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용감하게, 무식을 자랑하는 글줄을 써 본다. 이 글은 트웬티스 타임라인의 편집 방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을 개봉일에 보고 왔다. 영화관 홍보물 선반에 꽂혀 있던 브로셔는 각종 영화제와 해외 영화광들의 극찬만을 싣고 그 이상 아무 호들갑도 떨지 않고 있었다. 수입사와 홍보대행사가 얼마나 자신만만했던 걸까. 나 같은 일반 관객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감탄감탄 열매를 먹이고 내보낼 수 있다고 자신감 충만했던 모양이다.
일단 총평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상업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한에서 가장 학제적이고 구체적인 아동심리학 시청각 교재 같은 느낌을 주는데, 좋은 의미에서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그렇다.
영화는 수시로 곳곳에서 장기 기억, 단기 기억, 관심사 형성, 잠재의식과 상상된 대상의 문제, 아동이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매커니즘, 사고의 추상화 과정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각화 드라마화하여 제시한다. 물론 그것은 디즈니+픽사라고 하는, 인류의 현 단계에서 가장 탁월한 시각화 집단 중 하나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성의를 다한 결과였기에, 그 시각적 서술의 테크닉과 문법 자체는 배울 점이 많고 탁월했다.
그러나 <인사이드 아웃>을 읽는 사이비 철학도의 입장이 마냥 그렇게 편안하고 흡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설명되지 않은 요소들이 나를 불편케 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불편함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요약해 보니, 대강 이런 게 나왔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인간은 오직 저 다섯 감정의 조종을 받는 존재이기만 한가? 정말 그런가? 그래야 하는가?”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문득문득, 자기들의 그 수려한 시각적/서사적 설명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그냥 어물어물 덮어놓고 묻어가려는 시도를 하는 컷과 대사들이 있다. 예컨대 슬픔이가 ‘처음으로’ 기쁨의 기억을 만지는 장면이 있다. 영화는, 그 앞에서도 뒤에서도, 왜 슬픔이가 드디어 그걸 만지려고 들게 되었는지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기쁨이가 슬픔의 필요를 이해하는 장면은 있다. 중요한 부분이다. 근데 그 설명이, 이를테면 주인공의 엄마와 아빠가 샌프란시스코 첫날 저녁 식탁에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를 시각적/서사적으로 설명하는 설명만큼의 정합성과 직관성이 없다. 아니 애당초 왜 슬픔이가 그걸 만졌는지 그 자체에 대한 계기가 제대로 재고되긴 했는가? 아동심리학 책에 나올 만한 거의 모든 내용을 이해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창하고 야심찬 전체이용가 애니메이션이, 왜 이런 부분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가?
그걸 왜 독자에게 물어보느냐고? 아니 난 지금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좀 있다가 정리하겠지만, 시장에 내놓아 불편하지 않게 팔아치울 유물론 프로파간다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그게 그들의 최선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몇몇 설명되지 않는 불편한 기정사실들이 더 있다. 이를테면, 맨 처음, 주인공 라일리의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기쁨이가 등장하는데, 왜? 왜 하필 걔인가? 영화 어디에서도 ‘추상화의 방’처럼 알기 쉽고 깨끗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전체 정황을 통해 시청자로 하여금 이런 걸 은근슬쩍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봤지? 맨 처음 나타나서 첫 버튼을 누른 감정이 그 사람의 주요 감정이야! 그런 게 있으니 그런 줄 알아!” 예컨대 주인공 아버지의 다섯 감정들은 모두 버럭이를 닮았고 개중 대빵도 버럭이인 식이다. 그런데 그게 왜? 거기에는 어떤 전후 사정의 개연성이 있는가? 적어도,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텍스트만 펼쳐 놓고 뒤져 보면, 그런 건 없다.
봉봉과 그 일행이 생각 열차를 타고―이 “생각 열차”도 매우 논쟁을 벌이고 싶어지는 소재다. 이게 인지심리학적으로 과연 어디까지 옳은가?―가는 중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이런, 생각 박스를 엎었더니 사실과 의견이 섞여 버렸어!” “구분이 안 되는걸?” “그냥 대충 넣어두면 돼, 어차피 구분 안 되니까!” 적어도 내 기억에, <인사이드 아웃>에서 사실과 의견에 대한 이 영화의 견해는 이게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만 가지고 인간 심리학 공부를 끝내고 나면, 사실과 의견의 구별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한 결론이 나오고 만다.
