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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씨 교회 다녀? 난 어진 씨 보면 그 엔트로피라고 해야 하나? 그 차분한 느낌이 하나도 없고 막 부산스러워서 안 그런 줄 알았어. 사실 나도 교회 다니거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출석만 하는 건데, 목사님 말씀 들어 보면 다 결국 하나야. 익명화(anonymized)되는 거야. 자아를 죽이고, 내려놓고, 그분 말씀만 잘 순종하고 그러라는 거지. 살면서 뭐 선택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 근데 그걸 내가 하나하나 선택할 때마다 그게 다 짐이 된다 이거야. 그걸 다 내려놓으라 이거지. 요즘 우리 목사님이 거기에 꽂혀 계셔서 다 그 얘기거든.

위와 같이 황당한 얘기를 회사 회식자리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듣게 되어서, 그때 바로 얘기하면 술주정으로 들을까 봐 일부러 안 했던 이야기를 좀 적어놓으려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그거 순 불교 가르침 같은데요?" 정도로 퉁쳐 비비고 지나갔던 것인데 그걸 좀 길게 쓸 생각이다.


1.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아무도 해달란 적 없던 익명화를 요구하는가?

그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요약과 그 용어는, 나도 해석된 것을 전해 받아 들은 바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그 "목사님"이 정말로 '익명화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멘?' 운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가 설교를 구경하고 계신 분이 '가만히 들어 보니 결국 그 소리더라'라고 한다면, 그건 대상에 대한 전반적·전인적인 요약으로서 충분히 유효하다 할 정황이 있다 할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요약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이게 과연 기독교적 가치인가? 아니오!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시다. 근거 성구가 한둘이 아니다. 마태를 보고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심지어 이것은 우연한 인간적 습관이 아니고 오히려 이유가 있어서 나오는 본보기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버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더러 게바라고 부르는 식으로) 이름을 더 주시면 주셨지.

복음서 역시 (사실은 그리고 성경 전체가) 사람의 신원 파악(identification)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성경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누가 누군지 각각 무엇을 했는지 그 명부를 치사하다시피 세세하게 남겨 전하고 있다. 열두 지파, 열두 제자, 바울이 로마서 끝에서 안부를 물은 자매 형제들의 이름, 아니면 누가 누구의 자손 누구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구약이 지긋지긋하게 지키던 연표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연표를 여기 또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기독교는 익명화를 요구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내 전화번호와 금융기관이 서로 그러하듯이, 익명화를 요구하는 그 어떤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피싱이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그 "말씀"들은 뭘 말하고 있었기에, 좍 걸러 듣고 요약한 엑기스가 "익명화"란 말인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황망하고 아찔하다.

그건 아마도, 무리와 제자들 보고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에 근거하고 있는 얘기이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를 영어 성경들은 하나같이 'deny yourself'라고 번역해 놨는데, deny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관계'를 정정할 때,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때 쓰는 동사라고 한다. 따라서 deny oneself는 이를테면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여러분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면 당신은 뭔데요? 목사입니까? 선지자입니까?' 같은 질문을 들으면 그때는 등에 지워진 십자가를 보여주며 '나는 그저 예수님 따르는 사람올시다' 대답하라는 것, 그게 제자로의 부르심의 총체이다.

더도 덜도 아니라는 점, 이 이상도 이하도 요구하신 적 없음에 주목하자.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을 "자기 존재를 지우고 몰개성하게 군중 속으로 숨도록 하고"로 읽는다면, 이는 어떤 경우에도 오독이거나 비약이다. 논리는 간단한데, 'deny oneself'에 개성을 버리라든가 군중 속에 숨으라거나 눈에 띄지 않게 남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라거나 하는 의미는 내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등종교의 공통 요건 중 하나인 '자기부정'은 절망적 상태의 자아상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의미할 뿐이지, 무슨 실천적인 의미에서도 익명성에의 추구 등을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시 의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대체 누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의미에서의 '익명화된 교인'을 말하고 생각하게 하는가?

잠시 후에 적겠지만, 이건 교회라는 시스템이 원하는 한 마리 양에 관한 이야기일 뿐 제자도와는 일체 하등 아무 상관없다.

2. 뭘 내려놓고 집어들고 하는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뻘소리인가?

이 단락은 일단 결론부터 적자면, 그 "목사님"의 설교는 제자도에서의 자기 부정과 일생 여정에서의 행동 강령을 아무렇게나 짬뽕해 놓음으로써 세속적 종교 생활을 수요하는 다수 대중의 기대를 만족하고 통속적 종교관을 유지함으로써 그 청중을 호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들으나마나한 좋은 말씀 매주 똑같이 약간씩 바꿔서 들려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결론이다.

어떻게 그렇게 감히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어도 보지 않고 함부로 막 품평하느냐고? "자아를 내려놓" 운운하며 각종 관념을 유행어 하나로 묶어 팔아 기어코 기억까지 시키는 걸 보면 필시 그러하다.

