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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히브리어라는 언어 자체에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분들, 히브리 문화 연구자 여러분과 학계의 성과를, 최대한의 성의로서 존중하고 있다. 이 글은 누구와도 면전에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감정을 배제하여 작성해 공개하는 서면상의 사적 입장 표명이다.


1-1. 히브리어를 공부하면 유익이 있다는 충고나 제언들을 아주 가끔씩 접한다. 온라인 광고 배너에서, “[펌]좋은묵상글” 같은 출처 불명의 좋은 말들에서, 주변 신앙인들의 지나가는 말로, SNS 영상으로, 출판사 홍보로.

1-2. 그럴까?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정확히는, 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 배우는 것인데 뭐 어떤가? 심지어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언어를 직접 배워서, 그 참뜻을 새기며 읽을 수 있게 된다는데.

1-3. 조금 더 알아보고 조금 냉정해져서 조금 위에서 둘러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정확히는, 해로울 여지가 있다. 내가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현재 고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1-4. 핵심적인 의문은, 왜 한국인이 히브리어를, 특히 고전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느냐는 점이며, 그게 과연 특정 외국어에 의한 효용을 추구하는 일인지, 과연 그 효용이 있기는 한지, 다른 부정적 부작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하는 점들에 있어서 그렇다.


2-1. 먼저, 외국어 학습 자체의 차원에서. “유익이 있”다고 선전되는, 그래서 면학이 권고되는 대상으로서의 히브리어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압도적인 대다수의 경우 고전 히브리어다.

2-2. 히브리어는 엄밀히 나누어서 옛날 성서 시대에나 사용되던 고대의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의 2가지로 구분되고, 오늘날 실존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 히브리어를 읽고 쓴다.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심지어 이런 기초적 객관 사실관계조차 모르고 히브리어를 덥석 권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3. 이것은 언어 학습 동기 부여의 차원에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이두향찰을 공부하는 꼴인데, 이런 이치의 학습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권고하는 속뜻이란 무엇인가? 실상은 적나라하다. “성경 작성에 사용된 문자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두와 향찰을 공부하는 이유가 거지반 삼국 시대의 글을 읽기 위함에 다름아니듯이.

2-4.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라는 것은, 오늘날 그 외국어를 쓰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주체들과 소통하겠다는 데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는 지금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 언어는 그것을 배우는 누군가에 의해 확산 및 확장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 작용 하에 전수되리라고 기대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 공부란 본디 히브리 문화권을 이해하고 히브리어 구사자들과 소통하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편이 건전하다 할 것이다.

2-5. 2-3과 2-4를 종합하여, 나에게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게, 이러한 사회적 상호 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확산될 뿐인 일련의 지식/정보/논리 체계에 지나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2-3에서 제기한 바, 히브리어 공부라는 것의 실상은 구약성서라는 문서를 ‘나름의 기호 체계를 도입해 해석’한다는 독립적이고 단일한 목적을 가질 뿐, 지금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며 그 세계에 대해서는 그 흥미를 일절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2-6. 2-5에서 제기한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증명이 있다. 히브리어를 공부한다는, 혹은 공부하라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이들 중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어 구사자, 셈족 문화 등에까지 관심을 확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성지순례”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 수준으로, 이마저도 해당 문화에 대한 교류의 차원이 아니라, 본인들이 주고받은 학술적 내용의 지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견학의 일환인 경우가 태반이다.

2-7. 이것은 내게 일반적인 외국어 공부 행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주 특수한 학술적 교습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3-1. 이 학술 교습의 논리는 극히 간명하다. 구약성서는 절대 다수가 고전 히브리어로 정리되어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본뜻을 읽고 싶다면 고전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이보다 더 직관적일 수 없다. 이 교습을 권면하는 일부가 심지어 “기득권이 어려운 히브리어에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온 역사”니 “누구나 공평하게 배워서 해석” 운운을 내세우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3-2.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서의 본뜻이란 문자에의 착념이며 그 완벽한 해독 따위에서 드러나지 아니하고, 집필자와 제1독자를 포함한 집필 시점의 총체적 맥락을 감안하여 경건하고 성심 있는 자세로 그 문의(文義)를 탐구할 때 드러난다. 이는 그 이치가 사실상 대다수 학자가 고전(古典)을 탐구할 때의 일과 진배없다.

3-3. 글뜻을 읽기 위해 글[文字言語] 자체를 배우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소위 “글로 인하여 글뜻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난다”라든가 “글이야말로 글뜻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글을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 글뜻을 다 알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선동과 호도(糊塗)에 다름아니다.

3-4. 3-3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집필 과정에서 그 요점보다 그 요점을 기술하기 위해 동원한 문자언어의 엄밀성에 더 치중한 일이 없다. 이는 항간의 이치에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둘째, 그 어떤 고전도 그 전승 과정에서 글과 글뜻의 이격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전승된 일이 없다. 그럴 바에는, 글을 베껴서 전승해 보아야 오해만 더 키울 것이 분명하므로 글 자체를 없애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어떤 지혜 전승들이 암송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데는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한다.)

3-5. 3-4에 의하여 3-3을 강화하면 다음과 같게 된다. 즉, 그것이 고전인 한은, 그 고전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 그 고전을 작성한 고대 언어를 모두가 정말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절실한 까닭이란 없다. 필요한 것은 고전에 통달한 현대 전문 학자들의 적절하고 체계화된 번역과 주해와 교훈일 수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그 누구도 결코 완전히는 알 수 없는 옛 성현들의 당대 말씨를 샅샅이 새기는 따위의 언어학적 재간일 리는 없다.

