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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메모형 개괄보고. 준거를 대자면 너무 방대해지는 바람에 일단 통찰된 핵심 내용만 씁니다. 캐릭터페어는 가면서도 SICAF는 안 갔었는데, 여태 느껴왔던 것이 이번에 정리가 됩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 최근 문화산업계의 추세를 보면, 점차 오리지널(원작, 원형, 원조)을 생산해내는 순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생산 수단과 생산양식은 더욱 간편화되고 있으며, 그래서 상품(작품)의 치밀성, 예술성, 내적 완결성 등의 완성도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기대수명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반면, 오리지널을 유통하는 마케팅은 실물 경제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팽창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윤 추구와 규모의 경제의 차원에서 오리지널의 생산 주기를 단축하고 있다.
# 오리지널 자체가 빠른 주기로 속속 생산되는 현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과거 (특히 우리나라의) 문화산업 시장 자체가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마지막은 항상 오리지널의 더 많은 공급과 생산, 이를 뒷받침할 제반 여건과 풍토와 제도와 분위기 조성을 요구하고 끝났다.
# 이는 비단 문화산업뿐 아니라 지식정보 경제로 체제가 전환되면서 사회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오랜 시간 세련/정제/검토/함축하는 과정이 압축/생략/간편화된, 결과적으로 감각적이고 극단적이며 다소 개념형에 가깝고 일회적이며 소모성인' 떡밥들이 각처에서 투척되는데 이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에 있다.
# 이는 내용의 빈곤을 야기하며, 현대의 창조 능력의 빈곤을 반증하는 것 외의 역사적 성과를 이루기 어렵게 만들고, 무엇보다 '창조/창작/참여/기타행위에 의한 발언/상투성극복/발견/표현/가능성제시' 등 오리지널 생산에서 발현되는 인도주의적, 고차원적 목적과 성과를 단순한 생산/유통/소비/폐기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요컨대 창작이란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무슨 재미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 그 창작이 철저히 계산된 기획과 R&D 아래 진행되거나 곧 질려(혹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게 되는 그 '반감기'가, 요즘 들어 단축되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단축되어, 아무 재미도 없는 (그래서 상품 액면상으로는 더욱더 무조건 재미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듯한) 창조가 양산되리라는 것이다.
# 두 가지 방향의 해결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오리지널의 '물리적' 총량 공급 확장이 아닌, 오히려 소수의 오리지널이라 할지라도 그 '화학적' 총량, 내적 충만을 더욱 강조해서 생산케 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생산되는 떡밥들로부터 일정량 이상의 '칼로리'를 먹어야만 만족하는 '고등 오타쿠'를 대거 양산하여 오리지널들의 질을 상향 평준화하고 생산자들을 재삼 자극할 만한 집단을 형성해야 한다. 