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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도 무식이 탄로날 처지이므로 최대한 짧게 쓴다.


그래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여, "메갈"의 등장 이후 기분이 어떠신가들? 이런 부문에서 자기반성을 하지 않아도 좋았던 대다수 여러분은 아마도 그들을 (여러분이 득 보고 계신 모순덩어리 세상의 모순덩어리 규범에 입각해) 양껏 비판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된다. "성평등도 정도껏이지 거 되게 쿵쾅거리네!"라고, 지금껏 여러분이 '신녀성'과 '이대녀'에게 변함 없이 정력적으로 그래 오셨듯이. 이 글은 그런 분들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만 앞으로도 그렇게 세계의 절반을 제2의 성 정도로 오도하며 착실히 도태(淘汰)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다.

그런데 우리 중 그렇지 않은 일부는 조금 당혹스럽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다 알겠고, 그럼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인 것이다. 역사와 문화에 절절히 흐르는 여성혐오, 지금도 이어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에의 억압, 성평등의 필요, 다 이해하겠고 납득하겠다 이거다.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럼 이제 그 여성혐오와 성차별의 기득권에 있는, 소위 "평범한 남자"들은 이 모순에 대해 무슨 행동으로 갚으면 된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있단 말인가?

한 가지 있다. 가부장제(patriarchy, 부권제[각주:1])를 용맹히 때려부수면 된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는 각 집안 어른 중 남자 어른을 우선으로 모시자는 제도이나,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란 기실 온 천지에 가득한 인류 사회 대부분의 작동 원리 그 자체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면,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역할이며 부성(fatherhood)에 있어서는, 그 핵심 구성 가치가 이 세상 전체의 가치에 얼추 비슷하게 연동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선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生] 역할이 기대되는 자다. <시경>에서는 이를 "아버지 날 낳으시고[生]"로 요약하여 가르친다. 확실히 내 아버지가 없던 정자를 생산해 내 어머니에게 착상시키지 않았던들 나는 나지 않았을 것이니,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아버지의 역할이란 숭고한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 원리는 모두에게 발견되었으며, 그리하여 인류는 이것을 생산(生産)과 성장, 혁신과 창업을 떠받드는 단 한 가지 형식의 경제로 조직하여 유지하고 추앙하였다.

