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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카톡

2012. 6. 20. 19:55

종교계 지도자들간의 종교통합 관련 영상 얘기가 나와서 관련된 얘기를 하다가 얘는 버스에 타고 갔고 나는 왠지 이 얘기를 정리해봐야 할 거 같아서 한번 적어 주려고 했었다. 근데 생각보다 길어졌어...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딤전1:3-4)




P.S. 아따 이건 보너스랑께? 열어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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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선 수행하는 사람들 말로는 화두쯤 될까. 그런 것이 몇 개 있다.

  1.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정해져 있는 노력은, 무엇으로 정당화 혹은 계속될 수 있는가?
  2. 정말 참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 혹 종교는 필요한가?
  3. 현대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은 윤가 수업을 들으면서, 2는 자연인간을 들으면서, 3은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질문.
1은 아직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겠다. 까뮈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2는 한번 생각해 봤다. 사실은 일본 선교에 대해 생각하다가 부닥친 질문인데, 그들에게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구원이 필요하다. 요컨대, 그들의 행복은 그들만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데, 그 매개는 바로 좋은 소식의 전달이라는 것이다. 내가 봐도 어딘가 부족하다.

3에 대해서는 대답하겠다. 현대 기독교는 종교보다 거룩한 신앙으로서 이 세상에서 서 있을 필요가 있다. 요즘 종교계는 개판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단다.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아니지 싶을 텐데 결국 탈근대 초현대의 유행이 사람의 믿음과 십자가까지도 쥐락펴락한다.
종교는 모든 가르침 위에 신자가 앉아 있다. 종교통합이니 진리가 다르지 않다느니 대단하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오만하다. 자기 성찰과 평범한 도덕,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보편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구원과 모든 완성이 완벽히 가능하다고 하니까. 한마디로 "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너 알고 있는 대로 설명하고 다니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럴 리 없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이건 단순한 신념이고, 아니, 그냥 착하게 사는 방법의 온갖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마저 이런 식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적당주의에 기울어서는 안 되겠다.
머릿속으로 성직자를 상상해 보라. 빨리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과연 민중과 함께한다면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있는 혹은 대열의 앞에서 투쟁하는 모습으로 곧장 떠오르는가? 그럴 리 없다. 필시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의 기도 혹은 말없는 봉사를 하고 있었거나, 사람들에게 어질게 웃으며 사려 깊은 한 마디를 해 주고 있을 것이다. 현대의 종교계는 전자를 강력히 요구한다. 대다수의 흐름에 따라오지 않으면 왕따를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약속된 그리스도인들만은 세상이 부른다고 졸래졸래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해야 할 일엔 아니오 해야 한다. 그밖의 모든 것이 타협과 불순종과 오만과 음란함에서 나온다.
그러면 여전히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느 종교에서나 대체로 하지 않나? 내 말이 그 말이다. 그게 바로 종교와 신앙의 차이다. 종교에서는 모두 거의 같은 말을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종교란 순전히 인간적으로 봤을 때 옳은 가르침들의 집합이므로. 그러나 신앙의 지경, 신념의 위에 있으며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조건마저 포기되는 자리, 으로 올라가면 도저히 이 신앙과 저 신앙이 같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보다는, 아무도 도저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렇다고 믿는 믿음이 더 대단한 것이다. 당신은 죄로 죽었는가? 예수께서 당신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나셨는가? 그러므로 그분을 구주로 믿음으로 당신도 다시 나는가?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할 때 이것은 한갓 종교인들에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진리가 된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가 가져야 할 입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길길이 우기는 것이다.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믿고,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조차 납득한다. 그리고 더욱 위대해진다. 기독교야말로 이것이 가장 확실하게 가능한 신앙이다. 이 확고부동한 구분 전략(?)을 포기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시는 것이 된다.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몽학 선생으로 말미암고 말기 때문에.

Posted by 엽토군
:

교회에서 설교를 흔히 '말씀 선포'라고도 부른다. '교리를 설파하다'라는 의미에선 설교란 말을 쓸 수도 있지만, 그 교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누군가 그런 말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이 말씀 선포가 '설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말로 잔뜩 채워진 시간이긴 한데 그게 정말 '교리'인지 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단 말이다.
굳이 인간적인 클레임(?!)을 말해보자면 한도 없다. 우선 사소한 실수가 자꾸 나온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라는 그 유명한 말씀이 '잠언'에 있지 않느냐고, 어떤 유명한 간사님이, 무심결에, '말씀 선포' 시간에 말했다.[각주:1] 느부갓네살 왕이 여기저기에 세운 높이 60규빗짜리 금신상들이 요새 높이로는 '300미터'나 된다고, 어떤 '담임목사님'이, 대예배 시간에 말했다.[각주:2]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까지만 인용하고 '어리석은 자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잘라먹고, 이게 우리 미션스쿨의 교훈이라고 가르치는, 어떤 교장이 있다.[각주:3] 사소한 말실수는 왜 나오는가? 철저한 탐독과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설교자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실은 모르는 거라고 했다(고전8:2). 3만 절이 넘는 큰 책을 무지렁 백성이 어떻게 다 외우겠는가? 그래서 수시로 검색하고 무시로 중요 성구가 몇 장 몇 절인지 적어 되풀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없다. 그냥 '그런 게 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선포해 버린다. 인간적으로, 어떤 시사쟁점에 대해서조차 '그런 말이 있던 거 같아서' 선포했다간 독단으로 치부된다.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발언들이 은근히 많다. 특히 사단에 관해 말할 때 그렇다. 성경에선 사단에 대해 그리 많이 말하고 있지 않다.[각주:4] 집안 원수에 대해 그 집 안에선 말하기를 꺼리듯이. 그런데도 최근 강대상을 보면 사단과 마귀에 대해 장황하고 확고하게 얘기한다. 사단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마귀는 우리가 어찌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고...[각주:5] 솔직히 말해 보자. 하나, 이런 이야기를 성경(정경)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본 일이 있는가? 둘, 그런 얘기 굳이 설교 때 들으면 재미있나? 셋, 악한 세력의 이야기 자주 들어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신비 세계를 알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에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자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적어도 '말씀 선포' 시간에만큼은 '말씀'에 준거해야 한다는 거다.
예화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꺼내는 것도 사실 문제다.
극단적인 예가 조엘 오스틴이다. 그의 책을 국내에 수입한 출판사는 두란노다. 그런데 '긍정의 힘'에는 '(창1:1)' 같은 장절 표기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시피하다. 그런데도 공공연히 신앙서적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다. 굳이 오스틴 목사(?)를 들지 않더라도, 요즈음 설교 추세는, 좀 심하게 말해서, 순서가 이렇다. "오늘 말씀은..." 이라면서 어딜 읽는다.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물론 그 말씀이라는 것관 좀 별개고 약간 관련 있다. 그러고서 마무리 기도로 말씀과 별 관련 없이 기도하고 마친다. 그런데도 은혜스럽다. 그런데도 오늘 '말씀'이 '좋았다'는 칭찬을 점심 식사 때 공공연히 한다.[각주:6] 그 좋았다는 말씀은 무슨 책 몇 장 몇 절인가? 관련된 말씀은 무엇인가? 전후 맥락은 어떠한가? 어렵거나 특이한 표현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졌는가? 그리고 그 해석은 진리인가? 이 정도는 해야 '말씀' 선포 아닌가?
선포란 무엇인가? 세상에 뭘 알린다는 의미의 한자어는 매우 많지만 특히 '선포'는 세계적 규모 혹은 영향력을 지닌 무엇을 알릴 때 주로 사용한다. 그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것이고, 절대적이고, 따라서 아주 분명한 근거와 기반 아래에서 떳떳하고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 그게 선포다.
그런데 어째서 요새 이러한 요상한 풍토가 일어나서, 자칫하면 설교자의 개인적 견해로 볼 수도 있는 걸 '은혜로운 말씀'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내 생각엔 교회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니라 '현대인'이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응, 현대인. 이성과 합리의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까지 온 그들. 그들이 원하는 건 주의 뜻이 아니라 합리주의적 사고를 넘어선 어떤 해결밖에 더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선 관심없고 그 진리에서 내 행복, 내 집안 평화, 내 재테크를 뽑아낼 궁리만 한다. 회개와 사죄는 엄연히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 하나이고 '선포'해야 마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강남 동네에서 이 주제는 잘 선포되지 않는다. 간간히 '복 받는 비결'의 하나로 잠깐 스쳐 지나가다시피할 뿐이다. 도대체 교회에서 하는 겉치레 회개와 속세에서 하는 '울고 웃고 요법'과 뭐가 다른가? 말해 보라. 뭐가 달라야 하나? 말씀이 필요하다. 왜 그러한지 '성경'에 근거가 없고서는 말씀 선포가 못 된다. 설교는 더더욱 안 된다. 성경에 없는 걸 교리라고 내미는 게 이단이고 오컬트(occultism)[각주:7]지 달리 뭔가?
위선자들의 같잖은 설교에 관한, 예수님도 언급한 적 있는, 이사야의 대언이 생각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사29:13, 새번역)

지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사실 우리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나? 조엘 오스틴은 '하나님을 한정하지 않는' 신앙을 말한다. 좋다 이거다. 개인적 영성 체험, 사회적 모순과 변화 속에서 선견자, 제사장, 천국 사람, 제자, 용사로서의 삶, 예수님께서도 이런저런 비유로 말해주셨듯이 자기가 겪고 느낀 바를 표현해보는 온갖 저작과 이야기, 전부 다 좋다 이거다. 근데 그건 선포는 아니다. 그래선 설교는 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한다고 했으면 잡담을 하지 말고 선포를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너한테 내가 설교를 늘어놓겠다고 솔직히 말하라!