현 실태는 완전히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주 과장해서 비유하면, 지금 생산되고 있는 문화 소비재들은 속빈 강정과 같고, 그 바삭거리는 맛에만 몰두해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이 같은 오타쿠들만이 자꾸 생겨나고 있으며, 그 어린이들을 보는 어른들은 뭔가 먹을 것도 많이 생겼고 많이 먹고 있기도 하니까 앞으로 이 어린이들이 무럭무럭 자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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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아니오, 우리는 스마트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스마트폰 자격검정'이라는 것이 생기고 만 세상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대략 2세대[각주:1]에서 3세대[각주:2]로 옮겨갈 때 통신사를 바꾸는 게 나으냐 안 나으냐, 어떤 단말기가 어떤 류의 사람에게 맞으냐를 한 시간 안에 간파하여 분석해내는 기술을 연마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전역 기념으로 단말기를 하나 맞추려 하고 통신사 공식 판매 사이트를 몇 날 며칠을 헤매었습니다만 아무도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걸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는 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 아연해집니다. 요금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기계의 사용은 또 어떻습니까? 전망에 따르면 아이폰의 4세대[각주:3]와 5세대[각주:4]가 앞으로의 대세가 되면서 3세대[각주:5]는 완전히 떨이로 뿌려 버리는 '할아버지 폰'이 될 거라고 합니다. 요컨대 몇 달 뒤면 웬 아가씨 말에 혹해 웬 명함만한 화면을 이리저리 만지며 이게 뭐냐고 꼬부랑 들여다보고 있는 할아버님들을 도처에서 보실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이 민족, 이 영장류에게는 과연 평균적으로 4인치 쯤 되는 그 작디작은 네모 화면을 고개 푹 수그리고 그저 쳐다보고 있을 뿐인, 문화인류학적으로 극히 부자연스러운 이 모습이 스마트하다 할 만한 것입니까? 사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화면이 크고 전화가 안 된다는 '타블렛PC'[각주:6]를 알아보려 했다가... 스마트해질 대로 스마트해진 세상에 지금 막 복귀한 내가 굳이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싶어 그쪽 경로는 철수한 바지요만.
군에 있을 땐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이건 뭐 굳이 자격증 공부 안 해도 팔도의 절반 가량이 스마트폰과 관련 계약과 요금제에 정통해 있습니다. 요금제를 얼마 이상으로 하는 게 좋더라, 무제한은 생각보다 별로더라, 제일 먼저 무엇무엇[각주:7]부터 깔아야 한다, 아이폰 제5세대는 언제쯤 나온다더라, 입 가진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금 몇 시냐는 질문은 손목시계를 찬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자기 스마트폰이 편리하네 어떻네 손에 들고 자랑 혹은 험담을 실컷 하고 있다가도, 정작 이천시장 자리에 3선한 그 사람 이름이 뭐였는지 몰라서는,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의 스마트폰을 빼앗아 인터넷 검색에 '3선 이천시장'이라고 말했고 유승우 씨 아니냐고 되물어주는 지경입니다. 누가 영리한 것입니까?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 영리한 것입니까,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 시간이 언제쯤인지 무엇을 어떻게 검색하면 되는지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영리한 것입니까?