이쯤에서 좀 솔직해져야겠는데, "내려놓음"은 처음에는 안타깝게 오독되었고, '더 내려놓음'에 와서는 악랄하게 영합을 한 아이디어라는 게 내 일관된 생각이다. 규장에서 "내려놓음"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한창 경건한 신학생 모드였고, 그래서 그 책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뭘 정말로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가 내려놓겠습니다"는 우선 모순이며 결국 오만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내려놓으라" 하시는 것은, 그게 뭐든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추구해도 좋은 유일한 것은 주님뿐임을 깨우쳐 주시려는 뜻이지, 그거만 딱 내려놓으면 무슨 우는 아이 젖 주듯이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 같은 거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려놓음은, 그리고 "더 내려놓음"은, 더 큰 축복, 더 큰 감사를 매우 강하게 암시한다. 그건 겉으로만 건강하고 속으로는 너무나 달콤해 물러 터지는 이야기다.

"권리 포기"라는 용어조차도 이런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비슷하게 취약하고 불안하다. 분명 원래는 피조물의 피조물됨을 상기시킬 목적이었던 이 아이디어들은, 착한 일에 대한 댓가를 바라는 우리의 "세상적" 도덕 관념에 멋대로 근거하여, 더 좋은 뭔가를 위해 잠깐의 힘든 시절을 겪자는 얘기로 소비되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이 집에 가다 말고 여러분의 교통카드를 내려놓는다(혹은 교통카드 이용 권리를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이유가 '오늘 내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서'라고 하자. 이게 어떻게 은혜로운 사건인가? 그냥 대책 없는 충동이지. 하지만 우리는 몇 분 잠깐 기도하고 나와서는 그간의 사업상 결정 일체를 뒤집고 수많은 타인의 계획을 엎으며 뭔가를 했더니 더 큰 "은혜"와 "감사 제목"을 주셨다는 간증을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어코 인지부조화가 오고 말았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버렸다는 그것이 사실 단 한 번도 그들의 것이었던 적은 없는데.

심지어 번뇌를 내려놓고 해방되라는 소리는 아주 스토아철학적인 것이어서 대다수 고등 종교의 관념을 꿰뚫는 한 가지 테마이기도 한 바, 내려놓으라는 말은, 돌려쓰면 쓸수록 공허하고 납작한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런 썰이 있었지 않은가? 성폭행당한 기억을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버드 나온 스님한테 물어봤더니 그 번뇌도 버려라 운운했다던. 이것은 아주 놀랍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개소리인데, 왜냐하면 자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종교철학적 관념은 필연적으로 일체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번뇌 탈출이라는 테마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무 쉽거든.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 안에서는 배고픔도 사회문제도 트라우마도 다 그저 공이 된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그냥 그러려고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프로테스탄트이며, 기독교는 인간의 자아상보다는 그걸 포함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삼위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다. 하지만 당장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안락, 현실로부터의 적당한 도피와 허황된 자아상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들에게 '내려놓기'는 위대한 깨달음의 경지였고 그래서 그토록 유행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고통이 없는 상태이고,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은 그걸 위한 액면상의 종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진짜로 말을 꺼내 볼 생각인데, 바로 그 액면상의 형식적 종교를 공급하는 자들이야말로, 이러한 통속적 비대칭적 소시민적 종교인들을 양성해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은 확신범들이라는 생각이다.

3. 누가 누구더러 무슨 근거로 누구 좋으라고 다 내려놔라 자기를 버려라 운운하는가?

물론 권면과 동기부여의 차원에서 비유적으로 일컬어 깨우치는 말이라면 내려놓으라니 자기를 버리라니 하는 말의 효용이 1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효용, 불경제, 자기모순이 이와 같이 명확한데도 그걸 매주 실질적으로 똑같이 반복하는 설법자들, 설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이치란 대체 무엇일까?

간단하다. 삯꾼 목자에게도 양떼 자체는 필요한 것이다.

'네 것을 내려놓으라', '너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 되어 세계 만방 사람들과 영생할 것이다' 같은 말을, 그 은혜롭고 위대한 맥락에서 썩둑 들어내어 그 문자들 그대로만 되풀이 들려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과연 "아! 나는 부르심 받은 제자이지만 내가 제자된 것조차도 나의 노력이 아니고 값없는 하나님 은혜이구나! 이 놀라운 역설이 주는 감격으로 삶을 승화해야지!" 하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건 극소수 적극적인 신앙인들이 누리는 행운이다. 일요일 오전 11시 반부터 12시 정도까지만 말씀 구경을 하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냥 문자 그대로 들린다. '아 나는 아무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 자신을 그런 의미에서 부정해야겠네. 천국도 그냥 여기처럼 익명의 착한 존재로 살면 되는 곳인가 보다.'

심지어 그들은 행정적, 구조적으로도 철저하게 익명화되며 그 댓가로 생활에 어떤 위협이나 변혁도 가져오지 않는 소비적 종교 생활을 보장받는다. 관람객, 양떼 속 양이 되는 것이다.

