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번 갈래로 넣어도 될 것을 4번으로 넣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최근 내가 굉장히 협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축인가, 집안에만 있다 보니 당연한 건가. 사회로 나가면 또 다르겠지. 그래서 4번 갈래를 더 고르게 된다.
오른편에 링크를 대거 추가했다.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일단 내 즐겨찾기에 없지만 자주 들어가는, 아니면 즐겨찾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주 들어가봐야 하는 링크를 넣어봤다.
난 웬만하면 새창 띄우는 링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넘어갈 땐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 부모창을 남겨놓는 건 꼭 바짓가랑이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오른편 링크모음은 설정을 하다 보니 새창이 뜨는 경우가 있다. 일괄 수정봐야지.
엄니께서 근 몇 주 동안 내가 부쩍 어른스러워졌다고 하신다. 그럴까. 뭐든지 갑자기 크는 건 이상하다고 여겨 온 나에게 있어선 좀 계면쩍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 너 중학교 초등학교 땐 얼마나 건방졌는줄 아냐? 마치 저가 다 안다는 것처럼... 여전히 찔린다. 어무니, 멀었습니다.
어제부터 이틀에 걸쳐서 두 가지로 고민했다. '五月晴れ/五月バレ'와 '焼け太り'를 각각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전자는 심히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말장난으로, 정발본 역자 설은미 씨 역으로는 '5월 날씨/5월 들통'이었다. 어젯밤쯤에 결국 '5월 밝음/5월 발각'으로 결정했다. 후자는 단행본 10권을 산 날부터 '속편에서 반드시 나올 것이다'라고 예상한 탓에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이것 역시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내내 궁리했지만) 오늘 드디어 우리말 속담사전까지 뒤졌고, '집 태우고 못 줍기'라는 말을 얻어, 누가 뭐라건 이것으로 갈 생각이다. 사실 가능하기만 했다면 '사랑니(親知らず)'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식 표현을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작품에서 어느 정도 문맥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용인을 해주었고, 사랑니에 관한 우리식 표현이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슷한 게 있을 리 만무하므로 그냥 주석을 다는 쪽으로 갔다.
어떨 때 보면 난 너무 미련하다. SiCKO의 우리말 제목을 무엇을 지어줄까를 가지고 한 서너 주는 고민했다. 하지만 알아주는 이는 몇 없고, 심지어 나도 '앓던이'라는 제목은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전을 찾고, 관련 문서를 찾고, 죽어라고 혼자서 삽질한다. 절망선생 자막을 하고는 있지만 정말이지 어떨 때 보면, 그냥 나도 휙휙 직역해버리고 나머지는 죄다 텍스트로 밀어넣고, 원래 소재(元ネタ) 따윈 스킵하고서 난 할 거 다 했다고 내밀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런 희한한 고집의 장본인은 아마도 이세욱 씨일 것으로 생각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전담하는 번역가라며, 엄니는 이 사람의 정신이 대단하다고 늘 일러주셨다. 번역 중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땐 심지어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을 정도라고. 그 정도면 미상불 존경이 필요하다. 엄마가 '개미' 3권 세트를 볼 적마다 얘기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사람이 번역한 책(덕분에 베르베르의 책은 뭘 읽어도 문체가 같다. 외국도서임을 생각하면 놀랍다)을 읽은 일이 있기에 난 이런 벽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어에 '이마이치(今一)'와 '요코즈키(横好き)'라는 표현이 있다. 각각 '약간 모자란 모양'과 '잘 하지도 못하면서(본업도 아니면서) 무척 좋아함'을 의미한다. 이게 딱 나다. 내 창작활동은 이렇다. 항상 '~하다가 말고', '별론데 괜히' 덤빈다. 프로페셔널리즘. '요코즈키'까지는 해결 못하겠고, 일단 뭐가 됐든 '이마이치'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망은 그렇다.
일단 절망선생 정발본 전권 지르기는 완료했지만, 아직 천어씨가 준 제목의 책을 못 샀다. 만화책 살 때 같이 살 걸 그랬다. 뭐, 지금 생각해 보자면 배송은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그게 더 빠를 테니 따로 주문해도 나쁘진 않겠지만.
