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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친구 안녕? 정말 반갑다. "이 모든 입시제도와 고등교육은 망한 것이다. 대한민국 학교 다 지옥가라 그래"를 속으로 몇십 번 외치면서 결국 끝내 시험을 쳐서 여기 들어온 게 자랑스럽겠지. 서강고등학교에 온 걸 환영한다. 수업 종이 울리는 6교시의 학교 생활은 아마 익숙하게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사물함 배정공고. 정하상관 3층


사물함 배정은 받았니? 그래, 좋겠다. 네가 자주 수업을 듣는 정하상관, 그것도 가장 편리한 1층에 배치를 받았구나. 나는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는 사물함. 편리하지. 귀한 책과 노트북과 무릎담요를 넣어놓고 유용하게 쓰길 바랄게.


음?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생겼어? 아, 너의 사물함이 자물쇠로 잠겨 있단 말이지? 저런, 어떡하니? 네가 어렵게 신청해서 어렵게 마련한 소중한 너의 수납 공간을 누군가가 침범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주변 눈치를 잘 봐서 너도 예전의 사물함 사용자를 위한 포스트잇을 하나 붙여야겠지?


퇴거 요청이 붙은 사물함. 정하상관 1층


그래, 마음이 불편한 거 나도 잘 알아. 옆에 붙은 쪽지들을 보니 다들 "강제철거", "자물쇠 자르겠습니다", "꼭 빼 주세요" 등등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들로 반 공갈협박을 하고 있다는 거. 그걸 따라하는 건 좀 양심에 걸렸지만, 어쨌든 그 사물함은 너의 자리이니 그렇게라도 해서 너의 사물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수순을 밟는 게 맞을 거야. 뭔가 미안하니까 '죄송해요ㅠㅠ 꼭 빼주세요ㅠㅠㅠ' 같은 문자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너의 연락처도 적어야 할 테고.


자, 이제 전 주인이 사물함 자리를 내어줄 것을 기다리며 밥을 먹으러 가야겠지? 어디 갈까? 엠마오관이 깨끗하고 좋다는데 마침 가까우니 거기로 갈까?


구 삼민광장 자리. 최양업관에서 내려다봄


응? 저 네모난 유리상자들은 뭐냐고? 아, 저거? 아직 곤자가 플라자는 안 가봤구나? 저 유리상자는 사실, 저 아래 지하층에 있는 곤자가 플라자라는 지하상가의 천창(天窓)이야. 원래 곤자가 플라자가 지어지기 전에 방금 네가 지나온 저 이상한 공간은 삼민광장이라는 곳이었대.

왜 우리 학교에는 대학의 상징인 잔디밭 하나가 없을까 궁금하지 않았니? 있었어. 08년도가 오기 전만 하더라도 말이지. 내가 입학할 때쯤에 온통 잔디밭이었던 저 공간을 갑자기 공사장으로 만들었대. 그리고 '민자사업 유치 기숙사' 건설과 함께 지하상가를 만들고 그 위에는 미묘한 공터를 만들었어. 그게 방금 네가 지나온, 아무 이름도 없는 공간이야. 길이 좀 불편하지? 저 비좁은 길로만 다녀야 하는 이유,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옛 삼민광장.


그곳에서 우리는 원래 이렇게 앉고 모이고 드러눕고 공부하고 놀고 기타 치고 햇빛 쬐고 할 수 있었대. 청춘의 공간이지. 아무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함부로 없앨 수 없었던 공터였던 거야. 솔직히 너도 이렇게 좁은 학교에 변변한 광장 하나 없는 게 얼마나 갑갑하니?

하지만 경영학을 전공하신 전 총장님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봐.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토지는 산업화 내지는 토건 개발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 같아. 어쨌든 방금 막 들어온 총장님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곳도 방금 당신이 물려받은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마치 네가 지금 막 사물함을 배정받은 것 같이 말이야. 빨리 국가에 신청서를 내서 개발 계획을 배정받고 몇 월 며칠까지 사람들을 치우지 않으면 강제로 철거하겠다는 안내도 붙여서 말이야.


북아현 재개발 구역 현장 사진.


우리 학교에서 2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금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북아현이라는 곳이야. 재개발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강제 철거되고 안내문이 나붙고 자물쇠를 자를 줄 아는 용역이라는 이름의 깡패들이 끊임없이 출동하는 곳이지. 누가 그러는 거냐고? 누구일까? 생각해 보자. 누가 사물함 철거를 원할까―원래 주인 아니면 새 주인? 새 주인이지. 누가 북아현 철거를 원할까―원래 주인인 주민들 아니면 새 주인인 건설자본과 모피아 관료들? 그분들 입장에선, 마치 네가 방금 배정받은 '너의 권리가 있는' 너의 사물함을 빨리 사용하길 원하고, 전 총장님들이 방금 배정받은 '당신들의 권리가 있는' 당신들의 삼민광장을 빨리 유용하게 이용하길 원한 것처럼, 북아현도 그런 곳일 뿐이야. "죽어도 이 사물함을 빼 줄 수 없다, 나는 이 사물함을 이용해야겠다"라고 박박 우기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저기서 살고 있어. 그래서 아직도 이곳은 개발이 되기는커녕 서울시장님도 풀지 못하는 문제 지역으로 남아 있는 건데...