3-6. 3-5에 덧붙이자면, 히브리어 강습자들은 이를테면 히브리어에서 “눈[目]”이 무엇을 뜻하니, “머리”의 어원과 여러 뜻이 무엇이니, 첫번째 두번째 알파벳이 어떤 어감을 갖느니 따위를 대단히 진지하게 강의한다고 한다. 구약성서와 같이 방대하고 장황한 고전을 이런 수작으로 읽는데, 그 결말이 “창세기 1장 2절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이 숨겨져 계시” 운운 기상천외하고 자기중심적인 과잉해석으로 귀착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는지.

3-6. 구약성서를 고전으로 간주하는 한, 3-2와 3-5에 의하여, 3-1에서 소개한 (고전) 히브리어 강습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속된말로 짧게 요약하면, 그렇게까지 빡세게 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 어느 부분도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4-1. 구약성서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고전 히브리어 강습을 두둔하는 옹호론자들이 펼치는 바 또 하나의 논거란, 아무튼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정도라면 성서를 탐독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데는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4-2. 개신교 내에는 세대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대체로 신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예언과 계시들을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보다는 해독의 대상으로서의 명제로써 간주하고, 그렇게 성경을 체계화했을 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세대(들)” 개념을 현실상의 타임라인에 대입하려 하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지 창조로부터 인류 역사 최종 종료 시점까지의 모든 기간을 대략 7세대로 구분한다고 하며, 이 중 후반부 세대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서 ‘유태인(혈통 위주의 유대인 사회)의 집단 회심과 (지리적 의미에서 이스라엘로의) 회귀’를 중요하게 여긴다.

4-3. 만약 당신이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신구약 성경은 그 요점이 더 중요하며, 예언과 계시를 모든 실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묵시라고 인정하고, 어떤 세대에서 다른 어떤 세대로 역사가 이행하는 일은 없으며, 또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민족의 지구상 특정 위치로의 귀환 따위가 정말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유태인에게 그다지 각별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유태인, 즉 히브리 문화권과 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4. 개신교 내에는 또한 신사도주의라는 입장이 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각종 이적과 기사가, 대체로는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 문자적으로,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고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은 특히 방언과 예언이라는 두 가지의 특별한 신적 능력(“은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간구하는데, 여기서의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지구상 특정 언어문화권에서 유효하게 통용 가능한 실제 외국어를 의미한다.

4-5. 만약 당신이 신사도주의자가 아니라면, 그 말인즉 만약 당신이 사도행전상의 이적과 기사는 교회 공동체 건설 최초 단계에서 특수하게 발생한 것이며, 오늘날의 일상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방언이며 예언 등의 은사에 관심을 가질 각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들은 방언과 예언, 특히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의 방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다.

4-6. 4-3과 4-5를 염두에 두고 4-1의 논거에서 말하는 바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재고하라. 이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관점인가? 그것은 모든 교회 공동체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단지 신학적 난제를 규명하는 차원의 “새로운” 관점인가, 아니면 교회 전체가 동의하기는 어려운 특정 입장들의 관심에 복무하여 그 입장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사되고 편집된 일련의 이해 체계로서의 관점일 가능성이 있는가?

4-7. 4-6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이다. 요컨대 히브리어를 배운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회심이나 성경 언어 방언 등에 대한 엄한 관심과 상관 관계가 없기 어렵다는 말이다.


5-1. 마지막으로 내가 믿는 바를 조금 고백하고 끝맺고자 한다. 이는 히브리어 공부를 권하는 이들의 성심을 야멸차게 모독하지 않기 위함이다.

5-2. 만일 하나님이 고전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그는 고전 히브리어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로도, 한국말로도, 에스페란토어로도, 그 어떤 의미 기호 전달 체계로도 말씀하실 수 있다. 애초에 신이신 하나님께서 동물인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가해하며 초월적인 사건인 관계로, 그 사건이 일어나는 한, 그때의 수단이며 매체가 무엇이냐 따위의 문제는 철저히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이 되는 까닭이다.

5-3. 만일 구약성서가 고전 히브리어로 전승되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신적 질서와 계획 안에서 완전히 필연적으로 혹은 완전히 우연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비유컨대, 이는 인간이 어떤 프로그램을 구현함에 있어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는가와 그 이치가 꼭 같다고 할 수 있다.

5-4. 하나님이 성서를 주셨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읽으라고 주셨을 턱은 없는 까닭에, 하나님은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각자가 이해해야 할 수준까지 성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일체의 여건과 방안을 이미 강구하여 주셨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지라도.

