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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

2015.06.16 23:20

다음클라우드가 서비스를 종료한다고 하는 이 시점에, 바이두와 360클라우드에 올려 놓은 만화 파일들을 익숙하게 다운받아 보다가, "야 어진아 혹시 몽촌토성 영상 원본 없지?"라는 물음이 와서 "내가 지웠을 건데 함 찾아볼께요" 하고 집에 와서 옛날 하드디스크들 열어보다가 문득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정말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싶은 것이다.


당장 2012년 5월께만 하더라도 나는 몽촌토성에서 나 한 명이 구르는 비디오가 그렇게 일회적이고 두 번 다시 재현 불가능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냥 공식 유튜브 계정과 내 아이팟에 최종본을 넣어 놓았으니 이걸로 그만이겠지 하고 정말 어리숙하게 원본 파일들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미친 거 아냐? 최종본은 없어도 원본은 남아 있어야 될 거 아냐? 지금도 그걸 veg파일, sfk파일과 함께 통째로 싸그리 없애 버린 내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그 시절의 나는 백업 개념이 완전히 틀려먹어 있어서, 백업할 파일을 골라서 업로드했었다. 뭐 지금도 남아 있는 버릇이긴 한데, 같은 파일이 두세 번 올라간다든가 정말 하등 쓸모없는 파일이 업로드되느라 시간이 지나간다든가 하는 걸 잘 못 봐주는 편이다. 이제는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최대한 날것 그대로를 있는 대로 몽땅 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참 많이 변했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두고두고 옛날을 되씹고 싶지는 않다.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걸 매일 반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들은 다 어디에 저장해 놔야 유지가 된단 말인가. 2테라바이트를 주는 바이두 정도가 일단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으니 함부로 종료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이거 정도가 그나마 안정적일 것이다. 세월이 좀 지나면 저장장치 용량들도 좀더 늘어날 테니, 아무 생각 없이 파일들을 짱박는 것이 좀더 쉽고 값싸지겠지.


이 모든 데이터들이 어느 날인가는 그냥 스러지고 없을 거라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디지털 자료는 영원할 거라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그 무엇보다 핵심적인 근거는, 그 디지털 자료를 찾을 만한 사람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점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자료들은 아무 의미도 소유주도 얻지 못한 채 유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자료가 다시 위로 올라오고, 다시 한번 read가 되고, 캐싱이 되고 하는 거지 싶다.


이를테면 우연히 영화 소개 TV프로그램에서 봤다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내 컴퓨터》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현재 씨네21의 글을 클리핑한 진보넷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영화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우연히 쇼윈도에 진열된 컴퓨터를 보고 그게 자기가 옛날에 빼앗긴 컴퓨터임을 알아차리는 장면 그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씬 하나가 그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나도 내 컴퓨터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수 년 전에 잃어버린, 자기가 가꾸어 놓은 바탕화면의 '내 컴퓨터'가 그 모양 그대로 쇼윈도에 놓여 있는 걸 보면, 무슨 감회가 들까.


여균동 감독은 《내 컴퓨터》라는 영화의 원본 필름을 갖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안 그럴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지금 TAILER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추진력과 기동력을 선전하는 바로 그 행사의 바로 그 원본 영상을 안 갖고 있듯이 말이다. 이제 그것은 어처구니없고 죄스러운 일이 되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완벽한 기억의 보존이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 내가 남겨야 할 것은 어느 정도까지일까. 더 많은 백업은 그것을 더 많이 보장해 줄까. 어차피 언젠가 스러질 자료들이고 기억들이라면, 어떻게 스러지게 하면 좋을지를 좀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생각이 엉킨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일부터 대학 생활 마지막 시험이다. 이제 정말로 학창시절이 완전히 끝나고 세상으로 던져진다. 낙서공책을 모으고 모든 것을 백업해 두고 마냥 내 아이팟을 들여다보며 애지중지 이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유아적인 생각은 그만둔 지 좀 되었지만, 실존적으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스러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좀 잘 스러지고 싶은 것인지, 스러지게 내버려두기 싫은 것인지 어떤 것들은 스러지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것인지―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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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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