둔촌동에 있는 어느 우편물취급소에 가서 뭘 기다릴 일이 있었다. 에어메일 몇 통이 어느 창구에 놓여 있었다.
앤티-글로벌리제이션. 나는 어제 졸업식 때 일본어 교사에게 "덕분에 오덕후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막질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앤티-글로벌리제이션. 나는 300엔, 아니 3천원짜리 피규어를 뽑은 다다음날 은행에 표시된 한화-엔 환율현황표를 보며 분노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앤티-글로벌리제이션. 나는 청해역(廳解譯)이 귀찮아 원서를 어떤 식으로든 입수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앤티-글로벌리제이션. 아니, 앤티-제패니제이션. 아니지, 앤티-제패니메이션.
쿠메타 선생님께 에어메일 3통을 보내고 싶다. 하나엔 쿠메타와 마에다를 그리고, 하나엔 본격적으로 기합 넣고 그린 클래스 전원을, 그리고 나머지 하나엔 '안녕 절망선생'이 보여주는 행동기제의 사회심리학적 해석에 관한 논문. 우표값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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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선생 3기>
リー・仲直さんを描いてみた やはり三期の中には出番あるよな~
절망선생 3기 결정이라는 소문이 돈다. 소문이란 무섭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누가 아무렇게나 시작해버린 말을 자기들 멋대로 퍼뜨려 진짜로 만들려는 습성이 있다. 절망했다. 전설을 진실로 만드는 사회에 절망했다. WAWAWA, 하츠네 미○ 넨드로이드, 달 착륙, 슐리만, "제가 눈빛으로 병을 고칩니다", "도쿄대 CC가 되면 행복해진대", 닭둘기로 닭꼬치(양이 적어 손해가 난다고는 하지만), 벡사시옹 840, 와시노미야 신사참배 이벤트, 동북아공영권, 무한○전 앨범 발매, 종이봉투에 넣고 다니는 노트북, 대운하! 나도 해 보자. 뭐라고? 절망선생 3기에선 몽땅 오리지널 스토리로 간다고? 마에다가 배경을 전부 담당한다고? 뭐가 어째? 리 나카나오 캐스팅은 시라이시 미노루로 잡혔다고?
요즘 이러고 산다. 변기에 앉아 다음 방영분엔 몇 권 몇 화가 실릴 것인가를 혼자 예상한다. 신보 아키유키 선생님과의 머리싸움. 참고로 내가 그분보다 글씨는 잘 쓴다.
...재미없다. 아, 참고로 3기 나와도 자막은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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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안녕, 엽토군! 안녕!
타니가와 나가루 씨가 그 정체를 '타치하루 다이키치'라고 속인 채 자기가 근무하는 가게에서 시간을 맞추어 퇴근한다. 가다가 요시미즈 카가미 씨와 약속을 잡아 만난다. 생맥주를 총 33.7L 들이키며 했던 술주정을 또 늘어놓는다. 젠장,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루히 같은 년이 아니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말야! 젠장, 시라○시 따위 내가 알 게 뭐냔 말이다! 왜 그런 인간을 날더러 그려달라는 거야! 점원이 나와 그들이 깽판놓은 테이블을 치운다. 그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가자 점원 쿠보타가 씩 웃는다. 그러니까 작가는 독자들이 되레 놀랄 정도만큼은 막 나가 줘야 개성유지가 된다니까. 하여튼 뭣도 모르는 놈들.
인터넷은 좁다. 특히 이 바닥은 더 좁다. 이제 나의 글은 2ch에서 번역되어 돌아다니고 조만간 치리에게 얻어맞고 죽다 살아난 두 명의 경관이 우리 집에 찾아와 "인터폴이다."라며 다짜고짜 날 새카만 경시청 헬리콥터에 태운다. 안녕! 엽토군, 안녕!