또한 아버지는 똑바르고 딱딱하고 힘차게 오래오래 버티며 곧추서 있을 것이 요구되는 자다. 아버지 노릇에 사용되는 부위가 하필 그렇게 생긴 까닭이다. 이것은 모든 (적어도 절반 정도의) 인류의 무의식에서는 더없이 목전에 선명한 하나의 이상적 목표로 주어져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십여 개의 철제 페니스가 땅을 쉼없이 강간'하는 장면을 그렸을 때, 우리는 인류가 추진해 온 단 한 가지의 산업 발전 양상이 얼마나 가부장적이었던가를 낯뜨겁게 목도하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직선적이고 직접적이며 목적 지향적으로 강력하고 부단하게 정력적이기만 해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뿐 아니라 아버지란 어떤 정상적 표준과 규격을 제시하고 이를 준수하기(시키기) 위해 규율과 방침과 제재를 해야 하는 자다. 만들어낸 걸 기를 땐 기르더라도 만드는 단계에서만큼은 멀쩡한 것을 만들어 놓아야 기르는[鞠] 자(<시경>에 따르면 기른다 함은 이미 낳아진 것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 역할은 어머니다)에게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했노라고 강변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가부장적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위와 규범의 정치이며, 모든 비정상적 상황과 비표준적 존재를 '쉬쉬하고' 덮어놓는 정치, 처리가 불가능한 규격 바깥의 잘못 낳은 존재에 대한 배제, 말소, 부정, 무화(無化)의 정치이곤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경제가, 산업이, 정치가, 요컨대 기반 문화 전체가 순 다 아버지 입장이었고 언제나 가부장제적이었으며... 에라이... 좆 같았다는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잠시 좆같다는 한국 비속어의 의미를 좀 새겨보자. 나쁜 의미에서 남성기 같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무데서나 저 혼자 멋대로 발기하고, 죽어도 자기는 지금 당장 용두질을 해야겠다고 우기며, 한바탕 '싸튀'만 할 수 있다면 뭐든 그저 다 좋게 여기고, 그러므로 낳는 짓 외의 어떤 뒷일에도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설명해 놓고 보니 정말로 좆같은데, 그런데 과연 우리가 몸담은 가부장제적 체제나 문화나 사회 중 이런 행태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그 얼마나 되는가? 실로 없다시피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여성혐오에 진력이 난 페미니스트들이 매일 증언하고 있는 세상의 실체이다. 정치인(CEO)이 아무 공약(프로젝트)이나 막 싸질러놓고 뒷수습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그가 몸담은 부성적 정치(산업)의 세계에서 뒷수습은 공약(프로젝트)을 낳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트 폭력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은 연인 사이라는 지극한 개인사에서조차 일련의 규율과 정상적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가부장제적 세계에서 지당하기 때문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가부장제의 지배층인 "한남 앱충"의 생리와 모든 꼴불견에 대하여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가부장제는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의 역할상을 제시해 기초 사회를 유지해 온 순기능을 해 온 체제라는 점이 있다. 또한 없던 것을 생산해내야 하는 시대에 가부장제란 필연적으로 호출되는 사고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가 무슨 시대에 살고 있느냐인데, 과연 지금 우리가 뭔가 완전히 새롭고 전에 없던 무엇인가가 없어서, 혹은 더 강력하고 완벽한 내치와 외치가 부족해서 이 사달이 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근본적 의미에서 임계치에 임박해 있는 인류에게, 뭘 더 낳는 것만을 목적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실제적 해결을 주지 못한다. 낳는 건 낳을 만큼 낳았고 이제는 그걸 잘 기를 때가 온 것인데, 오직 가부장제의 수혜자들만이 그 방법을 못 배워 혼란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시대가 페미니즘을 호출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가부장제를 분쇄해야 한다고 우기는 이유가 여기에서 온다.


페미니즘의 역할은 불 보듯이 자명하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응할 수 있는, 혹은 아예 그걸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하고 억압되지 않은 발상과 방식을 제안하고 관철해 실현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반대는 가모장제가 아니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부장제 바깥에 있을까? 적어도 남자들이 발기차게 들고일어나서 왈가왈부 토론하고 몇 가지 완벽한 방침과 규범을 정해 밀어붙일 만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페미니즘에게 턴을 넘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이 닳아빠진 질서를 무너뜨리기 편하도록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작업이 있는데, 이제 좆 까는 짓은 그만하자고 나서서 부정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도 폭력적이고 기타 성별에게도 폭력적이지만 남성에게도 폭력적이다. 특히 그 남성이 정상적이고 규범에 맞으며 사회가 바라는 요건과 이상(理想)에 부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렇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규격과 정상, 표준을 추구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허하고 맹목적이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필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남 앱충'들과 '군무새'들이 '권리만 요구하고 의무를 지지 않는 여성들'에게 쏟는 그 분노, 그들의 처량한 처지,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자 이제 여기서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는 소수파의 양식 있는 남성 여러분을 다시 불러 보는 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불가능한 추구, 이제 아무도 원치 않는 생산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역할에의 눈먼 복무, 그 "수고와 희생과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 애쓰는 고생과 그 과정에서 세상에 끼치는 해악에, 당신이 동참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게 무슨 남자다운 것이라도 되는가? 당신마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좆 까라지!


