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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동 실로암분식 설거지하는 김씨 아줌마
written by 김어진, 2006

천호동은 서울의 전형적인 누항- 서민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손잡으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익숙한 동네입니다. 강남이 A클래스들의 메이저리그고, 명동이 자본 그 자체라면, 천호동은 이름 그대로 일천 가구가 돈이고 계급장이고 할 것 없이 한바탕 뒹구는 삶의 터라 하겠습니다.
이런 천호동이니만큼 먹을거리도 아주 익숙합니다. 순대 2인분을 떡볶이 3인분에 푹푹 찍어먹으면 학생 넷이 끼니를 때웁니다. 아무리 호화판으로 먹는대도 한두 점 입주해서 겨우 유지비 본전이나 건지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일식집 정도입니다.
학생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학원이 흥하고, 학원 옆에서는 온갖 분식, 야식, 패스트푸드집이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룹니다. 그리고 천호동 한자리에 버젓이 위치한 ‘세계학원’ 밑에는 퍽 오래된 ‘실로암분식’이 있습니다. 2층부터 위로 세 층 크기로 입주한 세계학원 외벽에는 빗물이 주름처럼 흐느적흐느적하게 묻어 있고, 해마다 그 골이 깊어가는데, 1층에 덕 버티고 앉은 지 오래인 실로암분식 가마솥 옆에도 해마다 기름때, 연기 그을음이 농해져 갑니다. 두 집은 매상도 같이 올리고, 불황도 같이 겪고, 나이를 같이 먹어가는 것입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내심을 받음’이라는 뜻인데, 기원후 대략 32년쯤 되던 어느 날 이스라엘의 어떤 맹인이 한거리에서 한 고귀하신 분의 도우심으로 놀랍게 눈을 뜨고서 그 눈을 깨끗이 씻은 자리로 유명합니다. 신기하게도 이 기적을 어떤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이야기와 ‘실로암’이라는 지명이 좀 두껍고 신기한 책에 실렸고, 이 책은 유사이래 최대의 판매고를 올립니다. 그 성자께서는 “거 너무 자랑 말고 가서 씻고 보아라” 타이르셨을 뿐이지만, 이 맹인(이었던 이름 없는 이)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대놓고 알아보게 해 준 하나의 증거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소경과 같은 인생역전을 꿈꾸므로, 지구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주식회사 실로암이 있고, 실로암 교회가 있고, 실로암 가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늦봄날이었던가, 작년 겨울 실로암분식에 새 식솔로 들어온 김씨 아줌마는 여느 때처럼 말없이 부엌 바닥에 의자 하나 놓고 앉아서 컵이며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실상 설거지야말로 김씨 아줌마가 그곳에 들어가 고무장갑 낀 뒤부터 이때껏 해 온 일의 전부입니다. 분식 동료 아줌마들이 하도 ‘설거지 아줌마, 설거지 아줌마’ 하고 불러댄 바람에 학생들도 김씨 아줌마가 어쩌다 부엌을 나와 있으면
“설거지 아줌마, 물 한 컵만 좀 주세요!”
하고 으레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겁니다.
그런데 김씨는 원래 사람이 그런 그릇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이 일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첨 김씨가 실로암분식에 찾아왔을 때, 그는 왼손에 광고가 난 신문 오림을 들고, 대뜸
“일할게, 돈 좀 줘요.”
하고 되게 퉁명스러웠다나 봅니다. 아니나 다르랴, 김씨 아줌마는 하는 것마다 불평이고 맡는 일마다 볼멘소리였습니다. 돈을 벌어가기 위해 여기 있을 뿐이라고 그는 행실로 보여주었습니다. 접때 언젠가는 김씨 아줌마가 튀김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지 좀 늦게 출근한 김씨가 앞치마도 두르기 전에 튀김 바구니가 휑뎅그렁한 것을 보고는 식겁을 하더랍니다.
“어머머, 기가 막혀. 방금 튀김 맡은 아줌마 누예요?”
누구도 뭐라는 사람 없는데, 김씨는 하늘이 꺼지기나 하는 듯이 다급하게 굴었다죠. 당장 손을 후닥닥 씻더니 고구마며 푸성귀, 새우 따윌 팔팔 끓고 있는 기름 가마솥에, 그것도 방금 막 씻은 그 맨손으로 덤벙덤벙 빠치우고 새 튀김을 막 만드는 겁니다. 젖은 손으로 튀김을 하는데 뭐나 잘 되겠습니까? 김씨는 아야 뜨거 제미럴, 튀어 오르는 기름에 욕을 하면서, 그 깊은 뜻을 설명했습니다.