5-5. 만약 당신이 5-2, 5-3, 5-4에 찬동할 수 있다면, 나뿐 아니라 당신 역시, 구약성서의 은혜와 신비를 내 삶에서 깨달아 알기 위해 특별히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는지의 근심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999-1. 이 글은 사실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지만, 김우현 PD와 그 주변 “동역자”들의 성지순례니 원어성경이니 히브리어 공부니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누구든지 또한 좀더 많이들 찾아 읽으시길 바라는 바다.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정말이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심지어 일상에서 쓸모도 거의 없다. 차라리 수능 제2외국어에 등재돼 있는 아랍어 같은 걸 배우는 것이, 소위 이스라엘 회복 선교라는 것에는 더 도움이 된다.
999-2. "'니크다'라는 이름의 모음 기호는 존재하고 있으나 이 기호는 일반적인 경우 생략되며, 외래어 표기나 성서 등의 중요한 글에서 매우 정확히 표기할 필요가 있는 경우나, 히브리어 초급 교과서에서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경우 정도에나 쓰인다."
999-3. 근거 없는 사설이라서 본문에는 안 적었지만, 내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오늘날 히브리어란 사실상 WASP-이스라엘 군사패권의 지지자들을 집결하는 시오니즘의 국제언어로 복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비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칭 남은 자들이라는 비주류 유사신학 강도사들이 유튜브 영상 찍을 때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군이 저 무시무시한 대테러 대량 살상 무기들 이름 지을 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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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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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떻게 살고 있느냐면 주중에는 매일 오전에 어느 유학원에 출근해서 홈페이지 관리하는 일을 하고, 끝나고 돌아와서는 조금 쉰 다음에 Lucy Liu라는 식당의 디시워셔로 일한다. 이 식당의 근무표(roster)가 좀 대중이 없어서 일요일 저녁에도 근무가 거의 항상 들어가는데, 그러면 나는 일요일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무도 시키지 않은 RWBY Chibi 2기 자막을 치고 박스힐 한빛교회 성가대를 한 다음 식당으로 가 일을 하고 콜라와 잔반을 좀 챙겨서 집에 가는 것이다. 보통 1주일에 4~5일 디시워셔 일이 있는데, 그런 날은 보통 아침 8시~9시에 일어나고 밤 1시~2시에 잔다.

디시워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식기들이 다양하고 무겁고 세척기의 물이 뜨겁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다.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몸이 힘들 때면 내 머릿속에서는 뭔가 랜덤한 게 재생이 된다. 보통은 옛날에 봤던 재미난 것들이고, 그래서 그걸로 버틴다. 아무튼 그래서 지지난 주쯤, 아마도 Lucy Liu 출근 19일차인가 18일차에 식당에 출근해서 일을 좀 하다가 살짝 한가해질 때쯤 원래 매일 해야 하는 위층 창고 정리를 하려고 배운 대로 걸레통에 물 받고 세제 풀고 몽당빗자루를 쥐고 계단을 올라 아무도 없는 식자재 창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쓸고 있었는데, 뭔가가 떠올랐고, 몸이 그걸 입 밖으로 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몸이 그걸 한 박자도 쉬지 않고 외는 동안 머리는 벙쪘다. 너 뭐하냐? 지금 요한복음 1장 14절을 암송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하필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떠올려? 청소하러 왔으면 청소에나 집중할 것이지... 그러다가 문득 머리가 그 말씀을 잠깐 다시 생각해 본 모양이다. 그때는 움직이던 손발도 잠시 1초 정도 멈추고 허공을 보아야 했다. 이 말씀에 대해 내가 그 순간 묵상한, 여태껏 와서 처음으로 깨달은 바는 이것이다.

와 그거 진짜 피곤하셨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다니? 태초부터 “말씀”이셨던 분이 어느 날부터 육신을 입고 살게 되면 세상에 그 얼마나 피곤할까? 생전 느낄 필요가 없었던 배고픔, 지침, 더위와 추위, 똥오줌 마려움과 더러움을 느끼셨어야 할 테고 그걸 또 지극히 평범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아버지 따라서 목수일 하고, 언제 독립할 거냐고 잔소리 듣다가, 광야에 나가서 40일 금식을 하고, 매일같이 언덕바치며 고깃배 갑판에서 목청 높여 설교하고, 병자들 고치고, 한입거리도 안 되는 하찮은 율법쟁이들과 굳이 싸우고, 허구헌날 누가 크네 작네 다투기 바쁜 제자들 붙잡고 먹이고 재우며 비유 풀어 가르치고,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신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새벽마다 일어나 따로 기도까지 하셔야 했을 것 같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면 말이다. 불교가 말하는 도일체 고액이란 사실은 인간성에 육체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공통 진리에 대한 서술이며 따라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참고가 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오밤중 회당에서의 날치기 구형은, 다음날 아침 빌라도 앞에서의 선고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끝내 못박혀 매달리는 순간은, 아, 도대체 얼마나 끔찍하게 피곤한 일이었을까.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부를 수 있는 분이 “내 마음이 피곤하여 죽게 되었”다고 애걸해야 하는 그런 피곤함은, 꽤 피곤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피곤을, 죽음을, 육체성 일체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감당하시고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는 신앙이 참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실로 인간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피곤하고 지치며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실존의 양태이지, 그 무슨 미신적 신앙으로 도망하여 잊거나 피상적 일상을 이용해 외면할 특이상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피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 필요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느라 느끼는 감정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 이성에게 살고 병들고 죽는 일은 그저 다 피곤한 일이다. 이성은 불멸할 것만 같은데 이 빌어먹을 육체 때문에 자야 하고 아파야 하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니다. 한데 불교는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 탈자아의 승리를 말하고, 힌두교는 엉뚱하게 인간 관점에서 설계된 계급을 내세우며, 이슬람은 오직 알라의 위대함에만 의탁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어느 것도 아닌, 오히려 인간성의 기초로서의 육체성을 완전히 수용하는 부활의 믿음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오직 신이고 이성(logos)이기만 하신 그분께서 우리처럼 낮고 힘들고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셔서, 정말로 우리처럼 돌아다니고 일하고 고생하고 죽으셨으며, 그것으로 모든 율법 조항을 갈음해 버리시고,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첫 번째 부활자가 되어 주셨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자 요한이 ‘도대체 내가 누구와 뭘 하며 뭘 본 것인가’를 한평생 곱씹은 끝에 내려 준 답이었으며, 알고 보니 그분의 성육신(incarnation)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기쁜 소식,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 기상천외한 은혜였던 것이다.

