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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방송관계자 여러분, 나님이 하는 일에 뭐 할말 없읍니까?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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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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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박(가명)씨는, 처음에는 이토록 유명해질 생각이 없었음에 틀림없는 사람이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트윗 번개, 중국행, 온갖 뉴스와 온라인 단편영화 퍼나르기 등의 기행과 쇼맨쉽은, 적어도 대단히 순박하고 다분히 장난스럽다는 점에서, 작당하고 악의를 품었거나 테러리즘, 반달리즘에 기반했다거나 정치색을 드러내고 여론을 선동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한 기획된 연출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냥 골때리는 괴롭힘 앞에서 어쭈구리 너만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하고 맞받아치는, 차라리 전형적인 대한민국 30대 남성의 조건반사라고 봐야 한다.

 

나는, 그를 팔로우하면서도, 사실은 상당히 씁쓸하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유머가 촌철살인 대신 초보적인 비아냥과 ㅋ으로 도배되어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다는 데 있고, 둘째로는 그런 재미없는 사람의 B급 농담이 정말 재미있는 쇼가 되게 판을 짜 준 이 고도로 정치적인 사회 때문이다. 그가 방송통신심의위에 직접 제출한 웃음기 쫙 빼고 진검 뽑아 쭉 써내려간 의견 진술서 등을 읽고 있으면, 오히려 한탄이 나온다. 그는 결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성인이다. 열받는 정치권 이야기에 열받고, 웃기는 동영상과 예쁜 소품들 앞에서 그냥 우스워하고 예뻐라 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인데, 그의 일반적인 반응이 "이메가씨팔놈아"라고 읽(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읽는 거야 자기 맘대로임이 틀림없)는 이름을 빌어 나온 순간부터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회는, 웃자고 시작한 트위터에 죽자고 덤벼드는 정권을 용인 중이라는 사실이.

 
프레드릭 제임슨이 청사 선생과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아직도 고도로 정치적"이라고 했다. 고도로 정치적? 이 사회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정치적이다. 다른 게 정치적인 게 아니다.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거기에 2차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정치적인 거다. 그딴 게 어딨어? 그냥 열받으니까 욕하는 거고 싫으니까 싫어하는 거고 가 보고 싶으니까 촛불집회도 가 보는 거다. 배후세력이 누가 있긴 있었는지, 내가 종북 좌빨인지, 이 모든 게 정치적 음해인지는 나도 전혀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은 당신들을 빼고는 아무도 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졸지에 제 2의 미네르바가 되어버린 송모 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정치권은, 모든 걸 철저하게 이용해 먹기 위해, 전부 다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뭘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 이건 뭐 공안이 돌아다녔다던 DDD 시절보다 더하다. 우리는 아직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히 답이 나오는 관리와 사찰과 감시와 처벌 앞에서 그 명분에 법조항을 붙여 가며 싸우기 바쁘다. 그렇게 해야 하는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초고도로 정치화한 사회.


이제 어느 영화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2MB18nomA가, 알고 봤더니 착하고 꽤 예쁘고 별반 못된 구석 없는 여인이라면, 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벤데타 가면을 쓰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가 어떤 사람이길 기대하는 걸까. 영웅? 떠오르는 무소속 정치인? 아니다. 아주 의외의,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친숙한 주변의 촌부이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것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팔로우하고 별로 재미는 없는 그의 트윗을 지켜보고 그가 받는 탄압을 전력으로 저지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다. 우리도 솔직히 한번쯤은 '이메가씨팔놈아'라고 속으로라도 중얼거려 본 적이 있는, 몹시 불법하고 유해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 다 똑같은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P.s ㅅㅂ 느낌이 좋지않다. 헌병대에서 날 잡아갈 것 같다.
만약 한 달이 넘도록 블로그/트위터 갱신이 없으면 부모님께 전해다오 인커밍폴더는 보지마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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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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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다 보니 밥 남기면 군기순찰에 불이익을 받는 지경이라 억지춘양으로[각주:1] 안 남기고 있습니다. 느낀 바가 있어 외박 나와서 쫙 적고 갑니다.

