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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개

2015. 6. 29. 09:44

1
세상은 기독교인을 거절할 수 있지만, 기독교인은 세상을 거절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와 순교란 결국 “이웃”들과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명명백백 불문가지의 죄악이다.

3
부드럽고 알록달록하고 달콤한 감각만이 ‘사랑’을 기표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죄악의 초기 특징이기도 하다.

4
적어도 현 시점에서, 동성 커플의 결혼이란 단지 전체 인구 중 극소수의 경우이며, 그 합법화에 따르는 추가적 손실/위험은 없다. 추가적 이득으로는 결혼 관계자들의 행복 정도가 있다.



이하는 그냥 누군가의 참고용 “의견”. 남의 의견 캡쳐해 갖다쓰는것 개인적으로 싫어하는데, 전적 동의가 아니라는 의미(좀 특이하지만)에서 캡쳐로 가져와 봄. “그때 내가 왜 무지개 프사를 (안) 걸었지?” 하고 나중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좀더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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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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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범죄

2015. 4. 6. 23:15

1. 죄라는 말을 한자로 罪라고 쓴다. 사람이 안될[非] 짓을 해서 포박[罒]에 잡힌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옛날에 辠라고 썼던 것을 사연이 있어 바꿔 쓴 것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중국 역사상의 황제[皇]가 된 진시황이, 그 글자 모양이 흡사 자신만의 1인칭 재귀대명사가 된 皇과 모양이 너무 흡사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대신 쓰게 한 글자가 바로 罪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크나큰 불행을 초래했던, 그야말로 죄받을 짓을 하고 산 인간 진시황 덕에, 우리는 스스로[自] 쓴맛[辛]을 보러 들어간다는 의미의 글자 辠를 거의 쓰지 않게 됐다.


2. 스스로 쓴맛을 보러 들어간다? 사실 이 파자는 내가 한 것인데, 그 글자가 가진 뜻이 너무도 명백하고 쉽고도 심오한 덕이다. 죄를 지어 본 사람은 안다.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임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파자에 관련된 것뿐이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아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으리라는 걸 그때의 나는 무슨 넋빠진 생각에 짐작을 못 했지?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잡하고 음흉하고 사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마음은 나쁜 짓을 해서 오라를 받기만 하면 바로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다. 그 죄의식(辠意識)은, 오직, 자기가 열심히 핥던 그 맛이 독극물의 쓴맛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이다.


3. 진시황 이래로, 드디어 오늘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에게 죄란 한 번도 辠였던 적이 없고 그저 정도의 차이만 더욱 맹렬히 편차를 보이는 罪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구체적인 예시를 대려 해도 차마 잔혹하여 뭘 댈 수가 없다. 유치원 선생이 애를 바늘로 찔렀다더라, 아파트 주민이 아파트 경비를 드잡이했다더라, 연예인들이 카메라 뒤에서 서로 반말을 주고받으며 싸웠다더라, 거진 300명 가까이가 영해상에서 수장되는 꼴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더라, 무슨 SNS에서 바른말 잘 하던 아무개가 헛소리를 굽히지 않는다더라… 누군가가 안될 짓을 저지르고, 누군가가 그걸 목격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 자를 포박해 데려오고, 수많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포박된 자를 네거리 광장에 무릎 꿇려 놓고 돌을 던진다. 오직 이 육체적이고 제도적인 순환만이 있을 뿐, 아무도 뉘우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죄에 깔린 쓴맛의 맹독성에 관심이 없다.


4. '우리 안의 XX' 어쩌구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밑에서 또 굳이 논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논하자면, 본전도 못 찾을 소리 씨부리지 말라고 해라.)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복잡하면 얼마나 복잡하다고, 도대체 지금 오늘 이 세상은 뭔 놈의 죄가 이렇게 많고 죄인이 이렇게도 많은가? 부연하자면, 그렇게도 많은 놈과 많은 일을 죄인과 범죄로 판결해 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갈수록 지옥도 일변인가? 왜긴 왜겠어, "범죄"가 너무 많은 바람에 죄가 죄로 발견되지 않아서지.


