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쓰고 싶었던 주제인데 여울바람님의 글을 보고 지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X세대가 지금은 '개성시대'라고 선언하면서부터 개성이란 정말이지 현대사회의 소시민이 가져야 할 대단한 미덕으로 아무 의심 없이 긍정되는 모양이다. 나는, 일평생 평범한 인간의 축에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인생으로서(그리고 모범적인 N세대로 규정된 듯한 여세를 몰아) 감히 말하겠다. 긍정되는 개성이 있고 부정되는 개성이 있다.
사회 제반 분위기에 무난하게 수렴될 만한, 혹은 극소수 쿨 메이커에 의해 공인된 개성만이 (어쩌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개성은 사실 한 종류인지도 모른다) 긍정성을 확보하며 그러므로 표출될 권리를 갖는다. 한편 누군가가 기존의 긍정된 개성과 어떤 연계가 느껴지지 않는(즉, 아주 순수한) 개성 아니면 아니면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불일치하는 개성을 추구할 때 이 개성은 아주 완강하게 회의되고 거부되어 개성으로 공인받기 어려워지며 그것을 내어보이는 것도 자꾸만 사위스러워진다. 내가 예수님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루카는 자기가 애니 오타쿠임을 말할 수 없었는가, 나는 어째서 평소 별로 관심도 없던 대스타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해 보고 마는 것인가는 이것으로 설명된다.
부정되는 개성이 긍정될 수 있는 방편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 그 개성이 사회에 의해 쿨한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둘, 자기기만과 타협적 변형을 통해 부정된 개성을 긍정된 개성으로 왜곡한다. 셋, 부정되거나 말거나 그 개성으로 일관한다. 대부분의 경우 부정된 개성들은 긍정되는 메이저 쿨에 굴복하여 둘째 경로로 우회하며, 첫째 방법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셋째는 결국 개성을 위한 개성이 되어 본래 표현하고자 했던 자기동질성에게 소외를 당하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 '퀴어'와 '고스'는 <프란체스카> 이전까지는 한국에 존재조차 없었던 문화 코드인가? 왜 나는 장기하를 많이 듣지도 않으면서 기타를 치고 노는 후배들 앞에서 되거나 말거나 '달이 차오른다'만 죽어라고 치고 있는가? 왜 개량한복만 입는 그 교수는, 신해철은, 쿠메타 코지는 마냥 외곬으로들 그러는가? 부정되는 개성은 그렇게밖에는 긍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만의 개성인데 스스로 만족하고 합당하게 느끼면 그걸로 그만 아니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여러분은 잔디밭 언덕을 굴러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개성이란 자기완결이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서 개성을 찾는 것이지만, 그 다름은 어쨌든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남들보다 안 좋아 보이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개성의 긍정성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부여된다. 잔디밭을 굴러 보고 싶어져서 구르는 건 나다. 나는 이미 내 개성을 잠재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실컷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잔디밭을 구르고 나면, 바지와 옷에 묻은 진흙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비웃는 듯한 일행들의 시선과 말투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만으로는 개성의 긍정성이 확보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미 부정되고 있는 개성이 방어의 수단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고 보는 게 잔인하지만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개성은 무조건 긍정되지 아니한다. 실제 그렇지도 않으면서 괜히 특이한 것을 갖고 싶다던가 돌+I가 되고 싶다고 꿈꾸는 것은, 참 미안한 이야기지만,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진짜로 개성이 있다는 것은 차라리 위험하고 고된 삶이며, 그것이 긍정되지 못할 때는 더더욱 협착한 길이 된다.
P.s 라온누리에서 주최하는 F4강의, 5월 12일 김진혁PD 강의 들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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