아십니까? 사실 우리는 스마트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라는 말을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일컬어지는 바 소비주의의 사회입니다. 여러분이 소비하는 것이 곧 여러분인 세상입니다. 스마트폰은 통신 3사의 영업 전략대로 날개 돋친 듯 우리에게 뿜어져 나왔고, 그걸 사들인 우리는 급작스럽게 스마트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각종 유형의 코드[각주:8]를 카메라로 찍어 온갖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다음 버스가 언제 오는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며[각주:9], 언제 어디서나 싸이월드와 지식iN과 페이스북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각주:10]. 그런데 이렇게 되새기고 보니, 저는, 궁금해집니다. 이것은 스마트한 사람의 수많은 요령과 방편들 중 하나이지 스마트 그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되묻고 보니 앞서 보여드린 '눈뜬 스마트폰 장님들'의 사례가 얼추 이해가 됩니다. 정말 스마트한 사람은 스마트폰이 없어도 대강을 파악하고 살아가며, 통찰하고,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공유할지언정 무엇을 공유하고 '트윗'[각주:11]해야 할지를 곰곰이 따지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하다는 말은 영리하다, 똑똑하다, 요령이 좋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동의하실지 모르지만, 기계의 덕목이지, 사람의 덕목은 아니올시다. 불러 주는 대로 정확히 알아듣고 정확히 음성검색어를 분석하는 건[각주:12] 기계의 일이고, 위성방송을 보다가도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병렬 연산[각주:13]과 다중 작업[각주:14]을 지원하는 것 역시 기계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이냐? "그래도 가끔씩은 동영상을 잠시 끊고 그녀만을 끝.없.이 바라"[각주:15]본다든지 "세상에 없던 세상이 기다리는 쇼를 하"[각주:16]는 것쯤 될 겁니다.[각주:17] 우리가 지금껏 최신 유행이라는 스마트폰을 탐내고 동경한 바람에 그리고 저들이 스마트라는 작위적인 어휘를 탈근대를 살아가는 단백질로서의 우리에게 마구 공급한 바람에 헷갈리고 있었습니다만, 스마트는 스마트폰에게나 어울리지, 우리 같이 그 이상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21세기형 멋쟁이들에게는, 폄하가 되고 실례가 되고 어쩐지 꺼려지게 되는 어휘에 다름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스마트함이 아니라 지혜로움과 성실함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글을 다시 잘 읽어보시면, 눈치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요즘 사용하는 외국어 전문용어는 가능한 따옴표로 묶어놓고 대신 최대한 우리말 표현으로 쓰려 한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스마트라는 말에 염증이 있고 각종 용어의 의미를 추리하기가 싫어진 분들을 위해 굳이 그렇게 썼습니다. 제가 용어들을 몰라서 그렇게 풀어 쓰고 안 쓰고 달리 쓰고 했겠습니까?[각주:18]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스마트해진 세상―에서, 용어를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것은 스마트함이 아닙니다. 정말 '영리하고(smart)' 똑똑하고 지혜롭고 성실한 것은, 전국에서 터지는 4세대 장기진화 통신망[각주:19]과 지식맨의 인스턴트 정보와 무시무시하게 빠른 연산처리 속도에 있지 않고, 그 이상의 세련미와 정성과 인간적 배려, 모든 것을 뒷받침하면서도 개성 있도록 스스로 만들어내는 문맥과 분위기 등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24개월의 할부계약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일평생을 공들여 이룩할 경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이런 거라면, 그리고 이렇게 듣고 보니까 스마트폰은 정말 그런 인간이 다루는 한 연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게 맞는 겁니다.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요금제를 당장 최저가 유형으로 바꿔버리고 세 번 접속할 사이트를 한 번만 접속하며 지내 보십시다. (그렇게 살기 힘든 세상이 조만간 올 거 같아 저는 몹시 두렵습니다.) 언젠가부터 전혀 쓰지 않게 된 저가형 디지털 카메라[각주:20]를 서랍에서 꺼내 들고 다니십시다. 그렇다고 해서 영영 그 편리하고 많은 응용 프로그램들과 작별하시자는 논조가 아니올시다. 요컨대 우리가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정말 스마트해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처럼 멍청한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지갑에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지하철 노선도와 휴대전화에 깔린 노선도 검색 어플이 동격이어야 하고, 그 정도 수준까지 양방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참으로 머리 좋은 사람이 되시자는 말씀입니다.

