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께서 로투스 방나점을 지나가시다가
삶이 개같고 짜치면 짜칠수록 예수님의 사연은 더 뜻밖의 방식으로 덜컥 이해되어 버리곤 한다. "이게? 이거라고?" 싶은 충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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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태국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방콕 공항 근처에 '방나'라 부르는 '트랏'이 있고 그 지역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던 어떤 대형마트가 있어서, 거기에 'ESL 사이니지'를 100대쯤 설치하러 갔다 왔다.
ESL이라고 하면 엄밀히는 '전자식 진열대 가격표'를 뜻하지만, 내 회사의 "파트너"(ㅋㅋ^^ㅋㅋ)인 S모 회사가 말하는 "ESL"이란 오로지 '자기네 시스템에 등록된 상품들의 최신 정보를 동적으로 표출 가능한 단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회사의 '사이니지'는 그런 기능 빼고 모든 것을 구현 중이었다 — 왜 그런 기능을 넣겠는가? 사이니지란 '디지털 광고판'이고, 사용자가 업로드한 영상이나 사진만 커다란 화면에 보여주면 끝인 상품인데, 몇십 인치짜리 화면을 매대에 갖다 붙일 이유는 무엇이며, SaaS 전략으로 가도 돈이 될까 말까인 마당에 특정 회사에 구태여 "락인"될 이유는 또 뭐냔 말이지.
그러나 9월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회사는 그걸 할 수 있다고 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그 '슈퍼갑' 대형마트는 S사의 비딩을 낙찰하자마자 말을 바꿔 "너네 LCD가 ESL도 되는 거지? 안되면 (이미 ESL 기능이 다 돼 있는, 다만 훨씬 더 비싼) 타사제품 쓸거야"하고는 사진 몇 장 던져놓고 나갔고, S사는 그 사진을 우리에게 던지며 "되는 거지?" 하고 화상회의를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 사진들 속의 구현사례는 내가 최근에 작업했던 사이니지 부가기능 '템플릿'과 매우 흡사했으며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가 기술적 책임자가 됐다.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S사 상품을 받아와야 했으며 받아온 상품 정보를 이미지로 '구울' 수 있어야 했으며 그 이미지들의 '레이아웃'을 사용자가 임의 편집할 수 있어야 했고 그 이미지나 상품이 바뀔 때마다 "연결"된 사이니지 단말기들이 알아서 '새로고침'돼야 했으니, 어느 단말기가 어느 상품과 연결되는지를 어떻게 정의할지부터 정의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구현체를 VPN과 방화벽과 로드밸런서 뒤에 있는 폐쇄망 서버에 Docker로 설치해야 했다. 이 단락에 언급된 사양의 거의 대부분을 내가 전부 다 했다.
그때부터 석달간 '외노자' 신분인 날 포함한 개발 실무진 3명이 얼마나 강도 높게 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주말 특근을 했을지는 여러분이 능히 짐작하실 수 있는 바다. 한 명은 S사와의 연동만 맡아서 했고 한 명은 앱에 관한 모든 걸 책임졌고 나는 "프로덕트 템플릿"부터 "레이아웃 디자이너"며 docker 이미지 빌드 등등 나머지를 다 했다. 나날이 우리 3명의 점심 식사 대화는 험악해져 갔다. S사와의 연동을 맡고 있던 S라는 친구는 미얀마 출신 외노자였고, 애초에 사이니지 프로젝트를 그간 쭉 담당해 왔어서, 이 일을 꾹 참고 해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고, 그래서인지 주가 바뀌고 달이 바뀌면서 더 험악한 비속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걸 받아주며 중간에 "통역"을 맡았던 P는 처음 입사할 때는 분명 리액트네이티브 개발자로 왔던 것이 이제는 "앱장님", "디바이스 가이"가 돼 있었다. 그것만도 짜증스러운데 자기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던 S 때문에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나는 나대로 이 회사에 처음 올 때 분명 다른 기존 상품 담당자로 들어왔었고, 그래서 사이니지 프로젝트는 곁에서 도와 주는 정도였는데, 그 도움 중 하나였던 템플릿이 갑자기 너무너무 중요한 기능이 되어 버려, 정작 그 기존 상품에 정성을 못 쓰는 것이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표라는 새끼는 되도 않는 SQL 전수조사며 "상대경로 변환" 따위로 놀고 자빠졌었고 테크리드라는 새끼는 jira 일감에 ======= ←이런식으로 줄긋는 일이며 테이블 varchar 길이 통일하기 따위에 넋을 빼고 있었지. 그 얘기는 그냥 하지 말자.)
