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7
=588,584

군인이다 보니 밥 남기면 군기순찰에 불이익을 받는 지경이라 억지춘양으로[각주:1] 안 남기고 있습니다. 느낀 바가 있어 외박 나와서 쫙 적고 갑니다.

하나, 음식쓰레기는 없어지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음식 남기기란 자신들의 풍족과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척도다. 달리 말하면, 남김없이 다 먹는 사람일수록 '허기지다', '밥 한번 복스럽게 먹는다'[각주:2],'못 먹고 자랐다' 등의 동정을 산다: 당신이라면 이런 대접을 받아 가면서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싶겠는가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전국민 못 먹고 자란 사람 되기' 캠페인에 동참하고 싶겠는가?
둘, '잔반 남기지 않기'는 정말 본질적이지 않다. 잔반을 남기지 않으려면 배식을 적당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잔식(배식조차 되지 않은 새 먹을거리)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자연히 배식조를 투입시켜 모두가 정량을 먹게 만든다. 다시 잔반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물리적 차원에서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밑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왜 남기는가'에 있다.
셋,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매년 몇억 명이 굶어죽고 있다고?[각주:3] 그러면 왜 작년이나 재작년 혹은 문민정부 시절부터 추진하지 않다가 지금 하는가, 아니 그보다, 우리가 먹는 걸 줄여서 어쩌자는 거야 푸드뱅크도 안 찾고 있으면서? 탄소배출을 막자고? 잔반 한 숟가락 더 먹어 없애는 것 가지고 정말로 CO2 배출량이 줄어들고 지구가 시원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저탄소 녹색성장 운운하면서 이 삽질정책을 나름대로 정당화하고 있긴 한가 본데 도무지 나는 납득하지 못하겠다. 시키니까 안 남기고 있을 따름이지, 지지난 주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선 전입신병부터 말년병장까지 모두가 짬통에 식판 팽개쳐서 잔반을 쌓아놓고 살았단 말이다.
넷, 나는 누가 왜 이 짓을 시키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건 정말로 2MB식 사고에서나 나오는 "잘못된 시대착오"의 끝장 그 자체다. 나는 그 논리를 알 수 있다. '소말리아 불쌍해 + 탄소 너무 많이 나와 + 요즘 사람들 배고픈 줄을 몰라ㅉㅉ' → '음식만 좀 안 남겨도 좋을 텐데ㅇㅇ' → 'ㅇㅋ 음식이 썩으면서 탄소 나오고 자원 낭비되고 사람들 굶어죽으니까 이거 추진해야겠네ㅎㅎ' 이게 다다. 이런 걸 일컬어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한다.
다섯, 이제 뻘짓 작작 하고 다시 접근하라. 잔반과 잔식의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남기지 않기'의 패러다임에 시대착오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가능하다. 내가 환경부 생활폐기물과 과장이라면, 예산을 총동원해 A+급 CF감독을 영입하고 "적게 만들어 적게 먹기"를 광고하겠다. 적게 만들어 적게 먹기, 이것이야말로 영양 과잉과 식자재 낭비 그리고 잔반 및 음식쓰레기 문제의 본질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 접근이지,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는 다그침에 대답할 21세기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공익광고 콘티를 하나 생각해 봤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의 음식물 쓰레기 제로화 노선으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 당장 각종 급식부터 식재료 노르마와 식단의 합리화를 시행해야 한다. 그리고 식재료 공급이 획기적으로 줄어 남는 식재료를 그 굶어죽는다는 동포들을 위해 쓰면 되는 것이다. 탄소는 정말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까 옆으로 좀 치우고![각주:4]
  1. 아니 진짜 억울한 게, 난 원래 안 남기던 사람인데 그걸 강제하니... [본문으로]
  2. 뭘 모르는 촌놈 여러분을 위해 촌놈인 제가 알려드릴게요. 이건 동정이자 욕입니다. [본문으로]
  3. 구체적인 수치는 찾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수보다 어쨌든 훨씬 클 테니까. 이런 것을 일컬어 문맥상 무의미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밥과 탄소가 무슨 관련일까? 여러분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가 혹은 어렴풋이 느껴질 만큼 그 관계를 심각하게 체감하는가? 아닐걸? 이런 걸 일컬어 개연성이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엽토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781)
0 현재 호주워홀 (6)
1 내 (325)
2 다른 이들의 (251)
3 늘어놓은 (34)
4 생각을 놓은 (68)
5 외치는 (69)
9 도저히 분류못함 (27)

달력

«   2018/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tatistics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