말씀이 굳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피곤하게 거하여 주셨으매 우리가 그 영광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더라.

내가 디시워셔 잡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힘든 만큼에 대한 보수가 적정해서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딱 그 수준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쨌든 일이 끝난다는 점이 가장 좋다. 지금껏 해도 해도 안 끝나는 가늘고 긴 “트랙”들의 연쇄에 치여 살아 와서 그런지 몰라도, 하다 보면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살아야 말이지’ 싶어진다. 접시가 막 밀려들어오는 걸 보고 있으면 아 올 게 왔구나 하고 막막해지면서도, 시계 볼 시간에 미친 듯이 물 뿌려서 팔레트에 올리고 세척기 돌려서 잽싸게 닦아 제자리에 갖다놓다 보면 결국은 모두 다 끝난다. 적어도, 아무도 안 들어오는 사이트에 아무도 안 누르는 배너를 유치하겠답시고 영업을 빙자한 구걸 전화와 메일을 돌리며 “앉아서 돈 버는” 헛꿈을 안 깨게 도와주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싶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까. 한가할 때 잠깐 광야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사역 정리 좀 하고, 어쨌든 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좀 풀릴 테니까 다시 공생애 사역 잘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유월절이 되어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움직이는 낌새를 보며 아, 바빠지겠구나, 이제 어떡하지, 하던 대로 하면 되나 하는 막막함을 느끼고, 십자가 위의 육체가 사망하는 시점에 와서는 아, 이 일이 드디어 끝났네,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러신 것일까.

그러셨을 것 같다. 그건 무슨 어마어마하게 신성하고 진중하며 엄숙한 장면들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육신이 되신 말씀이 — 육신을 입고 살며 어딘가에 쪼그려 앉아 빗자루질을 하는 우리처럼 — 고생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그런 차원의 장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말씀이신 그분이 ‘죽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었을 것이며, 그전까지 디시워셔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머릿속에 재생해본 적이 없는 그 말씀을 내 머리는, 내 영혼은 왜 하필 그 자리에서 토해내야 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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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전혀 안) 사소한 계기가 있어서 문득 깨닫는 것 하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그것은 어쩌면, 이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을 떠나는 가장 큰 규모의 휴가, 그러니까 월차(月次)도 연차(年次)도 못 따라오는 엄청난 기간의 명차(평생에 한 번꼴의) 휴가인 것은 아닐까?

출애굽기의 모세와 그 백성들은 구원 언약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받는다. 그들은 무려 430여 년에 걸쳐 누적된 피로에 지쳐 있었고, 바캉스(?) 장소는 방금 막 가나안으로 정해졌으며, 그 땅 소유자의 초대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찾아가서, 휴가를 쓰겠다는 형식의 요구를 한다. 그러니 돌아오는 답이 알기 쉽게 의미심장하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출5:17)

일하기 싫으니까 제사를 드리러 간다? “히브리 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그들은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그 섭리 안에서의 복락과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므로, 적어도 그들은, 일하다 죽으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일하다 죽기를 원하는 인간이 있기는 한가? ‘지금이야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휴가도 제대로 못 쓰고 있지만, 기회만 되면 언제고 때려치우고 남은 휴가 몽땅 털어서 떠나버리겠다’ 벼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기 위해 산다. 야훼의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 세계관을, 나는 지지하는 바다.

그런 의미에서 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더 생각해 보자. 쉬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휴가를 내기 위해서는, 앞의 출애굽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피곤해야 하고, 쉼으로의 초대가 필요하며, 갈 곳이 있어야 한다. 피곤하지 않은 쉼이란 그냥 노는 것이고, 갈 곳 없는 휴가란 방황이며, 허가나 권한 없는 휴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초대가 필요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20:8-11)

그런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몸의 부활과 영생과 구원과 천국으로의 초대 티켓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생 힘써 일하다 어느 날 죽는 것이, 그것 그대로 휴가가 된다. 피곤한 삶이 있고, 복음의 초대가 있고,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직속상관께서 한 번 쓰라고 하시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일평생에 한 번뿐인 휴가로서 성립한다.