俗・さよなら絶望先生 第06話 「君 知りたもうことなかれ」「夢無し芳一の話」「隠蔽卒」 안녕 절망선생 속편 6화 "난 모르오 안 알린 죄밖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어머니 그 사랑니를 알으십니까"
이번껀 너무 순조로움. 세상에 B파트는 이번 회에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맞았다! C파트에서의 장난도 재미있었는데, (자세히는 비통지라 미리니름 안함) 이것도 실은 분명히 원작의 자막을 따라서 뭔가 샤프트가 한술 더 떠 줄 거라는 예상도 했었다. 그래서 결국 드디어 오토나시도 말을 했다. 사토 치와라는 성우다. 난 하츠네 미쿠한테 시키든지 그 역을 맡은 후지타 사키씨를 불러서 시키겠지 생각했었는데. 앗차, 신보 씨, 그 생각은 못 했죠? ㅋㅋ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음.) - v0.0 (아직 자막없음, 내일모레 공개)
C파트에서 지겨워서 한 박자 쉬고 하루 지나고 다시 만드네요. 성우 이름과 엔딩에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싱크 이동을 쉽게 하게 되었습니다. 오프닝 가사도 좀 손봤습니다. 문화상품권 5만원이 생긴 덕에 단행본 전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 v1.0
※알고 있는 대로 쓴 글이므로 의견 혹은 단순 참고자료로만 봐 주십시오. 학술적 적절성은 보증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현대 미디어 사회의 온갖 현상들을 관통하는 어휘가 하나 있다. 스펙터클이 그것이다. 우리말로는 '볼것', '구경거리' 정도가 되는 스펙터클. 고도로 발달한 미디어(중개자)가 현대인들을 진정한 체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면서 사람들은 스펙터클이 주는 간접 경험에 취해 있고, 또 미디어가 가공하여 전달하는 그 스펙터클을 가지고 직접 경험을 해석하고 수행하려 하는, 말하자면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미디어와 직, 간접 경험에 관련된 현상들을 살펴보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교회 청년회가 금요일 저녁에 떠나 토요일 낮에 돌아오는 외박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1박2일 찍고 온다'라고. 이것이 스펙터클 이론을 설명하는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락프로그램 '1박2일'은 전형적인 스펙터클이다. 연예인들이 산간, 도서 지방 등을 여행하되, 편하게 가지 않고 마치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돌듯이 온갖 고생을 겪고 여행의 보람을 느끼며 돌아온다는 컨셉이다. 사실 이것은 프로그램으로 굳이 만들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남이 여행한 이야기를 보느니 차라리 직접 가면서 즐기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여행하기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프로그램은 고생을 '기획'하고, 여행 중의 장난과 놀이를 '촬영'하며, 그들이 느긋하게 가지 않는다는 것을 '방송'해 보여준다. 미디어가 그런 지점까지 범접하자 교회 청년들의 외박여행은 졸지에 '1박2일 따라하기'로 전락해 버린다. 직접 경험이 아니라 간접 경험의 모사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다. 'UCC 동영상'[각주:1] 또한 우리가 스펙터클에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조금만 특이한 장면을 보면 핸드폰 카메라부터 꺼낸다. 그 장면을 유심히 보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축소 복사해 버린다. 영상통화 브랜드 'show'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나는 자꾸만 그 광고가 show를 하라고 하기에 또 어떤 대단하신 UCC 사이트가 런칭하는가보다 했다. 자기네 '영상통화'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영상통화지 쇼가 아니다. 우리의 직접 경험(서로 얼굴을 보고 통화하는 일)이 무슨 스펙터클, 대단한 볼거리인 양 광고한다[각주:2].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경험의 대부분은 볼거리와 간접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상통화 광고 컨셉을 '상상만 했던 영상통화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따위의 직설적인 것으로 잡았다면 일련의 show 프로모션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고 그토록 신비한 것으로 선전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은 show 극장편 CF를 따라할 수 있겠는가? 광고에서 보여주기로는 쇼를 하면 영화 티켓이 공짜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쇼(직접 경험)를 하라는 게 아니라, show(간접 경험)를 사라는 것일 뿐이었다. 미디어를 접하는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진짜 상황'에서 멀어지게 한다. 심지어는 예의범절을 가르쳐주는 쇼프로가 생길 정도이니, 우리가 얼마나 '진짜 상황'에서 소외되고 있는지(아니면 진짜 상황이 우리를 소외하는지도 모른다)를 짐작할 만하다. 상황주의자들은 거짓으로 점철된 가짜 생활을 벗고 직접 상황에 뛰어드는 삶을 촉구한다. '쇼를 되찾을 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환경, 분위기, 상황을 창조할 것'을, '일시적이고 직접 경험한 무엇인가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각주:3] 막상 요구를 받고 나면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핵심은 '일시적이고 직접적이며 계획되지 않은' 무엇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메가폰을 하나 사서 국회의사당이나 타워팰리스 앞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읽는 것은 어떨까? 무균복이나 합창단 가운을 입고 시내 한복판에 앉아 있는 건 어떨까?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이 동참할 때까지 물구나무를 서면 어떨까? 시를 쓰거나 작곡을 해 보면 어떨까? 길거리 이름을 '방황의 거리' 따위로 바꾸어 보거나, 단체로 무작정 달리거나, 정 아니면 프리허그도 괜찮겠다. 내 경우에는 가끔 참석하는 찬양집회가 있을 수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곳엔 어떤 미디어도 없이 회중 하나하나가 직접 주님과 교감한다.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일단 어떤 기운이 느껴지면 즉각 반응해야 하는, 직접 경험으로만 이루어진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씨 또 길게 썼네...