대다수 교회 의자는 어느 자리에 누가 앉든 말든 상관없는 배치로 되어 있고, 교회 건축의 요체는 모든 청중이 모여 집중하는 단 하나의 점이 어디냐와 그 대중이 얼마나 빠르게 입퇴장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르르 몰려와 정해진 타이밍에 할렐루야 아멘 하고 지하주차장에서 쏟아져 나와 집으로 흩어지는 경험은,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갔다 오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그 한두 시간 동안 시청하는 내용만 적당히 괜찮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윤리적인 생각으로 기분을 전환하다 오는 주말 여가생활이 되고 만다. 흔히들 상투조로 "예배는 드리는 거지 보는 거 아닙니다" 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등장인물이 "우리 예배를 드리십시다? 아멘?" 하면 관객이 "아멘!" 외치는 게 규칙이라면, 그게 동네 오타쿠들의 "라이브 뷰잉"이지 무슨 예배냐는 말이다.

이걸 유지하려면 뭘 해야 할까? 뭘 하면 안 된다. 매주 매년 대동소이하게, 사실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주말 여가생활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인 사람들이 있다. 그 존재는 필연적이다. 여가 생활의 형식을 띠며 개인적 심신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속적 종교란 본질적으로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service라는 영단어가 실제로 이런 맥락의 '예배'를 의미하겠는가?) 윤리도덕적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해 소비자 고객에게 공급하고 그 댓가로 프로젝트 추진 기금 등을 합법적으로 모금 받으며 대중의 멸렬한 현실로부터 의식적으로 동떨어질 권리를 얻는 이들은,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더 받고 덜 받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한 가지 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참 좋다" 하는 얘기는 계속 들으면서 "목사님 그 말씀은 좀 부담된다" 하는 말은 가급적 안 듣도록 할 것.

자아를 죽이라느니 다 내려놓으라느니 하는 얘기들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용되는 화제들이다. 영양학적으로는 불균형하고 결과적으로는 교활한 것이어서, 이렇게 많이 팔면 안 되는데도 말이다.

앞서 살펴본 바 자기를 익명화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실제 가르침이 아닌데도 발신되거나 잘못 수신되는데,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게 실은 궁극적으로 '내려놓기',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기 주제에 느슨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며, 그 주제는 이미 고찰하였듯이 자아의 아파테이아 상태에 관심이 있는 대다수 종교 소비자 대중의 수요와 욕망을 정확히 지시하므로 유행처럼 공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생산의 다른 한 견인축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종교를 소비할 청중을 유지하기 위한 서비스로서의 종교 기획인 것이다. 이미 자아가 없는 신도들은 누구도 두드러질 수 없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닌 건물에 모여 자아 없이 살라는 텅 빈 가르침을 듣는데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너무나 깊게 와닿는다. 그 좋았던 경험은 다시 다음 주에 그 건물에 모일 빌미를 만들어 주고, 그 건물의 유지비는 헌금함에 착실히 쌓인다.

이래도 그 목사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그건 정말 당신의 문제다.


4. 대체 기독교란 정확히 어떤 기독교길래 이렇게 야단 법석인가?

기독교는 내려놓음이니 몰개성한 인간이니 하는 것의 정반대 대척점에 서는 신앙이다. 굳이 말하자면 (익명화라기보다는) 자기를 '그리스도를 본받은 구체적인 무엇인가'로 철저히 개변시키자는 믿음, 그리고 그걸 위해 (내려놓는다기보다는) 자기를 세상에 '내어준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해도 좋은 행위는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은 믿고 긍정하고 그대로 한다. 자기를 철저한 자기나 타인으로 만들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지만, 자기를 이도저도 아닌 군중 속 소비자로 만들겠다는 것도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 손에 다른 게 쥐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면서 손을 펴는 게 기독교일지언정 다른 뭔가가 쥐어지길 기다리며 손을 벌리고 있는 건 도대체 기독교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생로병사 번뇌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려고 사람을 입고 오셨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별 수를 다 쓰시다가, 막판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걸 들어서 떼어 나눠주며 그러셨거든. 너네들 이게 내 몸이다 치고, 피다 치고, 다 먹어. 다 마셔. 그거 아냐, 이게 내일 내가 할 일이야. 난 죽으러 간다. 난 죽어서 내 몸 내 피를 너네한테,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나눠주려고 나눠줄 것이다. 그니까 절대로 이거 잊지 마 알았어? 그런 부탁을 하신 분이란 말이다. 이게 내가 아는 기독교다. 그건 정말이지 그 전체가 예수님의 일생처럼 절절하고 인간적이며 드라마틱하고,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건 뭐 대체 얼마나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이름 없는 군중 모아다 놓고 은혜가 어떠니 만군의 여호와가 어떠니 꽃밭에 무지개 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만연해 있다면... 다같이 광야로 뛰어나가 메뚜기에 석청이라도 먹고 살아야 할 판이다.


PS. 다 적고 나서 생각이 났는데 이런 거 말고도 유행하는 설교 레파토리들이 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씩 이런 식으로 좀 뜯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은혜, 믿음, 감사 정도? 이런 것들은 이제 예수님 장사 지낸 무덤보다 더 공허해져 버렸는데 주제별로 어떻게 드러내야 제일 효과적일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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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최근 김어진쇼라는 것을 하고 있다. 기본 토크쇼이고, 평범한 사람들 데려다가 별 말도 안 되는 얘기 가지고 아무말 잔치를 한다.

