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즘 하는 생각인데, 지나치게 나빴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되지만,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된다.

오말찬 페이지 포스팅을 리뷰하다가 문득 생각했던 것은, “전하세 예수” 모델의 “경배와 찬양”이야말로, 이게 폭발을 하던 90년대에 시작해 지금 이때까지, 교계와 거기 속한 이들 모두에게 양(+, positive)의 트라우마[각주:1]로 작용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소위 온 민족과 나라들(“All Nations”)을 위해, 온 민족과 나라가 떼로 들고일어나서, 한 자리에 와르르 모여 우르르 꺼르르 극적이고 스펙터클한 종교적 경험을 가져 그로부터 영적 각성을 일으킨다는 기획이고, 사실 이는 지극히 인공적으로 치밀하게 조제된 경험이었지만.

이 영상 댓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모두가 이 시절을 말도 못 하게 그리워한다. 저때가 좋았다고, 저때는 참 전세계를 돌며 헌신했었다고. 나는 이것이 그냥 훈훈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하나의 트라우마 증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걸 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우리는 근 20여 년간 꾸준하게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숱한 크고 작은 교회에서, 각종 선교 단체에서, 무슨 집회 무슨 부흥회 때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저 집회 참가자들이며 연주자며 하스데반 목사라도 된 듯이 목청을 높였고 손을 들었고 방언을 읊었다.

그리고 저 좋은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저것은 지나치게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 양(+)의 감정을 갖는 사후외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부의 감정을 갖는 음의 트라우마 ― 일반적으로 말하는 트라우마 ― 가 지나치게 안 좋은 경험이고, 재현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양의 트라우마는 지나치게 좋은 경험, 그래서 재현하고자 하지만 필연적으로 재현되지 못하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의 트라우마가 그렇듯, 양의 트라우마 역시 필연적으로 자가당착, 부조리, 불행으로 이어진다.

당장 전하세 예수 예배모델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만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그게 얼마나 임팩트 있고 강력한 경험이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매주 주말마다 저 많은 교회의 “찬양팀”들은 끔찍한 수준의 아마추어적 하위 음악 문화를 존속시키게 된 것인가. 그 집회, 그 밴드, 그 목사님의 음반을 듣고 카피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자기들이 그런 걸 올려드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그걸 콘솔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헛웃음 웃고 있는 동년배 작가의 차가운 냉소를 받으면서.

나는 이 트라우마가 21세기 인류 전체의 공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 보라. 20세기말 내내 ‘신세계가 온다! 미래가 온다!’ 잔뜩 부풀어서, 그 미래에 뒤지지 않으려고 온갖 혁신[각주:2]을 일궈내다가 막상 21세기가 닥치고 아이폰이니 알파고니 넷플릭스니 드론이니 하는 것 몇 개 받고 “이게 미래다! 끝~” 하면 어떨 거 같은가? 다들 ‘응? 이게 다야? 띠용~’ 하고 어리둥절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눈과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느라 못 돌이켜보았던 인류의 정신은 이쯤에서 잠시 휴지에 들어왔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좀 돌아보자니,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과거로부터의 양의 트라우마들이 이제금 다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70~90년대 콘텐츠/브랜드/컨셉의 리바이벌 붐은 그 증거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 그 시절 어린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돈을 쓸 수 있게 된 점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 수가 없다. 지금의 어린이들을 위한 콘텐츠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냥 다들 과거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 지목하는 부분이다. 나는 한끗만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이건 착취가 아니라, 불가능한 과거로의 추구이고, 하나의 사후외상 증세이다.

스트리트 파이터와 모탈 컴뱃이 지금도 새 작품이 나오는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조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들 그걸 그냥 과거 추억팔이가 아니라 진짜로 지금 소비하고 있단 말이야? 잠시 후에는 스타워즈 배틀프론트 2라면서(심지어 2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도 듣는다. 게임을 하지 않지만, 이건 충분히 이상한 징조다. 왜 이래? 뭐 다음엔 ‘풀하우스’나 ‘프렌즈’ 시트콤이라도 리메이크하려나 보지?

왜 아니겠는가? 풀하우스 리메이크는 정말로 진행중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까지의 세계적 호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들 꿈 같은 시절을 보냈거나 적어도 꿈을 꿀 수가 있었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런데 그게 지나치게, 불가능하게 좋았다. 파티는 끝났고 더 이상 그렇게까지 모든 것의 생산량이 급증할 수는 없게 됐다. 자연히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것도 해볼까?’ 하는 시도들이 하나둘 종적을 감췄다. 마치 모두가 하스데반 목사님의 좋은 집회가 끝난 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마음 속으로 내심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그 잔감을 적절히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한 탓에, 그것은 영 실망스럽기만 하던 알루미늄색의 21세기 초엽 내내 묻혀 있다가 이제 와서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발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험이 지나치게 좋기만 해도 문제지만, 그 지나치게 좋았던 경험의 속알맹이가 잘못돼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한국 라이트노벨계가 정확히 그렇다. ‘미얄’과 ‘오라전대’로 대표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꼬리를 찾아줘’ 류의 방향으로 갈 것인지 망설이던 한국 라이트노벨은 ‘나호’의 등장 이후 완전히 모에부타 컬처가 되어 버렸다. 적어도, 작가 지망생들의 세계에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카넬이 지나치게 크고 전형적이고 유일한 경험을 제공한 이래, 그 세계는 완전히 뒤틀려 버린 상태다.