UCC라고 칭하지 않고 UCC 동영상이라고 칭한다. UCC가 곧 동영상이라는 개념은 포털이 만들어낸 허구이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여기 참조. [본문으로]
실제로 한 몇 달 간이나 서단비 씨에게 쇼를 시켜 스펙터클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우리의 머릿속에 남는 'show'는 단순히 서단비 씨의 막춤과 같은 뭔가 재밌는 것, 흥미로운 것일 뿐이다. 실상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영상통화일 뿐인데도. [본문으로]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빌어온 것이다. 일단은 '애드버스터-상업주의에 갇힌 문화를 전복하라'에서 따 왔다. [본문으로]
옥 목사는 "오스틴이 전하는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정말 심각하다"며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게 그게 무슨 진리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는 교인들에게 "긍정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자"고 거듭 강조했다.
이 기사를 놓고 이래저래 말들 하는 걸 읽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덜컥 겁이 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복음을 오해하지 않고 있는가. 내가 복음을 오해하는 일은 없는가.
복음은 으레 배척받고 거부되는 것이다. 복음은 십자가를 요구한다. 복음은 사람을 바꾼다. 한낱 자기계발 요령도 아니고, 신화나 역사나 철학도 아니고, 성공 비결은 더더욱 아니다. 그걸 난 오해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많은 이야기, 많은 말, 많은 것을 지어 보이고 들려주는 인생을 살아야 할 나다. 그 위대한 이야기를 오해하고 싶지 않다. 축소하고 싶지 않다. 과소평가하기도 싫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주이시고 또 모두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글을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 다시 찾아 본 말씀이 하나 있다. 그렇잖아도 그 때 새번역으로 읽다가 놀랐는데 이런 기사와 토론을 유념하여 다시 보니 또 놀랍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생각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마가복음 12:24-34)
- 요즘 볼 영화가 그다지 없더군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볼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결국 에반게리온을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밑도끝도 없이 그 자리 가서 지른 거죠. - CGV의 이런저런 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왔습니다. 왜 평일엔 되는데 공휴일엔 멤버십포인트로 영화표를 살 수 없는가, 왜 포인트로 팝콘밖에 팔지 않는가, 포인트 사용 방법에 대해 홈페이지에선 알기 어렵게 설명해 놓았으면서 왜 멤버십은 자꾸 모집하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주로 볼 게 뻔한 광고를 왜 올라간 사람들이 봤을 때 똑바르도록 붙여 놓았는가 등등. 포인트 매표는 담당자한테 물어봤더니 '티켓팅 시스템이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돼 있다'라고 하더군요. 경제 문제냐 경영 문제냐. 오랜만에 좀더 생각해 볼 문제. - 매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영화를 한 표 사겠다고 하니까 곧바로 5열 1번 좌석을 주더군요. 혼자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라고 말해줬습니다.