5. 범죄는 많을지 모르되 죄는 하나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옥편의 뜻풀이가 마침 편을 들어주기에 한번 인용해 본다. 죄란: ④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命令)을 감수(甘受)하지 않는 인간(人間)의 행위(行爲). 조금 겸연쩍을 정도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명쾌하게 요약한 이 풀이는 그 ‘인간의 행위’의 명목(名目)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뭔지, 형사법이 표현하는 죄명이 뭔지가 하나님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제는 오직 거역과 감수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지키면 장차 선행의 보응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형벌의 쓴맛이 너 자신에게 돌아올 줄을 알아라. 민수기 32장 23절에는 "죄가 당신들을 기어코 찾아낸다"라는 표현이 있다. 죄에 쫓겨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죄의 속성에 대한 절묘한 서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죄인'이니 '범죄'니 하는 것에 응당 따라붙어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이지, 지금의 이른바 '조리돌림'이, '구알티'가, '신상털이' 같은 것이 무슨 죄를 주기나 준다는 말인지, 나는 도대체 알지 못하겠다.


6. 영어에는 sin과 crime의 두 단어가 있다. 우리말에서 전자는 흔히 '죄'로 번역되고 후자는 주로 '범죄'로 번역된다. 사전으로만 찾아 보면 둘 다 의미가 거의 비슷하므로 헷갈리기 쉬울까 봐 편집자들이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nota bene를 달아놓기를, sin은 종교적/도덕적인 죄를, crime은 형사법상의 위법 행위를 주로 의미한단다. 이 구별, 이 사회과학적으로 실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지적으로 상당히 진보한 개념적 구분이, 오늘의 결국에 와서는 좀 우습고 처량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요컨대 지금은 sin이 crime으로 둔갑하는데, 아주, 아주, 아주 많은 경우에 그렇고, 갈수록 더 자주 그렇고, 날이면 날마다 더 노골적으로 그런 세상이다 이 말이다. 사람은 오로지 그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처벌받고 배상 책임을 진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말단 노동자 엎드려뻗쳐를 시키든 파업한 새끼들 혼구녕을 내 주든 원인 규명하고 선체 인양하라는 유가족의 요구에 대해서든 적당히 일금을 치러 주면 그만이다! 크으 앞으로 한 세기쯤 지나면 자기가 비고의적으로 저지른 죄의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보석금 보험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와 상상해 보니 좋나좋군? 그 날이 오면 교도소에 출입하는 종교인들은 다들 그 보험만 특별히 판매하는 라이센스를 얻어 다닐 성싶다!


7.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안의 XX'론 일체가 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그래서 본전도 못 뽑을 이야기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XX의 자리에 "일베"라느니 "파시즘"이라느니 하는 것을 넣어 쓰는 모양이니, 아마도 그 XX에는 죄목 내지 그 죄목으로 불리는 신분의 호칭이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뭐? 우리 모두에게 그 죄목의 혐의가 있으니 대마불사론을 적용하여 그냥 crime의 범주에서 빼자는 건가? 그게 "빼박캔트"의 sin인데? 뉘우침이 필요하고 참회가 요구되고 그 쓴맛을 스스로 다 맛보아 먹어삼키고 앓고 낫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절대 외부적일 수 없고 절대 물리적일 수 없는 죗값 치르기가 반드시 요구되는 허물이 그 XX인데, 그걸 그저 사회 구성원 일반이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사안이란 이유만으로 마냥 용인하거나 이해해 주자 뭐 그런 건가? 야훼 하나님은 우리더러 죄를 여하간에 이해라도 해 보라고 하신 적이 있나? 부정 타니까 멀리 떨어져서 짱돌을 던져 으깨 죽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8. 사실 현대의 가장 큰 사회악 중 하나는 회개 개념을 완전히 고사시켰다는 데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거듭나는 방편들 중 반드시 필요한 내면적 방편으로서의 회개를 아주 세속과 동떨어진 신선 놀음으로 만들어놓은 감이 있다. 회개? 너 지금 나 보고 회개라고 했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고 나왔더니 이젠 뭐? 날더러 회개를 하라고? 왜, 그 다음에는 뭐 간디 비슷한 게 되어서 아프리카 애들한테 국수라도 나눠주라고 하지? 성인군자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악착같이 벌어먹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한 세상 내딴에 열심히 살다 이 모양 이 꼴로 갈 거니까! 내 인생에 뭐 보태줄 거 아니면 저리 꺼져!


