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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

2015. 6. 16. 23:20

다음클라우드가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하는 이 시점에, 바이두와 360클라우드에 올려 놓은 만화 파일들을 익숙하게 다운받아 보다가, "야 어진아 혹시 몽촌토성 영상 원본 없지?"라는 물음이 와서 "내가 지웠을 건데 함 찾아볼께요" 하고 집에 와서 옛날 하드디스크들 열어보다가 문득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정말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싶은 것이다.


당장 2012년 5월께만 하더라도 나는 몽촌토성에서 나 한 명이 구르는 비디오가 그렇게 일회적이고 두 번 다시 재현 불가능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냥 공식 유튜브 계정과 내 아이팟에 최종본을 넣어 놓았으니 이걸로 그만이겠지 하고 정말 어리숙하게 원본 파일들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미친 거 아냐? 최종본은 없어도 원본은 남아 있어야 될 거 아냐? 지금도 그걸 veg파일, sfk파일과 함께 통째로 싸그리 없애 버린 내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그 시절의 나는 백업 개념이 완전히 틀려먹어 있어서, 백업할 파일을 골라서 업로드했었다. 뭐 지금도 남아 있는 버릇이긴 한데, 같은 파일이 두세 번 올라간다든가 정말 하등 쓸모없는 파일이 업로드되느라 시간이 지나간다든가 하는 걸 잘 못 봐주는 편이다. 이제는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최대한 날것 그대로를 있는 대로 몽땅 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참 많이 변했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두고두고 옛날을 되씹고 싶지는 않다.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걸 매일 반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들은 다 어디에 저장해 놔야 유지가 된단 말인가. 2테라바이트를 주는 바이두 정도가 일단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으니 함부로 종료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이거 정도가 그나마 안정적일 것이다. 세월이 좀 지나면 저장장치 용량들도 좀더 늘어날 테니, 아무 생각 없이 파일들을 짱박는 것이 좀더 쉽고 값싸지겠지.


이 모든 데이터들이 어느 날인가는 그냥 스러지고 없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디지털 자료는 영원할 거라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그 무엇보다 핵심적인 근거는, 그 디지털 자료를 찾을 만한 사람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점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자료들은 아무 의미도 소유주도 얻지 못한 채 유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자료가 다시 위로 올라오고, 다시 한번 read가 되고, 캐싱이 되고 하는 거지 싶다.


이를테면 우연히 영화 소개 TV프로그램에서 봤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내 컴퓨터》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현재 씨네21의 글을 클리핑한 진보넷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영화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우연히 쇼윈도에 진열된 컴퓨터를 보고 그게 자기가 옛날에 빼앗긴 컴퓨터임을 알아차리는 장면 그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씬 하나가 그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나도 내 컴퓨터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수 년 전에 잃어버린, 자기가 가꾸어 놓은 바탕화면의 '내 컴퓨터'가 그 모양 그대로 쇼윈도에 놓여 있는 걸 보면, 무슨 감회가 들까.


여균동 감독은 《내 컴퓨터》라는 영화의 원본 필름을 갖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안 그럴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지금 TAILER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추진력과 기동력을 선전하는 바로 그 행사의 바로 그 원본 영상을 안 갖고 있듯이 말이다. 이제 그것은 어처구니없고 죄스러운 일이 되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완벽한 기억의 보존이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 내가 남겨야 할 것은 어느 정도까지일까. 더 많은 백업은 그것을 더 많이 보장해 줄까. 어차피 언젠가 스러질 자료들이고 기억들이라면, 어떻게 스러지게 하면 좋을지를 좀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생각이 엉킨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일부터 대학 생활 마지막 시험이다. 이제 정말로 학창시절이 완전히 끝나고 세상으로 던져진다. 낙서공책을 모으고 모든 것을 백업해 두고 마냥 내 아이팟을 들여다보며 애지중지 이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유아적인 생각은 그만둔 지 좀 되었지만, 실존적으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스러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좀 잘 스러지고 싶은 것인지, 스러지게 내버려두기 싫은 것인지 어떤 것들은 스러지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것인지―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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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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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칫둠칫