- 줄거리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 에반게리온이 맞습니다. 심지어 앞쪽의 미사토네 집에 가는 장면은 아예 애니 DVD판스러울 정도. 그런데 애니로 나왔던 거보단 쉽네요. (원최 한 6화쯤 보다가 때려쳤기 때문에...) 애들이 시끄럽게 굴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15세도 아니고 12세로 책정하다니, 아직 우리나라 등급위원회는 멀었다니까. - 애니보다 쉽다고 한 말의 뜻은, 그러니까 거부감이 드는 표현이나 짜증나는 시퀀스가 많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극장이라 좀더 일반인을 배려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 에반게리온과 안녕 절망선생의 공통점은 딱 두 개. 절망적인 이야기와 눈이 행복한 타이포그래피. 정말 에바 시리즈에 사용되는 굵은 명조체와 그걸 사용하는 디자인 감각만은 크게 평가할 만합니다. 우리나라로 하자면 HY견명조는 좀 아니고 산돌명조B 정도면 될까요? 아냐, 아냐. 그보다 더 쎄야 해. 아주 잠깐씩만 지나가는 한자들이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자막보다 그런 것들에 집중을 해버렸습니다(본편 이외의 것에 신경써버린 거죠). 특수 전쟁에 사용되는 군사적인 서체는 역시 그렇게 생겨야 해요. 올곧고, 칼같고, 두껍고, 커야 좋고.
잠시 감상하고 지나가는 시간 갖죠. 하테나에 따르면 문제의 명조체는 마티스EB 혹은 극태명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지는 그저 성격장애자 아닌가요? 그래서 군대에서 그거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나? 근데 생각해보면, 군인을 징집하고 배치를 할 땐 임무나 각종 상황 등을 알려줘야 되는 건데 왜 그런 게 전혀 없죠? 일부러? -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스토리상 아스카가 안 나오는 타이밍인가요? - 왜 사도들은 일본만 공격하나요? ㅋㅋㅋㅋㅋ - 짜증나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줄거리 흐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그래서 세계관이나 험악한 장면들이 어느 정도 이입 이해가 가능하더라는. 별개 인격을 억지로 붙여놓으면 괴란쩍을 수밖에 없어요. 폭주를 하든 벽을 치든, 그런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순순히 따르는 게 이상한 거죠. 뭐 틀린 말이면 할 수 없고요. - 갈*패닉스2에 나오는 그 괴물이었군요. - 아무튼 긴 시간 동안 멍청하게 입 벌리고 보고만 있으면 되는 적당한 영화. - 음향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치고 맞고 하는 장면들은 이펙트가 정말 킹왕짱. 효과 하는 사람들은 정말 재미나게 했겠던데요.
- 원작(애니)에선 많이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만(불쾌감 견디느라고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이 작품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장면, 소품, 메카닉, 인물구도, 상황, 이야기, 풍경, 음향 배치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에 '생각들을 아주 빽빽하게 채워넣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앞서 말했던 '인격 연동의 부작용'이나 괴물의 다양한 형태, 건물의 설계 구석구석 등등, 웬만한 사람들은 합체로봇 만화 같은 걸 보면서 그냥 지나칠 사소한 문제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조리 메꾸어 놓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 정도 정성이면 당연히 좀더 평가받을 일(もっと評価させるべき)이죠.ww 정말 보는 내내 생각의 밀도를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여느 작품 같으면 빈틈이 많고, 그래서 거기에 머릿속으로 딴죽 거는 일이 많은데, 에바는 그럴 틈이 별로 없습니다. - 있다고 한다면, 역시 이 만화에서도 구약성서와 계시록은 어쩔 수 없이 우려먹히고 있다는 것. 일본 놈들 십자가 엄청 좋아해요. 신기한 건 복음서의 용어나 네타(...)는 전혀 모르면서도 666이니 뭐니 하는 거엔 빠삭하다는 것. 하나의 '신화'로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좋다 이거야, 내가 가서 그 신화를 '사실'로 만들어주겠어. (...) - 일본 사람들은 지구 멸망이나 거대 전쟁에 대해 늘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때는 일본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는 모양입니다. 침략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는 나라 국민으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 우타다 히카루 노래 하나 건졌네. 예고편으로 볼 땐 별로였는데 그냥 음악만 들으니 괜찮네요. - 영화 보면서 생각한 거 두 개. '절망선생 극장판 나오면 어떨까', '나는 내 이름이 되겠다'. 아이디어 베껴가면 죽음. - 에반게리온 원작이나 애니를 감명깊게, 혹은 끝까지 다 보신 분은 절대, 절대 가지 마십시오. 이걸 다운받아 볼걸 돈 버렸다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에바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전부터 속쓰렸던 분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작 하나쯤은 봐 둬야지 싶으신 분들은 가서 보세요. 돈 안 아깝습니다. 정성 많이 들였습니다. 초딩이나 애들도 별로 안 들어오니까 괜찮아요. - 엔딩 크레딧 끝까지 보세요. 가사 번역도 돼 있고, 맨 끝에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 계단에 애들 앉아있는 포스터, 거기 오른쪽에 적힌 이상한 단어들. 키워드입니다. 일부러 배워서 볼 필욘 없지만 알면 좋습니다. - 별점 5점 만점에 4점. 적당한 영화에 붙이는 점수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수입된 에반게리온 극장판이라고?