아니오, 우리는 현명해져야 할 일이지, 스마트해질 이유는 없습니다. 애당초 스마트하지 않으므로.



P.s 1.
근데 확실히 불편하긴 합니다. 아직 전화기를 안 바꿨는데, 조금 있다가 갈 국립중앙박물관 찾아가는 길을 (이촌역에 내리면 어떻게든 된다는 식으로 어렴풋이는 기억해 두고서도 혹시 몰라 굳이) 디카로 촬영해서 들고 갑니다. 그놈의 스마트폰이라는 것만 있으면 그냥 일단 버스부터 타고 로드뷰 찾아서 가면 그만인데... 그런데 또 그렇게 손쉽게 찾아갔다 오고 나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옛날에 어느 영어선생님이 가르치시길 영단어를 공부하려면 전자사전 쓰지 말랍니다. 철자를 '입력'하는 대신 입으로 되뇌이면서 책장을 뒤적이면 더 잘 외워진다고요. 위에 쓴 이야기는 다 이런 맥락입니다.

P.s 2.
여기서부터는 흰 아이폰 4세대 사고 나서 하는 잡소리~ 보시라 놀라시라 이거슨 iEojin
잠금화면 홈 화면

P.s 3.
그건 그렇고 LG가 오랜만에 광고로 사람 한번 혹하게 했다. 전체화면 열어서 함 보시라. 그들의 야망대로 4G부터는 정말로 역사가 확 바뀌어버렸으면 싶다. 볼만하겠지?
  1. 2G. [본문으로]
  2. 3G. [본문으로]
  3. iPhone 4G. [본문으로]
  4. iPhone 5G. [본문으로]
  5. iPhone 3G, 3GS. [본문으로]
  6. 혹은 스마트패드. [본문으로]
  7. 필수 어플리케이션 모음. [본문으로]
  8. 스마트코드: QR Code, IR Code, 마이크로소프트 태그 등. [본문으로]
  9. 각종 버스운행정보 앱. [본문으로]
  10. 각 서비스별 전용 어플리케이션. [본문으로]
  11. Twitter.com에 무엇을 적어 올림. [본문으로]
  12. 구글 음성검색. [본문으로]
  13. Parallel Computing: 멀티코어 프로세서의 원리. [본문으로]
  14. Multitasking. [본문으로]
  15. 'Samsung Galaxy S Hoppin' 선전문 중. [본문으로]
  16. KT의 과거 브랜드 'Show'의 선전문 중. [본문으로]
  17. 이와 같이 놓고 보면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스마트한 기능을 선전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미덕과 지향이어야 하는 양 말을 바꿔치는 희대의 배반극을 벌이고 있다. [본문으로]
  18. 혹시나 해서 굳이 알파벳을 써서 웬만한 건 각주로 적어둠. [본문으로]
  19. 4G Long Term Evolution. [본문으로]
  20. 이른바 벽돌 혹은 똑딱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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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출처
방송사는 저작권을, 연예인은 초상권을 걸고넘어질 거고,
그 동안 방송 맛집으로 소개돼 영화를 누리던 식당들은
오직 <트루맛쇼>에서 찍은 식당만 돈 내고 출연했다고 주장할 거고,
맛집 방송 제작진들은 <트루맛쇼>에서 촬영했던 프로그램들만 조작된 건데
다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이라 펄쩍 뛸 거고,
방송 브로커 수첩에 적힌 수십 명의 작가들은
이승복 어린이처럼 “우린 그 브로커 몰라요~” 소리칠 거고,
인터넷에서 가짜 손님 동원한 것도 손님들이 워낙 밥 먹다 인터뷰하는 거 싫어하시니까
증거가 제시된 딱 300개 정도의 방송 프로그램에서만
손님들 식사하시다가 체하시지 않도록 마음 약한 제작진이 배려해서 세팅한 거고,
방송사들은 자신들이 충분한 제작비를 지급하고 있는데
무식한 제작사가 돈 더 벌겠다고 오버해서 영업 뛴 거라고 다 뒤집어씌울 거고,
제대로 저널리즘 공부가 안 된 외주제작사 PD와 작가들이
잠시 뭐에 홀려 방송의 본질을 망각한 거라 해명할 거고,
외주제작국 회의실에 모든 제작사 대표 불러 모아서
“이러다 공멸한다” 협박하고 말 맞춘 다음에
역사적으로 늘 착취와 증오의 관계인 갑과 을,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대동단결해서
나와 <트루맛쇼>를 물어뜯을 거다.
아~ 큰 일 났다.

다른 건 읽으면서도 별 감흥 없는데 이건 화가 불끈 솟는다.
아무도 얘기는 하지 않는다. 초상권 저작권 그따위 게 문제야? 어쩌면 다들 이렇게나 정말 중요한 이야기로부터는 이렇게까지 그럴싸하게 철저하게 눈을 돌린단 말인가? 왜 그걸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지? 왜? 뭐가 그리 아쉬워서?
대명사를 혐오하기로 했다. 우리는 좀더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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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ADTS 성적표