“이거 이렇게 몇 개 안 남기고 대충 하다가 갑자기 튀김 찾는 손님들, 앗 따거! 손님들이 그래 떼거리로 찾아오면 어쩔려구들 그랬어요? 나처럼 미리미리, 앗뜨! 이렇게 많이 미리 튀겨놓아야 손님들 보기두 좋구 대접도 맘 놓고 할 거 아니겠어요?”
왕언니(말이 왕언니지 법적인 실로암분식 점주입니다)가 겨우 입 열어서 “아니, 지금 이 시간께야 별루...” 하고 말이나 하려는 찰나 어떤 교복 입은 소년 대여섯 명이 김씨 아줌마 튀김을 한 번 보더니, 참 재수도 희한하지,
“아줌마 튀김들 얼마예요?”
하고선, 방금까지 김씨가 튀겨놓은 걸 모조리 사 갔습니다. 김씨는 의기양양 “봐라요, 누가 맞나.” 으쓱대며 그제야 장갑을 끼고 가방 치우고 앞치마를 둘러 제대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뿐이냐고요? 그날 수업을 땡땡이쳤던 한인고 불량배 여섯 명이 길거리에서 심한 복통을 호소하여 응급실로 호송되었더랍니다. 믿거나 말거나.
무슨 얘길 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지? 예, 암튼 김씨 아줌마가 실로암분식 녹을 타 먹은 지도 어느덧 넉 달을 막 넘기던 그 어느 늦은 봄날. 컵이며 떡볶이 접시며 수저며 하는 것들의 설거질 제대로 막 끝냈는데 분식 문이 열리면서 젊은 사람들 여럿이 엉큼성큼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손님 드는 시간보다 좀 이르긴 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인원은 아니었기에 아줌마들은 이 단체고객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혈기가 왕성해서, 들어오자마자 덥다며 에어컨과 선풍기를 건드리고, “으아, 물은 또 셀프네?” 하면서 물을 계속 찾았습니다. 분식 전체 좌석의 7분의 5 정도가 차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씨 아줌마는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썰물 때(손님이 바닷물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즉 일손이 별로 필요가 없을 시간대였으니까요. 왕언니도 고참 주씨 아줌마도 이 시간까지는 근무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지금 같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은 짬밥이 낮은 김씨 같은 사람들인 겁니다. 새로 씻은 식기 날라 바치랴, 음식 대접하랴, 상 닦고 에어컨 만져주랴...
그 때 한 남자가 앉아 있다가 지폐를 손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아줌마!”
“예, 가요.”
김씨 아줌마가 그 앞까지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을 때에야 그는
“미리 낼게요.”
하고서, 파란 돈 노란 돈 빨간 돈을 섞어서 잔뜩 주었습니다. 김씨 아줌마는 그 남자를 쳐다보며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습니다.
“그거 정확히 팔만칠천 원이니까, 그 안에서 막 시켜먹을게요.”
김씨는 말없이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군말 없이 주방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단체고객들은 정말 힘도 좋게 잘들 먹었습니다. 먹으러 온 사람들처럼, 아니 말 그대로 걸신 씐 사람들처럼 안 먹는 듯하면서도 하하호호 떠들 것 다 떠들면서 계속 쿠역쿠역 먹는 겁니다. 추가도 계속 들어왔습니다. 한번에 그 많은 접시를 다 올려놓고 먹을 순 없으니 당연히 추가로 갈 줄은 아줌마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팔만칠천 원어치라고 하기엔, 추가가 어째 자꾸 들어오는 겁니다.
“설거지 아줌마,”
“왜요? 바쁜데!”
“접시 떨어졌어, 빨리 좀 씻어봐. 오므라이스는 끝났단 말야.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기다려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방금 빈 접시 받아들고 갔다가 대강 허겁지겁 씻어서 다시 요리 받아오는 일이 한 번, 두 번, 계속 벌어졌습니다.
“돈 누가 받았어?”
“설거지 아줌마 아냐?”
김씨의 손은 집중해서 볼 수 없으리만치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김씨는 허리 굽히고 앉아서 힘겹게 설거지를 하다가는, 간신히 아줌마들을 향해 고개를 빠끔 돌려
“어? 아 몰라.”
하곤 다시 설거지대야로 시선을 내꽂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젓가락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오고, 프라이팬과 조리대의 소란도 잦아들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식사를 끝낸 지 십오 분쯤 되어, 그들은 모두 일어나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잠깐만요 손님들.”