주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 앞에서 잘 자랐다.
관련성구: 창22:2-14, 창47:9, 삼상1:11, 마6:33, 마16:25
선포 요약(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작성):
많은 사람들이 한나가 자식을 얻지 못해 원통해한 것은 다만 당시 사회가 무자식을 저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으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만이 아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는데, 이 세 사람이 악하여 사회를 바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나는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제대로 된 제사장으로 키우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자식에 대한 간절함이 더했던 것이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그를 나실인으로 바친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귀한 아들인가. 인간적으론 바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그 자식을 드렸다. 1-1=0이다. 하지만 한나에게 1-1은 0이 아니라 5+1, 즉 세 아들과 두 딸과 시대를 움직이는 자랑스런 아들 사무엘까지였던 것이다. 비슷한 예로 아브라함이 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군말없이 그를 바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는 '열국의 아버지'가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뺄셈을 잘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뺄셈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덧셈을 해 주실 것이고, 덧셈만 열심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빼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의 손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하기는 사람의 빼기보다 훨씬 크고 하나님의 빼기 역시 사람이 더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실제로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했던' 엘리와 두 아들 일가, 즉 뺄셈을 모르고 덧셈만 하려 했던 엘리의 집안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셨다. 그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고, 엘리는 아들의 전사와 언약궤를 빼앗긴 소식에 놀라 자빠져 죽고,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는 배었던 아이를 조산한 뒤 거의 죽게 되었다. 야곱 역시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인물이다. 야곱은 성경에 그 일평생이 전부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한다. 왜 그러한가? 그의 일생은 무엇인가를 계속 더하기만 하려는 인생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목을 잡았고, 장자권을 탈취했고, 아내 라헬을 쟁취하기 위해 애를 썼다. 형 앞에 나아갈 때 집안 식구를 일렬로 세우고 자기와 라헬과 그 자식 요셉은 제일 뒷줄에 서게 할 정도의 욕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은 한 번도 행복했던 일이 없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라고, 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이것은 진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인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은 사람들의 꽤 많은 수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은 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것만을 본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등한시하고 자신이 받은 그것을 전부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덧셈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뺄셈을 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랜드 사태를 생각해보고 싶다. 본인은 이랜드 같은 기업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세금 잘 내고 주일 잘 지키고 손해나면 나는 대로 성실하게 기독교적으로 경영해온 기업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이미지는 실추되고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가? 본인은 이랜드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태가 매우 안타깝다. 사실 이 사태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본디 이랜드는 주일에 쉰다는 원칙 때문에 백화점 입점도 하지 않았던 기업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손댄 적도 없는 유통업, 호텔 사업 등에 뛰어들었다. 주일을 지킨다는 처음의 원칙을 어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주일에도 일하는 사람들, 즉 비기독교인들이 점차 회사 내부에 커지게 되었고, 결국 처음의 가치관이 어그러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큰일이 벌어져 여태 쌓아왔던 이랜드라는 기업의 이미지가 뺄셈된 것이다. 곧 출범할 이명박 정부 역시 국민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이것 역시 덧셈을 해 보려는 사람의 계획에 대해 주님이 주신 뺄셈의 결과다. 그들은 선거철 홍보하러 다닐 적에 주일날에도 전국 각지를 돌았다. 본인 생각엔 주일날 굳이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든 한 표 더 얻어보겠다고 주일을 소홀히 했다. 게다가 인수위원회도 몇날 며칠을 쉬지 않고 업무를 보더니 몇십 일만에 처음 쉬는 날을 주었는데, 그게 토요일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금요일 회의 때 '내일은 푹 쉬고 주일날 뵙시다'라고 했던 셈이다. 당선인은 장로고 인수위 총책임자는 권사인데 그런 발상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이거니와 그런 덧셈 덕분에 얼마나 많은 아랫사람들이 주일예배도 못 드리는 고생을 했겠는가. 이명박 정부를 놓고 많이 기도했던 본인은 이런 풍경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루빨리 그들이 하나님 앞에 뺄셈해야 할 것은 뺄셈하는 태도를 보여주길 바란다. 오히려 요즘 세상이 최근 트렌드를 마이너스 마케팅, 마이너스 생활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대로 뭐든지 '더' 만을 부르짖어서야 되겠는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여 바치는, 즉 '뺄셈하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덧셈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나누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곱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성경적 계산법을 기억하고 현명하게 생활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하자.
