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문의를 하러 가거나 문의메일을 보낼 때면 나는 으레 전문 용어를 하나쯤 꺼내어 사용한다. 펌웨어를 바꾸었더니 폰트가 바뀌는 현상은 이유가 뭐냐는 둥, 랜덤 기능이 백몇 곡 이상부터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둥... 입으로도 글로도 그런 말을 잘도 뻔뻔하게 내뱉는다. 이유는 하나다. 그런 용어를 들으면 '왜 안 돼요?', '어떻게 해요?' 같이 속 터지는 질문만 받던 담당자들이 아주 새롭게 느끼고 정신을 차리니까. 실제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또, 가끔 내뱉기는 내뱉어야겠는데 돌려 말하기가 어려울 때도 역시 효용이니 목적전치니 하면서 어려운 단어나 여러 사상이 응축되어 생성된 개념어를 한두 개 던지곤 한다. 왜냐? 말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셈속을 차리고 있으니까.
어려운 말, 전문용어는 힘이 있다. 그런 단어를 쓰는 사람보다 쓰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일단 입지가 낮아진다. 그리하여 결국 말을 모르는 이는 전후사정과 문맥상 의미를 파악해 볼 생각을 포기하고 말을 아는 이에게 수긍하고 만다. 푸코가 말했던 권력이라는 게 뭔지 난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것도 그의 권력 개념에 포함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미사여구에 속아서는 안 된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에서 패러다임이 뭔지 유니코드가 뭔지 백합이 뭔지 하는 것쯤은 후딱 찾아 알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엔 모르는 자, 발언권과 반박 능력이 없는 자, 권력 없는 자가 되고 만다.
촘스키 선생은 말한 적이 있다. 지식인들은 일부러 유창하게 말한다고. 하지만 제아무리 어려운 개념어도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낼 수 있다고. 그렇다. 동의한다. 나는 어려운 말의 권세를 조그맣게 사용하고는 있지만, 결코 커다란 '용어의 권력' 앞에서는 우민이 되지 않겠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듯이.
지하 2층부터 지하 7층까지가 주차장 지상에서 7층까지 복층에 금괴 같은 예배당 의자에서 까맣게 묵념하는 아무개 성도들 그 머리 위 8층에 전산실, 여신도회 그 위에 남신도회, 목양실 위층에 행정실, 옆엔 케이블방송 안테나 그리하여 꼭대기엔 빨간 네온사인의 십자가 그리고 그보다도 높은 자리, 십자가의 정수리에 피뢰침
처음의 천막은 지하 1층 역사관 창고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올림픽공원 옆에 있는 임마누엘교회에 미안하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며 그 교회를 보고 영감을 얻긴 했지만, 작품 속 교회는 현존하는 어느 교회도 특칭하지 않는다.
지금 열혈제작중인 내 웹폰트 '가분수'(유사이래 가장 작은 웹폰트라 자부함)는 과연 네이버 붐에 뜰 수 있을까? 천하의 귀여니가 다시 소설을 쓴다한들, 그 자체로 다음 UCC 광고를 만들 수 있을까? 일류 스타의 코믹연기로 포장해야 겨우 팔리겠지? 한때 세상을 휩쓸었던 마시마로와 졸라맨이 거대 스케일과 최고의 퀄리티로 찾아온들, 무한도전 매드무비보다 더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동네 도서관의 부당한 대출사례에 분노하는 40분짜리 다큐보다는 차라리 쓰다 망가진 아이팟이나 믹서기에 갈면서 과학실험인 양 까부는 40초 동영상을 만드는 게 더 낫다. 베스트에 올라가기도, 알려지고 홍보되기에도 말이다.
User-Created Contents라나 하는 개념이 요새 유행이란다. 처음에는 유튜브가 하는가 싶더니 구글 비디오, 엠엔캐스트, 다음, 네이버, 이제는 메가패스까지. 세상에 당신을 나타내는 새로운 길,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뉴 미디어. 웃기지 말라고 해라. 이건 순전히 대형 포털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그것이 분명히 소통과 개방과 공유, 그리고 Creativity의 수단이 되었다. 기억하는가? 뿌까와 우비소년, 졸라맨의 새 에피소드가 뜨기를 기다렸던 그때를, 그리고 아기자기한 웹폰트로 꾸며진 다음 까페에 연재되는 인터넷 로맨스 소설을 스크롤바 내려가며 읽던 시절을. 이리 생각하면 그때야말로 UCC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 누가 이걸 UCC라고 불렀나? 없다. 용어를 규정할 필요도 없었다. 본디 인터넷은 창조적인 공간이고 수단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초록상자 파란상자가 TV 스크린에 나타났고, 엄청난 마케팅과 융단폭격에 가까운 전략으로 사람들이 일방소통을 하게 되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혹은 포털이 사람에게 무조건 쏘아대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포털은 점점 문제를 알아차렸다. 큰일났다. 소스가 없어졌다. 손님 없는 까페는 망하는데. 방법을 찾았다. 저들끼리 우리 안에서 놀게 해 주자. 우리는 입장료만 받아도 두둑해진다. 그래서 UCC라는 것을 포털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자, 보아라. 너네들도 방송사처럼, 마빡이처럼, 지미 헨드릭스처럼 될 수 있다. 해 봐라, 너 뜬다. 어디서? 여기서! UCC! 유저가 만드는 컨텐츠! 이 얼마나 멋지고 간지나는 1인 미디어냐! 시끄럽다! 우리는 너네 포털들이 나발 불기 전부터 잘 놀았, 아니, 그 전엔 더 잘 놀았고 더 놀 줄 알았다 이거야!