정리하자면 이렇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첫 단계는, 당사자 남성으로서의 가부장제에 대한 탈권위와 전복이며, 여기서 말하는 가부장제란 결코 집안에서 "공처가"가 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 영역에서의 가부장제적 질서와 방식과 행태와 악습을 고발하고, 그 체계의 기득권으로서 그 모순을 순순히 시인하며, 적극적으로 혁파해 나갈 것이 요구된다. 맹목적 성장에의 거부, 목적 지향성으로부터의 탈피, 정상성에 대한 권위적 강압 문화의 극복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구체적 행동 요강은 더욱 세분화될 것이고 장차로는 더 다양한 거시-미시 사회에서 더 예리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행동들이 더 많이 요구될 테지만, 어쨌든 지금부터의 인류 발전의 한 축에 합류하는 데 있어 특히 (도태되고 싶지 않은) 남성들이 더욱 명심해야 하는 요점은 한 가지로 분명하게 모인다. 여자는 적이 아니다. 성소수자도 적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적(敵)이다. 그 장벽이 일단 무너지고 나면, 세상은 독일 통일 전후처럼이나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전면적으로, 훨씬 더 낫게, 도대체 그전까지는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는가 의아할 정도로.


그리고... 에휴 결국 무식이 탄로나고 말았다. 많은 질책과 비웃음 바랍니다. 끝.

  1. 여기서는 부득이 학술적으로 옳은 표현인 '부권제'보다는 좀더 친숙하고 전개에 편리한 기존 표현인 가부장제를 사용한다. 죄송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

기도

2017. 5. 9. 19:43

기도


동굴에 벽화를 새기는 마음으로
담벼락에 오늘 사진을 덧댄다
사냥터 같은 세상에서도
냉수 한 모금의 기쁨은 있었으므로

주여
만일 계시어든
이 하룻밤 우리 다리가
조금은 덜 아프게 해 줍소서

모닥불 앞에서 주술을 외던
제사장 대신
춤을 추는
희벍은 스크린을 쥐고 잔다


9/5/2017, one day before "melbourners" and the new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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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이 게시물은 다음 칼럼에 대한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고해 주세요: [임마누엘 칼럼] 한국에는 기술보다 과학적 사고가 필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님께.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지구의 날을 맞아 응용과학의 겉면만을 피상적으로 즉각적으로 감각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버리고 우리 모두 좀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력을 기르자는 취지의 기고를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부분 동감했습니다. 특히 매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서 사고력을 사용할 기회를 앗아가는지, 우리가 얼마나 “기술적인 성취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가득차 있으면서 정작 “스마트폰이나, 정부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는지 지적하신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제안해 주신 내용들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게 하는 교육 관련 법”이 그렇고, “‘주의 지속 시간’”이라는 개념이 그렇고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조치”가 특히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교수님께서 개탄하신 현 상황을 고치는 방법이 이러한 외부적이고 개별적인 조치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이런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조치들을 해 봤기 때문입니다.

대략 2년쯤 전에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앱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위원회가 오랜 시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하고 설치를 강권한 애플리케이션이지요. 목적은 명백했습니다.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완화와 부적절한 정보로부터의 청소년 보호. 기능도 계획상으로는 훌륭했습니다. 이제 적어도 청소년들은 비디오 게임을 줄이고 “정책이나 경제에 대한 글”을 조금이라도 더 읽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검색어의 연관키워드는 ‘뚫기’가 되었고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것을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사업은 순식간에 백지화되고 맙니다.

의무적으로 어려운 글을 읽도록 장려하는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은 어떨까요? 글쎄요, 교수님의 글을 소개한 중앙일보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에 따르면 “이렇게 또 수능 비문학 지문이 어려워집니다…ㅠㅠ” 그리고 교수님이 제안하신 교육 관련 법의 한국적 결과에 대해 이 댓글보다 정확하게 내다보는 분석은 달리 더 나오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정말로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기성세대에게 책임이 있는 허물과 폐습을, 다가오는 신세대가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해 왔습니다. 나쁜 것은 어른이지만 앞으로 잘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었죠. 이는 거의 미신적 전통이라 할 만한 불합리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논의의 범주를 벗어나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제 제 요지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게으르거나,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인내력이 없다거나 해서 과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지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부지런하고, 세상은 그들의 관심을 지나치게 요구하며, 그래서 그들은 만사에 초인적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는 많은 정신적 자질 중 과학적 사고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고력의 ‘trade-off’가 일어난 것이죠.

