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삿17:6, 21:25)
나는 이 말씀의 ‘왕이 없었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옹립되지 않았었다”라고 읽지 않는다. 이것은 사사기라는 히브리 경전의 한가운데와 맨 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가장 극적으로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요약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왕이 없었다’는 말은 “왕정(王政)”, 나아가서 정체(政體, regime)가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뒤의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라는 서술이 상호 호응이 된다. 왕이 있든 없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임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 이상을 함축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개념과 사사기의 ‘왕이 없어 저마다 자기 뜻대로 하더라’ 관점은 서로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상적인 왕정은, 아니 이상적인 정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원망(願望)의 응축 및 실현일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에 따라 regime의 종류가 나뉘는 것일 테다. 왕정에서는 그것이 ‘성군’으로 응축되어 ‘태평성대’로 실현될 것이 기대되며, 일반 민주공화정 사회에서는 대의제, 삼권의 분립 및 적극적 활약을 통해서 각 사안별로 수시로 응축 및 실현될 것이 기대된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저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 대통령님이 왕과 같은 자리에 있는 셈이다” 운운하는 유치한 말씀 해석이 한탄스러울 뿐,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왕”을 모셔 본 적이 없거나, 진정으로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는 둘 다일 것이다. 그때에 이 반도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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