사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직까지도 2개월에 한 번씩은 죽음이 두려워서 잠을 설치는 새벽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렇다. 사도신경에서 유일하게 자신 없는 대목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부분이니까. 난 내가 관에 들어가 누워 영겁을 보낼 생각만 하면 머리털이 죄다 곤두선다. 이쯤 되면 유년기의 심리적 외상이 의심될 법도 한데, 원인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전부터 그렇게도 가고 싶던 어떤 행사가 있어 갖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그 입장 티켓을 확보하니까 딱 그제서야 “아 이 기간에 중요하게 할 일 있다” 깨닫고 주저앉고 보니, 어쩐지 이런 생각이 뒤를 잇는다. 이번이야 이 일이 있으니 못 가지만, 나 천당 가는 그날에는 제아무리 모진 세상이라도 “일해라 절해라” 하지 못하고 별수없이 날 주님 곁으로 보내주겠지? 그땐 정말 다음주 스케줄이고 월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서 누리면 되겠지?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이론적으로나마, 죽음이 덜 무서워지는 밤이다. 우선은 오늘 밤새 해 주기로 한 일감을 좀 처리하겠다. 이 한 세상 살면서는 정말 빡세게 주님 나라 일을 하고, 휴가는 잘 아껴놨다가, 명차휴가로 한번에 몰아 딱 쓰고, 깔끔하게 집에 가야겠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빌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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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개

2015.06.29 09:44

1
세상은 기독교인을 거절할 수 있지만, 기독교인은 세상을 거절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와 순교란 결국 “이웃”들과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명명백백 불문가지의 죄악이다.

3
부드럽고 알록달록하고 달콤한 감각만이 ‘사랑’을 기표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죄악의 초기 특징이기도 하다.

4
적어도 현 시점에서, 동성 커플의 결혼이란 단지 전체 인구 중 극소수의 경우이며, 그 합법화에 따르는 추가적 손실/위험은 없다. 추가적 이득으로는 결혼 관계자들의 행복 정도가 있다.



이하는 그냥 누군가의 참고용 “의견”. 남의 의견 캡쳐해 갖다쓰는것 개인적으로 싫어하는데, 전적 동의가 아니라는 의미(좀 특이하지만)에서 캡쳐로 가져와 봄. “그때 내가 왜 무지개 프사를 (안) 걸었지?” 하고 나중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좀더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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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범죄

2015.04.06 23:15

1. 죄라는 말을 한자로 罪라고 쓴다. 사람이 안될[非] 짓을 해서 포박[罒]에 잡힌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옛날에 辠라고 썼던 것을 사연이 있어 바꿔 쓴 것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중국 역사상의 황제[皇]가 된 진시황이, 그 글자 모양이 흡사 자신만의 1인칭 재귀대명사가 된 皇과 모양이 너무 흡사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대신 쓰게 한 글자가 바로 罪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크나큰 불행을 초래했던, 그야말로 죄받을 짓을 하고 산 인간 진시황 덕에, 우리는 스스로[自] 쓴맛[辛]을 보러 들어간다는 의미의 글자 辠를 거의 쓰지 않게 됐다.


2. 스스로 쓴맛을 보러 들어간다? 사실 이 파자는 내가 한 것인데, 그 글자가 가진 뜻이 너무도 명백하고 쉽고도 심오한 덕이다. 죄를 지어 본 사람은 안다.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임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파자에 관련된 것뿐이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아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리라는 걸 그때의 나는 무슨 넋빠진 생각에 짐작을 못 했지?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잡하고 음흉하고 사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마음은 나쁜 짓을 해서 오라를 받기만 하면 바로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다. 그 죄의식(辠意識)은, 오직, 자기가 열심히 핥던 그 맛이 독극물의 쓴맛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이다.


3. 진시황 이래로, 드디어 오늘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에게 죄란 한 번도 辠였던 적이 없고 그저 정도의 차이만 더욱 맹렬히 편차를 보이는 罪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구체적인 예시를 대려 해도 차마 잔혹하여 뭘 댈 수가 없다. 유치원 선생이 애를 바늘로 찔렀다더라, 아파트 주민이 아파트 경비를 드잡이했다더라, 연예인들이 카메라 뒤에서 서로 반말을 주고받으며 싸웠다더라, 거진 300명 가까이가 영해상에서 수장되는 꼴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더라, 무슨 SNS에서 바른말 잘 하던 아무개가 헛소리를 굽히지 않는다더라… 누군가가 안될 짓을 저지르고, 누군가가 그걸 목격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 자를 포박해 데려오고, 수많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포박된 자를 네거리 광장에 무릎 꿇려 놓고 돌을 던진다. 오직 이 육체적이고 제도적인 순환만이 있을 뿐, 아무도 뉘우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죄에 깔린 쓴맛의 맹독성에 관심이 없다.


4. '우리 안의 XX' 어쩌구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밑에서 또 굳이 논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논하자면, 본전도 못 찾을 소리 씨부리지 말라고 해라.)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복잡하면 얼마나 복잡하다고, 도대체 지금 오늘 이 세상은 뭔 놈의 죄가 이렇게 많고 죄인이 이렇게도 많은가? 부연하자면, 그렇게도 많은 놈과 많은 일을 죄인과 범죄로 판결해 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갈수록 지옥도 일변인가? 왜긴 왜겠어, "범죄"가 너무 많은 바람에 죄가 죄로 발견되지 않아서지.