그들은 서로에게는 설정이 괴상하다느니 맞춤법이 맞지 않다느니 스토리나 캐릭터가 이상하다느니 온갖 독설을 퍼붓지만, ‘감평’을 부탁하며 내놓는 작품이라는 것들이야말로 사실상 “나호가 되고 싶은데 그걸 대놓고 들킬 수는 없고 해서 이것저것 바꿔 끼워서 그럴듯하게 만들고 자기만의 오리지널 개그 몇 줄을 추가해 놓은” 딱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는데, 한국 라이트노벨 작가 지망생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정확히 ‘나와 호랑이님!’이 거기까지만인 것으로 딱 폐쇄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니 뭐가 나와도 막 그렇게 엄청 새롭거나 재미있지 않게 된다.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프랜차이즈,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상상의 세계와 지평이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이럴 수 없을 정도로 즐겁고 좋았던’ 경험을, 따라서 재현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재현하려는 시도를 의식적으로 배격해야 하는 양의 트라우마적 경험들을, ‘나호’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읽은 작가 지망생들은 미처 의식적으로 배격하지 못하고 그 트라우마에 걸려 그걸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추구는 불가능하고 부조리하며 따라서 불행하다. 예배자들이 ‘올네이션스’에 대해서, 게임 시장이 ‘스트리트 파이터’의 시절에 대해서, 모든 종류의 소비자들이 모든 종류의 90년대의 유산으로부터 지금 그러하다.

대책은 있을까. 평소의 지론을 펴 보자면, 적당히 좋고 온전히 건강한 것들의 보편화만이 이 병질을 다스릴 수가 있다.

우선 다들 환상을 좀 깨야 한다. 그렇게까지 엄청 좋은 스펙터클이, 그렇게까지 엄청 자주 일상적으로 우리 삶에 제공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폭풍우를 창 밖으로 바라보는 것은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폭풍우가 내릴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맑거나 대충 구름이 껴 있으며, 시중에 나온 소설의 대부분은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교훈적일 뿐 불세출의 걸작은 그야말로 불세출로 나온다. 모든 아이돌이 톱스타가 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예배 순서는 은혜 받는 기분과 성령 충만한 느낌이 그렇게까지 엄청나지는 않다든가 등등.

그리고 거기서 더 나가서, 그렇게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주어지는 각 분야의 대다수 콘텐츠들에서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오말찬 페이지가 교계 ‘예배 문화’ 비판과 병행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말씀 찬양’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커스나 예△전도단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부르든 어쨌든 적어도 가사는 훌륭함이 보장될 ‘시편’을 가지고 찬송하기 시작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라이트노벨도, 각종 게임 프랜차이즈도 그렇다. 대작이 될 필요 없고, 스펙이나 무슨 보너스 피처나 특전 상품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낸 돈 값을 하고 약속한 재미를 일정량 이상 준다는 가장 기초적인 데서 시작해 줄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소비자들도 ‘지금 여기에 새로 나온’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면, 그들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지금의 경험으로 덮어쓰거나 극복하는 일이 좀 가능해질 것이다. (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그 경험을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유사하지만 다른’ 새 경험을 해내는 것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양의 트라우마 역시 그렇게 극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매번 교회에 갈 때마다 왜 우리 교회 찬양 시간은 여의도광장의 그때 같지 않을까 하는 갑갑한 마음도, 왜 나의 추억이 담긴 이 시리즈가 지금 이렇게 우롱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하는 어처구니 없음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좋았던 경험은 그냥 좋았던 경험이다. 나빴던 경험이 그냥 옛날의 나빴던 경험이듯이. 게임이라는 세계에서, 예배라는 종교 의식에서, 아무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이 가능한 세계에서 그러하다. 지금까지는 다들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그간 우리가 갖고 살아 온 양의 트라우마들을 좀 진지하게 직면해야 하지 않나 싶다. 파티가 끝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가서 밥을 지어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일상을 좀 찾을 일이다. 그닥 좋지도 그닥 나쁘지도 않은, 하지만 건전한 경험들이 충만한 그런 세계를 향해서.