P.s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청년부 평신도입니다. 전 예수전도단이고 이번 MC 후불금 6만5천 원을 못 내서 지금 고민중입니다. 전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교회를 무조건 매도하고 욕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절 보지 말아주십시오. 하도 답답해서 쓸데없이 긴 글 한 번 썼습니다.[각주:8]

  1. 잠언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전도서에서만 여러 번 나오지만, 특히 1장 2절 가장 첫머리에 나온다. 그러므로 위 발언은 단순 착오라고 믿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터이다. 혹시 몰라 첨언하는데, 참고로 전도서는 다윗이 아니고 그의 '아들'(솔로몬)이 썼다. [본문으로]
  2. 1규빗 혹은 1자는 30~45cm 정도이므로 60규빗은 18~27m에 해당한다. 300m는 요즘에도 세우기 힘든 높이인데... 단순히 인간적인 실수라고 본다. [본문으로]
  3. 잠언 9장 24절에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성구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기왕 부정적인 건 잘라먹을 생각이라면, 왜 이걸 고르지 않았는지? [본문으로]
  4. 개역개정에서 '사탄'은 49번, '마귀'는 37번 나온다. 더해 봐도 세 자리 수가 안 된다. 수치상으로 따져보면 주된 등장인물은 아니다. [본문으로]
  5. 이러니 '교회는 사단을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농담이 교회 내부에서 나오는 지경이다. [본문으로]
  6.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이와는 반대로 주석서처럼 제대로 된 설명으로 설교를 한다. 그의 말씀 선포를 들은 교인이 '오늘 말씀 좋았다'라고 인사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본문으로]
  7. 신비주의, 비밀스러운 종교를 의미하는데 특히 점성술, 신내림 등에 관심이 있다고 사전에 써 있다. 어근 occult는 '눈에 안 보이는'의 의미이다. 이런. 점점 '차별화'가 안 되어 가잖아. [본문으로]
  8. 혹시 오류사항이 있다면 빨리 알려주십시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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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그냥 깝깝해서 답글

2008. 1. 10. 20:04
개신교 사람들은 정말 이명박을 묻지마식 지지하나요?

아놔 이거 내가 태어나서부터 교회다니니까 하는 소리지만 복잡미묘하기 짝이 없는 얘김다.

대구경북 지역 근혜누나나 회창형 지지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그쪽은 불교 기세가 쎄서 교회가 (단순히 규모의 차원에서) 별로 흥성하지 못한다고 그럽니다. 접때 외할아버지 상치른다고 마산 창원 넘어다니고 있을 때 울 아부지가 해주신 얘기니깐 아마 맞을 겁니다. (울 아부지 다른 주젠 몰라도 종교쪽은 이론부터 듣보잡소문까지 빠삭합니다.)

성당이나 절은 잘 모르것습니다마는 교회는 확실히 아줌마 아저씨들이 씹을 잡담거리가 없어서인지(뭐 다른 모꼬지라면 술이라도 마실 텐데 그것도 거시기하죠잉) 정치 얘길 가끔 하죠.
그래도 뭐 평소 평범한 만18세 대한민국 선거권자들끼리 주고받고 하는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어디까지나 각자의 개인소견이니 이건 암만떠들쳐봐도 문제는 안 됩미다.

문제는 아놔 목사님(진짜루 가끔 장로 아저씨)들이 그것도 설교시간 혹은 뭐 축복기돈지 간구기돈지 할 때, 그 거룩한 시간에 직접적이든 돌려 말하든 그런 얘길 한다는 겁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말입니다, 사람이지 말입니다. 사회적 동물들이시니 정치 얘기 안하고 정치성향 없인 몬사는거 맞아요.
아 근데 그걸 왜 하필 궁극적 원론적으루는 성령님께서 집회를 보시고 계시는 예배 시간에 직간접적으루 발언하시너냐 이겁니다. 고게 문제가 되죠.