5. 범죄는 많을지 모르되 죄는 하나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옥편의 뜻풀이가 마침 편을 들어주기에 한번 인용해 본다. 죄란: ④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命令)을 감수(甘受)하지 않는 인간(人間)의 행위(行爲). 조금 겸연쩍을 정도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명쾌하게 요약한 이 풀이는 그 ‘인간의 행위’의 명목(名目)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뭔지, 형사법이 표현하는 죄명이 뭔지가 하나님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오직 거역과 감수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지키면 장차 선행의 보응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형벌의 쓴맛이 너 자신에게 돌아올 줄을 알아라. 민수기 32장 23절에는 "죄가 당신들을 기어코 찾아낸다"라는 표현이 있다. 죄에 쫓겨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죄의 속성에 대한 절묘한 서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죄인'이니 '범죄'니 하는 것에 응당 따라붙어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이지, 지금의 이른바 '조리돌림'이, '구알티'가, '신상털이' 같은 것이 무슨 죄를 주기나 준다는 말인지, 나는 도대체 알지 못하겠다.


6. 영어에는 sin과 crime의 두 단어가 있다. 우리말에서 전자는 흔히 '죄'로 번역되고 후자는 주로 '범죄'로 번역된다. 사전으로만 찾아 보면 둘 다 의미가 거의 비슷하므로 헷갈리기 쉬울까 봐 편집자들이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nota bene를 달아놓기를, sin은 종교적/도덕적인 죄를, crime은 형사법상의 위법 행위를 주로 의미한단다. 이 구별, 이 사회과학적으로 실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지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개념적 구분이, 오늘의 결국에 와서는 좀 우습고 처량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요컨대 지금은 sin이 crime으로 둔갑하는데, 아주, 아주, 아주 많은 경우에 그렇고, 갈수록 더 자주 그렇고, 날이면 날마다 더 노골적으로 그런 세상이다 이 말이다. 사람은 오로지 그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처벌받고 배상 책임을 진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말단 노동자 엎드려뻗쳐를 시키든 파업한 새끼들 혼구녕을 내 주든 원인 규명하고 선체 인양하라는 유가족의 요구에 대해서든 적당히 일금을 치러 주면 그만이다! 크으 앞으로 한 세기쯤 지나면 자기가 비고의적으로 저지른 죄의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보석금 보험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와 상상해 보니 좋나좋군? 그 날이 오면 교도소에 출입하는 종교인들은 다들 그 보험만 특별히 판매하는 라이센스를 얻어 다닐 성싶다!


7.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안의 XX'론 일체가 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래서 본전도 못 뽑을 이야기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XX의 자리에 "일베"라느니 "파시즘"이라느니 하는 것을 넣어 쓰는 모양이니, 아마도 그 XX에는 죄목 내지 그 죄목으로 불리는 신분의 호칭이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뭐? 우리 모두에게 그 죄목의 혐의가 있으니 대마불사론을 적용하여 그냥 crime의 범주에서 빼자는 건가? 그게 "빼박캔트"의 sin인데? 뉘우침이 필요하고 참회가 요구되고 그 쓴맛을 스스로 다 맛보아 먹어삼키고 앓고 낫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절대 외부적일 수 없고 절대 물리적일 수 없는 죗값 치르기가 반드시 요구되는 허물이 그 XX인데, 그걸 그저 사회 구성원 일반이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사안이란 이유만으로 마냥 용인하거나 이해해 주자 뭐 그런 건가? 야훼 하나님은 우리더러 죄를 여하간에 이해라도 해 보라고 하신 적이 있나? 부정 타니까 멀리 떨어져서 짱돌을 던져 으깨 죽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8. 사실 현대의 가장 큰 사회악 중 하나는 회개 개념을 완전히 고사시켰다는 데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거듭나는 방편들 중 반드시 필요한 내면적 방편으로서의 회개를 아주 세속과 동떨어진 신선 놀음으로 만들어놓은 감이 있다. 회개? 너 지금 나 보고 회개라고 했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고 나왔더니 이젠 뭐? 날더러 회개를 하라고? 왜, 그 다음에는 뭐 간디 비슷한 게 되어서 아프리카 애들한테 국수라도 나눠주라고 하지? 성인군자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악착같이 벌어먹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한 세상 내딴에 열심히 살다 이 모양 이 꼴로 갈 거니까! 내 인생에 뭐 보태줄 거 아니면 저리 꺼져!


9. crime은 sin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罪는 포박에 묶이는 것이기 이전에 辠, 스스로 그 죗값의 쓴맛을 감당하는 것이다. Criminal이 그렇게 많고 악성 범죄는 끊이지 않지만, 갈수록 자기를 'sinner'로 신앙 고백하는 자는 찾기 어렵고, 정말로 그 쓴맛을 뉘우치는 사람 역시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토 트위터를 자중하고 있는 최규석 작가님 정도나 보일 뿐이다.) 범죄는 많은데 죄가 없고, 속죄는 더 없고, '죄'라는 단어와 개념의 사용 빈도는 더더욱 하락일로를 달린다. 다들 매일 똥 싸고 뒤를 안 닦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라면 밥 먹듯이 저지르는 후회와 탄식의 원흉으로서의 범죄를 처치하고 청산할 생각을 어찌 이리도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그러면서 어쩜 또 그렇게 옆 사람 인생 근처에서 구린내 난다고 면박은 그리도 잘들 주고받는지. 근데 왜 세상이 이렇게 미쳐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들은 또 어쩜 그리들 쉽게 하는지.