2015. 5. 14. 09:34
어제 그럴 일이 있어서 저녁 6시 반경에 신촌 유플렉스 앞에 있었다. 흰 티에 민트색 하의로 깔맞춰 입고 나온 20대가 한 스무 명 정도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스피커가 설치되고, 그들 중 여자 다섯 명이 가운데로 나와 레드벨벳 최신곡에 맞춰 커버댄스를 정말 능숙하게 선보이지 않겠는가? 민트색 치마는 치어리더 스타일이어서 있는 대로 나풀거리고, 표정은 어쩜 저렇게 프로페셔널하게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돼 있는 광경을 봤다. 적잖은 남성 행인들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 그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왠지 우리가, 그들이, 모두가 조금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 5명의 훈련된 웃음과 배운 대로 추는 춤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큰 의미 없이 웃는 시선 처리와 사람 홀리는 치마의 비주얼 단지 그 둘 때문에 이런 무대에, 여성 아이돌에 홀리는 사람들이 있겠다 싶었다. 사람들의 주목과 카메라의 포착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 그 ‘섹시도발’을, 한순간 진실한 것으로 믿어버리고 욕망하게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동아리방을 드나들 때마다 춤동아리의 연습을 봐 온 나는 안다. 군무라는 건 심각하고 따분하고 진지한 과업이다. 저 민트색 치마는, 지금이야 길거리 깜짝 공연에서 최고로 주목받는 주인공일지 모르지만, 그 직전까지는 그냥 딱 한두 번 입어보고 어디 박스에 다시 개켜두었을 물건이고, 아마도 저 다섯이 저 “섹시 댄스”를 연습하던 대부분의 시간에 그들은, 내가 봐 온 게 일반적이라면, 아마 헐렁한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전혀 섹시하지도 도발적이지도 않게 마냥 고생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그들이 배운 대로 따라했을 그 춤, 그들이 수도 없이 들었을 “Give me that give me that icecream cake!” 따위 가사가 포함된 음악을 제공한 자들의 저의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크게 의심하게 된다. 뭐 하자는 것일까. 더 많은 5인조 여성팀이 더 확실하게 이 춤과 음악을 따라하게 만들면, 더 나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것일까?
하! 그럴 리가 어딨어? 이번 “시즌”에 “애들”을 “굴릴” 때 쓸 “최신곡”이 뭐든 하나 필요하니까 팔아치우려고 즉석 떡볶이로 볶아내 놨겠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의 복합을 본 사람들이 괜히 성욕이나 일으키는 거대한 오해와 허위와 가공의 세상이 되든 말든, 음원 수입에 행사 출연료만 두둑히 받아 챙기면 그만일 테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챙긴다더니!

선비질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춤을 추거나 보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춤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게 허구화되고 우상화되어 소외될 때다. 약 4분간 숨가쁘게 공연된 그 춤에서, 정말 이 동작이 필요한가? 싶은 순간이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 하나 목적이 있긴 했던 것 같다. 관객에게, ‘지금 내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애교를 부리고 있다고 믿어 주세요’의 신호를 보낸다는 그 한 가지 목적. 하마터면 나조차도 그 목적을 달성시켜 줄 뻔했으니,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뭐 오죽하겠는가. 이런 식의 것들이 밤낮 없이 유통되는 세상에서 성추행, 성폭력, “맞다 개같은년” 운운하는 방송이 없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5인조 무대가 끝나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20여명의 동료들이 합류해 다음 공연을 시작했다. 이제 그만 이동을 해야 해서 자리를 뜨다가, 문득 그들의 가방으로 추정되는 가방의 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제 그 저녁 시간 게릴라 공연의 자리에서, 그들의 춤이 뭘 의미하는지를 맨 처음부터 지켜봐서 아는 것은 오직 저 맥없이 널브러져 있는 가방들뿐이었다. 그리고, 천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 가방 더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들이 딱 한 번 보여줄 잠깐의 쇼로만 사태 전체를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들과, 그렇게 하라고 설계된 “둠칫둠칫”만이 가득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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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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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ㄱㅅㄲ 해봐!








