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처음 올린 게 7월 31일, 지금은 9월 5일입니다.
설국열차는 제가 원래의 글 말미에 예견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흥행했습니다. 대다수 관객에게는 양갱이 또렷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저도 양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한동안 양갱을 먹을 때마다 꼬리칸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정말 볼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아예 일언반구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텐데.
-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건 지하철 광고였어요. 지하철에서 광고하는 영화치고 적당히 덜 대중적이면서 적당히 구매의 가치가 있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은데, 이건 그 광고를 보고 나서 지하철에 탑승한 뒤에도 계속 유튜브로 정보를 찾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원작이 있으니까.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봉준호니까. 솔직히 CJ가 대대적으로, 정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배급하고 홍보 총력전을 펼치는 걸 보고서도 그럴 수 있겠거니 했어요. 그래 참자, 관객들의 등골을 아예 빼먹으려는 영화는 아닐 거야, 하고. 최소한의 예술적 예의 내지 사회적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 무좀약을 받으러 나간다 나간다 하면서 안 나가고 집에서 뒹굴다가 드디어 오늘 이 일 저 일 해치우려고 나가서 봤습니다. 버스가 마치 제 시간 계획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재깍재깍 도착해 주어서 놀람.
- 강변CGV에는 정말 오랜만에 가 봤습니다. 저의 12년 하남시 인생의 애증의 장소인 테크노마트도 참 많이 바뀌었더군요. 웨딩홀이 들어선 건 알지도 못했고, 1층의 엔터식스는 적응할 수가 없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건담마트 직영점이 (8층에) 생기고. 도대체 언제까지 저 테팔이들은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저기서 자기 머리 위에 먼지를 쌓고 있을 것인가...
- 생각보다 극장에 관객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만원사례일 줄 알았는데. 시간이 밥 먹는 때여서 그랬을까요? 뒤에 쓰겠지만, 아니었던 거 같아요.
- 비행기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항공을 가르며 CW-7을 살포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외의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 줄거리는 수많은 영화 잡지들이 다룰 터이니 굳이 복기하지 않겠습니다. 반전도 적지 않겠습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최고 악역은 길리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사회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 과학 자문이 있더라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긴 필요하지, 요즘 깨시민 님들이 얼마나 똑똑하신데. 허구와 실상도 구분 못 하는 예술맹들. 열차 밖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주요 명승지는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거 하나는 꽤 리얼했음.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북극곰은 MBC가 찍은 자료화면을 합성한 것이라는 추리를 해 봤습니다. 추가바람
- 영화 다 보고 나서까지도 생각을 못 하다가 트위터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양갱! 양갱 먹고 싶다!
- 15세치고는 신체절단 폭력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걸 '정말' 싫어하신다면, 중간중간 좀 참으셔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싸다는 뜻의 영어 표현에 '팔다리 값을 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유난히 사람의 수족에 굉장히 관심을 보입니다. "어떻게 두 팔을 다 가지고 리더를 하겠어요?"
- 고아영이 의외로 안 귀엽습니다. 송강호 한국어 발음이 의외로 안 좋습니다. 일본어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보이스웨어 번역이 간간이 사람 웃겼습니다. 하지만 가장 웃긴 장면은 역시 메이슨이 신발을 머리에 쓴 그림이 아니었을까?
- 스토리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아까워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 나는 크레딧롤이 다 올라간 다음에 상영관 출구를 나와 "ㅅㅂ 배반당했다"라고 느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10분 생각해 보니 대략 정리가 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 이 영화의 비유가 지나치게 전면적이다. 둘째, 그 비유로 해설되는 서사가 안 그럴 것처럼 가다가 결국 지나치게 냉정하다.
- 첫째, 비유. 반전이 소개된 다음 엔진실에서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아예 대놓고 설명합니다. "이 열차는 하나의 세계와도 같고, 이 안의 사람들은 인류지." 그 순간 감독에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야! 그걸 설명해 버리면 어떻게 해! 수많은 인터뷰와 영상에서 "마치 지금의 우리와도 같이" 볼 수 있을 거라며! 그렇게 대놓고 묵시록적 비유풀이를 해 버리면 어떡하냐고요.
묵시록적 비유풀이란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비유적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성경의 맨 끝인 계시록에 가면 하나씩 대놓고 정의(definite)가 됩니다. 이 정의와 관점에만 입각하여 나머지 비유에 이 정의를 대입하는 것을 묵시록적 비유풀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일곱 금촛대'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요? 계시록을 읽어 보면 "일곱 금촛대는 (계시록 작성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일곱 교회니"라는 말이 떡하니 나옵니다. 따라서 성경 어디를 읽더라도 '일곱 금촛대'는 '그 일곱 교회'로만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 수작을 부립니다. 심지어 윌포드, 이 세계의 창조자가 그렇게 정의내려 버린 시점에서 모든 것은 여기에도 끼울 수 있고 저기에도 끼울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단순 직유법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저는 유치원 칸을 보며 특히 더욱 '북한'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의 은유'(이게 모범답안이죠?)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과 각종 독재 사회가 어떻게 작동 가능한가를 이렇게 판타지적인 허구서사로 잘 표현해낸 것이기도 하구나... 라고 감상하려던 차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더니, 다시 감상을 오로지 자본주의에 관해서만 가지도록 방향을 고정시켜 버립니다.