9. crime은 sin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罪는 포박에 묶이는 것이기 이전에 辠, 스스로 그 죗값의 쓴맛을 감당하는 것이다. Criminal이 그렇게 많고 악성 범죄는 끊이지 않지만, 갈수록 자기를 'sinner'로 신앙 고백하는 자는 찾기 어렵고, 정말로 그 쓴맛을 뉘우치는 사람 역시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토 트위터를 자중하고 있는 최규석 작가님 정도나 보일 뿐이다.) 범죄는 많은데 죄가 없고, 속죄는 더 없고, '죄'라는 단어와 개념의 사용 빈도는 더더욱 하락일로를 달린다. 다들 매일 똥 싸고 뒤를 안 닦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라면 밥 먹듯이 저지르는 후회와 탄식의 원흉으로서의 범죄를 처치하고 청산할 생각을 어찌 이리도 안 하고 살 수 있는지. 그러면서 어쩜 또 그렇게 옆 사람 인생 근처에서 구린내 난다고 면박은 그리도 잘들 주고받는지. 근데 왜 세상이 이렇게 미쳐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들은 또 어쩜 그리들 쉽게 하는지.




0.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가 네이버 사전 한 번 보고 정말 간만에 삘받아서 마구 써내려간 글이다. 몇 번 윤독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세밀화에 관한 것일 뿐, 줄거리 자체는 거의 안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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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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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25절

(개역한글)




‘sane’이라는 형용사에 꽂힌 지는 좀 오래되었다. 이 성구는, 다른 인상적인 말씀들이 그렇듯, 참되고 정신차린 말이라는 대단히 인상적이고 탁월한 표현이 그 자체로 갖는 힘 덕분에, 그 앞뒤의 “미치다” 같은 자극적 단어를 잊게 한다. 헬라어나 라틴어 원문들은 아무래도 sober(술에 취하지 않은, 깬)의 어감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데, 유독 메시지 성경만큼은 sane이라는 유의어를 채택했고, 그 덕분에 insane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의 반대어라는 사실을 내게 확인해 주었다. sane을 사전에서 찾아 그 예문들을 읽어 보면, 유진 피터슨의 단어 선택이 ‘분별 있고’, ‘온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정신이 또렷한, 미치지 않은, 사상이나 행동이 온건한.

sane, 맨정신일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적어도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일은 대낮에 햇빛 보는 것처럼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긴 것은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여 나타난 예수님을 목도(目睹)하였다. 그것은 그가 기어코 유대인들, 그의 동족들, 온 누리 열방의 만민들에서 바리새 강경파 칠삭둥이 같은 자기에게까지 누구에게나 참된 메시아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눈을 비비고 다시 찬찬히 똑바로 읽어 보면, 지금껏 예언자들과 모세의 글에 기록된 바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귀 따갑게 예언되어 왔던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임무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시하여 검거 추포하고 다니는 것에서,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입증하는 것으로 전환되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귀결은 그저 옳고 바르며 떳떳하기만 한 것이다.
실제 상황은, 바울 사도가 미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버니게, 벨릭스(“아닌데요. 전 지금 지금 맨정신으로 맞는 말만 말씀드렸습니다.”), 아그립바(“임금님은 선지자는 믿으시죠? 믿으시잖아요.”)와 그를 핍박하고 고소 고발하는 동족 유대인들이 미친 것이었다. 그러니 형사법정 한가운데에서,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로마 황제를 직접 보겠다고 상소한 사람이, 말실수나 헛소리는 고사하고 이렇게까지 태연자약할 수 있는 것이다. “제 말이 짧았는지 길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전 임금님이나 여러분이 저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처럼 은팔찌까지 따라 차실 필요는 없구요.” 그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폐정을 하고 일어나 나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말, ‘참되고’ ‘정신차린’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이 미친 건 아닌데.” “일단 형사사건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근데 왜 괜히 로마 시민이랍시고 전하께 상소를 올리고 그러는지… 대충 훈방 조치 받고 끝내질 않구.”


