이야기일까요? 그런 발언을 스리슬쩍 하는 거야말로 눈치도 못채는 사이에 예배를 부정타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 일부는, 중대형 교회들이 그런 경우가 좀더 있는데, 대예배 축도보다 헌금기도 시간에 더 열성인 사람들이 대체로 많아서 복을 열심히 빕니다. 기복 자체가 사람의 감정과 계획과 이기심일 수 있거든요. 근데 이게 곧장 예배로 동기화되어서 어디까지가 사람 말이고 어디까지가 성경 말씀인지 구분이 안 서는 신도분들(심하면 성직자분들 개중에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라는 선포에나 "믿는 신앙인들이 이 세상 정권 잡아서 하나님의 거어루카시고 조오혼귀하신 영광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라는 기복에나 똑같이 다들 아멘 한다는 겁니다. 눈썹이 실룩거리죠잉.
여기까지 안 읽고 내려왔어도 상관없으요. 이제부터 일거주시요.
사실 제가 알기루 최소한 예배시간에 지켜야 할 정치관련 바람직 태도는 이렇게 정리됨미다. 가급적 정치 토픽은 꺼내지 않는다. 특정 이름은 아예 올리지 않는다. 노가리를 깔거면 예배 끝날때까지들 좀 참자. 꺼낼거면 원론적인 얘길 하든지(예: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갈 길을 비추어주시사 세상의 빛과 소금 되게 하시며... 등) 결론을 인위적으로 내지 말고 성경에 근거한 바람직한 의견(예: 공의를 굽게 하는 통치자가 되지 않기를... 등. 미가 3장 9-12절)을 위주로 전개하든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성도란 사람들은 세상 핍박을 견디는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자.
이건 좀 딴얘긴데 원래 사도행전 읽어보면 진짜 눈물 싸고 똥줄 타는 고역의 연속입니다. 원래 세상에 선포하는 기독교란 그래야 하는 법이니라 하고 성경에 써 있지 말입니다. 근데 요새 큰 교회들은 이상하게 되게 돈도 많고 다니기도 편하고 말입니다. 이상하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1907년을 감히 얘기하지 말입니다. 이건 좀 막말이지 말입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 통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분노가 나옵니다. 잊을만 하면 나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줫버리라고 한 분은 무려 예수님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금 낼 건 내란 소립니다. 근데 그 뒤엔 하나님 꺼는 하나님께 바치라시면서 천국에 세금내라고 하십니다. 실제루 예수님께선 이르시길 천국은 금은을 바꾸든지 한 다리 짤르고서든지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창녀, 환자, 어린이, 욕먹는 세리만 골라서 찾아다니셨다죠.
세금이라. 이명박 장로라. 권력이라. 설교라. 복잡미묘한 얘김다. 더 했다간 저 벼락맞겠어요.
1999년 온라인 게임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던 시절의 딴지일보 기사다. 8월 30일, 딴지 연애부 대표기자 겸 비서실장 이드니아 콘체른 작성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는 게임상에서 벌어지는 한국 게이머들의 추태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외국인 게이머라고 해서 전부가 예의 바르고 매너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와 규모에 있어 우리나라 게이머들을 능가할 나라는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분명 사람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기본 예의나 룰을 지키는 것을 이토록 우습게 볼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배양된 것일까... 어저면 그건 우리가, '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기 위해선 우아하게 지는 방법도 알아야 하는데 우린 지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긴 자를 위해 축하해줄 줄도 모르고, 이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의 정당성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이기기 위한 방법만 배워왔고 또 실제 어떻게 해서든 이 사회에서 이기게 된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잘쳐먹고 잘사는 사회를 너무도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가지 분명한 건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 게임에서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란 것이다. 게임을 통해 전세계 수백만 이상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이란 바로 이렇게 치사한 종족이라는 악선전을 실시간으로 바로 지금도 스스로 자기 돈들 바쳐가며 하고 있는 곳이 이 네트워크 게임공간이다.