하나, 음식쓰레기는 없어지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음식 남기기란 자신들의 풍족과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척도다. 달리 말하면, 남김없이 다 먹는 사람일수록 '허기지다', '밥 한번 복스럽게 먹는다'[각주:2],'못 먹고 자랐다' 등의 동정을 산다: 당신이라면 이런 대접을 받아 가면서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싶겠는가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전국민 못 먹고 자란 사람 되기' 캠페인에 동참하고 싶겠는가?
둘, '잔반 남기지 않기'는 정말 본질적이지 않다. 잔반을 남기지 않으려면 배식을 적당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잔식(배식조차 되지 않은 새 먹을거리)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자연히 배식조를 투입시켜 모두가 정량을 먹게 만든다. 다시 잔반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물리적 차원에서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밑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왜 남기는가'에 있다.
셋,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매년 몇억 명이 굶어죽고 있다고?[각주:3] 그러면 왜 작년이나 재작년 혹은 문민정부 시절부터 추진하지 않다가 지금 하는가, 아니 그보다, 우리가 먹는 걸 줄여서 어쩌자는 거야 푸드뱅크도 안 찾고 있으면서? 탄소배출을 막자고? 잔반 한 숟가락 더 먹어 없애는 것 가지고 정말로 CO2 배출량이 줄어들고 지구가 시원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저탄소 녹색성장 운운하면서 이 삽질정책을 나름대로 정당화하고 있긴 한가 본데 도무지 나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시키니까 안 남기고 있을 따름이지, 지지난 주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선 전입신병부터 말년병장까지 모두가 짬통에 식판 팽개쳐서 잔반을 쌓아놓고 살았단 말이다.
넷, 나는 누가 왜 이 짓을 시키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건 정말로 2MB식 사고에서나 나오는 "잘못된 시대착오"의 끝장 그 자체다. 나는 그 논리를 알 수 있다. '소말리아 불쌍해 + 탄소 너무 많이 나와 + 요즘 사람들 배고픈 줄을 몰라ㅉㅉ' → '음식만 좀 안 남겨도 좋을 텐데ㅇㅇ' → 'ㅇㅋ 음식이 썩으면서 탄소 나오고 자원 낭비되고 사람들 굶어죽으니까 이거 추진해야겠네ㅎㅎ' 이게 다다. 이런 걸 일컬어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한다.
다섯, 이제 뻘짓 작작 하고 다시 접근하라. 잔반과 잔식의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남기지 않기'의 패러다임에 시대착오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가능하다. 내가 환경부 생활폐기물과 과장이라면, 예산을 총동원해 A+급 CF감독을 영입하고 "적게 만들어 적게 먹기"를 광고하겠다. 적게 만들어 적게 먹기, 이것이야말로 영양 과잉과 식자재 낭비 그리고 잔반 및 음식쓰레기 문제의 본질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 접근이지,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는 다그침에 대답할 21세기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의 음식물 쓰레기 제로화 노선으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 당장 각종 급식부터 식재료 노르마와 식단의 합리화를 시행해야 한다. 그리고 식재료 공급이 획기적으로 줄어 남는 식재료를 그 굶어죽는다는 동포들을 위해 쓰면 되는 것이다. 탄소는 정말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까 옆으로 좀 치우고![각주:4]
  1. 아니 진짜 억울한 게, 난 원래 안 남기던 사람인데 그걸 강제하니... [본문으로]
  2. 뭘 모르는 촌놈 여러분을 위해 촌놈인 제가 알려드릴게요. 이건 동정이자 욕입니다. [본문으로]
  3. 구체적인 수치는 찾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수보다 어쨌든 훨씬 클 테니까. 이런 것을 일컬어 문맥상 무의미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밥과 탄소가 무슨 관련일까? 여러분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가 혹은 어렴풋이 느껴질 만큼 그 관계를 심각하게 체감하는가? 아닐걸? 이런 걸 일컬어 개연성이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