그리고 지금은,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시대다.


수십 명 제복 차림의 남녀가 “고객님”을 “사랑”한다고 웃으며 외치는 시대. “저는 열정과 패기와 비전이 있는 인재입니다” 운운하는 몇 겹의 모순으로 포장된 자기서술이 가능한 시대. “avc=mc=p일 때 최대 이윤이 달성된다” 따위의 유사-물리학이 강의되고 암기되고 복사되는 시대. 리비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마케팅”이, to부정사의 이러저러한 용법이, 후삼국시대가 원래부터 거기 있어왔다는 양 전제되는 가정들, 그리고 실제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전제를 가정하여 성립되는 명제들. 토대가 없는, 토대와의 결별을 숭배하는 아스팔트 문명. 카지노 타운 문화. 그냥 그렇게 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라는 말을 듣고 그냥 아멘 하는, 그래서 사실은 아무것도 믿는 바 없는 아멘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고도 우리는 금융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못하고 있으며, 압박 면접 같은 것이 극소수의 경우에만 유효한 인사 선발 방식임이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는데도 너도나도 그것을 따라하고 있고, 우리는 마치 이 모든 insanity에 발맞춰야 한다는 듯 매일같이 서점에 열다섯 겹으로 쌓이는 “주목받는 신간”의 제목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 그 책을 열심히 구입)한다. 주목받는 신간이라고? 장난하냐? 그럼 열다섯 겹으로 쌓아서 복도 한가운데에 거추장스럽게 늘어놓는 책이 주목받지 않고 배겨?


맨정신을 되찾자. 맨정신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그리고 충분히 경악(驚愕)하시라.


주목받는 신간이 사실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주목을 창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박 면접이란 참말이지 면접이고 뭐고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도저히 주고받을 만한 대화가 못 된다는 것을, avc니 mc니 하는 용어가 괜히 헷갈려서 그렇지 사실은 파는 만큼 본전을 뽑아야 장사가 된다는 것쯤 동네 점빵 할머니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중 누구도 “고객”이 아니며 저들 중 누구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좀 까발릴 필요가 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그 다음에는 주변에,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에. 맨정신으로 세상을 보면 정말 끔찍하다. 그곳은 거짓말이 횡행하고 자기기만이 사방에 뒹굴며 허위의식이 온 천지에 가득한 곳이다. 당신은 이 거짓을 견디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대답해 볼까? 당신이 이 지구상의 거짓말과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을 감내하거나 즐기거나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스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다, “니(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희)를 미치게 한다!”


필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맨정신이다. 용어가 아니라 건전함이다. 공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조리와 분별이다. “어떻게”에 대한 맹목적 천착이 아니라, “왜”를 끊임없이 재점검하는 참되고 정신차린 말들이다. 그 결과는 어떤 믿음일 수 있겠지만, 맨정신이 된 사람들 중 누구도 믿으시면 아멘 하라는 말을 듣고 그냥 아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참된 말도 아니고, 정신차린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당신이 sane하다면 당신의 말을 듣고 누군가는 벌떡 일어나서 당신에게 미쳤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야 할 터이다. 당신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정말 못 들어주겠군요, 어떻게 그런 소릴 감히 이런 자리에서, 당장 나가세요. 왜냐고? 이 세상은 정말이지 insane하기 때문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라. 눈을 감고, 잠시 당신의 머릿속의 그 많은 학문들이 주는 생각을 비우고, 다시 눈을 떠라. 아주 새삼스럽게, 목전의 세계를 다시 목격(目擊)하라. 그리고 ‘맨정신으로’ 당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 무엇인지 증언하기 시작하라.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놀라고 분개할 것이다.




