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PD 인사조치 철회하라는 요구가 일각에서 일어나는 거 같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하겠다.
원래 안 그러는데, 이번엔 좀 거만하게 쓰자. 난 그럴 자격이 있다. 난 지식채널e 방영분을 제 1회부터 이번주 거까지 전부 PMP 및 컴퓨터에 넣어놓고 보는 사람이고, 제작진에게 방송 아이템을 하나 제공할 때마다 3만 원씩 원고출연료를 받는 아이템도우미이며(한때 모집했을 때 선발됐는데 당시 총 12명이었음), 그 노력의 결과 실제로 지식채널e 방영분에 내 아이디가 명기된 일도 있고(070424 두 명의 해커, 맨 마지막에 소재 제공 yuptogun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제작진을 직접 만난 적도 있는데다, 김진혁 PD 이메일과 전화번호까지 받았다. 나보다 지식채널e팀과 가까운 일반 시청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그런데 지식채널e가 박지성 에피소드나 좀 알려지고 아주 잠잠하고 마니아군에서만 애청되더니 어느 날 전국민의 관심사가 돼 버린다. '17년 후' 방영금지조치 철회 논란. 이어서 김진혁 PD 괘씸 인사조치. 나도 물론 기분이 나쁘더라. 그런데 이건 뭐임? 지식채널e 자유게시판에 김진혁 PD 돌려놔라? 새 PD 실망이다? 지식채널e 못보겠다?
문자 그대로 저들끼리 잘들 논다. 기왕 판 벌인 김에 주된 아망들을 꼬치꼬치 따져서 그쳐 주마.
1. 김진혁 PD는 이명박 정부의 희생양이다! 인사조치 철회하고 명예 회복하라!
희생양 맞다. 물론 맞다. 근데 댁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김진혁 PD라는 사람을 끔찍이 아꼈는지 모르겠다. 이거 2MB 방송장악 반대운동 중 가장 허접한 물타기다. 물을 타려면 뭘 알고 타든가(밑으로 좀더 읽어보기 바란다). 김PD 본인이 그런 인터뷰를 했던 거 같은데, 지식채널e는 김PD 것이 아니고 지식채널e 제작진이 꾸려나가는 거고 그분은 (그분의 표현대로) 일개 PD다. 김PD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우리 구세주 어린 양으로 만들 셈인가? 딱 그 꼴인지도 모르겠다. '17년 후'라는 오병이어를 일으키니까 야 구세주다 하고 물타기하던 허다한 무리에서 열심당원이 나타나는 거지. 뭣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겠어요 그러면서.
2. 김진혁 PD가 안 하니까 너무 재미없고 이상하다! 실망이다!
하나 물어보자. 옛날 지식채널e엔 제작진 이름이 안 나왔었다(알고는 있나?). 그러면 옛날 꼭지 몇 개, 요새 꼭지 몇 개 늘어놓고 제작진 이름 지워놓으면 그거 누가 만든 건지 당신들은 분간할 수 있겠나? 당연히 못 하지. 나도 못 하겠는데. 김현우 PD의 연출이 그렇게 못 봐줄 정도인가? 오히려 점점 굳어져가던 지식채널e가 처음의 느낌으로 복고한 거 같아 나는 실망이라기보다 기대하고 있다. 아주 옛날의 지식채널(051010 낙엽, 051114 백수의 일기 등)과 요즘 지식채널(080825 당신의 온도는, 080901 기적이 일어날 확률 등)은 오히려 닮아 있다. 서투른 듯한 공백도 다시 보이고 지식채널e 특유의 감성도 되살아나고 있다. 영상 길이를 비교해 보면, 5분이라고 하지만 그 길이는 점점 길어지기만 하다가(6분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알고는 있나?) 요새 들어 확 줄었다. 날이 갈수록 '한 마디만 더, 한 마디만 더' 하던 지식채널e가 이제 빈 자리를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지식채널e는 원래 그런 개념의 프로그램이었다. "빈틈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언제 나온 말인지 알고는 있나? 051219 지식채널e Special I에서)".
3. 지식채널e가 해야 할 말은 안 하고 잡담이나 하고 있다! 지식채널e는 사명을 다하라!
이게 제일 웃기는 짜장이다. 지식채널e의 사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지식채널e가 해야 하는 일은 어리석은 무산자 계급의 각성도 아니고, 이른바 사회참여자입네 이명박 반대파입네 하는 당신들의 웅변에 필요한 영상 소스 공급은 더더욱 아니다. 착각 좀 하지 마라. 당신들이 '17년 후 파동' 한겨레 뉴스로 지식채널e를 처음 접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3년 전부터 지식채널e의 사명은 단 하나, 지식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해서 화두를 던지는 것뿐(어디서 가져온 말인지 알고는 있나? 홈페이지 기획의도에 보면 그렇게 써 있다). 물론 2MB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말은 너무 많고, 필요한 정보와 지식과 비판의식도 절실하다. 하지만 지식채널e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일련의 이데올로기를 보급해 주는 프로파간다 담당 혹 나팔수라고 여긴다면 이건 오히려 모독이다.
한 마디만 더 하자.
진보란 보수의 반대말이 아니다. 진보의 반대말은 진리에 대한 '무지' 그리고 세계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래서 진리를 조명하고 세계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지식채널e는 진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식채널e 그 자체는 진보입네 좌파입네 하는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보-보수 대립구도를 넘어선 어떤 궁극적인 추구이다. 진보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배움과 세계에 대한 관심이라면, 지식채널e는 아예 그 진리와 세계 자체를 다루니까.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창백한 푸른 점(2부작, 060220 060227)'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전율이 치솟는다. 고독, 사랑, 전쟁, 아름다운 자연... 그 모든 것이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되어, 우리는 거기 살고 있다. 보이저 호가 보낸 사진 한 장이라는 데이터는, 그 사진의 창백한 푸른 점이 '지구'라는 팩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구가 어떤 곳이냐, 우리들 그 자체다, 라는 감성과 깨달음을 집어넣으니까 '인류는 하나'라는, (좀 심하게 진보적인) 피부로 다가오는 앎이 생겨나게 되며, 그것은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 우주의 한 점과 같은 우리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철학과 사색의 지경까지 화두를 던지고 있는 거다. 그걸 5분 안에 한다! 지식채널e는 그런 프로그램이지, 이슈 터질 때마다 진보정당의 논리를 그때그때 착실히 대변해 준다거나 하는 대변인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최근 들어 그 원래 취지와는 좀 다르게 SOCIeTY 카테고리가 너무 늘어서 이거 진짜 이러다 진보방송 되는 거 아냐? 색깔 가지면 안되는데... 하고 내심 걱정하긴 했지만.
이번 인수인계(물론 결코 고의는 아니었지만), 김PD의 말을 빌리자면 여러 의미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렇게 떠나고 있는 노장(?!) PD 한 사람 데려다가 지휘탑에 앉혀 놓고 전군 진격 외치지 말란 말이다. 지식채널e는 싸우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함께 생각을 하자는 프로그램이니까.
떠들려면 제발 뭘 알고 떠들어라.
한 명의 골수 애청자로서, 지식채널e를 진정으로 응원하지 못하는 일각의 작태가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