왜? 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오는 수요일 일곱시 반에 근처에 성도등록자 200명 이상 되는 아무 교회나 찾아가셔서 기도시간 설교시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진풍경이 보이나...

목사님들이 거룩한 시간에 발언하시는 건 그냥 발언이 아니고 엄연한 설굡니다. 설교. 좀더 겁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고도 불러요 그걸. 웃기지 말라고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정말 거룩한 시간 맞긴 맞아요. 종교 예식이다요. 한창 설교 나가는데 일어나서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라고 하면 안됩니다. 할려면 예배 끝나고서 따로 찾아가 따지면 따질지언정... 나름대로 성직이고 종교집회이기 때문에 함부로 뭐라고를 못 해요. 그 때 발언이라는 거.

문제는,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별 관련 없는 예화(이해를 돕는 삽입된 이야기)를 꺼내시곤, 이어서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정치하고, 경제하고, 문화 하면 얼마나 좋아요, 안그래요? 아멘?" 하면 말이죠,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이 꽤 많은 분들이 "아멘"합니다. 아멘이란 히브리어로 "그렇습니다" 혹은 "그리 될 것입니다"란 뜻임다. 우왓따 살 떨리네요잉.

교회 가서 몸소 견학하기 귀찮으시면 자료화면이라도. 예밴지 성경공부인지 뭐 노래자랑 시간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 만약 예배도 아닌데 다들 이렇게 아멘 구령을 붙이고 있다면 이건 정말 살 떨리는 얘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이거 신앙도 뭣도 아니고 그냥 맹종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막말루, 상식적으로 예배라는 건 신을 불러서 받자와드리는 시간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부정타면 안되지요. 그런데, 신령님,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에서 이명박이 어쩌구 정동영이 어쩌구 소리를 꼭 해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게 신이 하는 말씀이실까요, 그냥 인도자로 서 있는 사람이 생각나서 하는 이야기일까요? 그런 발언을 스리슬쩍 하는 거야말로 눈치도 못채는 사이에 예배를 부정타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 일부는, 중대형 교회들이 그런 경우가 좀더 있는데, 대예배 축도보다 헌금기도 시간에 더 열성인 사람들이 대체로 많아서 복을 열심히 빕니다. 기복 자체가 사람의 감정과 계획과 이기심일 수 있거든요. 근데 이게 곧장 예배로 동기화되어서 어디까지가 사람 말이고 어디까지가 성경 말씀인지 구분이 안 서는 신도분들(심하면 성직자분들 개중에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라는 선포에나 "믿는 신앙인들이 이 세상 정권 잡아서 하나님의 거어루카시고 조오혼귀하신 영광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라는 기복에나 똑같이 다들 아멘 한다는 겁니다. 눈썹이 실룩거리죠잉.

여기까지 안 읽고 내려왔어도 상관없으요. 이제부터 일거주시요.

사실 제가 알기루 최소한 예배시간에 지켜야 할 정치관련 바람직 태도는 이렇게 정리됨미다.
가급적 정치 토픽은 꺼내지 않는다. 특정 이름은 아예 올리지 않는다.
노가리를 깔거면 예배 끝날때까지들 좀 참자.
꺼낼거면 원론적인 얘길 하든지(예: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갈 길을 비추어주시사 세상의 빛과 소금 되게 하시며... 등) 결론을 인위적으로 내지 말고 성경에 근거한 바람직한 의견(예: 공의를 굽게 하는 통치자가 되지 않기를... 등. 미가 3장 9-12절)을
위주로 전개하든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성도란 사람들은 세상 핍박을 견디는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자.

이건 좀 딴얘긴데 원래 사도행전 읽어보면 진짜 눈물 싸고 똥줄 타는 고역의 연속입니다.
원래 세상에 선포하는 기독교란 그래야 하는 법이니라 하고 성경에 써 있지 말입니다.
근데 요새 큰 교회들은 이상하게 되게 돈도 많고 다니기도 편하고 말입니다.
이상하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1907년을 감히 얘기하지 말입니다.
이건 좀 막말이지 말입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 통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분노가 나옵니다.
잊을만 하면 나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줫버리라고 한 분은 무려 예수님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금 낼 건 내란 소립니다.
근데 그 뒤엔 하나님 꺼는 하나님께 바치라시면서 천국에 세금내라고 하십니다.
실제루 예수님께선 이르시길 천국은 금은을 바꾸든지 한 다리 짤르고서든지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창녀, 환자, 어린이, 욕먹는 세리만 골라서 찾아다니셨다죠.

세금이라. 이명박 장로라. 권력이라. 설교라. 복잡미묘한 얘김다.
더 했다간 저 벼락맞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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