이것은 모랄까 지난 몇 년 간 콘텐츠 바닥에서 굴러 본 이후 약간 재활 비슷한 느낌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황금률들을 거의 전면적으로 초탈하려는 의지에 기반하고 있다.

  • 콘텐츠는 재밌어야 한다는 것.
    재미란 건 보통 두 가지인데, 만들어 팔 때의 재미와 사람들의 반응에서 나오는 재미다. 첫 번째 것은 유지 가능하다. 하지만 두 번째 것은 워낙 강렬해서 적잖은 이들이 그걸 다시 맛보고 싶어 발버둥치고 끝에 가서 헛다리를 짚어 자빠진다. 재미있게 할까 재미없게 할까 싶을 때는 재미없게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누구 말마따나, 노 잼 노 스트레스.
  • 콘텐츠는 특정한 내용이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
    내용이나 목적은 최소한만 있으면 된다. (어쨌든 최소 몇 분간 이어폰 끼고 이걸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 짓을 한 보람은 줘야 한다.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 목표치를 설정하는 순간부터 그건 고스란히 과제가 되어 사람 목을 조른다. 이거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난 그러지 않을 것이다.
  • 콘텐츠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일관성 역시 마찬가지로 최소한만 있으면 된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게 매번 너무 다르면 아예 인간 인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 일관성을 가지고 해내려는 "브랜딩"이라는 것 역시 사실 좀 부질없는 (혹은 불가능한) 무언가에 가깝다. 특히 아마추어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 콘텐츠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
    스윙 자체를 존나게 많이 휘두르면 누구나 안타도 치고 홈런도 치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마추어 얘기고 프로라면 타율을 올릴 생각을 하는 게 이득이다. 최악은 수량을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재미도 감동도 없는 걸 자기착취해 가며 만드는 짓이다. 씹노잼 폐급 파일들 말고는 남는 게 없거든.
  •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니 이건 완전히 틀렸다. 제작자로서만 말하자면,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설득한다는 것이 정확하다. 사람들이 도대체 뭘 좋아하냐고? 그래서 우리는 몇 달간 "트렌드"와 "이슈"를 팔로업하는 훈련을 해 보았고 남은 건 그냥 네이버 실검 보는 게 빠르다는 교훈뿐이었다.
  • 영상 콘텐츠는 짧아야 팔린다는 것.
    누가 그걸 모를 줄 아나 보지? 그러면 뭐 짧으면 짧을수록 막 반비례해서 팔리게? 다들 부탁이니 일차함수적인 사고방식을 만나면 의심을 좀 해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본 적지 않은 골드 유튜버들의 영상은 3분은커녕 10분도 넘길 때가 많다. 길이는 가장 irrelevant한 변수 중 하나다.
  •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자기와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
    이건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아무 연관 없는 것을 굳이 찾지 않는다. 수긍은 순순히 하지만 그냥 내 능력이 부족해서 이 부분은 포기하고 있다.
  • 기왕 하는 거 뭔가 남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것.
    이건 바꿔서 물어보고 싶다. 뭐가 안 남는 건 안 해야 하나? 오히려 뭐가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덤비기 시작하면 그건 그거대로 불행할걸? 왜냐면 사람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뭐가 안 남거든.
  • 어쨌든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것.
    김어진쇼는 "지나치게 유명해지면 그만"할 계획이다. 예컨대 방송 섭외 요청이 들어오면 "김어진쇼가 어제 망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하고 거절할 생각이다. 이게 무슨 투석이나 핵분열 발전도 아니고 마지못해 계속하는 짓을 할 거면 애초에 하질 말았어야지 말이다. 언제 그만두어도 문제나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 걸 해야 한다.

아무튼 뭐냐면 결국 주객의 전도로부터의 해방을 하자는 것이다. 콘텐츠 제작자들의 상당수가 인생을 바쳐 콘텐츠를 소환해 인기와 성취를 얻는다. 다들 정신 좀 차렸으면 싶다. 그깟 게 뭐라고 삶을 바칠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냥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인생 그 자체를 일단 잘 살란 말이야. 왜 있잖아 사람 만나고 밥 커피 술 사고 농담 주고받고 뭐 그런 거. 그러다가 만약에 혹시 괜찮으면 기념사진 찍듯이 기념영상 찍어놓고 최소한의 편집만 해서 남겨놓고 그 정도면 안 되겠냐구.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막 장소 빌리고 사람 빌려와서 오만 생쇼를 하냐고. 뭔 지랄 염병을 떨어본들 YTN 하루 시청자 수에도 못 이길 일인데.

Posted by 엽토군
:

이 시간에 달빛에 잠깬 게 아까워서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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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엊그제에 밤2시까지 삽질해 성공한 기념으로 아주 간략하게 작성. 질문 받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닷홈"이란 한국식 LAMP 스택의 shared hosting이라고 보시면 됨.