김씨가 느닷없이 나가는 사람들을 잡아 세웠습니다.
“돈 아까 냈는데요.”
“아니, 기다려 봐. 잠깐. 오므라이스 두 개, 치즈떡볶이 4인분, 라볶이 4인분, 제육덮밥 한 개...”
그러더니 마침내 김씨가 입을 열려 했고, 그 순간 뒤에서 김씨보다 짬밥 높은 윤씨 아줌마도 말을 꺼내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똑같이
“구만 원.”
손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남자가 김씨에게 말했습니다.
“저희들 분명히 잘 계산해서 팔만칠천 원에서 딱 끊었거든요? 그지 윤서야? 너네 돈까스 시켜먹고 싶다가 말았잖아.”
뒤에서 한 여자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다른 남자가 끄덕였습니다. 김씨가 한 걸음 다가와서
“그런데 왜 그릇 세본 게 딱 구만 원인데? 언니두 말 좀 해 봐요.”
“어? 글쎄, 그러고 보니 뭔가 잘못 센 거 같기도 한데. 아까 하나 취소하지 않았었나?”
“아냐. 지금 그거 분명히 계산에 넣었어.”
윤씨는 천천히 다시 그릇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가 취소라는 말을 듣고서는
“취소면 확실하네. 야, 김민준. 넌 왜 아까 너 혼자 순댈 먹겠다고 그랬냐? 같이 먹으러 왔으면 같이 먹는 거지.”
젊은이들 중 맨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옆머리를 머쓱하게 긁었습니다.
“그죠? 됐네 뭐.”
“됐다고?”
김씨가 갑자기 말꼬리를 쑥 올렸습니다. 윤씨의 눈이 한순간 희미하게 흔들렸습니다.
“안 됐네요, 이 아저씨. 베테랑 아줌마랑 내가 같이 세 본 게 딱 구만 원어치고, 실제로두 저기 요리 아줌마들 다 만든 거 합쳐보면 구만 원 나오거든? 그리고 넌 왜 슬슬 반말이냐?”
“제가 언제 반말을 했다구 그래요?”
“돈이 없으면 돈이 없다고 솔직히 말을 하든가. 그러면 서비스라도 줄 거 아냐?”
남자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예, 돈 없는데요, 그렇다고 분식집 설거지 아줌마 속여서 얻어먹고 그러지는 않아요.”
“뭐? 뭐? 말 다 했어? 설거지 아줌마?”
그 남자는 어쩌다가 아줌마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한 번 말했던 거 같은데, 이게 결국 점화 스위치가 됐습니다.
“이 자식이, 너 나 알아? 내가 설거지 아줌마면 어쩔 건데 니는 말이 그 따위야? 에이 씨, 다 필요 없어. 돈, 가져가. 너네같이 싸가지 없고 어른들 속여 먹을라고 드는 연놈들 돈을 내가 얻어 써서 뭐 하냐?”
하면서, 김씨는 씩씩거리면서,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렀습니다. 거기 돈이 있을 리가 있나요? 김씨가 주머니 속을 휘둥그레 살펴보며 사태 파악(?)을 하는 동안 윤씨는
“저기, 김씨. 애들 돈 잘 계산한 거...”
사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뭐,
“오호라.”
벌써 벌어질 일은 벌어졌죠.
“알고 보니 이거 돈 냈다는 말두 순 쌩이잖아?”
남자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손님 모두가 놀라워하면서 따졌습니다.
“냈다니까요!”
“저도 봤어요!”
“아줌마 주머니에 넣었잖아요!”
김씨는 벽창호.
“난 받은 돈은 무조건 앞치마 주머니 여기, 여기에 쑤셔 박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여기 있어야 할 팔만칠천 원이 그래 그럼 어디...”
“김씨!”
참다못한 윤씨가 뒤에서 소리를 쳤습니다.
“그릇 계산 틀렸어. 방금 먹고 나간 손님들 그릇 안 치웠어. 그거 떡볶이에 튀김 한 접시, 삼천 원 맞어. 그리고 아까 김씨 선불 받았어. 거 애들 배고파서 먹고 간다는데 좀 과한 거 아냐? 기억 안 나?”
김씨는 딱 2초 동안 어안이벙벙해하더니
“아 몰라! 꺼져 자식들아! 다신 여기 오지 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린지, 다시 그 따위로들 하기만 해 봐!”
하면서, 그들을 냉큼 내쫓았습니다. 길거리로 사라지던 무리 중 한 남자는, 몸을 뒤로 돌려서 뭐라 고함을 치며 감자바위를 먹였지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 김씨에게 조씨 아줌마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리구 삼천 원쯤은 거 팔만얼마 대목이면 좀 보아 넘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그러셨...”