UCC의 단점들이 있다고들 한다. 저작권, 패러디의 대량생산과 천편일률적인 컨텐츠로 인한 질의 하향평준화, '비주얼'하지 않은 컨텐츠의 소외와 수용 가능한 범주의 한계성, 기업과 방송사의 개입 등등. 그 모든 문제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 놈들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우리 본능을 한낱 '셀프스펀지' 수준으로 격하하고, 이를 예쁘게 포장해서 과대선전해 온 때문에 이리 된 것이다.
웹폰트를 만들고 어쭙잖게 소설이랍시고 끼적이고 심심하면 이상한 동영상까지 만들어본 UCC-C(creator)로서 나는 지금 UCC에 물음표를 던진다. 누가 감히 엄연한 법적 저작권자인 나를 일개 '유저(user, 사용자)'로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A. 전 당연스레 Creative Commons License를 지지하던 터라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정리가 잘 안 됩니다. 나름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CCL이 크게 영향미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예나제나 제가 보기엔, CCL은 어떤 기준삼을 만한 '지침'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떤 잣대가 딱히 현상을 주도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아이두 블로그들(백수의 하루 같은-_-;)만 보더라도, UCC 생산을 부추기고 주도하는 포털의 UCC가 아니면서, CCL이 걸린 저작물들은 위에 써놓은 UCC의 폐해 같은 것이 별로 안 드러나지 않습니까. 오히려, 포털이 이러한 기준조차 제시하지 않고 되는대로 컨텐츠를 쏟아내게 하면서 수요 높고 인기 좋은 UCC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마당에는, CCL이 딱히 비판받을 대상이 될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답변이 되었으려나요, twinpix씨.
P.s 2 나는 칭찬듣는데만 익숙하려는 놈이다. 못났다. 원래 상수랑 두는 법인데 일부러 나보다 급수 낮은 놈 찾아다니며 3점바둑 두는 근성은 아직도 남아서- 알든 모르든 고민하고 생각하는 습관이 더욱 필요하다.
여러분, 우리 모두 모릅시다. 모르는 사람이 됩시다. 참으로 모르는 사람은 또한 참으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은 스스럼없이 세상에, 사물에, 아(我)와 타(他)에게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요, 모르는 사람은 아는 체한 사람보다 입장이 나음입니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모른다는 말을 알지 못한다(do not know 따위), 혹은 알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듯합니다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는 모르는 척할 뿐이요 또한 아는 척할 뿐입니다. 몰라야 합니다. 아주 몰라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퍽이나 많이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좀 알아 가면서 사람들은 어느 새인지 모르는 법을 잊은 듯합니다. 대신 겉멋만 들어, 아는 체하는 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앎'이라는 것이 갈사 상태에 치닫게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온갖 매체와 각양 사람들이 끝없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주는데, 이것이 '앎'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옛적 톨스토이라는 현자가 있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그 이야기를 '지옥의 붕괴와 그 부흥'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 귀신이 말합니다. 닭이 기장낟알을 못 먹게 하려면 그 위에 다른 곡식을 한까득 부어놓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지식과 정보라는 것에 푹 파묻힌 '앎'을 쪼아먹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면 다행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고 진심으로 여기는 마음, 바로 '모름'이 또한 한까득 얹힌 지식과 정보 속에서 앎과 함께 덮여 버린 것입니다.