  1. 주류 심리학에 없는 개념이다. 그냥 말을 쉽게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니 오해 없으시길. [본문으로]
  2. 특히 오락문화에 있어서는 20세기말이 혁신이 넘치는 시대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오히려 지금의 업계는 그 시절의 업계에게 빚을 잔뜩 지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

평소처럼 월요일 저녁 키친핸드 근무 치면서 손으로는 분무질하고 머리로는 딴생각 이것저것 하다가 대강 정리한 것. 내일 멜번컵 공휴일 저녁근무도 있는데 이 시간 되도록 안자고 일안하고 뭐하는거람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자기들이 노는 놀이의 규칙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세대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놀이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 규칙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놀이의 핵심이고 가치이다. 소꿉놀이는 누가 아버지, 누가 어머니, 누가 자식이 되고 각자 무엇을 하는지를 정하고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땅따먹기는 땅에 네모 금을 긋고 돌을 줍는 데서 시작하고, 하다못해 "데덴찌"를 해도 무슨 구호를 외칠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 어린 시절에 스스로 놀이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대로 놀이를 하다가 집에 가는 경험이야말로 유사 이래 인류가 대대로 전수하며 역사를 앞으로 추동한 힘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뭔가가 고안되고 발견되고 발명될 때마다, 인류는 그에 대한 규칙을 수립하고 그 규칙대로 과감하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그런데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지금 이 나라의 아동과 청소년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그들은 성인 사회가 가공 및 규격화해 유통하는 몇 가지 특정한 형태의 오락과 제한된 종류의 쾌락만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를테면, 어렸을 적 전쟁놀이를 하며 느끼던 재미들 중 '롤플레잉'이나 '타격감' 등의 특정 측면만을 어른이 되어 선택적으로 부각해 일정한 목적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온라인 게임으로 체계화해 제공하면, 그들의 아랫세대는 "내가 딜러를 하니 네가 탱커를 하니 이번에 누가 승격을 하니" 하면서 PC방에 옹기종기 모여 주어진 목적에 따라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비디오 게임이 아동 청소년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유를 딱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 부분, 놀이의 본질로서 규칙을 수립하고 준수하는 주체의 의식과 경험을 대체 혹 희석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놀이"를 즐기며 재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지만, 과연 그것은 ― 인류가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던 바 ― 세계를 놀이하며 새 세계를 소화해내는 세대로의 성장의 바탕일까, 아니면 그저 '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오직 비디오 게임에게 아동 청소년을 책임지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따지면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TV도, 누구도 아주 무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길거리, 볼거리, 요깃거리가 다소나마 '놀이하는 주체'를 특정 재미에 길들이고 있는 한 말이다. 요컨대, 사회 전체가 운동장(playground)의 문을 닫고 각종 돈 내고 들어가는 "놀이문화공간"만을 장르별로 즐비하게 열어놓은 형국인데, 나는 이 시국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돈 내고 즐기는 놀이들의 공통점은, 목적을 특정하게 제시하고, 그 대신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특정한 쾌감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방탈출' 게임방이다. 내 돈 내고 방에 갇히는 놀이라니 뭐 이딴 게 다 있는가? 그러나 방탈출 게임방 자체는 아주 흥미진진한 경험인데, "암호/열쇠를 알아내기 어려운 공간에서 단서와 지혜를 모아 탈출하자!"라는 목적 아래 해당 공간이 치밀하게 구성돼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심지어, 각 방별로 테마를 갖춰서.

방탈출 게임방과 가장 대조해서 살펴볼 수 있는 놀이로서, 우리 어렸을 때 다같이 집에 가다가 한 번씩은 해 봤을 놀이를 떠올려 보고자 한다. "땅 밟으면 죽음"을 선언하는 순간부터, "땅"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안 밟으려고 보도 블록에 오르거나, 땅에 발을 최대한 짧게 디디려고 깡총거리거나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때 놀이는 결국 어디까지가 땅이냐, 왜 땅을 밟으면 죽느냐, 어떻게 하면 땅 밟아도 안 죽느냐, 죽으면 부활 못 하느냐 등을 정하다가 다들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외국에도 "땅바닥이 용암이야!"라는 비슷한 게임이 있을 정도로 이 경험은 아주 범세계적이다. 왜 그럴까? 실로 원초적인 놀이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뭔가를 정해서 잘 해내거나 잘 우기면 이길 수 있고, 그래서 아주 유쾌하고 무해하며, 훗날의 기약이 있는 것이다. 암호도 열쇠도 못 찾으면 담당자가 올 때까지 제한시간 내내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방탈출이란 "놀이"와는, 근본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규칙을 정할 수 있고, 대충 그냥 해 보면 되고, 잘 안 되면 우겨 볼 수 있고, '죽어도' 조만간 다시 할 수 있다는 점. 우연히도, 이런 측면들은 사람이 살아봄직한 문명 사회의 안전그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사실 이는 우연하지 않다. 선진 사회일수록, 어차피 인간사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한바탕 역할놀이일 뿐 그밖의 별볼일은 크게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그 진실을 충실히 구체화하는 제도와 예의와 사고방식을 지속시킴으로써, 새로운 놀잇감이 등장할 때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막지 않고 적극 장려해 사회 전체를 하나의 운동장으로 열어줄 따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아도, 일단 지금 우리 세대의 놀이란 갈수록 누군가가 주는 규칙과 목적을 가장 '끝판왕'으로 달성하는 것이 그 본질이 되어 가고 있다. '똥망겜'조차도 '혜자이벤트'가 뜨면 적금을 깨든 밤을 새우든 해서 보스를 깨야 직성이 풀리고, 드립 대회가 열린 것 같은 댓글창에서는 너도나도 최고 공감의 리액션을 한줄 넣어 '페북스타'가 되어 보려고 애를 쓴다. "마비노기"처럼 게임 속 세상 중에도 목적이 오픈된 곳이 있던 한때의 놀이 행태와는 정서부터가 다르다.