그냥 낙서

2008. 7. 5. 22:41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밤이군요. 여기서 최신영화 한 편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희대의 천재감독 이명박이 메가폰을 잡은 전투경찰영화 "블랙촛불다운"인데요, 주연이 딱히 없이 전부 조연급으로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죠.
이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알력뿐이며 그 가운데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다"라는 심각한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어, 이번 영화 역시 전작 "삽지리야 연대기: 버스, 청계 그리고 시청광장"에 필적할 만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주목됩니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이 감독이 시나리오를 구상하다 포기한 것으로 소문이 났었던 "삽지리야 연대기 2: 커낼 왕자(Prince Canal)"가 이미 거의 시나리오 골격이 잡힌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지요.
왜 썼지...? 어쨌든 맘에든다 ㅎㅎ

P.s 퍼간 사람이 있더라. 우왕ㅋ굳ㅋ http://fromeyetolip.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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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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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체 어떡하면 이런 관련성이 유추되지?

오늘 한겨레를 600원 주고 사서 봤다. 개판이다. 점심 먹다가 넋놓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침에 괜히 컴퓨터 켰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이게 뭐 하는 건지... 정말 말마따나 화염병이라도 안나오면 다행이겠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나 보다...
Posted by 엽토군
:
2MB를 위한 서민학개론


오리엔테이션

이 글은 어디까지나 레포트 쓰기 연습. 논리적, 학문적으로 많은 뒷받침이 필요하므로 이 뻘글을 읽는 누구나 되는 대로 트랙백 등으로 건설적인 추가논의를 구하는 바.
최근 정치계의 최대 화두는 '경제 살리기'이며, 모 대통령의 정략적 방향에 따라 그 경제는 곧바로 '서민'을 위한 경제로 연결되어 이야기되고 있다. 과연 그 서민은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역사와 특성을 지니고, 현대 서민의 대체적 특성과 대한민국 서민의 특수 상황을 견주면서 '서민의 경제'는 어떤 특이점이 있는지를 확인하여, 현재 '대한민국 서민의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지를 함께 논의해 보자.

제 1강 서민의 정의와 역사

서민(庶民)이란 단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2.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
비교되는 유의어 '평민'과 '백민'은 둘 다 단순히 '벼슬이 없는 일반인'의 의미를 띠고 있다.[각주:1] 그러므로 여기서는 용어의 문제에 있어서, '서민', '평민', '백민'을 전부 같은 의미로 취급하되, 특히 '서민'이라는 단어를 핵심어로 전개하기로 하자. 서민의 '서(庶)'의 새김은 '여럿'이다. '첩의 아들', '가까움' 등의 훈도 있으나 대체로 '흔하게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주를 이룬다. 영단어에서도 서민을 지칭하는 명사 common people(folks), commonality, the folks 등등에는 어김없이 '공통적인, 허물없이 가까운'의 의미를 지닌 어휘들이 보인다.
굳이 외국어와 한자까지 들먹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민'이 지니는 이미지가 확연하게 두 가지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기한 1번 정의의 두 가지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벼슬이 없다'와 '일반적이다'가 그것이다.
벼슬이 없는 일반인을 서민이라고 부른다면, 신분·계급적 특권을 가진 계층이 없거나 딱히 일반적이라고 지칭할 만한 집단이 없는 사회에는 서민이 없거나 그 의식이 희박할 것으로 생각된다.[각주:2] 대부분의 국가나 사회에 서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대부분의 그 나라들이 세계사적 일반 담론에서 말하는 봉건사회를 거쳤기 때문이다. 군주가 있고 몇 명의 영주 혹은 지방 수령들이 나머지 구성원들을 통솔·지배하는 봉건사회, 그 구조가 안정되는 시점에서 서민계층이 생겨났다. 상하귀천이 확실했고 또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같던 사회에서 이렇다 할 이름이 없는 '장삼이사'는 생겨났다.
그러나 일반인들 가운데 한 번 형성된 서민의식은, 마침내 특권층의 모순과 부조리를 혁파하기 위해 다 함께 들고일어나기까지 점차 강하게 뿌리박힌다. 그 이유는 중세 사회가 '관직(벼슬)'을 기준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이 뚜렷이 구분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신분은 상하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유일하게 획득 가능한 정치적 특권은 곧 경제적 특권으로 이어졌으며, 그 두 가지가 모든 사회적 신분을 말해주던 시대에서 지위불일치[각주:3]는 일어나지 않았기에(물론 후대로 가면 부르주아 등의 불일치가 일어나지만 여전히 소수이다), 자연스럽게 내집단으로서의 서민적 의식이 고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를 지나면서 점차 신분 상하이동이 자유로워졌다. 그것은 기실 일련의 근대적 사회 개혁이 추구했던 실질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는 현대사회에서 평민의식은 대체로 건재하다. 아니, 오히려 일부 사회에선 훨씬 강력하다. 왜 그러한가?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외집단 의식과 역사가 그것이다. 다양한 지위가 등장한 현대사회이니만큼 자기 자신이 어떤 처지에 속해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우나, 누구나 높다고 말하는 특권층은(그게 어떤 의미에서의 특권이든지간에) 뚜렷하게 구별되어 매스미디어와 생활 속 실제적 영향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외집단에 대한 확연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집단을 서민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또, 서민들로서는 대대로 서민으로 남으며(일개 여염에서 인재가 나오는 것을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특권층을 우러러보아 온 역사가, 신분 상승을 이루어낸 역사보다 훨씬 길다. 이러한 역사적 장단은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서, 집단적 의식과 기억에 영향을 끼쳐 '서민들의 사고방식'이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다.
모 대통령이 말하는, 일자리의 유무를 기준으로 한 서민의 정의는 역사적이나 사회학적으로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 일자리는 모든 서민에게 있어 왔다. 또 '무엇의 유무'를 가지고 특권과 일반을 나눈다면 그 '무엇'은 정권, 부동산, 교수 이상의 사회적 명망 등 계층적으로 확실한 구분 기준이어야 하는데 '직업'이란 도무지 다양하고 상대적이어서 평민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사회적 극빈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밥벌이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일반적인 국민'을 의미하는 서민은 차라리 '일자리가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각주:4]
그렇다면 도대체 오늘날의 서민은 무엇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서민으로 여긴단 말인가? 그에 대해서는 2강에서 좀더 논의하자.