0.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가 네이버 사전 한 번 보고 정말 간만에 삘받아서 마구 써내려간 글이다. 몇 번 윤독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세밀화에 관한 것일 뿐, 줄거리 자체는 거의 안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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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25절

(개역한글)




‘sane’이라는 형용사에 꽂힌 지는 좀 오래되었다. 이 성구는, 다른 인상적인 말씀들이 그렇듯, 참되고 정신차린 말이라는 대단히 인상적이고 탁월한 표현이 그 자체로 갖는 힘 덕분에, 그 앞뒤의 “미치다” 같은 자극적 단어를 잊게 한다. 헬라어나 라틴어 원문들은 아무래도 sober(술에 취하지 않은, 깬)의 어감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데, 유독 메시지 성경만큼은 sane이라는 유의어를 채택했고, 그 덕분에 insane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의 반대어라는 사실을 내게 확인해 주었다. sane을 사전에서 찾아 그 예문들을 읽어 보면, 유진 피터슨의 단어 선택이 ‘분별 있고’, ‘온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정신이 또렷한, 미치지 않은, 사상이나 행동이 온건한.

sane, 맨정신일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적어도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일은 대낮에 햇빛 보는 것처럼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긴 것은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여 나타난 예수님을 목도(目睹)하였다. 그것은 그가 기어코 유대인들, 그의 동족들, 온 누리 열방의 만민들에서 바리새 강경파 칠삭둥이 같은 자기에게까지 누구에게나 참된 메시아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눈을 비비고 다시 찬찬히 똑바로 읽어 보면, 지금껏 예언자들과 모세의 글에 기록된 바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귀 따갑게 예언되어 왔던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임무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시하여 검거 추포하고 다니는 것에서,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입증하는 것으로 전환되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귀결은 그저 옳고 바르며 떳떳하기만 한 것이다.
실제 상황은, 바울 사도가 미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버니게, 벨릭스(“아닌데요. 전 지금 지금 맨정신으로 맞는 말만 말씀드렸습니다.”), 아그립바(“임금님은 선지자는 믿으시죠? 믿으시잖아요.”)와 그를 핍박하고 고소 고발하는 동족 유대인들이 미친 것이었다. 그러니 형사법정 한가운데에서,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로마 황제를 직접 보겠다고 상소한 사람이, 말실수나 헛소리는 고사하고 이렇게까지 태연자약할 수 있는 것이다. “제 말이 짧았는지 길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전 임금님이나 여러분이 저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은팔찌까지 따라 차실 필요는 없구요.” 그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폐정을 하고 일어나 나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말, ‘참되고’ ‘정신차린’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이 미친 건 아닌데.” “일단 형사사건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근데 왜 괜히 로마 시민이랍시고 전하께 상소를 올리고 그러는지… 대충 훈방 조치 받고 끝내질 않구.”


그리고 지금은,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시대다.


수십 명 제복 차림의 남녀가 “고객님”을 “사랑”한다고 웃으며 외치는 시대. “저는 열정과 패기와 비전이 있는 인재입니다” 운운하는 몇 겹의 모순으로 포장된 자기서술이 가능한 시대. “avc=mc=p일 때 최대 이윤이 달성된다” 따위의 유사-물리학이 강의되고 암기되고 복사되는 시대. 리비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마케팅”이, to부정사의 이러저러한 용법이, 후삼국시대가 원래부터 거기 있어왔다는 양 전제되는 가정들, 그리고 실제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전제를 가정하여 성립되는 명제들. 토대가 없는, 토대와의 결별을 숭배하는 아스팔트 문명. 카지노 타운 문화. 그냥 그렇게 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라는 말을 듣고 그냥 아멘 하는, 그래서 사실은 아무것도 믿는 바 없는 아멘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고도 우리는 금융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못하고 있으며, 압박 면접 같은 것이 극소수의 경우에만 유효한 인사 선발 방식임이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는데도 너도나도 그것을 따라하고 있고, 우리는 마치 이 모든 insanity에 발맞춰야 한다는 듯 매일같이 서점에 열다섯 겹으로 쌓이는 “주목받는 신간”의 제목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 그 책을 열심히 구입)한다. 주목받는 신간이라고? 장난하냐? 그럼 열다섯 겹으로 쌓아서 복도 한가운데에 거추장스럽게 늘어놓는 책이 주목받지 않고 배겨?


맨정신을 되찾자. 맨정신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그리고 충분히 경악(驚愕)하시라.


주목받는 신간이 사실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주목을 창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박 면접이란 참말이지 면접이고 뭐고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도저히 주고받을 만한 대화가 못 된다는 것을, avc니 mc니 하는 용어가 괜히 헷갈려서 그렇지 사실은 파는 만큼 본전을 뽑아야 장사가 된다는 것쯤 동네 점빵 할머니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중 누구도 “고객”이 아니며 저들 중 누구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좀 까발릴 필요가 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그 다음에는 주변에,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에. 맨정신으로 세상을 보면 정말 끔찍하다. 그곳은 거짓말이 횡행하고 자기기만이 사방에 뒹굴며 허위의식이 온 천지에 가득한 곳이다. 당신은 이 거짓을 견디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대답해 볼까? 당신이 이 지구상의 거짓말과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을 감내하거나 즐기거나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스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다, “니(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희)를 미치게 한다!”


