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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두 개

2011. 8. 13. 00:52
1. 영원과 찰나 (the eternity and the transitoriness)
도대체 예수님은 왜 날 만나주신 걸까?
그분은 영원을 살고, 나는, 이 육신은 그 영겁 중의 찰나를 살아간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듣다 보면 더욱 소스라치게 새삼스럽다. 나는 왜 DOS디스켓 시절에 태어나 라이코스 시절을 지나 아이폰의 시대를 살게 되었는가—그리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는가? 이것은 과연 얼마나 절묘하거나 혹 우연한 것일까? 몇 년 전에 그만 작고해 버렸을 수많은 고인들에게는 그들의 찰나가 얼마나 그러하였을까…
묘하게도 영원함과 잠시잠간은 둘 다 계산이 되지 않는 그래서 꽤나 관념적인 시간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찰나를 살다 죽는다. 그럼 왜? 왜 나는 굳이 그 영원하신 분을 계속 신경쓰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 살게 되었는가? 혹시 실은 나도 그 영원의 지경에 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찰나는 살아봤다 쳐도 아직 영원이 무엇인지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 모르겠다.

2. 앞뒤를 따질 때와 딱 보았을 때
앞뒤를 따져 보면 분명히 옳거나 분명히 그른데 정작 전체를 딱 보았을 땐 어쩐지 그렇지만도 않다는, 아니 아무리 봐도 앞뒤 따졌을 때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말하겠다. 그런 경우엔 보통, 딱 보고 느낀 그것이 '온당'하거나 적어도 간과할 수 없는 상위 차원으로서 '진실'한 무엇이다. 신이 인간에게 직관을 부여한 것은, 어느 날인가 사탄이 지독하게 영리하여져서 누구라도 속여넘길 수 있게 되었을 때에까지라도 기어코 다시 진실을 걱정하고 다시 찾으라는 뜻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믿고 싶어한다. '기면 기고'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아무리 사정 복잡한 일에도 분명히 간명하고 '달리 더 고민할 필요 없는' 무슨 형이상학이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영원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그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여러 상황에 대한 지금 우리의 판단과 자세가 후세나 선대 때도 먹히는 것이었으리라고 자못 자연스레 기대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은 대체로 말해서 실로 찰나의 학문이다. 그래서, 경제 경제만을 되뇌이게 된 오늘 우리는, 찰나의 비본질적인 입씨름과 말장난에 목을 매달며, 우리의 맨눈이 직접 보라고 쉬지 않고 다그치는 '딱 보았을 때의 그 무엇'을 다시 증거 불충분으로 폐기하고 있다. 증거? 증거나 알리바이를 다 떠나서, 때로 우리는 차라리 무엇이 그냥 옳은(그른) 것이기를 혹은 어떤 정황이 옳아야(틀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걸 온당하다고 하는데, 이는 합당함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디자인 서울이니 단계적 무상급식이니 신형 신호등이니 하는 요즘의 '말을 들어보면 앞뒤는 맞는' 정책들을 의심 없이 납득하지 말자. 무엇 앞에서 "잘은 모르겠지만 거부감이 드는" 그 순간 여러분이 할 일은 그 거부감이라는 사탄 마귀를 쫓아내는 게 아니라, 어찌됐든 분명 실재하는 그 의혹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때에야 그 감정과 여러분의 직관은 영원의 지경으로 이끌려 올라가고, 그 무엇인가는 더이상 혼자 떠들지 않는, 여러분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소한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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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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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개봉일에 보려고 했는데, 원래 개봉 날짜에는 사정이 안 좋았고 해서 그 다음 날 적당한 시간에 느긋하게 가서 보고 와야지 했습니다. 근데 웬걸 개봉이 하루 앞당겨지더군요-.-;; 그래서 웬만한 한애갤 햏들보다 무려 이틀이나 늦게, 시끄러운 단체관람 초글링들 속에 파묻혀서 관람. 시끄러워!


- 영화의 줄거리야 여러분 아시는 대로입니다. 씨암탉들이 노니는 마당을 바라보며 양계장 축사에 고개만 내밀고 모이만 쪼며 살던 감수성 풍부한 암탉 잎싹이 어느 날 드디어 폐사한 체해서 양계장을 탈출합니다. 나그네 청둥오리의 도움을 받고, 늪의 공인중개사 달수 수달을 만나고, 나그네가 첫만남 때부터 싸우고 있던 외눈박이 족제비 때문에 배우자를 잃고, 그녀가 남긴 알을 통해 자기 알을 품어보고 싶다던 잎싹이 드디어 알을 품게 되고, 나그네는 떠나고, 알이 깼는데 웬걸 병아리가 아니라 청둥오리 새끼입니다. 나그네 말대로 늪에 와서 살게 되었지만 아들은 엄마와는 다르게 하늘을 날고 싶어하게 되고... 하여간 한 시간 45분이 너무 짧은 그런 영화입니다. 정말 눈이 행복할 새도 없이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 본론부터 말할게요.
이 이야기는 한 여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아동용이라기보단 페미니스틱하다 하겠습니다. 마당에만 나오면 될 줄 알았던 그녀의 앞에 마당은 없고 (이 부분이 전체 비중상으로는 매우 적게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잎싹의 감수성을 보여줄 건 다 보여줍니다. 여기서 여고생의 삶을 연상해버리면 이상한가요?) 닭을 파묻는 구덩이가 있고 빗물 새는 찔레덤불이 있고 늪이 있고 천적이 있는 야생이 나타납니다. 자식은 자기가 생각했던 마냥 귀엽기만 한 삐약삐약 병아리가 아니었고, 어느 새 머리가 커서 배냇머리가 자라고 보니 자기와 같은 벼슬이 달렸지 않음을 확인해야만 하죠. 게다가 본의 아니게 아비 없는 자식이 되어버렸고. 늪의 주민들은 냉담하고, 초록이가 따라가야 할 새떼에 초록이를 들여보내려면 그가 혹독한 순위경쟁을 해야 함을 알기에 미친 닭처럼 그의 발에 묶여 있던 리본을 끊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피차일반 새끼 딸린 입장인 외눈박이에게 자기까지 내어줘 버리죠. 실로 이 땅의 20~30대 여자들, 어머니들, 고모들, 할머니들이 살아오는 방식에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저는 <친절한 금자씨>를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만, 논란이 되었던 금자씨 포스터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다는 금자씨가 실은 결코 친절하지 않고 또 되도 않게 친절하려 애쓰는 모습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너나 잘하세요" 으르는데다가 좀 '미친년' 같듯이 잎싹 또한 꼭 그러합니다. (게다가 두 여성 다 섹시해요 누구 말마따나) 그것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범주가 강요하고 자승자박을 해 온 여성상, 모성상, 주인공의 개념형에 전혀 매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성이라면 일정량 이상의 매력을 뿜어주면서 독보적으로 돋보여야 하고, 어머니라면 자기 새끼에게 지극정성의 관심을 쏟으며 자기 새끼에게 자신을 헌신해 줘야 할 것 같고, 주인공이라면 스크린 위에서 죽어버려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전부 다 배반해요. 그냥 잎싹이는 마음은 만년 소녀인 그런 여자예요(나만 그렇게 본 건 아니었어). 마치 금자씨가 영화제목(과 금자씨의 주변인물들의 기대)을 배반해 버리듯이.