기왕 경제 용어를 썼으니 조금 더 알은체를 해 보겠습니다. 비용과 효용 모델을 도입해서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한국인들에게 있어 과학적 사고를 관철할 때 얻는 효용은 비용에 비해 턱없이 모자랍니다. 혹시 “설명충”이라는 인칭명사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구태여 답하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참고할 수도 있을 사실관계를 굳이 전재(轉載)해 오는 봉사자들에게는 이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열심히 검색하고 책 찾아서 뭔가를 써 올리는 비용에 비해 돌아오는 효용이 절망적이니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한때 자신의 자존감을 ‘스피드왜건’으로 내세우던 설명 봉사자들은, 순식간에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미디어의 행태도 그렇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미디어가 사안에 대해 일어나야 할 반응과 감정을 그들이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모든 걸 끼워맞춘다고 하셨지요. 타당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시청률이며 접속자 수 따위의 얼마 안 되고 일회적인 수치 때문에 휘둘리는 바보스러운 작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안은 이미 알려져 있고 이해 가능하며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대단히 지겹고 반복적인 구태의연함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것을 각개 사안별로 가설 세워 검증하고 꼼꼼히 복기하는 것은 과연 비용 대비 효용을 얼마나 보상하는 일일까요? 한국인들은 그런 일에 머리를 낭비할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바보스럽게 모든 것을 정해진 틀에 끼워맞춘 다음 편도체가 시키는 대로 반응하겠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지금 우리가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차갑고 차분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제 삶이 어떤가 하면, 바보스럽고 구시대적이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 꽉꽉 들어차 있는 삶이라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교수님의 조국에서 주로 나오던 정치 경제 이슈가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제가 지난 20여년간 보아 온 이 나라에서 정치 이슈의 절대 다수는 “제발 뇌물 받지 마라”였고 경제 이슈의 대부분은 “제발 돈벌이로 사람 죽이지 마라”였습니다. 단언하건대 이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합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법치 질서가 더 긴요합니까?

심지어 정치와 경제를 벗어난 생활 전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속성장 산업화 시대의 생활 양식이 아직도 먹히는 줄 알고, 혹은 그 다음 단계의 사회에 대한 각오가 총체적으로 미흡해 있어서, 아무튼 여러 이유로 ‘지금껏 살아온 대로’ 꾸역꾸역 살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지만 각자의 사업체는 지금껏 해온 대로 성장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 각자는 추가 근무와 더 적은 행복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이 근본적 불행 양산 체계를 해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한강 다리로, 스마트폰으로 도피를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사고력은 터무니없이 값비싼 것입니다. 아카데미 수강료, 순수문학이나 기초학술 분야의 책, 문사철 전공수업 등은 그 돈을 내고 내 것으로 만들기엔 어디 가서 쓸 데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인문학의 위기”, “기초과학 홀대” 운운의 지엽적인 몇몇 용어로 묶여서 이 사회 전체의 병폐와 별 관련 없다는 식으로 분리시키는 행태조차도 불만족스럽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력이 없는 게 아니라, 과학적 사고력을 사용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비용 때문에 그걸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설명충 소리나 들을 게 뻔한데 팩트체크는 왜 하며, 아무나 한 명 지목해서 화내고 넘어가면 그만인 뉴스를 무슨 유난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피곤해 죽겠는데 어떻게 주말에 책을 펴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을 때, 오히려 열심히 사고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좀더 낫게 만들어준다는 확신이 설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과학자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네티즌 수사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그러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 그러했고 각종 게이트가 터졌을 때 그랬습니다. 그 사안들은 조금 덜 지겨웠고, 약간의 새로운 설명이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이 지겹디지겨운 사회가 조금은 변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죠. 이제 제 요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이 모든 행태는 철저하게 경제학적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경제학적으로는 언제나 합리적이었다는 뜻이죠.