그래도 이 세대는 1990년대 어느 한때인가에는 각 동네의 정글짐을 손에서 쇠 냄새 날 때까지 헤집고 다녔던 적은 있다. 그 이후 세대는? 2000년대의 한때를 PC방 컵라면과 "서든어택"으로 보낸 세대는, 없던 룰을 만들거나, 룰의 구멍을 찾고 그걸 헤집거나 메우거나 하며, 작으나마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해 본 경험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그 여지를, 그런 놀잇감을, "운동장"을 제대로 주었는가?

그나마 가장 희망적으로 관측되는 것은 '마인크래프트'다. 현존하는 메이저 게임 중 거의 유일한 완전 오픈 월드 게임인 이 세계에서, 지금 아동청소년 세대는 '마인크래프트 캐릭터 역할놀이 유튜브 콘텐츠'라는 놀이를 찾아냈다. 이걸 자생적으로, 나름의 규칙과 방법과 문법을 찾아서 나온 놀이라고 덮어놓고 긍정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당장 이 놀이의 본령, 그 진짜 재미 포인트가 무엇일까만 해도 그렇다. 게임 세상을 빌렸을 뿐인 '역할놀이'일까, 아니면 별수없이 주어진 제반 여건 하에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기 존재감을 겨루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놀이'인 것일까.

뭔 짓을 하든 "좋아요, 구독, 공유, 댓글"을 많이 벌수록 더 크게 이긴다, 바로 이것이 유튜브 크리에이터 놀이의 핵심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위해 참여하는 경험들로부터 각자를 소외 내지 완전히 분리하게 된다. 주유소 직원 노인더러 "100원어치만 넣어 달라"라고 요구하고 이를 영상으로 올리는 인면몰수의 "꿀잼컨텐츠"는 그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요컨대, 놀이의 목적과 체계가 놀이 주체에게서 유래하거나 주체에 귀속되지 않을 때 그 게임은 성립은커녕 걷잡을 수 없이 파행할 여지가 크며, 지금 청소년들의 "놀이"가 바로 그런 파국의 위험을 안고 있지 않느냐 추측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파국이란 놀이 자체에 한하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 "지면에 붕 떠서 살아본 적밖에 없는 세대"의 장래에 대해 조잡하게 쓸 때도 생각한 것인데 ― 이 세대는 자기가 놀이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때가 되면 싫어도 어떤 규칙을 다함께 제정하고 따라야 한다는 진실을 마주했을 때 집단 패닉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초고령화가 저지하고 있는) 헤이세이 세대의 사회 등장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들이 정치를 해본 경험이 있는가? '블랙기업'을 고발하고 죄 주고 쓴맛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고작해야 <아이돌 사변>을 있는 힘껏 비웃는 데서 그쳤지 않은가? 기성 정치인들이 우경화에 가깝게 뭔가를 밀어붙이는 것에도, 어쩌면 어느 정도는 그런 차원의 문제 의식이 있지는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우경화를 옹호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이 나라라고 사정이 썩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이 나라 어린이 젊은이들도, 작은 정치, 작은 제도, 작은 판결, 작은 사회 역할 수행을 익숙하게 여러 번에 걸쳐서 해 본 경험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까지 '놀이터에서의 놀이'를 통해 쌓을 수 있었던 이 경험들이, 동네 놀이터가 완전히 개점휴업 중인 지금, 쌓이기는커녕 맛봐진 적도 없지 싶다. 자연히 이 세대에서 완전히 소멸한 공유 의식들이 있다. '못해도 된다', '져도 된다', '죽어도 된다', '까짓거 다시 하면 된다',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된다'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 세대는 반드시 잘 해야만 하는 게임을 하고, 지거나 죽으면 안 되는 파티에만 속해 보았으며, 한 번 잘못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입이니 대입이니 하는 갬블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세대다. 심지어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것조차도 어디서 느끼고 배운 적이 없으니, 못 견딜 만큼 뭔가가 싫어지면 무슨 수를 내거나 그냥 관두지 못한다. 대신, 열심히 궁리한 끝에, 그토록 요구받던 목표치 점수를 받아낸 다음 그 시험지에 "이제 됐어?" 한 줄 갈기고 여보란 듯이 몸을 던지고 만다.