“삼천 원이요? 삼천 원?”
김씨는 여전히 짜증이었습니다.
“누가 돈 달랬나? 싸가지가 틀려먹었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는, 참 지금은 으레 손님 없는 썰물 땐데 재수도 희한하지, 또 다른 다섯 명의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미트치즈덮밥 5인분이요!”
미트치즈덮밥은 실로암분식 특제 요리인데 만들기가 상당히 귀찮습니다. 그런 요리를 5인분 시키다니. 수완 좋은 천씨 아줌마가
“손님들, 이거 오래 걸리는데. 먼저 다른 거 간단히 튀김이라도 드실래요? 특별히 싸게 드릴 테니깐.”
“그럴까?”
“그러면 기왕 튀김을 먹는 김에 떡볶이도 시켜서 일단 그걸 먹자.”
“그렇게 해 주세요.”
“예, 떡볶이에 찍어먹는 튀김, 5인분이니까 원래 오천 원 나오는데 특별히 사천 원 드리겠습니다.”
김씨는 아까부터 흥정 붙이는 천씨를 원망스럽게 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동안. 왜? 웬만한 그릇은 다 나갔었기 때문에, 천씨 덕에 당장 해야 할 설거지가 자꾸 늘어나고 있었으니까요!
“김씨, 덮밥그릇 먼저 빨리 좀 씻어 봐.”
“기달리라구요!”
“재촉하잖아. 떡볶이 4인분이 벌써 거의 비었어.”
김씨는 다시 조금 울컥해서
“진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듣느니 그릇 달란 소리고, 보느니 이 빨간 다라고, 어쩌라고요! 좀 기다려요!”
“언니, 언니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애.”
“시끄러워요!”
계속되는 재촉에 설거지만 계속 정신없이 하고 있는데, 드디어 미트치즈덮밥 5인분이 모두 나가고, 바로 그 때 왕언니 아줌마가 들어왔습니다. 왕언니는 기분이 매우 좋아서 모두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윤씨! 기분 좋아 보이네?”
“아유, 언니 말도 말아요. 열 명 넘는 애들이 방금 와서 팔만 얼마 팔아주고 갔어.”
“진짜? 오늘 장사 되겠는데! 천씨, 오늘 날씨 어떻겠어?”
“오늘은 진짜 뭔가 돼요. 좀 있다가 그냥 깜짝세일이라두 할까? 무슨 날인가 봐, 언니.”
그리고, 왕언니 아줌마는 한창 들떠서, 핸드백으로 김씨 등을 탁 치며,
“헤이, 설거지 마마. 오늘은 퐁퐁 잘 먹어?”
“몰라!”
김씨는 벌떡 일어나서, 딱 3초간 왕언니 눈동자를 구멍나라 째려보곤,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앞치마를 벗고 한데 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김씨가 왕언니에게 반말로 꽥 소리친 전례도 없거니와, 분위기를 사정없이 깨 부셔버린 바람에, 김씨가 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도록 아무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김씨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김씨는 드디어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따위로 푸대접받고 사는 건, 니미, 이 쬐깐한 분식집에 식기세척기가 하나 없기 때문이야!”
딸랑딸랑. 김씨는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모두가 언어도단에 이른 상황에서, 조씨 아줌마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혼자
“퇴근 인사가 뭐 저렇대.”
했다가, 천씨에게 옆구리를 맞았고요. 이후 김씨는 한동안 출근하질 않았습니다. 왕언니는 “응? 징계 안 먹였는데?” 하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죠. 김씨는 어디로 갔느냐고요? 광화문.
이 아줌마가 드디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불꽃을 피워내기 시작했습니다. ‘전국분식업종사자조합’을 만든 겁니다. 이 아줌마가 억울하고 화딱지 나서 백방으로 알아보니 이건 뭐 사소한 다툼이라 법정에서도 기각할 거라고 하고, 자기는 생산자지 소비자가 아니라서 물어주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소리도 들리지 뭡니까? 김씨로서는 기가 차겠지요. 어느 날인가는 그래서, 서울 한복판에서 어디 가서 배를 채울지 어려워하다가 주머니에 있던 팔만칠천 원 중 천 원을 꺼내 삼각김밥을 사먹었죠. 그리고 조사해본 결과 노동조합 만드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서, 김씨는 돈을 좀 들여서 일을 벌인 겁니다. 먼 친척이 가진 빌딩에 어렵게 싼 값으로 입주해서 본부 차리고, 조합원 모으고, 부당대접 사례 접수받아서 구제해 준다는, 그래서 건전하고 명랑한 대한민국 분식시장 창조에 기여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들(?)의 제일안건은 ‘식기세척기 설치의 권고 내지 의무화’였습니다. 그렇죠. 김씨는 이제 쪼그려 앉아 설거지만 하는 신세, 승진도 못 하고 늘 따까리 취급받는 신세에 넌덜머리가 난 겁니다.