2011. 7. 18. 06:00

졸업사.
오늘 나는 ADTS를 졸업한다. 정말 길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하나님은 과연 말씀으로 약속하신 대로 내게 베드로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나는 도망쳤고, 그분은 못박히고 계셨고, 지금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간 곳에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인격체가 인격체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에 힘들게, 구구히, 뻔뻔스럽게 답하였다. 세상은 광야였고, 과연 아무것도 없어, 있느니 황무지와 영원하신 광명의 하나님 그리고 그 아래에 어느 날인가 허리를 굽혀 엎드려 순종할 한 사람 애늙은이뿐이었다. 군대에서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해선 안 된다. 그건 시간이 안 가서 괴로워하던 입소장정, 훈련병, 이등병, 일병, 상병, 병장 시절의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지 않나. 이제 문화가 있는 곳에서 교양인답게 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제 시작이다. 두 번 다시 아침점호니 식사집합이니 취침소등이니 이동병력 통제니 보안성 검토니 따위와 불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제 돌아간다. 이제 시작인 거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군대 가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법'을, 숙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몸에 익혔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예전 같았으면 아이팟 관리하고 픽시브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을 실천이라는 것을, 하기 싫은 일과집합 나가 하기 싫은 온갖 작업 해치우는 듯한 그런 기분으로나마 할 수 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를 이루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고통을 투입해야 한다. 그 임계점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가 개고생과 성취의 한끗 차이였다. 손글씨 서체 원도는 의외로 진척이 있어서 전역 전에 대강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고 시나리오는 마음같아서는 앞만 보고 달리고 싶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숱한 B급 스토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낮은 포복으로 끝까지 기어서 가야겠다. 진들레 민달래 이야기는... 한 달은 너무 늦으니까 두 달 내지는 50일 전쯤부터 준비해서, 어차피 공모전이니까, 개활지에서 신속한 전술이동을 실시하는 기분으로 그때 가서 해야겠다. 3인조 밴드를 한다는 이야기는 잊고 있었는데 일단 나머지 둘이 전역을 하면 그때 얘기하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대착오진흥원을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시대착오진흥원은 생전 전도의 사명을 딱 한 명에게밖에 실천하지 못했던 내 자신과 그래서 서운해하시는 그분을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가야 한다. 군대가 힘들었던 건 오직 그것이었다. 내가 무엇에 충성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어 있었던데다가, 실상 아무도 무엇에도 충성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해.
복학은 제때 하지만, 이제부터 전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3학기 동안 지나치게 허송세월하였다. 그렇게 쾌적한 곳에서 그렇게 좋은 여건이었는데 나는 왜 공부하는 시늉만 무려 1년 반을 하다가 이제서야 5학기만을 남겨놓고 이러고 있는 건지? 고등학생 때처럼, 내게 주어진 주특기와 일과가 정치와 경제와 철학인 양 투쟁처럼 학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돈도 문제다. 400여만원의 학자금 대출은, 아직도 단 몇만 원이 없어 각자 이리저리 돈을 꾸기 급한 우리 가족들의 발목을 조른다. 아이패드를 약정해서 공부하는 데 쓰겠다는 내 소박한 꿈조차 불안한 지경이다. 과외를 알아봐야 한다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정말 큰일이다. 과외의 핵심 기간은 9~11월, 대학생들도 한창 학기중인 시절 아닌가. 이 기간에 kocca 공모전이 있고 내 학점도 관리해야 하고 누군가의 공부도 봐 줘야 하는 지경인 것이다. 여기에 지방고와 연필 시리즈가 겹쳐 있다. 더 힘들게 살아야 할 줄은 알지만, 이렇게나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는, 좀 몸서리가 쳐진다. 각오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400만원이라는 너무 큰 값을 치르고 들어가는 것이고 보면, 첫째 가정 경제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과 학업이 지상과제다. 이제 최신애니 챙겨 볼 시간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주일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적어도 지금처럼 어질러진 컴퓨터책상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테니, 일단 집안부터 말끔하게 치우고 봐야겠다.

개인 신상과 정신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이 벌어졌던고로, 지난 1년 10개월의 나날을 온전히 '납득하는 법'을 터득하는 데 보냈다. 거기에 소모된 내 정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고 싶은 만화 못 보고, 하던 블로그질 못 하고, 듣던 음악 못 듣고, 가고 싶을 때 가던 교회 못 가고 오로지 일어나기 싫을 때 일어나 가기 싫은 곳에 가서 모이기 싫은 모임을 모여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나면 즐기고 싶지 않은 것을 즐기라며 틀어대던 TV, 하기 곤란한 대답을 하라는 그 온갖 눈치, 헛소리, 쌍소리. 그 모든 것들에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나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제 나는 군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다만 진짜 군병다운 군병, 십자가 군병으로 살 일이나 기대하고 걱정해야겠다.
한 가지 더 군대생활이 내게 가져다 준 변화는, 죄책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모니터 앞에 혹은 강의실 책걸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살아가는 인간이 느끼는 죄책감과, 매일매일 닥치는 거지 같은 일에 거지같이 대처하며 살아가는 시궁창의 인생이 느끼는 죄책감은 다르다. 나는 어느 날 깨달았다―득죄가 문제가 아니고 다만 그분을 사랑하지 아니함, 스스로를 유기방치함, 밤새껏 그토록 내리갈굼을 먹었을지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표정을 바꾸지 않고 일어나 다시 멀쩡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애써서 이미지를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아니함, 그게 문제가 된다. 과연 그렇게 살아야 한다. 깨끗한 방 안에 틀어박히려 하지 말라! 밖에 나가 나뒹굴며 할 일을 하고 돌아와 철저하게 다시 씻으라! 물론 그 얼마나 고된 일이냐마는, 그것이 사는 방법이다, 라고!