사전 준비사항

  • 이 글은 모든 작업을 윈도우에서 한다고 가정한다. 리눅스/맥 쓰시는 분들은 훨씬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니 필요한 명령줄은 알아서 연구하시길.
  • 최소한의 php 상식
  • php, composer (라라벨 인스톨러는 쓰지 않는다.)
  • Git 관리툴 (FTP로 수동배포하는 과정에서 버전을 관리하기 위한 용도. 잘 모르면 소스트리 쓰자.)
  • FTP 클라이언트 (닷홈에 수동배포하려는 용도. 잘 모르면 파일질라 쓰자.)
  • PHP 5.6.4 이상이 돌아가는 닷홈 계정 (닷홈에서 PHP 7.0을 굴리려면 무제한 호스팅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도메인 구매하는 댓가로 FREE 티어를 쓸수있게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제길 이런글 쓴다고 레퍼럴 받는것도 아닌데)


tl;dr

이하의 서술은 닷홈 호스팅의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안내한다. composer와 artisan을 못 쓰는 문제, 요청 실행 담당 파일이 마음대로 지목되지 않는 문제. 이 두 가지가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더 읽지 않아도 됨.

로컬에서는 php artisan make:migration create_foo_table 같은 콘솔도 쓸 수 있고 composer install foo 같은 것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지만 닷홈의 대부분 호스팅 상품은 공식적으로 SSH 접속이나 컴포저 실행, 쉘스크립트 실행 등을 할 수 없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패키징 체계로 되어 있는 웹앱 개발 환경에서 이는 치명적인 제약이다.

게다가 로컬의 라라벨과 프로덕션인 닷홈은 웹 요청 수행 방식이 다르다. 라라벨은 루트폴더의 server.php를 실행하는데, 닷홈은 별도의 .htaccess 설정이 없는 한은 걍 아무 생각 없이 각 계정에 대하여 /host/home숫자/계정명/html 디렉토리의 index.htm(l)이나 index.php만을 열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요청에 대해서 .htaccess가 특정 파일을 포인팅해 주지 않으면, 그 요청의 응답은 영원히 403404, 500 또는 310(Too many redirects)뿐일 것이다.

여기에 사소한 몇 가지 요점을 짚고 가려고 한다. 예컨대 라라벨 버전 문제인데, PHP 7.1이 아닌 PHP 7.0의 서버라면 라라벨 버전은 5.5까지만 쓸 수 있다. 이제부터 조금씩 살펴보자.


1. 상쾌하게 새 앱으로 시작하기 (단, 버전에 맞춰서)

이미 로컬에서 돌아가고 있는 라라벨 앱이 있다면 최악의 경우 그 앱을 다운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런데 라라벨에서 다운그레이드란 새 프로젝트를 낮은 버전으로 시작해 거기에 마이그레이션하는 것만을 뜻한다. 그렇게 따지면 아마도 이 스텝은 필수인 듯.

1-1. 라라벨을 올리고 싶은 닷홈 호스팅의 PHP 버전을 알아내고, 이 버전을 지원하는 최신 라라벨 버전이 뭔지 각 버전별 설치 문서에 가서 확인해 본다. 대리클릭을 해드리자면 PHP가 7.0일 땐 5.5까지, PHP가 5.6.4 이상일 땐 5.4까지.

1-2. 앱을 설치할 디렉토리로 가서 커맨드를 열고 라라벨 설치 명령을 실행한다. 예컨대 설치할 수 있는 라라벨 최고 버전이 5.5버전대라면 이렇게 입력한다. (자동으로 현시점 최신 버전인 5.5.28을 깔아준다.)

> composer create-project laravel/laravel 앱이름 "5.5.*" --prefer-dist

1-3. 컴포저 특유의 무반응이 잠시 이어지다가 한바탕 폭풍 설치가 끝나면 Git 관리툴을 열고 이 폴더를 기존 존재하는 저장소로서 생성해 커밋&푸시하고 버전 관리를 시작한다.
소스트리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New Tab > Create > 지금 만든 폴더 선택 > 저장소 이름이나 나머지는 뭐 알아서 > 생성 > Yes > 작업공간 > 모두 스테이지에 올리기 > 커밋 > Push.

1-4. 설치된 디렉토리로 이동해 php artisan serve를 실행해본다. 별문제가 없어야 한다.

1-5. /public 폴더에 assets라는 이름으로 빈 폴더를 하나 만들고 거기에 css 폴더와 js 폴더를 때려넣어 둔다. 3번 스텝에서 해야 할 작업을 미리 해놓는 것.


2. 최초 버전 unzip 배치

이짓을 하는 이유는 /vendor 디렉토리에 너무 많은 폴더와 파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걸 전부 FTP로 올리는 것은 바보짓이며, 번번이 이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composer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툴이지만, 우리는 닷홈 서버를 빌려 쓰고 있어 컴포저를 쓸 수 없으니 일단 갓 구워진 라라벨 정도로만 올려보자. AWS 엘라스틱 빈스톡에서 영감을 얻음.

2-1. 라라벨이 설치된(=server.php 파일이 있는) 폴더의 내용 전체를 압축해 파일명.zip을 만들어둔다.

2-2. 다음 코드를 적당히 활용한 적당한이름.php 파일을 만들어둔다.