웹진 회의 중 잠깐 남는 시간에 그린 건데 내가 봐도 pointless하기가 노답이다… 이건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웃기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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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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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레스를 약간 할 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건데 이게 살짝 조립PC 느낌이다.


  1. 2000년대 초반에 “PC를 삼보컴퓨터에 가서 사지 않아도 조립해서 쓸 수 있다!!!”라는 사실이, 우선은 너드들을 중심으로 굉장한 충격을 안겨주면서 퍼져나갔었더랬다. 아직은 그런 게 가능하긴 하냐는 분위기였다.
  2. 이후 막 너도나도 조립을 해보았다드니, 실패했다느니 성공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막 오고갔다. 여기까지는 뭐 그냥 신기한 이야기.
  3. 그런 시절이 지나고 나니까 부품들이, 부품 생산 업체들이, 조립이 가능하게, 아니 조립에 좀더 최적화된 부품들과 옵션들을 내놓기 시작을 했다. 여기서부터 일반인들이 ‘어? 그럼 나도 이거 이거 사서 후기글 보고 여차저차 하면 되나?’ 하고 괜히 도전해 보기 시작한다.
  4. 그러더니 저렴하게 PC를 조립해 주는 회사들이 브랜드를 달고 나타났다. (주연컴퓨터라느니 여우와늑대라느니… 맞나? ㅋ 나중에 다시 조사해보기로) 이 단계쯤 오면 이제 “컴퓨터 좀 아는 형”들이 등장해서 동생들 컴퓨터 구매에 충고를 해 주고 그런다.
  5. 메이커 업체들은 AS가 잘 된다는 것과 품질을 보증해 준다는 메리트를 가지고 승부를 했고, 이런 대응이 있을 때쯤 용산과 강변에서는 뭐 그냥 PC 조립해주는 것이 핵심 사업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PC를 조립해서 쓸 수 있다는 건 상식인데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대중화되지는 않는 단계.
  6. 그 다음 수순이 되니까 이제 메이커들은 아예 다른 시장(노트북, 휴대폰…)을 개척해서 나가 버리거나, 아주 약간의 데스크톱 PC 시장 지분만 운용하는 정도고 이제 PC 구매만큼은 메이커와 조립PC 사이에서 충분히 잘 알아봤느냐 안 알아봤느냐, 내가 직접 하느냐 남한테 돈을 주고 시키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선택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 모든 옵션들이 서로 아무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시기쯤 되었을 땐 이미 486 586 같은 단위는 사라진 지 오래고 부품을 끼우면 끼운 부품 값을 컴퓨터가 그대로 하는 아키텍쳐가 다 돼 있고 웬만해서는 누가 어떻게 해도 큰 문제 안 일어나게 기술 튜닝이 돼 있는 때였으니까…
  7. 그리고 한참 잠잠히 있다가 슬슬 다음 파도가 밀려오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라즈베리 파이, 아두이노 같은 툴킷 컴퓨터가 아니겠는가 추정됨. 이제 관건은 이 대상의 얼마나 깊숙한 잠재력을 끌어내서 얼마나 대중적으로 만드느냐에 달리게 된다. 이거 잘 하면 위대해지는 거고 못 하면 뭐 그냥 팔로워 되는 거지.