“이봐 엽토군 씨 진지 빨지 말라구, 이건 그냥 픽사가 애들 코 묻은 돈 뺏으려고 만든 오락 영화일 뿐이야”라고 말하고 싶은가? 미안한데, 먼저, 팩트 정리를 하나만 하자면, 이 영화는 코 묻은 돈을 받아내고 있지 않다. 사실은 애들에게 그 돈을 주는 어른들의 돈과 생각을 마구 빼앗아가고 있는 영화다. 아무 영화정보 사이트나 들어가서 주 관람객층 통계 그래프와 평점을 찾아 보시라.
그리고 더 중요한 포인트로서, 이 영화는 그리고 제작사인 디즈니와 픽사는, “애들 코 묻은 돈 뺏으려고 만든 오락 영화”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그러니까, 과도하게―전체 정황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론으로 만들어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여러 학술적 성과에 기반한 설정의 개연성과 탄탄한 구조적 완결성은 그 목표를 척척 달성해 냈다. 적지 않은 영화평이 ‘내 머릿속에는 아무래도 소심이(슬픔이, 까칠이 등등)가 있는 것 같다’라고, 유치하다 싶을 만큼 이 설득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 심지어 나도 설득당할 뻔했으니.
그런데 철학도의 습관이란 ‘정말 그런가’, ‘왜 그런가/아닌가’의 두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그건 별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의와 반성을 시작하자마자 당장, 동서양의 고전적 감정관을 모두 정면으로 개무시하는 <인사이드 아웃>의 ‘5감정론’에 막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동양에서는 <예기>의 칠정론(기쁨, 화냄, 슬퍼함, 무서워함, 사랑함, 싫어함, 욕망함)이 대표적이며, 서양에서는 헬레니즘 철학 때 모든 감정이 쾌-불쾌의 이원론으로 수렴된다는 발상이 나왔다. 핵심은, 양쪽 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들을 만드는 임의적이지 않은 최소 개수의 감정이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사이드 아웃>은, 도대체, 인간 머릿속의 감정이 왜 하필 그 임의의 5개여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전혀 내놓지 않는다. 그냥 그들의 선험적 실존을 열심히 사후 설득해낼 뿐, 그 본질의 필연성을 논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쁨이와 슬픔이가 없는 상황에서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야 하는데도, 전혀 그러지 않는다.
음, 그나저나 뭐? 까칠이? 지금 까칠이라는 감정이 주요 5감정에 속한다는 걸 받아들이란 말인가? 물론 이 캐릭터 자체는 매우 모에하다. 그런데 동서양 어느 인간학 연구자도 ‘disgust’가 필연적인 인간 감정에 속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적어도 내가 믿기로, 까칠함/도도함이란 현대에 와서야 계발되어 보급된 ‘감성’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매우 선명하게 대도시의 풍경과 K-POP 걸그룹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14세기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도 상상하기 어려운, 역사적으로 출처가 없는 정서이다. 다시 정리 반복한다. <인사이드 아웃>의 다섯 감정은, 제작사가 흥행을 위해 임의로 선택했지, 필연적으로 선택되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장담하는데, 이 영화의 자기 자랑 포인트와는 대조적으로, 적어도 이 다섯 감정의 구성에는 어떤 학문적 과학성도 없다. 반드시 그 다섯일 이유는 없었을 수도 있단 말이다. 예컨대, 흥행을 포기하고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어떤 다섯 ‘생각요정’들이 있어서, 그들의 다수결에 따라 이런저런 쾌와 이런저런 불쾌가 판결되는 형태일 수도 있었다. 다른 구성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라일리의 머릿속에 있는 다섯 감정이 그다지 ‘반드시 그들이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희미했던 찝찝함 하나가 매우 분명하고 확실해졌다. 오직 이 임의의 다섯 감정이 라일리의 언행과 심사를 ‘제어판’을 가지고 주관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이 라일리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 교회 다니는 철학도 한 사람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당신에게도 점잖게 권하고 싶다. 