문제는, 금자씨에게 그러했듯이, 이야기의 그 배반에도 당위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닌게아니라 영화를 따라가면서 생각해 보자니까 또 그게 오히려 말이 맞아요. 제 태에서 안 나온 자식을 키운다는 게 공익광고나 일일연속극에서처럼 마냥 극복되어 즐겁기만 한 생활은 아닐 거고, 세상에 좋은 놈과 나쁜 놈이 OX퀴즈 하듯이 딱 갈리는 것도 아닐 테고, 모성이라는 건 자기가 낳은 새끼를 사랑한다기보다 그냥 세상의 새끼들을 사랑하는 마음일 수도 있는 거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착한 애들로 돌아와서 대화합을 이룩하는 결말이 아니어도 되는 거예요. 물론 정말 기본적인 모자간의 애틋함이나 이야기가 주인공 위주로 돌아간다는 점 등의 룰은 기본적으로 지켜지지만,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꽤나 불편하고 낯설 수 있습니다.


- 잎싹뿐 아니라 이 이야기 자체가 모든 전형성에 대한 관객의 일말의 기대를 단칼에 거절하고, 그것에 나름의 앞뒤 사연이 있음을 설득하면서, 가공되지 않은 삶은 그러면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반추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 점이 원작과 그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과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디즈니가 받았다면 누구 말마따나 "둘이 행복하게 오손도손" 산다는, 오히려 더욱 말이 안 되는 그림으로 마무리지어 버렸을 수도 있고, 지브리가 받았다면 그림만 예쁜 판타지로 전향시켜 버렸을 수도 있는 거예요. 바로 그런 점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을 봤습니다. 일본도 미국도 하지 못할, 나쁘게 말해서 암울하고 좋게 말하자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서사를 우리만의 어조와 색채와 허구적 움직임으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것.


- 비주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본 직후에 간단히 쓰긴 했지만 잎싹과 달수로 대표되는 캐릭터 디자인도 웬만한 거물 스튜디오 못지않았고, 영상은 우포늪을 바라보며 그려서 그런가 더 칭찬할 말이 딱히 없을 지경이고 비행대결 씬은 모두가 극찬하듯이 작살납니다. 게다가 꼭 아름다운 것만 보여줄 이유는 없다는 듯 축사나 마당 등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정말 지저분하게 보여줄 정도로 정직하기도 합니다. 연출은... 아까도 적었지만 사실은 좀 급해요. 어린이용이었다는 점이 이 점에서 너무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여유를 줘 가면서 진행시켜도 좋았을 테지만... 뭐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정도도 적당한 길이인 건 맞습니다.


- 성우 문제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우리나라 더빙 업계에서 제대로 된 '아들래미' 연기란 게 있어본 적도 없다고 생각하고. 문소리 씨의 신음소리는 지병을 골골 앓는 소녀 돋는 암탉에게 의외로 잘 맞아떨어지면서 굉장히 섹시했습니다. 박철민 씨야 뭐 더 말할 것이 없고.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 반. 꼭 봐라 세번 봐라. 나중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환기를 상징하게 될 명작을 극장에서 못 봤다고 두고두고 한탄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지금, 극장으로 달려가세요.
Posted by 엽토군
:
하여간 무엇을 접하더라도 방심하면 안된다. 군침 흘리면서 엔하위키 디벼보다가 느닷없이
(전략) 실제로는 흥미 없는 부분은 요만큼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따라서 상식도 꽤 많이 부족한 편이다. (후략)
출처


아…….

흥미 없는 건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상식이 모자랄 이유는 없는데 대체 왜 그럴까 늘 궁금했다!!!

누가봐도 자폭이다..jpg
P.s 여담이지만 아키라 누님이 그런 점에서 오히려 한층 더 끌린다;;; 솔직히 부러워! 나도 4차원이지만 귀여우니까 용서받는 미소년이 되고 싶어! ㅜㅜ 현실은 형질이 빈빈한 냉엄한 세상이란 말여
Posted by 엽토군
:
그냥... 해보고싶어서...;;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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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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