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히브리어라는 언어 자체에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분들, 히브리 문화 연구자 여러분과 학계의 성과를, 최대한의 성의로서 존중하고 있다. 이 글은 누구와도 면전에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여 작성해 공개하는 서면상의 사적 입장 표명이다.
1-1. 히브리어를 공부하면 유익이 있다는 충고나 제언들을 아주 가끔씩 접한다. 온라인 광고 배너에서, “[펌]좋은묵상글” 같은 출처 불명의 좋은 말들에서, 주변 신앙인들의 지나가는 말로, SNS 영상으로, 출판사 홍보로.
1-2. 그럴까?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정확히는, 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 배우는 것인데 뭐 어떤가? 심지어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언어를 직접 배워서, 그 참뜻을 새기며 읽을 수 있게 된다는데.
1-3. 조금 더 알아보고 조금 냉정해져서 조금 위에서 둘러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정확히는, 해로울 여지가 있다. 내가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현재 고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1-4. 핵심적인 의문은, 왜 한국인이 히브리어를, 특히 고전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느냐는 점이며, 그게 과연 특정 외국어에 의한 효용을 추구하는 일인지, 과연 그 효용이 있기는 한지, 다른 부정적 부작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하는 점들에 있어서 그렇다.
2-1. 먼저, 외국어 학습 자체의 차원에서. “유익이 있”다고 선전되는, 그래서 면학이 권고되는 대상으로서의 히브리어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압도적인 대다수의 경우 고전 히브리어다.
2-2. 히브리어는 엄밀히 나누어서 옛날 성서 시대에나 사용되던 고대의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의 2가지로 구분되고, 오늘날 실존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 히브리어를 읽고 쓴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심지어 이런 기초적 객관 사실관계조차 모르고 히브리어를 덥석 권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3. 이것은 언어 학습 동기 부여의 차원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이두와 향찰을 공부하는 꼴인데, 이런 이치의 학습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권고하는 속뜻이란 무엇인가? 실상은 적나라하다. “성경 작성에 사용된 문자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두와 향찰을 공부하는 이유가 거지반 삼국 시대의 글을 읽기 위함에 다름아니듯이.
2-4.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라는 것은, 오늘날 그 외국어를 쓰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주체들과 소통하겠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는 지금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 언어는 그것을 배우는 누군가에 의해 확산 및 확장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 작용 하에 전수되리라고 기대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 공부란 본디 히브리 문화권을 이해하고 히브리어 구사자들과 소통하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편이 건전하다 할 것이다.
2-5. 2-3과 2-4를 종합하여, 나에게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게, 이러한 사회적 상호 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확산될 뿐인 일련의 지식/정보/논리 체계에 지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2-3에서 제기한 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것의 실상은 구약성서라는 문서를 ‘나름의 기호 체계를 도입해 해석’한다는 독립적이고 단일한 목적을 가질 뿐, 지금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며 그 세계에 대해서는 그 흥미를 일절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2-6. 2-5에서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증명이 있다. 히브리어를 공부한다는, 혹은 공부하라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들 중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어 구사자, 셈족 문화 등에까지 관심을 확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성지순례”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 수준으로, 이마저도 해당 문화에 대한 교류의 차원이 아니라, 본인들이 주고받은 학술적 내용의 지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견학의 일환인 경우가 태반이다.
2-7. 이것은 내게 일반적인 외국어 공부 행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주 특수한 학술적 교습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3-1. 이 학술 교습의 논리는 극히 간명하다. 구약성서는 절대 다수가 고전 히브리어로 정리되어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본뜻을 읽고 싶다면 고전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 없다. 이 교습을 권면하는 일부가 심지어 “기득권이 어려운 히브리어에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온 역사”니 “누구나 공평하게 배워서 해석” 운운을 내세우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3-2.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서의 본뜻이란 문자에의 착념이며 그 완벽한 해독 따위에서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필자와 제1독자를 포함한 집필 시점의 총체적 맥락을 감안하여 경건하고 성심 있는 자세로 그 문의(文義)를 탐구할 때 드러난다. 이는 그 이치가 사실상 대다수 학자가 고전(古典)을 탐구할 때의 일과 진배없다.
3-3. 글뜻을 읽기 위해 글[文字言語] 자체를 배우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소위 “글로 인하여 글뜻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라든가 “글이야말로 글뜻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글을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 글뜻을 다 알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선동과 호도(糊塗)에 다름아니다.
3-4. 3-3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집필 과정에서 그 요점보다 그 요점을 기술하기 위해 동원한 문자언어의 엄밀성에 더 치중한 일이 없다. 이는 항간의 이치에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둘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전승 과정에서 글과 글뜻의 이격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전승된 일이 없다. 그럴 바에는, 글을 베껴서 전승해 보아야 오해만 더 키울 것이 분명하므로 글 자체를 없애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어떤 지혜 전승들이 암송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데는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한다.)
3-5. 3-4에 의하여 3-3을 강화하면 다음과 같게 된다. 즉, 그것이 고전인 한은, 그 고전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 고전을 작성한 고대 언어를 모두가 정말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절실한 까닭이란 없다. 필요한 것은 고전에 통달한 현대 전문 학자들의 적절하고 체계화된 번역과 주해와 교훈일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그 누구도 결코 완전히는 알 수 없는 옛 성현들의 당대 말씨를 샅샅이 새기는 따위의 언어학적 재간일 리는 없다.