뭐 대충 이 수순을 대입해 보건대, 앞으로 워드프레스 기반 웹 빌딩 전망은:


  1. 2010년대 초반에 “이 모든 사이트가 워드프레스 기반이다!!!”라는 게 업계 뉴스였다.
  2. 전반적으로 영어 거부감이 적어진 시대 덕분에 codex를 더듬더듬 읽어서 설치를 해 보고 “와 이거 정말 되네!”라며 운영 시작한 파워 워드프레서러 등장. 이때 대다수 일반인들은 뭐 그런 게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3. 이런 시기를 지나고 워드프레스가 안정화를 하니까 플러그인들과 각종 유무료 테마들이 갖다 쓰기 좋게 막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제 워드프레스 관련 책이 나와서 이거 보고 자기 블로그 제작에 도전하는 일반인들이 나오기 시작.
  4. 이제 워드프레스 홈페이지 구축 대행업자들과 각종 빌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워드프레스 좀 쓸 줄 아는 형 오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지금 여기!
  5. 이제 슬슬 더 많은 영세 컴퓨터 관련 업자들이 워드프레스 홈피 기본 구축을 부업 삼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각종 유수 업체들은 프리미엄 관리니 뭐니 하는 것 갖다붙이거나 아예 다른 툴을 도입하거나 할 것이다. 적당한 장래에 다들 워드프레스 필수 플러그인 목록을 모르지는 않는데 그게 왜 필수인지는 잘 모르는 때가 올 거다.
  6. 좀더 시간이 지나면 업자(여기서는 뉴스 사이트, 쇼핑몰 등)들은 파이선이나 ror나 노드js 기반 웹애플리케이션으로 아예 넘어가 버리고, 다들 도메인부터 테마/플러그인 편집기까지 매뉴얼대로, (주로 돈 받고 대행해 주는) 누가 어디서 골라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깔아서 고만고만하게 꾸려 운영하게 될 것 같음. 다들 큰 문제 없이 잘 굴러가지만, 그 사이트들이 크게 고급화되거나 확실하게 기술적으로 진보하는 일은 더 이상 안 일어나지 않을까.
  7. 그리고 지금은 웹애플리케이션 관련해서 이렇달 시동이 안 걸려 있는데 이제 슬슬 걸린다. 예를 들어서 다음 네이버 같은 데서 갑자기 파이선 무료호스팅을 해준다거나… php가 소개됐을 때 제로보드가 만들어졌듯이 이 시즌에도 무슨 프레임워크가 만들어질 거다. 그리고 그게 다음 시대의 워드프레스가 될 것임.


결론: 이 사이클은 항상 있어 왔던 관계로 항상 두어 스텝쯤 빨리 있지 않으면 파도타기는 절대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니까 올라운더가 되고 싶다면 파이선을, 웹만 죽어라 팔 거라면 노드js를, 너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으면 루비를 (그리고 더 심각한 너드가 되고 싶으면 LISP를) 지금 당장 배우기 시작합시다. php는 이를테면 프로그래밍 업계의 복사실 같은 곳이라 여기서 탈출 못하면 향후 20년 이 업계에서 밥 빌어먹기 힘들 것. 난 자바스크립트 이상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 관계로 node.js로 갈 예정.


PS: 난 스페이스보다 탭. 1타에 되는 걸 2~4타로 하라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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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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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범죄

2015. 4. 6. 23:15

1. 죄라는 말을 한자로 罪라고 쓴다. 사람이 안될[非] 짓을 해서 포박[罒]에 잡힌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옛날에 辠라고 썼던 것을 사연이 있어 바꿔 쓴 것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중국 역사상의 황제[皇]가 된 진시황이, 그 글자 모양이 흡사 자신만의 1인칭 재귀대명사가 된 皇과 모양이 너무 흡사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대신 쓰게 한 글자가 바로 罪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크나큰 불행을 초래했던, 그야말로 죄받을 짓을 하고 산 인간 진시황 덕에, 우리는 스스로[自] 쓴맛[辛]을 보러 들어간다는 의미의 글자 辠를 거의 쓰지 않게 됐다.