이 사실을 좀 불편해하시라고. 라일리가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거두는 것, 라일리가 갑자기 우는 것, 라일리가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죄다 기쁨이가 버튼을 누르고 버럭이가 레버를 올리기 때문이라는 작중 기정사실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지 마시라고 말이다. 조금 섬뜩하게 과장해서 표현해 보자면, <인사이드 아웃>의 다섯 감정은 그렇게 귀여운 요정 캐릭터가 아니라 사실은 엔돌핀이니 아드레날린이니 하는 뇌내 화학물질 내지 그 분비샘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양철학이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 무시한 바 없었던 ‘인간 이성’은, 이 영화의 당최 어디에 있는가? ‘어 이상하다, 이성에 해당하는 요소가 없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부터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그걸 찾아 보려고 애써 봤지만 허사였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오직 감정들만이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게 넌센스라는 걸 눈치채셔야 한다. 우리는, 라일리는,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모든 사람과 개와 고양이는, 그저 머릿속에 다섯 감정을 넣어놓고 그들의 통제에 따르는 자동인형이라는 점에서 다 똑같다. 심지어 돌발적인 자유의지적 활동조차도, ‘제어판의 고장’이라는 도대체 무성의하다고 느껴져서 괘씸하기까지 한 작중 상황에 의한 것으로 그려진다. 고전철학을 진지하게 배운 입장에서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간 니가 배운 건 다 희망사항과 논리 장난을 합쳐놓은 것일 뿐이고, 이게 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진짜야, 꿈 깨 이 이성 충만하신 인간 님아, 라고 비웃는 것 같아서.
제어판의 존재도 솔직히 거북하긴 마찬가지다. 나이를 먹고 어떤 계기를 거치면서 성장하는 것이고, 감정들과 인간을 (하!) 상호 통신케 하는 중간자? 뭘 은유한 거지? 척수신경? 뇌간? 최소한의 기초적 이성 능력? 데카르트적 송과선(松果腺)? 아니,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것까지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 감정들은 (현대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은유로서) 거대한 TV 스크린을 통해 인간 내부에서 인간 외부를 들여다보는 스튜디오 안에 있을 뿐이고, 그 제어판은 그냥 “리모콘”이며(“그러니 제발 리모콘인 줄 알아보겠으면 그 이상 정체를 따져 묻지 마라! 리모콘 몰라? 리모콘?”) 스튜디오와 그 바깥 저장소까지가 인간 정신의 전부일 뿐이다. 만약 그 이상을 고려하려고 했었다면, <인사이드 아웃>은 첫째 흥행성 검토에 탈락했을 것이며, 둘째 이렇게 선형적으로 재미있지 못했을 것이고, 셋째 이렇게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지 못했을 것이다.
뭐, 물론 이게 과학적 사고에 충실하신 적지 않은 합리주의자 분들께는 ‘Why not?’의 귀엽고 유쾌한 세계관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작년의 <인터스텔라>가 그랬듯이.
이 영화의 리뷰를 지금 쓰는 것이 너무 늦은 감이 있는데 그래도 끌어오는 이유가 있다면, 그때 이 영화를 “성공적이고 치밀하며 엄청난 유물론 프로파간다”라고 이해했을 때는 내 이해가 너무 독자적이어서 말해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인사이드 아웃>이 마찬가지 패턴으로 흥행하면서, 아무래도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역시 결론부터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천체물리학 포르노이지만, 그 이상으로 ‘이 세상에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라는 사상을 주입하는 시각적 선동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 정도 사상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므로, 이 과학 판타지는 그토록 흥행가도를 달렸다.