3-6. 3-5에 덧붙이자면, 히브리어 강습자들은 이를테면 히브리어에서 “눈[目]”이 무엇을 뜻하니, “머리”의 어원과 여러 뜻이 무엇이니, 첫번째 두번째 알파벳이 어떤 어감을 갖느니 따위를 대단히 진지하게 강의한다고 한다. 구약성서와 같이 방대하고 장황한 고전을 이런 수작으로 읽는데, 그 결말이 “창세기 1장 2절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이 숨겨져 계시” 운운 기상천외하고 자기중심적인 과잉해석으로 귀착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는지.
3-6. 구약성서를 고전으로 간주하는 한, 3-2와 3-5에 의하여, 3-1에서 소개한 (고전) 히브리어 강습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속된말로 짧게 요약하면, 그렇게까지 빡세게 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 어느 부분도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4-1. 구약성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고전 히브리어 강습을 두둔하는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바 또 하나의 논거란, 아무튼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정도라면 성서를 탐독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데는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4-2. 개신교 내에는 세대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대체로 신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예언과 계시들을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보다는 해독의 대상으로서의 명제로써 간주하고, 그렇게 성경을 체계화했을 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세대(들)” 개념을 현실상의 타임라인에 대입하려 하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지 창조로부터 인류 역사 최종 종료 시점까지의 모든 기간을 대략 7세대로 구분한다고 하며, 이 중 후반부 세대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서 ‘유태인(혈통 위주의 유대인 사회)의 집단 회심과 (지리적 의미에서 이스라엘로의) 회귀’를 중요하게 여긴다.
4-3. 만약 당신이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신구약 성경은 그 요점이 더 중요하며, 예언과 계시를 모든 실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묵시라고 인정하고, 어떤 세대에서 다른 어떤 세대로 역사가 이행하는 일은 없으며, 또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민족의 지구상 특정 위치로의 귀환 따위가 정말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유태인에게 그다지 각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유태인, 즉 히브리 문화권과 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4. 개신교 내에는 또한 신사도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각종 이적과 기사가, 대체로는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 문자적으로,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은 특히 방언과 예언이라는 두 가지의 특별한 신적 능력(“은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간구하는데, 여기서의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지구상 특정 언어문화권에서 유효하게 통용 가능한 실제 외국어를 의미한다.
4-5. 만약 당신이 신사도주의자가 아니라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사도행전상의 이적과 기사는 교회 공동체 건설 최초 단계에서 특수하게 발생한 것이며, 오늘날의 일상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방언이며 예언 등의 은사에 관심을 가질 각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방언과 예언, 특히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의 방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6. 4-3과 4-5를 염두에 두고 4-1의 논거에서 말하는 바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재고하라. 이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관점인가? 그것은 모든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단지 신학적 난제를 규명하는 차원의 “새로운” 관점인가, 아니면 교회 전체가 동의하기는 어려운 특정 입장들의 관심에 복무하여 그 입장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사되고 편집된 일련의 이해 체계로서의 관점일 가능성이 있는가?
4-7. 4-6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이다. 요컨대 히브리어를 배운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회심이나 성경 언어 방언 등에 대한 엄한 관심과 상관 관계가 없기 어렵다는 말이다.
5-1. 마지막으로 내가 믿는 바를 조금 고백하고 끝맺고자 한다. 이는 히브리어 공부를 권하는 이들의 성심을 야멸차게 모독하지 않기 위함이다.
5-2. 만일 하나님이 고전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그는 고전 히브리어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로도, 한국말로도, 에스페란토어로도, 그 어떤 의미 기호 전달 체계로도 말씀하실 수 있다. 애초에 신이신 하나님께서 동물인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가해하며 초월적인 사건인 관계로, 그 사건이 일어나는 한, 그때의 수단이며 매체가 무엇이냐 따위의 문제는 철저히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이 되는 까닭이다.
5-3. 만일 구약성서가 고전 히브리어로 전승되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신적 질서와 계획 안에서 완전히 필연적으로 혹은 완전히 우연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비유컨대, 이는 인간이 어떤 프로그램을 구현함에 있어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는가와 그 이치가 꼭 같다고 할 수 있다.
5-4. 하나님이 성서를 주셨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읽으라고 주셨을 턱은 없는 까닭에, 하나님은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각자가 이해해야 할 수준까지 성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일체의 여건과 방안을 이미 강구하여 주셨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라도.
5-5. 만약 당신이 5-2, 5-3, 5-4에 찬동할 수 있다면, 나뿐 아니라 당신 역시, 구약성서의 은혜와 신비를 내 삶에서 깨달아 알기 위해 특별히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는지의 근심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999-1. 이 글은 사실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지만, 김우현 PD와 그 주변 “동역자”들의 성지순례니 원어성경이니 히브리어 공부니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누구든지 또한 좀더 많이들 찾아 읽으시길 바라는 바다.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정말이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심지어 일상에서 쓸모도 거의 없다. 차라리 수능 제2외국어에 등재돼 있는 아랍어 같은 걸 배우는 것이, 소위 이스라엘 회복 선교라는 것에는 더 도움이 된다.
999-2. "'니크다'라는 이름의 모음 기호는 존재하고 있으나 이 기호는 일반적인 경우 생략되며, 외래어 표기나 성서 등의 중요한 글에서 매우 정확히 표기할 필요가 있는 경우나, 히브리어 초급 교과서에서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경우 정도에나 쓰인다."
999-3. 근거 없는 사설이라서 본문에는 안 적었지만, 내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오늘날 히브리어란 사실상 WASP-이스라엘 군사패권의 지지자들을 집결하는 시오니즘의 국제언어로 복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비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칭 남은 자들이라는 비주류 유사신학 강도사들이 유튜브 영상 찍을 때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군이 저 무시무시한 대테러 대량 살상 무기들 이름 지을 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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