중간에 흘러가는 니코니코 코멘트 중 일부: "왠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노래 잘하잖아 젠장", "카오링의 테마가 더 나았고 이건 너무 평범하다", "그래도 에미링은 내 아내" 노래 끝난 뒤 여자 성우들 왈: "CD 내준다든지 하는거 아닐까요? 깔깔"
ねえキミは知ってる? 혹시 그대는 아시나요? 友達から恋が始まること 사랑이란 친구에서 시작하는 것을 信じてなかったよ 난 믿지를 않았었죠 キミのこと好きになるまでは 그대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でもキミはアイツを 하지만 그대 그 사람을 すごく好きなんだよね 너무나 사랑하고 있죠 ボクより ずっと 나보다 더욱더 臆病なボクは 겁 많은 나는 아직도 キミに好きと言えないまま 그대에게 고백도 하지 못했네요 アイツの隣に座って 그 사람의 곁에 앉아서 嬉しそうに笑うキミ 그대는 즐겁게 웃고 있어요 ボクの見たことのない笑顔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를 遠回りをせずに 두리번거리지 않고서 伝えればよかったよ 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胸の奥 溢れ出す気持ち 가슴 깊은 곳 벅차오르는 마음을 もっと素直にキミに 좀더 솔직하게 그대가 好きと言えたなら 좋다고 할 수 있다면 ボクらの距離は 우리들의 거리는 変わっていたかな? 혹시나 변해 있을까 いくつもの「もしも」 수없이 혹시나 하며 繰り返し願っても 되풀이해서 소원해 봐도 ボクの隣に キミはいないよ 나의 옆자리에 그대는 없는걸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 보통 대인배가 아니야 이 성우분. (...) 럭키스타 2기가 만들어질진 모르겠지만, 결정된다면 주제가 제작에 시라이시 씨 제대로 참여할 수 있을 듯.
0. 이 글은 누구 보라고 쓰는 글인데, 애가 워낙 자기 생각이 짙어서 트랙백도 못 걸겠다. 난 요새 글쓰는 것이라면, 문예창작은 그렇지 않은데, 무조건 너무 겁난다. 큰일이다.
1. '작위'라는 말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보이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법정에서는 이 단어를 '일정한 신체 운동을 하는 적극적 태도'라고 보면서, 법적˙규범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을 이를 때 사용한다. 반대어는 무작위(random)이며, '해야 하는 일을 안 함'이라는 의미의 부작위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2. 사실 '작위'의 반대말이 무엇일까를 찾으려고 사전을 뒤진 거였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의 '작위' 표제어 예문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 "이 작품은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고 작위로 가득 차 있다." 적어도 이 글을 생각해서 써 낸 사람의 사고의 논리대로라면, 자연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으면 작위란 얘기가 된다. 작위의 반대는 무작위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스러움이다.
3. 사람이 글을 쓸 때와 말을 할 때는 드러나는 모습에 있어서 그 형식이 분명히 다르다. 같으면 큰일이다. 여과가 전혀 안 되거나 지나치게 깔끔하기만 하니까. 하지만 쓸 때나 말할 때나 한결같아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다움과 자연스러움이다. 글이란 참 신기해서, 분명히 그 부분만 찢어놓고 보면 다들 하나의 형식이고 문법일 뿐인데 그걸 좍 모아놓은 글이란 건 하나의 표정이 되고 인격이 되고 (완전친 못하지만) 글쓴이가 된다. 다시 말하면 글에서는 글쓴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사람은 그 속에서 최대한 자기다운 자기가 드러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혹여나 너무 꾸미거나 다른 것을 가져다 쓰거나 억지로 말을 만들거나 하는 일체의 작위를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막말로 글 속의 나에게 반해 날 찾아온 사람이 날 만나보고 실망해 돌아가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좀 그랬다. 초딩 때였다. 채팅방이 유행하던 시절 상당히 작위적인 인격을 만들었었다. 덕분에 이메일 주소를 따낸 여자가 두엇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다 같은 초딩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다들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었다. 작위적인 글짓기의 끝이 이렇다.
4. 어떤 글은, 글쓴이의 의도와는 전혀 별개로, 그래서 더 미안스럽게도,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내 소설 써 논 걸 보다 보면 그렇다. 절대 내가 잘 쓰는 단어가 아닌데 서술을 한다고 하다 보니 맘에 다가오지 않는 금속성 표현을 써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런 글을 접하고 있노라면 너무 어색하다. 저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읽고 있는 사람은 어색한 것이다. 당황스러운 이야기 아닌가. '어떻게 하면작위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잘 생각해보라. 이 물음은 그 자체가 패러독스다. 갑자기 생긴 엄청난 난제다. 어쩌면 진지하게 글을 쓴다는 모든 사람들이 때가 되면 한 번쯤은 이런 물음을 만나는지도 모르겠다.
9. 이번 주에 논술 시험을 두 개나 본다. 억지로 생각해 보면 걱정인데, 기본적으론 별로 걱정 안 된다. 왜 그럴까. 혹시 '이 글, 나 보라고 썼구만'이라고 생각되면 트랙백도 걸지 말고 그냥 나처럼 블로그에 슬쩍 관련글을 써주면 되겠다.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확인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