아무튼 그래서 10월 29일쯤에 S사 대상 중간점검 데모를 "무사히"(ㅋㅋ^^ㅋㅋ) 마치고 11월 24일 월요일에 출국을 8시간 남겨놓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거 안 되네요" "저거 빠졌네요" "미안한데 간단한 거 하나만 합시다;;" 따위 꾸역꾸역 울부짖는 에미애비 없는 소리에 장단 맞춰 드리며 준비 아닌 준비를 갖춰 정녕코 태국으로 갔다. 첫날은 막혀 있는 네트워크를 놓고 하루종일 "왜 뭐가 안 되지? 네트워크가 막혀 있나?" 하다가 네트워크 막혔음을 확인하고 퇴근한 덕에 차라리 제일 한가했다. 네트워크가 뚫린 둘째날부터는, 대표라는 새끼와 테크리드라는 새끼가 갖고 놀 "DB툴" 백도어부터 깔아서 (이게 내 출장 기간 동안 가장 칭찬받은 일이었다. 다른 일들은 '당연히 돼야 할 것이 된 것뿐'이었고 아직까지 정식 평가받은 바 없다ㅋㅋ^^ㅋㅋ) 던져준 다음에, '현장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말 이건 꼭 만들어야 하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앉은자리에서 뚜닥뚜닥 만들었다. (지금 그때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스페이스바가 자꾸 두 번씩 눌린다.)
일은 정말 무자비하게 많았다. 알고 보니 가격의 '소수점' 부분만 작게 표현할 수 있었어야 했고, 할인 가격의 경우 취소선을 그을 수 있게 해줘야 했으며, 템플릿의 아이템 사이에 1px 굵기의 구분선을 그어주지 않으면 절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ㅋㅋ^^ㅋㅋ 식사 시간 간식 시간이 찾아올 때마다 대표라는 새끼와 테크리드라는 새끼는 짐짓 초조해하며 나와 P (S는 10월경에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사표 이메일을 던지고 나갔다) 2명의 밥을 먹일 문제를 걱정해 주는 체했지만, 막상 그 밥과 음료는 점점 그 질과 횟수가 줄어 갔다. 당연히 그랬겠지 갈수록 지들이 초조해 뒈질 거 같았을 테니까. 애초에 지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 docker build를 돌리길 해 앱 소스를 까보길 해. 유일한 실무자가 새벽 2시고 3시고 불 다 꺼진 마트 2층 한구석 푸드코트에서 "클래식 PHP"와 jQuery로 차력쇼 벌일 동안 휴대폰이나 꼬나보다가 바깥 구경 돌아다니는 따위가 최선이었으니 (씹쌔끼들 그렇게 방관만 할 거면 숙소 가서 잠이나 처 잘 것이지) 밥이 넘어갈 리가 없고 음료 사 마실 정신이 아니었을 테며 갑자기 (몇천 바트를 들고 있는 온 주제에) 모든 게 존나 비싸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ㅋㅋ^^ㅋㅋ
아무튼 그래서 넷째 날 금요일 아침이 밝았고 의외로 내가 일찍 온 편이었으며 잠시 나 혼자 그 마트 한구석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그 주변을 가만히 둘러볼 짬이 났다. 여러분은 금요일 아침의 마트를 보신 적이 있는가? 세상 그렇게 안락하고 별일 없는 세계가 얼마나 더 있을는지. 식당과 카운터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손님을 (안) 기다리고 있었고, 쇼핑 나온 고객들은 하나같이 그 지역 최고 한가한 사람들뿐이었으며, 5만 종이 넘는(다는) 풍성한 상품들, 푸짐한 음식들, 푸근한 조명, 은은한 캐롤 배경음악, 시원한 에어컨 바람, 무진장한 공짜 전기 등등에, 맡은 일 자체도 (내일 출국인 마당에 지금까지도 바쁘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라서) 그렇게까지 초급할 것 없이 전반적 안정화를 추구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문득 예수전도단에서 훈련받은 감각이 상기되었다. 아, 지금이다, 지금 이곳을 위해 중보를 해야 한다. 그러고서 눈뜬 기도로 적당히 그 지역과 사람들을 축복하는 기도나 하려고 했는데, 나온 기도 첫마디는,
주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토록 안락한 세계에서 이토록 복에 겹게 일하고 있고,
주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 그때의 그곳과는 같지 아니하나이다.
