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워서 그냥 올린다.
손호철 교수님한테 낸 문서에는 아무 글자효과도 안 돼 있었는데 여기선 걍 bold치겠음
특강 소감문: 홍세화, 정동영, 정몽준
한때 기자였던 세 명의 어른들은 이제 저마다 다른 행보로 정치계의 길을 걷고 있다가 한국정치를 개괄하는 수업 시간에 특강 강사로 초빙을 받았다. 그들은 지면과 모니터로 보는 것보다 더 ‘대두’였고, 더 인기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보좌진과 카메라를 동원하기도 했고 강연이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 익숙한 미소로 휴대전화 카메라를 바라보는 능숙함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명성과 동경으로 덧칠된 풍경을 꺼린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든 다들 밥 먹고 잠자고 뒷간 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든지 어디까지든지 이러한 기초에서부터 시작하는 겸손함에 근거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은 그나마 홍세화 씨가 약간 보여주었고, 정동영 씨는 그것이 거의 없어져 있었고, 정몽준 씨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은 그들이 초대받은 순서요, 준비물을 적게 들고 들어온 수요, 그들이 이념 스펙트럼에서 위치한 좌우 순서이기도 했으며 내가 들은 특강 내용의 알찬 것부터 뒤진 것까지의 순서이기도 하다.
홍세화 씨는 위치와 몸을 지니는 인간론을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이어가면서 우리가 왜 사회와 자본의 이해관계와 노동의 문제를 직시해야 하는지의 논리를 펼쳤다. 그 가운데 어휘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의 어감으로 활용됐고 문제들은 아무래도 갈등론적 시각으로 분석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인간’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과연 모두가 합의할 만한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시각을 강의실 내에서나마 확보할 수 있기를―사실 이것이 내가 기대했던 것이기도 하다―바랐던 내 기대는 갈수록 아쉬움과 혼란으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질문했다. 여기서의 인간론도 마치 그 자체로 이견이 없을 것 같지만 또 다른 인간관에서는 효용이니 행복 추구 따위를 말하는 그 자체로 완결된 듯한 인간관이 있다, 이 두 진영 사이의 용어 합의는 가능하겠는가. 나는 이렇게 질문하려고 애를 썼고, 그도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믿고 실제로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런 평행선은 언젠가 극복될 것으로 본다’라는, 결국에는 합의되지 않고 다만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비쳤다. 과연 그것뿐일까. 우리는 과연 사회문제 이전에 인간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철학도로서 받은 화두가 그나마 가장 많은 강의였다.
정동영 씨는 현역 핵심 정치인답게 최대 현안인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그의 최근의 정치적 입장을 발표하는 자리로 강의 시간을 채웠다. 그가 들고 올라간 태블릿 PC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는 우선은 자기가 괴담을 유포하는 국회의원이 된 신세에 대해 ‘세상을 잘못 읽고 있었다’라는 후회를 학생들 앞에서 변명하고, 이어서는 에콰도르 전 경제정책장관과의 대담을 지겹게도 인용하며 이것이 자유무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차라리 미국의 제도를 이식하는 경제통합 협정에 다름없음을, 특유의 강약이 존재하는 정치 연설 분위기로 내내 힘주어 외쳤다. 그가 참여정부 때는 이것이 오직 자유무역 협정일 뿐이고 ‘금융허브’는 허황되지 않은 구상이며 이행법이라는 것이 맺어져 있는 줄을 몰랐다고 변명할 때의 어조는 매우 낮고 조금은 우물거렸지만 반성의 기미는 분명히 보이는 기색이었는데, 그러다가도 다시금 “그러나 헌법 119조와 경제민주화를 적시한 헌법 123조를 어기는 이 협정은 헌법소원을 거쳐서라도 맺어서는 안 된다”라고 연설할 때는 앞에서 무슨 사죄의 변이 있었느냐는 듯이 전혀 망설임이 없고 맹렬했다. 나는 그가, 자기 트위터에 올렸었고 이후 <주간경향>에서 다시 한 번 인터뷰로 말한 “사람, 사람, 사람!”을 뭔가를 광고하는 사람처럼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어렴풋하게 의문시해 왔던 문제의식을 그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일말의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대뜸 질문했다. 서민이라는 어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설마 했지만 역시나 그 역시 ‘서민’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뭔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자기도 이따금 연설 등에서 친서민이란 말을 하긴 했었노라고 털어놓는 등 전혀 준비된 대답이 없었다.