물론 그 대사 하나 때문에만은 아닙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생존을 명목으로 질서와 계급을 만들어낸 통제 사회(자연세계가 야만으로서 그곳 바깥에 존재하니까 그곳은 사회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에 대한 사회학적 시뮬레이션과 메타화를 태만히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맬서스적 인구론과 포드주의적 기능론 딱 거기서 그쳐 있는 윌포드의 논리가 반란 이외의 어떤 정치적 수단으로도 반박된 적이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서사를 세계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현실의 설명 수단으로 사용하기가 영 어렵다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그저 그 절대다수가 무임승차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무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 이렇게나 꼼꼼하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일목요연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 건 누구 때문이지요?
- 둘째, 냉정함. 영화가 중간중간에 보여주는 잔혹한 비유('충돌' 장면이라든가, 긴 터널로 들어가는 구간에서의 진압 작전 장면이라든가. 열차의 불을 끄고 적외선 안경을 쓰고, "재밌는 구경이 되겠어"라니.)들의 훌륭함을 무색케 하는 허무함이, 이게 정말 <괴물>의 봉준호가 맞나 싶게 할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사실 '체제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은 그 체제를 피드백하기 위해 일정 정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공급될 여지도 있다'라는 의식은 제게 그다지 놀랍거나 당혹스럽지 않았어요. 예전부터 해 왔던 생각이거든요. 문제는 결말을 본 이후 되짚어 본 전체 흐름이었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날까? 허무한 패배? 타협? '제 3의 길'(남궁민수가 말하는 승차 출입문을 열자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할리우드식 목표달성? 결말은 허무한 승리였어요. 그리고 그것이, 이 이야기가 (세계 자본주의의 메타포 이상이 되지 않기를 자처한 시점에서) CJ가 악랄하다는 반증이자, 감독이 얼마나 세계 시장 앞에서 타협을 하기로 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이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봐야 할 영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시그널이라는 사실에 못을 박았습니다. 각본가가 하다못해 제 3의 길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아니라 그 열차 안에서의 어떤 제정신 차린 방안이 나왔어야 했고, 정말 세계 자본주의를 '까고' 싶었다면 열차를 유의미한 장소에서 스톱 시켰어야 합니다(하다못해 희대의 망작 <2012>에서도 희망봉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CJ는커녕 아무도 투자해 주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 각국에 배급할 수도 없었을 테지요. 결국 우리는 "또 한 번의 주기적으로 필요해지는 반란"을 일으킨 다음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CJ엔터테인먼트가 배달해 준 '새해맞이 계란'을 먹으며 "오큐파이 윌포드"를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 저는 차라리 윌포드라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독수리 5형제>가 선택한 방법이었지요. 하나의 유령이길 기대했습니다. 웬걸, 아주 구체적인 (음, 말하자면 때릴 수 있는) 인간이더라고요. 체제를 파고든 끝에는 어떤 한 명의 장본인이 존재한다, 이 얼마나 사실에 가깝고 그래서 믿고 싶지 않으며 영화라는 지극한 허구 속에서의 가능성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농락하는 이야기입니까? 모든 것이 시카고 학파 때문에 이토록 망가진 걸 누구나 아는데, 그렇다고 누가 시카고 학파의 학장을 때리고 싶어하는가요? 그렇게 이 영화는 공격 대상 혹은 진짜 원인을 유야무야 증발시켜 버립니다. 아주 극적으로 말하자면, 순식간에 윌포드도 나쁜 놈이 아니게 되면서 아무도 탓할 수 없게 되어 버려요. 커티스가 말문이 막혀 버린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그렇게 진정한 타격 대상을 (그 대상이 얼마나 타격하기 어렵게 정체 불명한가에 상관없이) 똑똑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재미와 상영관을 확보하고 급진과 원칙과 인류적 꿈을 기각한 영화가 "이 땅의 99%가 보아야 할 영화!"로 칭송받아야 할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영화들이 갈수록 그런 식입니다. 다들 간이 콩알만해져 있달까? 아니 어쩌면 상업오락영화라는 틀 자체가 그런 근본적 한계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봉하고 싶으면 개봉될 만한 이야기를 찍어 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잘라서 네놈 집안에서나 보는 홈비디오로 만들어줄 테니까. 꼬우면 유튜브에 올리시든가! 어디 몇십만 몇백만이 클릭 조회한 다음에 니가 기획했던 대로 세상이 바뀌나 보라구!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기 발로 뛰게 만드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두 시간 동안 자기들의 얄팍한 정의감을 청량한 극장 안에서 안락하게 위로해 줄 엔터테인먼트니까!