아, 미안해. 너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자, 밥도 먹었으니 다시 강의실로 가 볼까?


곤자가 플라자 위 가로수


무슨 수업 들어? 철학 산책? 음, 좋은 수업이지. 맘 편하게 듣고 족보 꼭 찾아보고. 그 교수님이 기독교 얘기 많이 하실 텐데 불편하면 그냥 흘려 듣고. 흠, 이 가로수들은 완전 반토막이 났네. 뭐? 왜인지 아냐고? 나야 모르지! 내가 가로수를 심어봤어야 알지.

근데 참 저 나무들은 참 불쌍해. 지리산이나 중국이나 아니면 핀란드, 하여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딘가에서 잘 자라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뜯겨져 온 거지. 그리고 사람들은 다짜고짜 자기들을 여기에 꽂아넣었어. 일단 흙과 물과 빛이 있으니 살 수는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 보니 자기들이 뿌리내릴 수 있는 깊이가 한정이 돼 있었던 거야. 아까 뭐랬어, 이 밑에 지하상가가 있다고 했지? 나무 뿌리가 지하상가까지 뚫고 들어가면 안 될 거 아냐? 그래서 아마도 저 나무의 뿌리 끝은 견고하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 가로막혀 있을 거야. 게다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뿌리를 둥그렇고 조그맣게 말아서 오랜 시간 운반해 온 바람에 깊고 웅장하게 오래오래 뿌리내린다는 게 뭔지 잊어버리기 시작해. 그리고 어느 날인가에는 자기의 목 언저리가 잘려 나가도 이렇다 할 항변 한 번 하지 못하고 생을 지속해. 그나마 다시 뿌리뽑혀 내어버려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면서, 고작 지하 1층 깊이도 되지 않을 그 몇 줌 안 되는 흙의 영양분을 빨아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대학생들, 현대인들, 자기라는 하나의 생(生)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영영 모른 채, 그저 비좁디비좁은 그 한 평 땅뙈기에 잠시 얕은 뿌리나 찔끔 내려 놓고 그걸로 뭘 빨아먹어야 '서바이벌'할 수 있을지에만 목을 매달게 된 존재들.


어휴, 너무 철학적인 얘기를 해 버렸나? 안 되겠다. 빨리 수업 가자. 계단으로 가는 게 빠를 거야.


1층~2층 층계참. 정하상관


저기 얼룩덜룩 붙어 있는 게 뭐냐고? 동아리나 학회나 각종 콘서트 같은 거 홍보하는 전단지 붙어 있던 자국이야. 지금은 다 철거를 해 버렸네. 완전 깨끗하다. 너도 동아리 할 거야? 하는 게 좋아. 대학생쯤 됐으면 행사도 개최해 보고 선배들도 만나고 저렇게 전단지도 붙여 봐야지, 안 그래? 근데, 전단지를 붙일 때는 '자진철거를 언제 하겠다'라는 내용을 전단지에 적어서 붙여야지, 안 그러면 청소하시는 노동자 어머니들이 저렇게 가차없이 떼 버려. 오래 붙어 있어봐야 소용이 없거든. 저 자리에 전단지를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너무 많단 말야. 그게 현대 사회야. 별로 넓지도 않은 공간을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덕지덕지, 남의 것 위에 자기 것을 붙여 가면서, 자진철거 기간이 지난 것은 담당자가 떼기 전에 자기가 우드득 뿌드득 찢어 뜯어버리면서, 자긴 영영 붙어 있을 작정으로 갖은 애를 쓰는 저 지하 1층 깊이도 안 되는 땅, 또는 저 좁디좁은 층계참 벽 같은 것 말이야.


잘린 사물함 자물쇠. 정하상관 1층


잘린 자물쇠 보여? 저렇게 부질없이 잘려 나간다니까. 아무리 튼튼한 자물쇠를 사다 놓고 네가 너의 사물함 자리를 영영 쓰고 싶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한 학기야. 다음 학기에 졸업이나 휴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매 학기 사물함을 바꿔. 그때마다 저렇게 처참하게 잘린 자물쇠와 가차없이 철거된 사물함들을 볼 수 있어. 사물함 속의 교재와 무릎담요와 귀중품들은 쓰레기처럼 내버려지지. 그게 뭐나 된다고, 결국 마지막엔 그렇게 내다버릴 거면서 다들 악착같이 자물쇠를 자르고 예전 주인을 내쫓고 재개발을 하고 민자사업을 유치하고 사람을 철거한단 말이야.

그러니 이걸 꼭 기억해. 누군가가 다음 학기에 너의 귀한 것이 가득 들어 있는 "너만의 사물함"을 갑자기 강제철거하더라도 너무 화내지 마. 그날 너는 네가 왜 철거되는지 모를 테니까.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철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철거당하는 게 이 사회에 의해 왜곡되고 강압된 모순적 존재양태라는 이야기를, 너는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고 기억할 테니까. 난 간다. 수업 잘 들어! A+ 많이 받고.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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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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