톨스토이보다 앞선 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2년쯤부터 기원후 30년 정도까지 살다 간 분께서는, 온갖 수수께끼를 잔뜩 던졌더랬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곁에서 듣던 열두 사람이 물었을 때에 그분이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알까 하여 내가 비유로 말했다. 옛날 선견자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복이 있다." 이 열두 사람은 몰랐던 사람들이어서, 또한 수수께끼 속의 앎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합니다. 이분보다 더 옛날 사람인 세네카라는 철학자는,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모른다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릅시다. 모르는 사람이 됩시다. 물론 모두를 알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렇지만, 진정 모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앎을 얻어 좀더 풍요롭고 아름답고 빛깔 있는 삶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s: 형이상학 강의 듣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 질문으로서의 질문이야말로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이며 인간의 초월적(형이상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각주:1]
칠판에 낙서를 하다 말고 황급히 시침을 본다. 낙서를 지우는 것도 잊고 부리나케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탈옥이다. 다행이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공원으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평화롭다. 햇살이 비친다. 옆에는 사서 교사를 대신하는 친구놈이 얌전히 앉아 책을 보다 말고 "왔냐?" 인사한다. 책이 꽂혀 있다. 소파가 사람을 기다린다. 모니터 열두 개가 빛을 발한다. 점심 나절의 일광(日光)은 썩 좋다. 잡지들이 앉아 있다. 이곳은 본디 지식과 정보의 공원이로되,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별로 즐기지 않아 '도서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추억해 본다. 내가 라이브러리란 곳을 처음 겪었던 게 그 언제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때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로 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의자들이 높았다. 그러나 거기 앉아 내가 보고 싶은 것 보는 데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시간이 좀 빠르게 간다. 만화와 학습만화, 어린이 과학도서를 읽노라면 길거리에서, 운동장에서 공이나 차고 있을 동년배가 전혀 부럽다거나 내가 초라하다던가 느끼지 않았다. 내 발로 찾아가서 손수 고른 책을 종류에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보고 읽고 즐기다가 시간이 되면 아쉬워하던 그 때. 그때부터 나는 도서관과 도서실을 예찬하는 이가 된 게다.
이 시대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지식의 옥으로 출근한다.
감옥. 자유는 없다. 뒤집기도 없고 변혁, 심지어 수정과 의지도 없다. 오로지 굴종의 내면화와 지식의 노화만이 착착 진행되는 곳이 있다. 옳고 뚜렷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지만, 소위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것 아래 틀리고 뒤떨어진 것들도 정당해져서 바로잡히질 않는다. 앎의 기쁨 운운하는 것은 개소리다. 뭘 배우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다. 사상과 정보를 억지로 넣어서 수치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 교과서의 실험 장면은 화석이 되었고, 미술 교과서의 그림들은 예술이 아니라 실기평가의 전형이다. 두꺼운 언어 교재에는 감상이 없는 대신 밑줄과 모범답안만이 복사되어 있다. 대화와 타협을 가르치는 교과서를 들고 있던 교사가 다음 날 가위와 자를 들고 돌아와서 젊은이들을 틀에 넣고 재고 째고 비튼다. 젊음은 늙어가고 지식엔 거미줄이 친다. 배움이며 생활이며 모든 게 무기력해질 즈음 출소하게 되지만, 지금껏 밀어넣은 지식은 모두 녹초가 되어 쓸모가 없고 갈 곳도 없고 기쁘지도 않다. 이 세상엔 지식의 옥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지식의 공원으로 뛰어들어가고 싶다.
모두가 제 발로 찾아들어온다. 누구도 뭐라고 간섭하지 않는다. 정답과 자신의 생각을 끝없이 대조하며 왜 난 그르고 이건 옳을까 고민하다가 무릎꿇는 모습도 없다. 시키는 이도 없고, 부림받는 이도 없다. 저마다 고개는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하나같이 앎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 최신 뉴스부터 고전명작까지가 총망라되어 있지만 교사용 지도서는 없다. 모두가 교사고 모두가 학생이다. 지식이 살아 숨쉬며 자유롭게 노닐고 마음껏 활개를 친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과 손끝도 살아 있다. 학교가 지식의 감옥이라면 도서관은 지식의 공원이라고 할까?
나는 학교가 지식의 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옥만은 되지 않기를 꿈꾼다. 사실, 몇천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지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어떤 모습이 될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감옥밖에는 달리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꿈꿔 본다. 지식이 어딘가에 갇혀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달은 이상.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현행 국기에 대한 맹세 (또는 국기에 대한 경례)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쳐들고 주의 군사 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 한국찬송가공회 지정 찬송가 400장 1절 (작시: D. W. Whittle)
남(아니 적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들이 뭐라하든 무조건 옳으니까 몸과 마음을 바친다. 무조건 옳은 이유는 사실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막연히 좋은 것 같다. 주변 동무들도 다 그렇게 한다. 과학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무튼 줏어듣기로는 우리네가 최고다. 이런 특권과 은총에 두고두고 감사 찬송을 하지 않으면 배신자다. 괴롭지 않은가? 이렇게 무지몽매한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이것처럼 황당한 애국심이 있어선 안 된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고, 옳은 것은 옳다고 여겨 의심치 않을 만큼 판단력이 충분한 사람의 진심어린 충성이야말로 종교생활의 발전이나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나의 충성은 가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안 하게, 혹은 못 하게 하는 집단일수록 불행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법이다.
하인스 워드에게 지나치게 많은 렌즈를 들이대는 언론과, 경쟁력 강화를 지적받고 있는 '한류'에 대한 우리네 맹목적인 신용 그리고 우리가 초딩 때부터 멋모르고 읊었던 국기에 대한 '경배'에서―기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애국심, 아니 파시즘을 본다.
P.s 초등 모교에 가 보니까 국기에 대한 '맹세'라고도 하더라. 맹세! 초등학교에서 그런 어휘를 쓰다니. 그냥 웃음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