그래서, 어쩌면 한때 제 마음 속의 관람 1순위였던 "지금 우리 사회를 고발", "전국민이 봐야 하는" 운운하는 영화는 이제 슬슬 무의미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영화가 documentation의 기능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지요. 관객이 만석이 아니었던 건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예매율은 뭐 얼마나 화제가 되느냐를 반영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로 모두가 봐야 하고 공분을 일으키도록 돕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사실 이제는, 마이클 무어가 그의 마지막 작품 <자본주의 연애담(Capitalism: A Love Story)>의 엔딩크레딧에서 '뭐라도 좀 하세요!("Do Something!")'라고 외친 이후로는, 어느 영화도 그걸 할 수 없으려는 것 같습니다.
- 나쁜 건 목적지도 없이 영원히 운행하는 대중교통입니다. 나쁜 건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으면서도 원론 시간에 배운 대로 "제약조건 내에서 최대 이윤 달성"만을 앵무새처럼 부르짖어 온 멍청한 기하산술적 신고전경제입니다. 나쁜 건 한숨 돌리고 쉬어가며 조금만 천천히 하자는 기초적인 인간성을 시간 계획과 끝없는 철로와 "엔진은 영원하다" 운운 노래를 부르며 묵살하는 물질주의입니다. 나쁜 건 정보 통제입니다. 나쁜 건 그 빌어먹을 속도입니다. 나쁜 건 CW-7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비판하지 않으면서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지구촌의 미래에 정말 관심이 있다는 양 황인종과 흑인종과 북극곰을 마지막 장면에 갖다놓고 끝을 내 버립니다. 이건 열린 결말이 아니라 냉정하다 못해 무례한 결말인 거지요.
- 글쎄, GV를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감독에게는 이 결말이 최선이었을까, 차악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이 사회에서 이런 형태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 사람들과 함께 오손도손 어울려 사는 것은 고사하고 하여간 엔진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줘야만 했던 것일까?"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아주 낭비가 되는 질문이죠. 당연히 최선이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투자자들이 검토하고 고친 것이기를, 그래서 그의 원래의 희망사항이고 대다수의 기대였을 내용의 "74%"가 "살상"된 결과이기를 저는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천하의 봉준호가, 이야기를 못 살리는 사람이 아닌 줄 번히 아는 우리의 봉준호가, 그러니까 CGV를 나와서 테크노마트 중앙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아 ㅆㅍ 배반당했다... 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죠. 그가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일치한다면, 저는 저 혼자서 그에게 배반을 당한 겁니다. <괴물>에서 한국 현대사 썰을 완벽하게 풀었던 바로 그에게.
- 감상 다음날 아침쯤에 한 생각인데, 어쩌면 이 이야기는 '현재까지와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예전부터 지금 바로 이 순간까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오늘 이 순간의 지구촌은, 정말 앞길이 막막하거든요.
- 유아용 해설 잠깐만 할게요. 이 영화를 보고 "위기 상황에 잠깐의 불편을 참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폭발하면 더 큰 상황을 못 보고 망한다" 따위의 교훈을 얻었냐, 애송아? 노무노무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17년간 똑같은 코스를 똑같은 속도로 질질 달리면서 이따금 '적절한 인구 감소 이벤트'를 조장하는구나? 위기 상황이니까 수족관과 클럽과 미용실을 빵빵하게 운영해야겠지? 거대 기획 혹 목표(영화의 내러티브에 빗대자면 '종착역'쯤이 될)의 실종이 유발하는 실존자의 상존적 불안과 그를 빌미로 가공되고 조장되는 구조적 억압 논리로서의 허구적 위협을 '위기'로 퉁치는 멍청함을 자랑할 시간이 있으면, 기초 논술교재 책이나 좀 봐라. 그렇게 감상하는 거야 뭐 니 자유지만, 니 인생에서 그렇게 낭비된 2시간이 가엾어서 그런다.
-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강력 추천해 드릴 수 없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친구에게 기초 교육 자료로 보여줄 수는 있어요. 깊이 있는 설정을 짠 근미래 판타지 픽션에 요즘 목마르시다면 두 시간 정도 볼거리와 떡밥이 충분합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의 팬이시라면 가서 보시면 좋겠네요. 하지만 이 영화를 봐야 할 그 이상의 이유는 없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할 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초반에 좀 달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푹 꺾이면서 잊혀질 겁니다.
- <매트릭스> 이후의 문제작은 이제 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저 아쉽습니다.
- 혹시 이 리뷰글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면 추가 질문을 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도 답을 드리면서 좀더 제 견해를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2 다른 이들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유레디? (Are You Ready?, 허원 감독, 2013) (4) | 2013.10.08 |
---|---|
최영해 (0) | 2013.09.17 |
주님의 학교 (0) | 2013.06.17 |
Latest thoughts from my "grown-ups" (0) | 2013.03.29 |
LIF^2+E 전시회 감상 (0) | 2013.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