맨정신 인터뷰 프로젝트

맨정신 인터뷰 프로젝트

(codename sane_interview, project initialized by yupto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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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

문의와 답변

2014. 7. 22. 21:26

1. 문의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방금 전에 브랜드 연필 2통 구입한 김어진입니다.

결제 과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넣었고 계좌이체를 마쳤는데(21시 06분경 농협), 확인 메일이 오질 않네요.

주문이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이메일 주소에 오타가 나 있다면 yuptogun@gmail.com 으로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와웸에 6년 정도밖에 안 있어 봤지만 CMK쪽에 상품 결제 관련 질문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CMK가 브랜드를 운운하리라는 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말해서, 이 방향성에 대해 마음을 사기가 어렵네요. 우리는 단순히 티셔츠나 기도책자, 콜드컵 같은 걸 사고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딘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마음을 사는" 사역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너무 고리타분한가요? 휴학 중 학원 일을 하게 되면서 7개월째 캠모 캠워를 안 가서 그런 걸까요? 이번 MC를 참석했더라면 충분히 마음을 사고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우리가 말해 왔던 과격한 헌신인가요? 한 발 물러나서 보자니 잘 모르겠습니다.


2. 답변

김어진님 안녕하세요.  

예수전도단 한국대학사역입니다.   


주문하신 내역은 조회 결과 주문 처리(입금완료) 되었습니다. 입력하신 Gmail의 경우 주문 확인 메일이 스펨함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펨함에도 없는 경우엔 다시 답변주시면 저희도 이니시스 쪽에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전문 쇼핑몰이 아니고, 현재 간사님들이 MC 마친 이후 잠깐의 숨고르기 시간과 전도여행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배송드릴 예정입니다.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주시길, 양해를 구합니다^^ 

 

배송비까지 결제까지 잘 되신거 확인되면 바로 월요일에 배송하겠습니다. 

 

한국대학사역과 계속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필로 사랑을 쓰윽쓰윽 적어내려 갈때마다 주님과 더 깊은 사랑이 쌓여가길, 부족하지만 기도할께요.  

  

그리고 추가로 의견 보내주신 것에 대해 짧지만 제 마음을 나눌께요. (공식적인 CMK의 답변이 아닌 것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저도 짧은 시간 이 몸에 있었네요. 04학번 학부때부터 간사로 섬긴지 만 5년의 시간이 지났네요^^ 

 

김어진 님의 질문이, CMK 브랜드를 런칭 준비를 할 때에 저의 마음과 비슷한거 같아요. '브랜드'는 단순히 무언가를 판매하는 것 이상에 '네임 벨류'를 부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겨지게 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에게 더 많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몸을 위한 것을 뛰어 넘어, 우리 몸 밖과도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 몸에 있는 분들에게 (복음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이런 작은 물건으로도, 로고로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고리타분하지 않구요, 충분히 그런 갈등을 느낄 수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더 많은 채널과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더 느낄 수 있도록 CMK도 노력하겠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셨는지요. 완벽하지는 않겠죠? ^^ 더 궁금한거 있다면 연락주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3. 수긍은 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허허롭다고 느낀다.