제 2강 오늘날 서민의 특성에서 계속... 내가 미쳤나 이걸 왜 공개했지? 갑자기 책 찾아읽어야되네
저보다 많이 배우신 분들의 가르침을 학생의 자세로 기다리겠습니다. 다같이 만들어봐요
우와 몸이 벌벌 떨려 (아니 진짜로;)
  1. 참고: '표준국어대사전(인터넷판)', 국립국어원 [본문으로]
  2. 예시할 만한 사료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도움을 구하는 바. [본문으로]
  3. 어떤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사회적 계층에 대하여 한 계층에선 높은데 다른 계층에선 낮거나 하는 불일치가 나타날 때, 이 사람은 지위가 불일치한다고 한다. 사회적으론 존경받으나 경제적으론 빈곤한 사람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본문으로]
  4.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 2번에서는 분명히 중류 이하의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크게는 같은 의미일지라도 어감 혹은 문맥상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는 유의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삼이사', '갑남을녀', '평민' 등과 '서민'은 모두 크게 보아서는 '특권(특징) 없는 일반인'이라는 큰 의미가 있는데, 단어의 사용과 그 오랜 관습에 있어서 '서민'이란 다른 단어들보다 특히 '잘 살지 못하다', '남들보다 뒤떨어지다'라는 의미를 더하는 것으로 굳어졌을 수 있다. '庶'라는 한자가 조선시대 내내 첩의 자식을 뜻하는 '서얼(庶孼)'이나 적자와 그 나머지 자식을 의미하는 '적서(嫡庶)' 등의 단어에서 사용되어 왔음을 감안하면 억지 궤변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넉넉지 못하다'라는 말을 볼 때, 2번 풀이가 그런 '어감'을 묘사하는 수준에서 그쳐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필자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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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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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민 목사, '덧셈과 뺄셈'
주제성구: 삼상2:21
주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 앞에서 잘 자랐다.
관련성구: 창22:2-14, 창47:9, 삼상1:11, 마6:33, 마16:25