공공연한 스포일러와 함께 몇 가지를 점검해 보자. 그래서, 결국 우주 바깥에는 외계인이 있었는가? 아니다. 있느니 오직 광활한 우주와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는 인류뿐이었다. 주인공의 딸 머피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듯한 비물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가? 아니다. 결국 잠시 다른 차원의 인류가 되었던 자기 아버지와 그가 남긴 물리적 영향에 불과했음을 진작에 알게 된다. 영화에서 신의 존재는 언급되는가? 아니다. 신에 대해서 <인터스텔라>는 아예 일언반구 없는데, 서양 영화치고는 놀라운 점이었다. 뭐 근데 영화 줄거리를 놓고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신도 외계인도 뭣도 아니라, 중력(이라든가 기타 등등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어떤 물리적 여건들)을 매개로 소통하는 (언제 어디에서 오는 인류인지는 몰라도) 우리 인류만이, 그리고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경이로운 각종 혹성과 행성이 세상에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철학에서는 유물론이라고 한다. Material은 물질이라는 단어지만, materialism은 물질주의라고 번역되지 않고 유물론(오직 유, 물건 물)이라고 번역한다. 유물론은 그 반대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는 게 제일 적절한데, immaterialism이란 비물질주의 즉 ‘세상에 물질과 그 상호작용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라는 관점이다. 유물론은 그 반대로서, ‘세상에는 오직 물질이나 물질간 상호작용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관점이다. 여기서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적 유물론”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의미의 유물론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래도 유물론 쪽일 것이다. 비물질주의는 왠지 좀 합리적인 삶과 동떨어진, 종교적인, 신비주의적인 사상으로 보이고, 유물론은 미지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점이니까. 이 시점에서 당신에게 혼란을 주는 진실을 던져 보자면, 서양철학은 뇌과학이 제대로 발달하기 전 꽤 최근까지, ‘정신’의 문제와 인간의 독특성 문제 때문에, 비물질주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영혼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천사 악마 등등의 존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없다고 쳤을 때도 사상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폐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 바로 비물질주의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비물질주의는 그렇게 쉽게 폐기되거나 무시될 수 없는 사상이다. 인정까지는 못 하겠더라도 언급 내지 고려 정도는 해야 무식을 면하는 관점인 것이다.
그리고 <인터스텔라>는 비물질의 세계, 천체물리학 바깥의 미지의 영역을 언급도 고려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쿠퍼 박사의 세계에 절대적인 미지란 없다. 있다고 한다면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인간의 욕망, 이기심, 이타심, 용기, 부녀간의 사랑 따위이다. “그 문제라면 진작에 풀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걸 밝히지 않았어.” 그리고 그런 드라마적 요소를 옆으로 치워 놓고 보면, <인터스텔라>의 세계는 건조하고, 치밀하며, 어떻게든 인과를 찾으려는 물리학적 사고로 가득한, 그야말로 인듀어런스 호 같은 세상이다.
그런 스토리에 두 시간 반의 CG 비주얼을 끼얹자, 지금의 관객들은, 특히 한국의 관객들이, 열광했다. 적어도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왠지 우주세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부 획득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영화는 앞뒤 이야기를 낭만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잘 조립해 놓았고, 그게 재미있었으며, 그럴듯했으므로, 왠지 이 영화를 보고 이해한 것을 가지고 앞으로 천체물리학에 관심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품이 내적으로 제공하는 논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인사이드 아웃>도 마찬가지였다. 심리학이라는 토픽을 가지고 내적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 본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고, 그 결과가 자기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하는 애틋하고도 소중한 삶의 한 장면에 대한 드라마이므로, 우리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온 순간, 영화의 보너스 장면들처럼, 내 머릿속과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느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그것으로 인간 심리의 문제는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유물론의 선동입니다.
유물론의 좋은 점이 바로 설득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설득하기 어려운 존재를, 그건 그 존재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고 말한 다음, 없는 셈 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지금껏 다룬 두 흥행 영화는 다 바로 이 점을 가지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유물론적 세계관을 채택하여 흥행을 얻어낸 다음 관객들로부터 전통 철학적 사고방식을 일괄 폐기한다. 우리에게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 우리가 단지 네댓 개 감정이 누르는 스위치에 따라 울고 웃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신의 계시나 귀신의 모르스 부호나 이 우주 밖의 저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한계 앞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분개하고 분개”하는 대신 좀더 높은 차원에서 그걸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인사이드 아웃>과 <인터스텔라> 앞에서 순진하고 유치하며 이해력 떨어지는 아이디어로 치부된다.
그리고 그게 시장의 일반 대중의 지적 허영심과 오만을 만족시켜 주는 상당히 쉬운 타협점 중 하나라는 것에, 그걸 크리스토퍼 놀란이며 디즈니나 픽사 따위가 앞장서서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이 쓰리다. 아까 사용한 “시장에 내놓아 불편하지 않게 팔아치운다”라는 표현을 기억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게 작금의 서사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현 대중들은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어떤 사상도, 학술적 증거와 정황과 이론도 거절한다. 새 것이건 옛 것이건 상관이 없다. 차라리 ‘적당히 불편하게 만들어 줌’이라는 전략적 콘텐츠 상품은 있을지언정 정말로 우리를 불편케 하는 서사 상품은 시장에서 완벽하게 외면당한다. 사실 그것―굳이 안 물어봐도 되는 것을 물어봐서 불편케 함―이 인문학과 순수학문의 역할인데, 모든 게 사느냐 파느냐 배달하느냐의 셋 중 하나일 뿐이 된 응용통섭학문의 세상에서, ‘정말 그런가요?’ ‘왜 그런가요/그렇지 않은가요?’라고 되풀이 묻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짓인 것이다.