<? header("Content-Type: text/html; charset=UTF-8"); ?>

<a href="?unzip=true">Unzip 실행</a>

<?php
if ($_GET['unzip']) {
$zip = new ZipArchive;
if ($zip->open('파일명.zip') === TRUE) {
$zip->extractTo('./');
$zip->close();
echo '<br><br>배치 성공';
} else {
echo '<br><br>배치 실패';
}
} else {
phpinfo();
} ?>

대단히 스트레잇포워드한 코드인데 설명하자면 이렇다. 파일을 웹브라우저로 딱 보면 Unzip 실행이라 써진 링크 하나가 있고 그 밑에 이 서버의 php 정보가 줄줄이 달린다. 링크를 누르면 그 정보가 없어지고 배치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알려준다.

2-3. FTP 클라이언트로 닷홈 계정에 접속해 파일명.zip 압축파일과 적당한이름.php 파일을 같이 루트폴더에 올린다. (닷홈은 전형적으로 /html 폴더가 루트임)

2-4. http://닷홈계정주소/적당한이름.php 에 접속해본다. 설명한 대로 링크 하나와 php 설치정보가 떠야함.

2-5. 과감하게 Unzip 실행을 한다.

2-6. 배치 성공이라 떴는지, 그리고 실제로 FTP로 새로고침을 했을 때 로컬에 보이는 폴더와 파일들이 막 보이는지 확인한다.

2-7. 큰 산을 넘었다는 안도감을 가지도록 한다. (이후 필요할 경우 /vendor 폴더에 대해서만 이 꽁수를 써서 일괄 업로드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tractTo() 함수는 덮어쓰기가 기본이므로 별문제 없을 것.)


3. public 폴더 바꿔치기

이 스텝은 왜 필요한가 하면 앞서 설명한 index.php를 루트에 띄워주기 위해 필요하다. 희한하게도 서양에서는 'public' 폴더가 닷홈 호스팅의 'html'에 해당한다고 한다. 요컨대 라라벨 앱 업로드 과정에서 그 public을 이 public으로 자연스럽게 덮어쓸 수 있으면 OK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정 모르는 서양 답변자들은 가끔 "퍼블릭폴더 위에 앱을 설치하면 그만인데 왜 우는소리를 해~" 같은 속터지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닷홈은 그게 안 되니까 이짓을 하는 것.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이 문서.

여기서는 라라벨을 닷홈 서버의 루트에 설치한다고 가정한다. 이 작업 자체는 닷홈 서버에서만 수행한다.

3-0. 잘 모르겠다면 다음 내용을 복사해 루트폴더에 .htaccess 파일로 저장하고 접속해 본다. 이것만 했는데 해결이 됐다면 (즉, 사이트가 뜬다면) 사실 이후의 3-x단계 및 4-x단계는 안 해도 된다. Thanks to 잘보고갑니다

<IfModule mod_rewrite.c>
RewriteEngine On
RewriteRule ^(.*)$ public/$1 [L]
</IfModule>

해결이 안 되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다.

3-1. 1-5를 아직 해놓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해놓고 닷홈서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해 준다.

3-2. /public 폴더에 있는 '파일들'을 모두 복사해 그 위 폴더인 루트 폴더에 붙인다.

3-3. 라라벨 5.5 기준으로는 지금 붙여넣은 루트폴더의 index.php에 이런 라인들이 있을 것인데, 각각 알맞게 고친다.

require __DIR__.'/../vendor/autoload.php'; // 이렇게 생긴 라인은
require __DIR__.'/vendor/autoload.php'; // 이렇게 고칠것

$app = require_once __DIR__.'/../bootstrap/app.php'; // 이렇게 생긴 라인은
$app = require_once __DIR__.'/bootstrap/app.php'; // 이렇게 고칠것

한마디로, /public 폴더 기준으로 써져 있었던 로딩 파일들 주소를 루트폴더 기준으로 고친다.

3-4. 하나 더, 루트폴더에 있는 server.php를 고쳐준다.

# 고치기 전

if ($uri !== '/' && file_exists(__DIR__.'/public'.$uri)) {
    return false;
}

require_once __DIR__.'/public/index.php';


# 고친 후

if ($uri !== '/' && file_exists(__DIR__.$uri)) {
    return false;
}

require_once __DIR__.'/index.php';

3-5. http://닷홈계정주소/home 에 접속해 본다. 뷰 파일을 건드린 적이 없는데도 css와 js 파일이 로딩되지 않아 와장창 깨지고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4단계에서 해결한다.


4. 환경 구분해주기

이제 거의 모두 해결됐고, 3단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퍼블릭 애셋 경로 문제만 남는다. php 소스들 자체는 로컬에서나 닷홈에서나 같아야 하는데, 로컬에서는 asset() 함수에 'assets/css/app.css' 경로를 넘겨줘야 되는 반면 닷홈에서는 'public/assets/css/app.css'를 넘겨줘야 된다. 어쩌면 좋냐고? htaccess 쓸줄 모른다고? 걱정마시라. 이런 건 env로 아주 간단하게 조치하면 된다.

4-1. 로컬의 루트에 있는 .env 파일을 편집기로 열고 다음 설정을 아무데나 추가한다.