2. 스스로 쓴맛을 보러 들어간다? 사실 이 파자는 내가 한 것인데, 그 글자가 가진 뜻이 너무도 명백하고 쉽고도 심오한 덕이다. 죄를 지어 본 사람은 안다.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임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파자에 관련된 것뿐이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아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리라는 걸 그때의 나는 무슨 넋빠진 생각에 짐작을 못 했지?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잡하고 음흉하고 사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마음은 나쁜 짓을 해서 오라를 받기만 하면 바로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다. 그 죄의식(辠意識)은, 오직, 자기가 열심히 핥던 그 맛이 독극물의 쓴맛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이다.


3. 진시황 이래로, 드디어 오늘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에게 죄란 한 번도 辠였던 적이 없고 그저 정도의 차이만 더욱 맹렬히 편차를 보이는 罪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구체적인 예시를 대려 해도 차마 잔혹하여 뭘 댈 수가 없다. 유치원 선생이 애를 바늘로 찔렀다더라, 아파트 주민이 아파트 경비를 드잡이했다더라, 연예인들이 카메라 뒤에서 서로 반말을 주고받으며 싸웠다더라, 거진 300명 가까이가 영해상에서 수장되는 꼴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더라, 무슨 SNS에서 바른말 잘 하던 아무개가 헛소리를 굽히지 않는다더라… 누군가가 안될 짓을 저지르고, 누군가가 그걸 목격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 자를 포박해 데려오고, 수많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포박된 자를 네거리 광장에 무릎 꿇려 놓고 돌을 던진다. 오직 이 육체적이고 제도적인 순환만이 있을 뿐, 아무도 뉘우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죄에 깔린 쓴맛의 맹독성에 관심이 없다.


4. '우리 안의 XX' 어쩌구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밑에서 또 굳이 논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논하자면, 본전도 못 찾을 소리 씨부리지 말라고 해라.)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복잡하면 얼마나 복잡하다고, 도대체 지금 오늘 이 세상은 뭔 놈의 죄가 이렇게 많고 죄인이 이렇게도 많은가? 부연하자면, 그렇게도 많은 놈과 많은 일을 죄인과 범죄로 판결해 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갈수록 지옥도 일변인가? 왜긴 왜겠어, "범죄"가 너무 많은 바람에 죄가 죄로 발견되지 않아서지.


5. 범죄는 많을지 모르되 죄는 하나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옥편의 뜻풀이가 마침 편을 들어주기에 한번 인용해 본다. 죄란: ④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命令)을 감수(甘受)하지 않는 인간(人間)의 행위(行爲). 조금 겸연쩍을 정도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명쾌하게 요약한 이 풀이는 그 ‘인간의 행위’의 명목(名目)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뭔지, 형사법이 표현하는 죄명이 뭔지가 하나님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오직 거역과 감수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지키면 장차 선행의 보응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형벌의 쓴맛이 너 자신에게 돌아올 줄을 알아라. 민수기 32장 23절에는 "죄가 당신들을 기어코 찾아낸다"라는 표현이 있다. 죄에 쫓겨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죄의 속성에 대한 절묘한 서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죄인'이니 '범죄'니 하는 것에 응당 따라붙어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이지, 지금의 이른바 '조리돌림'이, '구알티'가, '신상털이' 같은 것이 무슨 죄를 주기나 준다는 말인지, 나는 도대체 알지 못하겠다.


6. 영어에는 sin과 crime의 두 단어가 있다. 우리말에서 전자는 흔히 '죄'로 번역되고 후자는 주로 '범죄'로 번역된다. 사전으로만 찾아 보면 둘 다 의미가 거의 비슷하므로 헷갈리기 쉬울까 봐 편집자들이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nota bene를 달아놓기를, sin은 종교적/도덕적인 죄를, crime은 형사법상의 위법 행위를 주로 의미한단다. 이 구별, 이 사회과학적으로 실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지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개념적 구분이, 오늘의 결국에 와서는 좀 우습고 처량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요컨대 지금은 sin이 crime으로 둔갑하는데, 아주, 아주, 아주 많은 경우에 그렇고, 갈수록 더 자주 그렇고, 날이면 날마다 더 노골적으로 그런 세상이다 이 말이다. 사람은 오로지 그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처벌받고 배상 책임을 진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말단 노동자 엎드려뻗쳐를 시키든 파업한 새끼들 혼구녕을 내 주든 원인 규명하고 선체 인양하라는 유가족의 요구에 대해서든 적당히 일금을 치러 주면 그만이다! 크으 앞으로 한 세기쯤 지나면 자기가 비고의적으로 저지른 죄의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보석금 보험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와 상상해 보니 좋나좋군? 그 날이 오면 교도소에 출입하는 종교인들은 다들 그 보험만 특별히 판매하는 라이센스를 얻어 다닐 성싶다!


