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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처음 올린 게 7월 31일, 지금은 9월 5일입니다.

설국열차는 제가 원래의 글 말미에 예견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흥행했습니다. 대다수 관객에게는 양갱이 또렷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저도 양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한동안 양갱을 먹을 때마다 꼬리칸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정말 볼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아예 일언반구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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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나는 돈이 없습니다

2008. 5. 23. 20:25
존경하는 모 대학교 학식 담당자님, 나는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2200원짜리 학식을 사먹지 못하고 늘 1800원짜리로 손을 뻗치고 맙니다.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좀더 세련된 중일품을 먹지 못하고, 단 4백원이 없어서 늘 설익은 밥과 늘 같은 맛의 국물을 마십니다. 누굴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존경하는 담당자님을 욕할 맘은 더더욱 없지요. 저의 경제적 선택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지불 능력이 없는 소비자입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다 보니 많은 핑계를 댈 수 있더군요. 돈이 없으면 술자리에 가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미팅은 고사하고 노래방도 못 가지요. 학식 먹기 바빠 담장 너머 밥집은 꿈도 못 꾸고, 남들처럼 하루에 러키스타벅스나 그랬찌에 한 컵씩 타먹다가 맛없다고 놓고 나가는 사치는 더더욱 못 합니다. 돈이 없으니 하루에 집에서 가져오는 몽쉘 하나로 일일 코코아 섭취 권장량을 채우고, 돈이 없으니 어디 함부로 나다니지 못합니다(교통비 때문에). 아, 가끔 사치를 부립니다. 학생회 건물 꼭대기층 자판기에 150원짜리 '끓인 우유'가 있더군요. 그건 생활의 발견이었어요.
그렇습니다. 돈이 없어서 많은 것을 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서 카운터에 있는 잔돈처리 저금통에 적선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서 지하철에서 자일리톨 하나를 살 수 없습니다(정말 필요할 만큼 입안이 텁텁하더라도).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내고 저축하고 누군가를 위해 돈을 꿔 주고 엄한 것 한 달에 한두 번 사고 나면, 용돈은 어디론가 빼기 기호 하나 남기고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넉넉치 못합니다. 최근엔, 너무나 부끄럽게도, 아아, 식권을 컬러복사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매월 4만 5천원짜리 생산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 밥값도 못 하는 식충이올습니다. 그나마 그 터무니없이 값싼 밥을 두 번 세 번 더 타먹는 밥벌레올습니다. 문득 나는 꼭 공무원 같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는 꼭 일찍 은퇴한 중늙은이 혹은 벤처기업 같습니다. 돈이 없어서 마음대로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나는 꼭 서투른 사내 같습니다. 돈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가슴 한구석 짠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꼭 철없는 중학생 같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지지리궁상으로 같잖은 공부나 하는 거라고 떼를 쓰는.
알고는 있습니다. 돈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까짓 점심, 편의점 7백원짜리 김밥 한 조각 가슴에 점찍고 말면 그만 아닙니까? 더군다나 사회개혁이니 환경보호니 행복이니 자아실현 따위에 더욱더욱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배고픈 학생인지라 잘 압니다. 돈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물리학이 말하듯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에 꽃치장해 보았자 돌덩이는 움직이지 않아요, 일정 방향으로 겨자씨만한 힘이나마 가해야 가속도가 생깁니다. 돈이 없어서 안 바뀐다고 하는 일은 돈이 있어도 안 바뀝니다. 대규모 물량공세가 판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어떤 용기있는 사람의 한 걸음, 분별 있는 누군가의 한 마디가 다음 말과 다음 행동을 점화하는 것뿐입니다. 다만 아무도 용기를 내려고 하지 않아요. 왜냐? 사회적 잠재의식이 납득하지 않기 때문에.