였다.
너무너무 놀라서 그 기도를 그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 금요일 기어코 어떻게든 뭔가를 일단락지어놓은 뒤부터 토요일 하루를 자유 여행 보내고 (주토피아2를 영어 음성 태국어 자막으로 팝콘 없이 봤다. 대충 이해했고 적당히 좋았다) 돌아온 지금까지도, 사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다. 왜. 왜 주님께서는 그때 나를 그 무화과나무 앞에 초대하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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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은 이 사건을 어리둥절해한다. 마태는 예의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단언을 하지 못하고, 마가는 들은 바를 시간 순으로 쓰는 것이 최선이라는 양 맥락 모르겠는 전언을 기계적으로 타전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제성구로 하는 대다수 설교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갸우뚱해한다. '무화과의 철이 아님이라' 하는 언급에서 간신히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운운을 뽑아내는 것이 주류 신학의 최선인 듯싶다. 나도, 이 사건이 여기 삽입됐어야 하는 가장 객관적인 해석으로는 같은 관점을 꼽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시분초 단위로 다급히 돌아가고 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따라올 수 없을 거면, 철 안 든 무화과라도 백번 할 말 없지 뭐.
근데, 뭐랄까.
일이 힘들고, 갈 길이 멀고, 할 일과 전할 말이 너무 많고, 하루하루가 숨이 차게 바빠 죽겠는데,
뭔가 먹을 것이 있어 보이는 풍성하고 그럴싸해 보이는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제로 도움이나 위로가 되는 무언가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면,
"에라이 나가 죽어라!" 소리 정도는,
하실 만도 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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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저녁에 숙소 들어가 씻고 자려니 P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제가 치맥 시키면 같이 드실래요?" 사실 각자 밥 먹고 자자는 분위기였어서 혼자 편의점 내려가 이것저것 주워먹은 터였지만, 치킨 정도는 들어갈 자리가 있었고, 애초에 그런 초대는 나 같은 극I에게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와 너무좋네요" 즉답하고 1층 호텔 라운지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맥주 한 캔을 비운 P는 문득 내게 말했다. 저 퇴사하는 거, 이번 출장 봐봐야 될 거 같아요. 말인즉슨, (사이니지라는 신사업이 개척되던 그의 입사 직후 시기 이래) 특히 지난 석 달 동안 그가 내내 했던 생각이, "이거 해서 뭐가 되나?"였다는 것이다. 맨날 이거 돼야 한다 저거 돼야 한다 말이 많고 그래서 늘 억지를 써서 겉으로 그럴싸한 것이 되게 해 온 것이 자기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의 역사인데, 그래서 '이게 다 뭐지? 진짜 100대를 설치하긴 하나? 서버가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확 터져버려라 그래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데' 하고 벼르면서 지난 몇 달을 참았다는 것이다. 근데 막상 와서 보니.. 뭐가 되는 거 같고 자기가 한 일에 결실이랄지 의미가 있는 거 같아서, 그래서 퇴사할 결심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뭐 겉으로 보면 짜장 그렇다. 냉동식품 진열한 냉동고 위에 장치 3대 이어 붙여서 "비디오월(서로 다른 영상 n개를 m개의 장비에서 타이밍 맞게 루프하는 구현을 말한다ㅋㅋ^^ㅋㅋ)"로 냉동식품 광고 영상 보여주고 있고, 그 옆에는 무슨 상품이 원래 가격 얼마였는데 취소선 긋고 지금은 얼마다 라고 표시를 실제로 해주고 있고, 그런 식의 "아일랜드"(어떤 매대는 벽도 통로도 없기 때문에 '섬'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9개를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그걸 했으니까 금요일 저녁에 퇴근해서 삼겹살 먹으러 갔던 것이다. 