서민. 베드로 사도가 “나도 사람이라”라고 했을 때의 ‘사람(영어성경에서는 mankind, “인류”라고 나온다)’이란 단어가 갖는 자아의식은, 적어도 “나도 서민이라”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사인회가 끝난 후 손호철 교수님과 학우 몇 명과 함께 간단히 서민 개념을 토론할 수 있었는데(이 시간이 짧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여전히 나는 그가 이 문제의식을 정확히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뿐 아니라 그나마 개중 건전하게 본격적으로 대의정치를 한다는 ‘어른들’ 중 과연 몇이나 서민이라는 프레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서민이란 ‘서얼(庶孼) 출신’ 할 때의 그 무리 서(庶) 자를 써서 people을 표현하는 일본산 한자어다. 그리고 우리가 국민이나 시민 혹은 베드로 사도가 스스로를 지칭한 어휘로서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원흉의 하나로 나는 복수 1인칭 재귀명사로 쓰이는 바로 이 서민이라는 단어를 지목하고 싶다. 내가 왜 서민인가? 우리 가족이 소득 5분위의 최하위권에 들어간다거나 내 정치적 행보와 취향과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거나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가 불쌍한가? 서민은 없다. 없어야 한다. 돈을 얼마나 벌건 얼마나 쪼들리고 살건 실제 삶의 규모가 얼마나 작건 크건, 1표를 행사하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고 어떤 행동이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결코 서민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기기만이 아니다. 분명한 현실 인식과 그것을 초극하겠다는 의지와 ‘등장’의 차원인 것이다. 요컨대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규모를 딱 ‘MB 물가 바구니’ 수준으로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타도해야 할 개념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인간 자체를 말살한 낙인이라면 ‘서민’은 경제적 인간 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무서운 계급장이고 그 자체로 잘못된 계급 구분이다.
정몽준 씨는,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혀 잘못된 허위의식으로 완전히 무장한 세계관 위에서 그 많은 학생들을 교육하고 바로잡아주려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단 내용이 완전히 갈팡질팡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빈약하고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유의미한 내용이 “민주주의의 종착은 순한 전제주의다”라는 토크빌의 인용이라고 느꼈을 정도니 다른 학우들은 오죽할까. 미국이 세계의 1인자 체제로 가는 것이 당연한 대세인 것처럼 말하다가도 다시 동북아시아와 핵보유국 문제 등이 복잡함을 거론하더니 이렇게 파란만장하지만 기적의 역사라 할 만한 시대와 지정학적 위치 속에 사는 우리는, 방심하고 있다가 습격당한 대목인데, 이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창업 기대주’로 순식간에 둔갑했다. 그는 요 몇 달 동안 급부상한 2040 세대에 대해서도 “그들이 대한민국 사회를 대표하진 않겠지만 내가 그 세대와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라며 자신의 시대착오적 위치와 입지를 시인함으로써 그대로 이 강의실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사로서 초빙받았음을 승인한 듯했다. 그에 대해서는 질문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무엇을 질문하든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닌 한강의 기적을 주문하는 눈치를 되돌려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는 서민보다 더 서민이라 할 만한 대학생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 재단의 청년사업지원책의 도움을 힘입어 이 경제체제의 승리자로 올라올 수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의 국민들을 대하는 기분이 또한 그럴 것이다. 가장 큰 시장 지배자가 나머지 공급자의 한계비용곡선을 전부 흡입하는 이 체제에서 마치 모두가 747의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마치 자기가 그런 것처럼―굳게 믿는 그런 기분.