“이 중에 설거지 전문적으로 맡으신 고무장갑 여러분 손 좀 들어보세요. 저두 설거지만 했거든요. 솔직히 우리가 하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냥 닦으면 되고 씻으면 되죠. 그게 문젭니다! 맨날 똑같은 일만 하고, 쪼그려 앉아서 물 묻혀야 되고, 누구나 다 시키면 할 수 있는 단순 업무만 하니까 여러분 짬밥이 안 오르는 거라고요!”
김씨의 불꽃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일단 불이 붙자 그 많은(예상외로 많은 분식집 아줌마들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입들 했다죠) 조합원들을 선동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조합원 참모 박씨가
“하지만 법안으로 상정하는 건 무리가...”
하고 무리수를 내비쳤을 때에도, 김씨는
“법률이 안 되면 명령으로, 명령이 안 되면 시행령으로! 못할 건 뭐고 전경련은 뭐 국 끓여 먹자고 있는 거래요?”
톡 쏘아붙이는 겁니다. ‘전분조’에 세 번째로 가입한 박씨가 그리 면박을 당했는데 누가 뭐라고 감히 이의를 달겠습니까.
그리고, 드디어 왕언니 이하 실로암분식 아줌마 일동이 식겁을 하게 되는 대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전분조가 「분식업에 관한 권고 및 명령 청원서」를 서울시청에 제출한 겁니다. 어떻게 됐게요? 통과! 어떤 공무원들이었는지 김씨의 우격다짐에 이렇다 대꾸할 깜냥이 없었던가 봅니다. 한 두어 달쯤 지나니 서울 내의 분식업자들은 식기세척기나 그에 준하는 식기세척 장비를 설치해야 한다는 보도가 짤막하게 나갔습니다. 인터뷰는 김씨 대신 박씨가 국어 교과서 읽듯이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씨는, 그 보도가 나간 뒤 며칠 후 방글방글 웃으면서 출근했습니다.
“여러분 안녕?”
언제나처럼 조씨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고 했는데, 천씨 아줌마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고 조씨 아줌마는 다시 뻣뻣이 섰습니다. 모두가 김씨를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김씨는 평소처럼 늘 풀어놓던 자리에 가방을 풀어놓고, 늘 걸려있던 자기 앞치마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 먼지를 털고, 들어와서 그걸 두르고 늘 그랬듯이 한곳에 고이 접어져 있던 고무장갑을 끼고 부엌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머,” 하면서 한구석에 있는 중고 식기세척기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식기세척기네요.”
“예.”
왕언니 아줌마가 매우 딱딱한 말투로 대답해 주며,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모두가 조용히 아줌마 지나가는 길을 비켰습니다.
“저두 이젠 쪼그려 앉아서 일할 필요가 없군요. 기뻐요.”
“기쁘세요?”
왕언니가 한 번 웃어주더니,
“정확히 말해 드릴까요?”
김씨는 여전히 웃음을 얼굴에 남겨놓고
“?”
왕언니 아줌마는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통고했습니다.
“김씨 아줌마, 아줌만 이제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어요.”
“?”
“식기세척기가 닦아줄 건데 김씨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접때 못 받은 돈은 그 앞치마 주머니에 있으니 갖고 나가요. 김씨 같은 고집불통은 실로암분식에서 일 못 해요.”
김씨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자기 앞치마 주머니에서 삼천 원을 집어 들고, 딱 21초간 허공을 보며 어벙하게 있었습니다. 전분조는 다음날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그들의 청원은 행정 판결에서 취소 처분되었지요. 이렇게 해서, 천호동 실로암분식에서 설거지하는, 아니 설거지를 했던 김씨 아줌마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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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엽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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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8 15:5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재미있는 수필 한 편을 읽은듯한 느낌입니다...그러나 가슴 한쪽엔 열심히 사시는 분들의 뒷이야기에 찡하는 것도 있습니다...잘지내셔야 할텐데요..지금은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군요?...좋은 날 되시길 바랍니다
    • 2009.04.18 18:4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수필은 아니고 연습삼아 쓴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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