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지리산휴게소 저 아래쪽에는―내가 차마 내려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무슨 전승 내지는 반공, 참전, 순국 과에 속하는 기념 조형물[각주:1]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시절에 무수히 제작된 기념 조각의 전형으로 삐죽 솟은 20여 미터의 기념탑 아래쪽에 철모 쓴 군인들이 돌격하는 동상인 것이다. 특히 이 기념탑은 약 80˚를 이루는 예각의 첨탑으로 삐죽 솟아 있고 위 모서리도 사선으로 마감함으로써 날카로움을 극대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앞산 지리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에 저처럼 생선회 치는 긴 칼[각주:2]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놓는 아이디어, 이것은 단군 갑자 이래 20세기 후반의 인간들[각주:3] 아니고서는 5천년 역사 속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시절에 살고 있는 것이다.[각주:4]
600고지 전승탑. 조사해 보면, 이 부근을 간단히 답사할 때 으레 코스로 지정되는 모양이다. [본문으로]
현재 1권을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경멸스러운 어감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20세기'이다. 유홍준은 20세기 특히 그 후반 격동기를 문화유산의 흑사병 기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이상하게도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적으려는 책인데, 그가 시종일관 한탄하는 문화유산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폭력과 무개념에 대해서만 기억하게 한다. 그것이 이 책의 성공비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여전히, 우리는 터무니없이 엄청난 시절에 살고 있다. [본문으로]
방금 로욜라도서관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남학생이 불러세운다. 길을 모르나. 내 말투를 듣더니 군대 갓 전역한 사람 같단다. 할 말이 없나. 기질이 있어 보인단다. 그래서 내가 대순진리요? 한 마디 했더니 아, 아시는구나 하곤 가버렸다. 생각해 보니 웃기다. 그렇다고 불쑥 대답을 하냐, 병신. 난 예수전도단이라고 말해줬다. 가던 길 가려는데 곧바로 코앞엔 IYF가 대대적으로 유인물을 나눠준다.
오늘 5시쯤에 지하철에 탔다. 양복 입은 할아버지가 노방전도를 주절주절 하시며 사라졌다. (최근 노방전도를 특히 많이 접한다. 때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목숨 건지길...) 그 다음엔 지압펜이에요 지압펜 특허상품입니다 지압펜이라는 홍보를 하며 어떤 어른이 볼펜과 코팅된 전단를 하나씩 무릎에 놓았다가 사라졌다. 지압펜이 철수하자마자 이번엔 두 남자가 객차 문을 열고 이쪽으로 오더니 한 사람은 왼편, 한 사람은 오른편 벽에 전단을 절도 있게 붙이면서 지나갔다. 오늘 7시 반쯤에 버스에 탔다. 라디오에서 김홍도 목사가 벌금 물린 거에 관해 나오더니 갑자기 고린도전서 6장을 읽어준다. 버스 기사가 채널을 돌려버려서 그 다음 해석을 듣지는 못했다. 오늘 아침에 올블로그를 들어가봤다.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고 광우병에 대해, FTA에 대해 뭔가를 쏟아낸다.
불현듯 또 느낀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역시 행동으로 말하든지 아니면 말을 말아야겠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시끄럽고, 난 내가 해야 할 말들이 있다.
내일 시험을 기준으로 그 앞시간엔 대본 외고 구상하는 데만, 그 뒷시간엔 콘티 짜는 데만 집중하자.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