대표라는 새끼는 봉투도 없이 2천 바트를 건네며 다음날 개인자유여행에 맘껏 쓰라고 하셨다. ^^ㅋㅋ) 솔직한 말로 나도 금요일쯤에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만 힘들었을 뿐이고 앞으로는 나아질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그 견물생심은 다시 쏙 들어가고 입장은 다시 확고해졌다. 이건 잠깐의 착시고, 그 나무는 여전히 무화과를 맺지 못할 것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소프트웨어 회사는 상품을 단 한 번만 개발한다. "유지보수"는 돈 받은 곳에 한해서 마지못해 진행하고, 그나마도 (실무자를 딱 한 명만 뽑아서 noonchee가 있는지 석달간 검증하고는 전부 떠넘기고 외면하는 패턴으로) 무책임하게 하며, "연구" 따위는 언감 생심인 곳이다. (아니 씨발 기존 제품들로 웹소켓을 n년간 겪어 봤으면 웹소켓에 상태가 존재한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 되는데 socketio 서버를 스테이트리스 서버리스인 AWS apprunner에다가 처 배포해 놓고 해결이랍시고 폴링을 적용해놓고 오리발 내밀어 놨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래놓고 지가 socketio 할줄 안다고 거드름이 쩔겠지? 그 잘난 30년이 다 이런 식이었겠지?) 하지만 그 단 한 번에서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고 풍성하고 그럴싸하게 구현되는 탓에 그는 그가 모든 것을 해낸 줄 알고, 그걸 감히 팔아도 되는 줄 안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내 회사 제품을 쓰는 모든 분들께 어찌 죄송한지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맡은 상품도 S가 맡았던 상품도 영업 멘트 약속만 무성할 뿐 실제로는 그 약속을 ("poorly"라는 표현이 딱맞게) 간신히 한심히 겨우겨우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이니지는 그 3번째 상품이다. 앞전 두 상품에서 일어났던 모든 폐해가 명백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 '태국건'의 '테크리드'를 맡은 그는 이전 상품에 대해서도 '기획/QA'를 했었다. 남이 뭐라건 팩트가 뭐라건 다 모르겠고 결국 자기의 언질이 무조건 항상 옳고 바르고 좋아야만 하는, 자기가 오해했거나 틀렸거나 하는 역사는 있어본 적이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데, 그 예리하고 고매하고 아는것 많은 능력 가지고 프로젝트에서 잡아내는 디테일의 6할이 실무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생트집이다. 그치만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 노하우로 25년간 그렇게 성공적으로 무수한 프로젝트를 훌륭히 끝내 오신 노오련한 프리랜서님이신걸. ㅋㅋ^^ㅋㅋ 그런 사람 밑에서는 자연히, 뻔한 기능은 더 뻔하게 구현되고, 낯설고 도전적이고 누군가의 독박을 필연으로 하는 기능은 더더욱 관조, 방치, 이미모두가다알고있는것또괜히말해보는아무짝에도쓸모없고성가시기만한참견 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와 이거구나! 그동안 기존 제품들이 이건 왜 이렇게까지고 저건 왜 저딴 식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렇게 돼온 거였구나! 정말 대단한 25년 경력자야!"를 석달간 골수에 사무치게 납득하며 아드득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기를 출국 10시간 전까지 그랬고, 재입국 48시간 전까지 그랬다. 대표라는 새끼는 그 D-DAY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공연히 더 큰 공수표를 발행했다. 이 대형마트가 태국에 몇백 개 지점이 있어요! 지금은 100대지만 1000대, 10000대, 얼마든지! 지금 PO가 하나 더 들어오려고 하고 있고! S사에서 우리를 되게 좋게 보고 있고! (당연하다. S사가 '만들긴 만들었는데 성능 기능 애매하고 완전 애물단지네' 하고 만든 단말기들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준 것이 이번 프로젝트였다.) 무슨 이사도 연락을 주고 어디 지부에서도 얘기가 오고 있고 두바이에서 고객이 호주에서 연락이 어쩌고 저쩌고. 당연히 그 약속들은 하나도 약속이 아니었다. 사업의 근본에 아무 조짐이 없었고, 리더십 역시 아무 변화 없이 제 본색대로 신났을 뿐인데, 숫자가 좀 큰 게 뭐 어떻고 나라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되면 어떻단 말인가? 나중에 유지보수 할 실무자들이 사과할 고객 사과할 나라만 더 많아질 뿐이겠지. 그 유지보수 실무자가 나일지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뭐 나? 아니 나는 못 해요. 와우 씨발. 안 해. 돈을 3배를 줘도 난 싫고 사업규모가 9배가 된대도 거절이요. 많이들 하세요 난 갈라니까.