친애하는 교수님께, 이 모든 의견에 찬동하여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사안이, 이 병폐가, 이 추한 사회가 교수님의 기고문 속 전제들처럼 단순하고 한심스럽고 직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과학적 사고는 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뇌에 더하여 과학적 사고가 가능한 ‘토양’까지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모든 국민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 정도는 아주 딴생각을 하고 살아도 좋다는 보장이라든가, 정부 혹 기업체가 성장과 결과 위주의 방침에서 벗어나 좀 다른 걸 목표하기 시작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 사고력에 대한 비용이 할인되고 효용이 오르면,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과학적 사고력을 구입하고 유통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저를 가장 슬프게 하며, 저로 하여금 교수님의 기고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부족한 졸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어진

Posted by 엽토군
:

백엔드

2017. 4. 20. 21:50

백엔드 작업을 하고 있다 보면 졸라리 외롭다.

사람들이 보는 건 그냥 "깔쌈한" 화면이지만 그거 출력시키려고 갖은 고생 다 하고 있는 건 사실 서버이고 백엔드 코드인데 겉으로 보이는 프론트엔드가 너무 화려하고 알기 쉬워서 그 뒤에서 작동하는 백엔드 작업은 정말 하나도 안 보이고 티도 안 나고 그렇다.

사람들이 사상을 대하는 태도가 딱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건 알리바바고 우버고 마윈이지만 그 사람들이 가진 비즈니스 마인드라는 게 어떤 것일지, 정말로 그들이 그들의 눈 뒤에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사람들은 정말로 관심이 없다.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서 다들 내게 식량을 자꾸 먹이려고 한다. 그거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다. 나도 안다. 그 갑갑한 마음을... 하지만 나도 갑갑하다.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코드를 뒤집어엎고 있을 때 옆에서 "와 완전다 뒤집어엎고있네 ㅋㅋ" 하고 받아쳐줄 놈이 한 명만 있어 주면 오죽 좋으랴만.

퇴근하고 돌아와서 DNS 설정 문의넣어 해결하고 veg 파일 좀 고쳐서 최종본 렌더링떠 돌려주고 템플릿 html 파일들을 죽어라 들여다보면서 네이버지도 버튼을 구글지도 버튼으로 갈아끼우고 문득 시계를 보니 아직 11시도 안 됐다. 쿠로사와의 대사를 빌자면, 다른 개발자들은 다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 졸라리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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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오늘의 멜버른은 바람이 분다. Windy Day로군, 문득 혼잣말을 했다가 간만에 이 노래가 떠올랐다. 솔직히 누군지도 모르겠는, 하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했던, 그리고 그들이 부른 건지도 모르고 우연히 좋아하게 되었던 노래가, 남반구 저 아래쪽 에어비앤비 숙소 단칸방에서 불현듯.



지난해 6월께부터 이번 달 13일까지 편의점에서 일했다.

오전 6시까지 출근하려면 늦어도 4시 45분에는 알람을 끄고 일어나야 했다. 내가 즐긴 순간은 아무도 내 잠을 방해하지 않는 5시 18분의 분당선 상행 첫차,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 6시 반쯤부터 8시까지의 매장이었다. 이제 여기서 1시에 퇴근해서 아무거나 간단히 점심으로 먹고 코인노래방에 가서 한숨 자고 2시까지 출근하면 투잡이 되겠군, 하는 계산에 선택한 매장이었다. 물론 폐기 도시락을 먹는 순간도 내가 즐긴 순간이었지만, 그건 좀 불규칙한 것이었어서.