선포 요약(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작성):
많은 사람들이 한나가 자식을 얻지 못해 원통해한 것은 다만 당시 사회가 무자식을 저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으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만이 아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는데, 이 세 사람이 악하여 사회를 바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나는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제대로 된 제사장으로 키우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자식에 대한 간절함이 더했던 것이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그를 나실인으로 바친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귀한 아들인가. 인간적으론 바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그 자식을 드렸다. 1-1=0이다. 하지만 한나에게 1-1은 0이 아니라 5+1, 즉 세 아들과 두 딸과 시대를 움직이는 자랑스런 아들 사무엘까지였던 것이다. 비슷한 예로 아브라함이 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군말없이 그를 바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는 '열국의 아버지'가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뺄셈을 잘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뺄셈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덧셈을 해 주실 것이고, 덧셈만 열심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빼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의 손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하기는 사람의 빼기보다 훨씬 크고 하나님의 빼기 역시 사람이 더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실제로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했던' 엘리와 두 아들 일가, 즉 뺄셈을 모르고 덧셈만 하려 했던 엘리의 집안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셨다. 그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고, 엘리는 아들의 전사와 언약궤를 빼앗긴 소식에 놀라 자빠져 죽고,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는 배었던 아이를 조산한 뒤 거의 죽게 되었다.
야곱 역시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인물이다. 야곱은 성경에 그 일평생이 전부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한다. 왜 그러한가? 그의 일생은 무엇인가를 계속 더하기만 하려는 인생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목을 잡았고, 장자권을 탈취했고, 아내 라헬을 쟁취하기 위해 애를 썼다. 형 앞에 나아갈 때 집안 식구를 일렬로 세우고 자기와 라헬과 그 자식 요셉은 제일 뒷줄에 서게 할 정도의 욕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은 한 번도 행복했던 일이 없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라고, 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이것은 진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인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은 사람들의 꽤 많은 수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은 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것만을 본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등한시하고 자신이 받은 그것을 전부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덧셈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뺄셈을 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랜드 사태를 생각해보고 싶다. 본인은 이랜드 같은 기업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세금 잘 내고 주일 잘 지키고 손해나면 나는 대로 성실하게 기독교적으로 경영해온 기업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이미지는 실추되고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가? 본인은 이랜드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태가 매우 안타깝다. 사실 이 사태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본디 이랜드는 주일에 쉰다는 원칙 때문에 백화점 입점도 하지 않았던 기업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손댄 적도 없는 유통업, 호텔 사업 등에 뛰어들었다. 주일을 지킨다는 처음의 원칙을 어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주일에도 일하는 사람들, 즉 비기독교인들이 점차 회사 내부에 커지게 되었고, 결국 처음의 가치관이 어그러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큰일이 벌어져 여태 쌓아왔던 이랜드라는 기업의 이미지가 뺄셈된 것이다.
곧 출범할 이명박 정부 역시 국민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이것 역시 덧셈을 해 보려는 사람의 계획에 대해 주님이 주신 뺄셈의 결과다. 그들은 선거철 홍보하러 다닐 적에 주일날에도 전국 각지를 돌았다. 본인 생각엔 주일날 굳이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든 한 표 더 얻어보겠다고 주일을 소홀히 했다. 게다가 인수위원회도 몇날 며칠을 쉬지 않고 업무를 보더니 몇십 일만에 처음 쉬는 날을 주었는데, 그게 토요일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금요일 회의 때 '내일은 푹 쉬고 주일날 뵙시다'라고 했던 셈이다. 당선인은 장로고 인수위 총책임자는 권사인데 그런 발상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이거니와 그런 덧셈 덕분에 얼마나 많은 아랫사람들이 주일예배도 못 드리는 고생을 했겠는가. 이명박 정부를 놓고 많이 기도했던 본인은 이런 풍경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루빨리 그들이 하나님 앞에 뺄셈해야 할 것은 뺄셈하는 태도를 보여주길 바란다.
오히려 요즘 세상이 최근 트렌드를 마이너스 마케팅, 마이너스 생활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대로 뭐든지 '더' 만을 부르짖어서야 되겠는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여 바치는, 즉 '뺄셈하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덧셈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나누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곱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성경적 계산법을 기억하고 현명하게 생활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하자.