기둥과 뿌리가 막상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데, 그런 나무가 가지를 하나 더 치면 무엇하고 잎을 하나 더 열면 뭐냐 말이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걍 지금 콱 망해 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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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고사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효과만이 있었던 몇 안 되는 표징이다. 오병이어도 숱한 치유 사역도 전부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 효용과 이득이 있었으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기적 중 '딱히 누군가에게 득이 된 건 없고 그냥 불가해하기만 한' 일들도 분명히 있었다. 물 위를 걸으셨다든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셨다든가.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 고사 사건도 그런 축에 든다. 워낙 이상하고 뜬금없는지라 모든 복음서가 일반적으로 공통 기술하지 못할 정도다. 누가의 예수님은 너무나도 인간이고 요한의 예수님은 너무나도 "말씀"이시기 때문에 둘은 이 사건을 언급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님을 진술한 복음서들만이 이 사건을 취급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극히 드물게 예수님이 뭔가를 '죽이신', '파괴하신' 사건에 속한다. 달리 또 예수님이 망가뜨리신 게 뭐가 있었지? 돼지 떼 몇백 마리, 성전 뜰의 돈 바꾸는 장터 (요즘으로 치면 큰 교회 문간에 있다는 은행별 ATM 기기들?) 정도였지 않나? 예수님은 항상 누군가를 살리고, 건지고, 고치고, 먹이고, 마시우고, 이끌고, 모범을 보이시고, 하여간 내내 건설적인 일을 해나가신 분이었고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으시"는 분 아니었던가? 그런 분이 어떤 생명을 의지적으로 파괴하신 사건이 있었다고? 그게 이 무화과나무 사건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사건은 그렇게까지 일화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고, 조건적으로나마 납득 가능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그 정도의 중요도는 있는 사건이다.
예수님이 손봐주셨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돼지떼는 거라사 광인의 '군대' 즉 많은 귀신들이었다. 성전에서 야단을 놓으셨던 대상은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되 열매가 없는 나무였다. 공통점은 그것들이 악하다는 것이었다. 귀신은 당연히 악하다. 성전에서의 상인들은 악한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원하셨던 바 추구해 마땅할 도덕/이상/이념("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파편화, 제도화, 영리화("강도들의 굴혈")하여 실질 없는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무화과나무도 악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과 역사에 아랑곳 없이, 자기의 때와 자기의 시간에만 혼자 저 잘나서 부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눅12:16-21, RNKSV)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눅6:24-25, RNKSV)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욕하고 경계시키시는 것이 바로 이런 부류다. 때도 분간치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도 관심 가지지 않고, 오직 자기의 소출, 자기의 재산, 자기의 가지와 잎사귀 무성해지는 일에만 오만 열심인 모든 자 모든 것들. 이런 부류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오늘밤에 죽여버리겠다' 같은 비유나 드시고 "화있을찐저! 화있을찐저!" 저주도 서슴지 않으셨던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이 몇 년에 걸쳐서 준비했던 프로젝트 — 죽음과 부활 — 가 드디어 당일이 닥쳐서 현장 실무를 진행 중인데, 그래서 인간적으로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눈앞에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과실나무가 있을 것 같으면, 그 과실나무가 그 프로젝트 — 100% 하나님 나라 사역인 — 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시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예수님이야 이렇게 힘들든 말든, 자기 혼자 자기 계절이나 만끽하면서 혼자 싱싱하고 혼자 신나 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으셨을 거 아닌가?
연관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비슷한 처지 비슷한 광경을 겪어 본 나로서는 그렇게 독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방콕 한구석의 일주일간 내 눈앞의 세계는 나만 빼고 다들 너무나 안온하고 별일 없이 태평했다. 나는 지금 당장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해내야만 하는데, 안 그러면 (적어도 나의) 세상이 전부 와장창 무너질 거라고들 야단인데, 막상 그렇게 내게 야단을 놓는 이들은 하나도 야단이 아니었다. 내 앞의 대표며 테크리더는 "여기 1층에 마사지샵 있더라 내일은 교대로 마사지 받으러 갑시다?" 따위 개소리나 씨부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이 빌어먹을 슈퍼갑 대형마트조차도 나의 이 임무, 이 고생, 이 절박함을 알 바가 아니었다. (사실 마트 측 사람과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다. 너무 이상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 임무가 망했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그냥 별일 아니었을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애초에 이 마트의 '리뉴얼' 자체가 핵심 큰일이었고 내 회사의 "LCD"는 그 리뉴얼의 정말 작은 일부분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호들갑 떨며 공연히 의미 부여한 것이 무례였겠다 싶을 정도로.