6월 초에 수익사업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고 실질적 인수합병 계약이 해지된 바람에 택한 수단이었다. 그러기 직전 시절에,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편집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의 끝물에 '처리'해서 "내보낸" 기사가 하나 있었다. 일베인지 개드립인지에서 발굴한 독점 필자가 기고한, 오마이걸 군무 연구 콘텐츠였다. "이런 걸 해 보고 싶다"라는 게 가능한 시점이었어서, 디씨 펌글 캡처를 따라한 부가 콘텐츠도 만들어보고 아무튼 재밌게 열심히 잘 했다.

그리고는 이내 이 걸그룹의 존재 자체를 산업적으로 잘 잊어 두었다. 산업적으로 동원된 이 세상 모든 것이 대체로 그렇게 되듯이 말이다.

얼마나 깊게 잊고 있었냐면, 똑같은 노래가 똑같은 순서로 온 사방에 울려퍼지는 통에 지겨워 미칠 것 같은 K-POP TOP 100 차트 가운데 유난히 이 노래만큼은 귀에 덜 나쁘게 들려오던 그때에조차도, '아 이거 오마이걸인가 누군가 하는 걔들 노래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잊고 있었다. 그래야 했다. 그런 것 일일이 곱씹고 되새기고 있다간 '텍스트가 눈에 차서' 다음 글감 다음 콘텐츠를 처리할 수가 없다. 산업적으로 잊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어떤 것들은 그 공정의 마지막에 잊고 넘긴다는 과정이 있다. 킵, 폐기, 백업 서버에 업로드.



오마이걸도 그랬을까? "큐피드", "유리구슬", "Closer" 활동을 다 치고 나서 다들 서로 "다음 활동 잘 하면 되지"라고 위안을 삼았을까? 모르겠다. 적어도 0좋아요0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이론은 조금 복잡하지만 명백하다. 8인 군무를 살리는 시도는 흔치 않았다. 그들은 그걸 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이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편집장은 그 원본 텍스트의 후처리를 내게 맡겼고 나는 팔자에도 없이 이 걸그룹의 안무들을 공부한 다음 결을 정돈해서 냈다. 할 때는 참 열심히 공부했다. 잊을 땐 가차없이 잊었지만.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산업적으로 뭔가를 잊으면 그건 정말 잊어질까. 도구적으로 동원해서 수단적으로 사용한 다음 비용 대비 이윤 효율성을 따져서 덮어두고 폐기하고 잊고 넘어가는 것들은, 과연 그렇게 순순히 우리의 삶에서 사라져주는 것일까.

내가 매장을 지키고 있을 때만큼은 매장 음악을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대략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그때 이후로 사람들이 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엉금엉금 사무실로 들어가서 스피커 전원을 다시 켜면 으레 이 노래가 나오곤 했다. 전통적인 범주에 있는 코드, 성실한 멜로디 라인, 프로그래밍의 트릭으로 3분간 집중을 시킨다는 굉장히 올드스쿨한 (그런데 미끈하게 잘 빠진) 이 곡은, 번번이 나를 매장 관리 컴퓨터로 다시 이끌곤 했다. "이거 누가 부른 뭐라고? 윈디데이?"