관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정말 극단적인 전망을 제시해 드릴까? 이들은 사회에 나와서, 그동안 그들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패악과 구습을, 고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수용한 상태로 고착할 것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의무가 될 것이며, 왜 사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삶 투성이일 것이다. 절대 다수가 가라는 회사 가서 하라는 일 하고 받으라는 대출 받아 갚으라는 빚을 갚는 인생으로 점철할 것이며, 이게 뭔가 싶어지는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수가 '인간증발'을 할 것이다. 핵심은… 누구도 중간에 그렇게 선언할 수 있다고 배운 적이 없으므로, 더는 "씨발! 존나 재미없어! 이딴 거 그만하고 이제 딴 거 하고 놀면 안 돼?!"라고 중간에 외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계속하여, 잔잔히, 숨막히게, 그들이 보고 자란 교실 같은 세상을 이어갈 것이다.


사실은 문득, 요즘 게임이라는 건 다 최종 목표가 있고 다르게 놀 수가 없구나, 싶었던 데서 시작한 생각이다. 그럼 요즘 게임 말고는 별다른 놀이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걸까, 를 계속 생각하니, 종국에는 좀 깜깜한 세상을 그려보게 된다. 그럴 수밖에. 행동 목적이 어딘가에서 내려와 주어지는 한 그런 세상에 무슨 가망이 있을 리가 없다.

무슨 결론을 지어서 어디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머지 세대가 다 들고일어나서 떼로 위선이나 좀 떨어 주면 어떨는지. "못 해도 돼! 져도 돼! 이긴다고 뭐 별거 없어! 쟤가 반칙 쓴다 싶으면 반칙 쓴다고 말을 해! 규칙이 없으면 니가 제안해도 돼! 하다가 잘 안 되면 좀 쉬고 깍두기로 들어와서 시작할 수 있어! 힘들거나 싫으면 그만해도 돼! 너 재밌겠다 싶은 걸 너 하고 싶은 방식으로 실컷 하다가 질리면 집에 돌아가도 좋아!" 음. 써놓고 보니 2017년 한국의 맥락에서 이보다 더 위선적인 꼰대소리가 있을까 싶긴 하다.



추기1: 다 써놓고나서 사전을 찾아보니 영단어에서는 play와 game의 의미가 다르다. play가 일반적 의미의 놀이를 뜻한다면, game은 놀이 중에서도 특히 특정한 목적을 두고 겨루는 놀이만을 한정해 뜻한다. 그렇다면 위의 기나긴 잡설은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game이 아닌 play를 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추기2: 어딘가에 공유가 된 걸 보고 피드백들을 (셀프로) 받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이 요지에서 세대론을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었지 싶다. 한동안 20대란 뭔가 청년이란 뭔가 하는 걸 생각하고 살다 보니 그 버릇이 남아서 공연히 불필요한 논지가 들어갔다. 일단은 수긍해 둔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넓은 의미로서의 놀이 ― 자주적으로 각자의 역할과 행동 요령과 규범을 수립하고 다양한 안전 장치와 제도와 문화 아래 이를 수행하는 체계 ― 를 점점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는 세상 전체이지 특정 세대가 (특히 더) 그렇다는 말에는 별 근거가 없달까 핵심 주제가 못된다. 이제 글 전체를 수정해야 하는데 그건좀 미루고 싶구먼 ㅠ

Posted by 엽토군
:

딱히 정리는 안된 잡감들. 쓰(려)고 보니 순 꼰대소리인 부분 ㅇㅈ합니다.

현재 이 나라의 청년 세대에게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관념은 아주 만연하고 광범위하다. 공감을 사기 쉬워서 콘텐츠 제작이나 칼럼, 기사 작성에 많이들 이용했고 나도 그랬다. 심지어 “헬조선”의 지옥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로서 청년 사회 붕괴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 너도나도 아주 즐겁게 이생망 이야기를 했다. 그런 서사의 생산과 소비는 과연 유효하고 유익하며 유의미할 것이라 믿었다.