이랜드 사태와 인수위에 대한 부분에서 완전히 납득하고 말았다. 말 많은 평신도가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이런 말을 하면 귓등으로 들었을 것이려니와 오랫동안 기도했으며 또 바로잡히기를 바라고 있는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선포하니 완전 선지자의 말로 들렸다.
로긴하고 나면 제일 먼저 통계부터 본다. 어제 오늘 사람 수는 아예 검색필드 달아놓은 밑에 끌어올려놨다. 맘 같아선 spotplex도 거기 밑에 넣고 싶지만, 너무 좁아서.
지금 쓰는 스킨을 대단히 심플하게 바꾸고 싶다. 트랬팼잉 정도면 괜찮겠다. 어제 html코딩을 좀 해 봤는데, 나 많이 녹슬었더라. (물론 녹슨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근성도 그렇고, 도안 감각도 그렇고 필력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그래서 스킨을 바꾼다니 그건 좀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어떻게 해보곤 싶은데
유입 경로 로그를 읽는 것이 또 하나 일과이다. 별의별 리퍼러가 다 들어온다. 최근엔 천세영을 찾다가 낚이는 분들이 많고, 절망선생 회지를 찾는 사람들도 있고, 미노루 씨 관련 검색어는 꾸준히 올라온다. 아직도 구글 검색이력 디벼가면서까지 쇼와모던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실로암이란 말은 성경 어디에 나오나'라는 검색어도 봤다. 그런 건 holybible.or.kr로 들어간 다음 통합검색에서 실로암을 검색하면 된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정보를 찾는 요령이 너무 없다. 성경에 나오는 말인 거 같으면 먼저 온라인 성경을 찾아가야 하고, 프랑스어 같으면 먼저 불한사전으로 찾아가고, 피카소의 풀네임이 정확히 뭔지 알려면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피카소로 검색한 다음에 English 페이지를 눌러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게 다 네이버 때문이다. 정말이다. 우리나라 정보 바보의 대부분은 네이버가 양산했다. 뭐든지 '검색창에 그걸 쳐보세요'(정보화 시대의 역설적 정보 부족에 대해 이것처럼 직설적으로 시사하는 말이 있을까 싶다) 라는 말로 압축하는 네이버. 그 앞도 뒤도 책임지지 않는 네이버. 그 엄청난 직관성 덕분에 사람들은 네이버라는 섬으로 전부 이주했고, 덕분에 지식iN은 인기검색어의 이유를 물으며 남들 가는 대로 쫓아가는 법만 배우는, '포털(portal)'이 아닌 '해비탯(habitat)'이 되어버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좀 실례이려나? 내가 네이버를 찾을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지도 찾을 때, 아니면 광고 CM송처럼 '이건 다른 사람들이 많이 질문해 두었을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정보 찾을 때뿐이다. 그럴 땐 네이버가 유용하다. 하지만 그밖의 경우에는, 미안하지만, 지금 내 즐겨찾기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