어렸을 때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전국민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는 법이 있다면 좋겠다. 그 시절 제게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토록 터무니없는 생각의 일종을 위해 정책과 시민단체와 사회복지가 있는 거더군요. 왜 그런 법이 없을까요? 왜 없어야 하지요? IT강국,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는 나라에서 왜 첨단산업 육성의 기반이 될 컴퓨터 보급 사업을 하지 않죠? 컴퓨터 개발사가 망할까봐? 오히려 잠재소비층의 폭발적 증가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조그만 압력이 될까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시민단체가 발벗고 나서고, 국민여론이 박수쳐 주고, 약간 속이 거뭇거뭇한 기업들이 투자해 준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걸 이제 보니 알겠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선 마이쿠로소프트가 컴퓨터 보급 사업을 한다지 않습니까. 물론 흑심을 품은 시장 지배자의 계략이지만.
세상에는 돈이, 정말이지, 내게 그렇게 없는 돈이 세상에는 차고 넘쳐 떡을 치도록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동통신사 하나가 가입자로부터 만 원씩만 받아도 한 달에 700억은 모이겠더군요. 도대체 그 많은 돈이 뭘 위해 들어가는지 궁금했던 적이 없으십니까? 그 돈들은 더 이상 한 푼 한 푼의 돈이 될 수 없고 사람들이 '자본'이라고 이름붙인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됩니다. 이 덩어리는 뭐든지 막을 수 있고 뭐든지 뚫을 수도 있습니다. 덩어리니까요. 넓고 두껍게 펴면 아무것도 뚫을 수 없고, 한곳으로 뾰족하게 모이도록 집중시키면 아무것도 버티지 못하는 겁니다. 되고 싶은 모양으로 얼마든지 변하고, 뗐다 붙였다, 쪼갰다 모았다, 얼마든지 가능한 어떤 덩어리. 돈 아닌 돈. 그게 담당자님이 뉴스를 볼 때 접하는 크나큰 숫자들의 정체입니다.
우리 사회더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죠. 뭘 할려면 자본이 필요한 사회란 뜻입니다. 물론 책에 나오는 자본은 극히 원론적이고 소박한 자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뭘 하고자 할 때 필요한 건 돈일까요? 아니죠. 그 덩어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없다고 할 땐 실은 자본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절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여분 등등의 내역을 모른다거나 그걸 다소간 지출할 수 없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내겐 요술방망이가 없어서 그런 걸 시작했다간 용두사미가 될지 진퇴유곡이 될지 떡실신이 될지 모르겠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의사도 없으므로 난 모르겠다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전 돈이 없습니다. 자본은 당연히 없지요. 글쎄요, 이 학교에도 그런 덩어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덩어리를 조금씩 키우기 위해 제 푼돈이 매일 들어가고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값을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우수리 계산하기도 곤란한 일이고 하니 차라리 1500원, 2000원으로 보기 좋게 자르면 아주 좋겠습니다. 담당자님은 학식 관련 재무상태를 잘 아실 겁니다. 그 숫자들을 재정이 아닌 돈푼으로 보아 주시고, 아주 조그만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슬쩍 가격인하 변화를 시도해 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어릴 적 나라에서 컴퓨터를 주는 꿈을 꾸었듯이 지금 저는 이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학생증 바코드 찍고 도서관 열람실 무료로 쓰듯이 학식도 주면 좋겠다, 라고 말입니다. 공산주의 사회 이론 혹은 유치한 망상을 듣는 것 같으신가요? 제가 내는 등록금은 한 달 5만원 이하의 밥값도 포함하지 못할 만큼 빡빡하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많은 돈이 아니라 겨자씨만한 변화입니다. 핑계가 아니라 시도입니다. 어떤 변화를 위해 필요한 자원이나 이론적 뒷받침이나 다수의 찬동 등등은, 그 변화를 싹틔우는 단 한 명의 무명씨가 없음을 핑계하며 오늘도 묵묵히 자본주의에 순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서 이걸 인쇄해 보여드리지 못하고 블로그에 적습니다. 근무하시는 가운데 평안과 행복이 날로날로 넘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가난한 학생 엽토군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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