7.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안의 XX'론 일체가 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래서 본전도 못 뽑을 이야기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XX의 자리에 "일베"라느니 "파시즘"이라느니 하는 것을 넣어 쓰는 모양이니, 아마도 그 XX에는 죄목 내지 그 죄목으로 불리는 신분의 호칭이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뭐? 우리 모두에게 그 죄목의 혐의가 있으니 대마불사론을 적용하여 그냥 crime의 범주에서 빼자는 건가? 그게 "빼박캔트"의 sin인데? 뉘우침이 필요하고 참회가 요구되고 그 쓴맛을 스스로 다 맛보아 먹어삼키고 앓고 낫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절대 외부적일 수 없고 절대 물리적일 수 없는 죗값 치르기가 반드시 요구되는 허물이 그 XX인데, 그걸 그저 사회 구성원 일반이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사안이란 이유만으로 마냥 용인하거나 이해해 주자 뭐 그런 건가? 야훼 하나님은 우리더러 죄를 여하간에 이해라도 해 보라고 하신 적이 있나? 부정 타니까 멀리 떨어져서 짱돌을 던져 으깨 죽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8. 사실 현대의 가장 큰 사회악 중 하나는 회개 개념을 완전히 고사시켰다는 데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거듭나는 방편들 중 반드시 필요한 내면적 방편으로서의 회개를 아주 세속과 동떨어진 신선 놀음으로 만들어놓은 감이 있다. 회개? 너 지금 나 보고 회개라고 했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고 나왔더니 이젠 뭐? 날더러 회개를 하라고? 왜, 그 다음에는 뭐 간디 비슷한 게 되어서 아프리카 애들한테 국수라도 나눠주라고 하지? 성인군자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악착같이 벌어먹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한 세상 내딴에 열심히 살다 이 모양 이 꼴로 갈 거니까! 내 인생에 뭐 보태줄 거 아니면 저리 꺼져!


9. crime은 sin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罪는 포박에 묶이는 것이기 이전에 辠, 스스로 그 죗값의 쓴맛을 감당하는 것이다. Criminal이 그렇게 많고 악성 범죄는 끊이지 않지만, 갈수록 자기를 'sinner'로 신앙 고백하는 자는 찾기 어렵고, 정말로 그 쓴맛을 뉘우치는 사람 역시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토 트위터를 자중하고 있는 최규석 작가님 정도나 보일 뿐이다.) 범죄는 많은데 죄가 없고, 속죄는 더 없고, '죄'라는 단어와 개념의 사용 빈도는 더더욱 하락일로를 달린다. 다들 매일 똥 싸고 뒤를 안 닦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라면 밥 먹듯이 저지르는 후회와 탄식의 원흉으로서의 범죄를 처치하고 청산할 생각을 어찌 이리도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그러면서 어쩜 또 그렇게 옆 사람 인생 근처에서 구린내 난다고 면박은 그리도 잘들 주고받는지. 근데 왜 세상이 이렇게 미쳐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들은 또 어쩜 그리들 쉽게 하는지.




0.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가 네이버 사전 한 번 보고 정말 간만에 삘받아서 마구 써내려간 글이다. 몇 번 윤독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세밀화에 관한 것일 뿐, 줄거리 자체는 거의 안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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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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