이랜드 사태와 인수위에 대한 부분에서 완전히 납득하고 말았다. 말 많은 평신도가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이런 말을 하면 귓등으로 들었을 것이려니와 오랫동안 기도했으며 또 바로잡히기를 바라고 있는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선포하니 완전 선지자의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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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그냥 깝깝해서 답글

2008. 1. 10. 20:04
개신교 사람들은 정말 이명박을 묻지마식 지지하나요?

아놔 이거 내가 태어나서부터 교회다니니까 하는 소리지만 복잡미묘하기 짝이 없는 얘김다.

대구경북 지역 근혜누나나 회창형 지지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그쪽은 불교 기세가 쎄서 교회가 (단순히 규모의 차원에서) 별로 흥성하지 못한다고 그럽니다. 접때 외할아버지 상치른다고 마산 창원 넘어다니고 있을 때 울 아부지가 해주신 얘기니깐 아마 맞을 겁니다. (울 아부지 다른 주젠 몰라도 종교쪽은 이론부터 듣보잡소문까지 빠삭합니다.)

성당이나 절은 잘 모르것습니다마는 교회는 확실히 아줌마 아저씨들이 씹을 잡담거리가 없어서인지(뭐 다른 모꼬지라면 술이라도 마실 텐데 그것도 거시기하죠잉) 정치 얘길 가끔 하죠.
그래도 뭐 평소 평범한 만18세 대한민국 선거권자들끼리 주고받고 하는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어디까지나 각자의 개인소견이니 이건 암만떠들쳐봐도 문제는 안 됩미다.

문제는 아놔 목사님(진짜루 가끔 장로 아저씨)들이 그것도 설교시간 혹은 뭐 축복기돈지 간구기돈지 할 때, 그 거룩한 시간에 직접적이든 돌려 말하든 그런 얘길 한다는 겁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말입니다, 사람이지 말입니다. 사회적 동물들이시니 정치 얘기 안하고 정치성향 없인 몬사는거 맞아요.
아 근데 그걸 왜 하필 궁극적 원론적으루는 성령님께서 집회를 보시고 계시는 예배 시간에 직간접적으루 발언하시너냐 이겁니다. 고게 문제가 되죠.

왜? 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오는 수요일 일곱시 반에 근처에 성도등록자 200명 이상 되는 아무 교회나 찾아가셔서 기도시간 설교시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진풍경이 보이나...

목사님들이 거룩한 시간에 발언하시는 건 그냥 발언이 아니고 엄연한 설굡니다. 설교. 좀더 겁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고도 불러요 그걸. 웃기지 말라고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정말 거룩한 시간 맞긴 맞아요. 종교 예식이다요. 한창 설교 나가는데 일어나서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라고 하면 안됩니다. 할려면 예배 끝나고서 따로 찾아가 따지면 따질지언정... 나름대로 성직이고 종교집회이기 때문에 함부로 뭐라고를 못 해요. 그 때 발언이라는 거.

문제는,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별 관련 없는 예화(이해를 돕는 삽입된 이야기)를 꺼내시곤, 이어서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정치하고, 경제하고, 문화 하면 얼마나 좋아요, 안그래요? 아멘?" 하면 말이죠,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이 꽤 많은 분들이 "아멘"합니다. 아멘이란 히브리어로 "그렇습니다" 혹은 "그리 될 것입니다"란 뜻임다. 우왓따 살 떨리네요잉.

