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박(가명)씨는, 처음에는 이토록 유명해질 생각이 없었음에 틀림없는 사람이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트윗 번개, 중국행, 온갖 뉴스와 온라인 단편영화 퍼나르기 등의 기행과 쇼맨쉽은, 적어도 대단히 순박하고 다분히 장난스럽다는 점에서, 작당하고 악의를 품었거나 테러리즘, 반달리즘에 기반했다거나 정치색을 드러내고 여론을 선동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한 기획된 연출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냥 골때리는 괴롭힘 앞에서 어쭈구리 너만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하고 맞받아치는, 차라리 전형적인 대한민국 30대 남성의 조건반사라고 봐야 한다.
나는, 그를 팔로우하면서도, 사실은 상당히 씁쓸하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유머가 촌철살인 대신 초보적인 비아냥과 ㅋ으로 도배되어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다는 데 있고, 둘째로는 그런 재미없는 사람의 B급 농담이 정말 재미있는 쇼가 되게 판을 짜 준 이 고도로 정치적인 사회 때문이다. 그가 방송통신심의위에 직접 제출한 웃음기 쫙 빼고 진검 뽑아 쭉 써내려간 의견 진술서 등을 읽고 있으면, 오히려 한탄이 나온다. 그는 결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성인이다. 열받는 정치권 이야기에 열받고, 웃기는 동영상과 예쁜 소품들 앞에서 그냥 우스워하고 예뻐라 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인데, 그의 일반적인 반응이 "이메가씨팔놈아"라고 읽(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읽는 거야 자기 맘대로임이 틀림없)는 이름을 빌어 나온 순간부터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회는, 웃자고 시작한 트위터에 죽자고 덤벼드는 정권을 용인 중이라는 사실이.
프레드릭 제임슨이 청사 선생과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아직도 고도로 정치적"이라고 했다. 고도로 정치적? 이 사회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정치적이다. 다른 게 정치적인 게 아니다.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거기에 2차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정치적인 거다. 그딴 게 어딨어? 그냥 열받으니까 욕하는 거고 싫으니까 싫어하는 거고 가 보고 싶으니까 촛불집회도 가 보는 거다. 배후세력이 누가 있긴 있었는지, 내가 종북 좌빨인지, 이 모든 게 정치적 음해인지는 나도 전혀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은 당신들을 빼고는 아무도 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졸지에 제 2의 미네르바가 되어버린 송모 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정치권은, 모든 걸 철저하게 이용해 먹기 위해, 전부 다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뭘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 이건 뭐 공안이 돌아다녔다던 DDD 시절보다 더하다. 우리는 아직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히 답이 나오는 관리와 사찰과 감시와 처벌 앞에서 그 명분에 법조항을 붙여 가며 싸우기 바쁘다. 그렇게 해야 하는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초고도로 정치화한 사회.
이제 어느 영화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2MB18nomA가, 알고 봤더니 착하고 꽤 예쁘고 별반 못된 구석 없는 여인이라면, 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벤데타 가면을 쓰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가 어떤 사람이길 기대하는 걸까. 영웅? 떠오르는 무소속 정치인? 아니다. 아주 의외의,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친숙한 주변의 촌부이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것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팔로우하고 별로 재미는 없는 그의 트윗을 지켜보고 그가 받는 탄압을 전력으로 저지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다. 우리도 솔직히 한번쯤은 '이메가씨팔놈아'라고 속으로라도 중얼거려 본 적이 있는, 몹시 불법하고 유해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 다 똑같은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P.s ㅅㅂ 느낌이 좋지않다. 헌병대에서 날 잡아갈 것 같다.
만약 한 달이 넘도록 블로그/트위터 갱신이 없으면 부모님께 전해다오 인커밍폴더는 보지마시라고
1. 영원과 찰나 (the eternity and the transitoriness)
도대체 예수님은 왜 날 만나주신 걸까?
그분은 영원을 살고, 나는, 이 육신은 그 영겁 중의 찰나를 살아간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듣다 보면 더욱 소스라치게 새삼스럽다. 나는 왜 DOS디스켓 시절에 태어나 라이코스 시절을 지나 아이폰의 시대를 살게 되었는가—그리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는가? 이것은 과연 얼마나 절묘하거나 혹 우연한 것일까? 몇 년 전에 그만 작고해 버렸을 수많은 고인들에게는 그들의 찰나가 얼마나 그러하였을까…
묘하게도 영원함과 잠시잠간은 둘 다 계산이 되지 않는 그래서 꽤나 관념적인 시간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찰나를 살다 죽는다. 그럼 왜? 왜 나는 굳이 그 영원하신 분을 계속 신경쓰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 살게 되었는가? 혹시 실은 나도 그 영원의 지경에 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찰나는 살아봤다 쳐도 아직 영원이 무엇인지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 모르겠다.
2. 앞뒤를 따질 때와 딱 보았을 때
앞뒤를 따져 보면 분명히 옳거나 분명히 그른데 정작 전체를 딱 보았을 땐 어쩐지 그렇지만도 않다는, 아니 아무리 봐도 앞뒤 따졌을 때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말하겠다. 그런 경우엔 보통, 딱 보고 느낀 그것이 '온당'하거나 적어도 간과할 수 없는 상위 차원으로서 '진실'한 무엇이다. 신이 인간에게 직관을 부여한 것은, 어느 날인가 사탄이 지독하게 영리하여져서 누구라도 속여넘길 수 있게 되었을 때에까지라도 기어코 다시 진실을 걱정하고 다시 찾으라는 뜻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믿고 싶어한다. '기면 기고'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아무리 사정 복잡한 일에도 분명히 간명하고 '달리 더 고민할 필요 없는' 무슨 형이상학이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영원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그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여러 상황에 대한 지금 우리의 판단과 자세가 후세나 선대 때도 먹히는 것이었으리라고 자못 자연스레 기대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은 대체로 말해서 실로 찰나의 학문이다. 그래서, 경제 경제만을 되뇌이게 된 오늘 우리는, 찰나의 비본질적인 입씨름과 말장난에 목을 매달며, 우리의 맨눈이 직접 보라고 쉬지 않고 다그치는 '딱 보았을 때의 그 무엇'을 다시 증거 불충분으로 폐기하고 있다. 증거? 증거나 알리바이를 다 떠나서, 때로 우리는 차라리 무엇이 그냥 옳은(그른) 것이기를 혹은 어떤 정황이 옳아야(틀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걸 온당하다고 하는데, 이는 합당함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디자인 서울이니 단계적 무상급식이니 신형 신호등이니 하는 요즘의 '말을 들어보면 앞뒤는 맞는' 정책들을 의심 없이 납득하지 말자. 무엇 앞에서 "잘은 모르겠지만 거부감이 드는" 그 순간 여러분이 할 일은 그 거부감이라는 사탄 마귀를 쫓아내는 게 아니라, 어찌됐든 분명 실재하는 그 의혹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때에야 그 감정과 여러분의 직관은 영원의 지경으로 이끌려 올라가고, 그 무엇인가는 더이상 혼자 떠들지 않는, 여러분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소한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