그러니 순수학문이 타협을 하는 지점이 생기는데, 사람들의 이해에 맞춘 ‘놀이동산 XX 체험관’ 건설에 적극 협조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듣고 “이야 신기하다! 멋있다!”라고 바로 감탄할 만한 소재를 정면에 배치하고, 딱히 결정적이지 않은 각종 드라마를 실제건 허구건 상관없이 끌어 와서 통로 전체에 걸쳐 깔아두어 길잡이로 삼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그러나 중요한 전시물은 정말 안 보이는 곳에 설명 판넬 없이 덩그러니 갖다 놓는 식이다. 이건 학문적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 자체의 존립이 왔다갔다하는 문제를 낳는다. 모르겠다. 한 20년쯤 뒤에는, <인사이드 아웃>과 <인터스텔라>보다 더 엄청난 근자감으로 무장한 영화가 팥으로 메주를 쑬 때,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메주를 팥으로 쑨다는 게 말이 되냐?”라고 문제 제기하는 관객이 남아 있을까? 그때쯤엔 영화가 팥으로 메주를 쑤면 그저 “이야 신기하다! 역시 팥이 짱이다!”라고 하고 말 것인가?
‘인터스텔라’는 “별과 별 사이의, 성간(星間)의”라는 뜻이고, ‘인사이드 아웃’은 “안팎을 뒤집어서, 아주 완전히”의 뜻이다. 이들은 왜 영화 제목으로 거만을 떨었을까? 간단하다. 그들이 쥐고 있는 설득의 패가 그만큼 강력하고 쉬웠기 때문이다. 의심과 재고와 반성과 논리적 검토를 원천 차단하는 작중 수단을 총동원하여, 두 영화는 관객이 만족스럽게 주저앉아 있을 ‘생각의 지정석’을 확보해 준다. 그 결과 <인사이드 아웃>과 <인터스텔라>의 관객들은 지정석 제도 자체에 의문을 품는 대신 맘 편하게 대규모로 만족했다. 그들이 이야기 속에서 사람 머릿속을 종횡무진하든, 블랙홀과 토성 근처를 활강하든, 지금껏 인류가 고뇌해 온 어떤 문제를 ‘쌩까든’ 아무 문제가 없다. 현대인들은 근대인에게 혁신적 사고방식이었던 근대적 유물론을 이제 어렵지 않게 수긍해 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쩌면 이 시대 순수학문 배우는 사람들의 소임이란 “꼭 그게 전부는 아닌데…”라고 소심하게 읊조려 막간의 여흥을 정리해 주는 정도뿐일지도 모른다. 뭐 그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이기도 하고.
관객의 잘못도, 픽사나 놀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세상이 그런 원더풀한 학술적 세기말일 뿐이다. 초대형 메이저들이 모범 사례를 두 개나 제시해 주었으니, 이제 너도나도 유물론적 작중세계를 이용한 흥행을 시도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양산할 것이다. 그리하여, 초대형 스크린과 스포츠와 스마트폰과 섹스를 가진 21세기 인간은, 깃털 펜과 양피지 종이밖에 갖지 못했으면서도 신과 자연과 세계 전체를 광활하게 논했던 주후 몇 세기 스콜라 철학자들보다 가난하고 빈약한 영혼이 된다. 그리고 그 가난과 빈약을 인지할 방법도 없어졌다. 등 따시고, 배 부르고, 돈 남아서 들어간 영화관에는 매양 아무 의심의 여지도 없는 정제설탕 같은 ‘작품’이 걸려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냥, 보장된 해피엔딩을 보고 방실방실 웃으면 된다. 머릿속의 기쁨이가 단추를 눌러주는 꼭 그만큼만. 그리고 나는 혼자 생각하지, 참 원더풀한 세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