재수생과 반수 이야기 - Sepia☂

그러나 이런 만화가 디씨에서 나와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형국이 되고 나면 이제 ‘이번 생이 망했다’는 썰과 탄식은 오히려 하나의 장르, 좀 나쁘게 말하면 하나의 타령조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핵심은, 우리의 삶이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기록해 노출하고 묘사하는 일의 사회적 효용이 과연 그렇게 긍정적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서사의 생산 양상은 흡사 386, 486들이 송강호와 황정민을 앞세워서 그들의 젊은 날을 스크린으로 보상 및 상찬받고 싶어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동일한 점은 다들 모르지 않는 특정 세대의 목격담이며 경험담, 그들이 특정적으로 공유하는 정서와 사상을 굳이 예술 장르의 형태를 빌어 전시한다는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넥타이 부대’들은 그래도 뭔가 해봤다(해본다)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 비해 ‘청년들’은 결말부를 증발 내지 페이드 아웃시켜 버린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는 확실히 그 세대가 내다보았던 미래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386, 486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주인 의식이 충만했다면 그 직후 세대는 바로 그들, 삼촌 외숙부 할아버지뻘들에게서 “참교육을 시전”당한 입장이라 이렇다할 미래관 자체가 각별히 없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시궁창으로서의 현재, 그래도 한때는 퍽 멋모르게 즐거웠던 과거, 그리고 “이번 생은 분명 망했다”라는 대책 없고 확고부동한 결론뿐이다.

그런데 이 결론에 아무런 다음 스텝이나 돌파, 타개의 수가 전혀 없다 보니, 이 세대는 지금 이 결론의 무한 소급과 재생산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 만화가 그렇다. 현재 저 만화는 “공부 자극 확시켜주는 만화”로 홍보되어 유포되고 있는데, 여기서 아주 독특한 생산-유통-소비 행태가 관찰된다. 만화 줄거리 자체는 ‘별 노력 없이 그냥 가는 대로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인데, 이를 유통하는 측은 공부라는 노력이 없었을 때 이렇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아마 동시에 소비하는 입장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디테일 오진다”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과거로서의 디테일에 주목한다. 주로 같은 세대인 이 만화의 소비자들은 극단적으로 과장되고 극화된 주인공을 욕하는 것—그리고 작품이 원하는 대로 그 감상에서 거의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다—을 주된 감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이생망이라는 장르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논해도 좋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이것은 장르 예술의 형식이고 소비 패턴이다. 그 장르에만 나오는 요소들, 그 장르가 천착하는 정서와 논리 구조의 세팅, 그 장르에서 응당 받아야 할 감상과 교훈 등이 정형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확실한 장르가 된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 특정한 느낌과 생각이 반복적으로 공고해지는 것을, 이 만화를 포함한 꽤 많은 매체와 콘텐츠에서 점점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이생망이라는 장르가 주는 감상이 퇴폐미보다는 퇴폐 그 자체에 더 가까우며, 이 장르에 세팅되어 있는 가치와 관점과 관념 체계가 다분히 퇴행적이랄까 후진적이라는 데 있다. 퇴폐미는 적어도 엄숙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을 촉구하는 데 비해 퇴폐 자체는 어떤 것도 반성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런 것 따위 반성하지 않아도 좋다는 전제가 다분한데, 특히 이 만화의 결말부가 어떤 장면으로의 이행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압축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너(나)는 이마만큼 쓰레기 새끼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냐” 같은 말들은 정말로 “공부 자극”을 시켜준다기보다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효과를 일으켜 그냥 자기의 ‘쓰레기 같음’에 더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킨다. 정말 그러냐는 얘기는 묻지 마시라 그냥 이것 다 내 근거 없는 잡감이므로.

이 장르, 현시창 이생망 장르에 가장 가까운 역사상 유사 사례는 신파극이라고 보여진다. ‘불쌍한 새아가, 못된 시어머니’ 등으로 촌스럽게 정형화된 비극들은 분명 특정 세대 특정 집단에게는 지극히 유용하였으되 지금은 심지어 공중파 아침 드라마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장르화된 신파극을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주 간단하게도, 우리가 정말로 그런 세상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학의 미학으로 점철했던 신파극이 한물 갔듯이, 아주 정교하고 정당하며 말리기 어렵고 모두에게 쉽게 전파되는 자조의 미학으로서의 이생망 역시 적절한 시점에 종말할 것으로 예상되기는 하지만, 다만 이 장르가 한 세대의 뇌리에 어떤 정서를 얼마나 각인할 것인가가 우려스럽다. 실로 우리는 신파극이 낳은 손녀뻘 장르, 막장 드라마를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론은… 장르로서의 이생망, 장르로서의 현시창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장르는 다분히 자기파괴적이랄까 지속 불가능하달까 바람직하지 않달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별로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거니와 자꾸 되풀이할 소리가 못된다. 할 거면 어떤 타개, 돌파, 최소한의 확실한 골계미나 퇴폐미를 확보하고 가야 한다. 이런 장르, 현재 청년 세대가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표현상의 장르화를 이제는 덮어놓고 긍정하기 어렵다. 우리의 이번 생은 확실히 망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망했는지까지만을 거듭 되풀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일이 과연 어떤 예술적 역사적 공헌을 할 것인가 그런게 있긴 할까 하면 그건 의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4 생각을 놓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세트장 예능의 종언: <무한도전> 종영에 부쳐  (0) 2018.04.01
포주 레진  (0) 2018.01.31
텍스트  (0) 2017.01.10
무식이 배짱이라고 한두 줄 더 얹어 보자면  (0) 2016.07.18
의제에 대한 생각 둘  (0) 2016.04.30
Posted by 엽토군
:

저 박스 쓰고 눈구멍 통해서 실제 공연 관람을 했던 그 10분을 생각한다.

앉아서 보고 있던 것은 "청이와 삼둥이"였다. 휴대폰만 들고 급히 달려가서 각도를 확인하고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한 뒤 사진 나온 걸 확인하고 잠시 후 합류하겠다고 아주 잠깐 10분 정도 앉아있었다. 도대체 청이와삼둥이가 뭐하는 창극인가 애초에 창극이 뭔가 나도 좀 알자 싶어서. 가사 중간에 심청 얘기가 슬쩍슬쩍 나오길래 아 그거 맞구나 하고 확인만 하고(이 사실관계가 정말 그렇게 중요했다) 다시 또 뭔가에 쫓기듯이 슬며시 자리를 떠 다음 장소로 이동했던 걸로 기억한다.

홍보 콘텐츠로서 이 포스팅은 말하자면 배우 앞에 배경이 등장해 배우를 다 가리는 B컷이다. 단국대의 누가 나오는지(당사자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커리어 아니겠는가?) 배비장전이 뭐 하는 창극인지(사실 아직도 모른다. 이제 찾아볼 생각) 그걸 정말로 앉아서 즐겨보니 어땠다든지(그때 내 감상은 잘은 몰라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는 정보값은 정작 빈약하고 관객석의 누가 이상하다느니(사진 초점도 무게비중도 무대 주인공에 없다) "참신하고 유쾌"하다느니(내가 본 무대는 딱히 그렇지 않았다) 순 군말뿐이다. 공연을 미리 잘 알고 그걸 실제로 만끽하고서 감동을 느끼며 소식을 전해도 주인공들에게 각광을 줄까 말까인데 나는 이때 최후 수단이랍시고 비상물자처럼 갖고 있는 광목 한복 가져가서 당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굴 탓하거나 죄줄 생각은 없고 그냥 그랬다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안 되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즉석카메라 사진처럼 피어올라 이제야 좀 잘 보이는 느낌이다. 우리는 프로들이 뭔가 약은 요령으로 쉽게쉽게 식상하게 해낸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프로들은 즐길 것 다 즐기고 알 것 다 알아 가면서 제대로 치기 때문에 그게 쉬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3년간 꿈을 꾸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면 어쩐지 그렇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자체는 훌륭하다. 돈많이벌어 성공하면 5년에 한 번은 갈 생각이다. 전주 자체는 지금도 외국인들에게 서울 대신 추천할 만치 좋았으므로

Posted by 엽토군
:

웬만하면 한경오 얘기 안 적으려고 했는데 생각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서 한번 짚고 넘어가 보기로.

내 생각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이 불만인지조차 선명하지 않은 것 같다. 굵게 표시된 건 이 기사나 기사의 댓글이나 어디에도 정확히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내 포착되는 어떤 심심한 것.


[창간기획-미디어]‘가르치려 드는' 언론이 싫다는 사람들

“가르치려 든다.” 한·경·오 혹은 경향신문이 왜 싫으냐는 물음에 이 같은 인상비평이 다수 나왔다. “진보는 싸가지가 없다더니 한·경·오가 딱 그렇다”(건설노동자 임세현씨) “먹물 같은 느낌, 룸펜 같은 느낌”(오성근씨) “펜대를 잡고 권력을 쥐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회사원 이모씨) 같은 말들엔 경향신문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지녔다는 주장이 담겼다.

이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일부 남성들이 경향신문을 비판하듯 가치·지향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체나 화법 문제(“어려운 말로 비웃듯이 말한다” “수능 논술처럼 재미가 없다” “생각이 다르면 못 배웠거나 잘못했다고 하는 것 같다” 등), 독자와의 소통(“‘난 기사를 썼으니 넌 그냥 받아들여라’는 식의 태도” “틀렸으면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었으면” “오보를 정정하면서 설명하는 걸 본 적 없다” 등) 문제가 반영됐다.

[언론 입장에선 따옴표(“”)로 인용보도를 했을 뿐이지만, 커뮤니티에선 ‘일방적 주장의 전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용보도했을뿐이지만??? 그 부분 이용은 누가 결정했습니까? 