필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맨정신이다. 용어가 아니라 건전함이다. 공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조리와 분별이다. “어떻게”에 대한 맹목적 천착이 아니라, “왜”를 끊임없이 재점검하는 참되고 정신차린 말들이다. 그 결과는 어떤 믿음일 수 있겠지만, 맨정신이 된 사람들 중 누구도 믿으시면 아멘 하라는 말을 듣고 그냥 아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참된 말도 아니고, 정신차린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당신이 sane하다면 당신의 말을 듣고 누군가는 벌떡 일어나서 당신에게 미쳤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야 할 터이다. 당신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정말 못 들어주겠군요, 어떻게 그런 소릴 감히 이런 자리에서, 당장 나가세요. 왜냐고? 이 세상은 정말이지 insane하기 때문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라. 눈을 감고, 잠시 당신의 머릿속의 그 많은 학문들이 주는 생각을 비우고, 다시 눈을 떠라. 아주 새삼스럽게, 목전의 세계를 다시 목격(目擊)하라. 그리고 ‘맨정신으로’ 당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 무엇인지 증언하기 시작하라.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놀라고 분개할 것이다.




맨정신 인터뷰 프로젝트

맨정신 인터뷰 프로젝트

(codename sane_interview, project initialized by yupto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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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21:26

1. 문의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방금 전에 브랜드 연필 2통 구입한 김어진입니다.

결제 과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넣었고 계좌이체를 마쳤는데(21시 06분경 농협), 확인 메일이 오질 않네요.

주문이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이메일 주소에 오타가 나 있다면 yuptogun@gmail.com 으로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와웸에 6년 정도밖에 안 있어 봤지만 CMK쪽에 상품 결제 관련 질문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CMK가 브랜드를 운운하리라는 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말해서, 이 방향성에 대해 마음을 사기가 어렵네요. 우리는 단순히 티셔츠나 기도책자, 콜드컵 같은 걸 사고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딘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마음을 사는" 사역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너무 고리타분한가요? 휴학 중 학원 일을 하게 되면서 7개월째 캠모 캠워를 안 가서 그런 걸까요? 이번 MC를 참석했더라면 충분히 마음을 사고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우리가 말해 왔던 과격한 헌신인가요? 한 발 물러나서 보자니 잘 모르겠습니다.


2. 답변

김어진님 안녕하세요.  

예수전도단 한국대학사역입니다.   


주문하신 내역은 조회 결과 주문 처리(입금완료) 되었습니다. 입력하신 Gmail의 경우 주문 확인 메일이 스펨함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펨함에도 없는 경우엔 다시 답변주시면 저희도 이니시스 쪽에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전문 쇼핑몰이 아니고, 현재 간사님들이 MC 마친 이후 잠깐의 숨고르기 시간과 전도여행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배송드릴 예정입니다.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주시길, 양해를 구합니다^^ 

 

배송비까지 결제까지 잘 되신거 확인되면 바로 월요일에 배송하겠습니다. 

 

한국대학사역과 계속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필로 사랑을 쓰윽쓰윽 적어내려 갈때마다 주님과 더 깊은 사랑이 쌓여가길, 부족하지만 기도할께요.  

  

그리고 추가로 의견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짧지만 제 마음을 나눌께요. (공식적인 CMK의 답변이 아닌 것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저도 짧은 시간 이 몸에 있었네요. 04학번 학부때부터 간사로 섬긴지 만 5년의 시간이 지났네요^^ 

 

김어진 님의 질문이, CMK 브랜드를 런칭 준비를 할 때에 저의 마음과 비슷한거 같아요. '브랜드'는 단순히 무언가를 판매하는 것 이상에 '네임 벨류'를 부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겨지게 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에게 더 많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몸을 위한 것을 뛰어 넘어, 우리 몸 밖과도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 몸에 있는 분들에게 (복음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이런 작은 물건으로도, 로고로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고리타분하지 않구요, 충분히 그런 갈등을 느낄 수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더 많은 채널과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더 느낄 수 있도록 CMK도 노력하겠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셨는지요. 완벽하지는 않겠죠? ^^ 더 궁금한거 있다면 연락주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3. 수긍은 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허허롭다고 느낀다.

연필은 예쁘고 좋다. 잘 샀다. 여전히 이 몸에 있을 테고 의탁할 테지만, 글쎄 나는 YWAM CMK라는 네임을 자랑스러워하게 될까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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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삿17:6, 21:25)


나는 이 말씀의 ‘왕이 없었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옹립되지 않았었다”라고 읽지 않는다. 이것은 사사기라는 히브리 경전의 한가운데와 맨 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가장 극적으로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요약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왕이 없었다’는 말은 “왕정(王政)”, 나아가서 정체(政體, regime)가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뒤의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라는 서술이 상호 호응이 된다. 왕이 있든 없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임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 이상을 함축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개념과 사사기의 ‘왕이 없어 저마다 자기 뜻대로 하더라’ 관점은 서로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상적인 왕정은, 아니 이상적인 정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원망(願望)의 응축 및 실현일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에 따라 regime의 종류가 나뉘는 것일 테다. 왕정에서는 그것이 ‘성군’으로 응축되어 ‘태평성대’로 실현될 것이 기대되며, 일반 민주공화정 사회에서는 대의제, 삼권의 분립 및 적극적 활약을 통해서 각 사안별로 수시로 응축 및 실현될 것이 기대된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저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 대통령님이 왕과 같은 자리에 있는 셈이다” 운운하는 유치한 말씀 해석이 한탄스러울 뿐,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왕”을 모셔 본 적이 없거나, 진정으로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는 둘 다일 것이다. 그때에 이 반도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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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원하는 게 삭제라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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