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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7 <랭고> (2011, 고어 바빈스키 감독)


이 스크린샷들에 나와야 할 등장인물은 다 나온 듯(두더지 강도단과 박쥐들과 시장 빼고)

  • 내일 휴가복귀해야 되는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으로 혼자 수요일 낮 네 시에 강변CGV 8관 D05에 앉아서 봤습니다. 민간인일 땐 그렇게 서글픈 일이 아니었는데, 군인이고 솔로고 휴가복귀고 하니 이거 참 씁쓸하네요(...) 리뷰가 늦는 이유는 예약글을 해놓고 휴가복귀했기 때문이죠.(...)
  • 솔직히 좀 기대를 했었습니다. 토요일에 틀어주는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아주 잠깐 보고 국방일보에서 잠깐 봤을 뿐인데도 기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예고편도 그다지 허풍을 떨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보여주는 정도였는데도 이상하게 기대가 됐었습니다. 픽사가 아닌 곳에서 캐리비안의 해적 팀이 모여 만드는 조니 뎁 주연의 이야기는 대체 뭘까?
  • 그래서 영화의 시작 역시 다름아니라 기대에 부풀어 있는 관객들의 물음에 대답합니다. 올빼미 악단이 "랭고~ 랭고~"할 때 직감적으로, 아 이 이야기는 설명을 잘 해 주겠구나, 보기에 따라서 아주 유치하게 볼 수도 있겠는데, 하고 불안 반 안심 반이었습니다.
  • 주인들이 던져 준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어항 속에서 수많은 촌극을 만들어 놀며 지루해하던 한 마리 카멜레온. 그래서 그는 '내가 누구냐고? 나는 아무나(anyone)다'라며 자랑스러워하다가도 왜 이렇게 액션이 없어? 하고 불평하다가... 사고로 미 대륙 황야의 고속도로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액션 시작.
  • 일단 영화 자체는 서부극에 대한 tribute로 느껴집니다. 일대일 권총 대결, 각종 소품과 복장과 건물들, "그럼 이제 달려야지"라며 황야를 말달리는 장면도 두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 대수층 탐험, 비행 장면, 인간들의 세계와 무시무시한 속도의 불빛들이 횡행하는 고속도로와 그 너머 다른 세상(the another side)에 대한 묘사까지, 배경 설정 담당자는 이 모든 것을 그때그때에 충실하게 건설하고 있습니다.
  • 스토리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대단히 상투적일 수도 있는 영웅의 탄생을 아주 모범적으로, 혹은 아주 독자적인 줄거리로 따라가게 합니다.
    처음 이 카멜레온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누굴 만나도 '당신 누구야?'라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어 그저 얼버무리지요. 마을에 도착해 멋모르고 처음 들어간 선술집에서 세 보이려고 '나는 아무나 될 수 있다'라는 생각에 술병을 흘깃 보는데, 'Durango'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서 그는 'Rango'가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허풍을 친 대로, 또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착각하고 소문을 부풀려주는 대로 그는 순순히 영웅, 보안관이 되어 갑니다. 처음 그는 실제로는 영웅이 아니었고 사실 뭣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막연함입니다. "Anything means nothing"이라는 말도 있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힘있는 독사가 나타나자 그는 무릎꿇는 자세로 내동댕이쳐지고, 보안관 뱃지는 떨어지고,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다시 황야를 걸어나가야만 합니다. 이제 그는 고속도로 건너편 저 세상으로 체념의 발걸음을 옮기며 스스로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아무도 아니다(nobody)." 이제 그 막연함은 정면으로 맞대면이 되고, 이 카멜레온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이 고속도로 저편으로 건너가자마자 쓰러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서부의 수호신을 만나고,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왜 그걸 굳이 또 하려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게 제 팔자니까요(that's what I'm gonna be)." 영웅이 되려는 자 아니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는 반드시 이 질문에 대답하라는 감독의 메시지는 여기서 들립니다.
  • '물'이 절대적으로 모자라지만 예전엔 '물'이 넘쳐났다던 황야 마을을 바라보며 거북이 시장은 랭고에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면 뭔가를 믿게 해야 하고 그래서 '물'을 통제하는 것이 곧 모든 통제를 뜻한다... 뚫린 수도관 아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물'이 콸콸 쏟아지길 바라며 종교의식 같은 것을 치릅니다. 시장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노처녀 콩스 양의 말을 듣고 다시 시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쥐며느리 골프를 치며 마을 근처의 한 재개발 지역을 가리킵니다. "저게 미래라는 거야, 랭고.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아니면 남들처럼 뒤처지게." 랭고가 고속도로 너머에서 보았던 것은 인간들이 만든 레저타운. 그 귀한 '물'을 스프링클러로 탁탁 뿌려 가며 광활하게 길러 놓은 그린 사이로 카트를 몰고 다니는 골퍼들, 그 너머로 재개발 지역과 똑같은 인상의 거대한 빌딩의 숲.
    이 영화에서 물은 '자본(자연자원이든 통화든 그때그때마다 의미를 겸임하는데)'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딱 들어맞습니다. 보면서 전율에 몸서리를 쳤습니다. 아, 이게 니켈로디언의 힘이고 미국이라는 문화강국의 힘이다, 전체이용가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쉽고 중심적으로 풀어줄 수 있나? 나는 왜 이런 걸 못 하지? 스토리텔링을 배워야지 않을까? 하고 제 눈이 저한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도 수시로 보이는 전통극 같은 연기와 이따금 튀어나오는 상징적인 대사들이 '우리도 배울만큼 배웠어'라고 투덜거리는 각본팀의 불평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 생쥐 소녀 진짜 귀여워요. 좀더 출연이 많았다거나 랭고와 관계가 더 깊었더라면, 솔직히 콩스 양은 별로였음. ㅋㅋ 로맨틱한 장면은 간혹 있지만, 전체이용가라 그런가 로맨스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올빼미 악단은 생각보다 별로 안 웃겼음. 너무 극에 개입해버렸어요;; 초반부에 매를 피해 숨는 두 신이 있는데 그게 제일 재밌었던듯. 뒤로 갈수록 아주 진지한 영웅담이 되어버립니다. 아닌게아니라 나중에는 진짜로 총알 한 발로 건수를 해결하기도 하고요.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 월-E 이후로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부담없는, 좋은 전체이용가 3D 애니메이션 영화.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미국이 참말 부럽습니다. 고어 바빈스키, 기억해 둬야겠다.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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