사회생활과 사람들에 대해.
나는 여태껏 사람들을 겁냈다. 나를 순식간에 기억하고는 온갖 관심과 호기심으로 나를 지켜보는 그들을, 나는, 그들이 하는 것처럼 재빨리 기억해내지 못했다. 외적으로 딱 보아서 잘난 것도 없었다. '머리가 좋다'라는 말은 내게 칭찬이 아니라 내가 그런 캐릭터라는 의미의 정언 명령이었고, 김어진이란 이름에 대답하기가 싫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겁이 났고 피하게 되었다. 메시지 수신 신호음이 딩동 울릴 때마다 진심으로 덜컥덜컥 놀랐고, (비록 이메일로였지만) 내게 날아온 러브레터 같은 것에 대해서도 (물론 중학생이었지만) 전혀 남자답게 대처하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날 만나주겠다는 동년배 여자애들 앞에서 한없이 쑥스럽고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동년배 남자애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겁내지 않아야 한다. 알고 보면 누구나 다 후달리는 것인데 다만 그러므로 자신감이 미덕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자신있어할 따름인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에게 정직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정직하겠다―라는, 변명치고는 구차한 논리를 말해 왔는데, 그것만도 아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내가 저들이었다면 나 같은 걸 만나 주고 뭔가를 대접해 주었을까, 은혜를 입고 있다는 감사뿐이다. 특히, 적어도 내 눈에는 상당히 귀엽고 보기 좋은 개성이 차고 넘치는데 내게 아는 척을 하고 연락을 해 주는 동년배 여자애들이, 고마움을 넘어 신기하다. 이런 몰골을 무슨 기분으로 만나주고 있는 거지? 그래서 거기에 보답하고자 나도 최선을 다해서 웃기려 하고 웃어 보고 때로 진지하게 말해 주고, 할 수 있는 데까지 갚아주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게 눈에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대 울타리 안에 갇혀 매일 보는 풍경만 매일 보는 시절이 1년 반을 넘으니, 사회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락을 취할 수 있고 가서 닿을 수 있고 내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이라는 게 지독하게 그리워진다. 이제는 나도 아무 이유 없이 만나서 술 마시자, 밥 먹자, 좋은 연극이 있는데 같이 보러 가자, 뭐 그렇게 먼저 다가가고 노력하고 누군가를 만나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내가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길이요 보은(報恩)이고 지난날 내 군생활과 그 이전의 갑갑하기 짝이 없는 소극적인 처세술을 청산하는 방편이다. 다들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당사자는 한시가 급하다. 이 간단한 것 하나를 배우는 데 스무 몇 해를 탕진했었으니까.

끝으로,
기도하지 않고 들어간 군대였고 스스로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들어간 군대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걱정해야 할 일을 이만큼 보급해 주셨고 기도할 이유를 이만큼 할당해 주셨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아무래도 모든 것을 방치했다는 느낌이다. 제때제때 남들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도 있거니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그러했다. 그런데도 다시 묻고 계시는 질문―김씨네 아들 어진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앞에서, 나는 허물어진다. 이등병 때,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게 압박하고 눈치를 주던 그들에게 반항한다는 기분으로 배짱 좋게 들고 들어왔던 8만 9천원짜리 아이팟 셔플에도 'Eojin,/do you love Me?'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걸 들킨 후로 폐급 취급이 확정되었던 나지만, 최후의 오늘에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전역한다(고 생각한다). 이 2GB도 되지 않는 mp3p는, 앞으로 오디오 팟캐스트 전용으로 사용하면서, 흙빛 안개 부옇게 끼었던, 1년 10개월 동안 구부러진 산길과 오르막, 내리막, 목적지가 바라다보이는 마지막 구간으로 이어져 온 이 야간행군을 다시 되새기고 또 되새길 군번줄 같은 것이 되어, 앞으로도 내 두 귀에 걸릴 것이다. 그 차림으로, 나는, 더 고되지만 그래도 남이 시켜서 가지는 않고 그러므로 정말로 이번엔 내 주 예수님과 진짜로 교제하며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더 긴 행군길에 나선다. 잘 있어라, 109대대.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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