예수님도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심지어, 이게 나만 잘 하면 그만이냐 하면 그게 또 아니라는 점조차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계속해서 "미안한데 이거까지는 합시다 고객은 뭐다? 무조건 옳다!"(좆 까고 있네 그건 소금 넣고 후추 쳐서 해결되는 장사에나 쓰는 말이고요 이 씨발아) 소리에 예 예 하고 따르며 막판까지 스스로를 갈아넣던 그 때, 내가 힘들었던 건 일 자체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애를 써서 나아지는 게 뭐지? 이게 그렇게 도움이 되나? 이러면 정말 세상이 더 좋아지긴 하나? 아무리 봐도 그냥 마트 상품 가격 몇 개 보여주면서 옆에 광고 띄우는 게 단데? 이깟 것 아무리 잘 하고 예쁘게 해봐야 이 대형마트 장사에나 도움 되고 이 S사 단말기 세일즈에나 도움 되고 결국 일회용품 장치, 쓰레기 데이터 양산하며 대자본들 배나 불려 주고 뼈다귀 살점 좀 받아먹는 겨우 그딴 짓거리 아닌가? 이게 정말 예수님께서 기껏 구해 주신 백년짜리 목숨의 지적 능력의 최대치를 투여해서 할 가치가 있는 일이 맞나? 뭐 이런 수준으로까지 확대된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기도의 첫마디는 그런 차원에서 정직하려고 한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2천 년 전 예수님 사역하시던 세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이 좋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풍요, 호화, 여유, 최첨단 따위뿐이었고 순간 나의 이 고생은 오롯이 나의 억하심정 자격지심일 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이 좀 힘들다고 그걸 불평하면 쓰나? 하는 생각을 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찰나조차도 허락지 않으시고 바로 보여주신 것이 그 무화과나무였다. 아니야. 불평할 수 있어. 나도 그 무화과나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어. 바쁘고 힘들어 죽겠는데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던 그 나무. 날 도와줬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도 도와주지 않았던, 자기 변명만 크고 자기 혼자만 풍성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세상으로 회복시켜 나가는 과정에 아무 역할도 의미도 없었던 그 나무. 나도 솔직히 그때는 그냥 좀 울컥한 것도 있었어. 지금 네가 느끼는, 저 끝없이 늘어선 매대며 한쪽에 너희가 다소곳하게 설치 중인 그 장치들과 그 아래 진열된 "상품"들이며 그 주변을 서성이는 너의 "상사"들을 보며 느끼는 그 울컥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가 죽으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나무는 죽고, 제자들은 '진짜 죽었네요' 그러는데, 사실 그때는 뭐라 둘러댈 말이 없어서 둘러대느라고 말이 길어졌어. 솔직히 '일이 너무 개같고 상황이 너무 짜쳐서 홧김에 죽였다' 그럴 순 없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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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로 이 글이 계획에 없이 너무 길어졌다. 어찌 보면 그냥 지난 한 달, 아니 지난 석 달, 아니 최근 반 년, 아니 지난 1년하고도 3개월 정도가 그냥 개같고 짜쳤다 한 마디면 됐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주절주절 뭔가를 적어놓은 것은, 그런 더럽고 치사하고 힘든 세월의 정점의 한복판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저의 세계는 이렇게나 안락하고, 주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 주님이시니이다. 이런 과하게 에피파니적인 순간들이 있는 탓에 그리스도의 도를 버리지 못하겠는 면이 하나 있는가 하면, 이야말로 이 지난 세월을 가장 바르고 짧게 요약하는 관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한 측면이다.
어쩌면 이 자본주의 체제가 통째로 그 무화과나무인지도 모르겠다. 소문은 무성하고, 어떤 성취는 그 규모가 무시무시하며, 그래서 겉으로는 무언가 실질을 기대할 만해 보이지만, 정작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을 살리는 열매는 아무것도 없고 지금은 철이 아니라는 식의 뻔뻔한 변명만 튼튼한 피조물. 그리하여, 아낌없이 찍어서 불구덩이에 던져도 하루아침에 말라 비틀어 죽어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대체 그게 다 뭐냐 싶은 풍요. 자본주의 사회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지금까지 다닌 이 회사 하나만큼은 확실히 그런 피조물이었다. 그 토요일 자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Grab 콜택시 안에서 왼편에 스쳐 지나가는 그 대형마트 현장을 바라보며, 퇴사를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은, 그래서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의 교훈은 명백하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시장하셔서 잠시 들러 보셨을 제 생명 살리는 데 소용 있는 뭔가가 아무것도 없을 경우, 그게 무엇이/누구가 되었든, 그 최후는 명백히 그 무화과나무의 전철 그대로 즉각적이고 최종적인 고사일 것이다.
그 마트는 어떻게 될까.
이 회사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고, 이 사회는, 이 체제는,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