교회 가서 몸소 견학하기 귀찮으시면 자료화면이라도. 예밴지 성경공부인지 뭐 노래자랑 시간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 만약 예배도 아닌데 다들 이렇게 아멘 구령을 붙이고 있다면 이건 정말 살 떨리는 얘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이거 신앙도 뭣도 아니고 그냥 맹종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막말루, 상식적으로 예배라는 건 신을 불러서 받자와드리는 시간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부정타면 안되지요. 그런데, 신령님,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에서 이명박이 어쩌구 정동영이 어쩌구 소리를 꼭 해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게 신이 하는 말씀이실까요, 그냥 인도자로 서 있는 사람이 생각나서 하는 이야기일까요? 그런 발언을 스리슬쩍 하는 거야말로 눈치도 못채는 사이에 예배를 부정타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 일부는, 중대형 교회들이 그런 경우가 좀더 있는데, 대예배 축도보다 헌금기도 시간에 더 열성인 사람들이 대체로 많아서 복을 열심히 빕니다. 기복 자체가 사람의 감정과 계획과 이기심일 수 있거든요. 근데 이게 곧장 예배로 동기화되어서 어디까지가 사람 말이고 어디까지가 성경 말씀인지 구분이 안 서는 신도분들(심하면 성직자분들 개중에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라는 선포에나 "믿는 신앙인들이 이 세상 정권 잡아서 하나님의 거어루카시고 조오혼귀하신 영광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라는 기복에나 똑같이 다들 아멘 한다는 겁니다. 눈썹이 실룩거리죠잉.

여기까지 안 읽고 내려왔어도 상관없으요. 이제부터 일거주시요.

사실 제가 알기루 최소한 예배시간에 지켜야 할 정치관련 바람직 태도는 이렇게 정리됨미다.
가급적 정치 토픽은 꺼내지 않는다. 특정 이름은 아예 올리지 않는다.
노가리를 깔거면 예배 끝날때까지들 좀 참자.
꺼낼거면 원론적인 얘길 하든지(예: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갈 길을 비추어주시사 세상의 빛과 소금 되게 하시며... 등) 결론을 인위적으로 내지 말고 성경에 근거한 바람직한 의견(예: 공의를 굽게 하는 통치자가 되지 않기를... 등. 미가 3장 9-12절)을
위주로 전개하든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성도란 사람들은 세상 핍박을 견디는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자.

이건 좀 딴얘긴데 원래 사도행전 읽어보면 진짜 눈물 싸고 똥줄 타는 고역의 연속입니다.
원래 세상에 선포하는 기독교란 그래야 하는 법이니라 하고 성경에 써 있지 말입니다.
근데 요새 큰 교회들은 이상하게 되게 돈도 많고 다니기도 편하고 말입니다.
이상하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1907년을 감히 얘기하지 말입니다.
이건 좀 막말이지 말입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 통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분노가 나옵니다.
잊을만 하면 나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줫버리라고 한 분은 무려 예수님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금 낼 건 내란 소립니다.
근데 그 뒤엔 하나님 꺼는 하나님께 바치라시면서 천국에 세금내라고 하십니다.
실제루 예수님께선 이르시길 천국은 금은을 바꾸든지 한 다리 짤르고서든지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창녀, 환자, 어린이, 욕먹는 세리만 골라서 찾아다니셨다죠.

세금이라. 이명박 장로라. 권력이라. 설교라. 복잡미묘한 얘김다.
더 했다간 저 벼락맞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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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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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온라인 게임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던 시절의 딴지일보 기사다.
8월 30일, 딴지 연애부 대표기자 겸 비서실장 이드니아 콘체른 작성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는 게임상에서 벌어지는 한국 게이머들의 추태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외국인 게이머라고 해서 전부가 예의 바르고 매너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와 규모에 있어 우리나라 게이머들을 능가할 나라는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분명 사람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기본 예의나 룰을 지키는 것을 이토록 우습게 볼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배양된 것일까...
어저면 그건 우리가, '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기 위해선 우아하게 지는 방법도 알아야 하는데 우린 지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긴 자를 위해 축하해줄 줄도 모르고, 이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의 정당성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이기기 위한 방법만 배워왔고 또 실제 어떻게 해서든 이 사회에서 이기게 된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잘쳐먹고 잘사는 사회를 너무도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가지 분명한 건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 게임에서 한국인들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란 것이다. 게임을 통해 전세계 수백만 이상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이란 바로 이렇게 치사한 종족이라는 악선전을 실시간으로 바로 지금도 스스로 자기 돈들 바쳐가며 하고 있는 곳이 이 네트워크 게임공간이다.


이 기사 입력 이후 8년이 지났다. 얼마나 개선되었나?

이명박 장로가 향후 5년간 딴지일보를 열심히 움직이게 해 줘야 할텐데ㅋㅋ
Posted by 엽토군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명박이의 것은 명박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패러디된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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