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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다음 칼럼에 대한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고해 주세요: [임마누엘 칼럼] 한국에는 기술보다 과학적 사고가 필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님께.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지구의 날을 맞아 응용과학의 겉면만을 피상적으로 즉각적으로 감각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버리고 우리 모두 좀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력을 기르자는 취지의 기고를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부분 동감했습니다. 특히 매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서 사고력을 사용할 기회를 앗아가는지, 우리가 얼마나 “기술적인 성취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가득차 있으면서 정작 “스마트폰이나, 정부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는지 지적하신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제안해 주신 내용들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게 하는 교육 관련 법”이 그렇고, “‘주의 지속 시간’”이라는 개념이 그렇고 “젊은이들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조치”가 특히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교수님께서 개탄하신 현 상황을 고치는 방법이 이러한 외부적이고 개별적인 조치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이런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조치들을 해 봤기 때문입니다.

대략 2년쯤 전에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앱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위원회가 오랜 시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하고 설치를 강권한 애플리케이션이지요. 목적은 명백했습니다.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완화와 부적절한 정보로부터의 청소년 보호. 기능도 계획상으로는 훌륭했습니다. 이제 적어도 청소년들은 비디오 게임을 줄이고 “정책이나 경제에 대한 글”을 조금이라도 더 읽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스마트 보안관이라는 검색어의 연관키워드는 ‘뚫기’가 되었고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것을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사업은 순식간에 백지화되고 맙니다.

의무적으로 어려운 글을 읽도록 장려하는 문해력 향상 프로그램은 어떨까요? 글쎄요, 교수님의 글을 소개한 중앙일보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에 따르면 “이렇게 또 수능 비문학 지문이 어려워집니다…ㅠㅠ” 그리고 교수님이 제안하신 교육 관련 법의 한국적 결과에 대해 이 댓글보다 정확하게 내다보는 분석은 달리 더 나오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정말로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기성세대에게 책임이 있는 허물과 폐습을, 다가오는 신세대가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해 왔습니다. 나쁜 것은 어른이지만 앞으로 잘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었죠. 이는 거의 미신적 전통이라 할 만한 불합리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논의의 범주를 벗어나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제 제 요지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게으르거나,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인내력이 없다거나 해서 과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지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부지런하고, 세상은 그들의 관심을 지나치게 요구하며, 그래서 그들은 만사에 초인적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는 많은 정신적 자질 중 과학적 사고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고력의 ‘trade-off’가 일어난 것이죠.

기왕 경제 용어를 썼으니 조금 더 알은체를 해 보겠습니다. 비용과 효용 모델을 도입해서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한국인들에게 있어 과학적 사고를 관철할 때 얻는 효용은 비용에 비해 턱없이 모자랍니다. 혹시 “설명충”이라는 인칭명사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구태여 답하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참고할 수도 있을 사실관계를 굳이 전재(轉載)해 오는 봉사자들에게는 이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열심히 검색하고 책 찾아서 뭔가를 써 올리는 비용에 비해 돌아오는 효용이 절망적이니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한때 자신의 자존감을 ‘스피드왜건’으로 내세우던 설명 봉사자들은, 순식간에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미디어의 행태도 그렇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미디어가 사안에 대해 일어나야 할 반응과 감정을 그들이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모든 걸 끼워맞춘다고 하셨지요. 타당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시청률이며 접속자 수 따위의 얼마 안 되고 일회적인 수치 때문에 휘둘리는 바보스러운 작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안은 이미 알려져 있고 이해 가능하며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대단히 지겹고 반복적인 구태의연함의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것을 각개 사안별로 가설 세워 검증하고 꼼꼼히 복기하는 것은 과연 비용 대비 효용을 얼마나 보상하는 일일까요? 한국인들은 그런 일에 머리를 낭비할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바보스럽게 모든 것을 정해진 틀에 끼워맞춘 다음 편도체가 시키는 대로 반응하겠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지금 우리가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차갑고 차분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제 삶이 어떤가 하면, 바보스럽고 구시대적이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 꽉꽉 들어차 있는 삶이라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교수님의 조국에서 주로 나오던 정치 경제 이슈가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제가 지난 20여년간 보아 온 이 나라에서 정치 이슈의 절대 다수는 “제발 뇌물 받지 마라”였고 경제 이슈의 대부분은 “제발 돈벌이로 사람 죽이지 마라”였습니다. 단언하건대 이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합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법치 질서가 더 긴요합니까?

심지어 정치와 경제를 벗어난 생활 전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속성장 산업화 시대의 생활 양식이 아직도 먹히는 줄 알고, 혹은 그 다음 단계의 사회에 대한 각오가 총체적으로 미흡해 있어서, 아무튼 여러 이유로 ‘지금껏 살아온 대로’ 꾸역꾸역 살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지만 각자의 사업체는 지금껏 해온 대로 성장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 각자는 추가 근무와 더 적은 행복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이 근본적 불행 양산 체계를 해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한강 다리로, 스마트폰으로 도피를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사고력은 터무니없이 값비싼 것입니다. 아카데미 수강료, 순수문학이나 기초학술 분야의 책, 문사철 전공수업 등은 그 돈을 내고 내 것으로 만들기엔 어디 가서 쓸 데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인문학의 위기”, “기초과학 홀대” 운운의 지엽적인 몇몇 용어로 묶여서 이 사회 전체의 병폐와 별 관련 없다는 식으로 분리시키는 행태조차도 불만족스럽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력이 없는 게 아니라, 과학적 사고력을 사용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비용 때문에 그걸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설명충 소리나 들을 게 뻔한데 팩트체크는 왜 하며, 아무나 한 명 지목해서 화내고 넘어가면 그만인 뉴스를 무슨 유난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피곤해 죽겠는데 어떻게 주말에 책을 펴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을 때, 오히려 열심히 사고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좀더 낫게 만들어준다는 확신이 설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과학자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네티즌 수사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그러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 그러했고 각종 게이트가 터졌을 때 그랬습니다. 그 사안들은 조금 덜 지겨웠고, 약간의 새로운 설명이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이 지겹디지겨운 사회가 조금은 변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죠. 이제 제 요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이 모든 행태는 철저하게 경제학적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경제학적으로는 언제나 합리적이었다는 뜻이죠.

친애하는 교수님께, 이 모든 의견에 찬동하여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사안이, 이 병폐가, 이 추한 사회가 교수님의 기고문 속 전제들처럼 단순하고 한심스럽고 직렬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과학적 사고는 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뇌에 더하여 과학적 사고가 가능한 ‘토양’까지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모든 국민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 정도는 아주 딴생각을 하고 살아도 좋다는 보장이라든가, 정부 혹 기업체가 성장과 결과 위주의 방침에서 벗어나 좀 다른 걸 목표하기 시작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그렇게 과학적 사고력에 대한 비용이 할인되고 효용이 오르면,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과학적 사고력을 구입하고 유통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저를 가장 슬프게 하며, 저로 하여금 교수님의 기고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부족한 졸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어진

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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