ASSETS_DIR=assets

4-2. 소스코드 내 필요한 모든 곳에서 다음과 같은 찾아바꾸기를 실시한다. 4-1에서 저장한 변수를 불러오도록 하는 것.

// 바꾸기 전
{{ asset('assets/css/app.css') }}

// 바꾼 후
{{ asset(env('ASSETS_DIR').'/css/app.css') }}

4-3. 로컬의 .env 파일 내용 전체를 복사한 다음, 닷홈서버의 루트에 .env 파일을 새로 만들고, 그 파일의 내용을 방금 복사한 내용으로 덮어쓴 다음에, 이 부분을 고친다.

ASSETS_DIR=public/assets

4-4. 이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로컬에서 돌아가는 여러분의 앱이 닷홈에서 그 모습 그대로 똑같이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앞으로 애셋을 불러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아묻따 env('ASSETS_DIR') 하나로 오케이.


5. 부록: 버전을 관리해서 필요한 파일만 추가 FTP 배치하기

아주 간단히 설명하고 지나간다.

5-1. 로컬에서 이 소스를 Git으로 관리한다.

5-2. 배포할 커밋 위치로 체크아웃한다.

5-3. 다음 명령어 실행하여 싹 zip으로 묶는다.

git archive --format=zip master -o ../foobar.zip

5-4. 2번 스텝에서 만들어 놓은 코드를 활용해 묶어놓은 zip을 루트에 싹 올려 덮어씌운다. 끝.


6. 부록: 아티즌 콘솔 써서 마이그레이션 하기

닷홈서버의 DB에 이미 잔존하는 테이블을 활용하는 거라면 걍 DB 덤프받아 로컬에 복붙해 시딩하고 php artisan make:model Foo 돌려 모델 만들고 그걸 배포하면 그만이지만, 없던 테이블을 만든다면 라라벨의 컨벤션에 맞게 정식으로 스키마를 만들어 마이그레이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6-1. 일단 로컬에서 마이그레이션 직전까지 해놓는다. php artisan make:migration create_foo_table을 실행해 파일 자동 생성을 시키고, 생성된 파일의 up() 메소드와 down() 메소드를 적당히 매뉴얼 봐 가면서 채운다.

6-2. /routes/web.php 파일의 맨 끝에 아티즌 콘솔 명령을 실행하는 라인을 하나 넣는다.

Route::get('/artisan_console', function(){
Artisan::call('migrate');
});

6-3. 로컬에서 localhost:8000/artisan_console 에 접속해 up() 메소드가 계획대로 잘 돌아갔는지 확인하고, 확인되었으면 닷홈서버의 /database/migrations 디렉토리에 생성된 마이그레이션 파일을 올린 다음 /routes/web.php에 로컬과 같은 수정내역을 적용해, 마찬가지로 접속 실행한다. 닷홈DB에 migrations 테이블이 자동으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없으면... 걍 하나 만들면 됨.


후기

  1.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제가 읽고 싶었던 문서를 제가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던듯
  2. 아무튼 .htaccess는 웬만하면 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RewriteBase, RewriteCond, RewriteRule 같은것 붙잡고 씨름하고 계시다면 머리를 비우고 새로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 보시길.
  3.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네요.


Posted by 엽토군
:

늘 쓰고 싶던 테마였는데 이번에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을 기념하여 아주 콤팩트하게 써본다. 이거보다 길어지면 나도 헷갈리고 모두가 헷갈리는듯.


세트장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해진 개념이지만 예전에는 '버라이어티 예능'을 하기 위해 도입된 혁신적 장치였던 세트장이란, 어떤 굉장한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 각종 장치와 설비가 고안되어 작동하는 기계/전기 조립체 일체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울고 웃고 때리고 뒹굴며 '오락 프로'를 만들었다.

세트장은 목적지향적, 결과지향적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드는 이유 자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그림'만큼은 '따내겠다'라는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세트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신 그 반대 급부로서 주어진 규격과 분량에 맞춰서, 계산된 재미를 위해서, 모두가 각본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트장은 21세기 초엽까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성장 중심적 계획과 사회의 첨병에 다름아니었다. 어떤 목표와 도전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대신, 각 개인의 계획과 규격, 행복의 기준과 방향을 제어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았고, 그게 어느 정도 순기능을 했다. 우리는 한때 대형 버라이어티 쇼의 거대한 세트장을 진심으로 우러러보았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무한도전은 바로 이 '세트장'을 빠져나오려 하는 예능이었다. 아하 게임을 하던 '스튜디오'(그것은 최소한의 의미에서의 세트장이기도 하다)에서 시작한 그들은 장충체육관으로,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것들은 좀더 세트장에서 멀어진 것이다) 가더니 지하철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어딘가로(여기서부터 세트장이 아니었다)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물리적인 세트장을 탈피해 왔다.

한때는 전형적이고 다소 상투적이기까지 했던 방송가의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큰웃음이 보장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모내기 특집이 그랬다. 비 오는 논두렁에서 뒹구는 일은 그 자체로 시답잖게 우스운 것이다. '세트장 아닌 세트장'을 통해 변칙적으로 재미를 확보하는 이러한 의존성은 최근의 방콕 특집 같은 것에도 발견되었던 바다.