인용보도만하면 객관성을 가집니까. 이런 글 쓰면서 부끄럽지않습니까.

[특히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 담긴 발언을 여과없이 썼을 경우엔 언론이 그 정치인의 ‘편을 들었다’는 해석까지 낳는다.]=편은 들었지만 편든게 아니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기레기를 비판하는 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그건 적폐청산이라는거야 

알겠냐 무식한 기레기들아

신문 헤드라인과 본문 내용들을 쭉 비교판단해보시길. 독자를 낚으려고 하거나 가르치려고 하거나. 그런 기사 수도없이 많이 겪음. 특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할 때가 젤 짜증. 본인들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과 사건을 나열하는 순서와 문체에서 티나 남. 어쨌든 기자가 원하는 독해방식이 분명히 있고. 우린 그게 싫은거고. 

팩트를 중심으로 써달라고요. 알아서 판단할 테니. 아마 우리도 기자들과 비교했을 때, 지식, 논리력, 판단력, 학벌 등의 면에서 전혀 달리지 않을 거임. 기자님들만 잘나지 않았다구요.

해방후 70년 이상을 해쳐먹어온 기득권자들에 대해서 펜대를 세웠어야지, 왜 그나마 잘해보려는 사람들 발목을 잡아채냐고? 최소한 나라가 정상 비스무리하게라도 되고나서 입진보 노릇을 하던지.

지금 정국을 봐라. 아직도 갈길이 멀고 첩첩산중인데 협조 좀 해라. 욕먹는 이유는 아주 간단 명료한것.

문재인 이뻐서 빨아주라는것 아니다. 최소한 똥덩어리들이라도 치울수 있게 도와주라고.


  • 엘리트주의 - 소수 집약성을 갖는 대표 권위자가 옳을 확률이 높다는 입장
  • 탈권위주의 - 정당성이 없는 어떤 권위도 용납하지 않는 입장
  • 포퓰리즘 - 대중성을 갖는 대상이 옳을 확률이 높다는 입장
  • 반지성주의 - 지적 판단 이외의 기준을 중시하는 입장
  • 지적 권태와 식상감 - 그 내용이 그 내용이라는 지겨움과 따분함
  • 진보주의 - 총체적인 의미에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입장
  • 자유주의 - 총체적인 의미에서, 간섭과 규제를 배제하자는 입장
  • PD - 이른바 민중민주(파), 한반도 내 사회모순을 계급문제로 이해하는 노선
  • 정치경제적 자유주의 - 선거제도 및 정치활동에서의 자유와 최소한의 사회복지를 담보하는 자유시장경제, 그리고 이 지향에 일체의 간섭과 규제를 배제하는 입장을 모두 짝으로 하여 추구하는 노선
  • 팩트주의 - 주로 1차 데이터 형태의, 반박 불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입장
  • 비평주의 - 주로 종합적 판단 형태의, 납득 가능한 주관적 진실을 중시하는 입장
  • 인상비평 - 구체적인 사례와 논리적 정당화를 생략한 총체적 인상을 비평하는 일
  • 한경오(프) -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소위 대한민국 내 진보주의 논조 언론들
  • 적폐청산 - 오랫동안 쌓인 폐단과 악습 및 그 방조자를 제거하는 일
  • 저널리즘 - 사실관계의 취합과 배치에 의해 정보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일
더 있을텐데 생각이 안난다

생각은 당연히 정리 안되는데 대강 이런 느낌. 한경오 비판자들은 팩트주의에 입각한 엘리트주의 비판과 적폐청산을 하고 싶어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포퓰리즘에 논리 기반을 둔 탈권위주의와 가장 순박한 형태의 정치경제적 자유주의가 배경하고 있다. 한경오는 바로 그 배경을 배격하는 비평주의 저널리즘을 하고 싶어하는데, 그 배경에는 지적으로 권태롭고 식상해진 PD 계열의 진보주의가 있는 것. 다시 이 배경을 한경오 비판자들은 배격하고 있다. 이로써 이쪽은 저쪽이 반지성주의로 보이고 저쪽은 이쪽이 인상비평으로 보이는 평행비판이 발생함.

'2 다른 이들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7-zip으로 외국 언어 압축파일 압축풀기  (0) 2021.01.26
양의 트라우마  (0) 2017.12.05
#AnimeRight  (0) 2017.02.11
주식회사 버그햄버그버그  (0) 2016.03.21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2가지  (0) 2016.01.26
Posted by 엽토군
: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01)
0 주니어 PHP 개발자 (6)
1 내 (326)
2 다른 이들의 (253)
3 늘어놓은 (37)
4 생각을 놓은 (71)
5 외치는 (76)
9 도저히 분류못함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