그것은 "케이팝"이기를 거부한 케이팝이었다. 새된 음향, 변칙적 박자, 없는 화음 그리고 유행어 대잔치에 가까운 가사를 떡발라도 충분했을 것을, 그들은 기어코 유난스러우리만치 꿋꿋하게 고전적인(그렇다, 이게 고전적인 축에 든다!) 음악을 채택했고 평범하게 순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아마도 Closer의 유산이 없지 않았겠지. 적어도 그들은 다른 2군 걸그룹들이 이 박박 갈듯이 다음 기회를 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됐고 다음 활동이나 잘 하자"가 아니라, 뭔가를 분명히 보여주려고 애쓰면 누군가는 보아 준다는 한 가지 포인트를 잊어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당신이 이 음악을 싱거워하거나 안 좋아하셔도 괜찮아요"라는 자세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이렇게 뜻밖에도 기억을 한다. 항상 그렇게 "Windy Day"라는 곡의 정확한 제목과 아티스트를 보고 나서 조금 놀란 다음 다시 멍청하게 개인적으로 잊어버리던 내가, 무심하게 바람이 불어 지나가는 여기서 말이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몸에 익혀 온 모든 종류의 생활 템포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쓸모가 없으니까. 구입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항공비가 싼 여정을 살펴보니 김포에서 일요일 12시 반에 출발해 북경에서 12시간 체류하고 쿠알라룸푸르에 내리자마자 다시 8시간 꼬박 멜버른으로 날아가는 길이었다. 누구의 카톡도 전화도 공인인증서 로그인도 못 하는 시간들이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가진 돈의 거의 절반을 환전 예약해 버렸다. 지금 휴대폰에는 심지어 포인트 쌓는 편의점 앱이며 다음지도 앱조차도 삭제되고 없다. 이건 개인적인 망각이다.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멍청하달까 사정이 있달까 해서 지우고 잊고 넘기고 까먹은 것이다. 오마이걸의 신곡을 확인하는 번번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이내 흘러나오는 케이팝 곡(뭐가 됐든)에 경악했던 것처럼.

하지만 매일 하나씩은 내보내야 했던 기사와 콘텐츠 목록들이나, 모두가 똑같아서 아무도 구별이 안 되는 케이팝들 가운데서조차도, 어떤 산업적인 존재들은 기어코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와 인생을 다만 한 칸이라도 건설해 버린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다. 아니, 소중한 경험이다. 원래 후기산업사회의 산업 발달 양식이란 바로 그 경험을 매일매일 모두에게 구현시키겠다는 야망에서 움튼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이 욕구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면, 이것들이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이고 소박하며 인생에 결부되는 차원에서 처리돼야 한다는 값비싸고 오래되고 훌륭한 원칙 대신, 결국엔 포드식 컨베이어 벨트와 잡스식 스토어로 손쉽게 처리하고야 말았다. 물론 나는 지금도 믿는다. 어떤 사람은 코카콜라에서, 혹은 틴더 매칭에서, 아니면 하다못해 다키마쿠라 한 장에서도 인생의 환희를 맛본다. 인간은 그런 점에서 정말 생존력이 좋은 동물이지만, 그 생존 방식은 부작용을 낳는데, 그래서 이젠 소비자들마저도 그것들을 산업적으로 잊기 시작했고...

이제 더 길어지면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있어보이는 말은 이쯤 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지를 좀 정리하면서 끝내야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냐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다 잊은 줄 알았던 편의점에서의 40주를, 거기서 잠시나마 맛보았던 고요의 기쁨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들을 보며 "나를 향해 불어오는 너의 입김에 흔들"리는 감각을, 아마도 그 걸그룹이 느꼈을 그 고양감을, 그리고 삶은 지독하게도 끈질기게 저 알아서 꿋꿋이 잘도 이어져 간다는 싱겁고 진한 진리를 조금 맛을 보는 중이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게나 압축해서 에어비앤비로 빌린 빅토리아주 박스힐의 어느 집 9호실 침대에 누워 팔자 좋게 줄줄 출력하는 중이다.)



삶은 이어진다. 우리는 뭐 잘났다고 우리 삶의 어떤 부분들을 실수로, 얼떨결에, 멍청하게, 혹은 조작적으로 잊고 뜯어내고 무시하고 버리고 외면하지만, 생은 기어코 우리의 뺨을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갈기며 외치는 것이다. Could you tell, could you tell? (It's) Windy Day.



PS. +61 번호는 (공)사일륙 일공이 칠사공입니다. 한국어로 전화하시면 한국어로 답합니다. 옵투스로 할 계획이었는데 연락처가 너무 절실해서 급한 김에 보다폰으로 해버렸는데 잘한건지 못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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