아무튼,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적 세트장을 벗어나기만 해서는 머지않아 '(성장 발전상의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것을 직감한 TEO 사단은 새로운 세트장을 구성한다. 바로 관념적 세트장이다. 무한도전은 갈수록 'OOO 특집'의 이름으로 특정 주제/과제/컨셉을 내걸고 이것 하나에 모든 여건과 아이디어와 몸개그를 전면 집중해 70분을 채우는 (그걸 실패한 '특집'은 통편집되어 재방송을 타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왜 관념적 세트장이냐면, 기존의 세트장에서 볼 수 있던 철골 구조물, 카펫, 폭죽 같은 물리적 요소들은 사실상 없어지되 개그, 상황극, 캐릭터, 도전, 팀 꾸리기, 액션, 교훈, 사회적 의의 등등 비물질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특정 감동과 재미를 창출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계획대로 잘 될수록 그 특집은 레전설이 되었고, 잘 안 되었을 때는 통편집되어 창고에 박혀 있다가 발굴되곤 했다.


그들은 과연 세트장 자체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방송의 본질상 70여분간 별 요점이 없는 신변잡기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무한도전의 지난 십몇 년 역사상 그들은 성장주의, 목적주의, 성과주의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각본과 세트장이 주어지지 않는 예능에서도 빅재미를 만들어낸다며 뛰쳐나간 그들이 정작 스스로 만든 각본과 세트장에서 낑낑대게 된 꼴이란 아이러니가 아니면 무엇인가.

심지어 '쉬러 간다', '우천시 취소하는 특집으로 한다' 같은 관념적 세트장을 나가는 듯한 기획마저도 사실은 치밀하게 (또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각본, 체계, 어떤 그림을 무조건 따내기 위해 고안된 설계와 배치로 기능했다. 방송이니 그래야만 했다. 심지어 무한도전은 리얼 예능을 표방한 탓에 오히려 그 반대로 작위미, "일부러 철저하게 어떠어떠하게 한다" 하는 기획이 주는 즐거움도 넘볼 수 없게 됐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 "시즌1" 종영은 시사적이다. 이렇게까지 일부러 대본과 내용구성, 로케이션 등을 '어기고' 다닌 방송은 일찌기 없었는데, 그런 쇼가 유지 불가능성이 가시화된 이후로 그걸 끝내 부정하다가 마지못해 마침내 수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것이 쇼이기를 표방하는 이상은,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기획, 각본, 목적하는 결과의 집합체(set)에서 실행되게 되며 그래야만 한다."


무한도전은 자기가 얻어야 할 교훈을 이미 다 얻었겠지만, 그걸 보며 몇 년을 함께한 일반 대중은 과연 어떤 교훈을 제대로 얻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의 삶 여러 영역에, 사실은 불가능한 그리고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성장주의 계획이 삼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물리적 세트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철저히 자신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자본과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반 대중도, '디카'와 스마트폰을 손에 넣으며 다른 의미에서 물리적 세트장 없이 '쇼'를 해 오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쇼는 쇼이므로 이들에게는 크게 둘 중 한 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무한도전이 그랬듯 각종 컨셉과 설정으로 무장한 관념적 세트장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인생 전체를 물리적이고 통합된 세트로 구성해 버린 것이다.

둘 다 별로 건전하지 못하다. 전자는 경제규모 상위국가의 대표 민영방송사의 간판 예능조차 끝내 버티지 못한 고강도의 정신 노동을 일반 대중 개개인이 감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속된말로 자기 인생을 팔아서 관심을 얻고 유지를 하는 마이너스 게임이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이 보고 배운 것은 무한도전이나 인간극장, 세상에 이런일이 등이었을지언정, 그들이 정말 그것을 동경하고 모방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탈-세트장 예능의 대표주자였던 무한도전의 종언 이후 가장 질서 있는 퇴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냥 순순히, 물리적이고 인위적이며 전면적이고 조작적인 계획의 존재를 인정해 버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쇼"라고 이해하는 세계는 철저히 그 계획 속의 세계로 한정하고 샌드박싱하여, 그 안에서만 쇼의 문법과 방식이 작동하게 내버려두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그 밖에 나와 있는 방식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아주 그로테스크한 만화의 작가가 될 수는 있겠으나, 작가로서의 그를 예능 방송 게스트로서의 그의 자리에 불러내는 일은 하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또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더라도, 자기 개인사를 죄다 털어놓는 지금 대다수 유튜버들의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채널 속 자아를 좀더 허구적 체계로 확립하고, 분리 관리하며 그것을 게임의 룰로 이해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요는, 쇼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쭙잖게 대본과 세트장과 계획과 목적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고 하다간 실패만 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무한도전 역시 무한하지 못하게 도전을 멈췄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향주의 자체를 중단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만큼의 급진성과 거기 따르는 각종 능력 요건을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쇼는 결국 쇼이니 순순히 세트를 짜고 그 안에서 행동하자는 겸손한 교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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