연필은 예쁘고 좋다. 잘 샀다. 여전히 이 몸에 있을 테고 의탁할 테지만, 글쎄 나는 YWAM CMK라는 네임을 자랑스러워하게 될까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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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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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삿17:6, 21:25)


나는 이 말씀의 ‘왕이 없었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옹립되지 않았었다”라고 읽지 않는다. 이것은 사사기라는 히브리 경전의 한가운데와 맨 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가장 극적으로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요약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왕이 없었다’는 말은 “왕정(王政)”, 나아가서 정체(政體, regime)가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뒤의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라는 서술이 상호 호응이 된다. 왕이 있든 없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임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 이상을 함축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개념과 사사기의 ‘왕이 없어 저마다 자기 뜻대로 하더라’ 관점은 서로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상적인 왕정은, 아니 이상적인 정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는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원망(願望)의 응축 및 실현일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에 따라 regime의 종류가 나뉘는 것일 테다. 왕정에서는 그것이 ‘성군’으로 응축되어 ‘태평성대’로 실현될 것이 기대되며, 일반 민주공화정 사회에서는 대의제, 삼권의 분립 및 적극적 활약을 통해서 각 사안별로 수시로 응축 및 실현될 것이 기대된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저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 대통령님이 왕과 같은 자리에 있는 셈이다” 운운하는 유치한 말씀 해석이 한탄스러울 뿐,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왕”을 모셔 본 적이 없거나, 진정으로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는 둘 다일 것이다. 그때에 이 반도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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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 썼던거 보관용으로 긁어옴.


사53:9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메시아의 무덤은 부요한 사람의 것이어야 했다.
이것을 알았던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눅23:51)가 한 명 있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눅23:50) “부자 요셉”(마27:57).

메시아가 사형당하셨고, 누군가 부자인 사람의 무덤에 그분을 모셔야 했고, 제자들이란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숨어지냄)”(요19:38)하던 그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당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는 무덤에 묻힐 권리도 없었고 시신을 수습하는 자도 없었다. (보통 십자가 위의 시체가 저절로 썩어 없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게다가 빌라도에게 직접 찾아가 사형수의 시체를 직접 요구할 수 있는 유대인은 지극히 소수였다. 요셉은 알고 있었다. 메시아 그분은 분명히 오늘 죽으셨다. 그 무덤을 준비해야 한다.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 있는가?

막15: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시신이라고? 벌써 그가 죽었단 말인가? 사형 책임자는 의심하는데 예언을 받은 이는 확신한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 중엔 간혹 2~3일간 숨이 붙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빌라도의 경험상 지금 이미 죽었다는 것은 매우 급히 사망한 축에 속하는 경우였다.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막15:45)야 그는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사형수의 시체는 최고급 세마포와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쯤”(요19:39)으로 정중하게 장례된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자’로 기억된 사람은 누구나 마침내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목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가 확인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완전한 죽으심을 보았다. 그분이 정말로 죽으시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됨을 진작부터 내다보고 있다가 마침내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전부 내어던져 이를 성취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지금도 복음서 네 권에 전부 언급되는 영광을 누리며 믿음의 제자로 기념되고 있다.


Brian BeomS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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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2

2013. 4. 27. 07:14

단칸방.


고작해야 10평이 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

한쪽 구석에 문이 있고, 그 반대편 벽에 커다랗게 난 채광창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

그 빛을 마주보고 방에 앉은 그분.

보좌에 앉아,

탁상 위의 서류들을 보고 일을 하고 계시다.

방을 가득 채우는 그 빛이 워낙 밝아서 서류의 글자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얼굴, 심지어 신체 윤곽마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왼편에 서 있는 나.

아무 불편함이 없는 침묵.

문득 나를 쳐다보시는 그분.

나는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닫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침묵하는 웃는 얼굴을 보인다.

그때 분명히 웃는 것처럼 보인 그분의 표정.

다시 길고 긴 침묵.


일하시는 그분.

그분이 일하심을 그분의 왼편에 서서 보는 나.

그뿐인 방.

쏟아지는 빛.




http://bible.us/88/1co.15.20.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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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1

2013. 4. 20. 07:14

잔치상.


어마어마하게 길게 쫙 늘어져 있는 테이블.

접시와 잔과 식기와 진수성찬이 걸지게 차려져 있고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먹고 마시고 있다.


그 많은 잔치상 한쪽에 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다.

완벽하게 세팅된, 가서 앉아 들기만 하면 되는 한 자리.


내 자리.




http://bible.us/88/1co.15.20.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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