개인적으로 세 사람 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5년쯤 전이었더라면 이 세 사람의 화두가 전부 내 삶에 폭풍처럼 몰아닥쳐 완전히 내 정치적 방향을 어지럽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정치체제도 베드로 사도가 알고 속하고 따르던 국가 곧 천국에 비견하면 전혀 하급의 것임을 잘 알게 된 지금의 나로서는, 그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는 체제와 세계관과 그 속의 인간됨에 충실하고 있는 세 노선의 대표자들이, 모두 마뜩치 않았다. 그나마 굳이 고르라면 맨 처음 말했던 그 우연치 않은 순서대로 먼저 마음에 들었다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사람이다. 홍세화 씨가 말한 것처럼 오직 이 사회 속의 인간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요 2013년 체제를 살게 될 평범한 일반 서민도 아니고 (기존의 생산체제와 규칙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겠다는) 꿈과 열정이 가득하기만 한 젊음으로서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 사람 다 그것을 말하는 시늉만 하다가 그만 끝나고 말았다. (끝)
시청각자료 소감문: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부끄럽다. 거창 학살 사건이라는 끔찍한 일을 이번 수업 시청각 자료로 처음 알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과연 내가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에 배운 일이 없었던가? 다른 학우들이 80년대 색조가 충만한 상황 재연 장면의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쉬지 않고 웃을 동안, 난 정말 어색한 한두 장면을 제외하고는, 사안 자체가 워낙에 웃음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거의 예절의 차원에서 웃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맨 처음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을 정교하게 세워 놓고 바닥에 깐 레일을 따라 무표정의 시골 사람들을 몇십 초 동안 빙빙 돌다가 멈추면 눈치를 보다 못해 앞으로 뛰쳐나와 외치는 한 사람, “왜 이런 짓을 하는지나 좀 알자”는 그의 외침은, 당시의 TV 프로그램 제작 기술의 열악함과는 무관하게 너무나 시끄럽게 쏟아지는 소총 소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게 뭐지, 이렇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에 경악했고 그 다음에는 그 비극이 내 삶에 엷게나마 겹쳐 들어오면서 먹먹해졌다.
이따금 빨치산이 잠시 내려갔다 올라올 뿐이었다는 아무것도 없는 산골 마을이었다. 어느 날 군인들이 학교에 진을 치더니 집합하라고 하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면장이 와서는 고개 몇 번 끄덕이고는 뒤돌아 가 버리고, 하필 그 때 몸을 풀게 된 한 산모의 가족이 있어 그들만이 그 생지옥을 빠져나왔다가 되돌아와 보니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빨갱이 혐의를 뒤집어쓰고 깡그리 몰살당한 동네 사람들의 시체 무더기였다. 시청각 자료의 조잡함과는 별개로 어마어마하게 전해져 오는 끔찍한 정황과 중간에 소개되는 관련 정보들을 보고 듣는데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군이 주장하는 사건의 경위는 마지막 3일에 전말이 있었지만 민간 피해자 협의회 측은 6일 전부터 간헐적으로 부당 대우와 집단 수용 그리고 2차에 걸친 학살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보통은 ‘당한 사람들’, 곧 피해자의 말이 맞을 때가 많고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기리는 1951년의 위령비는 쓰러졌고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이후에는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그들의 신분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지금은 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한국전쟁 기간에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일이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웬만해서는 놀라거나 감정적으로 분노하려 하지 않는 나도 이와 같은 몰상식한 부조리 앞에서는 화가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이보다 많은 학살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군이 거창에서만 빨치산과 양민을 혼동했겠는가. 다만 잊어버릴 따름이고 외면할 따름이고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둥,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있었다는 둥 어물어물 매몰했을 뿐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지금도 반복된다. 예컨대 수능 직후 수험생 자살 뉴스는 이제 새롭지 않고 그래서 뉴스가 되지 않고 심각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시대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성의와 압제로 점철한 군사 권력’의 횡포 그리고 그에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양민들의 처지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우리는 이제 기억한다. 그런데 과연 수능 직후 수험생들의 연쇄 자살은, ‘입시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시대상’에서 ‘압제로 점철한 수능 체제’의 횡포에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의 처지로 인해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자살방조였다고 기억될까? 슬프게도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패러다임으로서 이와 같은 역사적 평가를 하지 못하게 할뿐더러 사실 지금도 그것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 수험생들이 단지 조금 더 견디지 못한 가엾은 영혼들이라고 치부하여 문제를 덮어 버리고 있다. 훗날 언젠가 수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치르던 시기를 근현대사 시간에 배우던 어떤 학생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던 ‘수능 자살방조’ 항목을 조사하다가 놀라지 않을까? 마치 내가 이 시청각 자료를 보고 이렇다 할 이차적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넋이 나가 버렸듯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